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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1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 위화(余華)
  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가. 작가란 결국 일종의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일까. 영악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무관심으로 대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용기를 큰 것이라 착각해 작가의 꿈을 꾼다는 것은, 그리하여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동정을 가지라니. 우리는 적(敵)을 동정할 수 있는가? 그들을 말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심히 떨리는 입술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화해의 두 손을 내밀 수 있는가? 행동하지 못하는데 글 쓰는 건 죄악이다. 그렇다. 애당초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의 주제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때론 우리는 침묵한다. 그것이 고상함인 것으로 착각한다. 온갖 문제에 대해 입 여는 헤픈 사람들이 있고, 그런 이들 사이에서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에는 이도저도 아닌 이들만 힘들다. 위화를 읽다보면 “아무에게나 작가라는 칭호 붙여주지 말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 참으로 높은 자리이다. 그 자리로 향하는 계단에 발이라도 붙인 듯 구는 사람들이라니. 이따금 작가라 소개하는 자들이 나와 칼럼에 써놓은 글들을 읽다보면 맛없어서 뱉곤 한다. 영양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먹겠건만.

 

 

“문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제화하고, 딱딱하게 굳어 화석이 되어가는 역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 되살려내는 작업이다. 박제화·화석화는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기억의 죽음과 의미의 영도(零度)로부터 다시 기억과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 문학이다.” - 장석주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가졌는데, 몬드리안은 못 가졌던 것이 하나 있다. 미술 얘기라 재미없을 수도 있으나, (이 글을 읽는 이도 별로 없다. 걱정도 팔자다!) 그것은 바로 대각선이다. 공책에다가 정사각형을 하나 그려보고, 그 다음에는 직삼각형을 하나 그려보면 그 텐션(tension)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몬드리안은 사각형만 그렸다. 이 자리에서 그의 회화철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언급하진 못하겠으나, 여하튼 테오와 피에트는 대각선 하나 때문에 토라졌다.
  현대회화에서 대각선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직삼각형도 곡선과 비교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곡선도 낙서에 비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텐션이 증가할수록 앞선 형태들은 ‘화석’이 된다. 장석주氏도 ‘의미의 영도’라 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회화의 영도’라 한 것과 매우 닮은 말이다. 말레비치는 그곳에서부터 회화의 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 봤다. 그리고 로드첸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의 죽음”을 선포했다.
  이들은 재미없다. 오히려 톰블리의 알 수 없는 낙서가 더 재밌다.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하다!) 여기서 픽션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화석학자들을 비하하는 말은 아닌데,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장석주氏의 말마따나 픽션은 지금 앞에서 뭔가를 움직이도록 만든다. <마이클 K>를 읽으며 그 회색빛 남아공 풍경 때문에 얼마나 낙담했던가. 또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내가 저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방관자가 되었을 때, 나는 몹시 우울하지 않았는가. 위화는 또 나를 얼마나 많이 울렸는가, 말이다. 그것은 뜨겁다. 뜨겁게 꿈틀거리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혹 모를 일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톰 리들의 일기장처럼 나를 어딘가의 세계로, 아니면 추억 속으로 아주 빠뜨리는 신비한 일이 일어날지.

 

 

