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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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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정작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되는 시간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 간의 접속을 무한히 증대시킨다. 그 결과 지속적인 접속 기간을 요구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지속 기간을 더 강화시켜야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의 유대관계는 오히려 약화시킨다.” (지그문트 바우만,『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41~42쪽)


    두 세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온라인 세계를 충분히 만끽한 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음껏 꾸밀 수 있는 무한의 세계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의 직감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처음인 세계였다.) 그렇게 우리는 아바타를 사고, 프로필 사진을 위해 사진 각도를 배우며, 좀 더 생각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아포리아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말의 진의는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였다. 선망의 영역 언저리에서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문제는, 그렇게 멋진 ‘나’와 ‘나’들이 서로 만나면 나체도 아닌데 왠지 헐벗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일찌감치 하차했지만 아직도 그 선로 위를 달리는 이들이 많다. 온라인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죽음도 0과 1 사이에서 맞이한다.


    수재나 E. 플로레스 박사의 <페이스북 심리학(원제 : Facehooked)>은 온라인에 묶여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하지만 극단적이거나 선정적인 사례들이 주목을 끌었다. 불편하긴 했다. “뭐 이런 사람들이 있나?” 우리가 익히 들어온 온라인의 폐해 지적과 비교해도 딱히 변별되는 주장이나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라인 중독의 해결 방안으로 제시되는 ‘인터넷 끊기’ 류의 일반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도 평범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온라인 세계의 발달과 같은 궤도 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강박적으로 SNS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한, ‘좋아요’ 반응이 올라오면 그때만 반짝 흥분하는, 전형적인 IAD(인터넷 중독 장애) 증상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이런 책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찾아봐야 한다. 이 책은 기호에 맞춰 읽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SNS 사용을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그 세계에 접속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공유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 이미지는 대개 이상적인 페르소나로 편집된 것이다. 그런 페르소나를 향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지나친 기대를 부과한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는 물론 인터넷 상의 ‘나’가 먼저다. 현실은 낮은 자존감, 우울증, 의존증 등에 시달린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페르소나 편집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게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는 게 문제다. 편집된 페르소나가 현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로그아웃하는 순간 까마득한 높이를 떨어지는, 기분 나쁜 현실의 중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공감과 동의, 그 ‘좋아요’를 눌러주는 세계로 들어가려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SNS의 친구는 과연 진짜 친구일까? 우스갯소리지만 진짜 친구와 SNS를 하는 경우는 제외하자. 수재나 박사는 온라인의 친구는 ‘관객’이라고 일축한다. 물론 건강한 온라인 친구도 있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인데 장문의 편지만 주고받으면서 평생 서로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주고 인생의 멘토가 되는 사례는 컴퓨터라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옛날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이를 기대하기에 우리의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수재나 박사는 “태생적으로 가볍고, 정보나 긍정적 반응, 지지를 받기 위해 유지된다.(95쪽)고 썼다. 이런 가벼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온라인 친구와의 문제를 인생 최대의 미제로 남겨놓은 채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다. 심리치료 분야의 흔한 주제라고 한다. 가짜 페이스북 프로필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질투, 스토킹, 강박, 복수 등 극단적인 애정 행위를 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이 양날을 갖고 있다면 이런 비극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베어내는 날만 휘두르는 셈이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합하도록 만들어진 소셜네트워크다.”(132쪽) 혹 이런 문제는 사용자 본인이 한 번만 깊게 생각해보면 익히 해결될 것은 아니었을까.


    20대에서 30대로 슬며시 넘어가면서 나는 SNS를 통한 피드백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됐다. 좋은 말 남기는 사람들을 ‘팔로우’하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없어진 한 커뮤니티 서비스에 온갖 사진을 올리고 방명록을 남기며 옛 친구들(대부분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교우한 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본다. 그때 방명록에 남길 말들, 지금 SNS에 남길 말들은 전화해서 직접 하면 되는 거였는데. 다른 사람의 말이 좋아서 ‘팔로우’하는 거, 짧고 좋은 말들이나 아포리아 좋아하던 건 그냥 멋져 보여서 였지.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실제의 만남은 깊고 길다. SNS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짧은 말들은 사실 긴 말의 일부분이라 우리 멋대로 발췌해서 해석하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진득하게 붙어 있어야 할 공간은 그곳이 아니다.


    열심히 인터넷에 목을 매던 시절에는 수재나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정보가 어디까지 노출될 수 있는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듯도 싶다. 나는 “공개광장을 통한 자기표현을 사회적 표준으로 여기며”(154쪽) 자란 세대까지는 아니다. 자신을 꾸미는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가감 없이, 일상과 감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신체까지 노출시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이들을 보면 우리가 과연 어느 선까지 온라인 세계에 자신을 담아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인터넷 세계의 변화를 목격한 세대는 너무 빨라진 기술의 속도에 일순간 거부반응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하는 것이, 그래야만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의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새로운 세대들은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0대들이 유독 SNS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까닭 중 하나가 이로 설명된다. 그 때문에 수재나 박사는 부모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을 적었다. 여러 세대가 조금씩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수재나 박사도 SNS의 건강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사 본인도 SNS에 푹 빠져 있던 일반적 경험을 한 당사자다. 다만 그녀가 주목하고 싶은 건 우리가 그 세계에 중독되어 잃어버리게 될 우리 자신의 가치다. 부모가 게임 하는 아이 뒤에서 잔소리를 쏟아낸다. 아이는 당연히 싫어한다. 부모는 격동의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와 사이가 조금 틀어질 수도 있다는, 부모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리고서라도 아이를 공부시키고 싶다. 아이는 게임과 공부가 서로 상극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그 중독의 대상에게 자기 자신의 많은 부분을 거의 무담보로 넘겨준다는 뜻. 부모는 아이 스스로가 주체로 자라길 바란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어른이 “공부 좀 해라.”라고 말하는 것, 그 속뜻을 아이가 알기에는 너무 어리기도 하다. 중독의 대상에 의존하지 말 것. 이것은 중독의 마력을 지닌 무수히 많은 이 세상의 것들 앞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제 1 원칙이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근거하여 결정하면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241쪽)


