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전 열림원 논술 한국문학 13
염상섭 지음, 손미순 / 열림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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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무관심도 하여보고, 꾸지람도 하여보고, 장황한 설명도 하여보고, 화도 내어본다. ‘이인화’ 이 사람이 나와 닮은 점들이 많아 <만세전>을 읽는 내내 나는 차분하게 공감했었다. 그래도 그에게 매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고작 몇 달의 신혼생활 끝에 십 년을 유학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아무래도 죽어가는 아내에게 별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은 너무 하다 싶었다. 그러나 이광수의 <무정>에서 본 ‘자유연애’를 생각하며, 그래, 모두가 일편단심일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제대로 된 정을 줘 본 적 없는 그의 싱거운 반응과 생각, 그리고 건넌방에 가 ‘정자(시즈꼬)’니 ‘을라’니 하는 여인들을 머릿속에 그려본 그에게 동정했다.


  얼마 되지 않은 분량을 다 읽고 나니, 나에게 급한 체증이 찾아왔다. 이면지에 빼곡히 적어놓은 메모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다시 희뿌연, 기분 나쁜 안개로 가득 찬다. 이런 안개는 영화나 TV에서 그렇듯 묘지와 어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그가 1922년 이 작품을 발표했을 적에 원래 제목은 <묘지>이었다.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지금의 심리로는 잘 되지가 않기에 별안간 <만세전>에 대한 나의 소고는 쓰지 않으리라 했으나, 마침 비가 내리니 적적함이 마음 밑바닥에 침전되어 고요히 호수를 이뤘다. 어둔 하늘보다 더 짙어 실루엣으로 제 몸집을 가늠케 하는 큰 나무가 창가에 버티어 있고, 집 앞 공원의 모래바닥을 걷는 사람의 자박자박 걸음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다시 메모들을 펼쳐보았다.

 

 

*   *   *

 

 

  돌이켜보니, 그가 현해탄을 건너기 전까지의 여정에 나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메모는 이인화가 대전까지 온 다음부터 많아졌다. 이면지 한 장을 가득 채웠다. 그가 ‘M헌’이란 곳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작중 담겨 있던 그의 무서우리만치 솔직한 넋두리가 한겨울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대목들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고쳐 읽기도 해보고, 메모로도 적어보고, 홀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다가 불현듯 나에게서도 북받쳐 오르는 것이 있어 멈칫멈칫하기도 해보았다.


  ‘배운 자’, 아니 ‘배워가는 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렇지 못한 자들과 마주할 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엄청난 층계의 격차를 소름끼치게 느끼곤 한다. 그래, 저 위에서 떵떵거리는 이들이 뭔가 계몽적인 말을 한다고 치더라도 그 말이 층계를 따라 또로로 굴러 떨어져 저 밑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기라도 했다면 지금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었겠느냐, 하는 역정도 내보곤 했다. <무정>을 읽고 내가 가진 가장 큰 위선의 장면은 대개 이런 것에서 나왔었다. 이인화 그 자도 배운 자의 입장에서 “과학지식이라고는 소댕뚜껑(솥뚜껑)이 무거워야 밥이 잘 무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속으로 나무랐는데, 나는 그가 또 어떤 위선의 궤변들을 늘어놓을까 단박에 째려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않는다. 그 말이 <무정>의 이형식처럼 수직으로, 혹은 수평으로 쭉쭉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 뿔에 지친 양 툭 떨어지고 만다. 이인화는 세상을 바꿔보려는 적극적인 태도에서 허황된, 언젠가 내가 인용한 김수산(金水山)의 표현대로라면 ‘사상누각’의 세계관을 만들지 않고, 그대로 도망가고자 한다. 자신을 이해 못하는 가족을 두고 집을 ‘여관’이라 하기도 하고, 위생이니 이층집이니 편리이니 하는 것들을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아니면 빼앗겨도 그대로 내준 뒤 술 한 잔에 화푸념만 하고 마는 조선 사람들을 증오하면서. 이인화의 태도도, 그들보다는 조금 더 안다는 까닭에 여러 정황을 계산도 해보고 자기방어도 해보지만, 결국 같은 줄에 매달린 빨랫감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못내 연민의 눈을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소설의 말미에 마음을 다 접은 듯 이렇게 말한다. 연민으로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다. 옳은 말이다.


  그런 것들과 더불어 또한 여러 이유들로 나는 그의 증오하는 자세를 ‘증오’할 수 없었다. 이형식과 이인화 사이에, 나를 독자의 위치에 세워놓고 분명 나는 분명 이인화에게 한 발 더 가까이에 있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괴괴한 거리의 처량한 모습이 조선의 실경이라면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은 주변을 탓하기 전에 냅다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 속에서는 그처럼 이런 말도 하겠지 싶었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망할 때로 망해버려라.”,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이다!” 파울 클레가 나치에게 작품들을 빼앗겨놓고 스위스로 도망갈 적에 뱉었다는 그런 종류의 상스러운, 홧김에 하는 말들 말이다.


  모든 것들을 보고 꾹 참아왔던 그의 마음도 대전 즈음에서는 무방비로 폭발해버렸다. 산다는 것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역겨운 취급 받는 것 중 하나가 구더기이다. 무기력한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절하시켜놓고 끝내 그는 “무엇에 써먹는 인종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이든, ‘김의관’이든, 김의관의 ‘차지(심부름꾼)’이든 간에. 세계대전(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조선만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 탓이리라 생각도 해보는 것이, 몇 달 살고 헤어졌다가 십 년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차에 죽어간다는 아내의 소식을 듣고도 동요 한 번 않는 이인화가 조금은 유별난가 싶기도 한 것이다. 서울에 와서도 아내와는 서먹하고, 미음 한 번 떠먹여줬다는 까닭에 뭔가 한 것 같아 뿌듯하여 유쾌하다 느껴보기도 하고, 아이(중기)를 보고 ‘고깃덩어리’라 하질 않나, 서울집에서 사나흘 머물 적에도 이따금 ‘정자’니 ‘을라’니 생각해보며 장례 후 재혼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그는 만사에 냉정한 이가 아니라, 그에게 맞지 않는 너트는 N극이 S극을 밀어내듯 거부해버리는 볼트와 다름없다. 면역이라면 면역이랄까.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로 그를 달래 봐도 <만세전>의 모습은 달라질 바가 없을 것이다.


  사회가 병약하여 썩어빠진 잇몸이 무너져 내리듯 사람을 누르고 누르면 애국은 둘째 치고서라도 오기로 일어나고자 할 법 한데, 이인화가 느낀 이 사회는 제목 그대로 묘지이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정 없으면 ‘무정’하면 된다.


