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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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한 가지 두려움이 있다. 곧 삶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질 것이다. ‘대단히’라는 저 부사의 의미를 나는 잘 모르겠다. 사회생활의 초입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자박자박 걸으며 나름대로 사유한 이 세계의 모습이, 혹은 모양이 서서히 바뀌어갈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늘 그렇듯 적응된다. 도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항상 약삭빠르게 적응하곤 했으니. 그러나 문제는, 아니 두려움은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 계절 지나가는 것마저 지나치며 살지도 모른다는.


  고집하던 속도가 있었다. 이 공간을 찾아와 기꺼이 누추함을 견뎌주던 나의 몇 안 되는 당신들은 그 속도가 얼마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물리. 타인이 보면 멈춰 있는 것만 같고 그리하여 매우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미미한 속도를 사랑했다. 글은 지렁이처럼 쓰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생각의 밭을 가꾸려면 맨손과 자갈, 그리고 꿈틀거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분히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에 ‘거느린’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주변을 생각하게 되었다. (배운 바) 철학과 닿아보자면 그건 장자에 가까웠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철학적으로 여겨본 적이 (이따금 굳이 글감으로 따져볼 때는 제외하면) 거의 없다. 들판에 세워놓은 나를 지팡이 든 방랑자로 만드는 것에 나는 익숙했다. 목동이 되지 않았다. 나를 세상 위에 띄워놓고 바라보면 나는 더 넓고 큰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의 적잖은 양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그런 기회를 줬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는 읽는 속도만큼 걷거나 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마치 식물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순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듯이,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자란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가장 느릿느릿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마음도 속도를 늦추는 완보를 하게 된다.” (문태준,『느림보 마음』, 57쪽)


  최근 방송작가 과정을 밟아가면서 나는 나를 새로운 분위기에 몰아넣는 나름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익숙지 않은 단어와 과제 사이에, 프로들 사이에, 제작의 입장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중압감 사이에. ‘어른’을 이해해가는 길목에서 나는 벌써 그들이 무엇을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그리고 생(生)을 위해 자신의 모양을 얼마나 바꿔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의 보온병 속에서는 어른들의 이기와 무지, 혹은 무감각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의 특권이란 게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해로부터 반보 물러나서 다시 바라본다.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이기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으며, 또한 무감각하지 않은, 그리하여 일상을 쪼개 그 속에서 세상을 분별하고 성찰할 줄 아는 어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끝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대단한 책임감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세간이 몹시 부러워하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 안에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밭을 부단히 경작하는 어른의 모습이 내가 좇는 이상에 가깝다.


  “구태여 우리 모두가 새벽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나는 다만 ‘홀로 앉아 있음’의 시간으로 새벽을 선택한 것이다. 비껴 앉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이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이다. 뒤가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그이는 이마를 앞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로만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옹벽이 있다. 옹벽을 만나 옹벽을 종일 고집스레 이마로 밀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문태준, 위의 책, 143쪽)


  그것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지 않을까 싶다. 삶의 새벽을 만드는 것. 아마 작가의 삶을 꿈꾸는 것도 그런 까닭. (프로의 길을 걷는 선배들에 따르면 그 삶은 무척이나 치열하다지만) 누구나 사는 대낮의 삶에서 내 손으로 조용히 태양을 내려 노을을 만든 뒤, 그들에게 새벽을 지을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태준 시인이 그 새벽을 나에게 선물한 것처럼. 물론 그 새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하루를 서랍 속에 넣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새벽의 모습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벽은 대낮과는 다른 의미로 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대체로 멈춤과 느림과 여유, 아득한 고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조우와 관련이 있다. 새벽이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불면이 아니라면 새벽은 (조금 선정적으로 말하자면) 늘 노곤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잠으로 달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진정한 새벽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당신의 삶에 있어 당신 스스로 새벽을 만드는 일. ‘이것을 할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렇게 할 능력이 되는가?’를 물어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삶은 거대한 바다로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다로 흐르는 강물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목할 만한 선각(先覺)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제시되어왔다. 다양한 말을 통한 일관된 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큰 위안을 받는다. 잠시 멈추고, 생경한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순간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물리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멈춤이다. 나는 책만큼 그 멈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 시인의 이 책은 멈춰 있는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걸음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위대한 역설이다.