    작업수행능력이 떨어진다. 기억력도 감퇴한다. 우울증이 생길 수 있고, 심한 경우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마약에 가까워질 확률도 높아진다. 강박충동이 일어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섭식장애가 와서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수재나 박사가 파괴자(사보타주), 나르시시스트, 순교자, 유혹자, 스토커, 이렇게 다섯 부류로 나눈 ‘SNS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 때문에 SNS 반응을 받을 때만 반짝 기분이 좋아 감정의 굴곡이 심해질 수도 있고, FOMO(소외 공포증)를 겪어 불안해질 수도 있다. 뭔가 포스팅을 남겨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정작 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올려버리는 말 못할 해프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저건 분명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전혀 건강하지도 않다. 박사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SNS는 분명 화합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의 자존감을 스스로 갉아먹거나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우리는 애당초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용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다. 해결책도 개개인에게 다르게 주어질 것이다. 자본의 생리는 앞서 말한 폐해의 책임을 이용자에게 고스란히 넘기곤 한다. 이용자인 우리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단히 식상한 말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일상 습관을 건강하게 다져놓는 것밖에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보면, 인터넷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물에서 나오기만 하면 된다. 페이스북 중독 예방책이라고 해서 수재나 박사가 10가지 방법을 적어놓았다. 다 모아서 합쳐놓으면 “담근 발을 조금씩 빼라.”로 일축된다. 금연하려면 담배를 멀리해야 하고, 살을 빼려면 가급적 덜 먹어야 하며, 도박을 끊으려면 도박장 근처에도 가지 않으면 된다. 박사의 지침대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자신이 일상과 SNS 세계 사이에서 훌륭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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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유니버스 - UFO, 외계인,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한 모든 것
돈 링컨 지음, 김지선 옮김 / 컬처룩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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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5



    다큐멘터리인 척 하는 영화에 <유로파 리포트(Europa Report)>라는 2013년 SF 스릴러가 있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났다는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에 대원들의 역경과 희생, 불신 등으로 살을 붙인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샬토 코플리(우리에게도 영화 <디스트릭트 9>의 비운의 주인공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배우)가 희생하는 대원으로 나와 반가웠다. 사실 NASA와 세계 유수의 우주 관련 학자들은 유로파에 생명체가 살 확률을 높게 잡는다.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었는데, 이를 아는 이에게 <유로파 리포트>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가는 그저 그런 영화’ 정도로 비춰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이 글의 서문을 영화 이야기로 연 까닭은, 그럼에도 <유로파 리포트>가 외계생명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외계생명체는 흡사 영화 <매트릭스>의 ‘추적자’를 생각나게 하는, ‘오징어’형이다. 눈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불빛도 쏜다. 일그러진 화면이라 아무리 돌려봐도 정확히 볼 순 없지만 이 영화 역시 우리가 생각해온 전형적인 외계생명체 중 하나를 등장시켰다. 그래도 ‘오징어’형 외계생명체가 유로파에 실제 있을 수 있다. 유로파의 광활한 얼음 대지 밑은 바다로 추정된다. 지구의 바다에는 오징어가 있다. 아무렇게나 영화 제작자들이 그런 외계생명체를 가져다 CG로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 밝히겠는데, 나는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E.T.>나 <디스트릭트 9>, <에일리언>, <프로메테우스>, <스타워즈> 시리즈, 드라마 <X 파일>처럼 주로 서구 문화가 흥행몰이를 위해 개량한 외계생명체의 형태가 실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 <콘택트>처럼 신비한 체험으로 그들을 만날 가능성도 낮다고 본다. 외계‘인’에 대한 인류의 로망은 정말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런 지적 존재가 우리와 접촉할 가능성, 그리고 그들의 문명이 우리와 만날 만큼 충분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소 회의적이다. 단지 바다를 유영하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혹은 땅을 기어 다니거나 뛰는 정도의 외계생명체는 이른바 항성계의 ‘골디락’에 들어가 있는 행성에서는 충분히 출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문제는 그게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서양에서는 온갖 공상들이 나왔지만 별로 과학적이진 않았다.



*    *    *



    이 책 <에일리언 유니버스(원제 : Alien Universe : Extraterrestrial Life in Our Minds and in the Cosmos)>에서 저자 돈 링컨은 외계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로망을 확인하고, 실제 존재가능한 형태의 외계생명체를 지구의 조건과 사례를 기준으로 추정한다. 증명하거나 아직까지는 발견할 수 없는 그 존재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혹자들은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단순히 외계만 바라보진 않는다. 오히려 이 책에는 지구의 유구한 물리∙화학적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된 조건들 안에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건, 그 단순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한다. 어쨌든 외계‘생명체’이지 않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들을 만나면 과학계는 (마치 화성의 물을 보고 실성한 우리처럼) 또 한 번 발칵 뒤집히겠지만 우리는 그 ‘전혀 다른 방식’을 아직 알지 못하기에 확인가능한 방식으로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모를 수도 있는 영역에 대해 활짝 열려 있다.


