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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2011.12.20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하루에 거의 한 편씩 시를 쓰곤 했다. 나는 시와 애증관계에 있었고, 그것은 나의 계륵이었다. 방문을 닫고 얼마간은 소설만 쓴 적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차츰 알게 되었다. 가끔 작가들 앞이라면 부끄러웠을 정도의 저자세로 작품을 대하고, 미술을 “배운다.”는 취지로 각종 지식을 섭렵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나는 늘 예술을 접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개되어 오랜 시간의 공격, 수많은 눈들의 검열을 거쳤으나 지금껏 명작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은, 혹은 막 그런 위치에 오르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용기의 산물이었다. 나에게 재능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명들의 인정을 안 받아본 것도 아니고, 이름은 낮으나 공식적 자리에서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조차 자만할 수 없었다. 늘 굶주려 있었거나, 아니면 더 솔직하게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리라. 사춘기의 얄팍한 고민에서부터 아직 접해보지 않은 철학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시를 통해 성찰하고자 했고, 그로 인해 분명 보이지 않는 장애를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간 달성한 것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날 일기에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며 작정하고, 창작의 어려움에 대한 잇단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시로부터 밀어낸 것은 요컨대 부족한 사랑과 형편없는 집중 때문이었다. 용기가 있었다면 시를 더 사랑했을 수도, 시에 훨씬 더 깊게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기는 재능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용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재능의 텃밭에선 작물이 두터운 땅을 뚫고 나올 수 없다. 나에게는 잡초만 무성했던 것이다. 잡초를 뽑고 난 뒤 공부한 것이 미술이었고. 그러나 밭의 주인이 해마다 준비해뒀던 옛 씨앗들을 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따금 시를 읽을라치면 먼저 작가의 뛰어남에 혀를 내두르고, 나중에는 “왜 용기의 비는 내리지 않았던가?”며 후회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내려달라 소리쳐 애원한 적이 있기는 했는가? 결국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착실한 독자보다는 더 참여적이긴 해도 예비문학도의 발치에는 가지 못하는 정도라고, 나는 몇 해 전 끈을 묶었다. 그래놓고 남은 미련이 나를 시의 더욱 은밀하고도 가까운 독자로 만들어준 것이리라.

 

 

 

*   *   *

 

 

 

  위의 단락들은 폴 존슨이 쓴 <창조자들>의 서문을 다 읽고, 막 초서를 읽으려던 참에 적은 것이다. 굳이 리뷰를 위해 정리한 생각은 아니지만 써놓고 보니 서문이 됐다. 어떤 독서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장(場)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경향이 뚜렷한 듯하다. 실력을 갖춘 누가 봤다면 괄시했을법한, 그래도 시를 꿈꾸던 나의 옛 경험이 <창조자들>을 읽는데 상상 외의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미경험자가 아니기에 폴이 그의 책에 적어놓은 문학, 미술, 혹은 음악 관련 개념어들과 창조에 관한 관념어들이 살에 달라붙듯 다가왔고, 나 스스로 “나는 저들 중 누구와 가장 가까운 성향이었을까?”를 물어놓고 답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독서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겠거니와 숱한 독자들의 비근한 오류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꿈꾸던 것에 대한 향수를 대신하여 자기평가를 했던 것이니, 이런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쾌락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핑계를 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깊게 따졌을 때, 나는 이들과 견줄 구색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폴이 소개한 인물들 중 나는 미술을 공부한다는 까닭에 뒤러, 터너, 그리고 피카소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 중 처음 듣는 것을 제외하자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어 다소 실망했고, 오히려 나의 관심은 문인들에게 있었다. 요컨대, 나는 문학도의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문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아주 안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인생의 대종(大鐘)을 울릴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작가가 없었다. 몇몇이 기억날 뿐이었다. 시를 외우려는 열정도 없었기에 나는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의 절절하면서도 한국미 넘치는 그 구절들조차 암기한 것이 하나 없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유종호氏가 일러준 대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짤막하게나마 동시(童詩) 정도는 암송해서 좋은 리듬감을 갖춰야 한다는데, 나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게을리 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소설의 기억나는 구절을 대라고 하면 외지 못하나, 그래도 나이폴, 위화, 솔제니친 등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변명거리를 찾아봤자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불러도 어울리는 표현이다.


  사실 초서, 셰익스피어, 엘리엇, 트웨인 등 영어문학의 최고봉들이라 평가받는 거인들의 원어(原語)본을 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지라, 폴이 그들을 평하거나 인용한 부분의 역자 번역 구절을 읽어도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없었다. 받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카라바조에게 감명해서 그의 작품 중 그가 몰타에서 그린 <세례요한의 참수>를, 누구 못지않은 열정으로 소개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그림을 보지 않은 이에게, 그리고 카라바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이에게 그 감동이 전해지겠는가. 초서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로부터 기법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 부분에서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틴어를 배워야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가 방언을 포함해서 약 24,000여개의 단어와 표현을 만들었다는데, 나는 그 수에 혀를 내두를 정도에 족하면 될까? 아니면 그것들을 다 찾아봐야 할까? 또한 그는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지녀 그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넣었다고 하는데, 영시를 접한 적이 거의 없고, 더군다나 영시를 읽을 정도의 언어능력도 안 되는 내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할까? 그것들을 나의 경험과 비교하여 유추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읽는 이들은, 아마 나와 대부분 같은 처지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폴이 열거한 사례들을 하나의 거대한 그릇에 담은 뒤 그것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혹시 모른다. 누군가는 바흐에 정통한 이라, 폴이 말하는 모든 정보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할지. 혹은 다른 누군가는, 예컨대 퓨진에 대해 잘 알고, 건축을 해본 경험도 있어 무릎을 치며 뿌듯해할지. 하지만 대개 우리는 영문학애호가임과 동시에 미술애호가, 거기에다 패션의 역사와 감각을 꿰뚫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을 아주 좋아하고, 더불어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는 동시에 악기를 아주 잘 다뤄 음악을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여기에다 일본 회화사까지 정통한, 소위 말하는 전인(全人)이 아니다. 세세한 정보들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면 앞 문단에서 내가 말한 온갖 불이해(不理解)의 좌절을 겪게 된다. 나는 엘리엇과 제인 오스틴에 대해 잘 모르는 까닭에 대학 논문 몇 편(우리나라에는 엘리엇학회가 있다.)을 찾아 읽었는데 오히려 두 번째 불이해의 공격을 허용했다.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나, 폴의 의도로부터 더 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창조자들이란 어떤 이들이란 말일까? 폴은, 요컨대 그들이 뭘 썼고, 그렸으며, 만들었는지는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차이점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척 힘들겠지만 폴은 이들의 헌신, 미침, 용기, 고독 등을 말한다. 위고처럼 워낙 탐욕적이었던 이도 있고, 트웨인처럼 탐욕을 인정하며 그보다는 웃음을 더욱 추구한 ‘쇼맨’도 있고, 엘리엇처럼 욕망을 억제하면서 은밀하게 작품 속에 드러내는, 하지만 일상은 거의 청교도와 같았던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으며, 그런 헌신적 창조의 밑바탕에는 그것을 가능케 할 정도의 방대한 지식이 들어가 있었다. 뭘 배우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고, 선택한 배움은 늘 도움을 줬다. 엘리엇은 엄청난 독서량과 학습능력,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집중으로 그 방면에 있어서는 가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구사한 단어들 중 일부 외설적인 것들은 그가 젊었을 때에 (아이러니하지만) 푹 빠져 있었던 보들레르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그의 보수적인 삶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반면, 셰익스피어와 초서는 글쓰기와 단어에 도취돼서 명예를 얻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저속한 단어들을 엄청나게 쏟아내곤 했다. 이는 모두 삶의 유희를 높게 평가하고,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트웨인은 어떠했는가? 그의 매력적인 재담은 그를 미국의 서부개척이 낳은 ‘근대의 호메로스’로 만들어줬다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의 기반은 이야기꾼들 사이에서 겪은 그의 경험이었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독자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탁월함이었다. 트웨인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톨킨에 비춰 보자면 톨킨이 <호빗>을 통해 펼쳐놓았던 빌보와 드워프들, 베오른, 그리고 골룸 사이에 오고 간 “나름 재미있는” 대화들은 트웨인의 발치에도 못 미칠 정도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은 퍽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트웨인은 톨킨과 같은 일은 하지 못했다.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중적으로 투자한 전무후무한 일은 그의 시대 이후 환상소설가들에게 “뭘 해도 톨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겪게 만들지 않았던가. 다시금 그가 조명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트웨인보다는 톨킨의 위력이 더욱 가시화되기도 하는 중이다. 하지만 트웨인의 글이 분명 더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맞다. 어쩌면 폴의 표현처럼 “너저분하거나 어설프거나”, 그렇지만 오로지 재미있는 것들이 말 그대로 독자들에게 훨씬 재미있게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웨인이 삼류의 저속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 정정해서, 최고의 대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다양하다.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접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톨킨을 읽으면 그의 세계로 ‘점프’하게 되고, 롤링을 읽으면 어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혹시 저 변기가 마법부로 통하는 비밀의 길이 아닌지 실제로 의심하게 되며, 위화를 읽으면 뿌리 깊은 인간애를 느낀다. 그리고 모든 대작들은 읽는 중에 재미있고, 읽은 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개인에게 가까운 주제라면 더욱 기억에 남게 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심지어 신체도 바꿔놓는다! 작가의 순수한 동기가, 혹은 탐욕적 동기라도 좋은데, 어쨌든 창조의 항로를 거쳐 독자의 부두에 정박하고, 결국 길고 짧은 문장, 밝고 어두운 색채, 높고 낮은 음 등으로 수입되면, 비근한 비유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거대한 삶의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열렬한 독자에게는 자신이 왜 그토록 예술에 몰두하는지에 대한 비밀을, 반대로 예비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예술을 하려는 철학과 동기를 재점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창조의 비밀 중 하나가 용기라는데, 그런 비밀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것만 같은 우리의 삶에, 대관절 용기는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서문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가장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장애가 오히려 엄청난 용기와 의지력을 일깨웠다. 혐오와 자기 비하의 삶은 최고의 창작품을 무수히 쏟아 내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프랑스 화가 툴루즈-로트렉와 관련된 평 중 일부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그 못지않은, 스스로 돌이켜봤을 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과 같은, 하지만 남이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산을 넘기 위한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마 우리가 기억하는 “내 생애 첫 번째 대성통곡 때에 부모님께서 해주신 말”이라든지, 교과서에서 본 “교과서적인 삶”의 비밀과 관련해서, 혹은 그 외의 숱한 경험들로 말이다. 그것은 용기이다. 베토벤, 미켈란젤로,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삶을 긍정으로 보든, 총체적인 멜랑콜리로 보든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드느냐에 있다. 그리하여 용기가 생기고, 그 순수한 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끄는가가 문제이다. 대단히 지루한 말일 수도, 그리고 별 차이가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는 크다. 폴이 말한다.
  “창조는 즐겁기보다는 인내해야 하는 괴롭고 혹독한 경험이며, 차라리 창조자가 아니길 바라는 때도 많다는 게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에너지는 소비된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때론 그들 못지않은 엄청난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에너지로 만든 용기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폴은 그들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한다. 이 부사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의 삶과 비교하여 얼마간 읽은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를 복기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에 에너지를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엘리엇의 회고처럼 만약 우리가 삶의 시간을 일말이라도 낭비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훈련에 뛰어난 이들이라면 우리가 TV에 한 눈을 팔거나 인터넷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시대를 움직일 어마어마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대해서 부러워하거나 그것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폄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일상과 예술의 대조적 삶 중 하나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창조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건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 변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정말 창피한 핑계가 아닐까. 상기된 기억을 인질로 삼아 추궁해보고, 지금을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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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4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5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마르틴 우르반 지음, 김현정 옮김 / 도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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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7 