(읽을 만한 책은) 물론 좋은 책이며, 생활경험의 진지한 결정(結晶)이자 사유와 감성을 꽃피우는 원동력으로, 종종 문화의 기록을 쇄신하는, 한 시대정신의 최고봉이다. 이런 책은 신기축을 세우고 신국면을 개척하여 절대로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그 깊이가 얕든 깊든, 판에 박힌 말로 에돌지 않고 실천적 혈맥과 생기를 길어 올릴 것이며, 개념과 용어의 남발로 독자와 세상을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은 (중략) 인류 지혜의 발화점이자 광원으로서 개개의 인간정신에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다.” - 한샤오궁(韓少功)
  <열렬한 책읽기> 서문의 한 대목인데, 그는 “읽을 만한 책”, “버릴 책”, “갖고 있으면 좋은 책”으로 장서를 분류하는 법을 소개했다. 서재를 살펴보면 내게는 아직 읽을 만한 책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읽었는가?”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나의 책장에는 미술책이 가장 많이 꽂혀 있고, 종교/신화관련서적, 문화관련서적, 문학관련서적, 소설책, 역사책 등이 그 다음으로 많은 듯하다. 아, 시집도 꽤 많이 있다. 수(數)를 다루는 책은 거의 없다. 수학에 젬병이었던 트라우마가 여전하다. 그래도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 수학이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따금 NASA와 Science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읽기 연습도 할 겸사겸사 기사들을 읽는데, 몰라도 재밌다.
  한샤오궁의 “좋은 책” 정의는 나에게 미션과 같다. 컴퓨터 게임에는 미션이 있다. 미션을 완수했을 때, 게임유저들은 “미션을 클리어(clear)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익숙한 그것에 비유해보건대, 나는 저 조건들 중 하나라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큰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멜랑콜리의 수준을 웃돌 폭발력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산 너머 동네의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다. 신기축과 신국면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비단 글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토로 삼고 있다. 개념과 용어의 남발이란 과연 어느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거창한 꿈을 꿔보자면 나는 결국 발화점이자 광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허투루 말하거나 글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 중 하나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그건 초등학생도 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으로 방학일기를 쓴 적이 문득 생각난다. 어렸을 땐 웃으며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다 큰 사람이 그러면 간판 내려야 한다. 요즘 비평가들이 예리한 눈으로 진단하길, 그런 작가들이 많다고 하니 책도 꼼꼼히 따져 읽자. 아니, 나부터 그렇게 해야지 되겠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 조운찬 경향신문 선임기자의 비평 中
  김우창氏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알 것 같다. “쿨하다.”라는 표현은 칭찬이다. 저 위에서 말한 위화의 고상함과도 같은 말이 아닌가. 나는 노트에 조운찬氏의 평을 팬으로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은 다음에 ‘이성적 성찰의 힘’과 ‘포용적 사고’에 밑줄을 막 그어댔다. 내겐 없는 그것들. 아, 배가 고프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 장정일
  이그잼뽈(example). 나는 그동안 블로그 포스트나, 혹은 남 보여주지 않고 폴더에 남겨둔 글을 쓸 때 얼마나 많은 보기와 일례, 그리고 비유를 사용했는지, 생각해보니 돌아본 적은 없는 듯하다. 마침 3년 동안 쓴 포스트를 한글문서로 바꾸는 중이니 얼추 통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물론 비유도 비유 나름이다. 좋은 것은 거듭 응용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한다. 작문에 있어 쉽게 풀어 쓰고자 할 때, 비유만큼 좋은 전략은 없다. 생각해보면 비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지금 유행하는 세태도 꽤 뚫고 있어야 함이 당연지사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것이 고상함과 상스러움 사이를 예리하게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상스러움’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잘 모른다. 대중적 글쓰기에 대해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우리나라의 관행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글 쓰려는 이들은 자신의 스타일이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미리 예단해봐야 한다. 결국 운전할 때 사이드미러 잘 보고 다니라는 말과 진배없다.

 

 

“참, 책은 과거가 아니야. 열여덟에 읽은 책도 지금 읽으면 전혀 처음 읽는 책 같아요. 책처럼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는게 없어. 나는 책이 자궁이고 내가 태아인 것 같아요. 서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몸이 달아오르지.”
(한 책을 펴들더니)
“아, 이것 봐! ‘준성(準星)’이란 게 있네. 불확실한 별이라... 뱃속에 있는 태아 같은 거겠지? 이런 말을 만나면, 아, 미치지!”
“종이가 아까워서. 그냥 버리면 천벌 받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은 나무를 죽여 가며 사는 존재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천벌을 덜 받으려면 종이를 아껴야죠. 백지는 내 종교예요. 보면 절 안 할 수 없고 달려가서 껴안지 않을 수가 없어요.”
- 고은

  거장은 늘 나를 반성하게 한다. <한겨레> 신문에 고은 시인의 관련기사가 있어 한참을 읽고 또 읽다가 파일로 저장해놓은 구절들인데, 노(老)시인의 넋두리야말로 진정한 ‘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봤다. 그렇다. 조금이나마 시를 사랑했을 때, 나는 단어 하나와 문장 하나에도 그리 열광했었다. 그것이 소화되면 나는 점점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이상한 경험도 했었다. 문제는 결국 시간이었고, 추진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거장들의 한마디를 조약돌 삼아 마음의 웅덩이에 빠뜨릴 수 있는 나만의 풍경화와 같은 배경을 만들어준다. 수면이 일렁이면 나는 “미치는 것”이다.

