그로테스크의 몸 몸문화연구총서 1
몸문화연구소 엮음 / 쿠북(건국대학교출판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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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토시 하나하나 따져가며 공부할 무렵이었다. 아버지께서 몇 페이지 넘기다가 루벤스의 작품 <메두사의 머리(c.1618)>를 보시더니, “이런 그림을 보면 밤에 잠 못 자겠다.”고 농담하셨다. 나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학문의 눈을 빌려 ‘이런 그림’들 수 십 편을 봐온 내가 그 충격 때문에 밤잠 설친 적은 없었다. 또한 수전 손택의 말마따나, 작품을 통해 충격적인 추(醜)를 목격하는 것과 실제 그것을 목격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극사실주의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이 ‘작품’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순간(다른 말로는 ‘복제’되는 순간), 베냐민 식으로 말하자면 “실제 추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다. 작품은 항상 특정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실제 추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쉽게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괴물을 보느냐, 아니면 괴물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있느냐의 차이라는 뜻이다. 후자의 경험을 우리는 바로 ‘공포’라 부른다.


  나는 최근 대학교 강의 중 <변강쇠가>를 맡아 발표해야 하기에 나름 예습을 하겠다는 심산으로 몇 권의 책과 여러 논문을 찾아 얼마 전 읽은 적이 있다. 그 중 한 권이 몸문화연구소에서 펴낸 <그로테스크의 몸>이다. 제목을 잘 붙였다는 생각이 독서가 끝나고 나자마자 가장 먼저 들었다. 제목 ‘Grotesque body’는 우리의 몸(자아, 주체, 생리 등을 모두 포괄한 ‘철학적인 몸’)과 관련된 기괴함을 다룬다는 뜻이다. 만약 이것을 ‘Body of grotesque(몸의 그로테스크)’로 바꿨다면 독자들은 시각적인 그로테스크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 책의 여러 논의들과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점이긴 하나, 책을 덮고 난 후 착잡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위해서는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봄도 좋다. 그로테스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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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한 말인데, 우리가 ‘기괴(奇怪 : 외관이나 분위기가 괴상하고 기이하다.)’, ‘괴기(怪奇 : 괴상하고 기이하다.)’, 혹은 ‘괴상(怪狀 :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하다.)’이라고 번역하는 그로테스크와 관련된 이론은 대부분이 서양에서 온 것이다. 그 중 바흐친, 카이저, P. 톰슨 등의 종합적인 이론이 유명하나, 이들 외의 논의들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소개된 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하다.”라는 말을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한다. 교양인들에게 이 용어는 각종 현대예술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상식 중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테스크가 수많은 작품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로테스크의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지와 같은 성찰은 감히 시도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용빈도에 비해 그 속뜻이 매우 오묘하고, 때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까닭이다. 멀찌감치 서서 그것을 바라보면 이해될 것 같지만 그것이 가까이 오면 뒷걸음치게 된다.


  <그로테스크의 몸>에는 제목 그대로 ‘그로테스크’, 그리고 ‘신체’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실려 있다. 발췌독을 하기에도 좋고, 각 논의들의 분량도 알맞기 때문에 한 주제를 가지고 하루 종일 생각하곤 하는 나 같은 ‘아날로그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사려 깊은 책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막상 논의에 발을 담그면 하루가 너무 짧다는 기분이 들게 된다. 각 논의의 저자들이 여러 날들을 공부해서 쓴 글을 한 번 읽고 대충 넘어가는 것은 도둑의 심보이기도 하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면면이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에 단순히 매료된 수준의 독자가 아니라면 저들의 철학적 고민과 통찰을 따라가기에 벅차다고는 할 수 없다. ‘그로테스크’를 파헤쳐보겠다며 충격적인 현대미술 작품 하나 안 본 이 없을 것이고,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은 이 없을 것이기에.


  <변강쇠가>의 발표준비를 명분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지만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독한 뒤에 나는 <추의 역사>를 샅샅이 공부한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예술과 철학의 세계로 살짝 발을 들여놓았다. 나와 비슷한 고민과 성찰의 주제를 갖고 있을 ‘동포’, 혹은 ‘인민’을 위해 서평을 더 곱게 써보자면 이 책은 단 하나의 코드만 알고 있어도 그것과 연결된 수많은 노드들을 통해 전문(全文)을 호기심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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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 관심은 모두 다를 것이다. 여러 주제가 있다. 그러나 책의 구조상 첫 번째 논의인 <철학적 스캔들로서의 괴물(김종갑氏)>은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시동을 걸지 않은 차가 스스로 엔진을 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대뜸 데리다를 이야기 한다. 괴물에게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는 정상으로부터의 단절일 수 있으며, 그것은 ‘괴물성’으로서 선포되거나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우니 내가 잘 아는 미술사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르네상스는 겉으로 드러난 숭고미의 방벽이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치열하고, 한편으로는 비열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궁중 문화가 막강한 재력을 만나고, 로만가톨릭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면서 미술 역시 그것에 호응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대(古代)에의 향수가 이탈리아 발(發) 르네상스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라는 단어(사실 이탈리아어로 ‘부활’이라는 뜻의 ‘리나시타’가 어원이다.)는 이상할 정도로 정상적이다. 이를 ‘기준점’이라는 의미로 ‘데코룸’이라 불러보자. 르네상스를 전후해서 고딕과 마니에리스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의 저의(底意)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크도 그렇고, 인상주의, 야수파 등도 그러하다. 한 시대를 정의내림에 있어 용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면 르네상스는 그야말로 “언제든지 회고하기에 영광스러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후 실제로 신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은 르네상스를 ‘고증’했다. 이 고증은 미술사에서 아주 오래토록 정상 패턴의 곡선을 그려 가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술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단절’에 해당한다. 대학생들은 교양 미술사 시간 때, 그리고 일반인들은 대중적인 미술서적으로 그 단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은 국내에도 여럿 소개된 바 있다.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재미있어 할까? 데리다의 말이 생소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 ‘단절’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 아카데미즘의 추락과 함께 등장한 후기인상주의, 그리고 그로부터 거인이 된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 말레비치, 칸딘스키, 마르크 등. 그들은 ‘괴물’이었다. 괴물이 미래를 선포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괴물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니! 그러나 이미 진리라는 것이 누구의 손에서 제시되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모더니즘에 그토록 매료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괴물’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어로 표기하면 이렇다. [either A or B]가 보통의 우리이다. 여기서는 자기동일성이 확인된다. 우리는 A이거나 B이기 때문에 만약 A라면 동류인 A를 자기동일성의 증거로 삼고, B는 배타성의 사례가 된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both A and B]. 사람들은 너그럽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주체성이 단일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평등, 민주 등과 함께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상대성. 그러나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인 사람(Androgyny). 사람이면서 코끼리 얼굴을 한 사람(Joseph Merrick). 여성이면서 비정상적으로 엉덩이가 큰 여인(Sarah Bartmann). 분명치 않으나, 우리에게는 ‘기준’, ‘일반’, ‘보통’이라든지, 아니 그보다는 ‘정상’이라는 개념의 테두리가 있다. 그것은 뿌연 안개와 같으나, 어떤 때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도 하다. 저들을 ‘나’의 인식 범위 안으로 ‘입성(入城)’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아니면 19세기 유럽인들처럼 철창 안에 갇힌 저들을 마치 원숭인 양 구경하기 위해 돈을 내고 낄낄거리거나,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면할까? 과연 주체의 다양성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도덕적 인식으로 자신을 무장시키고자 하는, 평범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주체는 다양하다면서 [both A and B]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련된 철학적 도전도 이윽고 벽에 부딪히게 된다. 흄(D. Hume)처럼.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성전환자가 살아가기 힘든 나라 중의 하나이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싶어 하거나, 혹은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싶어 한다. [both A and B]의 특성을 A와 B 중 하나로 결정하고 싶은데, 불행이도 그것이 이미 결정된 성으로 인해 막대한 장애를 받은 이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철학적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은 차치하고, “괴물이다.”라고 정의해버린다. 이는 이방인을 괴물로 그리거나, 혹은 이단을 악마로 형상화하는 저 서쪽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하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르네상스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상은 허구이다. 나는 옛 미술 블로그를 꾸릴 때, 하우저의 글을 읽고 “르네상스는 허구이다.”라는 제목의 포스트 하나를 올린 적이 있다. 그것은 ‘정상’이라는 것이 (나는 그것을 ‘데코룸’이라고 썼는데)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히고, 또한 무슨 이유로 해체되는지를 다룬 글이었다. 분량 상 전문을 옮길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모더니즘에 주목하는 까닭과 닿아 있으니, 인용 없이도 충분히 이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논의는 진전되었다. 정상이 허구라면 괴물을 보고 놀라는 우리의 본성은 ‘괴물’을 지정하는 우리의 제도, 주의, 사상 등과 분리될 수 있다. 쉽게 말해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달 초, 나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서평을 이 공간에 올렸다. 그의 논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인종주의가 인간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제도로써 형성된 것이라는 간파이다. A가 생각하기에 B는 타자이다. 자신과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B에게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낄까?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문화적 학습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괴물은 어떠한가? 괴물은 기본적으로 추하고 무서우며, 위협을 주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공포는 적대감과 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우리가 ‘괴물’이라는 부르는 이들에게 과연 그 명칭이 합당한 것인가? 혹은 너무 단순한 ‘명명하기’로 괴물이 양산되는 것은 아닌가? 다시 기준으로 돌아와 이곳, 즉 정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런 철학적 질의를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규정한 ‘괴물’이라는 각종 대상들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배척에서 중립으로, 더 나아가 중립에서 환영으로. 이 환영에서 우리는 이른바 “괴물 견뎌내기”의 과정에 돌입한다. 윤리가 태어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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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논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로테스크에 대한 적대감을 논리적으로 해제시키는 과정이 녹록할 리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어지는 논의 ‘아브젝시옹(abjection)’에서 그로테스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뚜렷한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현대예술가들 중에서 유명한 여성들만 100명을 선별해 나름의 정리를 한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는 그들 중 대다수의 여성들이 선정, 비정상, 과격(그런데 대관절 이들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등 테마를 활용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현대예술은 항상 붕괴로부터 창조된다. 그러나 그 ‘박식’하다는 현대인들은 그녀들의 말에 귀를 쉽사리 기울이지 못한다. 일단 그로테스크하기에 적대감을 갖거나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무엇을 부수고자 하는지 알게 되면 그 그로테스크가 강력한 시대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명백하게 깨달을 것이다.


