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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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심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선언을 좋아한다. 우리가 비근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우대되는지 모르는 그런 개념어들이 실은 플라톤의 어깨 너머에 있을 뿐이라는 식의 선언 말이다. 미술이론을 조금이나마 공부했고, 그것을 동경했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곰브리치의 저 선언은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실은 나 자신이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한다는, 조각 역시 하지 못한다는, 벽돌 한 번 쌓아본 적이 없다는 한계에 자주 시달렸었다. 이는 예술 분야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미술가들에게는 없을 수 있는 ‘작품과의 어떤 객관적 거리’를 내가 가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미술 속에 들어가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탓에 “미술의 바다 위를 방황했다.”는 식의 회상들을 나는 곧바로 지워야만 했다. ‘미술의 바다 위’는 사실 사막의 신기루였던 것이다.


  미술에게 보낸 지난 2년 반의 집중과 헌신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견고한 시각들을 줬다. 세세한 것에게 애정을 기울이고, 큰 틀을 다시 바라보는 예술의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이 모든 공부의 시작인 곰브리치의 이 책은 나에게 특별한 책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기의 일부분이다. 미술사를 나처럼 막연하게나마 동경했었다면, 이런 유치한 수준의 자기고백에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    *    *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곰브리치의 서문은 이 책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단, 미술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을 ‘기호(嗜好)’나 ‘시각(視覺)’ 등의 단어로 바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이라고 해서 저자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새삼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깨달은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의 시각이 우리가 지닌 ‘여러 시각’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것들은 취향과 편견의 틀을 거쳐 인식된다는 것이다. 장담 한 번 해보자. 만약 현대인들에게 숙고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상당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멤링의 그림보다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좋아함’의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어서 별다른 장애 없이 우리의 ‘감상’이라는 영역을 확실히 점령한다. 곰브리치는 그런 우리에게 시간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부탁해본다. 그렇다면 멤링의 그림 역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곰브리치의 부탁은 앞서 말한 나의 첫 번째 깨달음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부탁을 수행할 넉넉한 시간을 우리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두 번째 깨달음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기호대로 산다는 것을 - 사실 미술작품 관람에 있어 기호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건강이나 도덕에 잘못된 영향을 주는 아니므로 - 만류할 수는 없다. 작품 감상은 옳고 그름[是非]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는 퍽 아쉬운 면이 있다는 것이 곰브리치에게서 뽑아낸 나의 지론이다. 우리는 대체로 쉬운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는 우리의 삶을 원색적으로 비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여건만 주어진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각자의 삶을 더 깊게 숙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고(再考)라는 것은 몸 바깥으로 튀어나간 어떤 생각을 다시 자신의 몸으로 들여보내서 ‘필터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에게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삶에 있어 자주 권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취향에 의지한 작품 감상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기 힘들다. 미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넓을 수밖에 없다. 이곳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말마따나 “반감을 극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갈림길을 만나면 익숙한, 혹은 잘 닦인 곳으로만 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늘 가르치지 않던가. 하물며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 앞에서는 어떠할까.


  미술의 효용을 주장하는 건 나의 사고에는 잘 맞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미술은 거의 모든 교육의 합치(혹은 매개체)와도 같다. 영국의 한 학교에서 한 장의 그림만을 가지고 여러 과목을 하나로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터너의 <노예선>을 가지고 화가 개인의 삶, 미술사, 기법 등 우리가 보통 미술을 공부하며 일반적으로 알게 되는 그런 지식들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상과 역사의 변천, 인권 등의 문제를 다 같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이다.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뽑아내고, 교훈을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법은 지금껏 통용된 적이 없다. 일종의 교양에 머물었다는 뜻이다. 대학에 가면 이런 종류의 복합적인 교육은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된다. 내가 겪은 바로는 아직도 전공수업의 질적 우위를 주장하는 교수들이 많다. 그것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누는 사고’와 더불어 ‘종합하는 사고’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상 주장하는 바들을 보면 - 굳이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린네의 종(種)분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지난 역사는 칼같이 정리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바람직한’ 인식인 것으로 비춰져왔다. 균형과 경계가 근대사회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줬는지를 이 자리를 빌려 굳이 회고해보진 않겠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심지어 “좋고 나쁜 작품”이라는 획일적인 사고방식마저 학습하도록,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감상인양 권유했다는 것이다. 로제 드 필처럼 화가들에게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아니, 화가들이 교수나 선생에게 작품을 제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미술사상 가장 강력했던 사관(史觀) 중 하나인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이론이 오늘날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해보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와 같은, 흡사 우생학을 떠올리게 하는 가치화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많은 블로거들이 그저 자신이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화가들의 작품들을 객관화시킨 흔적을 볼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이건 중견 평론가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의 객관화된 근거를 5~60년 후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본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까. 설령 그들의 주장이 너무나도 강력하고 튼튼해서 또 하나의 ‘빙켈만적 사관’으로 구축된다고 하더라도 미술은 언제나 객관과 절대의 기준을 깨고 인간이 어디까지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무한의 영역을 유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결정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비록 평론가 수준의 지식이나 사관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들이 취향, 편견, 시각 등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봐온 작품들을 재고하는 힘겹고도 보람된 작업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깨달음의 순간에 정말 필요한 것은 각양각색의 이론들이 아니라, 용기와 양심이다.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 책은 곰브리치가 밝혔듯이 그가 알고 있는 미술에 대해서만 다뤘기 때문에 엄연히 말해 그 ‘Art’라는 것은 그 자체의 하위개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소문자 ‘art’와 대문자 ‘ART’로 나눠 기술하곤 했는데, 사실 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작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을 관통하는 곰브리치의 기본적인 사고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거 좋아해서 뭐해?”라는 주변의 비아냥거림을 기분 좋게 받아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말이 주는 울림은 크다.


