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3


    땅콩문고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혹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재고 있나요?” 집이 일산이라 방문 구매하겠다고 했다. “네, 지금 오시면 있습니다.” 오후 세 시 반. 구름이 옅은 그늘을 깔아놓은 틈을 타 클릿슈즈를 신고 나갔다. 페달에 걸리는 슈즈 소리가 경쾌했다. 습기 가득 머금은 날이라 땀으로 샤워를 했지만 로드바이크는 가벼웠다. ‘어떻게 생긴 서점일까? 책 포장은 예쁘게 해주셨을까?’ 설레면 힘이 나는가보다.


    땀범벅이 되어 실례가 아닐까 했는데, 친절하고 단아하신 주인께서 곱게 포장해놓은 책을 내어주셨다. 이 책이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으셨다고 하셔서 “요즘 트윗에서도 이 책 이야기만 하더라고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온라인 구매 대기자가 연락이 없어, 딱 한 권 남아 있던 이 소중한 재고는 나의 품에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 꼬리를 문 생각이 내 옆을 나란히 달렸다. 지금 내가 등에 맨 가방 속 한 권의 책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고 가는 중일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일산의 일상을 봤다. 중학생들이 하교 중이다. 재활센터 앞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눈이 마주쳤다. 양손 가득 무거운 장보따리를 든 채 집으로 향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신호를 기다리는 나를 바라보셨다. 일상이다. 자연스럽게 얽매여 있는 일상이다. 자연스러움은 무섭다. 무서우니 쉽게 반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트윗은 지금 용광로다. 동생이 말했다. “오빠는 어디 가서 페미니스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서 권유대로 4월부터 트윗을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7일에 강남역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강남역으로 가는 동생이 대신 포스트잇을 붙여주겠다고 해서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고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나는 그저 미안해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나는 남자다. 용광로에 들어가 하나둘 해체된 나는 더 이상 글을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청하고, 읽고, 공감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정희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이라영, 김현경, 코델리아 파인, 마사 누스바움을 사서 서문을 읽었다. 미술, 철학, 종교를 지나가며 지난 십 수 년 간 이어왔던 지적 여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반문했다. 용기를 냈다. 결국 나는 쪼그라지고 초라해졌다. 나는 슬펐으나, 새롭게 바뀔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놓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은 아직도 수없이 많다.


    내가 가진 것들 중 상대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건 내게 소중했던 것이다.”라는 환상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상대는 여성과 LGBT, 사회에서 분명히 ‘약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객체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 내가 트윗을 놓을 수 없는 이유, 그곳에서 (분노의 형태로, 때론 설득의 형태로) 언급되는 이슈들에 매일 집중하는 이유는 나의 환상을 포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대신 상대의 고통을 바라본다.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져서는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서는 안 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36쪽) 트윗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지성과 공인들에게 쓴소리와 지적을 아끼지 않는 여성들에게, 나는 매일 배운다. 고통을 잊거나 지우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람의 인식은 언제나 더 넓고 깊어질 수 있다고 믿기에, 먼 미래를 본다. 그 날이 희망적이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분명 바뀌고 있다. 편견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명백한 ‘편견’이라 부른다.


    기만하지 않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용기 없는 자는 추억 속으로 죽어갈 뿐이다. 진짜 죽진 않는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으로 남는다. 나는 그러기 싫다. 책을 읽어왔고, 사람을 생각했고, 역사를 들여다봤고, 가끔은 어설프게나마 진리를 추구하기도 했던 충실한 독자로서 그럴 순 없다. 오늘 내가 등에 짊어지고 온 한 권의 책은 그런 것이었다. 내게 용기를 준 동생에 대한 보답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뭔가를 덤으로 얻는 걸 참 못하는) 나는 사장님께 "이거 책갈피인가요?"하고 여쭤봤다. 사장님은 그걸 내게 흔쾌히 내어주셨고, 나는 그 친절을 동생에게 건네줬다. 내가 받은 과분한 것들에게 배신하지 않는 삶을 살길 바란다. 용기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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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7-1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어쩐지 감동적입니다....ㅠ

탕기 2016-07-18 20:10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 독서 중입니다. 동생에게 빚진 바가 많군요.

오거서 2016-07-14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동적입니다!

탕기 2016-07-18 20:11   좋아요 1 | URL
이 각오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五車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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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제 1책 :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김민아 지음 / 뜨인돌



    염운옥의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에 이은 독서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다가, 마침 신간추천을 해야 하는 과제와 맞물린 책 한 권을 찾았다.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이다. 염운옥은 20세기 초반 영국 우생학 운동의 한 축을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도맡게 된 아이러니한 경위를 설명한다. 페미니즘과 우생학의 제휴는, 사실 맥락 없이 듣게 되면 우리에게 대단히 이상한 조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배경이 바로 장애에 대한 차별 의식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의 권리'가 전면에 배치됐고, 우생학에서 이미 가장 퇴화된 '인종'으로 취급된 장애우들에 대한 권리 주장은 당시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어 질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장애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는가? 마음 약한 내게는 장애우를 돕는 사람들의 용감한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하는 도덕적 비겁함이 있다. (이건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비겁함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앞날은 뻔하다.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쓸 권리가 없는, 하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근래 약자, 혐오, 차별 등을 주제로 한, 인문의 의무를 다하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김민아의 책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지난 달, 나는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를 했는데, 신간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도 오지 않았다. 적잖이 실망했음을 밝히고 싶었지만, 나는 성실한 독자이고 싶기에 보내준 두 권의 책에 대한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끝냈다. 보내주시는 분의 사정도 있을 테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자, 혐오, 차별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담은 책을 한 권씩 보내줬으면 한다. 구색이 신간'평가'단이지, 나는 우리가 신간'광고'단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독자다. 책을 읽고 그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하는 위치에서 무슨 '평가'를... (나는 '서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책에 대한 나의 모든 글에는 '복기'라는 부제가 붙는다.) 그러니 이왕 10개가 넘는 리뷰들을 붙여 '광고'해줄 의도라면, 적어도 인문을 다루는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시대적 주제들과 도덕을 '광고'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런 책들을 보내 인문의 취지를 도드라지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제 2책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가와타 후미코 지음 / 안해룡, 김해경 옮김 / 바다출판사



    이 책을 '추천'한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할까 싶다. 저미는 마음으로 들여다봐야만 할 책인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그 책을 읽으면서 잊지 않게 된다. 저자 가와타 후미코는 21세의 어린 나이에 배봉기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고, 책을 냈다. 일본 여성이 바라본 위안부 문제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근래의 화두에 가장 닿아 있는 책이다. 언론에서 양심적 일본 지식인들을 여럿 보도해오고 있는 까닭에 가와타 같은 이들의 행보가 놀랍진 않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용기'라는 미덕에 있어서. 일본 사회는 지금 갈필을 잡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정부를 향한 불신에 장작더미들이 날아들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심적 판단이 화두가 됐다. 그럼에도 일본 주류는 여전히 보수이고, 그녀/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그릇된 역사를 강제적으로 주입받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正)을 수호하려면, 그 반대편에서 희생된 세대를 알아야 한다. 국가는 양심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철저하게 정치적 기업이다. 따라서 국민은 그에 저항하며, 기억해야 한다. "몇 번을 지더라도" 녹슬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기에, 인간 정신의 매듭은 풀리지 않는다. 놓지 말자고 다짐하자. 우리의 '정신줄'을. 사정이 있어 이 책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꼭 사서 읽어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벌써 저미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스베틀라나 읽기도 도무지 진전이 없다.)



