  이후 논의들은 위의 두 논의보다 좁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죽음, 판소리, 전쟁, 우리의 몸, 입양인, 기억, 미래기술의 그로테스크(사이보그) 등이다. 내가 앞서 <철학적 스캔들로서의 그로테스크>를 반드시 읽고 다음 논의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한 말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로테스크로 ‘정의됨’을 이해해야 그것의 ‘해체적 활용(아브젝시옹)’과 기타 쟁점들의 깊은 성찰을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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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그로테스크를 철학의 특성으로 생각해봤을 때, 다시 말해 괴물이 우리를 혼란스럽거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철학자들이 그런다는 뜻인데, 이 경우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것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매번 피할 수는 없다.”는 진리 하나를 얻게 된다. 그것이 윤리와 직결된다면 그 진리의 의무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맞는데, 그 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괴물과 같은 그 말은 피하면 안 된다. 이 상황은 어느 시대든 적용된다. 더불어 이 사회의 우리에게도 소중한 진리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만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외치는 삶은 얼마나 간드러진 맛이 있는가. 한 곡의 노래와도 같고, 한 편의 시와도 같고, 아니면 멋진 산수화나 서양화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와 멋을 조금이라고 아는 이라면 그것에 자신의 이성과 감각을 모두 맡기고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것 중에 진리가 없다고 하진 않겠다. 그것으로 향하는 것이 최종의 지혜인 것도 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면되는 것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아름다움에의 맹종’이라면 지양해야 하는 것이 저 더러운 똥과 소크라테스의 어려운 철학과 여성 현대예술가들의 기괴한 몸동작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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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4-1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학교 잘 다니고 있죠? 이 글은 많이 늦게 와서 보지만 역시 흥미로워요. 저도저도 '그로테스크'한 그림들 좋아해요. 처음 그림을 보게 된 것도 메두사 같은 거였던 것 같고..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서평도 뜸한데..^^

탕기 2012-04-30 23:38   좋아요 0 | URL
그간 시험이다, 레포트다, 발표다, 해서 나름의 핑계를 대자면 바빴습니다.^^; 운이 나쁘게도 중간시험 전에 과제들이 몰려 있게 됐어요. 한 고비 넘기긴 했습니다만 학기말까지 또 어떤 과제들이 주어질지 살짝 겁부터 나네요. 틈틈 읽었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올리려고 들어왔는데, 아이리님의 댓글을 이제사 확인했습니다. 이 공간을 너무 오래 방치해둔 감이 있네요.

맘을 놔야 읽고픈 책을 펼칠 수 있는 성격이라, 참 고쳐야 하긴 하는데, 그런 면에서 바쁜 직장생활 중에 다독하는 분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리뷰 올려놓고서야 "이제부터는 정신 없어도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뭔가 벼려봅니다. 여하튼 오랜 만에 아이리님 만나니까 마음 편해지고 좋네요.^^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 한겨레지식문고 9
알리 라탄시 지음, 구정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3.03

 

  얼마 전이었다.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를 읽는 중 ‘genocide’라는 영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뜻이 가물가물하기에 인터넷 검색을 했다. 집단학살. 예컨대 홀로코스트를 뜻하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쉰들러리스트>가 떠올랐다. 속초에서 군복무를 하던 때, 나는 공용업무 차 간부들과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내에 나갔다. 그 때마다 군용 지프는 일본 731부대(ななさんいちぶたい)의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오랜 건물 하나를 지나갔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역사는 대개 추상적이기 마련이나, 핏빛의 역사는 몸을 떨게 만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핏빛의 역사’를 굳이 과거로부터 배울 필요는 없다. ‘genocide’를 검색한 뒤, 더 찾아보거나 읽을 만한 자료가 있을까 싶어 드래그를 하던 차에 나는 이 단어를 길드(guild : 온라인게임의 유저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만든 온/오프라인모임) 이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별로 놀라진 않았다. 온라인게임들의 대부분이 전투를 모티프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제노사이드”라고 발음하는 것도 그럭저럭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genocide’의 일면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집단학살”이라 번역되는, 소름끼치는 저 단어를 길드의 이름으로 사용하고자 했을까. 이는 사소한 문제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무감각이나 무지의 문제이다.