  “우리는 꽃이나 옷이나 음식에 관해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pg.33)


  독자들 중 일부는 이미 그 가치를 직접 작품 감상을 통해 느껴봤을 것이다. 이 책은 미술공부를 막 시작한 초년생을 위한 책임과 동시에 그 공부의 양이 상당한 ‘고급반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그 이유는 앞선 인용문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어떨까?


  “미술에 관해서 재치 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pg.37)


  “단어로 표현된 미술은 죽은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나는 있었다. 저 생각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여러 미술서적을 읽어본 이라면 접해봤겠는데, 마테오 마랑고니의 <보기 배우기>라는 책을 읽어보면 곰브리치가 ‘설익은 문장’들이라고 비판한 그런 종류의 비평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 붓는 한 늙은 학자의 응어리진 불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권장되는 경고인데, 미술에게 우리가 화려한 언어를 가져다댈수록 - 물론 그것은 오래지 않아 화려함을 잃고 말 것, 즉 식상해질 것이다 - 미술을 관람하는 우리의 직관적 본질은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 언어들이 미술을 공식화하는 것은 곰브리치의 말마따나 “언제나 실패”했다.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    *    *

 

 

 

  길게 적어 내려왔으나, 결국 곰브리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의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무리한 시도는 어려운 이론조차 속화(俗化)시키곤 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올바른 태도란 늘 참신하고 진심 어린 마음가짐뿐이다. 또한 그런 마음가짐은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감수성을 따라 작품 주변에 놓인 사실들을 조화하여 저만의 해석을 내리는 과정을 진정으로 경험해본 이라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겸손인지를 잘 알게 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pg.36)


  첫 번째 겸손은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 사실 이 점이 굉장히 어렵다. 일반인들은 이런 것들을 습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고, 마랑고니와 같은 보수적인 미술사학자들은 제대로 된 미술요소들을 이해하지 않고 비평을 하는 ‘젊은 비평가’들을 맹비난한다 - 이고, 두 번째 겸손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열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 두 겸손은 지식과 새로운 해석이 나만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재채기’를 방지해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야만 곰브리치가 말한 “새로운 발견의 항해”가 계속된다.


  미술사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작품정보, 작가비교 등 우리가 별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기초지식들은 굳이 이 책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지식들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책 중에서 단연 최고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지식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사관(史觀)의 차이는 있겠지만 최근 서점가에는 다양한 미술사책들이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곰브리치의 책에서는 마니에리스모, 현대미술 등에 대한 질 좋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에 관해서는 오히려 다른 책들을 추천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 시대의 미술을 곰브리치는 - 다른 시대들보다는 - 잘 모른다. 사실 이런 종류의 허점이야말로 역사책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이란 갈림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곰브리치를 만난 후에 독자들은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것이니, 이 책을 그 초두로 삼는 것은 다른 책들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다만 미술공부의 초입에 곰브리치를 만나 그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나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까닭은 언제든지 복기할 수 있는 곰브리치의 서문 때문이다.


  나는 단편적이거나 종합적인 여러 미술사책들을 읽어봤다. 그러나 그들 중 그 어떤 책도 곰브리치의 서문에 비견될 만한 ‘아름다운 글’을 그들의 머리맡에 두지 못했다. 뛰어난 독자라면 여러 책들의 내용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합하여 큰 틀의 미술사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당신이 현명한 독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디 곰브리치의 서문을 여러 번 음미해보길 권한다.


  나는 미술이 아름답다고 늘 믿는다. 그것이 실제 아름답게 보이든, 아니면 추한 것조차 우리가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전환의 힘이 진정 요구되기 때문이든 간에 미술은 수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아도 그 어떤 각도에서든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도 아름답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비싼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힐끗힐끗 보고 지나가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다고 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책을 읽은 이만이 그 앞에 머물며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 나온 예화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는 미술에 대해 실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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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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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7

 

 

  오늘 윤리학 수업이었다. 교수가 한 정당의 여성의원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성범죄문제에 대해 처벌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화학적 거세’보다는 ‘물리적 거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고 했다. 교수는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는 ‘물리적 거세’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손을 들었다.


  교수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주홍글씨’를 예로 들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했다. 하나는 ‘화학적 거세’로 성충동이 완벽하게 완화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범인이 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법의 기능인 예방과 교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런 조건이 있다면, 물론 최악의 범죄였음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가 만약 교화되어 사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체에 일종의 징표가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법이 그로부터 앗아가지 못했던 기본권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났을 때, 물리적 거세의 흔적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교화된 그를 교화되기 이전 상태의 인격으로 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물리적 거세’, 바로 옛날에 사마천이 당했던 그 구형(舊刑)이 근대법이 보장하는 인권의 견고함을 깨고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의 윤리관이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바로 떠오른 직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는 7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중 나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자신도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이는 절반이 안 됐을 수도 있다. ‘물리적 거세’를 찬성한다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교수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는 의견이 나오지 않아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한 의견에 대해 여러 갈래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마다의 개성이 된다.


