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5

 

 

  저번 주였다. 나는 강의들이 다 끝나고 잠시 이병주의 <소설·알렉산드리아>와 단편 <삐에로와 국화>를 읽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대충 기억하자면, 대략 반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복사대 쪽에서 “복사해주시오!”라는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서관의 정적은 얇은 얼음장이 박살나는 것처럼 깨져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곳을 내려다봤다. 주변의 학우들도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다. 하긴 도서관이라는 곳은 늘 조용하기 마련이니 옆 사람 기침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하지 않던가. 잘은 모르나, 생각해보면 혹 귀가 안 좋으신 까닭인 듯도 했다. 공공의 예를 모르는 분은 전연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큰 목소리 덕분에 나를 비롯해 복사대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대화의 내용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지만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내 복사 좀 맡기려 하는데 말이오. 책 페이지 말씀해주세요. 내 그러니깐, 여기 목차 다음부터 180페이지까지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소? 한 시간이면 되겠소? 내 여기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복사가 다 되면 불러주시오. 예.


  10분도 안 됐을 것이다. 직원은 복사물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부르러갔다가 할아버지와 함께 복사대로 돌아왔다. 할아버지께서는 복사가 빨리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셨었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셨다. 고맙소. 고맙소. 소낙비 같은 감사에 직원은 웃으며 멋쩍어했다.


  한바탕 ‘소란’은 그렇게 끝났다. 미소를 지으신 할아버지를 나는 잠시 바라봤고, 할아버지께서는 입구 반대편으로 걸어가셨다. 책 넘기는 소리, 기침소리, 도서관 ‘알바’들이 책 수거용 카트를 밀고 다니는 소리,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전부였다.


  나는 그 광경을 곰곰이 복기했다. 이병주의 작품을 읽으면서 낙서했던 이면지 구석에 “할아버지. 고맙소. 복사. 공부.”라는 네 개의 단어들을 적어놓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시간이 넘게 나는 이따금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연로하신 분들의 ‘공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자료를 찾으셨기에, 우리 세대가 봤을 때에는 시쳇말로 거의 ‘오버’에 가깝게 고마움을 표현하셨을까. 집중해서 읽는다면 180페이지 정도야 반나절이면 정리하면서 읽을 수 있다. 무엇이었을까? 아니,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갑작스레 의미를 부여한 것은 할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미소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공부를 하며 저런 미소를 지어본 적이 있었나?’


  몇 번 있었던 듯하다. 국문이 전공이지만 소질에 맞지 않아 미술사로 전향하겠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한 이후 나는 큰 희열들을 맛봤었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는 대체로 교양강의들이 나에게 배움의 기쁨을 줬다. 시간이 지나자, 전공에서도 이따금 무릎을 치는 순간들에 점차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꼬여버렸던 실타래가 이런 모양으로 내 안에서 서서히 정렬되어가자 나는 할아버지의 미소로부터 그간의 쓰라린 경험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헛배우지 않고 있다는 모종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마음의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시험, 내기, 경쟁 같은 것에 영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이 대학의 내로라하는 소위 ‘머리’들의 성적이나 향후 목표 등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기도 하거니와 잘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지향하는 바들이 나와는 때때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보다 나를 더 많이 자극하는 것은 바로 위의 할아버지, 아니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도우미 학생의 보조를 받아야만 강의를 겨우겨우 들을 수 있는 전신지체 장애우 학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백발의 외국인 교수이다.


  그들에게서 나는 ‘대학(大學)’이라는 이 시대의 잊힌 단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낀다. 이 열정에 ‘순수’라는 점수로 어떤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가진 열정보다 그들의 열정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뒤지고 있다는 자괴감과 본받아야겠다는 긍정적인 충격은 말 그대로 손바닥과 손등의 차이인 듯하다.

 

 

 

*     *     *

 

 

 

 

  일산에는 ‘백마교’라는 다리가 있다. 그 밑으로 경의선이 지나간다. 이 다리는 출퇴근시간마다 차량소통이 많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 주 목요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백마교 사거리에서 내가 탄 921번 버스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피곤을 쫓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피요네(Fjordne)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하튼 그때 마침 버스 옆에 서 있던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스멀스멀 감기던 눈이 떠진 건 내가 그 승용차 운전석에 탄 한 남자가 실내등을 밝게 켜고 무언가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알 같이 쓴 손글씨라 내용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때문인지 나는 관심이 갔다. 무엇을 읽는 것일까.