  알리의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는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프란츠 파농을 읽기 위해서였다. 프란츠를 알게 된 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현우氏의 알라딘 서재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우연히 견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니, 이유를 더 따져보라면 종교분쟁관련 대학교 강의에서 교수의 참고로 된 한나 아렌트와 홀로코스트를 들 수 있겠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나 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고, 첨예한 갈등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이 분출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던 차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여 알리와 프란츠의 글을 읽고 싶어진 것이리라. 혹은 사춘기 때, 먼 타지 호주에서 백호주의(백인호주우월주의)를 직접 겪어봤기에 “왜 내가 차별을 겪어야 했을까?”를 알아내고자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달, 미국 댈러스에서는 한 주유소 업주인 박氏의 발언(다른 주유소보다 휘발유 값이 비싸다 항의한 흑인 목사제프리 무하마드氏에게 “아프리카로 가라.”라고 한 발언)이 화두가 되어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시위대는 아시아계 이주민들의 추방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유대계 여성과 결혼했으면서도 현대 반유대주의의 선교사가 됐던 빌헬름 마르”에 대한 이야기로 알리는 논의를 시작한다. 그가 책의 후반부 논의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인종주의의 정체성’은 사실 이 부분에서 미리 결론된다. 한나 아렌트가 경악을 금치 못한 한 유명한 나치전범재판도 빌헬름 마르와 같은 경우이다.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가 밖에서는 유대인들을 ‘청소’하고 다닌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종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수많은 제약이 있음을 이 도입부에서부터 알게 된다.


  이어 알리는 여러 역사적 근거들을 추적해본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 동양과 이슬람을 잠깐 거친 뒤, 중세 기독교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대인 차별에서도 그는 인종주의의 생물학적인 차별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흑인을 보면서, 혹은 유대인을 보면서, 아니면 중국인을 보면서 갖게 되는 전형화(편견)은 당시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에 보면 귀족들이 평민을 어떤 방식으로 희화화했는지가 적혀 있다. 도판으로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 동족 내부에 대한 시선도 이러한데, 그들이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던 무슬림들에게 ‘생물학적인 차별’이 과연 없었을까? 내가 문헌을 찾을 만큼의 고도로 정련된 학자가 아닌 만큼 의구심은 잠시 접어둬야 할 듯했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알리의 논점을 쫓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시대는 흘러 소위 ‘이성의 시대’라 불린 18세기에 분류학이 득세하며 인간을 범주화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Americanus, Europaeus, Asiaticus, Afer 등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4기질설에 대입된다. 별로 산뜻하진 않다. 하지만 이 시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칸트와 흄이 가졌던 흑인열등주의이다. 물론 그들은 흑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단, “검다.”는 것이 곧 추(醜)와 연결되는 사상이 철학의 옹호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신고전주의 미술이론의 창시자이자, 아카데미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빙켈만의 미의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서구는 세상을 그렇게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영국이 아프리카의 노예시장을 개척한 뒤, 과학적 인종주의가 흑인과 백인을 명백히 구별하면서 이윽고 그 유명한 사라 바트만(Saartje Bartmann) 사건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민’이라는 모델을 위한 보편주의가 퍼졌을 때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세기, 유럽 열강들은 국가형성프로젝트를 위해 엄청난 자본과 사상을 쏟아 부었다. 유럽뿐만이 아니었다. 1790년 미 의회는 백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권을 포고하기에 이른다. 유럽보다는 미국의 경우가 매우 흥미롭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웨일즈, 독일, 아일랜드, 유대계,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나라에서는 자국 국민의 ‘백인됨(whiteness)’이 곧 인종적 규범이 됐다. 그리고 이들을 Caucasian이라고 묶었다. 잡혼이 금지됐고, KKK는 1890년부터 약 10년간 무려 1,100여 건의 린치사건을 일으켰다. Jim Crow 체제가 공고히 되기도 했다. 흑인들은 곧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흑인이 아닌 유색인종 중 ‘백인됨’에 포함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곳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식민지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인도 벵골과 자메이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고착화시키며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잔인함의 진수를 보여줬다.


  곧 우생학이 등장했다. 본래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반유대주의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된 경제가 이것과 맞물리면서 홀로코스트의 서막을 열었다. 민족국가가 부상한 뒤, 우생학은 아주 쉽게 정치와 결합했다. 과학은 중립적이다. 도덕의 비호를 받지 못한 이 강력한 이론은 활활 타오르던 나치스의 반유대주의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코스모폴리탄으로 두각을 나타낸 유대인들을 독일인들은 아니꼽게 봤다. 표적이 되기 쉬웠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나치스의 홀로코스트가 그들 정치의 주요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려 600만 명이 죽었다.


  이것을 비이성의 소산이라고 진단했던 이들은 당시 전범재판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치스 패망 후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을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잡았고, 곧 전범재판이 이뤄졌는데, 한나 아렌트가 술회하듯 그는 자신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발을 뺐다. 여기서 “악의 평범함(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등장한다. 최근 내가 극우주의의 득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잠시 알리의 글을 인용한다. 무지와 태만의 소산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드러나 있다.
  “심리적인 후퇴와 통상적인 무관심이 겹쳐, 독일 시민 대다수는 유대인 등의 운명에 대해 더 알아볼 생각도 않고,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과학적 인종주의가 우생학 이후에도 진행됐지만 사람들은 상관관계와 인관관계를 혼동하는 무지를 범하며 인종주의를 더욱 합리화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흑인의 대부분은 무식하다. 문명화된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싸움만 일삼는 ‘족속’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의 낙후된 국가에 가면 그것이 현격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사회적 조건은 어떠한가? 혹은 개개인의 특질이 무시되는 것은 아닌가? A라는 사람 하나의 특질이 그가 속한 집단 전체로 비화되는 것은 대단한 비논리이지만 합리를 지향한다는 저 지성의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먹혀든다.


  오늘날 홀로코스트는 없고, 아마 제도적 제약 덕분에 발생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큰 위안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의 개념 하에 핍박받는 집단들이 있고, 그 수는 매우 많다. 때론 불특정 다수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도 일어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 애매모호해진 인종의 개념이 마치 19세기 후반에 득세한 그 개념처럼 강력하다는 것이다. 소위 ‘혼혈(mixed)’이 많은 시대이고, 개인의 정체성을 국가나 종교보다는 특정 문화, 혹은 사회적 위치 등에 두는 경향이 강한 오늘날 우리를 인종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은 어려운데도 말이다.


  한창 페이스북을 할 때, 나는 영어회화실력을 높여 보겠다는 심산으로 여러 외국인들과 채팅을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중동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 이집트, 그리고 쿠웨이트가 있었다.) 그 중 영국 카디프에서 유학 중이라는 한 이집트 여대생과 이슬람을 주제로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그녀는 자신은 유학생임에도 영국인이며, 동시에 이슬람교도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었다. 국가와 종교는 상당히 밀접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답을 피하고 대신 테러에 관한 생각을 말해줬다.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테러리스트는 아니며, 그들 대부분이 테러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 이름은 칸>이라는 화제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칸은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는 긴 여정을 하게 된다. ‘종교, 폭력, 평화’라는 제목의 대학 강의를 듣고, 한편으로는 이슬람과 관련된 13부작 다큐멘터리를 다 본 후,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개인의 정체성. 알리는 말한다.
  “개인의 정체성과 행동 사이에 언제라도 모순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의 정체성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또한 달리 선호되는데, 과연 인종이 ‘전형화’될 수 있을까? 사실 되기 때문에, 아니 만연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전형화가 전면에 부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알리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겉으로 보이게 행동할 때에는 예의를 갖추게 마련이다. 적대감과 차별은 눈에 덜 띄는 물밑에서 일어난다.” 최근 ‘인종주의적 사건’은 대개 옛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소위 “대놓고” 행해지진 않는다. 그 은밀한 공격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흑인 불평등을 해소해왔다고 하지만 불평등은 누적되고, ‘악순환’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해서 한 때 미국 시민성의 위대함이 부각되는 듯했지만 그것은 전면에 드러난 가짜일 뿐이었다. 여전히 흑인들은 턱없이 부족한 고용기회 탓에 일자리를 얻기 힘들고, 그들이 고용됐던 제조업이 신흥 산업들에 밀려 패망하면서 쫓겨나고, 또한 열악한 주거지 및 교육 환경으로 인해 불우한 유년을 보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있다.