  문제가 하나 있다. 이렇게 학업을 이유로 여러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유실험을 해보는 것은 건강하지만 막상 사회정책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개성은 선택될 수 없는 의견으로 남게 된다. 마침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중 나는 이를 잘 표현해줄 제목을 하나 찾았다. 바로 <소수의견(손아람 作)>이다. 참 비근하고 새삼스럽다.


  그런데 이걸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 하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정치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는 정치의 진면(眞面)을 파고들어 우리에게 시민적 참여를 유도하는 책이다. 얇고도 깊다.

 

 

 

*   *   *

 


  책의 초반에는 소위 ‘아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간은 ‘복수성(複數性)’을 갖는다. 이것이 정치의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언어’이다. 이를 하나로 뭉쳐보면, “여러 인간이 말을 하기 때문”에 정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말로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개성’이다. 그것은 고유의 것 - 저자는 이를 daimon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했는데 - 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what’보다는 ‘who’를 강조하도록 한다. 우리의 의견은 곧 내가 ‘누구됨’을 타인들에게 알리는 것과 같다. 위에서 내가 ‘물리적 거세’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것은 곧 나의 ‘누구됨’ 중의 일부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 곧 정치가 되는 까닭으로는 아렌트의 ‘인간행위분류’를 들 수 있다. 그녀도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학자인데, 한나는 인간이 labor, work, 그리고 action을 한다고 봤다. 그런데 이 action이 문제다. action에는 ‘말 없는 것’이 있고, 언어행위가 있다. 전자는 반드시 후자로 해명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혹은 사상적 뉘앙스가 강한 것으로 비춰져서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면, 그 행위자는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인간의 망(網)을 거쳐 정치가 되고, 다시 그 정치가 언어로 행해지는 순환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이 많다.”는 건, 혹은 “말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정치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정치가 정지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문제를 우리에게 고민토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정치에게 요구하는 심리는 오랜 정치적 염증의 누적으로 ‘앓이’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지상정이겠으나 - 그걸 누가 모를까! -, 사실 정치에는 진리가 없다. 이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진리는 종결형이다. 그것은 마치 군주와도 같다. 그러나 말은 종결형이 아니다. 쉼표 뒤에는 또 다른 문장이 등장한다. 그것이 곧 일상이며, 정치이다. 진리 앞에서는 우리의 개성을 표출할 기회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복잡다단한 본질, 앞서 말한 ‘인간의 복수성’은 철학보다는 정치에 훨씬 잘 어울린다.


  2장은 사적인 영역이었던 경제가 자본주의 - 이 말 자체가 개인의 자산이 사회자본이 된다는 함의를 갖는데 - 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정치적’이라는 술어가 ‘사회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 - 토마스 아퀴나스의 ‘societas(동맹)’ 번역 구절 "homo est naturaliter politicus, id est, socialis." -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장이다. 이는 뼈아픈 필연적인 역사를 반추하도록 한다. 개인자산이 사회자본으로 바뀌어 공적 영역에서 경제가 운운되었다는 것은 곧 돈이 기준이 되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문가들이 내리는 사회적 차원의 판단과 정치(정책)적 합의의 판단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pg.55)


  3장은 플라톤을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사뭇 재미도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을 본 플라톤이 ‘설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을까?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못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자면, 아테네 시민들은 결코 뛰어난 시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플라톤이 만든 것이 ‘철인왕’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동굴이야기’라 부르는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군주, 군인, 상인이 각각 이성, 의지, 욕망을 상징하는데, 그 군주가 백마(의지)와 흑마(욕망)를 잘 끌어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유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유명함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끌어낸 ‘절대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성공했느냐 하는 판단이다. 이 점에서는 칸트도 충분히 표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이해’와는 무관하게 절대기준이 도입되었을 때, 그걸 수용할 수 있을까? 못 한다면 왜 못 할까?


  플라톤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바로 정치의 진짜 모습이다. 철학은 조용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고요’를 ‘skholē’라고 했는데, 이것이 훗날 ‘scholar’가 된다. 철학이란 관조의 상태이다. 반면, 정치는 시끄럽다. 그리고 사실 철학보다는 정치가 우리의 삶에 더 제격이다. 그래서 김선욱氏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경쟁하는 모습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죽음의 적막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지 않겠는가?(pg.81)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그 옛날에 플라톤이 말한 ‘진리’라는 것이 정말 죽음의 적막을 가져다줬는가? 로크가 사회계약을 설명하며 ‘하느님’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빌려다 썼지만 칸트는 그걸 없앤 채 사회계약을 설명했다. 그 칸트의 ‘정언명령’은 정말 고요한 상태인가? 논란이 꼬리를 물고 현대철학까지 이어져서 칸트식의 설명을 롤스가 ‘정의론’을 통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정치철학사의 중요한 계보학적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저자의 논점에서 벗어났다. 정치와 철학은 체질 상 맞지 않는다. 철학은 강요하면서 정치를 왜곡시킬 수 있다. 플라톤처럼! 그래서 저자는 <국가>가 현대인들에게 답답함을 주는 까닭은 ‘인간 복수성의 묵과’에서 찾는다.