 

  “Scientia est potentia.
  러셀은 이 말이 베이컨이 아닌 이전 시대의 사람이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으나, 그 역시도 베이컨이야말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가 시대를 완전히 바꿔놓진 못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도덕적으로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고, 다른 어떤 면에서는 과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를 낮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체적인 시대의 평은 그를 ‘새로운 귀납법’과 고전경험론의 아버지 즈음으로 정의한다. 뉴턴이나 갈릴레이가 그랬듯이, 아마 저 격언은 반(反)신학적이고, 파격적인 발언이었겠으나, 베이컨도 종교적 믿음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그가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눴으나 신학을 부인한 정도가 오늘날 도킨스 정도까지 되진 못했던 것이다. 

  세속에 침투된 용량으로만 따지자면 종교는 점점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는 지구와 환경이 매우 흡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 2의 지구(케플러 22-b 행성. 평균 온도 섭씨 22도에 크기는 지구의 약 2배 정도)’를 찾아냈다는 과학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그러자 일부 편향적인 무신론자들이 신랄한 코멘트를 달았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와 관련된 것으로, 가톨릭에 대한 공격은 그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개신교는 그 정도가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그 중에는 몇몇 자유주의자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변론을 달아놓은 것이 있었지만 수적으로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이 ‘가상의 종교피해자(‘종교혐오자’보단 나은 것 같아 임의로 이렇게 불러본다.)’들은 “제 2의 지구에서 생명체가 발견되면 기독교의 교리가 틀린 것이라는 과학계의 주장이 사실로써 입증되는 것 아닌가?”라며 흥분했다. 그들이 종교로부터 어떤 피해를 구체적으로 받았고, 각 피해들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혹은 반대로 그들이 그저 근래에 들어 공격당하기 쉬운 처지에 놓인 종교를 비난하는 반(反)종교주의자들의 논리에 무임승차한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는 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아닌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Kepler-22b’ 기사 링크 : http://www.nasa.gov/home/hqnews/2011/dec/HQ_11-408_Kepler_Habitable_Planet.html)

  개인적으로 나는 (태생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이 점에 있어서 스스로 매우 다행이라 여기는데) 심각한 과학주의자도 아니고, 굳건한 신앙인도 아니다. 칼 세이건과 도킨스의 논리적 설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 옆에 꽂혀 있는 마더 테레사의 ‘사랑’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가슴이 훈훈하게 덥혀진다. 과학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가 서로 방향을 달리하는 것은 자명하다. 둘은 모두 믿음이다. 이성 역시 믿음을 추동력으로 갖는다. 지적 호기심을 믿지 못하면 알고자 할 수도 없다. 이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과 모르는 것을 믿고자 하는 것의 차이이다. 물론 둘의 차이는 현격하다. 그리고 과학의 발견과 논리는 점점 인류의 대체적인 이해를 그들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위의 사람들처럼 ‘제 2의 지구’, 아니 케플러 22-b 행성에서 지적 생명체의 흔적(전파통신 같은 것들로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신의 증거가 없어지거나, 혹은 “신은 지구에만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종교가 답할 수 없어진다고 해서 종교가 몰락의 시나리오를 밟는다고 예측할 수 있을까?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까? 많은 지식인들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영역이 그들의 주장처럼 종교에만 국한되어 자주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지식의 오류’이다. 일상은 그보다 훨씬 큰 종교이다. 인간 자체가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는 몇 해 전에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독일어 원제 : Warum der Mensch glaubt. Von der Suche nach dem Sinn)>를 꺼내 든 적이 있다. 저자는 신학자 집안 출신의 과학전문가이다. (나는 흔히 상반되는 이력이라 회자되는 ‘독특한’ 발자취를 지닌 이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적 저울, 혹은 가치 저울, 그런 중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류의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에서 논의되었던 것의 상당부분이 이 책에도 실려 있다. 전개 방식도 별로 다르지 않다. 루이스와 마르틴 모두 “종교는 인간의 진화적 산물이다.”라는 현대적 견해에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마르틴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다.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배우며 변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믿음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안겨준다 .하지만 공포를 안겨주는 믿음은 문제가 된다. 우리가 그토록 편안해하던 믿음의 비밀을 마르틴은 여러 항목을 통해 샅샅이 밝혀낸다. 종교의 장막만 들춰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믿음’이 나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금 마르틴의 선택으로 돌아가게 된다. 믿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때가 아닐까. 