  다행이도 교육에 있어서는 1960년대 활발했던 민권운동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개선이 있었다. 그 시절, 미국 연방정부들의 흑인 우대정책은 얼마간 실효를 거뒀고, 지금 흑인들은 사회 각층의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 중 흑인들에 대한 시선에는 가시지 않는 경멸이 담겨져 있다. 심지어 백인 빈곤층들조차 흑인들이 빈곤해진 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인종주의의 각축전은 생활수준이 하위에 속하는, 소위 “잘 못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에서 자주 발생하며, 이는 영국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민할 당시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수 있는 교육조건을 만족시켰던 인도계, 아프리카 인도계, 혹은 중국계 이민자들은 그렇지 못한 이민자들보다 훨씬 높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개 그렇지 못하고, 특히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민자들의 60% 정도는 일자리가 없다. 경제적 제약이 크면 사회에서 받는 불평등의 감도가 훨씬 강하게 느껴지기 마련이고, 그런 분위기의 주거지에서는 백인 사회와 이민자 사회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들은 소위 ‘기 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흑인 아이들과 유사한 폭력성을 지니기도 한다.


  제도 상 인종차별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냉전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제 3세계 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등 민권운동의 영향을 받아 인류는 서로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법을 알게 되었고, 좋은 실천사항들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공익광고나 공교육개선, 봉사활동 등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제도적 안정 뒤에는 열대야처럼 기승을 부리는 인종주의의 폐단이 남아있다. 우리나라도 이슬람 혐오증이 꽤 강한 나라 중 하나이다. 직접적인 테러의 위협을 받은 횟수가 타국들에 비해 현저히 적으면서도 우리는 미국과 밀접한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그들의 칼날을 느낀다.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슬람 혐오증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무슬림들은 다 테러리스트이다.”라는 편견을 갖는다. 편견이라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화의 이미지가 그 편견을 조장한다. 집단을 ‘전형화’시키기 때문이다. 문화에도 마치 공식이 있는 듯 말이다.


  집단 간의 반목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인종의 개념은 18세기에 등장했다고 알리는 역설한다. 과연 그 집단과 인종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과학과 심리학이 오용됐던 실수의 역사가 있다면, 아니면 일조한 잘못된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필연적 연관관계’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알아본 것처럼 ‘인종’처럼 애매모호한 개념은 없다. 탈(脫)인종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단어에 집착해선 안 된다. 해결책 역시 모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알리는 낙관하자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제도적인 노력들이 현재까지 거둔 성과 때문이다. 그러나 극우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알리와 같은 낙관은 금물이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패를 운운하고 있고, 그것을 극복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이론적, 혹은 실천적 행동들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최악의 경제상황은 극우세력의 성장을 돕고 있다. 그들은 자국에서 이민자들을 몰아내 ‘순수성’을 회복하면 자국민들의 경제적 형편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주목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그 외의 경우에 있어서도 낙관보다는 비관이 앞서는 이유가 여럿 있다. 국가 간 전쟁이 첨예한 곳에서는 인종차별이 ‘인종공포’의 수준으로 비약되어 있다. 알리도 말한다.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많다. 생물학적 결정론,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문화적, 생물학적 순수성을 현실로 만들고픈 욕망, 서로 다른 문화와 민족들 간에는 변치 않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신화는 언제나 모습을 바꿔가며 새로운 강령과 관행인 양 다시 포장돼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의 말마따나 현대사회는 초국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것이 덜한 편인데, 다민족 국가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가 아닌 “장소, 문화, 성별 등 여러 정체성”에 두고, 그것에 굳건한 충성을 바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전통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주류가 탄생한다. 사실 그것이 더 오래된 문화적 전략이기도 하다. 일부 강경한 이슬람 사회는 서구에서 들어온 세속사회에 반대한다. 신도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 서구에서 들여온 TV프로그램 방영을 금지하거나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같은 유명 수입품 판매를 조기에 차단하기도 한다. 전통과 서구 문화가 공존(사실 주류는 후자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우리’라는 뿌리 깊은 개념이 민족을 휘어잡는다.)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알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을 인종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인종의 개념을 끌어다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 그 자체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센서스 조사원인 A가 B의 집에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탈인종주의를 위해 너의 인종을 조사해야 돼. 너는 인도계이니, 아니면 아프리카계 인도계이니?”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혼혈(mixed)’이라는 말에도 탈인종주의를 지향하는데 방해가 되는 어폐가 들어 있다.


  저자가 누차 강조한 바인데, 인종주의는 매우 부실한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인간은 마치 많든 적든 인종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설명되며, 인종은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은 합리적인 과학의 비호를 받는 것처럼 광고된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시작된 인종주의가 20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쇠퇴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닌 ‘편견’일 뿐이며, 다양한 이해관계와 무지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연명하고 있는 고대의 악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리 라탄시는 말한다.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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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3-03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종주의는 매우 부실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평소 제가 생각한 것과 같아요. 오히려 저는 저랑 다른 인종이(그런 게 있다면 말이죠;) 더 신기하고 알고 싶고 그렇다는 점에서 나름의 인종 이데올로기를 실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탕기님, 그동안 뭐했어요? 오랜만이에요.
프란츠 파농이 뭔지 몰라서 검색해봤어요. ^_______^

탕기 2012-03-03 16:5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님. 독서도 지지부진하고, 개강 준비 전에 축 늘어졌죠.
어제 개강했어요. 머리도 생기를 찾았는지 남은 분량 다 읽고 오늘 독후감 썼습니다.
프란츠 파농 읽을 준비해야겠어요. 내달에 살 생각입니다. ^^
 
위도 10도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엘리자 그리즈월드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012.02.03

 

 

  우리나라는 잘 사는 편이다. (이 말은 리뷰에서 다루게 될 다섯 나라와 비교했을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계 10위권 안에 진입하기 위한 대(對)21세기적 목표도 가지고 있다. 국가선전을 목적으로 만든 공익광고를 가끔 TV에서 보면 자랑스럽기도 하다. ‘88만원 세대’도 후한 점수라며 나와 같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취업난 속에 허덕이지만 그래도 물질적 풍요를 얻어먹은 격이니,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 하리라. 나의 아버지는 학비를 벌기 위해 주경야독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학창시절 만나 자장면 한 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신다. 하지만 나는 매달 지혜를 탐닉하겠다는 요량으로 거의 8~10만원 정도하는 책값을 이곳에 쏟아 붓고 있다. (사놓고 소위 ‘뻥튀기’된 광고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하지만) 나는 가난을 모른다. 그리하여 분쟁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있는 세상의 실없는 넋두리”로 들릴 때가 있다. 그만큼 세상을 모른다.


  그리하여 먼 곳의 경치를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저곳에 가보고 싶다.”, 혹은 “저곳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다.”라는 생각. 금강산에서 그랬다. 나는 금강산 육로관광의 1세대이다. ‘세대’라 하니 거창한데, 기념비적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맞다. 검문 차 버스에 올라 탄 북한 장교의 날카로운 눈매, 소가 건초수레를 끌고 가는 시골의 풍경, 이루 말할 수 없는 절경의 금강산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북한은 ‘심리적 원거리’이다. 나의 망원경은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분단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실상을 울타리 너머에서라도 봐왔는데,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질감이 생겼다. ‘이곳’에서 어떤 간부가 어떤 여성을 겁탈하든, 압록강을 건너던 탈북자 가족이 한꺼번에 잡혀 몰살당하든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큰’ 상관. 이것이 뭔지도 사실 잘 모른다.