제 3책 :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이은희 / 한겨레출판



    위에서 무겁고 뜨거운 이야기만 했으니, 마지막에는 분위기를 밝게 바꿔본다. 잠깐 미술 이야기를 해보자.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서양의 전통에 따르자면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종 후보는 좁히고 좁혀 세 명으로 압축시켜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전통에 따르자면, 그 셋 중 한 명이 거의 몰표를 받는다.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버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이 이름이 낯선 이들을 위해, 우리는 그를 또 다른 명사로도 부른다. 원근법. 원래 판화를 배웠지만 건축가로 전향한 필리포는 피렌체 세례당 거리에서 자신이 발견한 선원근법 측정을 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들 중에는 (다소 이탈리아적 과장이 섞여 전하는 바대로) 동시대의 화가 마사초가 원근법 구도로 그린 <성삼위일체>라는 벽화를 보다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진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원근법은 서양회화를 획기적으로 바꿨고, 당대 화가들 중 영민한 이들은 반드시 그 개념을 익혀야 한다고 직감했다. '파올로 우첼로'라는 화가는 얼마나 그걸 뼈저리게 느꼈는지, 식음을 전폐한 채 원근법 공부와 드로잉 실습을 하는 바람에 아내의 걱정을 샀다고 전해진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은 서양회화의 '위대한 눈'처럼 풍경을 보지 않는다. 예상 외로 우리는 원근을 거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정확히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각도도 매우 제한되어 있어 초점을 무수히 조정한다. 또한 욕망하는 것만 집요하게 쳐다보는 변태적(?) 습성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본다'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전회는, 우리처럼 생각하고 읽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전환인 것이다. 그래 봤자 어차피 일상으로 돌아가므로, 전회의 횟수와 강도가 중요하다.


    필명이 '하리하라'인 이은희의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우리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안경을 쓴다. 안경이 없으면 세상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보는 것'이란 무엇일까? 또한 미술을 공부한 나에게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식으로 저마다의 의미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과학 정보들 역시 있을 것이니, 여럿이 함께 모여 '볼 만한' 책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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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창밖의 폭설







    2011년.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에 마음을 뒀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혹은 잘 모르는 채 글이라는 걸 쓴 건 그보다 더 옛날의 일이지만. 책을 읽었으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할까. 기억은 흐리다. 꿈과 비슷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우주의 탄생과 같다고 하면, 아니, 그건 너무 거창하여 나에게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뭐라도 기억을 해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그냥 읽기 시작했어요.” 이런 대답을 하더라도, 성의 없다고 느껴지진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글을 모아봤다. A4 300여 장씩 묶어서 세 권이 나왔다. 조만간 보르헤스의 한 단편으로 올릴 글이 있는데, 그걸 쓰고 나면 제 4권으로 넘어갈 참이다. 미술도 그렇고, 나에게는 세상에 내지 못할 책들이 있다. 제목은 <서해(書海)>라고 지었다. 어딘가에서 밝힌 것처럼, 보르헤스 이후 도무지 나는 ‘바다’라는 단어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술 글로 모아놓은 책도 <서해>처럼 편집하면 다섯 권에서 약간 넘친다. 그 중 어느 한 권의 (아무도 읽지 못할) 서문에 “나는 미술이라는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끼워 넣었다. 보르헤스 이후의 일이었으리라. 그 단어가 아니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나는 수영을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껏 헤엄을 치고 있는 건, 순전히 대가들의 덕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   *   *



    갈수록 나는 “모르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곤 하지만, 예전의 글들을 읽어보니 어디서 배우지도 않은 수술 실력으로, 그 가짜 기술로 책을 이리저리 찌르고 다닌 흔적들이 태반이었다. 니체가 경멸했던 그 예의 외과적 글들로. 하지만 그런 글들을 잊거나 버리진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가들의 틈에서 어깨를 움츠리며 본능적으로 겸손을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은 참으로 교활하므로 어느 날 갑자기 옛날로 돌아가는 관성을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한, 그래도 점점 추억할 거리들이 늘어나는 내 삶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 성질머리가 죽지 않는다면 노년의 내 모습은 뻔하다. 젊음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경멸할 테다. 나는 최후를 내다본다.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그동안 그려온 길을 보고, 이 세상의 정신과 가족과, 그리고 대가들에게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런 감사의 마음에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 한 톨도 하나도 없어야 한다. 금욕주의라 불러도 괜찮다.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적어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독서와 정신과 글에 있어 꽤나 보수적인 청년이라 불러도 반박할 뜻은 없다.


    <서해> 3권의 한글 파일을 쭉 편집하다가, 서재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의자를 한 바퀴 천천히 돌려봤다. 비집고 나온 책들, 비스듬한 책들, 고꾸라진 책들, 구겨진 책들. 저마다 제목의 모습으로 나를 향한 채 그 속에 무궁한 세상을 품고 있었다. 이따금 아우성치는 환청을 듣기도 한다. 나도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사물과 정신의 이상한 혼합을, 마치 광인의 환상으로 경험할 때가 있다. 그 날은 책을 전혀 못 읽는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읽는다. 자전거 타는 게 가장 속 편하다. 어쨌든 수행자가 되기에는 급하고 변덕스런 성격이라, 도무지 책과 종일 붙어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루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없다. 정 못 읽겠으면 제목이라도 돌려 읽는다. 머리가 좋지 않아 제목과 저자명도 까먹기 일쑤고, 그래서 책 읽을 때마다 이면지와 모○○ 펜을 옆에 끼고 있어야 하지만.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백 번 맞다. 가시가 돋는다.