  시작(詩作)을 관둔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이다. 이따금 볼펜을 쥐고 하얀 노트를 바라보면 뭐라도 불쑥 튀어나오겠지,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나는 어제도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을 실패했다. 내년에는 한 문장이라도 시의 행으로써 써봐야겠다고 벼르고는 있는데, 무릇 욕심만 앞서면 그건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천벌을 받을 첩경이 아니겠는가 싶다. 천벌을 애써 찾아가 받는 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언제 열릴까? 백지에 자음과 모음으로 적혀 내려가던 비밀의 상형문자들 사이로 피어나던 시상(詩想)들, 그 신비스러운 체험은 언제쯤 나에게 다시 찾아올까? 그러나 막상 기대는 안 한다. 라면물처럼 빨리 끓다 이내 식어버리는 사랑으로 시인의 경지를 탐냈던 적도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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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사람

 

  5월이나 6월이었을 것이다. 철학 강의시간에 내 옆자리에는 새내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청강인데도 열심이었다.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많아 보였다. “나는 왜 새내기 때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폐적으로 글쓰기에만 몰두 하고, 생활은 기형이 되었으며, 결국 안으로 찌부러졌던 날들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참 부러웠다. 그런데 그보다는 사실 그가 철학을 대하는 태도가 더 부러웠다. 지식이라면 나도 있었다. 그가 모르는 것들 중 내가 아주 잘 아는 것도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이 나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가,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가이다. 나에게 있어 지식의 양(量)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으니. 알고 있어도 실천하거나 말로 뱉어내거나, 글로 풀어쓸 줄 모르는 지식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질적으로 제련된 지식은 사람을 고민토록 한다. “알았다.”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의 고민하는 태도였다. 5년이라는 시간을 물리고 싶은 유치한 욕망이 문득 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처럼 긴장을 유독 많이 하는 성격인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없는 용기가 있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앞에서도 질문과 의견을 열성적으로 던지는 태도는 그의 “아는 것과 고민한 것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누구든 살아가면서 그런 태도를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이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문학을 사랑하긴 했는가? 미술을 사랑하긴 했는가? 아직 못 찾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대학에서 사랑하는 학문을 못 만나는 건 비운이다.


  주변을 돌아볼까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면접, 지원서, 기업 초청 오리엔테이션 이야기를 한다. 주변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가 비로소 정확해지는데, 나는 어디에도 없다. 순위와 점수, 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말해줘도, 그들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의 위치를 내가 새내기 때 알았더라면 나는 매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부럽기도, 대견스럽기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를 자극하기도 했다. 다음 학기를 두 달 남짓 앞두고 그가 기억나는 이유이다.

 

 

 

 

 

 

미술을 놓고, 책을 읽다.

 

  바닥에 쌓인 책이 많아진 탓에 몇 달 전 부모님께서 새로 장만해주신 고동색 책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 올 한 해 내가 한 일들과 읽은 책들과 얻은 것들을 나름 헤아려보고자 했다. 무엇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분기점 같은 때가 있었다.


  나는 네이버에서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몇 년 간 꾸려왔었다. 블로그 이웃은 미술책 저자들, 화가들, 미술애호가들, 모두 나에게 도움을 주신 좋은 분들이었다. 좋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조용히 찾아주는 소중한 그분들이 있었기에 미술공부가 더욱 수월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데, 가끔 나에게는 큰 역사 속 사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부단히 노력해서 길게 포스팅 해온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다. 포스트 하나 당 A4용지 5~8장 정도는 되니, “이걸 다 언제 정리해?”라며 의욕을 잃을 때마다 그간 공부해온 양을 피부로 직접 느낀다. 쉽게 쓰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있어 어설픈 것들도 많다. 정말 많은 것을 토해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나는 그 블로그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몰래 옮겨왔다. 더 많이 배우고, 글을 연마해 책으로 인사드리겠다고 이웃분들께 약속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술만 공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것에 집중하던 시간을 그간 읽었던 책을 복기하고, 인문학과 여타 학문의 답습에 나눠 쓰기 위해 블로그를 지웠다.