  이어지는 논의는 ‘진리의 판별기준’이다. 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판별하기에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뜻일까? 이런 질문은 이 책의 그 어떤 독자라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은 이렇다. 대응, 정합, 합의. 대응은 말 그대로 A와 B 사이의 일치 여부를 가지고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고, 정합은 논리성을 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의는 어떤가?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와 철학의 교차점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철학에서의 합의는 이상적 대화의 결과이다. 화자인 A와 B가 내용을 교환한다. 당사자의 관계와 대화의 (상황)적합성이 분명 이 대화 자체에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는 이런 이상적 대화가 아니다. 정치는 ‘의견 주장’이다. 다양성이 생명이다. 그건 설득하는 것이고, 동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기준이나 근거는 없다. 따라서 잠정적인 참도, 잠정적인 거짓도 없다. 정치적 ‘합의’는 오직 그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결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대화 자체의 ‘대표성’이다. 정치인이 그것을 대표하게 된다.


  저자는 정치를 ‘예술작품관람’에 비유하며 그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훌륭한 비유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 그럼에도 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 그 ‘준거’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일반성을 갖는다. 물론 엄밀히 고려해본다면 이 개념조차 애매하긴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 세밀함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이 일반성에 따라서 정당의 선호도를 판단하지 않는가? 어떤 준거가 있을까? 왜 우리는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통합당’을 지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질까?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 돌이켜보건대 우리 개개인은 그 정도로 정치에 소위 ‘올인’해서 비판을 하거나 정치적이지 못하다. 대표성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보수성’이든 ‘진보성’이든 그런 단어들은 오로지 ‘공동체 감각’ 내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저자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녀와 저자의 논지는 결국 정치는 진리가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저 대표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하고, 정권을 겨냥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나는 작년 수능 시즌에 한 칼럼을 읽었었다. 한 대학생이 쓴 것인데,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연대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지젝의 ‘지젝거림’ 중 일부로 파편적인 운동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진리적 주장’을 꺼내놓고 그 칼럼을 비판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우리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 철학교수는 내게 “우리 사회가 왜 정의롭지 않은지 아나? 그건 우리가 정의롭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야.”라면서 인간이 평등보다는 자유 - 개성의 드러냄, 타인과의 차이 등 - 를 선호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연대는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했다. 그것을 이 책을 읽은 직후 깨달아 나는 그 대학생에게 -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 보낸 비판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것은 식자층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식자층뿐만이 아니라, 이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충격이었다. 바로 ‘아이히만’ 해석 말이다.


  내용은 차치하겠으나, 그 요는 ‘평범한 악’이다. 우리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아마 지구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설명해준 것이었다. 사실 ‘수싸움’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여럿이 함께 생각하는 삶”이 역사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가스밸브를 잠갔는가?”를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확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 ‘확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높은 신뢰를 준다. 이건 자명한 사실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눈이 여러 개일수록, 쉽게 말해 연대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정치 환경은 더욱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대가 이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각해보건대,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대는 회사의 이익, 지역의 이익, 학교의 이익 등 일부 집단들의 제한적 이익을 부르짖는 연대일 수가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저자가 ‘세계연대’라고 말한 초국적 연대도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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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1
채만식 지음, 이주형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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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가 우리나라에서 ‘미술특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적이 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사이먼 특유의 명쾌하면서도 감성적인 해설을 본 사람들은 근래 보기 드문 ‘미술비평의 수작’이 출현했음을 반가워했을 것이다.


  나는 마크 로스코 편을 유독 기억한다. 그 편에서 사이먼은 초두부터 이런 질문을 툭 던져놓는다. 누군가는 그걸 우문이라고도 하겠다.

 

  “예술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사이먼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본다. 혹시 우리가 그런 질문을 보통에는 쉽게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가 예술의 등받이에 올라 세상을 한 바퀴 휘 둘러볼 때면 그 크기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본래 인간이 그 크기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거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곁에 두고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예술을 대할 때에는 그것으로부터 받는 느낌이라도 간소하게나마 정리해야 나중에 가서 저런 질문을 받았을 경우 자신의 사변을 미지의 호수에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하루 한 번 딱 보고 마는 것도 어리석인 짓이겠거니와. 그렇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묻고자 했다. <태평천하>. 말만 그러한 제목. 실은 빈껍데기일 뿐인 저 제목. 채만식(蔡萬植)의 이 소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문학이 전쟁을 끝냈다는 이야기는, 나는 듣지 못했다. 혹 수소문하여 누군가에게 소식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비근한 사례가 아닐 것임을 거의 확신한다. 새삼 흔히들 드는 명언이지만 - 누가 그랬더라? -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했더니, 웬걸 우리의 식민지 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종결되었을 뿐, 내로라하는 문사들의 연재소설들은 시대를 바꾸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그걸 “읽은 사람”이 제대로 된 생각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서 통속소설이 그렇게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대의 카프도 실패하고, 도대체 무엇이 이 땅에서 문학의 후임이 되겠느냐 했었을 때, 채만식의 <태평천하>로 대표되는 그것이 득세했으니, 그것이 바로 풍자소설이다. 풍자는 소살(笑殺), 말 그대로 “웃고 마는 것”이다. 그냥 만다. 그러고 만다. 이 땅에는 윤직원 영감 같은 이들이 수두룩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리얼리티는 그래서 쓴 맛이 난다. 지금 우리가 읽기에도 그러한데, 그걸 쓴 채만식의 속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기막힌 표현이 많아 웃고 또 웃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뭔가 자윌 해보자면 나는 채만식이 말하고자 한 바를 꼭꼭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버스에서, 강의실에서, 침대에서 나는 - 옛 어휘들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마는 - 돈 한 푼 아끼려는 만석꾼 윤직원 영감 흉내도 내가면서, 종수 흉내도 내가면서 도박하는 양 어투도 조금씩 바꿔가면서, 태식이 따라 천치인 듯도 해보고, 그걸 쥐어박고 싶은 경손이도 흉내내보고, 하여튼 요리조리 돌려가며 재밌게도 읽었던 것이다. 그 때에 이런 소설을 - 도대체 ‘그 때’가 뭔지 나는 당최 모르겠지만 - 쓴 채만식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서 오고가는 실랑이나 천태만상의 하나하나가 귀여워도 보이고, 사람더러 셰퍼드 같다고 한 구절도 그렇고, 혹은 서울아씨와 대복이 사이의 그렇고 그런 감정을 보고 “호르몬 분비의 명령인 한 개의 커다란 필연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던 것”이라 꾸민 구절도 그렇고, 속속들이 이 소설에는 재미가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었다.