  이매망량. 온갖 도깨비란 뜻이다. 귀신에게 정을 줄까, 도깨비에게 봉사할까, 그들 구원받을 길도 없는 ‘백의(白衣)’ 입은 이들을 두고 이인화는 신생(新生)하러 떠나는데 마지막에 피식 웃어봄이 나에게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대만의 생번’ 같은 ‘요보’들을 두고 그는 다시 현해탄을 건너 동경으로 갔을 것이다. 올 때처럼 선박 안에서는 조용히 눌려 있다가 아마 돌아가서는 M헌에서 들르고도 했을 것이다. 그것 말고 또 무엇을 했을지는, 별 관심 없다. ‘묘지’ 보고 돌아오며 “나는 묘지를 봤다.”고 하는 이에게, 그 묘지의 양분 위에 태어나 후손으로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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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만세전은 밑줄 그어가며 분석하면서 읽고 줄거리요약까지 했었는데도 이 생경한 느낌은 뭘까요. 사람의 기억력이란..아니 제 기억력이란..!

탕기님, 지금 N블로그에서 오는 길이에요. 탕기님이 만드신 카페 덕분에 알게 되신 분들께 안부인사 드리고요.ㅎㅎ

탕기 2012-08-16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면지에다가 뭘 빼곡하게 적어놓긴 했는데, 참 볼 때마다 염상섭의 내공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 저 조금씩 블로그 살려보려고 건드려보는 중이에요. 나중에 저도 카페 이웃분들 한 분 한 분 초대해서 옛날에 블로그 했던 기억으로 좀 다듬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학교는 1년 정도 더 다녀야 할 것 같지만 틈틈이 만들어서 졸업한 다음에는 직접 이웃분들 찾아뵈야죠.^^

아이리시스 2012-08-19 16:4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그렇잖아도 선샨님이 탕기님이 블러그 접고 가버렸다고 서운해하셔서..조만간 보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인연은 끊기는 게 아니고 언젠가 만날 사람은 만나는 거라고 하시던데요^^

우리 그때 미술관도 가보기로 하고 그랬었는데..어언..( '')

루브르 산책인가 그 책이 나온 걸 보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게 개정판이라 그러시더라고요ㅎㅎ 책 안 읽은 거 다 뾰록났죠 뭐.ㅋㅋㅋ

탕기 2012-08-20 00:08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벌써 오래 전 일이군요.
예전의 '탕기'라 하기에 제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졸업하면 조금 나아질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간 대학 다니면서 미술공부 소홀해진 것도 있고, 원채 게으르고.ㅎ
나중에 한 분 한 분 초대해야겠어요.^^
 
무정 -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9
이광수 지음, 김철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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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3

 

  독서는 선입견으로부터 시작한다. 독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책의 디자인, 작가의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 제목의 뉘앙스, 출판사, 혹은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사진, 뒤표지의 추천사 따위에서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일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선입견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때론 끝까지 남아있기도 하고, 굳이 그것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선입견이 독서의 엔진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선입견이 인식과 이해의 근본적인 지평이라는 가다머의 말에 동의한다.


  <무정>을 읽기 전, 나는 나의 심리가 대체 어떤 상태인지 거의 알지 못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은 마음속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문학계에서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작품을 이탈리아 미술계가 조토를 사랑하듯, 혹은 영문학계가 초서와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듯 다룬다.


  대학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혹 교양으로 들어본 바가 있는 이라면 사회과학계든 인문학계든 우리나라의 대학풍토가 1970년대부터 거의 맹목적으로 ‘근대’에 집착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근대’는 가히 지적 굴레요, 팜므파탈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덫에 빠져 거의 모든 과거의 작품들에서 근대로 소급되는 것인 양 혼동되는 인물, 서술방식, 혹은 구절 등을 발표 주제로 삼았다가 교수에게 퇴짜를 맞는 학생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근대를 논하기 온당한 주제는 아무래도 이해조(李海朝), 이인직(李人稙), 이광수(李光洙) 등과 문예 동인지 <창조>를 시원(始原)으로 하는 1910년대 무렵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근대’에 목말라하는 듯하며, 이광수의 <무정>과 같은 선구적 작품들은 사상과 역사적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는 초월적 평가를 받아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문학사가 마련한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매국노. 하필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일본 정부의 강경 대응, 그리고 올림픽 세리모니 등으로 온 TV에서 곧 다가올 광복절의 분위기를 한껏 고취시키고 있는 때에, 공교롭다고나 할까, 나는 <무정>을 읽었다. 매국노. 그것이 나의 선입견이었다. 큰 깨우침을 위해 타 문화를 숭상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나만 하더라도 한국미술보다는 서양미술을 훨씬 많이 알고 있고, 유불도의 사상보다 서양의 근현대철학에 더 심취해 있으니), 나는 지식인들의 한계를 대단한 역사의 핑계인 양 소개하는 것을 종종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보다 나을 점이 없었겠느냐는 심리가 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가다머를 믿어보고자 했다. 그에게 동의했으니, 나는 선입견에서 멈춰 설 수 없었다. 책을 펼쳐들기 전, 일종의 기합을 뜻할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싫은 것을 하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솟구치는 소름도 없진 않았다.

 

 

 

*   *   *

 

 

 

  <무정>은 1917년 새해 벽두부터 <대한매일신보>에 약 6개월 간 126회를 연재한 소설이다. 당시 그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의 철학과에 진학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바로 작년까지는 같은 학교에서 고등예과를 수학했었다. 학벌만 보더라도 그가 월등한 지식인이었음을 부인할 길은 없다. 그것도 ‘골방철학’하는 이가 아닌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다채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는 분명 배울 점이 있었고, 왕성한 집필은 내가 그를 마음 한 구석으로는 몹시 시기했던 그의 뛰어난 역량이었다. 소설 <무정> 속에도 이광수의 박학다식한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톨스토이를 좋아하고, 진화론과 우주에 관심이 많았던 그다. 이제 막 도킨스, 카쿠, 세이건, 최재천, 리들리 등에게서 그것을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이형식이 두 여인인 김선형과 박영채 사이에서 남모를 고민을 하며 애정소설과 비슷한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 있음에도 이 소설은 종종 이형식의 독백을 빌려 이광수의 심오한 사상들을 거리낌 없이 독자들에게 내던진다. 마치 독자를 계몽시키려는 것 같은 공격적인 태도이므로, 그렇다, “내던진다.”는 나의 표현은 퍽 적절하다. 그가 조선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강조코자 했던 것은 교육이었다. 나는 대사 뒤에, 아니 때론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광수의 엘리트 의식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교육과 개화를 외치며 조선이 잘 살 길을 모색하던 그를 친일로 기울도록 만든 시대를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를 위선자로 봐야 하는지 갈필을 잡지 못했던 탓에 결국 쉬운 방법을 택해 그를 아니꼽게 본 것이었다.