    보통 우리가 ‘외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그 저변에는 일종의 음모론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외계문명이 인류의 주요 고대문명들을 키워줬다는 이른바 ‘역기술론(역공학)’이 대표적일 것이다. 드라마 <X 파일>도 음모론의 대표주자다. 특히 돈 링컨은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강화할까봐 걱정스럽다.”(193쪽)고 우려를 드러냈다. 스컬리가 항상 멀더에게 결과적으로 승복하는 플롯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음모론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입증 외에도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음모론>이라는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책을 번역한 이종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소개된 음모론은 휘어진 공간의 착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발하고 파격적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또한 생각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의 생각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데이비드 사우스웰, <음모론>, 이종인 譯, 9쪽)


    돈 링컨은 <에일리언 유니버스>의 거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이 ‘생각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사례로 입증하는데 사용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정말 재밌다. 달에 기이한 존재들이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가십거리들로 가득한 페니 프레스, 즉 1 페니면 살 수 있는 저급 신문에 실리면서 1835년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이야기, 외계인을 목격했다고 와전된 대표적 사례인 푸 파이터(이건 미국의 밴드 푸 파이터스가 아니다.), 지금도 ‘재탕’되면 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로스웰 사건, 자신들이 외계인과 접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혹시 이런 접촉 사건을 다룬 인상적인 영화를 찾는다면 영화 <포스 카인드>를 추천한다. 나이지리아의 젊은 감독 올라턴드가 만든 이 영화의 주연은 밀라 요보비치다.) 등을 저자는 위트 있는 문체로 전한다.


    이런 사건과 더불어 인간의 창작물이 외계에 대한 인류의 환상이 다양해지고 점점 강력해지는데 일조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톰 크루즈 주연 영화 <우주 전쟁>으로 알려진 H. G. 웰스의 <우주 전쟁(1898년)>은 한 라디오 감독이 각색했다가 미국 뉴저지 주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오래된 소설과 영화 중 최근에 리메이크되어 다시금 조명을 받은 작품들도 꽤 있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바숨> 시리즈는 앤드류 스탠튼 감독의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으로 2012년 개봉했었고, 1951년의 <지구 최후의 날>은 2008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지구가 멈추는 날>로 리메이크되었다. (하지만 후자는 거의 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블록버스터가 미국의 영화시장을 상징하게 되면서 <스타 트렉>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 <에일리언> 시리즈, <스타게이트> 시리즈, <미지와의 조우> 등이 환상을 불어넣었고, 드라마 <X 파일>이 거기에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음모론을 조장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오늘날 나오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은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최근의 독창적 사례라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영화가 아니라 PC 게임이다. Maxis 사에서 2008년에 내놓은 게임 <스포어(Spore)>는 진화론과 환상의 조화나 다름없다.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로 ‘크리처’를 진화시켜 지성을 얻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게 목표이고, 진화의 단계를 넘을 때마다 모습을 각양각색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게임을 일컬어 플레이어에게 무궁무진한 권한을 줬다 하여 ‘God Game’이라 부르는데, 사실 나름 과학적인 구석이 많은 게임이다.)


    여기까지가 1~4장의 내용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MBC의 TV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를 생각하며 다채로운 사례들에 매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 링컨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5장부터 나온다. 지구의 생명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흡사 외계에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이하다. 하지만 그 생명들은 다름 아닌 지구에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환상하는 외계인의 모습에 너무 젖어있지 말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언젠가 만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이 그토록 친숙한 존재일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전무하다. 선사 시대로의 방문은 외계 세계가 얼마나 이상할지를 보여주는 가장 미미한 실마리일 뿐이다.” (224쪽)


    지구에는 진핵생물, 균, 식물, 동물 등이 있다. 나는 대학의 한 과학 관련 강의에서 노(老) 교수가 한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주에는 수많은 원자∙분자들이 있으며 그 가능한 조합의 경우의 수도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지구의 생물들이 보여주는 조합의 경우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니 그 교수는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한 생물’들의 형태가 존재하겠느냐고 학생들에게 반문했다. 물론 그 가능한 경우의 수가 전부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돈 링컨도 마찬가지. 그는 몸 대칭성, 다리의 수, 체구, 골격, 신경계, 이동, 속도 등 여러 조건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외계인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라는 우리의 공상을 좀 더 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지구중심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알아낸 바로는 생명의 4대 핵심 필요조건이 있다. 열역학 불균형(에너지 이동과 관련), 원자결합(탄소와 생명 관련), 액체 환경(액체는 생명의 ‘보편 용제’), 그리고 진화 구조(자기 복제 관련)이다. 6장 원소는 화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는 외계생명체와 외계인을 생각해볼 때 꼭 고려해봐야 하는, 적어도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들여다봐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생명의 방식을 잘 안다. 그 생명은 꼭 인간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엄청난 고도에서 사는 벌레나 열수공에서 서식하는 해저 생물들이 과학계에 안겨줬던 충격을 잊지 않고 있는 과학자들은 외계도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외계인’에 한정해서는 지구와 비슷한 조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체계적 학문에 따른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6장 원소를 보면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콘택트>에서는 외계(베가 항성)에서 온 전파를 수신하는 순간이 아주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콘택트>는 1950년대에 등장한 전파천문학과 드레이크 방정식을 기초로 한 영화다. 그 방정식의 값은 시대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이 기저에는 오늘날 SETI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외계문명에 대한 인류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1964년에 제시된 니콜라이 카르다셰프의 ‘카르다셰프 척도’도 그렇다. 외계문명의 유형에 대한 이론이다. 돈 링컨은 이 책을 2012년에 썼는데, 향후 길면 몇 십 년 안에 “우리가 유일한 존재인가?”에 대한 확답이 내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나는 화성이나 유로파가 그 답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가능성과 환경을 생각해볼 수 없다.) 아마 저자의 기대가 현실이 된다면 외계문명에 대한 인류의 로망 ‘수치’는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   *   *




    <에일리언 유니버스>가 외계를 향한 나의 환상을 부추겼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과학은 인류의 오래된 질문인 “우리는 혼자인가?”에 답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혼자이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이는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믿음과 별개이기도 하다. 과학은 확증에 기초한다. UFO 신봉자들이 그린 외계인의 해괴한 모습과 과학이 제시하는 ‘가능한 생명체의 형태’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과학이 우리의 환상을 억지로 막진 않는다. 오히려 나처럼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도심의 밝은 밤하늘에서 익숙한 별자리를 찾아보려고 검은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될 것이다. 돈 링컨도 이렇게 책을 닫는다.