  볕 좋은 여기에서는 음지가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는 <위도 10도>를 읽는 나를 거칠게 음지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힘겹게 읽었다. 먼 곳의 풍경이 코앞까지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때 느껴지는 현기증과 공포도 있었다. 신앙이 돈독한, 특히 기독교 신자와 무슬림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 책의 내용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긴 리뷰이지만 하고픈 말은 곱절이나 많다.

 

 

*   *   *

 

 

  나는 궁금했다. 사람이 유일신을 믿게 되는 경위. 그래서 읽은 책이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였다. 최근 이와 비슷한 주제로 출판되는 여러 책들도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굳이 비싸게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에게 “참된 신앙”이라는 세계는 공감할 수 없는 곳이다. 열고 싶지 않은 문은 고리도 잡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적 편식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신앙인이 보면 ‘불신’이고, 근본주의자가 보면 ‘이단’이며, 내가 스스로 봤을 때는 ‘유연함’이다.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고, 대체로 의식주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교육수준도 중간 이상인 우리나라는 일본, 싱가포르 등과 함께 전형적인 ‘서구적 아시아 국가’로 분류된다. 조금 거친 분류이므로 세세한 것들은 차치했으니, 이런 분류가 무지의 소산이 아님을 밝혀야겠다. 여하튼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를 만든다.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이른바 종교최소주의의 사회이다. 독실하기로는 유별난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들(이들이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자들을 파견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약 12,000여명으로 추산된다.)은 예외이겠지만.


  반면, <위도 10도>에 나온 국가들, 예컨대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경제적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고속성장을 기반으로 아시아에서는 비교적 부국에 속한다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속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 책을 통독해보면 이들의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더 추려낼 수 있다. 식민통치를 겪었고, 그 이후의 민주화과정이 실패하거나 독재정권이 국가를 장악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고, 때론 그것이 서구와 이슬람의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렵은 서구의 식민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때의 선교사들은 국가와 자신의 종교가 공익(共益)을 추구한다고 여겨 열성적인 포교를 했다. 종교가 정부와 연루되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국가 마케팅’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 중 대부분이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종교도 세력이다. 그들은 팽창하기를 원한다. 가톨릭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신부가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한다. 개신교도들은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아파트 단지와 대도시 중심가를 돌아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슬림들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돈, 혹은 반(反)기독교주의를 이용해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부교(富敎)’라고도 불린다. 인도의 힌두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아닌 ‘권력’이 된 종교는 말씀을 빙자한 권리를 주장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전 세계의 자기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없다. 십자군전쟁과 지하드는 같은 투쟁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런 역사는 “흉악한 원혼들이 서로 역사의 잘잘못을 따지며 옥신각신한” 역사와 다르지 않다.


  종교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말씀’에 있지 않다. 세부적 내용은 물론 다르겠으나, 공자와 싯다르타,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은 차이가 거의 없다. 신을 근거로 들더라도 인, 의, 예, 지, 애 등 우리가 흔히 들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순수한 도덕에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종교의 ‘말씀’이 그들이 강한 이유라면 종교 사이의 충돌과 편차는 있을 수 없다. 종교가 강해진 이유는 그것이 “국가를 휘어잡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무역’도 있겠다. 개종이든, 배교이든 권력의 확보를 위해 종교의 권위를 순간적으로 상승시켜 이단자들을 사형시키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A라는 나라는 기독교를 전통적으로 믿고, B국가는 이슬람공화국이다. A에서 독재자가 출현해 군부와 언론을 장악해 그 나름의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분명히 나온다. 독재자는 B국가와의 전쟁을 빌미로 강력한 탄압을 실시할 수 있다. 이때, 독재자가 처단할 수 있는 대상은 A국가 내의 비(非)기독교 세력뿐만이 아니다. 죄는 만들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옷이 되었을 때, 그것은 권력의 훌륭한 방탄복이 된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이나 서구 등 강대 세력의 지원을 받던 독재가가 그들의 힘을 더 이상 등에 업지 못했을 경우에도 종교는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과 서구의 입장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해당 국가의 종교적 권위가 너무 강해 개입이 용이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먼저 독재자를 처단하거나 상황에 개입한다. 미국은 이런 방법으로 이슬람과의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 중에 있다. 그런 까닭에 아랍혁명에 미국이 개입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혁명에 참여한 국가들의 과도정부가 확고하지 않은 것이 좋다. 미국은 그들의 상처가 깊을수록 이슬람이 크게 분열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것이 뻔하다. 오히려 미국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지금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행이라고 하긴 뭐하나 유럽발 경제위기가 이란의 강경책 탓에 이미 올랐어야 정상일 배럴당 원유값을 고정시켜주고 있다. 곧 이라크에서 열릴 아랍연합회의에 미국이 어떤 외압을 불어넣을지가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관심사로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세 국가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는 특히 종교로 인한 전통지역사회의 분리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엘리자도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인도네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각종 종교의 권위를 인정해 겉으로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완성한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정부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하며 친미 계열로 기울었을 때,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무슬림들이 정부를 외면한 것이다. 결과는 뻔하다. 정부는 권좌유지를 위해 이슬람과 손을 잡았다. 이런 땅에서 기독교를 선교한다는 것은 ‘순교’를 피치 못하게 동반하도록 한다. 그런데 엘리자의 말처럼 종교는 이상한 특징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종교 활동의 수수께끼는 바로 ‘박해 아래서 더욱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pg.231)” 진실로 순수하게 신만을 섬기며 선교하다 순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순교가 전략적 카드로 사용되는 세태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밖에 없다.


  마르쿠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억압받고 짓밟힌 피식민자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기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박민영 著 <이즘> 참고)” 테러리즘의 철학적 근거이다. (인종주의에 대항한 프란츠 파농의 테러리즘이 여기에 기초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그 결과를 우리는 거의 매일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팽창지향적인 종교에서 순교자는 전략적 ‘선봉군’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교를 하다 순교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첨예하게 말들은 오가지만 실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있다고 해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충격적 사건이 되는 이곳에서 ‘저곳’의 선교와 순교가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아마 나도 그렇고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이에 대해서 그곳 사람들의 말을 들어봄도 좋을 듯하다.


  “주일에만 하느님을 믿을 만큼 정신 상태가 ‘느슨한’ 서양 기독교인과는 달리, 위도 10도에 분포된 신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인할 여유가 없었다.(pg.233)
  “형편이 넉넉한 삶 속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요?(pg.290)
  “저희는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종교에 크게 의지합니다.(pg.291)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종교가 아닌 전통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종교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사례도 엘리자는 비중 있게 소개한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다. 그들의 종교와 경제발전이 동반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의 국가목표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의 종교법인 ‘샤리아’를 세속의 영역으로 수용하면서, 한 인물이 했던 말처럼 “이란혁명을 죽이며” 말레이시아 특유의 약진을 이뤄오는 중이다. (이란혁명은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 하에 호메이니가 국가지도자로 등장한 1979년의 민주혁명을 의미한다. 이때 이란은 서구화를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말레이족과는 차별화된 전통을 지닌 소수민족들은 무슬림이 되면 돈을 준다는 여당의 공략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준다는 기독교에 힘을 실어주며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이를 단순한 여야의 구도로 보면 곤란하다.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야당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레이시아 안에 강제적으로 통합되면 부족문화가 사멸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고도로 연결된 시대에 단절로써 문화를 고수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생각이라 비판하는 이도 있겠으나, 그것은 문명적 사고일 뿐이다.