  직진 신호가 들어오자 남자는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하는 앞차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기어를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손글씨가 적힌 노트를 덮었다. 나는 그걸 봤다. 표지에는 - 아마도 매직으로 쓴 것 같은 - ‘잠언집’이라는 단어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직진을 받아 백마교를 넘어갔고, 이어 좌회전을 받은 버스에서 나는 제 갈 길을 갔다.


  책 읽는 이라면 읽으면서도 “독서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된다. 답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질문은 참으로 매력적이어서 독서의 일상에 자주 중지(pause)의 표지를 심어놓는다. 그 남자의 잠언집이 나에게 또 한 번의 중지명령을 내렸다.


  나는 중지의 표지판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백마교에서 내가 내리는 곳까지는 대략 15분 정도 걸린다. 음악을 들으며, 마침 일산의 유명한 먹자골목인 ‘애니골’ 입구의 정체 때문에 5분 가량 가다서다 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읽는다.”라는 행위의 정체를 어떤 검은 베일 앞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내가 끌어당기는 만큼 나의 다른 한 손은 그것을 다시 베일 뒤로 숨기려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나와의 대결이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그래서 이런 것인가 보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 한편으로 - 이제 곧 눈이 내릴 테니 잠깐 생각을 겨울에 닿아보건대 - 독서는 그 이름을 가진 설원에서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하나의 커다란 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저마다 구른 방향에 따라 형체가 다를 것이다. 수많은 것들이 몸을 숨기거나 제 몸의 부피를 줄여나간다고 했을 때, 그러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독서는 우리의 몸집을 스스로 불려나가는 것이니 제아무리 시린 것이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풍성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심심한 위로를 여기에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번 주중은, 그런 까닭에, 이래저래 독서와 공부에 대해 뜻밖의 많은 생각을 해보고 나 스스로도 정신을 앙양시키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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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1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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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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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2

 

 

  책과 씨름하던 토요일 오후이다.

  나는 오늘 새삼 ‘책’을 다시 보게 됐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   *   *

 

 

  나는 요즘 세미나 수업의 과제로 훈민정음을 공부하고 있다. 재미있다. 내가 발표할 주제는 훈민정음이 무엇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사실 훈민정음을 하나씩 읽어가며 ㄱ은 무슨 소리이고, ㄷ은 무슨 소리이고 하는 간단한 수준은 아니다. 아무래도 학부 졸업논문 수준이라, 학자들의 면밀한 논문들에 특히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뜻을 되새김질할 때마다는 늘 소름이 돋는다. 나는 요즘 들어 새로운 한글을 배우는 듯하다.


  여하튼 훈민정음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한글갈』을 참조해야 했다. 훈민정음을 풀어쓴 근래의 책들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교수들이 항상 학부생들에게 강조하는 건 고문서(古文書)들을 먼저 참고하라는 것이지 않은가. 한문투성이인 옛 책들을 읽는 것이 쉽진 않지만 조사나 어미가 없는 그 글들을 한글 문장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아마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번 주말에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분석하려고 최근 발행된 몇 권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가서 『한글갈』을 빌려와야지.”라고 벼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께서 학생 시절에 공부하셨던 여러 책들 중 십 수 권 정도가 지금도 서재에 있기에 한 번 찾아볼까 생각했다.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최현배의 『한글갈』, 그것도 1942년에 정음사(正音社)에서 발행한 초본을 발견했다.


  등산을 다녀오신 아버지께 나는 『한글갈』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께서 그 책을 빌리셨던 당신의 모교인 옛 가평가이사중학원(現 가평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초판이라 경매에 올리면 고가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며 나는 아버지와 농담도 따먹었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일반서고에는 이런 고서를 보관하지 않는다.