    “하늘을 감시하라.”(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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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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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시리아가 자랑하는 고대 신전인 벨 신전(Temple of Bel)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시리아 측에서는 “기본적인 건축 구조는 아직 남아 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UN은 인공위성으로 찍은 이미지를 분석하여 처참하게 무너진 신전 본 건물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를 BBC가 뉴스로 발표하면서 벨 신전의 비보를 듣고 조마조마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범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ISIL, 우리가 흔히 IS라고 부르는 수니파 테러조직, 이슬람 국가가 한 범죄였다. 반달리즘의 전형이다. 벨 신전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신전이었다. 이리나 보코바 UNESCO 사무총장은 이를 두고 “문화 청소(a form of cultural cleansing)”라고 비난했다. 하버드와 옥스퍼드는 UNESCO와 합동으로 약 5천 여 대의 카메라를 파견하여 앞으로 훼손될 우려가 있는 문화유산들을 3D 사진으로 저장하겠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인류 가치가, 그 집약들이 지금 화약고 속에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곳의 무고한 사람들이 왜곡된 종교 해석을 일삼는 정치적 싸움 탓에 목숨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주요 포털사이트 검색어 10순위 안에 ‘IS 김군’이 오래도록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중동과 아프리카 등 주요 분쟁지역의 폭탄테러 소식이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분단과 대치라는 군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도 그곳의 끔찍한 상황은 살갗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아마 ‘이슬람’이라는 타문화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적잖은 영향을 주고받았을지는 몰라도 이슬람권의 테러가 바로 우리의 이웃동네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는 그 사건들을 정리한 뉴스보도나 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주장처럼 IS의 확산과 대규모 수준의 국제테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내부적인 문제와 종교적 교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IS 지도부의 성향 때문에 알카에다의 9∙11 테러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에게 대입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IS 문제로 (일부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큰 고통을 겪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IS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외교적이거나 정치적 의미에 있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IS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오해를 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려는, 그렇게 편을 쉽게 갈라버리려는 단순한 (정치적) 사고의 절차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분위기여서 하는 말이다. ‘테러-이슬람’의 구도가 자칫 우리의 머릿속에 굳어버릴 수도 있다. 서정민의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한편으로는 오늘날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이슬람 전역의 항변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슬람의 초기 역사에서 시작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슬람국가(IS)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살펴본다. 이슬람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국내 저자들의 소개서가 적잖기 때문에 이와 겹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저자는 이슬람 형성 과정에서 어떤 내부 갈등이 있었는지를 주로 살펴본다. 특히 그가 주목한 부분은 오늘날의 ‘과격 이슬람주의’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들으면서 늘 생각한 것이지만 이슬람의 문제는 사실상 무함마드 사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들은 어렸을 때 죽었고, 그는 후계자인 ‘칼리파’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서로 자신이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로 이어지는 정통 칼리파 시대, 즉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말하는 지상 최고의 이상적 국가의 시대가 끝나자, 이슬람은 세속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가의 확장과정에서는 내전이 발생했고, 극단적 사상이 등장했다. 이슬람은 타민족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오늘날처럼 시아파와 수니파가 정치적인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일이 드물었지만 문제는 정치적 상황에서 계속 발생했다. 십자군 전쟁, 그리고 몽골의 침입 등이 있었다. 이후 이슬람은 원래 주인공들이 아닌 투르크인들이 재통합했고, 그들의 쇠퇴와 멸망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서서히 이슬람공동체 곳곳이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 지금 아랍권 국가들의 국경은 서양의 손이 그은 것이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서양이 인위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아랍권 나라가 바로 레바논이다. 프랑스가 만들었다.)


    서양의 위협 속에 근대적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이슬람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혁의 ‘삼두마차’로 불린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는 서구의 제도와 기술을 도입해서 내부의 문제를 풀어가자고 주장했고, 무함마드 압두는 교육의 개혁을 강조했으며 일부다처제를 폐지하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라시드 리다는 셋 중 가장 강경하여 기독교 세계를 ‘암적 존재’라 규정하고 칼리파 제도 부활을 통해 정통 칼리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 세 주장을 보면 당시 이슬람공동체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는지 이해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상이 행동으로 옮겨진 첫 사례가 온건했다는 것이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된 무슬림형제단은 토론과 자선을 통해 영국에 대항하며 이슬람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은 나빠진다.