  다 못난 사람들이다. “저게 가족인가?” 싶기도 하면서 슬며시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것이 저 꼴이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 한 것은, 한편으로는 저런 집이 한 두 가옥이었겠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강점기의 급변하는 사상이나 환경 속에서 거의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을, 그렇다, 그때 생각해보면 살짝 그걸 비꼬아놓은 채만식의 솜씨에서 애긍한 감이 올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수부귀다남자’라 하면 뭘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말이다.


  종학이가 사회주의에, 윤직원 영감이 부랑당패라고 맹비난하며 오히려 강력한 일본제국을 칭찬하게 된 그 배경인 사회주의에 빠져 갑작스럽게 소설은 이 노인네의 울부짖음으로 끝맺는다. 그의 절규는 사뭇 복합적이다. 뜻을 헤아리면서 읽다보면 그 어떤 구절들보다도 독자의 미간에 긴장을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나는 느꼈다.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고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윤직원 영감의 발광이다. 종학에게 줄 돈은 사라지고, 이 손자는 삽시간에 ‘죽일 놈’이 된다. 가솔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영감은 퇴장했어도 몸 둘 바를 모른다. 나라든 가솔이든, 그걸 말아먹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그런 바로는 진시황이 윤직원 영감보다는 행복하다는 채만식의 평에서는 망해가는 역사가 보인다. 망국(亡國)을 하여도 망가(亡家)는 하지 않겠노라고 돈을 붙잡고 고집부리는 저 만석꾼도 그렇고, 그 밑 사람들도 도통 시대의식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다 망했다.


  채만식은 독자들을 웃기고, 그 웃음은 독자들을 달래어준다. 한판 크게 웃고 나면 뭔가 살아갈 힘이라도 나는 것이 이치인 것을, 그러나 아홉 달 간 《조광》에 연재된 이 소설이 풍자한 세계의 그 사람들은 조금씩이라도 움돋았을 그 힘을 어떻게 쓰고자 했을까. 이렇게 묻는다. “보소, 당신 잘못 살고 있소. 거 망해가는 꼬라지의 땅에서 그렇게 히히 헤헤 웃고 있으면 하늘에서 태평천하라도 떨어진단 말이오?” 그러나 웃을 뿐, 답이 없다. 이런 시대의 탈출구는 문학이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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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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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6

 

 

  곧 개강이다. 나는 방학의 마지막 책을 고르고 있었다. 책꽂이를 훑어보면서 나는 되도록 얇은 책을 손에 쥐려고 했다. 개강 전날인 내일은 책 읽을 정신이 아닐 듯했다. 토요일을 틈타 유종의 미를 짧게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겉표지의, 한편으로는 새삼스럽기도 한 제목의 책을 집었다. 10년이 넘으면 속지가 누렇게 변하는가보다. 1판 1쇄, 2000년 발행.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런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책에 끌린 것은, 예삿일은 분명 아니었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두 장 선 채로 천천히 읽다가, 오전과는 딴판으로 더웠던 오후의 변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방바닥에 오래된 치즈조각마냥 찰싹 붙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베개를 책상 삼아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픈 구절들이 많아 이면지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방학 중에 읽고 리뷰를 쓴 책이나, 리뷰 없이 메모만 적어둔 책들을 통틀어서 이 책을 나는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그 편안함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전의 경험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를 읽었다.

 

 

*   *   *

 

 

  이 책은 말 그대로 그녀가 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가를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밝힌 책이다. 그녀의 경험들 속에는 열정과 헌신의 이유가 솔직하게 적혀 있고, 독자들은 왜 그녀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인 구달’이라는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는지 차츰차츰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영적 평화’라는 개념 - 그녀는 이 책에서 항상 그것이 특정 종교의 해석이 되지 않게끔 주의하는데 - 은 자연과 그녀 사이를 이어주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건, 아마 누구나 체감할 수 있겠지만, 그 이해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어린 시절, 제인의 인격을 만든 여러 가지 추억들을 나열해보면 그녀가 어떤 인물이 될 소녀였는지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목사 집안인 외가, 타잔과 <정글북>을 좋아하는 소녀, 대자연에 대한 시를 종종 쓰던 소녀,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 종교에 대한 회의와 한 목사에의 동경, 성서 독해, 폐허가 된 쾰른 방문, 신지학,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아프리카 방문과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와의 만남,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


  그녀가 케냐 캐슬호를 타고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케냐의 몸바사까지 가는 긴 항로 - 원래 수에즈 운하를 지날 계획이었는데, 당시 이집트 전쟁으로 운하가 봉쇄되었다. - 에서 바다의 위대함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낭만을 꿈꾼 것이 아마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반복해서 회고하듯 홀로코스트나 차별, 박해 등은 그녀가 훗날 침팬지를 연구하며 갖게 된 인류에의 희망이 나온 검은 웅덩이, 악의 원천이었다.