  “가난한 나라의 타락한 대통령”은 필리핀에게도 들어맞는 묘사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은 남부의 무슬림과 그들의 땅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개입으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 디터 젱하스도 그의 <문명 내의 충돌>에서 가난이 종교분쟁의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별로 중요치 않을 수 있는 소규모 원유매장량이 필리핀의 남부를 병들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이 무슬림들의 땅으로 이주를 강행하고 있고, 일부 가톨릭 폭력조직(Ilaga : ‘들쥐’라고 불린다.)은 학살을 일삼는다. 엘리자는 이런 상황을 원유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엘리자는 초지일관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그녀가 평가를 내리는 부분은 종교분쟁의 근본이 목격되는 곳뿐이다. 그곳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미국도, 해당 국가의 정부도 모두 비판을 받는다. 이런 태도 사이사이로 그녀는 종교인들(선교자나 신도)과 분쟁대상자들의 대화를 적나라하게 싣는다. 읽다보면 기가 찬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전후좌우가 종교적 신념으로 막혀 있는 대화이기 때문에 그것의 논리는 철저하게 순환논증 속에서 돌고 돈다. 반대의견은 튕겨져 나가거나 사멸되기를, 혹은 동화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런데 엘리자가 방문한 6개국, 그리고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종교분쟁의 최전선에서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부국의 종교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갖는다. 생존의 문제이며, 권력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엘리자의 ‘위도 10도’라는 명칭은 종교보다 더 큰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석유가 나고, 보다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식민주의의 상처가 씻기지 않은 곳에서 분쟁의 진물이 올라온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라는 어린 아이 같은 소감을 한숨과 함께 먼저 내뱉었다. (하지만 내려놓은 <위도 10도> 옆에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가 놓여 있었다.)

 

 

*   *   *

 

 

  밝힌 바 있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이며, 동시에 자유사상가이고, 종교보다는 과학과 합리, 그리고 도덕철학의 기반을 더욱 신뢰한다. 유일신은 입증되기 전까지 믿지 않고, 지적 태만과 맹종으로부터 발생되는 인류의 모든 문제 앞에 반성코자 한다. 따라서 종교 사이의 종교적 논쟁은 나에게 “어떤 분쟁을 야기하는가?”를 제외하면 큰 의미가 없다. <위도 10도>는 그런 나의 성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우연일까? 나는 방금 저녁때까지만 하더라도 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영화 <천사와 악마>를 봤다. 여러 번 본 것인데, 볼 때마다 사뭇 느끼는 바가 늘어난다. 영화의 말미에 한 추기경이 극중인물인 로버트 랭던에게 말한다.
  “종교는 흠이 많소. 인간이 흠이 많은 존재이니. 날 비롯해서 세상 모두가.”


  나에게 종교적 진리는 이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흠과 인간의 흠은 분쟁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있거나, ‘등잔 밑’에 있는 것이다. 생각의 여유가 없는 곳에서는 종교가 강해진다. 종교는 그곳에서 팽창한다. 이것이 21세기 과학과 지성들의 지적 도전장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종교가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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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3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1.30

 

 

  영화 <300>을 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가장 큰 내무반에 모여 조그마한 TV를 응시하던 장정들이 탄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뻔했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이모탈’들을 가르고, 베고,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는 야성의 향연에서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CG인지 실사인지 구별할 수 없는 오묘한, 혹은 ‘광택’이 나는 화면처리가 전사들의 육체미를 한껏 부각시켰다. 몇몇 장면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케 했다. 전쟁이 아니라 예술이었고, 학살이 아니라 화려한 기술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각 내무반으로 돌아가던 병사들 중에는 더러 “스파르타!”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남자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음이 아닌 영예와 승리만 선전하면 그들은 포비아(phobia)를 잊는다. 영화 <300>에 관한 부정적인 비평들은 대개 그들의 관심 밖에 있다.


  제대 후, 나는 미학을 공부했다. 물론 고난이도를 자랑하는 전문적인 원서를 읽진 않았다. 몇몇 개념만 알면 될 것 같다고 시작한 공부를 크게 벌여놓은 까닭에 나의 관심이 미술로 완전히 전환된 것도 있지만 우선 진중권氏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대담하게 내지르는 일침과 같았다. 내친 김에 그의 저서를 많이 주문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매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영화를 보진 않았다. 몇 편은 소위 ‘암흑의 통로’를 통해 보긴 했지만 <필로우 북>, <파렌하이트>와 같은 영화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책에 실린 영화들을 다 볼 필요는 없다. 진중권氏도 서문에 “이것은 담론의 놀이이다.”라고 거듭 밝히지 않았던가. 비평이라면 각 단편들이 이 정도로 짧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氏의 필력에 비춰 예상해보건대 그가 비평을 쓴다면 영화 하나로 책 한 권은 족히 냈을 것이니.

 

  미학과 시대적 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런저런 반찬들’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매진>은 ‘영화’라는 이름이 붙은 한 끼의 식사와 같다. 독자들은 각자 알맞게 소화해야 한다. 유독 “맛있더라.” 싶었던 것이 있으면 직접 구해서 느긋하게 보는 것도 역시 각자의 몫이다. 편식은 아니고, 나도 몇 가지 반찬의 맛이 특히 기억난다. (나는 진중권氏가 다룬 영화 34개 중 21개를 독서 전에 봤다. 제 2, 4, 5, 7장의 영화들은 <웨이킹 라이프>를 제외하고 모두 봤다. 하지만 제 1, 8장의 영화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편식이라고 해야 할까.)

 

 

*    *    *

 

 

  영화의 기술적 진보와 관련해서 CG의 발달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생에게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책을 추천받아 조금 접해본 적은 있지만 사실 나와 같은 일반 관람객들이 CG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싼 기술인 만큼이나 난해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아닌 우리가 CG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대부분이 CG로 이뤄진 영화의 영상미와 충격이 서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할 영화팬은 아마 없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고전의 서사가 CG의 몸을 빌려 웅장한 규모의 고대그리스 신화로 재탄생한 것을 나는 영화 <타이탄>에서 목격했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다른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들도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며 감탄을 연발했었다.


  나의 반응은 CG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담긴 상상력이 실사로는 도저히 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별세계’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큰 영화팬들은 CG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광신도가 아닐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롤링의 <해리포터> 등은 CG가 없었다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지 못했을 환상적인 별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비평가들에 의해 두 부류로 나뉜다. <아바타>는 “별 내용이 없는데도 CG의 효과를 톡톡히 본 영화”라 저평가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독자들 사이에서 이 시대를 빛낸 명저라는 찬사를 받아왔으므로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평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다. 더 나아가 <반지의 제왕>은 감독 피터 잭슨과 그와 함께 시나리오를 쓴 작가들의 역량이 더욱 빛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설로 <반지의 제왕>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느낀 점이겠지만 톨킨의 소설에는 지루한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해리포터>는 다소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환상문학의 어머니’라 흔히 회자되는 어슐러 르귄은 롤링을 빗대어 “소설을 쓸 줄 모르는 작가”라 비하했고,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죽음의 성물>의 재구성에 있어서 수많은 ‘해리포터팬’들을 실망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들은 세베루스의 죽음과 회상이 너무 짧고 성의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고 성토했다.)


  진중권氏가 <폴라 익스프레스>를 설명하며 제시한 개념인 ‘언캐니(uncanny)’는 CG 기술의 진보로 인해 앞으로는 찾아보기 힘든 기술용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픽사, 디즈니 등 굴지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들은 대부분이 동물을 다룬 3D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크레더블>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하지만 진중권氏가 이어 담론을 논한 <베오울프>라든지, 올해 개봉한 <틴틴>에서는 ‘언캐니적’인 현상이 많이 줄어 들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을 닮았으나 2% 부족한” 것에서 느껴지는 언캐니는 “CG가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우리의 보수적인 경향으로부터 옹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완벽한 CG의, 단 하나의 실사도 없는 환상적인 세계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을 되돌아보면 기술은 인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놀라운 수준의 압축 성장을 이뤄오지 않았던가.