    세계대전으로 현재와 비슷한 국경이 그어졌지만 정부의 권위주의와 전쟁 배경 속에 극단적 이슬람주의가 등장했다.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몰랐다. 자신들과 맞지 않는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노선의 이념이 팽배했다. 지금은 자힐리야(무지)의 시대이니 하키미야(알라의 주권 회복)를 해야 하는데, 이는 글로벌 지하드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중동의 비이슬람 정권과 서방, 특히 미국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됐다. 식민통치와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과격 이슬람주의의 선명한 등장을 예고한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국가 수립 선언(1948년)이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땅’이라 했고, 유대인들은 ‘약속된 땅’이라 했다. 둘 사이의 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뉴스를 보니, 팔레스타인 측에서 얼마 전 체결한 평화조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엄포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에 곧 반응할 것이다. 둘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을 던진 채 이 지난한 분쟁의 원인을 서로에게 미루고 있는 형세다. 강건파인 하마스도 이런 와중에 등장했던 것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도 큰 충격이었다. 서방 세계는 당연히 놀랐고, 무엇보다 중동의 이슬람공동체도 놀랐다. 서방의 비호를 받던 이란의 세속왕조의 부패를 이슬람의 뜻으로 몰아낸 사례였기 때문이다. 단일혁명으로는 최대 규모의 시위대가 이 혁명에 동참했다. 해외 도피 중 이란의 국민들을 선동했던 호메이니가 귀환했고, 호메이니는 자본주의와 미국 패권주의, 세계 불공정을 타파하겠다고 했다. 이후 탈냉전시대와 1차 걸프 전쟁을 거치며 반서방정서가 이슬람사회 전역에 만연했고,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1세기 아랍의 봄 이후 IS 등장에 이르는 역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가 테러와 이슬람을 하나의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된 것은 어쩌면 서방의 뉴스 보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슬람교가 보수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미지를 이슬람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학자들은 IS와 관련된 이슬람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몇 가지 원인들이 저자의 갈무리 글에 들어 있다. 독립과정에서 서방이 일방적으로 정한 국경,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저소득층 문제의 심각성, 부족에 충성하려는 지방민들의 특성, 책임 없는 정부로 인해 발생한 국가분열사태, 그 과정에서 성숙하지 못한 국민국가 등이 학자들이 꼽는 사태의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종교를 왜곡하고 극단적인 방법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지금 IS가 통치하고 있는 영토는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시리아 정부는 지금 반군과도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토는 매우 좁다. (여기에 쿠르드족의 문제까지 겹쳐 시리아 정부가 고려해야 하는 문제는 상당히 많은데, 문제는 그들이 극단적 방법으로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IS가 침투하여 무상교육, 무료복지, 소득 재분배, 식수와 전력, 연료 등을 공급하면 저소득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 IS는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세력에게는 공포를 선사하지만 장악지역의 민심을 얻는데 있어서만큼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랍의 봄을 통해 무너져버린, 혹은 약점을 드러낸 중동의 여러 정부들이 IS의 확산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그만큼 IS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칼리파 국가를 선언하며 자신들과 손을 잡아야만 ‘합법적인 지하드 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있다. ‘IS 김군’ 사건으로 우리에게도 이미 IS의 SNS 홍보 실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서양에서도 그들의 홍보에 ‘선전의 정석’이라는 평을 달았을 정도다. 여러 해외조직이 IS에 가담하며 충성을 맹세한 것 외에 이슬람과 아무런 관련도 없던 이들이 IS의 선전에 매료되어 비행기를 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IS에 접근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다. 여기에다 전문미디어 설립, 온라인매거진 발행, 앱 활용, 드라마 방영 등으로 포근한 이미지를 대외에 뽐내는데 성공했다. 미 정보국은 90여 개 국에서 약 2만여 명이 IS에 지원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과 무기 등으로 이미 준국가의 형태를 갖춘 상태다. 다만 비타협적 성격을 가진 세력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공포통치가 자행되고 있어 빠른 확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전망이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한 히즈불라(헤즈볼라), 알카에다, 나이지리아의 보코 하람, 소말리아의 알 샤밥 등과 IS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IS는 테러 집단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민병대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는데, 테러 집단과는 달리 확실히 통치하는 영토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60여 개 국이 연합군을 꾸렸고, 오바마 대통령도 “죽음의 조직(network of death)”이라 부르며 국제사회의 동참을 적극 요청할 정도다. (IS는 수니파이므로) 시아파 맹주 이란도 이라크와 시리아 사태에 개입하고 있다. 군대의 규모 상 격차가 있어 IS가 주변국을 실제 위협할 것 같진 않고, IS 사태가 타국으로 확산될 조짐도 낮긴 하지만 IS의 등장으로 중동의 불안정한 분위기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으며 그들은 더 오래 살얼음판의 정세를 지나야 할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그 분위기 속에서 탄압받는 이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 열거한 몇몇 사례들을 보면 이념의 차이가 불러오는 잔혹성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시각에서 현재의 IS 사태를 주시하거나 분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 및 온건 이슬람주의와 테러 세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같은 담론이나 시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239쪽)


    저자 서정민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슬람국가’, 즉 IS라는 용어만 놓고 보면 그들이 하는 행태가 이슬람의 뜻과 딱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대표적인 전쟁범죄, 예컨대 일부 소수파나 소수민족, 혹은 그들이 적대시하던 민족의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삼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왜곡된 이슬람 교리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행동이 앞서고 교리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가 정치의 해석 아래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졌는지 이미 충분한 사례들을 통해 들어왔고 또한 알고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이슬람권 사람들은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대해서도, IS 사태에 대해서도,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 각지에서 매일 같이 들려오는 폭탄 테러에 대해서도 비난과 비탄을 쏟아낸다.


    뉴스만으로는 중동의 사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다. 테러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구조대원들이 피투성이의 노약자를 끄집어내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오열한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로 잔인하고 때론 선정적이다. ‘테러-이슬람’의 구도가 그 사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짤막한 뉴스는 그 정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 정황이다. 이 책과 같이 중동 문제를 분석한 책들이 숱한 뉴스 보도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과 중동은 오해받아선 안 될 정도로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들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와 그들이 섞여 사는 지점은 문화 다방면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말미에서 내 가슴으로 파고든 문장들이 있어 옮기며 마친다. 이슬람은 테러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는 아랍어다. 커피에 넣는 설탕도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다. 면, 알코올도 아랍어라는 점을 한 번쯤은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긍정적인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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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미술, 사회 - 중세부터 현대까지 여성 미술의 역사
휘트니 채드윅 지음, 김이순 옮김 / 시공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2015.08.30



    그간 공부했던 미술을 짤막한 책으로 펴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콘셉트를 잡는 것부터가 문제여서 처음에는 가방 속에 들어가는 일기 정도로 잡고 필자 나름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다. 글에서 힘을 빼기 어려워 나답지 않은 캐릭터로 글을 썼더니, 동생은 평소 같은 글을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충고했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 동생이 내게 해줬던 두 번째 충고가 내게는 어려웠다.