  책의 104쪽에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는 침팬지 사진은 지금은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곰베에서 찍은 사진인데, 침팬지의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제인은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최초로 보고한 학자였으나,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녀가 연구원의 신분으로 제출한 보고서는 곧바로 회의론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에게 침팬지 연구를 권유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발견을 두고 인류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놀라워했으나, 다윈의 연구가 그러했듯이 제인의 연구 역시 지성인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생소하고도 다소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례보고였다. 1970년대의 이 해프닝은 ‘악의 뿌리’라는 장에서 상세하게 다뤄졌으니,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주류과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 사실 그녀는 흰 옷을 입은 과학자들을 한동안 ‘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 그녀의 ‘감정이입’이 된 연구는 과학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지적 연습이 경이의 일부를 훼손시킨다.”며, 이 ‘경이’야말로 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다. 나는 이 생각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반려동물과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이라면 제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들을 가족이라 느끼고, 어느덧 ‘동물 취급’하지 않는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인이 ‘고대의 언어’라 말한, 말없이 눈과 마음, 그러니까 영적으로 서로 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지금 과학이 중시하는 그녀의 발견은 바로 과학이 배척했던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오랜 연구가 진행되던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는 결혼에서 이혼으로, 곰베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여자에서 어머니로 그녀의 삶이 뒤흔들리던 때였고, 그녀의 글들로 미뤄보건대 내 생각에 그때 그녀는 어떤 책임의식에 대한 통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의식들은 이 한 문장으로 모아진다.

  “확실히 인간 종 -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와는 상관없이 - 의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그 존재의 지속이 위협받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pg.134)


  인간을 신이 만들었든 그렇지 않았든, 혹 누군가가 신의 여부를 믿든 안 믿든, 작금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자명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녀의 희망의 한 축을 담당한다. 맺는 글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장에서도 그녀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의 세태가 어떻다고 생각한 것일까? ‘전쟁의 전조’는 그에 대한 그녀의 간결하고도 명백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것은 ‘문화적 종분화’라는 개념이다. 그녀는 그렇게 부르나, 대체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라고 하는 이 개념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구별하는 (집단)이기주의이다. 그녀는 오랜 연구 끝에 침팬지의 사회에도 그러한 분화의 전조가 있었다며, 그런 전조는 대개 두 집단으로 나눠진 사회에서 발견되었고, 두 집단 사이에서는 충격적인 공방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의 공격은 단순한 차원이었다. 그녀는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며, 인간의 문화적 종분화는 인간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세계평화의 장벽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집단이기주의, 혹 그러한 ‘이기성’은 도킨스가 써서 큰 파장을 일으킨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것처럼 인간 본연의 이기적 특성에서 나온다. 제인도 그에 동의하는 편인데, 사실 그보다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한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그녀는 도킨스보다는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 쪽이다. 그렇다고 도킨스를 ‘이기주의 지지자’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는 순자와 닮았다. 원래 악하니 도덕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가 유행할 때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타성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행동목적은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것에 있어야 하고, 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 본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서, 그리고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머금고 봤던 그러한 연민, 사랑, 희생들. 이타주의, 측은지심, 의식적인 결정, 영웅적인 행동 등등.


  그리하여 사실 독자들이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장 중 하나는 ‘도덕적 진화’라는 장이다. 나 역시 이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제인은 ‘르콩트 뒤뉴와’라는 의사 출신 철학자의 1937년 저서 <인간의 운명>을 보고 큰 울림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 책에서 르콩트는 인간의 역사를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으로 봤다. 그렇다면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제인은 침팬지들에게는 정의가 곧 힘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면서 19세기 후반의 빈약했던 인권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성취된 인권은 얼마나 높은가를 반추한다. 이 잠재력에 대한 긍정.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확신했다.


  희망을 키워가는 한 방법으로 그녀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라는 장에서 동물보호를 예로 든다. 물론 독자들은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이든 간에 그녀의 말대로 인간의 ‘유일무이성’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오만함을 줄이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한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바야흐로 진정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녀도 낙관이 힘들 때가 있다고 토로한다. 시간의 문제임도 시인했다. 비관은 아주 쉽게 전이되는 특성이 있고, 또한 다수에게 별 어려움 없이 수용된다. 세태가 그렇다. 그러나 원론적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녀의 ‘희망의 이유 네 가지’는 곱씹어봐야 한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 정신. 이에 회의론이 곧바로 질문할 것이다. 그녀가 주장한 동물실험금지, 채식주의 등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이는 내가 <엔트로피>를 읽으며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을 ‘황당하고 대범하며, 결국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기억하고 있는 이유와 닿아 있는 회의일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의도는 우리에게 영감와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대부분이 대의민주주의의 국가인 이 지구공동체에서 현실은 당연히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열정은 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통로인 것이다.