  여럿 쌓여 있는 미술책들을 보다가 문득 네이버 블로그를 그만 둔 뒤 갖게 된 해방감이 떠올랐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미술책과 논문, 해외사이트 포스트들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날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해 포스트를 두 개나 올린 적도 있었고, 다른 날에는 공부는커녕 책도 한 줄 안 읽은 날도 있었다. 뭔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거의 반사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는 이런 변덕이 득이 되기도, 혹은 독이 되기도 한다. 겨울 같다고 할까? 삼한사온 말이다.


  용케도 그런 체질로 미술을 꾸물꾸물 지렁이처럼 공부하며, 돌아보건대 적잖은 것을 얻었다. 본래 공부의 목적은 대학교 진학이었다. 준비가 소홀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니, 준비가 소홀한 것은 맞을지 모르겠으나, 미술을 열성적으로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시험에 미술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으니, 떨어질 수밖에. 좋아하는 화가도 생겼고, 좋아하는 시대도 생겼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서양문화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면서 나는 공통과 차이에 따른 정신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종교가 공통된 문제로 연상되어 그와 관련된 유익한 계절학기 강의와 책들을 접했고, 지금도 그 관심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거의 공황상태였다. 그 때처럼 나 자신에게 실망한 적도 없었다. 막상 심한 낙담을 겪었을 때에는 “그것도 경험이 된다.”는 조언은 아예 들리지 않는다. 냉철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나는 그 조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 추운 날이 아니어서 어머니와 함께 장 보고 돌아오는 길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픔이 추억이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추억하느냐가 사람의 앞날을 결정한다고들 한다. 글로 읽거나 말도 듣기만 하면 몸이 알지 못하는 그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오랜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기억한다. 1년 전 그 때, 나는 내가 여태껏 배운 미술의 모든 것이 결국 쓸모없어질 것이라 좌절했었다. 하지만 나는 미술로 말미암아 가지를 뻗어나간 여러 관심들을 통해 여러 책을 읽고, 이따금 미술을 연결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3년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님의 조언은 적중했다. 나보다 앞서 더 많은 삶의 좌절을 겪어보셨을 부모님의 경험은 나에게 큰 지혜가 다가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즘 어른을 다짜고짜 싫어하려는 많은 아이들이 깨달아야 할 점인데, 삶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연장자의 말은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뒤늦게 깨달으니 몸이 알아간다.


  이제 나는 잡식한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읽은 책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사실 집중되는 분야는 따로 있지만 잡식성에다가 책을 얌전하게 읽지 못하는 나의 게걸스러운 습성이 지금은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을 잠시 놓으니, 편식하던 나의 3년을 보상하려는 듯 나는 거의 몰아치기로 (학기 중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많은 책을 읽고, 예전에 읽은 것들을 복기하곤 했다. 더불어 독서의 방향도 정하게 되었다.

 

 

 

 

 

 

 

소설 읽기는 힘들어

 

  소설 읽기를 유난히 힘겨워했기 때문에, 돌이켜보건대 학교와 집을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얻은 3시간을 쪼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은 그리 선명치 않다.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나 위화의 소설 두 편 <허삼관 매혈기>와 <살아간다는 것>은 재독한 것이고, 처음 읽었을 때에도 워낙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다시 읽는 것인데도 카뮈의 <이방인>,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오웰의 <동물농장>, 쿳시의 <마이클 K>, 레싱의 <다섯째 아이>, 케르테스의 <운명> 같은 책들은 분위기를 빼곤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논픽션을 읽으며 생긴 독서습관이 픽션의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길게, 그리고 자주 접해야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논픽션 책들만 가득 쌓여 있다.


  일본의 유명한 한 장서가의 조언처럼 굳이 픽션을 안 읽겠다고 벼른 적은 없다. 언젠가 픽션의 강한 향기에 이끌리게 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고 보니 그 향기를 아주 처음 느껴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회상해보면 내게 그 향기를 처음 전해준 이는 쥐스킨트였다. 고등학생 때, 한 여자친구와 <좀머 씨 이야기>에 대해 열렬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오른다.