  “사랑이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나는 알 것도 같다. 너무 손을 대면, 손 타면 안 된다는 그 말의 귀함을 나는 알 듯도 하다. 애써 성공하려 하지 말고, 애써 실패를 초래하지도 말라는 가 말을 알 것도 같다. 애써 헤어지려 하지 말고 애써 만나려 하지 말라는 그 말을 알 것도 같다. 삶이나 사랑은 강과 같아서 다만 유유히 흐를 뿐이다. 초봄의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그것이 시간의 변화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에게 처음으로 용납한다.” (문태준, 위의 책, 337쪽)


  멈춤의 역설로부터 나는 세상을 배운다. 빠른 것이 소위 ‘대세’이고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속도의 기술이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그 흐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뛰어드는 일은 쉽다. 어른들이 슬그머니 나의 귓가 뒤에 와서 들려주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그 일들은 빠른 속도에 알맞게 자기 자신의 덜어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아픈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리하여 정말 아프도록 뼈저린 일이리라.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다져나가야 하는 밭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자동차를 무서운 속도로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 멈춘 다음, 근처 밭으로 가 생각의 농부가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할 나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적정 속도로 달려도 양옆으로 차들이 바람에 날린 종잇장처럼 지나가버리는 게 이곳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멈춰 세울 수 있는 비(非)물리적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생각이 끊어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문 시인은 이 책 어딘가에 그곳이 궁금하다는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나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커다란 모습을 갖춰간다고 믿는다. 빨리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크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그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의 세계. 한 욕심이 있다면, 그건 이 세계를 놓치기 아깝다는 욕심이다. 씨앗 뿌리고 정성 들여 이 밭 가꾸면서 그렇게 생각해본다. 멈춰 선다. 변화하는 모든 시간의 기름칠로 내 무딘 손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 밭 일구기 좋은 가을이다.


  “여름 매미가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나도 소견이 좁아 시절의 오고 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무딘 마음의 안쪽으로도 가을은 와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 위의 책,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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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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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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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제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 저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저는 꼭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 어떤 극심한 곤경에 처해서도 글은 계속 썼습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휘몰아치면 다른 문제들은 마음에서 해소되기 마련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論創作』, 297쪽)


  나에게 그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작가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섭렵하겠다는 (그 나이 때에는 꽤나 순진했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오싱젠의『영혼의 산(靈山)』은 아쉽지만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건대, 지금 읽는다 해도, 혹은 황혼이 되어 읽는다 해도 ‘나를 찾는 여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정신적 고립의 파탄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부단하면서도 절박한 노력이었을 것인데, 나는 과연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았을까. 혹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의 낮은 기준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는 세상이 많다는 걸 항상 느낀다.


  사실 읽기에 실패한 작품은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눈에 밟혔다. 가오싱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혼의 산’이란 아름드리나무들의 울창한 원시림과 시끄럽게 축제를 벌이는 마을, 그리고 곰팡내 나는 여관방의 이미지가 전부다. 그런 까닭에 『창작에 대하여』는 그 높던 누군가에게 느끼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 글모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과 글’에 대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저에게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혼잣말입니다.” (위의 책, 297쪽)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만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는 한 가지 장르에만 치중하는 작가보다 ‘예술’이라는 총체적인 현상을 더 폭넓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오싱젠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들 중 한 명이다. 『창작에 대하여』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대한 가오싱젠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는 가오싱젠이 직접 모든 장르의 창작에 참여하여 얻게 된 결과물이지, 다른 이들의 철학과 견해, 혹은 체험을 빌려 쓴 말이 아니다. 가오싱젠의 직업은 ‘작가’라고 한정지을 수가 없다. 악기연주, 무대연출, 소설집필, 회화, 언론, 번역,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년시절에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던 배경과 예술에 대한 본능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이라는 작은 예술의 그릇이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오싱젠의 국적은 현재 프랑스이다.