  속지들이 거의 갈색이라 할 정도로 훼손됐고, 하드커버들도 전부 너덜너덜해져 낱장들과 분리될 정도의 상태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을 간직한 책이다. 험악한 일제치하에 한글 가르침만이 민족의 얼을 지키는 것이라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최현배 선생의 글 - 1942년에 발행했으나, 초고는 1940년에 완성하셨다 - 로 訓民正音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20년도 더 전에 이미 읽으셨던 그 길 위에서 말이다.

 

 

 

 

 

부모님께서 공부하셨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책들을 내 서재에 보관하다.

 

 

 

  잠시 쉴 겸, 나는 서재의 책들 중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행된 옛 책들을 하나둘 모아봤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서재정리를 한다고 오래 된 책들 중 상당수를 처분하셨는데, 그것들이 지금도 있었다면 아마 수 십 권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책들 중에 아홉 권을 뽑아다가 내 책장에 꽂았다. 모두 70년대에 나온 책들이다. 책값은 1,500원에서 5,000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아버지께 “이 책은 5,000원이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때 그 책값이면 자장면이 몇 그릇이니!”라고 새삼 놀라셨다.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교사가 되겠다고 힘들게 공부하셨다던 그 옛 이야기가, 나는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다른 책에서는 어머니께서 아마 당신의 대학생 시절에 껴놨었을 꽃잎들을 찾았다. 장미꽃잎인 것 같다. 또 다른 책의 맨 뒷장에는 당시 아버지의 두 선배가 신입생 축하파티에 힘쓴다며 아버지께 선물한다는 내용의 글귀 두 줄이 보였다. 책들 구석구석에서는 부모님의 오래된 밑줄과 낙서들이 색을 바래가고 있다.

 

 

*   *   *

 

 

  책. 그건 저자의 말이 여러 문자로 적혀 있는 단순한 공간은 분명 아니다. 그곳에는 읽는 이의 지문도 있고, 서명도 있고, 이따금 어머니의 장미꽃잎 같은 추억의 흔적도 있다. 나는 그 추억 위에 나의 지문을 남겨본다. 교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 십 번도 넘겨 읽으셨을 그 책을, 아들인 나는 - 그런 일념은 없으나 나도 무늬만은 국문학도인데 - 이런저런 까닭으로 다 읽어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재에 꽂아둔, 부모님께서 추억하실 그 책들은 지금 내가 읽는 책이 세월이 지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나는 부모님의 사인 밑에 나의 사인을 적어본다.


  어쩌면 책이란 것은 흔적을 따라가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저자의 이정표이든, 부모님의 이정표이든, 아니면 타인의 이정표이든. 그렇지 않은가?

 

 

*   *   *

 

 

  세미나 과목을 들으려고 강의실에 갔는데, 앞선 수업이 막 끝났는지 한 남학생과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귀 너머로 듣고 있으니 재밌는 대화가 오고 가서 지금도 기억한다.

 

  교수가 말하기를, 자신이 책을 한 권 빌렸는데 대출지에 낯익은 이름 하나, 그러니까 바로 그 남학생과 동명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니?”고 남학생에게 물었는데, 남학생은 “네, 그 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얼굴에 인자한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 이런 신기한 일도 있니!”라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함께 웃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정말.

 

 

*   *   *

 

 

  그런 것이다. 오래 읽다보면, 책과 오래 만나다보면, 우리는 책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필시 만나게 된다. 한자 ‘冊’자를 다시 본다. 저 한자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긴 횡선이 책에 대한 우리들의 추억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헤진 책들을 다시 보자. 세월의 상처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면 한 중국의 고사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천 년의 세월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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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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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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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리뷰의 리뷰

 

 

#1.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는 시를, 나는 두고두고 읽는다. 2011년의 회고에 대한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채로 두고 싶다. 무지의 초심으로 시어와 문장이 주는 향기를 음미하다보면 - 배 두둑이 채운 어느 봄날의 나른함 속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와 저도 모르게 꿀잠에 드는 것처럼, 바로 그렇다. - 무지가 나을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거다. 앞뒤 잘라 써본다.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돈’과 ‘잠자리’의 이미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처절하다. 잠자리가 돈을 깨뜨린 뒤, 그 돈의 파편들이 잠자리를 깨뜨리는 광경이다. 그건 그녀의 말마따나 일종의 울음이나 비명이다. 이 질문은 나의 눈에 생채기를 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눈물이 볼 위에 낸 흔적을 손바닥으로 비벼 지웠다.