 

 

 

 

 

 

 

 

 

2011년, 기억에 남는 책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논픽션 중 내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였다. 현대인들이 공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매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국가성장의 동력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나에게도 잉여의 시간을 어떤 노력으로 채워가야 하는지 귀띔해준 책이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도킨스를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도킨스가 눈에 보이는, 그래서 종교인들에게는 다소 거슬릴 수 있는 공격을 서슴지 않고 감행한다면 세이건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그 점에 있어서는 도킨스도 물론 마찬가지인데) 합리와 논리로써 종교맹신주의자들의 틈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의 책은 과학을 맹신하려는 사람들이 자위할 목적으로 읽는다든지, 혹은 과학을 더 비중 있게 “이미” 다루고 있는 이들이 조언을 얻을 요량으로 접하는 것 말고도, 아니 그보다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나는 아직 삶의 경험이 적고, 아는 바 역시 적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양자의 입장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못한다. 종교와 과학을 모두 알면 두 문제를 긴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 교과서적인 말은 지켜지지 않기에 더욱 중요한 시대적 교훈 중 하나이다.


  복기한 책 중에서는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가 기억에 남는다. 리뷰로 올리진 않았지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KBS 다큐멘터리 <마음>의 책 버전도 읽기를 권한다. 맹종보다는 이해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내리는 결론은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믿음을 변형, 혹은 왜곡시킨다.”나 “인간은 쉬운 것을 좋아하려는 경향이 있다.”라든지, 혹은 “그것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와 같은 것들이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뒤늦게 지각하게 되는” 습성을 극복할 첫 번째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합하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해괴한 일들”의 원인도 알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창조와 관련된 좋은 책들도 올 한 해에는 많이 접했다. 본래 미술공부를 위해 구입한 것이지만 나 역시 창조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기에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왔던 <창조자들>이나 <생각의 탄생>, 리뷰하진 않았지만 <신이 내린 광기>, 그리고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나 <위험한 생각들>과 같은 책들이 이해의 폭을 넓혀줬다. 또한 창조가 교육과 닿아 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를 리뷰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비판해보는 시간도 나 스스로는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교육자 집안이라 유독 그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인데, 이따금 언론들의 논설을 읽다보면 ‘인권’이라는 문제와 ‘교육’이라는 문제의 융합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연말에 가까워져 잡스의 사망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가 창조와 관련해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 것도 나에게는 많은 영향을 줬다.


  리뷰로 올리진 않은, 사실 리뷰로 올리기도 힘든 책으로 내가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은 책은 박민영氏의 <즐거움의 가치사전>이었다. 이 책은 챕터별로 나눠 읽어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내용이 좋기에 여러 곳에서 추천도서로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는데, 나는 이 책을 이라는 그의 또 다른 책의 뒷날개를 보고 샀다. 어려운 것을 소화하여 재정리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그는 대단히 뛰어난 저자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한 책들 사이에 꽂아놓으면 절로 빛나는 책. 그런 것을 쓰기란, 문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나에게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읽힌 책이었다.

 

 

 

 

 

 

 

 

 

좋은 다큐멘터리 보고 생각하기


  책과 영상은 다르다. 영상은 시각에 민감한 우리에게 훨씬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연상을 해야 하고, 쉴 새 없이 복기해야 한다. 더 깊은 사고가 가능하게 독서를 이따금 정지하기도 하는데, 이른바 pause라 불리는 그 시간들은 독서가 가진 가장 뛰어난 기능 중 하나이다. 영상은 쏟아진다. 따라서 대부분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흥미를 갖게 하는 점에서는 독서보다 훨씬 유리할 수 있다. 다행이도 나는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을 두루 좋아하기에 잡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 듯하다.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라.”라며 문자만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책은 싫다.”며 영상에만 빠지는 사람들의 외골수적 경향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둘 다 좋지 않은가.