    내가 동생에게 보여준 글에는 길을 가다 문득 본 한 여자의 모습이 하루 종일 기억에 남는 것과 미술에 대한 추억을 서로 빗댄 구절이 있었다. 다분히 과하게 꾸며 쓴 부분이긴 했는데, 동생은 그 구절에서 여성의 대상화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 남자 아이돌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지적됐던 여성과 뮤즈에 대한 누리꾼들의 논쟁을 소개해줬다. 처음에는 ‘그게 문제가 될 만한 거였나?’라는 생각이 앞섰다. 불쾌감도 있었다. 여자가 남자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고, 그 아름다움을 예술로 추앙하는 것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걸 두고 패러다임의 함정이라고 부른다. 나는 부득이하게 나만의 미술책을 펴는 작업을 관뒀다. 길게 잡으면 8년을 공부해온 미술에 대한 모든 생각에게 “잠시 멈춰라.”라고 명령하고, 거대한 회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굳어 있던 나의 세계관에 일대의 운동이 시작된 건 진화론과 우파니샤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휘트니 채드윅의 『여성, 미술, 사회(Women, Art, and Society)』의 서문은 미술에 대한 글을 써왔던, 그리고 공부해왔던 나의 작업을 모두 정지시키고 그 판을 뒤집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줬다. 고민거리가 크게 늘어 기분이 좋진 않다. 하지만 결코 옆으로 밀어놓고 싶지 않은 고민이다. 왜 그런지 이 책의 서문을 빌려가며 적어본다.



*   *   *



    미술을 공부하며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적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15세기까지 서구의 주요 작품들을 생산해낸 제작방식인 ‘템페라(tempera)’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속 주인공 때문이었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 대한 일화를 읽으며 마녀사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 비극에 눈살을 찌푸린 적도 있었다. 가장 최근은 미술 블로그를 할 때였는데,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은 100인의 여성 미술가들을 짤막하게나마 모아 이웃 블로거들에게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의 시선이 잘못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이렇게 글로 적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충돌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미술사를 공부하는 남성인 나에게 여성은 대상, 혹은 재현물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작품을 그저 재현물, representations이라고 보는 시각에 우리는 아직도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구차한 변명 하나를 해볼 수 있다. ‘그렇게 적힌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주류인 환경에서, 그리고 여성을 그렇게 보는 시대 속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 그 시각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내가 뮤즈에 대한 논쟁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질문이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먼저 묻기 전에 반사적으로 든 궁금증이자, 일종의 변호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물들어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공부한 미술사의 모든 것을 수정해야 한다고?’라는 억울함도 있었다.)


    오늘날의 환경도 나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은 소비와 소유의 대상이다. 인터넷에 나도는 수많은 선정적인 광고들은 자본주의가 여성을 어떻게 ‘이미지화’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예쁜 여자 운동선수가 나오면 누리꾼들은 순간적으로, 아니 돌발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보여지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는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 그로 인한 시각적 즐거움과 거의 자연적인 결합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모 방송사의 아카데미에 다니며 느꼈던 실망 중 하나는 “그래서 예뻐?”라는 한 작가의 질문이었다. TV에 나오는 여자의 얼굴은 가급적 예뻐야 한다. 그 작가에게 실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시청률이 조금이라도 더 나오는 TV 프로그램의 특성, 아니 그보다는 그래야 잘 볼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봐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지난 역사적 전통, 그리고 그걸 아주 잘 이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이미지 사회 속에서, 그렇다면 그것과 저항하려는 페미니즘 미술의 움직임은 얼마나 고독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페미니즘 미술이 극복하려고 했던 건 여성과 저속함의 연결고리였다. 이건 사실 더 크게 보면 공예와 고급미술 사이의 위계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노력과도 닿아 있다. 알겠지만 여성은 공예와 더 가깝다고 봤다. 고급미술은 당연히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다시피 했다. 우리는 둘 중 누구를 봤을까? 고급과 거리가 있는 것에 거리감을 두려는 경향에 휩쓸리기 쉬운 우리가 말이다. 고급은 우리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오래도록 유전됐다. 여자는 공예품이나 만드는, 고급미술과는 거리가 멀어서 미술사에 굳이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취급됐다. 페미니즘은 이걸 거부했다.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된 이 이론은 운동의 형태로도 이어졌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시 관람자들에게도 상당한 당혹감을 줬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주로 나왔다. 여성의 신체로 누드가 제시됐다. 거리에 옷을 벗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여성미술가, 자신의 몸에 온통 피어싱을 한 여성미술가,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가 옷을 벗은 채 관람객들 앞에서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여성미술가. 여기서 여성의 신체는 대상이 아닌 주체로 거대한 전환을 한다. 이 시대의 누드 작품은 19세기의 남성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 모델의 누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체를 드러내는 과장되고 폭력적인 방식은 그 공격력을 우리들의 시선에게 행사한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에서 제외시키거나 아예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여 우리의 지배적 시선을 두 번 조롱한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관람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저 미술가가 돈을 벌려고 환장을 했다며 야유를 보낸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메카라 불리는 영국에서도 한동안 그런 미술에 ‘쓰레기’라는 제목을 선언조로 붙인 언론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했었다.


    미술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권력 이데올로기는 남성 위주의 담론을 생산해왔다. 남성은 다시 권력을 생산한다. 이 둘이 거의 뫼비우스의 띠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관습적 이해라는 건 여기서 나온다. 미술사도 여기에 들어 있다. 미술의 모든 것이 남성 위주의 담론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를 쓴 사람이 대놓고 “나는 남성 위주로 썼어요.”라고 말한 적은 없다. 이런 미술사의 본질은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와 서술이라는 체계적인 학술 방식에 포장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이를 ‘포장’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미술은 곧 권력이요, 미술사는 권력의 서술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연구가 주류다. 미술 상식에 많은 부분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걸 배웠니 피해자라면 피해자였고, 그런 글을 썼으니 권력의 생산자이기도 했다.