*   *   *



    죽기 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커다란 목표는 ‘보통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거듭 찾아오는 막연함과, 사막의 자유와, 그리하여 새벽의 모습으로 내리는 무시무시한 감정들은 ‘독(讀)’이라는 단어와 ‘독(獨)’이라는 단어와, 차라리 그보다는 ‘독(毒)’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책 안 읽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이런 질문을 한다. “읽어서 뭐하게?” 이 질문을 하는 나는 무수한 나 중에서도 유독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녀석이므로, 조용히 앉아 펜을 물며 책 읽는 나 같은 서생의 용기로는 되받아칠 수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들이란 다 시원찮았다. 결국은 조금 뜨거운 마음을 가진 나를 골라 이렇게 답한다. 저 질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상태에서 허언을 하는 것이다.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읽는 거야.” 명쾌하진 않지만, 아직 이 답변을 방패삼아 지루한 삶의 공방에서 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이상한 독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책들은 있었다. 까먹고 잊고 귀찮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도 글을 쓰다보면, 특히 뱉어내고 곧장 휴지통으로 끌고 가는 수십 여 장의 장문을 쓰다보면 그 책들이 문단 문단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분명 나를 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정신의 혈관을 돌아 정신의 장기들을 꿈틀거리게 하고, 정신의 신진대사를 통해 정신의 말과 글을 생산해내는, 명백한 나의 구성체다. 생물이란 워낙 복잡하기에 (그리하여 정신은 또한 어떠한가) 그 경로를 내가 알 방도는 전혀 없다. 그런 건 대가와 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내가 과연 그녀/그들의 실험체가 될 자격은 있을까. 소심하여 부탁도 못 한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복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졸문의 벼랑에 매달려 기억을 떠올려보곤 한다.


    하지만 이런 글은 처음이라, 어떤 책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했었고 그러다가 탈이 난 적은 또 몇 번이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되돌아보다가, 실수로 약간의 위선과 허황(虛荒)과 오만을 내 얼굴에 묻혀버리는 결례를 이 글의 독자들에게 범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어쩌면 이건 전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도 바구니가 있고 나누고 싶은 바가, 돌아보니 있었다. 또한 이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가급적이면 이 졸문을 ‘독자’라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독자란 홀로 된 자이지만 저 추상의 단어로 서로 연결되며, 그렇게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특이한 집단이므로. 이건 그 집단에게 보여주는 나의 바구니다. 짚으로 엮어 초라하며, 풀냄새가 나더라도 이해해주기를.











    <서해>의 1권과 2권이다. (이렇게 보니 어느 게 1권인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얼굴 붉어지고,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뜯어고치고 싶은 기록이다. 결국 언젠가 나는 저 기록 속의 책들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와 보르헤스를 빼면 도무지 ‘제 2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므로, 이런 나태함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1권과 2권의 수정 작업은 그저 요원하기만 하다. 책이 되지 않는다는 다행스러움이 나의 유예를 끌고 끌어 저 먼 내일로 계속 잡아당기는 중이다.


   그래도 남겨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글은 사진이 아니기에,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지금의 내 거울에 반사된다. 그 반사된 풍경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나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만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안다. 잊는 것이 얼마나 아찔한 일인지.














    예술을 공부하며 나는 천재를 부러워했었다. 후대가 기억해야 할 예술의 대가들, 그녀/그들이 지닌 천재성을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봐야 했다. 시샘하던 어린 마음은, 지금은 없다. 나는 범인(凡人)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 김연수가 그런 말을 했다.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건 ‘천재성’이라는 벽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벽을 앞에 두고 견디는 일. 벽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건, 어쩌면 독서가 준 교훈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나에게 독서는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지 않은 나는 저렇게 이면지와 펜을 곁에 두고 씨름할 수밖에 없다. 여러 종이봉투에 이면지들이 나눠 담겨 있다. 기분 좋은 날에는 가지런하게 쓰다가도, 도무지 읽고 싶은 기분이 아니면 엉망으로 낙서한다. 마침표보다는 화살표와 선이 많다. 대가들은 보통 서로 이어지는 문단을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놓는, 나 같은 독자들을 곤란케 하는 훌륭한 기술을 우아하게 구사하므로.


    인용할 만한 구절을 적기보단 파란색 펜으로 내 생각을 적는다. 대학 시절 낙서 습관이 이제 와서는 좋은 동료가 된 셈이다. 다른 책과 닿아 있는 부분이라 별도로 빼놔야 하는 구절이나 내용은 빨간색 펜으로 적는다. 종교 관련 서적들, 그것이 비교종교학이 됐든 경전이 됐든 도킨스 류의 비판이 됐든 간에 그 분야의 책을 읽으면 유독 빨간색 문장들을 많이 적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적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모자람 때문에,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소설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에서 가장 많은 걸 얻는다. 내게 소설은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에 묘사된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와 같다. 내가 기대한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들쑥날쑥한 모습으로 언제나 나를 실망시켜 서재 밖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진리가 인공적인 형태로 나타날 거라고, 나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이 흐리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귀찮아 다시 찍지 않았으니, 그 괘씸한 마음을 용서받으려면 이 글의 꼬리에 책 목록을 붙여 넣어야겠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사진을 한 눈에 알아보리라.) 트림은 우리가 무엇을 먹었는지 속이지 못하도록, 아주 노골적인 냄새로 과거를 고발한다. 지금은 (올해 2월 초순부터) 한창 보르헤스에 빠져 있기 때문에 뭔가를 뱉어내듯 써내려 가면 어쩔 수 없이 ‘보르헤스적 글쓰기’라는 괴상한 걸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방식과 문체가 스며들어 그 중 아주 조금이나마 어떤 문학의 분자들을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한다. 이 작은 사진 속에는 그런 식으로 내게 들어와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책이 있다.


    이탈로 칼비노, 보리슬라프 페키치, 루쉰, 쿳시, 보후밀 흐라발, 파트리크 쥐스킨트, 나이폴, 조지 오웰, 솔제니친, 포, 보르헤스, 카프카, 골딩, 카뮈, 도리스 레싱, 다자이 오사무, 위화 … 이들의 이름은 이렇게 글로 쓰고 읽기만 해도 가슴 뛰게 한다. 정신의 맥동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고유명사다.


   이따금 나는 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논객들, 심지어는 아주 저명한 문학 인사들의 글을 들여다본다. 그 중 진지한 글들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읽어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독자에게는 말이다. 굳이 의견을 밝히라면, 나는 문학의 혁명과 문학의 ‘문학[닫힘]’ 사이에 서있다고 해야겠다. 즉, 나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도무지 뭘 얻어낸 것도 없는데 잘 읽었다며 텅 빈 독후감을 쓰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 비해 (이런 모습이 훨씬 바람직한데) 도무지 쓰지 못하겠다며 짤막하게 자신의 독서 실패를 밝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문학 중에서도 우리가 여러 세대에 걸쳐 회자해야 하는 명작들에 한해 생각해보자면, 그 작품들에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다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시해버린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냥 읽으며 즐기면 되는 대부분의 하류들은 논외다. 그건 어쩌면 단어나 문장, 혹은 감동에 목이 마르거나 어떤 보상심리 탓에 독자들이 훑고 넘겨버리는 작품으로, (인기를 끌더라도 종국에는) 별로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불가능한 도형의 형태로 세상의 다면을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작품들은 현명의 영토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작가도 그걸 고스란히 “여기 길이 있소.”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문학의 특수성은 이 난해함 속에 있다. 시대의 독자들은 그걸 해석해야 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필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빈약한 삶을 충족시킬 용기를 얻거나 현생의 비극을 타개할 수 있는 무기, 혹은 도구를 얻는다. 저마다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가능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헤럴드 블룸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지 않으면 도대체 독자들이 어느 작가에게서 지혜를 얻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상징적인 역설이다. 평생 문학에 빠져 살아온 노학자의 노망에서 나온 말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간단하고도 쉬워져서, 그것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최고의 매력일 수밖에 없으므로, 문학을 곡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에서 뭔가를 보려는 이들의 글과 논리를 상대로 비교해보면, 그 반대의 것은 그다지 호소력도 없고, 이따금 개개인의 툴툴거림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저 책들은 그냥 문학일 뿐인 문학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보건대, 분명 내게 무슨 짓을 해버린 책들이다. 독자들의 이런 신고를 통계로 내보면, 우리는 우리의 딸과 아들이 무슨 책을 건네받게 될 것인지 알게 된다.