  물론 영상도 영상 나름이다. 소위 fresh한 마음 상태를 만들기 위해, 혹은 웃음을 통해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버라이어티 이상의 기능을 하기 힘들다. 그것도 적당히 즐기면 좋은데, 중독되면 문제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셔키가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시간들은, 심하게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셔키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인터넷 온라인 게임을 하라고. 그 정도로 그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재미’라는 개념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다큐멘터리의 재미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누리는 재미가 어디 그것 한 가지 뿐이던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쾌락을 유발하는 정도의 재미는 반복적으로 체득하기 아주 용이한 중독성을 갖는다. 그리고 얻기도 쉽다. 그런데 의외로 지적 쾌락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영역에 있다. 단,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이 ‘다른 추구’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수준급 다큐멘터리들이 다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제작담당자들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BBC의 기준에 비춰보면 해외로 수출할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차마고도> 이후 그런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와 다양한 분야의 쉽고 간편한 이해를 돕는 오밀조밀한 양질의 다큐멘터리들은 거의 매주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를 지니고 있다.


  지식에서 있어서 호기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알고자 하지 않으면 결국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오랜 생각인데,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학문의 문 앞까지 데려다놓을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길잡이이다. 그래서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서 나아가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자 꿈을 꾸기도 했었다. 이미지와 음향으로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좋은 강의를 듣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기에 완성도는 더 높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내레이션으로 그곳의 풍물과 전경을 설명하는 저예산 다큐멘터리부터 시작해서 수학의 비밀을 여러 부작으로 나눠 설명하는 전문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와 같은 다국적 방송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스케일 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근래 들어 대부분의 것들은 세련된 형태로 제작되고 있다. 서구의 다큐멘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 이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적 병폐들도 상당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한다. 수준에 맞게끔 공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영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널리 실행되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그걸 보고자 할까, 이렇게 물어놓고 즉각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도 장애물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는 중립성이 강하다. 책보다도 훨씬 강하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여 양자의 의견을 모두 사례로 드는 경우에는 웬만한 칼럼보다도 탄탄하다. 무엇보다도 “직접 보여준다.”는 이점이 있다. 다큐멘터리 한 편만 봐도 다음 한 주를 그것과 관련된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보는데 할애할 수 있다. 피드백을 활용하는 노력만 보인다면 그 어떤 수업보다도 유익하다. 권위에 기대어, 혹은 경제적 성공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며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학문 앞에서는 적어도 아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순수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마치며

 

  몇 시간이 지나면 지구는 이제 자신이 작년에 운행했던 그 노선을 얼추 비슷하게 따라가며 태양을 한 바퀴 더 돌기 시작할 것이다. 내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물리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제인 구달의 책에 나오는 침팬지들에게도 송년의 아쉬움과 새해맞이의 설렘이 있을까? 왜 유독 인간만 시간 앞에서 청승을 떨까? 보신각 타종과 함께 폭죽이 터질 것이고,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인사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자정까지 깨어 있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내년이 그렇게 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 하얗게 질려버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바로 ‘다짐’이라는 것이다.


  나의 다짐은 별 것 없다. 조금 더 바르게, 조금 더 열심히 사는 것이다. 지금 하는 것들에 약간의 속도가 더 붙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가, 지금의 나에게는 세세한 것에까지 욕심의 약물을 투여하지 말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려준다. 뭉뚱그린, 보편적인, 아니 실현될 수 없는 큰 목표를 그렇게 잡아놓고 길잡이로 만든다. 틱낫한 스님이 그러셨다. 달에 가기를 바라고 걸어도 달에는 갈 수 없으나, 그만큼 멀리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가진 용량에 수긍하며, 그 용량만큼만 일하는 것도 실은 힘드니, 욕심은 적을수록 좋겠다. 그래도 독서에는 욕심이 많이 생긴다. 아, “이 종이들을 더 많이 넘겼으면” 하는 바람은 도무지 떨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막 바람이 하나 생겼다. 보름달은 아니겠지만 오늘 밤하늘에 빌면 혹시 들어줄까? 책값 좀 싸게 해달라고.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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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0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응원이 됐으면 하고 늘 댓글을 남기려고 노력해왔는데 올해는 숨어서 지켜볼게요.
간혹, 말을 걸러 올게요. 늘 열심히 잘 했으니까 걱정은 안되지만 건강도 챙기고, 실속도 챙기고, 모든 것들 다 품에 안게 되는 한해였으면 좋겠어요.^^

탕기 2012-01-06 10:45   좋아요 0 | URL
욕심 같아선 모든 것을 다 품에 안고 싶지만, 저는 용량이 작은 컴퓨터 같아서 뭔가 욕심을 부리면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ㅎ 아이리님의 응원은, 아뜰리에 했을 때부터 늘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쇼스타코비치 2012-01-1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블로그에서 좋은 글 읽곤 했는데, 어느날 이웃에서 없어졌다 싶었는데 여기로 오셨군요.
예전 글 다시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새로운 글 기대해볼게요.