  그는 확정적인 선언조로 소설을 연재하며 근대의 ‘열린 태도’에 대해 예찬한다. 나는 단적인 예로 작중 인물 박영채의 의식변화를 들고 싶다. 그녀는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형식을 거둬 가르친 은사 박응진의 여식인데, 박응진의 교세가 기울고 도적질을 했다는 죄명으로 가문이 거의 파탄나자 친가를 전전한다. 어디에서도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기에 영채는 일단 조금이라도 거처가 정해지면 옥에 갇힌 아버지를 찾아가 따뜻한 밥 한 공기라도 대접해드리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녹록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정절’의 아이러니가 시작된다. 효가 기생을 낳은 셈이었고, 그 기생은 “기생이 아닌 정절”로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형식에게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사랑을 모두 지키고자 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또 다른 기생인 월화가 영채의 절반이 되어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영채는 정절에 목을 매 훨씬 이전에 대동강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여차저차’하여 형식을 찾은 영채가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둘은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정절 때문이다. 뒤에서는 자유연애를 말하는 지식인인 형식이 정절, 기생 등을 논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가당착이다. 그는 단지 영채가 더렵혀졌는지 더렵혀지지 않았는지를 놓고 고민하여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을 거뒀다가 들였다가 한다. 그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라면 그가 결국 영채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장면에서 구역질 날 정도의 위선을 목격했노라고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영채도 정절과 기생의 울타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해방되는 순간은 또 다른 절묘한 사건에서 찾아온다. 평양 가는 기차에서 유학파 여인인 ‘신여성’ 김병욱과 만난 것이다. 영채는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 죽으러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월화가 그랬듯 대동강에 뛰어들고자 모든 결단을 내린 후였다. 그녀의 눈에 석탄가루가 들어간 것이 사람 하나를 살렸다. 병욱은 영채의 눈에 들어간 먼지들을 닦아주며 그녀에게 정을 느꼈고, 영채는 병욱으로부터 삼종지도는 그른 제도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그것에 목숨을 걸어왔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의 울타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애당초 차버리고 ‘자유여인’이 된 이가 있었던 것이다. 영채는 그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다.


  영채가 그러할 적에 형식은 선형과 약혼을 한 사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선형과의 미국 유학생활을 꿈꾸면서도, 아마도 죽었을 영채가 눈에 밟히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강력한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이 그의 취향에 맞는 여인이라면 너무나도 솔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평양에 가서 영채의 시신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면서도 그는 ‘계향’이라는 기생을 옆에 끼고서 ‘쾌미에의 지각’이 일어났다며 무슨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상황을 서술한다. 그러나 실은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조화이기도 하고 혼돈이기도 해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상태였다.


  형식으로부터 나오는 ‘교육’에의 강조, 그와 함께 후반부의 주를 이루는 것 중 하나인 병욱의 자유로운 사상은 조선의 부족한 현실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과 자연스럽게 닿아 있다. 엘리트 의식, 교육, 연민으로부터 나오는 인도주의는 당대 선각자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또한 느꼈던 책무와 다름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독자들은 어떤 굵직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형식, 박영채, 그리고 김병욱을 우러러 봤음 직하나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것에는 구체적이지 못한 장황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동조의 계몽 연설문과 같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가졌다는 서술이 갖는 의도성은 훤히 드러나 있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삼랑진 역사(驛舍)에서 ‘게릴라 콘서트’식의 성금모음 연주회를 열고,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영채, 병욱, 선형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는 형식의 태도는 쉽게 이해될 법한 것이 아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희곡작가 김수산(金水山)은 1926년 <조선지광>에 투고한 글로 이광수의 <무정>을 두고 “공중누각의 이상주의”라 했고, 그 유명한 김동인은 <조선일보>를 통해 춘원(春園)의 위선적인 성격과 형식의 위선적 행동(영채를 버리고 선형에게 간 것)을 꼬집었다. <심문(心紋)>의 최명익(崔明翊)은 <무정>의 인물들을 “통속 도덕이라는 관념의 노예”라고 했다. (장석주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참조)


  <무정>의 독서는 상처를 남김과 다름없다. 나는 김철이 책임·편집한 책으로 <무정>을 읽어 그 뒤의 소고를 봤는데, 그는 <무정>을 통해 ‘나’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아직 벗어던지지 못한 선입견 때문에 그것이 나는 못내 불편했다. 이 작품을 거울로 삼는다는 것은 적잖은 거부반응을 몰고 왔다. <무정>은 분명 이미 내가 지금껏 듣고 읽고 배워오며 만들어간 나만의 항체에게 거부당하고 공격당할 항원이다. 몇 번은 더 인문서적 접하듯 고쳐 읽고, 몇 번은 더 설득당하는 양 고쳐 읽어야 알러지가 없어질 듯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무정(無情)’이라는 단어만 보고 있어도 나의 마음은 꼭 그것과 같아진다. 그것이 나에게 "무정하오."라 해도,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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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1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사를 국문과에서는 반드시 배우잖아요. 책읽고 글쓰시는 분들 상당수가 문학전공일텐데도 (그런데) 알라딘 서재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전방위적인 리뷰를 처음 봐요. 저만해도 안쓰지만 (처음엔) 그게 너무 의아했어요. 너무 더워서 한동안 드러누워서 딴짓도 엄청하고 손놨던 공부를 다하네요. 책읽는 것도 영화도 보다보다 지겨울만큼 지긋지긋해졌어요..ㅎㅎ

아참, 무정은 정말로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이광수는..음..아니지만.

탕기 2012-08-16 23:0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우리문학 리뷰하는 분들이 별로 없나보군요.
음, 저는 다음 학기에 현대소설론을 듣게 되서 미리 읽는 중이라 책 무진장 많이 사놓고 홀짝홀짝 넘겨보고 있답니다. 이번 학기에는 소설 정말 많이 읽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소설이 잘 안 읽혀요. 독서태도라고 할까? 인문학이 저에게 더 가깝거든요. 그런데 소설도 자주 읽다보면 저에게 잘 들어맞을 것 같아요. 이 기회에 꾸준히 소설 읽는 버릇 좀 들여서 나중에는 한 달에 4권씩 소설책 읽기에 도전해야 겠어요.^^

아이리시스 2012-08-19 16:51   좋아요 0 | URL
남자들은 아무래도..(라는 건 우스갯 편견이고요) 막상 읽어보면 소설보다 인문학이 더 잘 읽힌다는 게 어떤 말인지 저도 알아요. 소설은 묘사가 있어서 진짜 재미를 느끼지 않으면 좀 더디 읽히는 면이 있고,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쉽다는 편견이 있고, 인문학은 지식이라 생각하니까 다가가기 어렵지만, 막상 생각 안하고 넘겨 읽으면 은근 잘 읽힐 때가 많더라고요. 예전에 저는 인문학이 어려운 거, 소설이 쉬운 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런 분이 많아서 신기했거든요.(그렇다고 소설읽는 게 대단하다는 건 아니고) 근데 어느 정도 감을 잡고보니까 읽는 건 인문학이 더 빠를 때가 많아요. 그걸 다 습득하는지는 나중 문제고ㅎㅎ