    예술을 공부했기에, 서재에 이런 책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전공은 국문이지만 가장 많이 들여다본 건 미술이라, 시각예술에서 문학에 걸쳐 있는 이론들에서 ‘내 눈으로 보는 예술’을 도출하려는 욕심이 인 건,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분야의 추천 도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여러 권을 골라줄 수 있겠으나, 전공으로 다룰 이들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통사의 책들을 접해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세부 내용이 대단히 어렵다. ‘대단히’라는 부사로도 부족하다.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 자체가 어렵고, 이 분야에서 다루는 작품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세부 비평을 접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시간 낭비다.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때때로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통사라 해도 저자가 예술이론 진영의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이왕 접할 거면 두 세 권 정도를 빗겨 읽는 걸 추천한다.


    사실 국내에 발간되는 예술 분야 책 중에는 읽지 않아도 될 책들이 많다.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사전 찾아보거나 인터넷을 뒤지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짜깁기해서 뽑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 중에 베스트셀러도 있다. 명저여서가 아니라, 교양분야의 특성을 잘 노린 저자들의 전략이 보기 좋게 먹힌 것이다. 게다가 미술 관련 책들만 보더라도, 그 값은 컬러 도판의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학’이라는 분야에도 조금 쉽게 풀어주겠다고 서로 겹치는 책들이 많으니, 평점이나 ‘좋아요’ 등 널리고 널린 평판에 휘둘리면 골치 아파지는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쉽게 나오는 예술책들은, 한 번 맛볼 통사 형식의 책이 아니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가 없다. 아쉬운 술회이지만, 영양가 있는 예술 책들은 통사를 몇 번 읽고 나서 접할 수 있는, 난이도로 굳이 표현하자면 몇 계단 더 어려운 책들이다. 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련의 예술과 독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들여다보려면 얼마든지 깊어지는 세계다. 관심에 따라 읽으면 되는 것이다. 교양이라 멋지다거나 하는 인상은 정보 수준에서만 통한다.













    거듭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목성 보는 걸 좋아한다. 화성과 함께 1시에서 2시 방향의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는 때에는 한참 멍하니 두 점을 바라보곤 한다. 망원경을 사면 아주 본격적인 마니아가 될까봐 섣불리 접근하진 않지만, 우주의 무궁한 궁륭은 언제나 내게 과학적이고, 그와 동시에 종교적이며,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이다. 과학은 주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알게 됐다. 가족에게 보여주려고 번역한 다큐멘터리들도 꽤 있고, 얼마간은 칼 세이건과 미치오 카쿠에 푹 빠져 인문학 책을 몇 달 동안이나 전혀 읽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결정타는 아무래도 리처드 도킨스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대학 생활 말미에는 그의 뜨거운 정신에 온몸을 데였었다. 정신 못 차린 적도 있다. 성향으로 치자면 나는 이제 온화한 카렌 암스트롱 쪽으로 돌아섰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리처드와 <엣지> 필진들의 종교 비판은 유효하다. 여기저기 보면 데인 상처들이 있다. 언젠가 다시 그녀/그들에게 빠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우리에게 아주 못된 일을 자행하는 날에는.


    이렇듯 어쩔 수 없이 과학과 종교를 빗겨 읽게 되지만, 과학자들이 모두 날카로운 비난조의 필자들과 같은 건 당연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성향 탓인지 이상하게도 과학이 인간을 비판하는 책들을 쏙쏙 골라 읽었고, 그런 것들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사진에 넣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서재에 없었던 (아직도 의문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든지, 제인 구달, 혹은 우리에게 가까운 최재천 같은 저자들의 책은 객관의 옷을 입은 과학 외에 독자들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담고 있다. (레이첼은 시인이니 '과학자'라고 할 순 없어도, 예리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과학 정보들의 수준은 굉장히 높다.)


    어쩌면 나는 과학이 뭔가를 제시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서 빨리 SETI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거나, 유로파에서 (지적 생명체가 아닌) 갑각류 외계생명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공식 발표했으면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과학적 관심 말고, 과학의 손톱으로 인간 세계의 병폐를, 그 부스럼을 긁어 떼어버리는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 사진 속의 책들은 나를 힘들게 했었다. 읽기 힘든 건 둘째 치겠다. 어쨌든 시간과 낙서는 독자를 그다지 배신하진 않으므로. 이 책들의 문제는,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뭐라고 표현할 문장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능력 밖이다. 대단히 오래 됐거나,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함부로 읽을 내용이 아니라거나, 더 많은 삶을 겪고 다시 돌아와 읽으며 숙고하고 속을 긁어야만 한다거나, 이런 한계의 표지판을 면전에 대단히 노골적으로 들이댄 책들이다. 나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아는데, 그래도 들어갈 수 없는 텍스트 앞에서 뭔가 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이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어쩌면 위의 책들에 대해 이 공간에서든 아니면 휴지통 버린 글에서든 너무 많은 말을 ‘지껄였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성경>과 <꾸란>과 <우파니샤드>와 (이 사진에는 없지만 여타 경전들과), 그리고 니체는 나의 과제다. “왜 그걸 과제로 삼았느냐?”고 묻는 성질 급한 나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 침묵으로 일단의 실천을 감행하고 본다. 자전거가 정직한 건,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심장과 근육이 버텨주는 한, 자전거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몸의 그런 습관으로, 정신도 그렇게 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심산에,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교와 니체를 선택했다. 그것들이 나에게 왔고, 나는 어쩔 수 없는 과제를 받아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답을 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안 한다. 중등 교육과정에서였든 대학 과정에서였든, 난이도나 진도 따윈 전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시험이라고는 좀처럼 극복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자의 삶으로, 그런 나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시 물어봐도 딱히 대답하진 않겠지만, 왜 나는 그걸 읽기로 했을까.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재밌는 건, 나는 종교와 니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도무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 권의 시집은 참 초라하다. 그 왜소한 모습으로, 하지만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시집 앞에서는 그보다 훨씬 얇은 종이 한 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참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불량한 독자로 살고 있으나, 놀랍게도 시집의 복기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여기서 ‘읽는다’는 동사는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제한한 것인데,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누군가를 읽고 문장의 습관으로 익히거나, 혹은 기억하려고 읽는다는 뜻의 동사다. 그런 뜻으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지금 읽는 시는 이미지의 잔영으로 남는다. 시를 안 읽는다고? 졸업 이후 더 이상 쓰지는 않지만 시를 한 번도 안 읽어본 날이 없었다. 눈으로 콕 찌르면 압축된 공기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고, 시인마다 서로 다른 향기를 퍼뜨린다. 나는 꿀벌이고. 그런데 안 읽는다는 건, ‘나’라는 독자의 성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문학, 과학, 종교, 예술, 신화, 소설, 그리고 온도 높은 철학은 아무리 읽어도 울어본 적이 없다. 시만이 내가 눈물을 흘리는 독자라는 걸 알려줬다. 시는 내게 가자미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입으시는 꽃무늬 팬티이기도 했으며, 내가 언젠가 도착할 해변의 보물이기도 했고, 소리 내면서 우는 나무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문장을 만들고, 고이 접어 휴지통에 버릴 수 있다.