탕기 2012-01-08 01:48   좋아요 0 | URL
아틀리에에 들러주시던 분이군요. 닉네임만 보면 어느 분이셨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타지에서 만난 우리나라 사람처럼 반갑군요. 늘 모자란 글만 올리더라도 종종 들러주세요.^^

쇼스타코비치 2012-01-1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좋아하는 글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걸요. 자주 올 거예요.

탕기 2012-01-10 23:18   좋아요 0 | URL
별 거 없는 공간이지만 격려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1.12.28

 

  이번 달은 거의 내내 창작의 구상에 빠져 있었기에, 이틀에 한 권 정도 읽던 독서가 뜸했다. 채우는 것과 덜어내는 것은 다르다. 조금이나마 시상의 고통에 빠져봤거나, 말도 안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지어내본 사람이라면 그 필연적 차이를 알 것이다. 일기도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둘은 매우 긴밀하다. 따라서 쓰고자 하는 이는 읽어야 하고, 읽은 이는 써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가?"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 그 능력을 소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듯하다. 이 주제의 책은 매우 다양한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명작가가 돈을 벌고 싶으면 자신의 작문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내기만 해도 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어 봤자, 독서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책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은 집과 학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듣는 훈계이다. 그 훈계를, 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고자 1만원은 족히 될 "뻔한" 교양서 하나 사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이 세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의 책을 사서 읽으면 자연스럽게 하고픈 말이 생기고, 그것을 부단히 쏟아내며 타인과 비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장이 견고해지는 것인데, 글을 생각이 아닌 표현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좋다. 온갖 생각의 낙서를 해가며 한 챕터만 읽어놓고 그것에 대해 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튼튼한 주장과 넓은 사고를 만들어준다. 독서는 30분만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각은 3시간이든, 3일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발췌본이 읽어도 좋다. 그리고 요즘은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독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말로 끄는 수레 세 개를 채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는 옛 현인들의 오래된 조언을 무시하란 것은 아니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노력한다는 뜻이다. 새삼 하는 말이나, 독서는 단순한 책과의 조우가 아니지 않은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은 많다. 권위 높은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괜히 자신의 사고와 리듬을, 돈을 들여 바꾸는 것보다는 나 자신의 성향을 충분히 알고 책을 접하는 노력이 현명한 방법이다. 따라서 책 읽는 법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양심 있는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독서의 왕도를 두리뭉실하게 권유할 수밖에 없다.

 

 

 

*    *    *

 

 

  연말부터 내달, 아니 내년의 달력 첫 장까지 읽을 책들을 주문해놨다. 성탄절 전날에 주문했는데, 배송에 혼선이 있어 오늘에야 왔다. 많은 탐서가들이 그렇겠지만 겨울날 배송된 새 책을 받아들었을 때 느껴지는 표면의 한기는 나의 마음을 항상 설레게 한다. 미술을 조금 공부했다는 이유로 책의 표지 디자인을 한껏 음미하기도 하는데, 근래 표지가 독창적이지 않은 책은 거들떠 보이도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모르겠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다 가끔 오래된 것 같은, 별 눈요깃거리도 안 되는, 고리타분할 것 같은 표지의 책을 우연히 펼쳤을 때, 예상 외의 놀라운 이야기와 사려 깊은 저자의 마음을 읽게 된다면 그 순간 느껴지는 환희는 가히 탐험가가 미지의 섬 동굴에서 보물창고를 발견했을 때와 비견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서울의 큰 서점들을 다닐 때면 한 번 즈음은 구석진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보기도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평점이 매겨져 있지 않은,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책을 간략한 개괄이나마 훑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책이 여덟 권이다. 새벽을 틈타 그 서문들을 읽은 뒤에 정리한다.