  종교를 믿던 믿지 않던,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너도나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의 공식을 이용해 왔는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요컨대 우리가 우연을 믿는 것과 같다. 어떤 놀라운 일을 겪고, “이건 정말 우연이다.”라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은 그 일과 유사한 정도의 충격을 또 다른 일이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연의 연속이며,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기적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모세가 홍해의 바다를 갈랐다. 현대의 일부 양심적 신학자들은 그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 해석을 대신해서 “당시 그곳은 별로 깊지 않았으며, 썰물 때에 마침 모세와 그의 무리들이 그곳에 당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예컨대 바닷길 같은 것), 약간의 상상을 보태어 이번에는 우리가 모세와 그의 무리가 되어보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원래 바다였던 곳에 물이 없더라.”는 ‘이상한 일’을 겪는다면 그것을 간곡한 기도의 산물이라 믿을 법도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신의 양식 만나가 떨어졌다는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인근 마을에 몰래 가서 적잖은 음식을 얻어 왔고, 그것을 거의 굶어 죽어가던 처지의 사람들이 받아들었을 때 느끼는 안도감.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말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비가 내릴 수도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으로 확장된 텍스트로 적혔을 때, 모든 것은 신의 기적이라는 교리가 된다. 우리가 그것을 불편해 하는 까닭은 그 종교의 부정적인 역사, 혹은 (구약만 보자면) 유대인 중심의 선민사상 등일 뿐이다. 정도가 다를 뿐이지, 우리도 여러 초등학교의 단군상 머리를 잘라 버린 일부 과격 종교단체들의 행동에 분노한다.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가 적게나마 ‘단군의 후손’임(아니면 민족단일주의에 기초한 여러 맹목적 사고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중도적 반론은 대부분 이해되기 힘들 것이다. 

  위의 “설명될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지 조금만 상상해본다면 우리는 지식이 믿음에 반대되는, 혹은 맹목적인 믿음을 봉쇄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지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도 같다. 연금술은 지식이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화학이 되었는지는 간단히 검색만 해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지식이 신비주의와 맞닿았을 때에 사람들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매력을 느끼게 된다. 지식에 근거한 운세는 어떠한가? 이따금 솔깃한 김에 스포츠 신문을 펼쳐놓고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 다음, 만약 그 날의 운세에 “주변을 조심하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면 우리의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정말 조심스러워진다. 아니, 그것을 바쁜 나머지 잊는다고 하더라도 운세를 읽었을 때에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대체로 보일 것이다. “거짓말이야.”, 혹은 “조심해야겠군.” 둘 다 지식에 대처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당신이 말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고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도 지식이었다. 나는 그것과 관련된 전공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문학에 내재된 토테미즘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고대(古代)인식”이 지금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강의였다. 결론은 우리에게 토테미즘의 DNA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현격하게 다르다. 문제는 ‘연결’이다.) 또한 우리와 고대인 사이에 마치 우생학적인 관계가 놓여 있다는 것도 아니다. 자연에 위험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 놀라운 감각적 지식은 지금의 우리에게 거의 없고, 반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그들에게도 역시 거의 없었다. 결국 두 세계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지식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는 구태의연하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현대적 과학의 합리적이고 근거에 입각한 지식에만 국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토템을 가졌다. 자신과 영혼이 닿아 있다는 동물. 오늘날 사람들은 반려동물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물가가 치솟는 와중에도 정성껏 사료를 먹이고 병원에 데리고 간다. 문제는 믿음이다. 지식도 믿음의 도구이다. 같은 논리로 신 역시 믿음의 도구이다. 

  나는 예수가 (종교인들이 믿는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이유는 하나이다. 그가 믿음의 메커니즘과 기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기적을 행했는지, 신의 아들인지는 내게 거의 중요치 않다. 다만 당시의 중동 세계를 고려해보건대, 삶의 비관만이 가득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불어넣어줬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를 종교와 닿아놓고 생각했을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창조적 사고인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보자. (이는 이 책의 159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요한복음서 5장의 내용이다.) 절름발이에게 예수가 다가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절름발이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절름발이는 걸어갔다. 물론 절름발이가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선천적인 절름발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구절에 주목한다. 환자에게 “스스로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교조주의의 깊은 뿌리를 볼 수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교’라는 일부 종교에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떼어놓고 ‘예수와 절름발이’로만 생각해본다면 예수는 절름발이에게 비관에서 긍정으로, (병에게의) 복종에서 (환자 스스로의) 창조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에는 힘들었을 것이고, 아마 영영 걷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저 절름발이는 벼락을 맞은 듯 깨우친 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생활을 했을 것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이런 식으로 늘어갔다. 이를 플라시보 효과와 비교해보자.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칭찬은 고래도 움직인다.”와 같은 현대적 성찰의 문구와 비교해보자. 이들의 메커니즘은 거의 다르지 않다. 종교가 세속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세속이 종교를 서서히 밀어 올리기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독자들이 특별히 주목해서 읽어야 할 챕터는 여덟 번째, “왜 불신보다 믿음이 더 위험할까?”라는 대목인데, 여기서 마르틴은 종교의 문제를 정리한다. 종교적 권력, 여성학대, 근본주의 등이 주로 언급되고, 우리는 이미 이에 익숙하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들이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종교의 여성학대, 특히 마녀사냥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데, 남성우월적인 역사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종교(물론 모든 종교가 그렇진 않고, 종교마다 ‘가부장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다. 예컨대 로만 가톨릭보다 러시아 정교회가 여성의 종교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가부장적이다.)부터 전복시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분리해보자. 먼저 하나는 진화론에 반대되는 창조론이다. 다른 하나는 신에게 씌워진 권력이다. 과학이 창조론을 이길 수는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승패’의 개념을 썼는데, 이유는 두 이론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설립논증이 가설로써 등장했지만 도킨스와 세이건 등 과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그것이 왜 잘못된 논증인지는 금방 알게 된다. 문제는 후자, 즉 권력의 문제이다. 과학이 신에게 씌워진 권력을 이길 수 있을까? 개인적인 사료인데, 아마 이 대목에서 마르틴이 “왜 불신보다 믿음이 더 위험할까?”를, 독자들에게 한 번 생각해보도록 권유하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물론 “신에게 씌워진 권력”에 기초한 것으로 그 어떠한 것도 “왜?”를 묻지 않는 맹목으로 이끌 수 있는 사고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근본주의에 있다. 아니, 나는 이를 “세속적 근본주의”라 풀어 써야겠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유대교 등의 폭력적 근본주의자는 엄밀히 말해 종교인이 아니다. 그들이 종교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것에 비유해보건대, 그들보다는 차라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폭력을 지양하는 이들이 훨씬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반복해서 강조해야 할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종교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가령 민족의 영역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우파적 근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지금 유럽에서는 심각한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모든 문제는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외국인들이 취직하자 자신들의 일거리가 없다며 분노하는 일부 독일의 청년들은 미국의 반유대주의와 다르지 않고, 프랑스의 상황과도 거의 다르지 않다. 팔은 대개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가. 우리나라 사람들도 심각한 취업난을 겪으며 최근 들어서는 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등의 인권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문화세계, 다원주의, 지구촌 문화 등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런 우리가 종교의 심각한 기울기를 정확히 따지고자 함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가치 있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믿음의 엔진’ 중 하나를 스스로 꺼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세계는 여전히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세계’라고까지 넓혀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나 자신은 불확실성과 매순간 싸운다. ‘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 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조금 더 넓혀 생각해 ‘너’는 누구인가? ‘나’와 ‘너’를 가르는 비물질적 조건들을 생각하다보면 문득 연대감으로부터 시작된 사고의 다발들이 우주까지 폭넓게 전개되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생각의 연쇄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듬성듬성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지(無知)한 존재, 다른 말로는 “알아가는” 존재이다. 무지를 극복하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무지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우리는 과거의 앎과 믿음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한 근거로써 확보한 시대의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의 후손들도 이 시대의 앎과 믿음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겠으나, 메커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합리적 성찰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계단에 발을 디딘 이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앎과 믿음을 합리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다. 추상적인 방법이라 여기는 회의론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조화가 어디 즈음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다. 자연에 대한 경탄, 존재에 대한 의심, (자연에게서 이끌어낸 교훈인) 확실성의 부정, 그리고 불확실성의 극복. 