    대학 다닐 때는 옆으로 빗겨 메는 가방 안에 한 권의 시집을 번갈아가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생각나면 읽고, 아니면 말았다. 로욜라의 이름을 딴 대학 도서관에서, 내가 뭐 그 이름의 聖人처럼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영신 수련을 할 만한 정신 상태의 위인은 아니지만, 얇은 시집 한 권에 매달려 거미줄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린 적이 많았다. 나는 거미줄이었기에 많은 걸 놓쳤고, 의미는 저 언덕 아래로 흐름 따라 그렇게 흘러가곤 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잔영이다. 덕분에 나는 문장과 단어로 승부하려는 초보적인, 졸렬한 시인들을 걸러낼 수 있다. 나의 거미줄에 남은 시인들은 누구누구일까, 손가락으로 셈해보려다가, 귀찮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두 움큼 잡아든 시집만 사진으로 찍어봤다. 옆에 피사의 사탑처럼 버티고 있는 황현산 선생의 책은 도무지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기에, 시집이 아닌데도 염치없이 세워 놨다. 내게는 큰 나무 같은 비평이다.












    톨킨을 모르는 독자에게 위의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환상이 아닌 것들과 환상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보르헤스가 어떤 의미일지를 말하는 건 입만 아픈 일이 될 테다.) 맨 위에 있는 『The Lord of the Rings - The Fellowship of the Ring』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은인의 선물이고, 나머지는 조금씩 저축한 돈을 부숴가며 주문 후 3~4주를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하는 고역 속에 모은 원서들이다.


    우리말로 읽을 이들에게는 ‘씨앗판’ 소설을 권한다. 그 이유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을 복기한 글에서 충분히 밝혔기에 이 자리에 거듭 싣진 않겠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원서로 읽는 걸 권하진 않는다. 스스로를 톨킨 ‘덕후’라 부르는 걸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톨킨은 정말 옛날 사람이다. 지금 쓰지 않는 말들도 많고, 만들어낸 말들도 많다. 또한 소설보다는 사실 피터 잭슨의 영화가 훨씬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소설 이외에 톨킨의 세계를 풀이한,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엮은 시리즈들은 소설 원서를 읽지 않았다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비싸기도 하고, 그 시리즈는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하면서 읽을 역서들을 구할 수도 없다. 수집이 취미인 경우를 뺀다면, '비추'다.


    언젠가 톨킨을 이야기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익히 알려진 소설에 대한, 예컨대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실마릴리온』과 『후린의 아이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크리스토퍼는 물론이고 톨킨을 연구한 여러 저자들의 글을 언급하면서 끊임없는 애정을 글에다 덧바르는 실수를 범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대단히 지루하고 이 글보다 훨씬 긴 글이 될 것이다. 이러다 바보 같이 책을 써버리는 건 아닐까? 또한 톨킨은 내가 장편의 번역을 실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므로, 번역 이야기 하는 걸 빼놓지도 않을 테다.


    너무 길어질 것이 당연해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 이 마음을 저 사진에서 느껴줬다면, 나는 여기까지 동행의 걸음을 이끈 인내심 많고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꼬이지 않은 발음으로 어찌어찌 잘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니 책을 너무 험하게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구비하지 못한 다섯 권의 소장본은 부디 잘 다룰 수 있기를. 앞서 독서의 실천으로 종교와 니체를 과제로 삼은 가역(苛役)을 말했었는데, 번역의 실천은 톨킨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능수능란하게 ‘우리말 톨킨’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도 그 글을 읽을 순 없다.












    이 긴 글도 이제 막바지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사진이다. 네 권 밖에 없다. 내가 머리맡에 두고 자는 책은 딱 네 권이다. ‘머리맡’이라 함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을 말한다. 머리맡과는 전혀 관련없는 공간이지만 (나는 고등학생 이후 한 번도 책상에서 자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그곳을 ‘머리맡’이라 부르기로 했다. 글을 쓰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저 네 권의 책과 <성경>이 있다. (다른 경전을 꽂지 않은 건 순전히 책의 크기 때문이다.) 머리맡에는 저 네 권이 아니면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다. 막다른 길에 있을 때, 그것이 삶의 순간이든 독서든 작(作)이든 그건 아무 상관없는데, 그런 궁지에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한 장 한 장 다시 넘겨보는 책은 저 네 권이 전부다.


    어쩌다 저 책들을 읽게 되었는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며, 그저 질문의 질문만 될 뿐인, 돌고 도는 메타 질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래도 그런 질문을 한다. 따져보자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어쩌다 접한 이탈로의 소설 중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 것이고, 『침묵의 세계』는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리고 덧붙이자면 릴케의 추천 문구에 완전히 홀렸으므로) 읽은 것이며, 언젠가 말했지만『중력과 은총』은 이상하리만치 ‘지름신’이 강림한 겨울의 어느 날 일고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한꺼번에 사버리는 통에 두꺼운 책들 사이에 껴서 온 책이고, 『공부하는 삶』은 (순전히 말장난 같으나) 한창 대학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을 때 쥐어본 책이었다. 그러나 분명 그 시작에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운명을 믿지 않는 나는 대체 무슨 문장으로 그런 현상을 내 식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따금 다시 운명을 믿기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귀 기울인다면, 그런 세심한 배려를 기꺼이 베풀어준다면, 나는 저 네 권 말고는 그녀/그에게 아무 것도 건네줄 수가 없다. 이 책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눈을 감게 된다. 몸이 반응하는 책이다. 감히 어딘가에 네 권의 복기를 적어 내려갔었으나, 그건 전혀 나의 글이 아니다. 수많은 나 중 한 명이 괘씸하게도 글을 뱉어버렸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내가 그걸 공간에 올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아무 것도 쓰지 말라고 항상 말했다. 그 나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 읽었으니 써야한다는 초라한 강박증으로는 아무래도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 실패에 앞선 네 차례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 여러 번 다시 읽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한동안 손에 쥐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같은 공간에 있다.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 내가 ‘머리맡’이라 부르는 곳에.