 

 

*   *   *

 

 

  나는 독서를 마치고 잠시 유투브에서 그녀의 동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영어는 짧지만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종종 TED나 FORA.tv의 강의·회의 영상들을 다운받아 챙겨보는데, 내가 기억하는 제인은 매기 스미스와 닮았다. 영화 <해리포터>의 미네르바 맥고나걸 교수 역을 맡았던 그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제인은 모두 영국 사람이고 1934년 생으로 나이도 같다! 여하튼 내가 본 그녀의 강의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녀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 강연이다. 제인은 많은 미국대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특히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그러한데, 나는 슬프고도 화가 납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넘어서’라는 장에서 소개한 그녀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방문기를 떠올렸다. 타협은 무감각이다. 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보여주면 열정은 검은 웅덩이에서 탈출해 각자의 태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섯 마리의 왜가리’라는 그녀의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봤다. 이 시에서 그녀는 왜가리들이 바다와 구름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시간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황진이처럼, 고이 접어뒀다가 후에 적막이 자신을 엄습할 때에 펼쳐보겠다고 다짐한다. 시가 아주 와 닿았다. 그녀가 용기를 얻기 위해 처칠의 명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처럼 나도 이 시의 제목을 어딘가에 적어두고 적막과 회의가 찾아올 때마다 들춰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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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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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2.08.25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1권]

 

 

  가다머는 <과학 시대의 이성>이라는 저서에서 “정신적 객관화로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재인식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객관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과학과 수학일 것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그것은 철학처럼 언어와 말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기호와 서술의 자동화로 이뤄져 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과학과 수학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들은 가다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거의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가다머가 설명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그의 말은 “철학하자.”는 주장이다. 열심히 사유하는 삶을 통해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자기운동’으로 철학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수한 철학자의 논의를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도 한다.


  그가 과학지상주의를 겨냥한 듯 철학의 전면에 나서 그것을 호위하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그의 저 대목에서 - 어려우니 문장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고민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철학의 묘미랄까? - “과연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가다머가 철학의 반대편에 세운 건 실증과학(Wissenschaft)이다. 이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과학’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과학, 즉 ‘자연과학’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그와 더불어 역사학, 언어학, 기하학도 있다. 부분이 전체를 반영한다는 논리로, 나는 “자연과학으로부터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철학(사유)이 결정적인 지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결정적인 동기는 최재천의 <다윈지능>이었다.


  진화론과 유전자학에 따르면 -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 우리는 유전자 정보가 시키는 대로 사는 존재이다. 반대의견이 바로 뒤따를 것이다. 본능의 억제, 인류의 지적 유산, 형성된 인간의 문화 등등. 우리가 이룩하고 바라는 것이 반드시 유전자 정보대로 전개되는가? 이것은 유전자 정보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훨씬 우세하다고 믿는 일종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감성적 방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유가 DNA보다 더 우월한 것인지도, 실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매트 리들리의 <게놈>을 읽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인격 형성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철학자, 용병, 창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란 속설이 있다. 그러나 DNA가 그에 선행한다.


  나의 궁금증을 스스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를 읽어가며 계속되었는데, 사실 그냥 계속된 것이 아니라 훨씬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부터 ‘두 과학자’의 갈라파고스 연구에 이르는 진화론의 ‘전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이 책은 최재천의 추천사처럼 일반 사람도 읽을 수 있는 난이도로 쓰인 책이다. 대중적 과학저술을 생각하는 저자라면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금 말한 ‘두 과학자’는 그랜트 부부를 일컫는다. 남편 피터와 아내 로즈메리는 지금 프린스턴 대학교에 재직 중에 있는 생태학자이며, 진화론의 실측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둘은 갈라파고스에서 무려 20여 년을 보내며 ‘핀치(Finch)’라는 새를 연구했다. 그들의 방대한 연구가 겨냥한 초점 중 주된 것은 바로 책 제목처럼 부리이다. 분명한 것은 “새의 부리가 뭐 대수야?”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읽어가며 깊은 자기반성과 함께 놀라운 지적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다윈의 논리적 ‘믿음’을 밝혀나간다. “종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일종의 ‘성서(聖書)적 질문’이 “우리는 종을 믿어야 한다.”라든지 “종은 신이 만들었다.”와 같은 종교적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진화론의 특징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밝혀지지 않으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과거의 진화론자들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범죄자(일 것 같은 사람)에게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마치 ‘명탐정 코난’처럼 통쾌하게 선언하지 못하는 형사와 같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다윈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지 못해 못내 찜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밝혀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종의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밝혀졌다. 믿음이라는 건초더미에 불이 떨어졌고, 최근에는 진화의 종교적 해석인 지적 설계론이 등장했다. 사실 존 브록만의 <엣지>에 투고되는 학자들의 글만 봐도 그건 학문적으로 논할 만한 가치가 없는 ‘론(論)’이긴 하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다윈, 헉슬리 등 옛 인물들, 그랜트 부부, 그리고 갈라파고스 연구와 진화론에 관련된 학자들의 담화와 책의 구절들을 빌려오면서 진화론의 기본개념들을 인상적으로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설과 같은 구절들에서는 마치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것 같은 놀라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도 있다.