  ‘중국’은 하나의 정치적 환경이었다. (또한 다른 대부분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오싱젠이 그곳에서 떠났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환경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문학이 정치로부터 이탈하여 냉철하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환경으로 도망쳤다고 봐야 옳다. 이 책에는 가오싱젠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정치와 문학의 분리’가 여러 문장과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신의 창작 철학에 대해 설명한 1~2부는 물론이고, 대담 형식의 3부에서도 등장한다. 가오싱젠의 ‘문학 제 1법칙’이라고 (다소 딱딱하지만)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문학을 정치에서만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조나 사상적 배경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의 미학은 해석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학에 대해서도 명제를 연구하거나 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든 언어적 분석이든, 철학자들의 미학 연구는 범주와 개념, 어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미와 예술을 일종의 언설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작업은 예술창작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위의 책, 124쪽)


  지금 책상 왼편의 서재에는 지난 몇 년 간 미술을 공부하며 읽었던 숱한 미학책들이 꽂혀 있다. 그 공부를 끝내고 다시 몇 년 간 작품들을 감상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던진 질문은 “과연 카라바조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바로크’나 ‘르네상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특정사조 속에서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을까?”였다. 어떤 작가든 마찬가지다. 물론 19~20세기 들어 ‘예술철학’이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예술이 사상적으로 움직이려는 시도가 빈번해지긴 했었다. 아마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예술이 이처럼 격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미술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회고하거나 추정하면서 정의(혹은 고착화)하는 작업은, 어쩌면 학문적 차원에서만 효용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는 언제나 해석의 언어들 사이로 도망쳐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위의 책, 125쪽) 그리하여 가오싱젠은 예술이 한없이 주관화된 세계에서 ‘예술의 언어’를 통해 표출되는 오묘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예술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가의 창조자로서의 본성은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집단의 의지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 어떤 공인된 진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권력이나 관념에서 비롯된 그 어떤 강제나 구속도, 예술가의 창조적 본성을 압살하지 못한다. 예술가 개인의 미학만이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며 윤리다.” (위의 책, 195쪽) 이 문장을 읽으면 대단한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오싱젠 자신도 자본주의 속의 예술을 (특히 문학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며 드러낸 것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세상에 조응하고 있다. 특히 예술이 향유되는 방식에서 가장 그러하다. 예술이 하나의 문화생활 속에서 소통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특성이 그 한계일 것이다. 이 소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시장(market)’이라는 말을 붙여야만 한다. 벤야민의 ‘복제’, 혹은 ‘아우라’라는 용어 역시 이 시대에는, 그리고 이 시대 이후 언제까지나 유의미하다.