  돈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근래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를 읽고 있는데, 한 구절이 인상 깊었다. “외환위기 때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많은 이를 자살하게 한 것은, 경제적 환란 자체가 아니라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다.(pg.59)”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돈이 관여하지 않는 비밀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정원에 어떤 꽃을 심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의 추적자들이, 혹은 스파이들이 정원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들이 정원의 꽃들을 모두 뽑아가려고 난동을 부리더라도, 혹은 그리하여 우리가 만석꾼에서 가난뱅이로 떨어지더라도, 손에 움켜쥐고 끝까지 놔주지 않을 꽃을 한 줌 정도는 가슴 속에 미리 정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이다. 결제하기 전에 합계액을 보고 ‘헉’하며 놀라곤 하지만 <톨스토이 단편선>이 정말 8,500원의 ‘값’을 할까. <그림과 눈물>은 정말 15,000원의 ‘생각’을 담고 있을까. 정량 공리주의를 못 미더워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걸 사치라고 하면 '좀' 그렇다. 비밀의 정원이 서울광장 한복판에 공개된 느낌이리라. 좀 더 비밀스럽게, 나는 책이다.

 

 

 

#2.
  말미에 접어드는 여름. 많은 책을 읽겠노라고 스스로에게 공언까지 한 탓에, 순전히 양으로만 따지자면 만족의 발치를 기웃거릴 정도의 독서량이었다. 야심차게 나는 파농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밀의 <공리주의>를 읽고, 다시 한 번 <자유론>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수포로 돌아갔다. 세 번째 수포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스마일 카다레,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하인리히 뵐, …, 이하생략.


  그러나 읽은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힘이 나고 좋다. 무엇이 인상적이었는가를 회고하는 것이 ‘독서건강’에도 좋을 것 같으니, 눈을 과거로 몇 번 던져본다. 뭐가 기억에 남을까.

 

 

 

#3.
  지난 학기 중에 읽은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을 정리하는 것으로 방학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논픽션 11선과 픽션 11선을 나름 선정하여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득하게 바라봤지만 이차저차 흐지부지되었고, 리뷰 올리지 않은 책과 소설책을 빼고 11선만 리뷰하기에도 사실 벅찼다. 불타는 머리로 난삽하게 정리하고, 그걸 재단하여 글로 뽑아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누에의 일’이 아닌가 말이다.

 

 

 

 

 

 

 

 

 

 

 

 

 

 

 

 

  <권태>는 제 나름의 힘을 가진 권태의 양상에 대한 책이다. 역사를 쫓아가는 재미도 있고,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권태도 분석한다. “권태는 그저 권태일뿐이다.”라는 구절과 그것의 치료법 - 이미 다 알고 있는 ‘활동들’ - 이 이 책을 용두사미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권태’이다. 밤안개처럼 슬며시 찾아와서는 우리에게 제 모습의 스산함을 보여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어느새 살그머니 떠난다.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어딜 읽어도 처음 같고, 마지막 같다.


  <진단명 사이코패스>의 요는 “잘 대처하자.”라는 건데, 사실 그보다는 분석사례가 주는 인상이 더 짙다. 역자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현장조사는 서양에 뒤진 편이다. 차라리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저 인상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마치 추(醜)처럼 우리 주변에 있으나 바라보는 것이 꺼려지는, - 움베르토 에코가 강조하듯이 - 그러나 결국 바라보게 되는 사회의 어떤 면을 이 책은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CSI나 NCIS, 크리미널 마인드 등 ‘미드수사물’을 즐겨보는 이들에게 <진단명 사이코패스>는 저 텍스트들의 실제 콘텍스트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로도 커다란 충격을 줄 것이다.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는 전형적인 ‘정리책’이다. 문장 구절 하나하나가 특별한 감흥을 주진 않는다. 그 점으로만 본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주제이다. 죽음이다. 기준점을, 혹은 한 축을 중심으로 ‘생’에의 정확한 대칭점을 이루는 것. 아니, 정정해야겠다. 이 책은 ‘정확한 대칭점’으로서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건 “살아 있는 죽음”이다. 물론 이 책 하나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세분화시키거나 고정시키진 않는다. 별다른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그건 이 책 탓이 아니다. 그 어떤 책도,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체로의 공포 속에서 우리에게 아주 사사로이 다가오지 않던가.