  CG와 함께 이 시대의 영화 관람객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 것은 서사의 해체이다. 고전은 언제나 향유되며, 그 권위가 향유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마련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수많은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심지어 흑백 무성영화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젊은 영화팬들에게도 ‘향수’라는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영화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층위의 서사가 한꺼번에 진행되는 영화가 이 시대의 문제작들로 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나비효과>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영화 <밴티지 포인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주인공이 다양한 시대에서 별로 늙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평행공존’하듯 진행되는 영화(패션과 관련된 강의에서 봤는데,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도 있다. 진중권氏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양자영화(콴툼시네마)’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 영화는 눈이 아닌 뇌를 통해 보는 영화로 관람자들마다 서로 다른 서사가 진행되게 된다.


  만약 이런 기술이 실행된다면 우리에게 서사는 개인적인 체험이 되어 더 이상 단일성을 띤 ‘공유체’로써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를 가진 개념 중 하나인데, 이는 온라인게임의 스토리진행 형식과 일면 닮은 점이 있다. 온라인게임에는 굵직한 스토리가 있고, 그 외에 선택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스토리들이 있다. 물론 유저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스토리에 집중을 하거나, 캐릭터의 힘을 기를 목적으로 다른 스토리들을 마치 “헬스클럽에 다니는 사람의 심정”마냥 진행한다. 추천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온라인게임은 ‘자율’이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모든 이가 동일한 서사를 체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사는 개인적 체험이 된다.


  콴툼시네마도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서사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서사는 훨씬 깊은 개인적 체험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다. A가 B에게 “나는 그 장면에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 길을 선택했거든. 그랬다가 거의 죽을 뻔 했어.”라고 말했다고 하자. B는 바로 그 선택의 장면에서 상상을 동원한 약간의 공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A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겪지 못했던 사건들이 연속됨을 알게 되고, 결국 공감의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서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체험자들의 심리를 읽고 미리 대비하여 자신의 몸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황과 같다. 서사는 확정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사실상 유기체가 될 것이다. 비록 작가가 공을 들여 만든 수많은 ‘경우의 수’라고 하더라도 관람객에게 높은 수준의 콴툼시네마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가상체험’이 될 소지가 높다.


  여기서 ‘가상체험’은 CG와 서사의 해체 외에도 시각적 충격, 혹은 진중권氏가 자주 쓰는 용어인 ‘촉각적 충격(혹은 체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클로버필드>는 “자세하게 보여주거나, 혹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관람객들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 초반부터 관람객들을 로버트 카파로 만들어버린다. 아마 관람객들이 노르망디 해안에서 충격에 노출되는 시간은 30분이 족히 넘을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카비젤에게 아람어(예수가 활동했을 당시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등 중동에서 국제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예수의 수난(passion)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관람객들을 당시 예수를 따르던, 혹은 그의 삶을 목격한 한 무리의 중동사람들로 바꿔놓는다. <클로버필드>는 영화 <REC>와 마찬가지로 1인칭 기법을 사용해 관람객들에게 엄청난 멀미와 현기증을 준다. 그러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고전적 의미’의 관람은 이런 영화들 앞에서 일제히 해체된다.


  영화의 기법과 관련해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 정도이며, 영화가 짚고 간 다양한 주제, 예컨대 사이보그, 유령선, 미디어, 권력, 망상, 부조리, 폭력, 천재, 동화(童話), 역사 등도 진중권氏는 다채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가벼운 문장인 것 같으나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봐야 하는 내용이다. 현대를 규정하고, 구성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지금의 담론들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유의 기회라 생각된다. 영화팬이라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영화들도 해당 챕터들에 삽입해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나갈 수도 있다.


  “누가 영화를 이렇게 복잡하게 봅니까?”라고 물어본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저자가 부제를 달아놨듯이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며, ‘즐거운 사유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영화를 말하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은 이는 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를 단순한 픽션이 아닌 ‘시대읽기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런 식의 투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리다. 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작품들을 보며 우리의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해보는 일은, 그리하여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릴 수밖에 없다. 인문학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세태에 이 책과 같은 시도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크로스오버(cross-over)의 매력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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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2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탕기님 :)

영화는 대부분 대작이고 또 본 것들이지만 글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진중권은 제게 [미학 오디세이]보다 나은 게 없었어요. 제가 작년에 [필로우 북]을 본 것 같은데 진짜 특이하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네요. 사실은 전혀 배경지식 없이 틀었다가 너무 신기해서 끝까지 봤거든요. 영화사나 기법에서 한 획을 그었을 것 같았어요ㅋㅋㅋ

탕기 2012-02-02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나중에 한 번 봐야겠네요. 안 본 영화들을 다룬 챕터는 사실 절반 정도 이해를 못했던 것 같아요. 글도 인문학 중심이구요. :)
 
과잉 연결 시대 - 일상이 된 인터넷, 그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윌리엄 H. 데이비도우 지음, 김동규 옮김 / 수이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1.20

 

 

 

  MBC의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안철수氏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러다간 모두 공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의 대중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충분히 겪고 있으면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방관하는 우리의 자세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임은 알겠으나, ‘공멸(共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갖고 있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니 ‘공멸’은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고, 발행한 지 조금 오래된 사전들에는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한다. 무엇 때문에 “함께”라는 부사어가 굳이 첨가되었을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보면 슈호프는 죄수 알료쉬카와의 대화에서 죄 없는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 왔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예컨대, 그런 것일까? 나는 아직 사회에 나서지 않은 학생이고, 죄를 지은 적은 없다. 의무교육도 성실히 받았고, 군복무도 열심히 이행했다. 이 사회에 내가 해를 끼친 것은 없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사회의 추락과 함께 ‘공멸’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솔직한 생각으로 나는 무엇이 공멸의 위기를 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으로만 봐온 세상이다. 대기업들의 횡포, 정부의 무능력, 폭력에 둔감한 사회 등의 문제는 논설이나 칼럼에서만 읽어왔다. 이 좁은 시야를 가진 일개의 학생이 무슨 이유 때문에 “함께 멸망하는” 시나리오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우리는 온갖 링크(link)들로 이어진 그물 사회에서 살아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유럽의 위기가 9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이곳에서도 문제를 야기한다. 어떤 원리로 그런 비극이 벌어지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학자가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대략적인 이해는 이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Overconnected)>는 이 시대의 ‘연결’에 관한 충격적인 사례와 저자의 예리한 시각을 담은 책이다. 인터넷 선을 잠시 뽑아놓거나 무선연결을 해제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더 이상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 될 수 없다.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혹은 누군가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인터넷에 접속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온라인은 놀라운 속도와 ‘연결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결욕구를 가속화시킨다. 빛의 속도로 대화를 주고받는 시대이다. 같은 뜻으로 위기 역시 빛의 속도로 다가오게 된다. 세계가 동시다발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는 시나리오는 더 이상 하찮은 음모론이나 비관론이 아니다. 윌리엄은 그런 위기들을 짚어가며 우리에게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출처] crowdfundingbank.com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은 이라면 <과잉연결시대> 역시 비슷한 부류의 서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앞서 과학 분야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고, 그것으로 사회를 해석한 뒤, 문제해결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내놓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탄탄한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되고, 다소 어렵더라도 각종 사례들을 통찰하는 저자의 혜안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과잉연결시대>에는 주로 금융권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예시들이었지만 얼마간 언론보도를 통해 들어본 것들이라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라 하던가. 일주일 정도 이 책을 붙잡고 조금씩 쪼개어 읽은 뒤, 오늘에서야 결론을 읽었다. 그가 여러 단락과 장(章)을 통해 설명한 사건들의 중대함에 기대어 생각했을 때, 과연 이 책의 꼬리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먼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하는 용어들은 책의 첫머리에 나온다. 물리학 이론에서 따와 그가 만든 용어인 overconnected와 positive feedback은 일단 이해하면 전혀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피드백이란 A가 B에게 영향을, B가 C에게 영향을 줬을 때, C가 다시 A에게 영향을 주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영향관계이다. 이 관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overconnected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는 정체되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빠르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SNS을 통해 실시간으로 사건들을 알게 되고, 복잡한 교통시스템을 이용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몸을 얹혀 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이 드러나는 때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고(accident)’를 당했을 때이다. 2008년 세계는 극단적 사고를 겪은 바 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공격적 투자,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안이함, 규제구조의 문제, 그리고 도덕적 해이가 낳은 총체적인 비극이었다.