    모니터를 오른쪽으로 살짝 밀어 책 한 권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날이, 내가 “다섯 권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건, 모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심을 구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너덧 권이 넘는 책을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확고부동한 비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 손에는 보통 다섯 개의 손가락만이 있으니. 부디 나는 그 손가락 모두를 한 번 쯤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독자’가 되기를. 그 무엇보다도 바란다.





*   *   *



    내가 부지런하다면 5년 뒤에는 이런 글 하나를 더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10년의 실패'를 술회하게 될 것이다. 딱히 5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의미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엉성한 나의 독서를 회상하기에는 그 정도가 알맞을 것도 같고, 1~4년이면 맛 좋은 음식 하나를 먹어도 먹다가 남길 것 같은 짧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다. 그렇게 별 의미 없는 5년이 두 번 쌓이면, 의미 있는 10년이 된다. 내일도 모르겠는데 5년 뒤를 내다 보진 못한다. 지금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여전히 답보일지도 알지 못한다. 책의 다음 문장이 뭐가 될지 전혀 모르겠는 답답함과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발휘하게 되는 인내는, 삶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다르지 않다.


    책 안 읽어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솔직히, 읽어도 훌륭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훌륭해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내 정신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테니. 그리하여 나는 그저 길가의 돌멩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독서를 통해 보석이 되려는 마음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 마음이 나를 책으로 이끈다. 역설인 것도 같고, 누가 들으면 거짓말처럼 들리긴 하겠지만 사실이다. 서두에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까지 써내려온 글에는 단 하나의 위선도 없었다. 그리고 끝까지 솔직할 수밖에 없다. 책에게 다가가 그 암호들 앞에서, 나는 부디 돌멩이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저 옆에서 비바람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의 바삭바삭 구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다. 돌멩이, 그것은 나의 저항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힘 좋게 날아가 이 세상 어딘가를 부수는, 나는 하나의 무기이자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껏 그런 글들을 읽었고, 그런 대가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불가역의 독서가 앞으로 5년은 더 실패하며 굴러갔으면 한다. 결국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별첨 : 책 링크를 아래에 덧붙여놨다.





① 소설


































































































② 예술과 문학






















































































































③ 과학
















































































④ 고역의 책












































































⑤ 머리맡에 두는 책























우울과몽상, 에드거앨런포, 이탈로칼비노, 반쪼가리자작, 존재하지않는기사, 나무위의남작, 보이지않는도시들, 우주만화, 파리대왕, 윌리엄골딩, 다섯째아이, 도리스레싱, 이방인, 카뮈,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이반데니소비치, 솔제니친, 동물농장, 조지오웰, 인간실격, 다자이오사무, 미겔스트리트, 나이폴, 알렙, 보르헤스, 좀머씨이야기, 파트리크쥐스킨트, 허삼관매혈기, 살아간다는것, 위화, 영국왕을모셨지, 보후밀흐라발, 마이클K, 존쿳시, 기적의시대, 보리슬라프페키치, 루쉰,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진중권, 조이한, 발터벤야민, 춤추는죽음, 카라바조, 임영방, 르네상스, 도상해석학, 파노프스키, 문학과예술의사회사, 아르놀트하우저, 백낙청, 루카치, 신이내린광기, 여성미술사회, 추의역사, 움베르토에코, 그림과눈물, 현대미술,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유종호, 마가레테브룬스, 미학오디세이, 예술철학, 박이문, 오타베다네히사, 부르크하르트, 허버트리트, 톨킨, 반지의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후린의아이들, 크리스토퍼톨킨, 인간없는세상, 이기적유전자, 이타적유전자, 매트리들리, 리처드도킨스, 샘해리스, 게놈, 광대한여행, 제인구달, 빌브라이슨, 재레드다이아몬드, 총균쇠, 미치오카쿠, 핀치의부리, 최재천, 레이첼카슨, 침묵의봄, 칼세이건, 악마의사도, 만들어진신, 카렌암스트롱, 신을위한변론, 불안의서, 영혼의산, 우파니샤트, 코란, 미셸푸코, 광기의역사, 니체, 쇼펜하우어, 사사키아타루, 야전과영원, 성경, 르네지라르, 폭력과성스러움, 블랑쇼, 켄윌버, 무경계, 체르노빌의목소리, 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 라마나마하르쉬, 함석한, 간디, 리처드파인만, 미메시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탄생, 이희재, 황현산, 시몬베유, 중력과은총, 침묵의세계, 피카르트, 공부하는삶, 세르티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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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from Value Investing 2016-02-29 15:47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
 
 
 

2016년 2월 20일 토요일




    나는 새 책이 오면 커버를 벗기는 버릇이 있다. 그 탓에 서재에는 두 권의 하얀 책이 꽂혀 있다. 시간의 먼지와 손때 틈에서 더욱 하얗게 보이는 책이다. 미술 공부를 할 때, 나는 이 백지 같은 두 책에게 많은 빚을 졌다. 한 권은 Belleza, 다른 한 권은 Bruttezza. 그렇다. 미(美)와 추(醜)에 관한 책이었기에, ‘미술’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고로 자주 회자된 바가 있다. 저자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 올해 여든넷인 그가, 나는 거의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어왔다. 이 어리석은 믿음은 그에 대한 큰 동경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 2016년 2월 19일 밤이었다. 이제는 내 곁에 꽂아두는 그 책이 죽은 자가 ‘썼던’ 책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더러움이요, 더러움은 아름다움이니.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움베르토가 『추의 역사(Storia della Bruttezza)』의 서문에서 언급한 맥베스의 제 1막 구절이다. 2004년과 2007년에 걸쳐 움베르토는 추와 미의 집약을 세상에 내놓았다. 미가 먼저였고, 3년 뒤 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번역본의 편집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그 책은 내게 돌덩이 같은 충격을 줬고, 나는 고서 가득한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학자처럼 몇 달이고 그것만 들여다봤었다. 『미의 역사』는 미학 관련 양서라면 어느 책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추는, 그 책을 번역한 역자도 술회했듯 여태 본격적인 주제로 대중들 앞에 소개된 적이 없는 테마였다. 한동안 미술을 공부한 독자의 입장에서 나 역시 감히 돌아보건대, 그와 같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애덤 모턴의『잔혹함에 대하여(원제 : Thinking in Action)』에는 “놀랍게도 철학사에서 심각한 잘못에 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니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덕철학자들은 주로 동기가 손쉽게 파악되는 잘못된 행위에 주목했다.”(16쪽, 변진경 옮김)라는 문장이 있다. 추와 관련된 형용사들은 주로 “거의 모두 격렬한 거부감이나 공포,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혐오감의 반응을 포함하고”(움베르토 에코, 오숙은 옮김,『추의 역사』, 16쪽) 있으며, 그 혐오가 애덤 모턴이 자신의 책에서 논하는 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서양의 미학에서, 즉 고전미학이든 근대미학이든 상관없이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모방, 더 나아가 창조(천재와 관련)의 이론을 구축한 역사에서 추는 거의 예외 없는 논외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움베르토가 『추의 역사』의 절반을 도배해놓은 도판과 인용구들을 보면 추는 분명 서양의 매력적인 주제였다. 그것도 수 천 년을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명백하다. 우리는 추와 미의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걸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수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통계를 내 두 기준의 공통점들을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출해낸 공통점을 절대화시키는 건 오류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어느 특정 집단의 민족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안다. 또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종교의 경우 그런 사례가 즐비하다. 마르크스는 150여 년도 더 전에 “돈으로 여인을 살 수 있다.”는 문장을 저서에 남겼다. 지금은 유럽적인 미에서 탈출하려는 일부 저자들의 ‘미학 설립’ 운동이 유행이다. 아방가르드가 권위를 부수기 위해 사용한 온갖 ‘추한’ 양식들을 지금 미술 애호가들은 아름답다며 좋아한다. (적어도 추가 전면적으로 승리한 적은 그때가 최초였다.)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지, 우리는 별로 고민하지 않으며, 특히 다른 한쪽에 대해 생각하는 걸 가치가 덜한 것이라 여기곤 한다.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예술을 아름다운 것을 생산해내는 창조적 행위로만 본다면, 콧등에 가려 그 너머로 결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아, 아름다워라.’라는 말만 되풀이하게 된다.