 

 

 

 

 

 

 

 

 

 

 

 

 

 

 

 

 

 

 

 

 

 

 

 

 

 

 

 

 

  '그늘진 정신'이라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흔히 양지라고 부르지는 않는, 고독과 권태, 멜랑콜리 같은 정신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피터 투이의 <권태>와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를 주문했고,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로 산 책이다. 틸 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과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는 이번 달 초에 흥미 있게 읽었던 <많아지면 달라진다>와 이어지는 책들이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연결과 시간"의 새로운 개념이 어떤 운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건 비단 견지가 부족한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은 얼마간 버트랜드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와 더불어 읽을 것 같다. (순수하지만은 않은, 혹은 순수할 수 없는) 대중운동을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습관은 이현우氏가 간략하게 소개해준 지젝의 발언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호퍼의 '맹신자'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도>는 평소 종교전쟁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주저 없이 고르게 된 책이다. 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을 다뤘지만 이 두 종교의 분쟁만 다루더라도 (내가 지난 계절학기에 들은 종교분쟁관련 강의에 따르자면) 전 세계의 종교분쟁 8할은 진단할 수 있다. 잠깐 읽어본 서문과 나이지리아 관련 첫 챕터에서부터 이미 빠져 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이미 고전이라 들었다. 환자의 병을 '병력'이 아닌 환자 개인의 역사로 다루는 올리버의 글에서는 높은 통찰력과 사려가 느껴진다. 따뜻한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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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30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2  

  어쩌다보니, 11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달력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매몰차다. 원래 시간은 인정머리가 없다지만 생각할수록 정말 야속하기 그지없다. 가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텃밭에 파종도 안 했는데, “수확하고 나면 겨울에는 뭘 하지?”라는 투로 걱정하는 우를 범하고 나면 씁쓸하면서도 참 스스로 어리석다며 다그친다. 뭐가 그리도 급한 것일까. 그래도 다행이다. 시간은 가도 격려는 남는다. “내가 뭐 시간 때문에 사나?” 격려가 나를 살게 하는 것임을 재차 상기해본다. 마음의 끈이 빙빙 돌다 다시 말뚝으로 돌아가 자신이 묶여 있는 곳 언저리에서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 거기가 바로 네 자리다.

  이런저런 일도 있고 해서 동네 잔디구장 트랙을 돌고 왔다. 나름 단단히 무장하고 나갔는데, 의외로 추웠다. 뛰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니, 휑한 트랙 탓에 더 추워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그냥 계속 뛰는 것이 상책이다. 무리를 했는지, 씻고 나오니 다리에 누가 바윗덩어리를 얹은 듯 무겁다. 메일 확인하고, <나는 가수다> 재방송을 어머니와 함께 보며 “그래, 김경호가 대세야!”라고 무릎 좀 치다가 책상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책상 위, 바닥,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위용을 뽐낸다. 그까짓 것 사람이 쓴 것인데, 라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몰랐던 시절에 손댔다가 화상을 입은 책들도 있다. 곁에 두고픈 책들도 있다. 읽다가 운 책도 있고, 자지러진 책도 있다. 독서라는 행동은 참 묘하다. 인식의 메커니즘이야 오래 전에 이미 철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심리학적으로든 소상히 밝혀진 바이지만 가만히 표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독서 좋아하는 이들은 다 동의할 것인데, 웃음이 나온다. 오늘 나의 웃음을 받을 새 책 4권이 도착했다.  얼굴 반반한 책들이 후줄근한 책들 사이에서 광을 낸다.

 

       

 

 

 

 

 

 

   내가 최근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책을 사놓고 나면 뒤늦게 알게 된다. 기대가 크다. 따뜻하게 몸 지지고, 새 책 냄새 맡으며 기웃기웃 거리고 있으면 입이 “헤~”하고 벌어진다. 내가 읽고파 산 책인데도 느껴지는 막연한 부담감과 “대체 어떤 내용을 만날까?”라는 호기심이 교차하면서 몇 문장 읽다보면 다시 그 교차된 감정이 나의 독서를 압도적으로 방해한다. 성가신 큐피드이다. 누가 내 등짝에다가 화살을 마구 박아 놨다. 책을 덮었다. 책 제목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꾸깃꾸깃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어주리라, 벼른다. 겸손한 지혜에 다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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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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