  ‘예수’라는 이가 이미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자기극복의 창조적 사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길을 찾는 방법. 그는 분명 종교가 되었고, 신이 되었고, 혹은 우상(idol)이 되었으나,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맹목이 어찌되었든 간에 본질은 이것이다.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두 앙숙에게 다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간디에게 이르러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 이상적인 실천대안으로써 활용되었고,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되는 길”이며, 古이태석 신부와 마더 테레사, 슈바이처에 이르러서는 눈물겨운 희생적 삶으로 우리의 귀감이 되었다. 힌두교의 한 텍스트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인데, 그것을 말하는, 혹은 실천하는 수많은 현자들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진리'가 뭔지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편협한 유대교의 사고방식을 보다 넓혀 결국 죄목을 얻은 까닭에 예수는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마무리했고, 종교가 그의 뜻을 온전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니, 그의 본질이 오늘날 더욱 까마득히 보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말에서 과학을 발견하기 힘들고, 과학에서 예수의 말을 발견하기도 힘드나, (나는 위에서부터 계속 예수에 대해서만 언급했으나, 그건 이 책과 나의 종교와 대체적인 이해 때문이고, 사실 예수의 말이 되었든 다른 성인(成人), 혹은 현자들의 말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역시 마르틴이 서문에서 언급했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어떤 일관된 이상적 방법이 있다. 마르틴이 말하는 것은 둘 모두의 겸비이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서로를 견제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되, 비관에 빠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래된 중용의 덕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 덕을 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라고 없을까. 잘못된 것을 알고, 우리를 되돌아보며,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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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8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9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 ‘1조 시간’을 가진 새로운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이충호 옮김 / 갤리온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2011.12.05  

 

  시인 고은氏의 독서습관처럼 나는 이 책 저 책을 거의 즉흥적으로 읽는다. 공부할 목적이라면 진득하게 읽기도 하나, 흥미가 빨리 식는 건지, 의지가 약한 건지, 아니면 체력이 좋지 않은 건지, 좌우지간에 여러 손을 빌려 조금씩 지식 동냥을 하는 식객이 딱 내 모습이다. 이런 방랑벽에도 좋은 점은 있다. 어려운 책을 나눠 읽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들어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갔을 숨은 쟁점들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고, 읽고 있는 여러 책들 중 우연찮게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있으면 비교해보면서 생각을 넓혀갈 수도 있다. 이것이 나의 변이지만, 사실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이는 법이라니, 속독으로 수많은 책을 섭렵하고 매주 자신의 독서계획을 자랑스럽게 게재하는 유능한 장서가들의 비기가 탐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나에게는 “한 번에 읽었다.” 내지는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그 책만 주구장창 읽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사랑받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런 책들은 정말 벗처럼 가깝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운이 좋게도 얼마 전 나는 벗을 하나 더 만났다.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 원제는 <인지잉여(Cognitive Surplus)>인 책이다. 우리가 ‘시민적 책임’ 앞에 열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기에 느낀 것이 많았는지 리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     *     * 



  역사책을 읽다보면 인간이 인간으로써의 보장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후손인 나로서는 이미 보장된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니, 역사의 무지에서 비롯된 이런 오만과 방자를 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역사적 쟁취 뒤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일관되게 흘러왔는지를 되돌아보면 인간은 쟁취한 것에 대한 애착을 투쟁 이후에 너무 빨리 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짧게 줄이자면 “뭘 위해 투쟁했는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수많은 이견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막상 클레이가 하는 말은 다르다. 인간이 산업화와의 투쟁 중 쟁취한, 소위 ‘민주적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를 직시하자는 그의 제안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가’라는 자존적 시간을 TV 앞에서 보낸다고, 답하면서도 고개를 숙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여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직도 부분적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막 도심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유재석氏가 촬영진과 함께 나타났다고 하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성과 함께 인산인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떻게든 그와 악수를 하거나, “멋있어요!”라고 소리를 치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시나 몰라 싸인을 받을 준비를 할 것이다. 그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유명인이다. 무엇이 그런 사랑을 만들었을까? 우리의 고독이다. TV는 우리에게 대인 접촉의 기회를, 여가를 활용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을 줄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오는 고독을 “유명인이 나의 간접적 친구처럼 느껴지는” 심리로 아주 간단하게 바꿔버림으로써 TV스타를 양산한다. 이 구조는 눈에 보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느끼기에는 힘들다. 그들이 나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TV시청이 인간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바보상자”라 불렸던 적은 오래 전이고, 클레이 역시 그와 관련된 수많은 논문이 이미 발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클레이는 TV 앞에서 수동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적극적인 참여적 시청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추적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주 간단했다. “TV시청을 수동적으로 하면 안 되겠어.”라고 다짐하는 사소한 선택이 수 백 만 명의 단위로 일어나면 거대한 선택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위키피디아(Wikipedia)와 최근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우샤히디(Ushahidi)가 있다. 두 사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우리 자신의 역할이다. TV에 길들여진 우리의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샤히디를 예로 들며 클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 도움을 주길 원하며,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도우려고 한다.” 별 노력 없이 TV 앞에서 고독을 해소하려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클레이는 진(zin:술) 열풍에 휩싸였던 18세기 초 영국 사람들과 비유했다. 우리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cognition)’라고 한다면 지금껏 우리는 자주 그것을 낭비해 인지의 ‘잉여(surplus)’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 흔히 ‘와우(WOW)’라 불리는 전 세계적인 온라인 게임에 매진하는 이들은 최소한 여러 퀘스트(임무)들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길드’라는 연대를 형성하고 뭔가를 하기 때문에 시트콤을 보기 위해 30~45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TV 앞에서 깔깔대는 사람들보다는 났다고 본다. TV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비위가 상할 것이다. WOW 중독자들의 ‘전설적인 경험담’은 소위 말하는 “잉여스러움”의 대명사로 우리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시하자면, 굳은 믿음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은 법이다. 

  중요한 것은 피드백이다. 일방적 소통의 TV는 우리에게 소비할 것을 권장하며, 우리는 그 권장을 관습처럼 이어오고 있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시청자 참여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시청자 중심주의를 외친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그 과정에서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해 그것이 양적으로 충분히 넉넉한가를 긍정적으로 평할 수는 없다. (게다가 시청자 참여의 수단이 TV인가, 아니면 TV가 다른 매체들, 가령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것인가를 따져보면 참여가 TV 고유의 습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토론회에 반드시 ‘나’의 의견이 수렴되는 것은 아니고, 그 의견의 양 또한 많지 않다. 다만 일련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문자 투표는 대표성보다는 개별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방금 ‘양(量)’을 말했는데, 클레이는 그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척도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많아지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이다. 이것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이유는 소셜 네트워크의 광범위한 확산에 있다. 실로 (약간의 어폐는 있으나)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어떤 초국적 행동이 발생할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느 날 A氏가 길을 가다가 B氏가 여러 명의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폰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것을 유투브에 업로드했더니, 수 십 만의 누리꾼들이 봤다. 이 경우, B氏의 개인적 폭행 경험은 전 세계적으로 ‘폭력’에 대한 생각 재고하기라는 피드백을 낳는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직은 수준이 미약하긴 하지만 이런 피드백은 “누군가의 피해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소통되던 TV미디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끓어오르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보장된다. 따라서 문제는 전적으로 ‘양’에 있다. 양이 많은 피드백은 그 어떤 권력의 감시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적 법망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인지잉여를 되도록 사회적 가치와 시민적 가치에 쓰는 편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바람직하다. 

  나는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사회적 행동에 대해, 지젝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일관성이 없어 영속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여겼고, 한편으로는 타인의 불편을 유발하면서까지 집단의 이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처사에 불만이었던 터라, 짙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사회가 생각보다 덜 견고하다는 이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시장통처럼 시끄러운 인터넷과 공론에서 훨씬 질적으로 가치 있는 타당한 의견이 등장하리라 기대하게 된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에서는 갑론을박들이 감정적으로 오고 가고, 그것이 지나친 악플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우리가 인터넷에 거는 기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 생활과 연계된 새로운 형태의 가치창출은 인터넷의 ‘주체적 참여’에서 시작된다. 