탕기님 말이 저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가지고 길어진 건데, 어쨌든 탕기님 리뷰는 다 좋군요(!) 급 결론^^

2012-08-19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 한겨레지식문고 5
찰스 타운센드 지음, 심승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2012.07.11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6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년 여름, 나는 3주 정도를 ‘체첸(Chechen)’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리주의 운동이 이슬람-러시아 정교회, 혹은 이슬람-서구의 대결에서 강력한 종교의 힘을 빌리고 있는 까닭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검은 미망인(black widow)’이라 불리는 여성 테러리스트들이었다. 그녀들은 러시아와의 전쟁(혹은 이미 구소련과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극빈층에 지금도 속해 있다. 체첸 반군은 그녀들을 선동해서 모스크바의 병원과 지하철역에서 폭탄테러와 인질극을 실행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체첸을 잠시 공부하며 느꼈던 묵직한 충격은 각종 매체를 통해 볼 수 있는 중동의 테러관련 소식들로도 충분히 상기된다. 솔직한 표현으로, 10명 남짓한 사상자가 발생한 테러사건을 뉴스로 보면 나는 1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사건을 떠올리며 “저건 테러도 아니다.”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으나, 자오신산의 ‘전쟁호르몬’은 끊이지 않는 테러와 그에 대한 보복을 훌륭하게 설명한 개념인 듯도 하다. 기나긴 휴전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저’들의 폭력적인 ‘정력’의 원천은 공감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의 장소에서 붉은 핏물들을 계속 솟구치게 하는 중일 것이다.


  오랜 독서였다. 정치학이나 테러리즘 관련 학문에 입문하려고 구입한 책 아니었기 때문에 찰스 타운센드가 들어준 수많은 사례들 중 대부분을 일일이 검색해봐야 했다. Google이나 Wikipedia로도 검색되지 않는 사례들이 있을 정도로 저자의 예는 대단히 풍부하다. 그것들을 통해 찰스는 학설과 정치적 태도들을 비판하고, 명백한 현상을 도출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시오니즘, IRA, 무자헤딘, 알카에다 등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테러리즘을 바라보는 이상적인 시각을 다듬어가기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   *

 

 

  이 책에서 나름 도출한 두 개의 명제가 있다. 일반인인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아마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잊고 싶은” 명제가 될 것이다. 첫 번째 것이 특히 그러하다. 찰스도 이 경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테러리스트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이다.” 우리나라에서 윤봉길 義士의 (사실 ‘물통 폭탄’이라고 불러야 맞지만) ‘도시락 폭탄’사건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민족항쟁의 상징이다. 장제스의 극찬은 우리나라의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회자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의 입장에서 윤봉길은 (개인의 행위로 일단의 목적을 달성한) 근대적 테러리스트에 해당했다. 유사한 예로 저자도 언급한 바, 프랑스에서는 나치에 대항한 드골의 투쟁을 일컬어 ‘반군(反軍)’이라 부르지 않는다.


  두 번째 명제는 옮긴이 심승우氏의 인용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민주주의적 레토릭(rhetoric)이 오히려 호전적인 여론을 강화하는 포퓰리즘의 기제로서 더욱 강력한 동원 수단이 될 수 있다.(241쪽)
  어려우니 풀이해보자. 테러리즘의 공격으로부터 국가는 위협을 받는다. 정부는 두 가지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 하나는 보완을 강화하는 소극적 대응이고, 다른 하나는 보복이나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적극적 대응이다. 둘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대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대응은 대중들이 원하며, 가속화시킨다. 크레린스턴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다.(239쪽)


  특별법이나 특별군이 정부의 대응책으로 등장하게 되면 국민들은 일정 수준 자유의 침해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도 테러리즘의 위협 앞에서는 정부의 (때론 기약을 알 수 없는) 무력 사용을 옹호한다. 문제는 국가적 대응, 혹은 국제적 대응의 비용 대비 효과가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때론 테러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광기 어린 보복을 감행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단독 군사행동을 해서, 일례로 이탈리아와 사이가 나빠질 뻔도 했었다.

 

  책을 전체적으로 보면 서두에서 찰스는 테러와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매우 모호하고, 상대적임을 누차 강조한다. 찬찬히 살펴보면 테러의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다가 도리스 레싱의 ‘선한 테러리스트(good terrorist)’라는 개념이 대부분 테러에 관해서는 제 3자적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혹은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준다. 게다가 노엄 촘스키가 최전선에서 미국 정부의 위선과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으니, 속된 말로 “누가 나쁜 놈인지 모를” 아이어니한 상황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3장에서는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장 폴 마라 등의 프랑스 혁명정부를 살펴본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이 도덕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이 명제가 중요한 까닭은 폭력이 “억압과 폭정에 저항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천부적인 권리(70쪽)”라는 것이 프랑스 혁명정부의 기조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정부의 폭력(숙청의 정당화)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테러리즘과 다르다면, 그건 바로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차이 밖에 없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적 테러리즘은 ‘개인의 고립화(한나 아렌트)’나 ‘정신적 공황(손튼)’을 통해 개인들이 테러에 의존하도록 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집단학살)와 같은 경우에는 아예 목표 집단을 절멸, 흔한 수사법으로 빌리자면 ‘청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타협은 불가하다. 남미의 경우에는 군부들이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를 위협한다는 점을 빌미로 좌파를 완전 봉쇄했고, 그렇게 결성된 이른바 ‘반공동맹’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진배없다.


  ‘혁명적 테러리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4장은 테러와 혁명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는 장이다. 물론 우리는 혁명을 부르짖는 집단들이 테러를 사용하면 정치적인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이 테러를 도구로 삼게 된 까닭은 순전히 혁명 집단이 다수가 아닌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견은 (해당 사회의 문맹률이 높을수록) 대중들에게 잘 전달되기 어렵다.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행동은 곧잘 저지된다. 이것이 ‘행동하는 자’에게 영웅주의를 심어준다. 피터 라브로프는 “우리는 순교자를 원한다.(101쪽)”고 했다. 그러나 권력이 단기적으로 충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권력자의 암살 같은 것은 또 다른 권력자의 등장 때문에 영구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회의주의에 빠질수록, 하지만 테러를 통한 투쟁은 계속된다. 1970년대가 바로 그런 때였다.