  예술시장 속의 대중은 유행과 기호, 그리고 (가장 중요할 테지만) 가치를 따른다. 조금 씁쓸한 표현이지만 이건 다 ‘값’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볼 수 있는 이들만 알아서 찾아오라는 식의 고가 전시회는 예술시장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술상품의 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후 발견된 거장의 작품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무엇을 주고 얻는가? 이런 전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고 나면 ‘자유’와 ‘주관’과 ‘무한’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영역은 창작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엄청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지 말 것을 농담 삼아 조언했던 한 교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때 창작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었기에, 솔직히 이 책을 사들고 처음으로 했던 기대는 ‘나의 창작’에 대한 회고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두려워지는 수많은 세상 중에 ‘창작’이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의 자유’라는 확고한 하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는 작업은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원칙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마저도 일반의 마음으로는 해낼 수가 없다. 나는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의 겉을, 문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예술은 분명 어딘가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위안이 된다.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예술가가 되는가. 흥행여부를 떠나 100년이 지나도 기억될 이는 누구인가. 독자인 우리는 이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언제나 예술에 기대어 우리의 긴 삶과 작은 세상에 얼마든지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그러한 수단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유일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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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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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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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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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아버지와 함께 새벽 4시부터 산을 오르면 새벽 5시 즈음부터 산의 이곳저곳에서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는 산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로운 세계로 초대받는 기분이 든다. 눈앞을 가리던 어둠이 높은 하늘서부터 옅어지고, 어떤 ‘공간’이 열리는 듯하다. 땀을 식히는 바람, 바람에 더 빨리 흘러 떨어지는 땀. 그 외 모든 것들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당신도 알 것이다. 이런 걸 ‘개방’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일종의 착각이나 순간적인 인식일 수도 있겠지만, 장자 철학에서 말하는 ‘무문(無門)’의 체험일지도 모르겠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과의 동화를 느끼는 것은 인생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6~70년대 농촌생활을 한 어르신들께서 나와 같은 젊은 세대들을 안타까워하시는 까닭도 그 동화의 현저한 부족 때문인데, 우리 세대 중 그런 넋두리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은 속마음으로는 ‘부재’를 느끼고 있다. 수많은 자연의 대상들을 이름 불러가며 살갑게 대할 수 있는 세대적 능력은 정말 낭만적인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나는 올해 봄까지만 해도 진달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와 산을 다니면서 직접 보고 향을 맡고 손으로 만져보면서 알게 된 사실들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추억이다. ‘봄의 보라색’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한 편의 시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이라는 개체의 전체가 자연과 맺고 있는 종합적인 관계로, 이는 쉽게 말해 환경파괴와 불가분에 있는 모든 것이다. 개인의 자연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에 따른 일련의 경험들이 환경파괴를 막는데 중요한 동력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동력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당연히 그 ‘무엇’을 과학적으로 아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에 의무나 명령의 표를 붙여놓을 수 있느냐의 여부로 우리는 환경윤리를 논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표를 붙여야 하는지 논쟁을 해야 하는 여유로운 상황에 있지 않은 듯하다. 수많은 우려와 과학적 고찰이 있었지만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1962년 미국의 출판사 호튼 미플린에서 한 권의 책이 발행되었다. 당시 저자는 50대 중반의 해양 생물학자. 그녀는 1940년대부터 꾸준하게 한 가지 문제에 매달려오면서 방대한 자료를 모아왔고, 그것을 집대성해서 1962년에 책을 냈다. 이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단순한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엄청난 지진을 일으킨 진앙 그 자체가 되었다. 모두 그녀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 ‘환경’이라는 주제를 가진 전 세계적 규모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그녀의 주장을 정책으로 옮기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일련의 정책들을 실행하도록 했다. 1970~80년대에는 헝가리,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서 대단위 법적 제재가 발동했다.


  저자는 책 발행 2년 후인 1964년에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를 빼고는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나는 그녀를 대학의 여러 강의에서 상식 정도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고, 마침내 그녀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항간에는 환경 분야의 도서 중에서는 드물게 놀라운 문학적인 성취를 일군 수작이라고 평가한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원제 : Silent Spring)』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 성취로 논할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침묵의 봄>이 왜 중요하고 그토록 유명해졌는지는 이 책의 소재 중 하나인 ‘DDT’라는 살벌한 단어에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    *    *



  사실 194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과학자들은 DDT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DDT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과학 분야의 군비로 개발되었다.)에 대해서 우려를 나타냈고, 미국 정부도 1950년대부터 DDT 사용 규제를 조금씩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규제가 강력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1957년 ≪뉴욕타임스≫지에서 뉴욕 나소 카운티의 DDT 사용 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보도를 낸 이후 환경문제가 미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쓰게 된 것이다. (사실 레이첼이 <침묵의 봄>을 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녀의 친구인 올가 허킨스가 1958년 1월 ≪보스턴 헤럴드≫지에 쓴 편지 때문이었다. 올가는 모기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공중 살포된 DDT 때문에 자기 소유의 새들이 죽었다는  호소문을 신문사에 편지로 보냈고, 레이첼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보내줬다.) 물론 DDT를 제조하는 의약품 회사들이 가만히 있진 않았지만 1970년 12월 2일 미국 정부가 환경보호국(EPA)을 설립하고 DDT를 사용을 규제하는 등 레이첼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큰 빛을 보게 되었다.


  DDT는 살충제이지만 레이첼은 이것을 ‘살생제’라 부른다. 이 공격적인 단어의 어감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레이첼의 『침묵의 봄』이 살충제와 같은 화학물질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치는 책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물론 레이첼도 경제의 효용을 무시하진 않으며 해충을 억제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녀가 문제로 삼는 것은 ‘과다 사용’이다. 특정 해충으로부터 피해를 입는다면 그 피해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해충을 억제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인데, 무차별적인 화학약품 살포로 인해 다른 종들이 특정 지역에서 ‘학살’ 당하는 사례가 무수히 많은 것이 문제였다. 레이첼과 같은 학자들만이 당시 이 문제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DDT 살포로 피해를 받은 여러 지역의 주민들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한 바였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혹은 발생해야만 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는 아무래도 경제적 효용성을 별다른 분석 없이 맹종했던 것 같다.