 

 

 

 


 

 

 

 

 

 

 

 

 

 

 

 

  <다윈 지능>에서는 지식도 배웠고, 시각도 배웠고, 간결함도 배웠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그러나 너무 한 문장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닌 독서는 아무 책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를 나는 도킨스나 바전, 곰브리치 등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재천氏를 목록에 넣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진화론의 역사와 이론을 쉽고 재밌게 배운 것만큼의 행복을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 <이타적 유전자>, <조상이야기>, - 분야는 조금 달라도 - <엘리건트 유니버스> 등 비싼 책들도 최재천氏가 내게 던져준 호기심 덕분(?)에 서재에 두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번 여름에 내가 건진 대어였다. 소설 좀 사서 읽겠다고 한 출판사의 책을 시리즈로 몇 권 샀는데, 값이 싸다는 이유로 - 또 하나는 밀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 한 바구니 속에 넣어 서재에 꽂아뒀었다. 더위 탓에 하도 책이 안 읽히기에 “어디 얇은 책 하나 없나?”는 심보로 이리저리 둘러대다가 꺼내 단숨에 읽은 책이다. 명료하고 강했다. 내가 초상화로 알고 있는 벤담의 이미지와 꼭 닮은 글이었다. 이론이라기보다는 프로포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는 챕터별 정리를 짜깁기해서 이 공간에 리뷰로 다뤄봤는데, 짜깁기인 만큼 전체적인 이해는 아직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롤스, 샌델에 이르는 철학사의 ‘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자칫 위험한 독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류의 책이다. 발췌독이나 검색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하루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단숨에 읽고, 리뷰를 4~5시간 정도 적어봤는데, 그만큼의 ‘임팩트’가 있다. 일단 문제를 진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각 비평가들의 솜씨도 솜씨이거니와 하나의 텍스트가 한 국가의 독서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는 부득이하게 읽어야겠지만 -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이유>, 새삼 긍정의 필요성을 알게 된 책이다. 구달의 섬세하면서도 솔직한 태도가 읽는 내내 강한 확신을 줬다. “그녀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얻게 된 유일한 인상이다. 이 인상은 책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다. 아니, 가장 강한 인상이라고 해도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이 유사하게나마 체험하게 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다.


  물론 혹자들은 그녀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한다고 구달을 저평가할 수도 있다. 나도 그녀의 주장 중 채식주의나 실험동물보호 등이 - 나도 모르게 이때 나는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렸는데, 아마 대다수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런 양가성이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 우리에게 과연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의심을 했었다. 그녀의 실천을 공론화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 ‘다원화된 사회’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놓쳐버리고 후에야 깨닫는 것은, 그녀와 같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의 희망전달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엄청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래,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매번 뉘우치며 돌아올 수 있는 원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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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3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가을에도 이런 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개강축하해요, 탕기님.
ㅋㅋㅋ

탕기 2012-09-01 10:59   좋아요 0 | URL
아...ㅠㅠ 개강이에요, 아이리님.
그래도 학기 중에 꾸준히 읽을 책들 정해놨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읽어야죠^^
가을도 파이팅해요!
 

2012.07.03


 

  국어학을 배우다 보면 ‘어휘부(Lexicon)’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말해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들이 있는 창고 정도가 된다. 위대한 작가들을 다룬 큰 책들을 읽다 보면 “A는 몇 개의 어휘를 사용했고, B는 몇 개의 어휘를 만들었고”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나는 대체 몇 개의 어휘를 사용할 줄 알지?”라는 질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국어사전에 하늘색 색연필을 칠해 가며 아는 단어들을 헤아려본 적이 있다. 얼마 못 가서 포기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일단 끈기가 문제이긴 했으나, 사실 어휘부는 우리가 보통 아는 ‘단어’와는 다르게 온갖 방언과 (특히 연령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속어 등도 포괄하는 개념. 나는 결국 “꽤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산의 허리 즈음까지만 올라간 주제에 정상에서의 기쁨을 만끽하려고 한 셈이다.