  5장은 4장보다 위력이 강한 민족주의에 할애된 장이다. 민족주의는 좌파보다 크다. 좌파는 집단이지만 민족은 최대의 경우 어느 국가의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또한 민족은 자연발생적이기도 하다. 좌파가 할 수 없는 “대서사의 신화를 동원”할 수도 있고, 다원화와 신자유주의의 범람 속에서도 여전히 맹렬한 위세를 과시할 수 있다. (탈종교화가 진행되리라 예상됐던 20세기 후반에 근본주의가 강세였던 것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잘 참지 못한다. 그 예로 찰스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인 혁명형제단, 1959년 창설된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주의 ETA,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의 ‘검은 9월’ 사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키프로스 전사민족단 EOKA 등을 소개한다. 이들은 타집단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무차별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우리는 종교와 테러의 상관관계를 이제 눈 감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가 어떻게 폭력을 정당화하는지는 르네 지라르의 역작을 비롯한 여러 종교사회학자들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 테러가 현실·초월적, 혹은 우주적 차원에 호소하는데, 찰스의 질문처럼 상식적으로 이런 것이 실제 가능할까? 수행의 가능성이나 실현 가능성 모두에서 말이다. 이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찰스는 결국 종교적 테러의 밑바탕에는 근대적 테러리즘(행위 주체가 행동을 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광신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또 다른 문제는 종교와 민족이 서로 상호침투 한다는데 있다. 때문에 우리는 둘을 거의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 종교적 테러리스트들은 등에는 신을 업고, 손에는 돈을 쥔다. 그들에게 폭력은 “신과의 대화를 증명하거나 상징하는 의미(190쪽)”인 경우가 많다. 비록 상대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7장에는 우리가 어떻게 테러리즘에 대항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논의가 실려 있다. 테러는 그냥 무시하면 된다. 그것이 합리적이긴 하나,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것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쉽사리 내놓지 못한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대응 과정에서 일어나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피치 못할 억압을 특별한 예외로 다뤄야 한다. 또한 미국이 극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국가의 명예와 국가 안보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205쪽)” 있다.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클린턴 前대통령은 아프리카 수단에 강력한 미사일을 발사했었다. 잘 알다시피 부시 前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었다.


  학자들 중 이러한 일련의 대응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수행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찰스는 그걸 우려했다. 영국의 챌폰트 경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보복은 보복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테러리스트는 다른 사람을 살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살해당하기를 원하기 때문(208쪽)”이다. 또 하나 찰스가 우려하는 것은 적극적인 국가 대응으로 만약 보복 국가가 특수군(독일의 GSG9, 미국의 델타포스, 이스라엘의 테러진압특수군 등)을 창설하고, 그것이 만성적이게 되면 자유민주주의가 침범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소극적 대응이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의 침범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공항의 보완수위를 높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과잉진압이라며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물리력에 대한 국가의 배타적 독점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광범위한 의미에서 공공의 안전감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테러리즘은 대단히 효과적이다.(201쪽)
  테러리즘이 달성하고자 하는 수많은 목표들 중 실제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달성된 것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테러리즘은 끊임없이 국가를 위협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놓고 보면 찰스는 테러리즘이 비용 대비 효율성이 매우 큰 반면, 국가와 국제사회의 대응은 미비한 수준임을 꼬집어서 비판한다. 각 국가들이 마치 거미처럼 여러 개의 그물을 쳐놓고 테러리스트들이 걸리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나 더 비유하자면 거미들이 서로 어디에 그물을 쳐야 하는지도 합의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것은 “동의하기 힘든 국제적 의무(221쪽)”인 셈이다.

 

 

*    *    *

 

 

  책의 무게중심은 7장으로 분명하게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역자의 제목(이 책의 원제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 Terrorism’이다.)과는 달리 나는 7장의 부제를 이 책의 제목으로 오랫동안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근래 읽었던 책 중에서는 가장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던 책이다. 모르는 사례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가 문득 튀어나와 저자의 결론이나 정리를 따라가기에 벅찬 감이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례들이 나를 바다에 빠뜨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덤벼 검색하고 정리한 까닭은 내가 무언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글로 정리하며 차분히 생각해보니, 나는 (제목처럼 테러리즘의 상대적 개념에 주목했다기보다는) 테러리즘과 공존하는 국가의 위선, 혹은 테러리즘 자체의 한계와 역설 등을 몹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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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1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어려워서 어려운 책읽듯이 틈틈히 읽었어요. 탕기님은 어려운 걸 나름대로 풀어서 다시 공부해서 참 잘 써요. 그래도 역시 직접 보고 공부해보는 게 더 낫겠죠? 여름 어떻게 지내요, 탕기님?

탕기 2012-07-21 12:46   좋아요 0 | URL
익숙하지 않은 내용을 읽고, 요약하고, 정리하는 게 쉽진 않죠.
그래도 어려운 내용을 직접 공부해보는 것이 남의 요약문 읽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거에요.^^

저는, 지금 <탕기의 미술사> 2권을 정리 중입니다. 덕분에(?) 독서를 거의 못 하고 있어요.ㅎ
고딕이 주요 내용일 거 같아요. 건축하고, 회화를 중심으로.
예전에 공부 안 했던 부분도 공부해서 같이 꾸리는데,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요.ㅎ
방학 중에 다 완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완성하면 아이리님께도 보내드릴게요.^^

아이리시스 2012-08-03 16:03   좋아요 0 | URL
응, 막 신나네요! 하고 싶어했던 일이고 재밌는 작업이니 방학을 투자하더라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거기다 저도 보내준다니! (정말 좋아요) 응원하고 있을게요^^
 
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7.10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5권]

 


  세계적인 석학들과 학문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대학자가 쓴 것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런 책들을 만난다. 자크 바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 미치오 카쿠의 <불가능은 없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등등. 물론 독자들은 저자가 특정 분야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다소의 어려운 용어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들을 리드미컬하게 서술하는 그들의 배려 깊은 노력과 위트 때문에 불편함은 거의 못 느낄 것이다. 짧은 일기 하나를 쓰면서도 그토록 고민하고, 글을 늘 힘겹게 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다. 자신의 생각들을 정갈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해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최재천의 <다윈 지능>도 바로 그러한 책이다.

 

 

*   *   *

 


  매트 리들리, 리처드 도킨스, 미치오 카쿠, 칼 세이건, 스티븐 핑커, 르네 지라르, 피터 버거, 브루스 링컨, 오토 마두로. 대학생이 된 이후, 강의와 책,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저들을 접하며 나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 저들을 아는 이는 아마 짐작했을 것이다. 우주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종교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공교롭게도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우주과학은 각종 어려운 우주이론들을 귀동냥으로라도 배워 보려는 노력과 진화론에 대한 이해를 줬고, 종교사회학은 유아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인 내가 이슬람교와 불교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다.


  최재천의 <다윈 지능>은 위의 같은 성향의 내가 자칫 종교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주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도 동류의 책이라 하겠다.) 그의 겸손한 학자적 태도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그가 충분히 재밌게 설명해주는 수많은 진화론 이야기들도 각각 영양가가 높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와 같은 작은 독자들은 늘 저자의 태도를 염두에 둬야 하지 않던가. 정독하면서 이면지 5장 분량으로 정리한 바가 있어 책의 내용을 잠깐 간추려보자면 (어차피 진화론의 주요 이론들의 약술이겠지만) 이렇다. 본의 아니게 리뷰가 평소보다 길어질 듯하다.