  윌리엄은 이 책에서 잠시 ‘사고전염(thought contagion)’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가 사고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은 <믿음의 엔진>과 같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인간의 고질적 한계이다. 사고전염은 경제에서도 일어난다. ‘버블(bubble)’, ‘토네이도(tornado)’와 같은 단어는 자주 들어본 것이리라. 사고전염은 소통의 욕구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기대도 포함된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평가가 좋으면 투자자들은 당연히 그곳에 투자를 하고자 한다.


  아이슬란드도 그러했다. 어업에 전념하던 가난한 이 섬나라가 금융업으로 전환한 뒤 2008년 10월에 겪은 국내 3대 은행 글리트니르, 란드스방키, 카우프싱의 잇따른 파산은 영국, 네덜란드에게는 직격탄을 날렸고, 전 세계 금융증시의 불황을 가져왔다. 기대가 전염되고 투자가 몰리면 거품이 생긴다. 은행은 그 버블로 재투자를 하면서 더 큰 버블을 만든다. 그런데 정작 투자로 운영되는 돈이 부풀어지는 중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 줄어들고, 다시금 사고전염이 발생해 거품이 갑자기 사라지면 투자자들은 은행의 실체를 알게 되고 돈을 급히 뺀다. 은행은 망한다. 부채가 생기고, 그곳에 투자했던 이들은 인터넷뱅킹은 물론이고, 은행본사의 입구가 봉쇄된 것을 목격한다. 땅을 치고 통곡하는 건 이미 늦은 일이다. 이렇게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세 은행 탓에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막대한 빚을 물어야 한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2009년 1월 26일 연정붕괴라는 사태를 초래했다.


  최근 그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거품은 overconnected를 만든다. 그것이 사라지면 막대한 손해가 온다. 놀라우리만치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를 피해갈 수 있는 혜안을 지닌 투자자는 많지 않다. S&P와 무디스와 같은 굴지의 신용평가사들마저도 2008년 사태에 앞서 위험부담이 매우 높은 채권들에 트리플에이의 평가를 매겨 투자자들의 쏠림을 부추겼다. 이런 쏠림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수레 제단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악마들이 이끄는 수레 위에서 방탕한 자들이 놀음을 일삼고 있고, 수레 근처의 사람들은 자기네들도 태워달라며 손을 하늘로 뻗은 채 욕구를 드러낸다.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수레 위의 천사만이 알고 있다. 종교적 지옥을 ‘사회적 지옥’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그 천사는 진리, 혹은 진실을 우러러보며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는 기도를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버블이 하나의 문제였다면 overconnected는 정보들이 연계되는 것, 윌리엄이 말한 정보연계가치(values by association)을 통해 사생활 침해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Cyworld, Daum, Naver 등 굵직한 사이트들은 물론이고, 각종 온라인게임에 사용된 개인정보들이 하루 만에 유출된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미온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집주소로, 전혀 모르는 기업의 홍보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착한다면 그제야 화들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기업들은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기업, 예컨대 윌리엄이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라 소개한 초이스포인트(ChoicePoint)와 같은 기업에 돈을 주고 고객의 정보를 구매한다. 그 기업들은 회사를 홍보하거나 고객의 취향을 분석하고 판매계획을 세우는 것에만 그 정보들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정보를 취급하는 안전성에 있어서는 일괄적이지 못하다. 윌리엄은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개인에게 주는 ‘비밀번호 제도’를 제안하지만 피해복구방안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언급한다. 요컨대 그것은 윌리엄이 결론에서 언급한 ‘외부효과(externality)’를 제 3자가 부담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사고전염에 대해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극우세력들의 온라인 활동이다. 페이스북은 신(neo) 나치주의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정책을 펼친 바 있다. 소위 ‘hate group’들의 사고전염은 위험하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증오심이 부추겨지면 다양한 경우들이 생겨나 각종 민족주의의 부활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야기된 현실”이 지금의 모습이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조그마한 안티-카페들은 그나마 사소한 경우이겠지만 인터넷은 사람의 의견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플도 전염된다.”는 학자들의 진단은 사실이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다.


  윌리엄은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보수주의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가 결론에 그의 보수성을 드러낸 이유는 “미친 철마(鐵馬)와 같은” overconnected의 실상을 제어해보기 위한 현실적인 의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통제와 자율시장의 공존을 통해 국부(國富)가 증대된다는 개념인데, 오늘날의 정부통제는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기업들에게 상호연결성이 강한 현대사회는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문제는 그들이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수단들을 카드로 꺼낸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엄청난 혜택을 누린다고 여기고, 실제 그러하며, 따라서 대안을 생각할 만큼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길들여진 상태”이다. “위험은 곧 기회비용이 아닌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식의 진화론적 인식이 지배적인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윌리엄은 원론으로 돌아가 점검과 예방이 필수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결론으로 담는다. 이런 것들이다. 투자자들의 공격적인 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positive feedback의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유류세를 예로 들건대 과세제도를 점검해야 하며, 경제학자 토빈이 제안한 금융시장 세율 1%도 좋은 사례일 수 있다. 프라이싱(가격책정) 장치를 점검해 버블을 조장하는 positive feedback을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 외부효과에 대한 프라이싱도 중요한데, 탄소배출권의 경우 시장가격에 맡기는 방안이 정부의 규제보다 나을 수도 있다. 제 3세계의 무역성장속도를 낮추기 위해 그들 기업들에게 선진국 기업들의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예방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윌리엄의 태도는 더욱 막연해진다. 사례를 들고, 문제점을 언급한 뒤 “이렇게 했더라면”의 식으로 맺는 단락들이 여럿 있다. 요컨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방어운전’하라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통해 “엔트로피를 줄이자.”라고 한 주장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용두사미의 책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의 주장을 ‘식어버린 라면물’처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윌리엄은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상하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overconnected에 적응할 것이냐, 아니면 객체적으로 적응할 것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도태될 것이냐를 놓고 무거운 저울질을 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자면 다소 비관적이긴 하나 주체적 적응을 위해서는 이 세계의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잉연결시대>가 이미 빠르게 달리는 소위 ‘문명권’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인구가 과잉밀집된 대도시에서 벗어나 전원(田園)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고, 그런 탓에 미술에 있어서도 유난히 인상주의 거장들과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돈을 벌어 귀농하는 젊은 청년들의 꿈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여럿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과 제 3세계의 독자들에게 윌리엄의 말은 소위 “태평양의 원주민이 본 <최후의 만찬>”과 같지 않을까? 이 세계의 문제를 야기하고, 속도를 주도하는 이들이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윌리엄이 말한 상기 문제들을 바라본다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에 더욱 무게를 주려고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과잉연결시대>를 덮고 창밖을 내다본다. 잔뜩 눈이 내릴 것처럼 웅크린 흐린 하늘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 세계는 분명 내달리고 있다. 상반된 속도 탓에 현기증이 난다. 내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를 일갈하려는 윌리엄의 진단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고, 그러나 해결책을 실천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독서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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