  지난달에 재독한 <자유론>에는 저자 J. S. 밀이 ‘출판의 자유’라는 주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을 클레이가 말한 ‘대중출판’과 맞닿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러 종류의 미술책을 읽어보면서 비전공자의 ‘미술 논하기’와 전공자의 것에서 오는 중량감의 차이를 현격하게 느꼈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비전공자의 책이 미술 출판계에 등장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봤다. 이유는 별로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천편일률적 감상에서 벗어나 보다 친근하게, 독자들이 직접 생각해보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런 책들에서 상대적으로 ‘주체화’를 더 많이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감의 양적 차이’에서 이미 분명하게 입증된다. 

  네이버에서 미술 블로그를 꾸려가던 무렵, 나의 이웃블로거였던 ‘레스까페(선동기氏)’분은 <처음 만나는 그림>이라는 책으로 최근 <슈퍼블로거>라는 공영방송에도 출연하신 적이 있는,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저자이다. 그는 미술전공자가 아니다. 대중과의 공감으로 성공한 경우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내가 배운 어려운 미술을 쉽게 풀어 해석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에게 그의 글은 생경한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간 날 때마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읽을 수 있는 무게의 미술책이 탄생했다. 이런 시도가 반가웠던 까닭은 기존 학계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그건 그들의 입장일 것이고)이 아니라, 미술을 보는 다양한 눈이 비로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에게 그의 글이 온당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학설과 진위여부를 내세워 학자들이 “잘못된 감상”이라 부르는 부분들을 여럿 찾아낼 수 있겠으나, 그런 시도는 이제 거의 무의미한 상태이고, 나는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겉으로라도 다양성을 옹호하고, 그 다양성 속에 우리가 속해 있음을 알고 큰 안도감을 느낀다. 미술 감상에 일련의 정도(正道)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점, 선, 색의 원리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참여를 인지하고, 서슴없이 다양하고자 한다. 저마다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어려운 학문을 공부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워진 것은 대단히 기뻐할 만한 이 시대의 현상이다. 미술의 해석은 이미 충분히 해체되어 있다. 얼마 후면 해체된 해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그들의 전성기를 누릴 것이고,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미술을 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적어도 동시대의 미술을 대할 때에는 자유분방한 놀이로 발전하길 원한다. 물론 이런 자유로움은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를 감상할 때에는 적용되지 않겠으나.) 

  출판은 수입이 있으니 잠시 접어두고, 위키피디아와 우샤히디와 같은 비영리 웹사이트에 정보를 올리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리의 낯익은 경제관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바로 “공짜인데도 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윤만이 반드시 주체적 참여를 낳진 않더라는 좋은 정보를 얻는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주체적 참여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하고 싶고, 관심 받고 싶고, 토론하고 싶은 것이야말로 주체적 ‘주체’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오래된 인간의 염원을 맘껏 펼치고 있는데, 이것이 불러온 여러 지역의 ‘봄(春)’은 이미 우리에게 소통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충분히 각인시켜줬다. ‘아랍의 봄’도 소셜 네트워크에 참여해 그들에게 정신적 원조, 즉 비물질적 도움을 준 사람들의 내재적 동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의 민주화 열망은 이미 수많은, 민주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이룩한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했고, 네트워크에 천문학적인 수의 대군을 소집시켰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그 대군의 함성을 듣고 ‘아랍의 봄’ 사건에 쉽사리 개입해서 훼방을 놓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이 아랍의 자주적 민주화를 원치 않을 수밖에 없는 경제적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사익을 챙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대의라 느낀 것이다.) 

  클레이의 주장처럼, 많아지면 정말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 주체가 될 도구를 얻었고, 잘은 모르더라도 시위에 참여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할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민주(民主)’라는 단어에서처럼 정말 국가의 주인이 되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근거 있고 타당한 화를 낸다면 국가의 지도자를 바꿀 수 있는, 맹자의 역성혁명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리더의 자격 역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대중이 무능력하다는 비판적 목소리를 들어야했지만 우리는 주체적 능력을 깨닫고 자신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여러 근거들을 수집하고, 다른 이들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직접 참여하여 사회적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깨닫고 있다. 때문에 정당에 대한 회의를 묵혀두지 않고 ‘제 3의 정당’이나, 정치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인물들을 대신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표출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전문가들의 의견처럼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처음 일어난 일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양적인 측면에서 몹시 고무되었을 뿐이다. 

  전문가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우리는 “나는 아마추어이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마추어’라는 단어에서 저급함은 사라졌다. 소수의 출판과 의견 제시만이 가능했고, 그것이 거의 주가 되었던 시대가 이제 종지부를 찍고, 질적으로 평준화된 시대가 서막을 올렸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서브(serve)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는 진정으로 글로벌 시대를 맞이했다. 다양한 언어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있거나, 혹은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무상으로 외국 사이트의 내용을 번역해 올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주로 영어로 게재되고 있는 <해리포터>의 각종 팬픽션을 볼 수 있다. 그것들 중 상당수는 분명 고전적 관념에 따라 “저급한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렇게 여기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더 저급한 것은 우리가 평상시 갖는 수동적 반응이다. 클레이의 말마따나 저들은 다름 아닌 ‘생산’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Please read and review my story.” R&R 말이다. 이건 건설적이다. 이것을 저급하다 말하는 것은 ‘아카데믹’하다. 롤링은 <해리포터>로 돈을 벌었지만 R&R이라 말하는 팬픽션의 저자들은 그런 이득은 원치도 않는다. 

  클레이가 근거로 삼는 내재적 동기들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버리게 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 이득을 위하는 욕망을 버리도록 하는 반(反)경제학적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공유지의 비극(p.158 참조)’을 인지하는데서 비롯된다. “사회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덜 이기적으로 절제한다.” 이 지점에서 협력이 추구된다. 클레이는 그 대표적인 예로 스케이트보드 열풍을 일으켰던 1970년대의 Z 보이즈들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상파 화가들을 든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예는 프리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누리꾼들이다. 이들은 통합조정 가치를 이용해 훨씬 대규모의 작업을 해내기도 한다. 이것을 공공 부문의 작업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순수한 작업은 이미 공산주의 국가들이 해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이후, 우리는 복지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공공+민간’의 적절한 통합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고 있다. 거의 ‘절대자본주의’의 사회처럼 회자되는 이 사회에서도 “공공의 목적을 위해 무상으로 일한다.”는 것은 충분히 존재한다. 이것이 행동경제학이 밝혀낸 의외의 현상이기도 하다. 

  출판계에는 이것이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소리바다’ 사건을 두고 도덕적 타락이라고 설명하며 결국 저작권을 지닌 쪽이 승리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었다. 이것의 전신 격으로 미국에는 ‘냅스터’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두고 클레이는 부정적이고 관습적인 설명을 거둔다. 우리는 “공유가 아주 간단하다면 기꺼이 공유하려고 한다.”고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오고 가는 리트윗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또 하나의, 가장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내재적 동기는 ‘긍정적 일탈(positive deviance)’로 소개된다. 한 파키스탄 청년이 페이스북을 이용해 시장의 쓰레기를 치우던 것이 사람들의 책임감을 고무시켜 훌륭한 사회적 업적을 유지해갔다는 이야기는 매우 훈훈하다. 이러한 동기에 가격을 책정하면 ‘이기적 동물’일 것 같은 우리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동기를 유발하는 가치가 감소한다.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를 이룬다. 언어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영어의 리트윗이나 정보공유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고, 또한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교류하려는 이들이 많으므로 이러한 실천공동체는 초국가적인 문화를 낳는다. 이로써 우리는 TV를 볼 때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할 때에 공동체가 원하거나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훨씬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재빠른 인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참여적 커뮤니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인터넷에 기반을 둔 이러한 현상들을 “기껏해야 가상세계인데.”라며 비판하는 낡은 이론들이 있다. 그런 까닭에 클레이는 “페이스북은 페이스북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권위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만약 페이스북에 모여 논의하는 이들이 모두 아마추어라고 해도 클레이의 비유처럼 뇌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병원에 갈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뇌수술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쉬운 접근성과 친근함은 병원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심지어 그 커뮤니티에서는 (바쁜) 의사와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이야기도 오고 갈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이제 알뜰살뜰 저축하자는 고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지금의 소셜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용어로 변모했다. 그리고 태산이 되면 무언가가 바뀐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인과 경찰은 대중이 어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위협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최효종氏 사건을 보라.) 만약 그 ‘관심’이라는 것이 여러 공동체들, 가령 각종 노사들이나 일부 연합단체들의 사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대의나 인권과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는 시민적 가치를 표방하며 거세게 반응해 결국 정부의 의지나 학계의 권위마저 굴복시킬 수 있다. 그것이 개선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러한 가치는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관심이란 어떤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의미 없는 논쟁을 지양하는 노력, 또한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또한 사회적 냉소를 제거해야 한다. 저 차가운 시선은 우리에게 안주할 것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매우 진부한 말이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다. 나의 부모님 세대들은 70~80년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땐 그랬지.”라고 운을 다신다. 그런 식으로 나도 할 말은 있다. 486 컴퓨터를 쓰고, 집에서 인터넷을 쓰면 전화는 쓰지 못했던 시절, 2D 게임을 하려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던 시절이 나의 초등학생 때였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정도의 시간만 지났는데도 이미 예상보다 많은 양적, 그리고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 우리는 여전히 갈필을 잡지 못할 것이다. 혼돈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혼돈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등장할 엄청난 사회적, 기술적, 혹은 문화적 혁명들이 예견될 때마다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클레이는 말한다. “상상하라.”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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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플래닛 -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외 지음, 홍은택 외 옮김 / 윌북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2011.12.03 