  “인간의 충동적이고 부주의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신중한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변화가 초래된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31쪽)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변화’란 대부분 부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생산 과다의 문제, 축적의 문제, 지표수와 지하수의 문제, 야생동물의 피해, 인간의 피해 등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면서도 우리 세대들(과 이전 세대들)은 그러한 현상을 뉴스보도를 통해 한 번 듣고 가볍게 넘겨버리곤 한다. 지속적으로 올바른 환경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우선 나부터도 그러한데) 거의 없다. 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불행한 사실 그 자체다. “아마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위의 책, 33쪽) 그렇다면 레이첼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며, 또한 주장하고 싶어 한 것일까.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사례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사례들의 결과는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치명적인 화학물질의 사용에서 야기된 여러 개체의 급감, 혹은 절멸이 그것이다. 합성 살충제는 제 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비소 사용의 역사에서도 그렇듯 일반인들은 새로운 약품의 치명성에 대해서 거의 몰랐고, 심지어는 살충제를 몸에 뿌리기까지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약품 통에 손을 넣었다가 다음 날 죽은 사람도 있다. 책에는 없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 흥미로운 사례가 뭐가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몇 가지 발견한 게 있어 옮겨본다.


  다음 인용문은 10%의 DDT가 함유되어 있던 한 파우더 제품 광고를 번역해본 것이다. “벼룩, 이, 개미, 빈대, 바퀴벌레, 파리 등과 같은 기생충들을 박멸합니다. 네오사이드(※ DDT의 옛 이름이다.)를 해충에게 뿌리거나 곤충, 그리고 곤충이 지나다니는 곳에 뿌려두세요. 파우더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제자리에 두세요. 사람과 집의 기생충들을 박멸합니다. 해충이 바로 죽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반드시 죽습니다. 프랑스 제조품. 인간과 온혈동물에게 무해합니다. 확실하고 지속적인 효과. 무취” (Destroys parasites such as fleas, lice, ants, bedbugs, cockroaches, flies, etc.. Néocide Sprinkle caches of vermin and the places where there are insects and their places of passage. Leave the powder in place as long as possible." "Destroy the parasites of man and his dwelling". "Death is not instantaneous, it follows inevitably sooner or later." "French manufacturing"; "harmless to humans and warm-blooded animals" "sure and lasting effect. Odorless.) 이 제품은 치바-가이기 사가 만들었는데, 이 회사 소속의 화학자가 바로 DDT의 살충능력 발견으로 193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파울 뮐러(Paul Müller)였다. 나는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를 예방하기 위해 한 미군 장교가 병사의 군복 속에 DDT를 뿌려주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적도 있다.

  (링크 : http://en.wikipedia.org/wiki/Ddt#mediaviewer/File:DDT_WWII_soldier.jpg)