    움베르토는 『추의 역사』 마지막을 이탈로 칼비노의 글로 맺는다. 반가운 이탈로. 인용된 단편은 「참관인(La giornata d'uno scrutatore)」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번역 출간된 바가 없다.) 이탈로의 글을 읽어보면 섣불리 추에 대한 선입견을 들이댈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느껴볼 수 있다. (오히려 善을 본다.) 그 전에, 즉 이탈로를 불러오기 전에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양한 세기의 예술들이 왜 집요하게 추를 묘사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의 목소리는 주변적일지 몰라도, 일부 형이상학자들의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는 냉엄하고 슬프게도 악한 어떤 것이 있음을,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상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움베르토의 책, 436쪽) 그리하여 추는 인간적 비극으로, 우리가 혐오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비극으로 격상된다. ‘격상’이란 표현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나는 『추의 역사』를 서재에서 꺼내 다시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공부하는 이는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는데, 지적 만족을 위안 삼아 이 책을 만지작거렸던 때도 추억해봤다. 하지만 위대한 미술 이론가, 비평가, 그리고 작가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무수한 지식과 작품들 사이를 올곧게 관통하는 하나의 가치다. 언제나 그랬다. ‘보는 것’의 힘. 싫다며 밀쳐낸 사물과 대상에게 다시 눈을 주고 알아보려고 하는, 관심의 힘. 누군가 그랬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그렇다고 내가 ‘추한 것’들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까! (그러니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추한 것’들을 밀쳐내지 않는다. 미술은 내게 실로 놀라운 세계를 알려줬다. 특히 시각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많은 걸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미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깨달음은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질 것이다. 여전히 미술의 웅숭깊은 우물, 수평선 끝없는 바다에서 이곳저곳 여정을 이어가는 나에게 미술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생각해본다. 그동안 내게 도움을 준 수많은 대가들의 통찰력과 뛰어난 인내, 호기심을. 움베르토 에코는 단연 그 중 최고였다고 언제나 회고할 수 있는 학자다. 『장미의 이름』을 제외하면 그의 다른 글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 읽어본다 해도, 나는 그의 이름을 이 손때 가득한 책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안식에 들었다. 그가 내게 알려준 ‘큰 눈’은 지금껏 얻은 여러 눈 중 하나이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 무엇보다도 그 눈을 뜨게 하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리라. 곱씹어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주지시키는 인간 정신의 근원에게, 그 대가들에게, 나는 충실한 한 명의 독자로 살며 하루하루 보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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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2016-02-2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퍼 리에 이어 움베르토 에코까지...뒤늦게 소식을 전해듣고 신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네요. 에코와 그리 깊이 사귄 인연이 있었다니 탕기님은 더욱 남다른 마음이지 않을까 짐작이 됩니다. 대가들의 죽음 앞에서 저는 조금쯤은 고아가 되어버린 기분이 드네요. 그들이 남긴 무언가를 통해 저마다의 몫으로 남겨진 숙제가 있다는,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엄중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무서움 때문일런지...
이런 제 기분과는 다르게 심상한 사람들과 섞여있다가 여기 들어와 탕기님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그래서 댓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탕기 2016-02-20 22:56   좋아요 0 | URL
오후에 기분좋게 운동하고 와서도 한동안 마음 어딘가가 떠내려간 기분이었습니다. 풀꽃님 말씀마따나 심상한 이들 사이에서 저 역시 무거운 심정을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런 변변치 못한 글로나마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책을 펼쳐보니 위안은 되더군요. 저와 마음이 같으시다니 풀꽃님 댓글이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16-02-2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대가들과 그렇게 깊은 교감을 나누시는 탕기님이 부럽습니다. 엄청난 사유를 끌어 올리지 않고서는 대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없겠지요. 대가들과는 친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안식을 애도하며, 탕기님도 그 사색이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랍니다.

탕기 2016-02-20 22:52   좋아요 0 | URL
시인이시니 일개 독자인 저보다 대가들의 곁에 더 가까이 계실 텐데요. 저는 그저 대가들을 읽으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간다는 상상을 하는 젊은이일 분입니다. 마음의 상중을 이렇게 달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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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1. 『혐오에서 인류애로』 - 마사 C. 누스바움 /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혐오와 수치심(원제 : Hiding from Humanity)』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마사는 마이클 샌델을 배우다가 미국 법철학에 관심이 생겨 찾아보던 차에 알게 됐다. 마사의 그 책은 미국에서 2004년에 출간됐는데, 찾아보니 국내에는 작년에 번역 소개됐다. 10년이 넘었으니, 그녀의 영향력에 비하면 굉장히 늦은 거다. 생각해봤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장막을 출판계가 의식하고 있던 건 아닐까? 어쨌든 그쪽은 책을 '파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뭔가 주저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근 몇 년 사이에 소수와 혐오라는 단어의 멀어지고 가까움,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개념의 '유동'이 유난했다. SNS로 논의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수의 복권은 여태 한 번도 없던 일이지만, 희망을 갖는 소수들이 있다. 나는 나를 소수라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소수와 다수의 구별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게 나의 함정이다. 감정의 결여. 마사는 그걸 경계한다. 법학자로서 감정에 주목한다. 그 감정이 없으면 그녀가 말하는 인류애로 나아갈 수 없다. 『혐오에서 인류애로(원제 : From Disgust to Humanity, 미국 2010년 출간 / 옥스포드 대학교)』는 가장 날이 선 책이라 한다. 그것도 김영란 前대법관이 그런 추천을 했다. 한참 사사키를 읽으며, 르장드르와 푸코를 읽으며 언어인 법이 지닌 힘을 수많은 사례들로 확인했다.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말. 그것의 감정을 생각해봐야 한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사의 입문서로 읽어보고 싶다. 누구에게 추천하기에는, 부끄러워지는 책이다.

