  다이어트를 하는 나라와 유니세프의 식량조달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나라. 세계의 정부들은 “굶주린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동시에 “너무 많이 먹고 있는 인구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 되도록 관찰자의 입장에서 각국의 ‘가족 식단’을 취재하고, 그것을 열거한 책인 <헝그리 플래닛>은 제목 그대로 아이러니한 오늘날을 거의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가 음식투정을 부릴 때 아마 대부분이 소말리아 아이들의 굶주림에 빗대어 “못 먹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타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 빗댐은 온당치 못하다. 밥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사치에 저들의 상황으로 굳이 대입시켜보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을 두둔하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연간 2억 톤에 육박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내보낸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그들의 30%에 못 미치니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겠지만 이곳의 사정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반면, 차드는 영양결핍자가 인구 전체의 34%, 위생적인 물을 공급받는 인구는 전체의 27%이며, 말리는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이가 전체 인구의 91%나 된다. 

  어폐가 있겠으나 비유해보건대, 우리가 반려견과 도축된 돼지에게서 느끼는 각각의 감정이 다른 것, 즉 가까이에 있는 것에 더 많은 애착과 관심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소말리아, 말리, 차드 등 최빈국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관심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여러 사례들을 조명하지만 직접 개입하는 감정은 드물고, 이따금 실어 놓은 에세이들에서 문제제기의 방향을 빌린다. 지나친 긴장이 없고, 무엇보다도 사진(덴마크의 부엌 사진은 흡사 페르메이르의 작품 구도를 떠올리게 만들기까지 한다!)이 풍부하기 때문에 문화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마치 주전부리 같은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이다. ‘식량조달’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비교하려는 사람에게는 차드, 말리 등 아프리카 내륙 국가와 미국, 호주 등이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장수’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일본의 사례가 인상적일 것이다. 각지를 여행 다닌 이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책이기도 하다. 

  <헝그리 플래닛>을 읽으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괄호를 치기도 하고, 노트에 옮겨 적기도 했다. 소위 쉽게 말해 “들입다 팠지만” 적어 놓은 것들을 쭉 복기해보니 이 책의 요점이 각 사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사례들의 열거를 읽은 독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시오.”라고 권유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맥카스(맥도날드의 호주식 속어)를 먹고 TV 앞에 누워 뒹굴뒹굴 거리는 호주의 아이들, 콜라를 마시는 부탄의 승려, 격렬했던 내전 후 1주일 치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보스니아 사람들, 얼마 되지 않는 염소고기도 라마단 기간이 아니라면 공동도축하지 못하는 차드 난민촌 사람들, 30년 전의 굶주림과 비교하며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는 중국의 한 할아버지,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1인 1자녀의 수혜자 샤오황띠(작은 황제(小皇帝)라는 뜻)들, 대략 10km를 왕복해야 장터의 물건을 살 수 있는 에콰도르의 산간지방 사람들, 유기농 바이오 제품들이 비싸지만 몸에 좋으니 안 살 수도 없는 독일 사람들(하지만 알다시피 이 바이오 제품이 독일에서 올해 초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었다.), 식량배급이 원활해 굶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생산성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쿠바 사람들, 바다표범, 사향소, 연어 등을 사냥해서 돈을 벌거나 육류를 섭취하는 그린란드 사람들, 육류를 거의 먹지 않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 하라 하치 부(腹入分, はらはちぶ : 음식의 8할만 먹는다는 오키나와의 건강 속담)를 실천해 10만 명 당 100세 이상 장수 인구가 무려 33.6명이나 되는 오키나와의 사람들, 1주일 동안 콜라를 자그마치 20리터가 넘게 마시는 멕시코의 한 가족, 온갖 사회적 문제들을 가족과의 식사로 버텨가는, 알뜰살뜰한 필리핀의 슬럼지역 사람들, 스시에 푹 빠져 있는 한 폴란드 가족, 1년에 네댓 번 여윳돈이 생기면 그걸 아이들을 위해 맥도날드에 투자하는 터키의 가족, 나름 저지방 식단으로 건강을 찾으려고 하지만 정작 움직이지 않는 미국의 한 가족, 과잉식단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슈퍼사이즈 미>를 보고 운동과 채식을 병행하려는 미국의 한 흑인 가족,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은 미국 텍사스의 한 라틴계 가족 등등.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식단은 어떠할까? 

  풍부한 열거가 비교적 객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으나, 이 책의 사이사이에는 에세이와 사변이 삽입되어 있어 독자들이 그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권한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의 에세이 <An Animal's Place>이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2002년 11월 게재된 것인데 책의 역자가 번역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본다. 괄호 안의 영문은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 올라온 것 중 이 대목에 해당하는 원본의 문단을 발췌한 것이다. 

  “미국의 사육 공장은 자본주의가 도덕적, 사회적 규제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악몽 같은 모습으로 다른 어떤 집단들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삶은 재정의된다. 단백질 생산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존경할 만한 단어는 ‘스트레스’로 바뀐다. 이것은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 경제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래도 ‘꼬리 자르기’ 같은 해결책이 등장한다(원문 : More than any other institution, the American industrial animal farm offers a nightmarish glimpse of what capitalism can look like in the absence of moral or regulatory constraint. Here in these places life itself is redefined -- as protein production -- and with it suffering. That venerable word becomes ''stress,'' an economic problem in search of a cost-effective solution, like tail-docking or beak-clipping or, in the industry's latest plan, by simply engineering the ''stress gene'' out of pigs and chickens.).” 

  우리가 지녀야 하는 식문화 윤리 중 하나로 동물과의 관계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도덕관념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산업화된 도축의 모습은 위와 같다. 이를 여러 국내 다큐멘터리로 많은 사람들이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사회는 모습이 다르다. “죽이는 것”은 같으나, 메커니즘 자체가 상이한데, 얼마 전 방영된 다큐멘터리 <아무르> 1편을 보면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설원에서 멧돼지를 사냥한 뒤 머리를 잘라 귀를 세워주고 예를 다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여주인공이 동물을 죽인 후 화살을 뽑으며 연대감 있는 대사를 외는 장면과 유사하다. 우리는 이것을 형식적인 절차로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도덕적 형식’이라 간주(실은 이 의식 자체가 전통적인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나)한다고 해도 산업적 도축과는 차원이 같을 수가 없다. 