 

 

*   *   *

 

 

  변이, 유전, (한정된 조건 속의) 경쟁, 그리고 (경쟁의 귀결과 다름없는) 자연선택이 바로 진화의 필요충분조건들이다. 새삼 우리는 서로 다르다. 일종의 나비효과와도 같이 게놈(genome)이 유전자풀(gene pool)에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관절 변화는 왜 일어날까? 조금이라도 진화론에 대해 들어본 이라면 바로 답할 수 있다. 생존과 번식 때문이다. 살아남아야 하고, 자손을 퍼뜨려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하게 환경에 적응하고, 형태와 능력을 개발하는 생물과 미생물의 양태들을 우리는 이미 여러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만약 생존과 번식이 최대의 목표라면 모든 종은 완벽하게, 아니 그것이 무리라면 적어도 ‘우수하게’ 진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매양 그렇지만은 못하다. A라는 환경에서 우수하게 적응한 생물이 B라는 환경에서는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환경은 변수(variable)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계속된 조류 인플루엔자 파동 때에 닭들을 모조리 생매장 처리한 것이다. 하우스에서 기르는 닭들은 자연선택으로 진화한 닭이 아니다. 인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든 ‘피조물’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없다. 만약 닭 한 마리가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렸다면 대부분의 닭들이 바이러스에 그대로 노출되어 감염된다. 가족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콜록콜록”거리지 않는다는 것과 대조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온통 바이러스에 감염된 닭들이 인간에게 위험한 까닭은 조류 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도 감염되는 일명 ‘인수공동바이러스(zoonosis)’이기 때문. 결국 닭들은 생매장됐다. 이런 일은 내일이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저께에는 중국이 이 바이러스 때문에 국가비상사태에 빠졌다.

  최재천은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섞어야 건강하다.(48쪽)
  맞춤형 유전자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겠다는, SF영화들이 고발한 인간의 무모한 욕망이 어떤 미래를 낳게 될 것인지는 생매장된 닭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인간도 진화한다. 하지만 그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이를 무작위 걸음(random walk)이라고 한다. 자연선택과 함께 진화론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를 이해하면 ‘임의’라는 것이 진화를 일종의 ‘잡아둘 수 없는 공기’처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화에 방향성이 없다는 것은 곧 ‘목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 다윈도 일찍이 진화론에 걸맞은 용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큰 고민을 했었다. 지금이야 우리는 ‘진화(evolution)’라는 용어를 별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만 사실 이 말에는 방향성이나 목적성이 내포되어 있다. ‘진화’의 어원이 되는 evolvere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윈은 이를 ‘transmutation’이라든지,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고, 즉 ‘돌연변이’나 ‘수정된 상속’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내며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탄압이 들어오지 않은 까닭은 사람들이 ‘진화’에서 종교적 목적성을 멋대로 도출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로 말하건대, 무목적성의 ‘진화’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과학이론들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는 몇몇 시도들에게 독자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이다.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으나, 과학이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사회과학이론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량 차이가 매우 심하다. 한 교수는 내게 “인간을 물 분자 크기로 줄여서 자판기 종이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엔트로피> 리뷰를 참조) 현대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의 무목적성에 대해 동의한다.


  만약 목적이 있다고 하자.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인간우월주의에 빠져서 말이다. 예컨대 우리의 ‘눈’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숭배하면서. 하지만 인간은 상당한 진화의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날개도 없다. 아가미도 없고, 지느러미도 없다. 즉, 날지도 못하고, 수중생활을 하지도 못한다.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시세포도 없다. 오늘날에도 지적설계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가장 비근하게 예로 드는 인간의 위대함은 앞서 말한 것처럼 눈인데, 최재천은 눈의 불완전성과 불합리성을 말한다.


  나도 평소에 한 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왜 뒤통수에는 눈이 없는가? 나 같이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는 사람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제약이 있다. 기도와 식도가 교차하는 것 말이다. 사래가 걸리면 죽을 맛이지 않은가. 털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들이 많은데,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은 적어도 동토층에서는 살지 못하도록 진화한 듯하다. 핀란드 사람들은 한 겨울 사우나를 하고 곧장 근처의 얼어붙은 호수로 뛰어들곤 한다. 그것도 한 두 번이면 족하지, 계속 있으면 얼어 죽는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가 “자연선택은 진화적 땜질이다.”라고 한 말이 맞다.


  2004년 Human Genome Project의 결과로 인간의 유전자수는 벼(5~6만개)보다도 적은 2~2만 5천여 개로 밝혀져 인간우월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아마 그들은 인간의 유전자수가 그 어떤 개체보다도 많을 것이라 예상했는가 보다. 하지만 그들은 유전자가 조합의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수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조합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가령, 유전학에서는 유전자 A가 여러 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다면발현과 한 형질의 발현에 여러 유전자들이 관여하는 다인자발현을 나눠 설명한다. 이렇게 대단히 복잡한 유전자와 형질의 발현은 그저 강처럼 “구불구불 흘러갈 뿐(99쪽)”이다. 이를 ‘적응’이라고 바꿔 말해도 된다.


  이밖에 여러 이론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다윈의 진화론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정작 다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최대의 고민이 있다고 털어놨다. 두 가지, 바로 이타성과 성적 이형성이다. 도킨스의 말처럼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와 어울리는데, 인간을 포함한 몇몇 개체들은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왜 그럴까? 그리고 왜 성(性)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일까?


  먼저 이타주의(altruism)을 살펴보자. <종의 기원> 1판 9장에 보면 이타성은 다윈에게 “언뜻 극복하기 힘든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208쪽)”라고 묘사된다. 그런데 이타주의가 이기주의보다 생존이나 번식에 있어 더 적합한 사례들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이는 더 이상 진화론의 골칫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타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공식도 있다. 윌리엄 해밀턴은 ‘rB>C’라는 공식을 제안했다. 이는 ‘친족 이타주의’를 설명할 때 쓰였는데, 풀이해보자면 ‘근친도’와 ‘이득’을 곱했을 때 그것이 ‘비용’보다 크다면 이타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재천은 개미와 말벌 등의 수컷이 반수 배수체(haplodiploidy, 염색체 n=23만 갖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복사체를 퍼뜨리기 위해 각각의 사회에 복종하며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최승호 시인이 “알이 닭을 낳는다.”고 한 표현을 그는 좋아한다고 했다.