*   *   *



    페미니즘 미술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 일상이다. 나의 ‘여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상화, TV에 나오려면 일단 예뻐야 한다는 한 작가의 말, 예쁜 여자 운동선수에 대한 돌발적 관심. 그밖에 또 얼마나 많이 적을 수 있을까. 여성을 미적 대상으로 보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여성 스스로를 주체로 내세우는 페미니즘 미술의 규모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채드윅도 인정했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성 미술가들도 많다. 더군다나 미술을 공부한 나의 입장에서 보면 미술의 현실 참여, 혹은 현실 속 패러다임의 전환 등이 이론에서처럼 그렇게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가 그 주체들을 보려고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질문이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페미니즘 미술은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이것도 권력적 표현이지만 편의상 용어를 쓰자면) 미술 사조를 통틀어 가장 현실 참여적이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권력의 밖에서 그 권력을 부수는 정치적 목소리를 가장 많이 내야 하는 운동, 반드시 운동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술은 우리가 아는 기존의 ‘예술’이라는 것의 성격에서 탈피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전적으로 페미니즘 안에서 형성되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로지 ‘여성’의 기준으로 보는 어떤 시각이 아니다. 한때는 그러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는 푸코의 권력 고찰을 통해 그 한계가 지적된 바 있었다. 푸코는 권력이 제도와 담론, 생산되는 지식의 형태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즉, 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존의 권력을 부수려는 그 어떠한 것도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반드시 ‘비권력적’이어야 한다. 이를 적용하면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을 위한, 여성만의, 여성에 의한 미술이어서는 안 된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형성한 권력 자체를 해체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개념을 만들고, 차이를 세우며, 위계를 형성하는 권력을 해체시키는 것이 페미니즘의 특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미술은 젠더, 인종, 계급, 성적 경향, 나이 등을 모두 포괄하여 저항해야 한다. 대단히 넓은 미술이며, 거의 180도에 가까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의 근거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다르게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은 권력지향적이지 않다. 해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의 공존이 얼마나 어렵고, 권력망과 다른 권력망 사이의 파괴적인 행동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빈번하고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만약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결론이 난다면, 어쩌면 페미니즘은 인간 그 자체와 싸워야하는지도 모른다.


   이 운동이 ‘저항’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까닭이 아마 그것이 아닐까. 해체를 위한 행동 방안으로 우리가 목격해왔던 행동 중 가장 눈에 띈 것도 아무래도 저항이었다. 비권력화를 향한 실천적 행동.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비권력화’는, 즉 나를 계속 변두리로 밀어내려는 작업은 권력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면서도 권력을 부수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물리적 저항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 미술에서 폭력성을 목격하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가 예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당당하게 항변할 수 있다. (사실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여성 육체의 아름다움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그렇지 않은 육체를 부각시킨 작품은 시각적 폭력으로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다. 이 폭력이 주는 충격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쾌한 진실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그것과 대면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받아들이진 못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임인데 어쩌겠는가.



*   *   *



    한편으로는 기존의 미술사를 공부해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진 않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서문만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미술의 역사와 미술가와 미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여성을 비롯한 ‘타자성’ 짙은 오늘날의 ‘주체’들에게 어떤 시각을 가져야하는지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은 인간은 하나의 종(種)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을 줬다. 자연에 대한 경이를 키웠고, 그 경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신성성에 대한 공감도 기를 수 있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드는 감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그때마다 느낀다. 우주에 대한 관심도 더욱 많아졌다. 그와 관련된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는 것이 즐거운 소일거리 중 하나다. 우파니샤드는 ‘동시성’에 대한 관념을 줬다. 나는 하나의 대상이 여기와 저기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대학 때 배운 장자의 사상도 이에 감응하도록 했을지 모르겠다. 글로 풀면 난잡해지는 생각이라 서술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는 분명한 사상적 경험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전환이 내게 찾아온 듯하다.


    언젠가 동생이 내게 “오빠는 어디 가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진 못한다. 겨우 몇 주 고민해놓고 아는 것처럼 말하면 그 말은 범죄이고, 그 글은 범죄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부단히 생각하고 고민하면 이것이 언젠가는 나의 시선을 진정으로 회전시킨, 내 삶을 전환시킨 또 한 번의 기회였노라고 회상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술의 다양한 일화를 소개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술을 공부한 보람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미술이 다른 시선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매우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공감할 수 없을 것 같고, 난해하며, 불쾌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 속에 진리가 있다는 현인들의 말을 굳게 믿고 있다. 이제 막 쓴약을 들이킨 아이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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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지혜 - 세계 여러 문화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
마가레테 브룬스 지음, 김정근.조이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2015.08.25



    세상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는 크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동면을 위해 한껏 먹어두는 곰처럼 미술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들을 찾아다니며 흡수하려고 했다. 덕분에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종교, 광물질, 나무, 외국어 등을 예전보다는 많이 알게 됐다. 그것들을 긴 시간 소화하면서는 나만의 미술관을 꾸리고 책을 써나갈 수 있겠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학자의 마음, 작가의 시선, 그리고 관객(혹은 독자)의 관심 사이를 오고 가는 상상도 했다. 참 매력적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러 종류의 블록을 앞에 둔 아이가 된 듯하다. ‘저걸 어떤 모양으로 쌓을 수 있을까?’ 조합의 문제를 생각한다. 재료의 모양과 성질을 모르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나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명제이자 불변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는 원점, 아니 바닥 같은 게 보일 것이었다. 미술의 표면을 뚫는 깊은 책들을 읽어갔고, 내가 가진 그 어떤 도구로도 더 이상 파내려갈 수 없는 신비한 물질로 된 표층을 발견했다. 그 표층의 이름은 ‘눈’이었다.