  세계의 음식문화는 대체적으로 과다육류소비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반가운 사실도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음식에도 만족하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음식을 먹을 때에는 못 먹었던 시절의 아픔을 보상하려는 욕심과 대비되는, 즉 “양이 적더라도 만족하는 습관”도 함께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키나와의 ‘하라 하치 부’ 전통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며, 먹더라도 식단을 저칼로리로 교정하고, 되도록 패스트푸드를 섭취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이야말로 국제 식량소통의 획일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나는 한 과학강의 시간에 “미국인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10억 명의 기아인구가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과장된 바가 없진 않겠으나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연간 배출하는 음식물쓰레기의 양이 2억 톤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소박한 식단은 우리의 식비 지출을 줄인다. 한편으로는 패스트푸트에 대한 코비 커머의 에세이에서처럼 대형업체들의 윤리도 한 몫을 해야 한다. 사실 그들의 행동이 우리의 실천을 좌우할 수 있다. “바다에게 진 부채를 우리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에 대해 우려하는 칼 사피나의 에세이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책을 덮고 나서, 물론 독서 중에도 그랬지만, 계속 아쉬웠던 것이 하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더니.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 터키, 필리핀 등 가히 음식의 대국이라 불리는 곳 못지않은 방대한 식문화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음식조리가 있으니, 나 역시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탓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저자는 한국어판을 펴내는 서문에 “여러분은 영양가 높고 지방이 낮은 전통 식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가공 정데된 식품의 특징인 ‘공허한 칼로리’도 적은 식단이지요. 전통 한식을 고수해올 수 있어서 여러분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왔던 좋은 점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식을 뒤로 한 채 온갖 패스트푸드들을 사 먹는, 그리고 그것에 매우 흡족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배고프면 일단 라면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한 라면 회사가 소위 “대박 난” 상품 하나로 국가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한 것이 얼마 전 화제가 되었다. 그것을 사 먹은 사람들은 “맞아. 우리가 일조했지. 그 라면 참 맛있더라.”하며 좋아했다. 이러한 즐거움에는 큰 덫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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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4 0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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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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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나에게 만약 추천사를 쓸 위치가 주어졌다면 나는 이 책을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물론 추천사를 쓴 분은 내가 감히 경지를 논할 수 없는 이어령氏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내가 써야 할 책이 먼저 나왔구나!” 창조성의 원칙이 그의 지론이었던 까닭이다. 여전히 “How?”보다는 “What?”을 강조하는 사회. 그러다보니 여전히 지식이 주가 되는 사회. <지식의 미술관> 리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지식에 기반을 둔 단편적 사고로 창조의 영역을 설명하려는 놀라운(?) 사회.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인(全人)을 다시금 되살리려는 이 시대의 교육과 전인의 일면을 본받아 다양한 것을 접하고 천편일률에서 벗어나려는 깨우친 학생들에게 <생각의 탄생>은 그 숱한 표현처럼 ‘단비’와 같은 책이다. 상상력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이어령氏의 추천사만 읽어도 뇌리에 박히겠지만 정작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의 방법이 많아?”하며 놀라게 될 것이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오랜 연구 끝에 서양 특유의 여러 카테고리 분류로 책의 챕터를 나눴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의성이라 강조하니, 자칭이고 타칭이고 ‘지성인’이라 불리는 우리가 아직 갈 길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내가 네이버에서 미술 블로그를 꾸려갈 무렵의 이야기이다. 나이가 있으신 한 이웃 화가께서 “나는 미술을 공부하는데 있어 몇 가지 핸디캡을 안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나의 글에 코멘트를 달아주신 적이 있었다. 한 노(老) 화가의 말씀을 빌려 “차라리 데생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화가의 마음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고 조언해주신 것이다. 나는 이 코멘트를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미술을 공부한다면서 뭔가를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이론과 이미지를 공부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기술은 미술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창조의 문제를 새삼 일기장 꺼내어보듯 회상하기 시작했다. ‘창조’ 말이다. 

  창조적 생각을 감성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쁜 일상 중에 이런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의 경계’를 넘으면 “나 자신을 잊는” 몰아(沒我)적, 혹은 탈아(脫我)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구체성은 표현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드러낼 뿐이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그 중 전혀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표현된다는 것이다. 오키프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한창 시를 썼을 때, 나는 표현의 한계(이건 대개 주제가 확장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앞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름 생각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독서량의 문제, 어휘력의 문제, 경험의 문제, 혹은 하루에 한 편씩은 꼭 썼던 다작(多作)의 문제 등을 생각해냈지만 그것들은 사실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표현’이라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시가 만들어지는지를 나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어떤 공식이 있을 것 같았고,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기술적 문제들, 가령 시어(詩語)의 선택, 점층, 대구, 어미 처리, 열거, 율조, 문체 등에 국한된 문제들이었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에게는 ‘제격’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적잖은 도움이 될 수는 있겠으나, 기성 문단의 베테랑들에게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쉽게 말해 창조의 파편 그 이상도 아니었다. 상상과 창작의 대가들이 말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거의 속 시원하게 설명된 적이 없고, 더군다나 연구된 적도 드물다. 인간이 번개를 이용해 전력을 만들어내는 꿈의 기술에 푹 빠져 있으나, 정작 번개가 왜 치는지 원리를 알지 못하는 것에 비유해도 괜찮을까. 섬광처럼 지나가니 말이다. 그리하여 표현이란 대개 “타당성이나 유용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될 수 없고, 타인에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엄청난 열거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타인이 올곧이 이해할 수도 없다. 

  창조란 ‘새로운 이해’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매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제각각 쪼개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창조란 이해에서 표현으로 이어지는 통합의 과정이다. <생각의 탄생>에는 13가지의 기법들이, 마치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인재로 육성해 좋은 직업과 평판을 얻게 할 것인지를 계산한 부모들의 기호에 맞게끔 소개되어 있으나, 만약 그럴 목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면 그 부모들은 십중팔구 실망하고 말 것이다. 이 책에 비기(秘技)라는 것은 실려 있지 않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교육자로써 통합과 전인의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이유로 13가지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열거했을 뿐이다. 창조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해보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방법을 얻어 순식간에 자신이 창조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거의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령 이런 것이다. “생산적인 사고는 내적 상상과 외적 경험이 일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적 상상을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즉 “그건 상상일 뿐이야.”라며 현실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이 책에 소개된 상상의 거장들은 자신과 너무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은 그저 ‘천재’라고 부른다. 

  나는 어렸을 때,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거의 광적으로 레고에 집착해서 레고의 ‘사람’들 22명을 모아 놓고 침대 위를 그라운드로 삼아 직접 축구경기를 해설하며 레고를 움직여 놀기도 했고, 역사책에서 본 내용을 재현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거나, 영화 <쥬라기공원>을 흉내 내거나, 혹은 프랑스의 테제베 열차를 알았을 때에는 기차를 만들어 그것을 ‘마리호’라고 이름붙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모두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이니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아마 내가 얼마나 레고에 “미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간혹 레고 광고를 보면 사고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레고는 놀이이기 이전에 창작이다.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건축을 하는데, 이 ‘건축’이 놀이가 되었다는 것이 레고의 성공비법이다. 레고는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는데 있어서 탁월한 학습효과를 준다. 