  가령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진화론에는 자연선택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과거에 분화된 종이 하나로 뭉치게 된다는 개념이 있다. 최재천은 이를 그의 <다윈지능>에서 “달라야 산다.”고 표현했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A라는 바이러스는 B1이라는 생물군에 치명적이라고 해보자. B1의 개체들은 A 바이러스를 피해서 B2와 B3로 분화했다. 분화하게 된 것은 외압(스트레스) 때문이다. 이 경우 B1은 B2, B3로 분화하면서 ‘B’라는 자신의 종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B2와 B3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다른 바이러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으로 멸종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만약 B1이 분화하지 않고 버티면 -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 A 바이러스는 언젠가 B1의 멸종을 불러올 것이다. B1의 실패는 곧 B 전체의 실패가 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를 다른 외압으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는 “왜 우리가 등장했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에 대해 명백한 검증을 거친 과학적 개념으로 답할 수 있다.


  “핀치의 부리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강한 선택압은 이 모든 부리가 사라지지 않게 지키기도 한다. 다윈의 과정은 하나에서 다수를 창조했으며, 다윈의 과정은 심지어 지금도 창조활동 중에 있다. 만일 자연선택이 각 섬에서 각 세대에 계속 힘들게 작용하지 않았다면, 다수는 금방 다시 하나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pg.278)


  이것이 진화론이 ‘적응방산’이라고 부르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는 찢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진화와 멸종, 변이가 실제 지구 역사의 전부인 까닭이다. 자연선택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정말 눈물도 피도 없는 냉정한 신이다. 그래서 조너던은 그것을 “창조와 파괴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중재자”라고 불렀다.


  내가 진화론을 조금씩 배워가며 느끼게 된 것은 그것이 현대과학의 열역학과 닮았다는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 아니면 거의 확인할 수 없어서 우리가 도통 모르고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둘의 닮은 점이다. 자연을 보다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도구와 시스템이 개발된 현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개념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건 정말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다행이도 열역학의 법칙들보다 진화론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확인이 가능하다. 열역학 법칙을 확인한답시고 우리가 ‘닫힌계’나 ‘열린계’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반면 최재천이 누차 강조한 것처럼 진화론은 나방의 날개무늬, 같은 종 나무의 지역별 잎사귀 차이 같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생태학자들이 지금까지 진화론과 연관해 진행한 유례없는 방대한 작업이 바로 이러한 ‘실측’이다.


  다윈은 최근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인공선택, 쉽게 말하자면 사육을 근거로 “자연선택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유추를 했다. 여기서 진화론의 근거가 나온 것이다. 그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간 이유는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핀치의 부리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체류기간은 단 5주. 핀치 표본도 겨우 31마리. 또한 핀치연구는 다윈의 감정의뢰를 받은 조류학자 존 굴드가 했고, 그가 핀치 표본을 연구한 후 1837년 1월 10일, “31마리는 12종으로 나뉘며 모두 ‘전적으로’ 새로운 종”이라고 발표한 기사가 뜬 이후에야 유명해졌다. 다윈의 진화론은 본래 ‘선험적 가설’이었지, 엄밀히 말해서 ‘과학’이라 하기에는 전혀 관찰된 바가 없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계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측의 세력은 강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은 종교인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었다. “어떻게? 왜?”에 대한 질문의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다.”라며 배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자연선택과 변이. 이 두 개념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북한산에 올라 의정부 방향의 도봉산, 서울의 은평구, 그리고 송추계곡을 한 눈에 파노라마로 담고 있으면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때 우리가 느끼는 위대함의 바탕에는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어 있는 자연’이 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긴 힘들다. 책장의 책들을 가지런히 꽂혀 있고, 신발들은 신발장 속에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자고 나면 이불을 개고, 더러운 빨래는 세탁한 후에 다림질을 한다. 정리하는 것이 일상인 인간에게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낯선 것이다. 진화생물학의 ‘혜성’이라 불린다는 돌프 슐레터의 말이다.


  “당신은 종이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요동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종은 여러 해에 걸쳐 보면 안정되어 보이죠. 하지만 실제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당신의 생각처럼 안정된 것이 아니랍니다!”


  물리학이 발견한 모든 법칙들이 전 우주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놀라운 원리를 비롯해서 진화론은 물론이고 과학은 우리에게 앞서 말한 가다머의 정의대로 ‘기호와 서술’로 이뤄진 연구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삼라만상의 비밀을 조금씩 눈앞에 펼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비밀을 푸는 코드는 물론이고, 그 방법까지도 과학은 종교와 다르다. <핀치의 부리>에 있는 챕터 중 ‘보이지 않는 문자들’은 DNA를 의미하고, 물리학에서는 우주를 숫자와 기호로 푼다. 실제 그들이 우주를 관찰하겠다고 쏘아올린 보이저호, 그리고 지구를 빙빙 돌고 있는 허블 망원경은 인류가 구사할 수 있는 숫자와 기호의 상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과학과 종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이 설명하는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난해하고, 과학은 너무 어렵다.


  나의 첫 질문이 혹 과학지상주의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으나, <핀치의 부리>를 읽으며 나는 과학적 연구와 이해들이 인간을 타락시켜온 작금의 상황을 사실 ‘과학적 연구와 이해’에게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타락은 도덕의 결여일 뿐이다. 도덕이 과학적 이해와 다름은 명백하다. 과학이 밝힌 바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자연은 우리에게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알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학이 밝혀오고 알아가려는 바가 과학지상주의와 반드시 연결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핀치의 부리>가 아마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가장 인상 깊은 책으로, 나에게는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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