    미술은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삼스런 이 문장은 의외로 많은 걸 이야기한다.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눈을 둘러싼 세계다. 따라서 미술만큼 ‘철학하기’ 좋은 분야도 사실 드물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때로는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눈은 가끔 거짓말을 말한다. 어떤 것이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반면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는 단초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판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못 볼 수도 있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만 볼 수도 있다. 눈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눈으로는 절대적 진리나 객관을 말할 수 없다.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 이것이 진리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가능하다.) 따라서 미술도 그러하다.


    마르가레테 브룬스의 『눈의 지혜(Die Weisheit des Auges)』는 눈이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열게 해주었는지 설명해주는 대단히 깊은 책이다.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눈에 대해 쉽고 간편하게 설명해주겠다고 벼렸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글, 겉핥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근원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때때로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의 이야기 정도로 취급하는데, 잠시라도 시간을 내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눈의 지혜>는 나의 별 볼 일 없는 이름을 걸어서라도 필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구석기와 신석기(즉 구상과 추상), 고대 이집트, 동양화, 이슬람, 그리스도교, 르네상스, 현대회화로 구성된 이 책에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시대의 일화나 미술, 철학, 역사 등의 전문용어들이 실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 재료보다도 그 재료들로 마르가레테가 무엇을 엮어가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동양화에 대한 그녀의 이해에 감탄하기도 했다. 마치 동양 철학을 전공한 사람처럼 문장을 다룰 줄도 안다.) 눈은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그녀의 메시지다. 이 책은 영원과도 같은 세계로 필멸의 우리를 초대하는 한 권짜리 손길인 셈이다. 적어도 그에 관해서는 내게 가장 진득한 책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인류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의 긴 역사를 통째로 대상으로 한다 가정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유형과 무형을 본다. 여기서 ‘무형(無形)’은 정말 형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형태,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잡스러운 형태’를 의미한다. 인류가 본 최초의 유형은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이 당연 아니었다. 그리기 이전에는 그려진 형태를 봤을 것이다. 바로 머릿속으로 그려진 형태. 주로 동물이 아니었을까. 어제 동료들과 함께 잡은 야생소의 뿔 달린 머리가 바위 속에 그려져 있다. 최초의 화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눈’ 그 자체였다. 최초의 미술은 화폭이 아닌 머릿속에서 ‘발견’된 것이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이후 미술의 역사는 꽉 채우는 그림, 비워놓는 그림, 옆모습만 그리는 그림, 선원근법을 사용한 그림, 역원근법을 이용한 그림, 직접 보고 그리는 그림, 이상(理想)을 그리는 그림 등 매우 다양한 가지로 진행됐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릴 수 있다. 유형(有形). 미술은 머릿속에서 형태를 그린 최초의 이름 모를 인간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유형에 봉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 않은 대상까지도 유형의 세계로 끌어다 놨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화다. 그릴 수 없는 대상은 문자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예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글씨에서 기(氣)를 느끼는 이들이 있었으며, 아무도 보지 못한 선인(仙人)을 그림에 그려 교훈으로 삼기도 했다. 침묵은 여백이 되었다. 또한 여백으로 침묵하기도 했다. 색채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광물질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자본의 움직임에 일조했다. 인간은 이렇게 눈의 노예를 자처했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림으로 ‘거짓말’까지 하게 됐을까. 이제는 각도가 변할 때마다 달리 보이는 그림이 전시관에 걸려 관람객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낸다. 똑똑한 작가들은 눈이 사람을 얼마나 기만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한때 우리는 사진으로 시간을 그리는 지경에 이르렀기도 했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유형의 화폭을 보게 됐다. 이걸 ‘무형’이라 불러도 괜찮은지, 아예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제멋대로 던져놓고 화단(畵壇)의 고평을 받아 세계적인 화가가 된 한 남자를 두고, 그것이 예술적으로 정말 공정한 일이었는가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유형에서 해방되려는 인간의 움직임은 최대한 무작위에 가까운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유사 이래 인간이 이런 전환을 겪은 적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 폴록은 무작위적인 형상 속에서 작위적 형상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나는 그도 이 치명적 단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 무당처럼 춤을 추며 물감을 휘갈긴 것이리라. 이후 마크 로스코는 아예 형상을 떠올리지 못하게 색면(色面)만 남겼다. 이와 비슷한 일은 반세기 전 러시아에서도 있었다. 유형에서 도망치려는 인간의 무모한 시도는 추상의 형태와 색만 남기고 다 걷어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르가레테는 이 문장을 남기고 책을 닫았다.


    “형상. 성스럽고 악마적이고 가치 없고 쓸모없으며 강력한 형상들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냥꾼과 채집가로 수십 만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림이 그려진 동굴을 영원히 떠났고, 새로운 형상을 지닌 채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춤추듯 나아갔던 인간들만큼이나 현재의 인간들도 기본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르가레테 브룬스,『눈의 지혜』, 449쪽)


    나는 크게 늘어나고, 동시에 아주 작아지는 세상을 본다. 상이한 형태로 공존이 가능한 절대의 존재를, 마치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그런 기이하면서도 고차원적인,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눈은 분명 제한적 생체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인류의 형상 속 역사, 그 춤을 추는 것 같았던 화려했던 역사는 우리에게 깊은 문화적 감흥을 줬다. 인간을 고고한 존재로 만들어 자존감을 심어줬다. 수많은 예술 분야와 서로 조우하면서 우리는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을 거의 무한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그릴 것인가? 여기서 그만 둘 것인가?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더 그리게 된다. 마르가레테의 마지막 문단에도 답은 나와 있다.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렇게 “춤추듯” 나아가며 형상을 그릴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주의 손아귀에서 멸망할 때까지 우리는 형상과 함께 어우러져 주인인 듯 노예인 듯 일생을 영위하다 그 모든 것을 남겨놓고 사라질 것이다. 이따금 미술을 공부하다 감상에 젖을 때면 나는 모니터 속 그림 앞에서 깜빡거리는 눈을 비비곤 한다. 위대한 감옥의 철창을 우리는 뜯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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