  로버트 트리버즈의 호혜성 이타주의도 있다. 일명 ‘계약 이타주의’라고도 불리는데, 피가 모자랄 때에 서로 나눠먹는 흡혈박쥐와 청소놀래기 등을 우리는 쉽게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고기인 내가 입 안에서 기생충을 먹던 청소놀래기를 먹는다면 점점 청소놀래기들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이 낮아질 것이고, 결국 기생충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개념과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청소놀래기들이 나에게 오지 않는 것은 일종의 ‘보복’ 행위도 같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즉 ‘TFT’인 셈이다. 이러한 이타주의는 인간의 사회성으로 더 잘 설명이 된다. 니체는 약자들이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계약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으로 성적 이형성이다. 말이 어렵지, 앞서 풀이한 것과 같이 다윈이 궁금했던 것은 “왜 성이 서로 달라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이 당시 우습게 들렸던 이유는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물론이고, 식물과 균류 등 개체의 다수가 유성생식하기 때문이다. 유성생식은 유전자의 손실을 가져온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정확하게 각각 50%씩 갖고 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50.1%를 받고, 어머니로부터 49.9%를 받는다면 지금의 ‘나’가 있을 수도 없다.) 친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만약 그들이 자신의 유전 형질을 손자에게 아주 잘 물려주고 싶어 했다면 그들은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물려주려고 해도 그들의 유전자는 나에게 정확하게 겨우 25% 밖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더 실망할 것(12.5%)이 분명하다. 이는 번식에 있어 유성생식의 생태적 비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많은 개체들이 유성생식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맨 위에서 살펴본 ‘변이’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성생식 개체군은 절멸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의 등장을 ‘기생충(혹은 병원균)과 숙주의 공진화’로 보는 매력적인 가설이 있다. 숙주에 해당하는 우리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을 나눴고, 기생충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진화론이 ‘수컷들의 약점’을 발견해 남성중심사회로부터 반감을 산 역사적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성의 선택권은 언제나 거의 암컷에게 있다는 다윈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이 인용하기에 아주 좋은 이론인 것처럼도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보다 많은 여성의 몸을 빌려 번식 성공도를 극대화하려는 남성들의 경쟁의 역사라는 것이다.(166쪽)
  이는 로라 벳직(Laura Betzig)의 말인데, 이것이 비단 인간의 사례만은 아니라는 실제 여러 예들이 있다. 밀회장소를 만드는 정자새(bowerbird)의 일화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 새의 눈물겨운 구애 행동을 가족과 함께 다큐멘터리로 보면서 “참 용 쓴다.”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 아니면 사자의 사례도 있겠다. 왕의 영역 언저리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가 ‘된통’ 얻어맞고 상처투성인 채로 쓸쓸히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늙은 수사자의 모습 말이다. 19세기 의학의 발달로 인해 gender가 sex의 연장선상으로 여겨지는 사회풍토, 현화식물에게 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는 발견, 그리고 다윈 이론으로 설명하는 동성애의 진실 등도 흥미로운 읽을거리이다.


  그 밖에 여러 쟁점들이 있으니, 하나씩 음미하고 필요하다면 곁가지로 알아둘 정보를 검색하거나 진화론과 관련된 여러 번역서들을 읽는 것도 좋다. (하지만 대개 번역의 문제가 지적된 바 있는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재천이 우리나라 학자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이 나와서 하나 소개하는데, 최재천이 세균과 페니실린의 전쟁을 빗대어 오용과 남용을 비판한 챕터는 다큐멘터리 <감기>와 함께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감기약으로 항생제를 준다. 네덜란드의 한 의사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자 그가 혀를 차면서 놀라는 장면은 뭔가 우리나라의 관행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씁쓸하게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환자들도 많은 약을 처방받을수록 대체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    *    *

 

 

  이 책을 과학 자체에 대한 흥미만을 견지한 채 접하면 보다 깊은 생각을 해볼 기회를 잃게 된다. 때문에 최재천은 책의 후반부에 거의 철학에 가까운 난제들을 진화론적 사고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는지 소개한다. 그 방법과 문장이 어렵지 않으니 혹 과학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울이 될 것이다.


  나름 그 난제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키워드를 요약해보자면 ‘문화’, ‘경험’, 그리고 ‘자유의지’를 꼽을 수 있다. 처음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문화’는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우리에게 친숙한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그 때의 반향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그와 비슷한 충격을 나는 철학 강의 때에 본 한 영상에서 받았다.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먹는 일본 원숭이들을 본 것이다! 에릭 홉스봄이 “전통이란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과 비유해봤을 때, 문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험’은 진화론자들 중 일부 ‘유전자 결정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이다. 그들은 유전자가 유전의 전부라고 여긴다. 최재천은 대표적으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을 소개한다. (그 내용은 다소 어렵다.) 그러나 최재천은 그보다는 우리에게 흔히 용불용설(use and disuse)로 알려진 라마르크와 다윈의 공통점을 ‘경험’이라고 설명하면서 진화론의 절대주의를 뒤로 물린다.


  ‘자유의지’는 세 가지의 키워드 중 가장 철학적인 단어일 것이다. 자유의지의 반대개념은 결정론. 인터넷 검색창에 ‘결정론’을 치면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결정론을 만날 수 있다. 무엇이 무엇을 결정한다는 개념, 혹은 총체적으로 이미 결정된 무언가가 있다는 개념은 흡사 종교의 내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종교의 틀에서 벗어난 결정론들도 많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결과는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에게는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최재천은 이것이 ‘explaining brain’을 만들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또 다른 종류의 환경(284쪽)”이 된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변수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이는 알바 노에(Alva Noe)가 <뇌 과학의 함정>에서 우리에게 뇌 그 자체가 아닌 뇌가 작동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일치하고, “마음, 즉 의식은 두개골 속에 갇힌 채 일어나는 뇌의 신경활동을 넘어선다.”는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무언가를 맹신하려는 우리의 오만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이렇듯 언제나 ‘변수’이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궁극 중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    *    *

 

 

  후기의 내용이 두서없이 정리된 까닭을 이 책의 구성 탓으로 돌려 소심한 핑계를 대본다. 워낙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된 터라 나의 재량으로는 거칠어지는 리뷰를 순일하게 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고백하건대, 독서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아는 대목에서는 흥분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연결해보거나 다른 책들을 들춰보기도 한다. 나는 매트 리들리의 <게놈>,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와 <만들어진 신>을 곁에 두고 봤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책들을 서재에서 꺼내 곁들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종종 이름 모를 시기심이 발동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과학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있었구나 싶다.


  그러나 지식의 일면들은 이면지에 정리해둔 것으로 족하다. 그것들을 다 기억한다면 준(準)생물학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책을 읽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한다든가, 우월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다시 카오스로 회귀한다든가 하는 일종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마 최재천의 집필의도와도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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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2012.07.05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4권]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유명한 왕의 셋째 아들이 데리고 있는 궁녀였다. 하루는 어떤 선비가 궁에 찾아와 시를 짓는데, 그녀가 벼루에 먹을 가는 시중을 들게 되었다. 선비와 그녀는 첫눈에 반해 서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 왕의 셋째 아들은 둘 사이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마침 여인이 선비를 보고 싶어 궁을 몰래 빠져갔으나 한 종놈의 밀고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물증을 얻게 된 왕의 셋째 아들은 크게 진노하여 그녀와 다른 궁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다. 다행이 궁녀들의 애긍한 설득으로 화를 푼 그는 그녀를 별궁에 가 뒀다. 가슴에 난 구멍을 그녀가 어찌 막을 수 있었을까. 결국 목을 맸다. 소식을 들은 선비는 절에서 향을 피워 그녀를 기린 뒤, 그녀의 뒤를 밟았다.