2. 『덕후감』 - 김성윤 / 북인더갭


    그렇다. 나는 덕후다. 톨킨 덕후다. Banjion.com이라는 LOTRO(The Lord of the Rings Online) 국내유저 사이트에 가면 내가 번역해놓은 게임 스토리들이 있다. 게시물은 1천여 개가 넘는다. 덕후심에 한 번 자랑해본다. 그런 '덕질'을 한 사람은 우리나라 온라인 상에 나밖에 없다. 톨킨 원서들은 스무 권 가량 있다. 앞으로 네 권을 더 사야 한다. 영화 《호빗》 3부작이 끝나자 한동안 우울했다. '중간계' 6부작 확장판 영화를 다 번역해 가족들과 한동안 계속 돌려봤다. 언젠가 톨킨이 그리지 않은 중간계의 다른 이야기를 2차 창작으로 한 편 멋지게 쓰고 싶다는 생각에 청사진을 짜놓기도 했다. 단어 암기는 최악인 내가 톨킨 세계관에 나오는 수많은 단어들을 암기한다. 어느 정도 번역을 마치면 요정어(신다린)를 공부할 생각이다... 이런 사람을, 나 같은 사람을 덕후라 한다. 그리고 나는 덕후가 창조의 토양을 다져간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철학, 인문학, 과학, 미술 등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급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작업을 꾸준히 한다. 덕질로 연마한다. 덕후들에게 오해를 갖지 않는 나는,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흔히 '구조'라 부르며 쉽게 가르곤 하는 두 '구조' 사이의 혼탁한 지점을 안다. 그래도 이 덕질을 10년은 훨씬 넘게 해왔으니, 뭔가가 보일 때도 됐고. 대중문화를 두고 비생산적이라 일축하는 고고한 이들의 논리는 사절이다. 서재 한 구석에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원제 : The Dictionary of Imaginary Places)』이라는 대단히 두꺼운 책이 한 권 있다. 그곳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 어슐러 르귄파다. 『덕후감』이라니! 나를 위한 책이 아닌가!



















3. 『글쓰는 여자의 공간』 - 타니아 슐리 / 남기철 옮김 / 이봄


    네이버에서 2~3년 간 미술 블로그를 할 때, 내 공부글과 미술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 이웃의 대부분이 여자였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보다 많은 경험을, 그리고 나는 결코 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경험을 지닌 그녀들의 댓글과 반응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새벽이 내리고 목성이 희뿌연 달을 좇아 아파트 머리 위로 떠오를 때면, 옛 미술 공부의 추억이 떠올라 대가들의 그림을 펼쳐볼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여자의 공간'이다. 내게 그것은 새벽과 같다. 기억의 절차고 뭐고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반드시 찾아오는 여명 말이다. 남자인 내게. 위험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신비하다. 그래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했다. 블로그에 찾아오는 분들과 작은 온라인 카페로 소통하던 차에 현대미술의 여성 작가 100인을 추려 소개해드리면 좋겠다, 싶었다. 반응은 좋았다. "저는 소니아 들로네가 참 멋져 보여요.", "아이더 애플브루그의 작품속의 여인의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왠지 자꾸 시선을 붙드는군요.", "트레이시 에민.. 작품 저거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ㅋㅋ". 그 기획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나에게 익어 있는 남성 위주의 미술사로는, 그 어조로는 도무지 100인의 작품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과 작품 하나, 짤막한 일대기 정도로 마무리했다. 지금 『여성, 미술, 사회』를 읽으면서 반쪽짜리 미술을 배웠구나, 생각한다. 이제 그 생각을 문학으로 가져간다. 얼마간 열심히 읽고 쓰는 중이니, '여자의 공간'을, '글쓰는 여자의 공간'을 들여다보고 싶다. 김애란과의 대담, 오정희와 권지예의 단편들, 여러 기억이 떠오른다. 아, 그렇다. 『글쓰는 남자의 공간』이라는 책이었다면 쳐다도 안 봤겠지. 공간. 그것은 여자와 잘 어울리는 단어다. '품'이라는 뜻이니까.


















4.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김명남 옮김 / 창비


    동생은 SNS를 한다. 폰보다는 책이라며 그저 읽고 쓸 뿐인, 이 불성실한 오빠는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힘들다, 힘들다, 하는 오프라인 말이 아니라, 빅데이터처럼 뭔가 한 단어에 반응해서 뻗어나가는, 헐겁고 즉각적이지만 그 나름의 진실이 묻어나는 온라인 말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민감한 온라인의 말. 동생은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스트 선언의 적기라고 보는 듯하다. "오빠가 어딜 가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해본 적도 없고, 아니, 공부해보긴 했는데 그건 대학 1년 차에 어떻게든 학점을 채워야 해서 한 남학우와 쭈삣쭈삣 거리며 들어가 수많은 여학우들 사이에서 낯설게 체험해본 정도고, 그 개념을 생각의 한복판에 세워둔 적이 없다. 그런 사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이 혈관에 쌓여 생각의 흐름을 막고 실핏줄들을 터뜨렸을까. 그녀/그들은 벌써 저어만큼, 저어어만큼 생각을 하고 논의를 펼쳐 행동하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글이라며 동생이 보여준 글들을 읽어보다 아찔했던 적이 여럿.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이야말로 문학과 경전의 해라고 '선포'까지 해놓은 차에 '소수'와 '여성'이라는 단어가 서재에 들어갈 줄이야. 예상 못했었다. 그만큼 급박하게 찾아온 단어다. 기회를 놓쳐 후회한 적이 많다. 삶은 강물을 주시하는 거라 생각한다. 漢詩를 읽다 유일하게 전율이 돋았던 적도, 그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구절의 접했을 때였고. 그런 새삼스러움이 위험하고, 나를 망치더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아직은 낯선 이름. 나이지리아의 유망한 그녀의 글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호모 페미니우스? 호모 페미니쿠스? 이런 단어가 도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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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2-0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존경합니다.
요정어를 공부하실 생각이라니요???? 아아아아 요정어!!!!!
님은 진정한 덕후이십니다. ^^
친구신청했습니다. 축생이라고 퇴짜는 아니겠지요??? 호호호

탕기 2016-02-03 16:28   좋아요 0 | URL
숨겨왔던(?) 저의 덕후심을 반가워해주실 분이 알라딘에 계실 줄이야...

미야자키 하야오도 좋아합니다.
덕후까진 못 되겠지만 전편 다 보고 아트북을 사놨지요.
제게 동심이 있다면 그건 동화보다는 미야자키 덕분일 겁니다.

사람보다는 축생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