  염화탄화수소(DDT로 널리 알려진 것)와 말라티온, 파라티온 등 유기인산은 탄소화학결합으로 탄생한 유독물질인데, 앞서 말한 스위스의 파울 뮐러가 발견한 이래 폭발적인 생산량에 힘입어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농업과 삼업, 어업 등에 투입되었다. 이 유독물질의 가장 큰 문제는 극도로 사소한 양의 차이가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생태계 자체에 미치는 피해의 양과 범위가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연쇄적 중독, 농축, 혹은 잔류와 같은 먹이사슬 상에서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종 이기적’ 생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문제를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구 상 전체 종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은 분명 더 넓어져야 한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위의 책, 126쪽) 환경윤리와 동물윤리에서 하는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권’과 ‘존엄’에 대한 기존의 인간철학적 논의들이 그리 넓은 시야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레이첼이 직접 언급한 것 같진 않은데, 위와 같은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논의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애써 묵인하고 대단위의 방제 작업을 실시한 것은 한편으로 (혹은 많은 면에서) 화학약품 제조업체와의 이익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레이첼은 정부가 과학적 무지에서 무책임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꼬집어 비판했지만 그녀도 자본주의 맥락 하에서 일단 가동된 ‘생산’의 엔진을 꺼버리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령 (이 책에 언급된 여러 사례 중에서 가장 사회적 논쟁이 많았던) ‘불개미 퇴치 사건’의 경우에도 그렇다. 과학자들은 불개미의 피해가 농가들이 불평을 털어놓은 것보다 훨씬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지만 정부는 일단 불개미 퇴치를 시작했고, 미 농무부에서는 불개미 방제 작업에 투입된 약품 때문에 가축피해를 입은 농가들의 또 다른 불평을 부정하고 대단위 방제 작업을 다시 실시했었다. DDT 공중 살포를 반대하는 롱아일랜드 주민들의 재심 요청은 미국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이러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이 정도면 단순한 무지의 소행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온갖 화학방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해충은 내성이 생기고 ‘익충’은 박멸된다. 『침묵의 봄』에는 한 챕터가 별도로 울새나 독수리와 같은 새의 절멸에 할애되어 있는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이 갑자기 없어져버리는 과정을 레이첼은 특유의 문학적인 문체를 동원해서 안타깝게 풀어냈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종합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전문적으로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자연을 최대한 이전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일뿐이다. 인간 종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화학방제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레이첼도 그 성공적인 사례들을 여럿 언급한다. 이 사례들의 성공과 화학방제 작업의 실패를 극명하게 비교해놓은 여러 문단을 보면 정부의 정책이 무지의 결과라는 레이첼의 주장은 더욱 견고해진다. 특히 해충을 없애기 위해 익충을 활용하면서 곤충을 ‘자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동맹군’으로 봐야 하는데, 성공적인 방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초음파 이용,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활용, 호르몬 주입, 미생물(생물학적 방제) 활용, 천적 이용, 포식곤충과 기생곤충의 이용(전통적인 방법) 등이다. 가령 살충제의 경우에는 해충이 내성을 갖는 기간이 짧게는 6개월에서 보통은 2~3년, 길게는 6년 정도이다.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것도 일종의 ‘진화’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대안적인 방제는 ‘자연방제(Biological pest control)’라고 해서 자연의 균형을 유지(다른 종의 멸절을 방지)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거의 확실한 해충 억제의 효능까지 갖고 있다.


  레이첼은 보지 못했겠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종합방제(Intergrated pest management), 즉 ‘IPM’이 UN의 권고로 세계 각지에서 실시되어 화학약품에 의존하던 방제 작업의 변화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UN 식량농업기구에서는 IPM을 “농업생태계의 잠재적인 교란을 최소화시켜 작물의 건강한 생장을 강조하고, 자연방제의 방법을 증진시키는(emphasizes the growth of a healthy crop with the least possible disruption to agro-ecosystems and encourages natural pest control mechanisms.)” 것이라고 정의했다. ‘유기농’을 생각하면 쉽다. 가격이 비싸서 그렇지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대체로 유기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생산성’에 열을 올리던 이전의 사고에서 우리가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소비자의 입장이 아니라 종 다양성 유지에 동참해야 하는 ‘하나의 개체’라는 인식을 갖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하지만 나는 레이첼의 시대보다 더 진전된 환경 인식을 지닌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편으로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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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환경파괴와 훼손을 선정적으로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려는 환경 다큐멘터리들을 본다. 보는 내내 힘들다. 내가 평소 무심결에 하던 파괴와 훼손은 생각도 않고 대규모의 사례들만 비난하기도 한다. 초보적인 ‘인식’ 실수이다. 다행이도 나는 운이 좋아 대학 강의의 여러 분야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인식과 고찰들을 접해볼 수 있었다. 내가 열렬한 환경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인식의 전환점에 설 수 있는 기본적인 생각들을 서서히 갖춰가는 과정에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그 과정 말이다. 레이첼의 이 책도 그러하고 가령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나 『희망의 자연』 등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고찰들을 책으로나마 접해보면서 나는 ‘인류적 차원’에서 해야 하는 반성이 무엇인지 그 실루엣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중요하다. 중요한 것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없다. 레이첼의 이 책은 모든 이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이다. ‘추천’이라는 말은 감히 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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