  일상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조각들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트린다. 하지만 책 앞에 앉아, 자욱한 물안개를 거두는 햇빛을 기다리며 옛 추억을 되살려보면 그것들이 선명하게 돌아올 때가 있다. 고전문학은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학창시절의 고리타분한 무언가로 기억되던 그것을 새삼 진심으로 읽게 되는 때. 그렇다. 저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비극, 조선 유일의 비극 소설 <운영전(雲英傳)>이다.


  나에게 ‘궁녀’는 운영의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을 섬기고, 문예에 능하여 흡사 ‘해어화(解語花 :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보통 기생을 일컫는다. 원래 당 현종이 양귀비를 부를 때 썼던 말이다.)’를 연상케 하는 그녀들. 치열한 궁궐의 삶을 버텨가며 느꼈던 엄청난 (목숨을 건) 긴장과 암투, 살육. 폐쇄된 집단 속에서 어떠한 불합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지 조금이나마 느낀 나의 경험으로, 그녀들의 삶은 압축기 속의 답답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만면에는 미소를 머금거나,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때문에 나는 궁궐이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부족한 이해에서 연유한 이미지, 오해 그 자체이겠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약간의 낭만을 덜어내야 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가마 옆을 종종 걸음으로 쫓아가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신명호氏의 <궁녀>를 읽기 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궁녀에 대해 위처럼 정리해봤다. 과연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학자의 객관적인 (하지만 학자적 애정이 풍부한) 시각으로 고증된 궁녀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최근 궁녀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에서 비춰진 잔인한, 혹은 에로틱한 모습은 정말 그녀들의 실제일까? 나는 들여다봐서는 안 될 구멍을 엿보는 것처럼 한 장 한 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이 왕족의 삶과 매우 밀착된 일상을 보내면서도 넘어서는 안 될 마지노선을 지켜야만 했던 것처럼, 이라고 비유하면 어울리는 모양새일까.


  두괄식으로, 이 책에서 느낀 바를 다소간 요약하자면 일단 그녀들의 삶을 절반 정도는 이해했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머지 절반은 궁녀에 대한 고증자료의 빈약한 수량(신명호氏가 믿음직한 자료로 선정한 것은 <실록>, <계축일기>, <인현황후전>, <한중록> 등이다.)으로 인해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실제’들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또한 저자가 상세한 문헌들을 쉬운 말투로 소개하며 독자들의 이해를 확장시킨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가 밝혀낸 그녀들의 삶은 우리에게 쉽게 체감되기 힘든 것이라, 때론 그 이해가 또 다른 신비를 낳기도 한다.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궁중 생활의 민낯”과 “조선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치부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드러나더라도 끝내 치부로 남아 있는 것.


  1장에서 궁녀의 실체를 알아내야 하는 역사학적인 이유와 고증 작업의 방법을 소개한 그는 대표적인 우리의 오해로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든다. ‘역사를 빛낸 100명의 위인’인가,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위인 이름 외운다고 즐겨 불렀던 그 노래에도 “삼천궁녀 의지왕”이라는 가사가 명확히 들어 있다. 저 레퍼토리가 궁녀의 비극적 이미지를 유행처럼 퍼뜨렸던 것일 텐데, 이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 위해 저자는 2장에서 대표적인 궁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 중 내가 아는 사례는 장녹수가 유일했다.)


  세종과 행복한 삶을 보냈던 신빈 김씨(본래 소헌왕후의 궁녀였다. 소헌왕후는 세조와 안평대군의 어머니이다.)의 이야기, 광해군의 ‘그녀’ 김개시의 이야기,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도모한 고대수의 이야기, 명나라에 가서 영락제(명나라 제 3대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씨의 이야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였으나 천주교 금지령(1612년)으로 인해 유배된 오따 줄리에의 이야기, 쑤저우 출신으로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의 ‘귀국선물’이 되어 조선으로 들어온 굴씨(그녀의 묘는 필자가 사는 일산과 꽤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의 고양외고가 있는 대자동 일대이다.)의 이야기 등은 그녀들이 실제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3장부터 6장까지는 궁녀들의 삶을 문헌고증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공간으로, 접하기 쉽지 않은 자료들을 간략하게 읽어볼 수 있다. 궁녀를 발탁하는 과정, 궁녀의 종류, 입궁의 제한, 일과 근무지, 궁녀와 하녀의 관계, 월급, 재산, 패션, 동성애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하나하나 꼼꼼하게 정리해 다시 한 번 되새겨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마다 성향이 다르니, 이 책을 읽고 오해가 어느 정도 이해로 교정되는 정도들도 편차만별일 것이다.


  나처럼 고등학교 시절의 어렴풋한 이해(‘역사관’이라도 할 수 없을 취약한 이해)로 책을 읽으며 더러 “역시 그랬군.”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대개 “그랬던 것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겠고, 본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일찍 책을 덮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 책을 읽든 간에 독자들은 서문에 적힌 저자의 의도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그는 “조선 시대 역사 자체까지도 상상의 영역으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부분의 오해가 전체의 오해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접하는데 있어 픽션만큼 매력적인 통로도 없다. 소설 읽는 것보다는 드라마나 영화 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그 드라마와 영화가 소설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보기 전에 ‘사실(史實)’이 적어도 두 번 이상 각색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물론 이러한 복잡한 생각을 픽션 감상에 일일이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고, 때론 억지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힘들다.


  하지만 역사는 픽션이 아니다. 누리꾼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이겠으나, 한 초등학생이 시험에 나온 “한글을 창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라는 주관식 문제에 “한석규”라고 답을 썼다는 일화는 과소평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일반인들에게 역사공부를 강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적어도 올바른 역사를 판명하려는 역사학자들의 노력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신명호氏는 무명(無名)의 역사에 눈을 두려는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으레 그러는 것처럼 서문을 한 번 더 읽다가 “이 책이 이름 없이 살다 간 수많은 궁녀들 그리고 그 궁녀들이 살아갔던 한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는 구절에서 순간 먹먹해졌다.


  출판광고계에서는 역사적 자료를 모아 쉽게 소개했다는 것을 이 책의 의미라고 대체로 선전하는 모양이다. 독자인 우리는 그 이면의 의미를 찾아서,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찾아서 조금 더 걸어 가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만약 경복궁이든지 창덕궁이든지, 아니면 다른 궁을 갈 기회가 있다면, 머리를 조아리고 궁내 모든 비밀을 함묵하며 그 역사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름 모를 그녀들을 한 번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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