  요즘에도 레고가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는 레고를 서로 바꿔가면서 놀기도 했다.) 레고보다는 아마 컴퓨터 게임이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주워진 스토리대로 자신의 ‘아바타’를 움직이는 방식인 최근의 MMORPG들은 분명 교육적 효과를 일정 부분 지니고 있으나, 자신이 직접 창조한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빠르게 진행되고, 즉각적이며, 또한 감각적이기 때문에 레고처럼 한참을 생각하고 조립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뒤에 뿌듯함(이런 느낌을 온라인 게임에서 소위 “만렙을 찍었다.”고 해서 얻게 되진 않는다. 온라인 게이머들의 경험담은 대체로 게임 내의 모든 미션과 레벨을 클리어해도 허무감이 먼저 든다는데 공통점을 보인다.)을 느끼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레고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로 계속 진화한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게임 산업이 교육의 일부를 대체할 수 있을 수준까지 나아간다는 전망에는 동의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 책의 내용을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었을 때, ‘열린교육’과 미디어를 활용한 교육 등이 최초로 시도되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색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자 했으나, 사실 그것도 몇 번에 불과했다. 그것이 시험으로 직결되는 일은 드물었고,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을 대하는 우리나라 정부와 나름의 교육철학을 지닌 교사들 사이에는 당연히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강준만氏의 <입시전쟁 잔혹사>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과거와 비교해 별로 나아진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정치적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교육자 집안인 내가 늘 부모님께 듣는 바에 따르면, (차라리 그 편이 쉽겠으나) 교사 한 명이 바뀌어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다. 교육일수는 대단히 많은데, 학업성취도는 턱없이 낮은 ‘교육대국’인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다른 나라가 모방하려고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상상과 창조가 이 시대에 새삼 재조명되고 있지만 ‘교육’이라는 덩치 큰 배는 뱃머리를 돌리지 못하고 있다. 창의력을 키운다며 보낸 학원에서는 “이렇게 하면 시험을 잘 본다.”라며 결국 무늬만 차별화인 교육을 시키고, 정말 올바른 사고와 용기를 지닌 부모들은 “이 나라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키는가?”며 해외로 자녀들을 보내기 일쑤이다. 시대의 인재를 이 나라에서 키우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곳 일산의 학원가도 강남 못지않게 유명한데, 이따금 지나가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있는 부모들에게, 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이 문제를 직시하도록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어떤 새로운 방책을 마련할 촉진제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도록 하고, 어렸을 때 많이 놀면서 신체의 감각을 이용한 정보습득에도 힘을 기울이도록 하고,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처럼) ‘주목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부족한 경청의 시작이기도 하다.)’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영어 학원을 보낼 돈으로 음악이나 미술, 혹은 무용, 축구 등을 가르쳐보든가, 반성일기가 아닌 ‘생각 일기’를 써보도록 하고, 컴퓨터 게임할 시간을 줄이는 대신 동화를 읽거나 동시를 암송(이는 기억술과 창작술에 큰 도움을 준다.)하도록 할 수 있는, 채근하는 대신 재미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등 여러 행동을 부모들 스스로 창안해낼 수 있다. 

  과학과 예술이 공유하는 창조의 세계를 그들이 잘 알수록 그들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부모의 욕심이 많을수록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식을 겸비해야 한다. 학벌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다 보내니까 학원 보낸다.”는 소시민적 삶에서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자각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막연하게 천재, 예술가, 과학자 등을 아이의 미래에 덧씌우고, 그것에 알맞다고 항간에 널리 추천되는 학원을 골라 보내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창조적 삶이다. 이 책에 소개된 거장들 중 유년 시절, 그와 타인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학습과정을 뛰어나게 마친 이들은 거의 없다. 소위 말해 그들은 ‘엄친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름의 방법을 찾는 고된 과정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상과 창조 앞에서 과감하고, 그 결과 앞에서는 겸손해하는 놀라운 자세를 통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세계를 만든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이들이 곧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행의 교육과정을 문제 삼는다. ‘상상력 풍부한 만능인(generalist)’이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간의 전형인데, 사실 그들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방법은 이상적인 제안일 뿐, 어떤 현실적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이 책에는 실려 있지 않다. 따라서 나름 정성들여 모아놓은 카테고리를 다 접하고 나서도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인적 삶으로는, 만약 “나는 너무 바빠.”와 같은 엄살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실천이 결과로 이어지기 힘든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창조적 실천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다. ‘동기화’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사람들 사이의 공감도 형성되어야 하나,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생각의 탄생>이 제시한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극과 극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라, 전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어도 실천하긴 어렵다. 최근 들어 대학가에는 전공 논문을 폐지하고 그 시간에 다른 인문교육과정을 수료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를 모방한 여러 철학교육과정과 ‘인문화 교육’인 우마니타스가 실시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취업이다. 전공도 취업의 일로 일뿐이다. “기업이 전인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엄청난 양의 ‘전인’들을 취용할 것이라 공고를 내도 지금의 환경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점수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상상과 창조는 점수로 환산될 수 없다. 

  얼마 전, 창조와 기업운영의 전설인 스티브 잡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 결과 그가 평생 감춰두고자 했던 사생활의 일부가 드러나면서 비결이 공개되었는데, 사실 그것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Think Different.”가 전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철수氏가 이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히 초시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MBC의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은 이 시대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다. 의사로써의 전공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할 때에 거의 쓸모가 없었고,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한 것은 기업을 운영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며 그 스스로가 “저는 효율의 측면에서 보자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해 “도전은 효율로는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전은 남들이 대개 안 하는 것에 대한 무모한 동경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즉 잡스의 명언을 실천하는 것이다. 생소한 것을 동경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현대미술을 대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하지만 생소한 것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지식과 감정의 조화, 그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메커니즘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이들이 만드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아이디어’라고 부르며 동경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나는 여가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 이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많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 여가는 놀이를 포함한다. 그것은 보장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얼마나 여가의 시간이 부족하고, 혹은 시간이 있더라도 그것을 또 다시 일이나 배움으로 연결해야 하는 부담이 많은지, 이 사회에서는 여가를 잘 보는 것도 이슈가 되곤 한다. <생각의 탄생>에 나온 13가지 방법 중 나는 ‘놀이’야말로, 물론 선행지식을 열정적으로 탐구해 갖추는 진정성을 겸해야겠으나, 나머지 12가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을 창조의 작업을 이룩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놀이는 공부와는 다르다. 느낌, 정서, 직관, 쾌락 등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말한 ‘내면’의 무언가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어떤 기발한 방법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문화력을 갖춘 나라의 사람들은 뿌리 깊은 놀이문화를 지니고 있다. 놀이문화가 얄팍한 나라의 사람들은 그것을 사행성 놀이로 즐긴다. 

  “노는 것을 허하라.” 어디서 본 문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를 나이트클럽처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적잖은 교장들이 나머지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조용히 자율학습 시키는 것에는 찬성하면서 왜 그 시간에 다양한 놀이나 다큐멘터리 시청을 하는 자율‘활동’에는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학교의 ‘장(長)’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최선의 방법으로써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멀리 나가면 꼭 문제가 발생한다.”와 같은 정치적 문제(지역사회와의 불화, 학교의 위신 추락, 문제아들의 비행, 교장 개인의 처벌 등)로 학생들의 야외활동도 거의 금지하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은 자신이 학교에 있는 한 어떤 ‘트러블’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과잉보호하기 일쑤이다. 창조적 미래인간에 대해 역설하는 그들에게 진정성 있는 의지가 있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 

  창의적 교육을 위해 교육계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회의론은 이 사회에 지배적으로 깔려 있다. 이미 이상적 대안은 충분히 제시되어 왔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앞으로의 교육변혁을 기대하도록 만듦과 동시에 이 시대의 교육자들이 자신의 교육철학으로 삼아야 하는 정석을 담고 있다. 이 책의 내용들이 활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전에 옮겨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있기를 일선의 교육자들에게 당부하게 된다. 획일적 교육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자주 타인(외국)의 삶과 비교하며 좌절하도록 했고, 유익하며 재미있는 삶을 앗아갔는지를 통탄한 것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되, 그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더 넓은 시각을 통해 사회를 비판할 시선으로 이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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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2-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것만 보이네요. 탕기님은 그릴 줄 모르는(제 기준에서)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는. 그러고보면 상관이 없기도 해요. 문학평론가들은 문학을 쓸 줄 알아서 비평하는 게 아니잖아요. 간혹 그런 분들도 있지만. 날카로운 글과 보도 글과 문학의 글과 일상의 글은 다르고 또 달라야 하니까요. 이 책은 많은 곳에서 추천도서던데요. 어쩐지 도망가야 할 것 같아요. 히히.

탕기 2011-12-02 00:51   좋아요 0 | URL
그림 못 그리지 않았나요?^^ㅎ 음. 문학을 할 줄 알아서 비평하는 것이 아님은 맞지만 문학을 할 줄 모르는데도 비평의 글을 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적어도 기본 원리는 알아야겠죠. 그냥 읽고 쓰는 것이 쉬워서 창작의 고통을 체험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쓰는 글과 그렇지 않은 진중한 글은 무게부터가 이미 다르잖아요? 그런 까닭에 저도 그림 못 그리는 것이 나의 공부에 큰 방해가 되곤 했다는 술회를 한 것이구요. 비평의 글을 쓰면서 예술의 속을 건드려야 할 때마다 항상 그 핸디캡이 신경 쓰이곤 했습니다. 저도 어딘가로 도망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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