  책상 위에는 방학을 틈타 읽을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책장에는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책, 읽은 책,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꽂혀 있다. 마땅히 둘 자리가 없어 바닥에 내려놓은 것까지 하면 몇 백 권은 될 것인데, 나는 이따금 저 많은 책들 안에 잠들어 있는, 내가 읽어야만 마법의 잠에서 깨어날, 흡사 병마총의 병사들 같은 단어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성벽은 내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내 삶의 말뚝을 박을 수 있는 땅이고, 한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단어로 된 성벽에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불어넣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로와 같은 삶에서 내가 찾아낸 단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책으로의 부단한 발걸음을 스스로에게 주문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 많은 책들이 도착했다. 여덟 권이지만 권수로는 열두 권이다. 그 중 몇 권은 서재에 꽂아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 읽고픈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샤오궁이 말한 ‘갖고 있을 만한 책’이다. 가슴 절절한 무언가, 혹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진 않지만 호기심이 닿아 있어 훗날 글을 쓰고자 할 때에 불현듯 찾게 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종합적인 것들이라 대체로 비싼데, 할인을 빌미로 나의 ‘지름신’을 달래보게 됐다.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방법>, 그리고 사사키 다케시 外의 <절대지식 세계고전>이 그 책들이다.


  어쩌다보니 리처드의 또 다른 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한 권씩 사다보면 언젠가 그의 애독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쇼펜하우어의 이 책은 평이 좋아 사뭇 기대가 된다. 사실 그의 책을 고른 까닭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철학자들의 조언’이라는 콘셉트의 작은 철학책(이라기보다는 카운슬링에 가까운 책)을 문득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사사키의 책은 지식에 대한 큰 틀을 그리기 위해 샀는데, 챕터별로 발췌독하기에 용이하다. <맹자>의 주해본(박경환 譯)도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동양철학서적들 사이에 꽂아두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되지, 뭐 하러 비싸게 돈 주고 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오래된 고성(古城)에 들어가 낡은 보물 상자 하나 들춰보는 장서의 미학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터넷의 정보들은 이상하리만치 신뢰할 수가 없다. 이것도 내가 가진 선입견 중의 하나이겠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부분을 인터넷에서 여러 번 비교해 찾지, 인터넷을 하다가 궁금한 것을 책에서 찾아보진 않는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드디어 샀다. 익히 명성만 들어오던 터였다. 첫 장의 첫 구절부터가 인상적이다. 읽고 있는 책이 여러 권이라 당장은 못 잡겠지만 여름방학맞이 픽션 도서로는 1순위가 될 듯하다. 루카치의 <미학>은 미술 공부하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계열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둘 모두 마르크스 선상의 위대한 학자들이다. 베냐민, 뵐플린, 파노프스키, 단토, 타피에 등을 읽으며 길러진 나름의 내공(?)으로 조만간 깊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 설렌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속속 서재에 꽂히고 있는 푸코의 책(그나마 이 책이 푸코의 저서들 중에서는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더라.)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푸코 읽기’는 인문학계에서 꾸준히 불고 있는 유행이라, 인문학의 위대한 사상들을 평소 동경해오던 나에게 푸코 읽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포만감을 준다. 비록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의 완독이 실패로 돌아간 씁쓸한 기억은 있으나, 꾸준히 독서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어본다.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복잡하고도 상세한 대(大)철학가들의 사상서적을 홀짝홀짝 넘겨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핑계도 대본다.


  김애리氏의 <책에 미친 청춘>은 귀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주저 없이 샀다. 젊음의 생존법을 ‘독서’라고 단언하는 그녀는 독서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애독가인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른 한 마디 한 마디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녀는 나와 ‘젊음’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생에의 치열함에 있어서 내가 감히 그녀와 비교될 수 있게냐마는.


  천천히 읽어볼 것을 벼르며 대충 책장을 넘기다가 (어떻게 나는 그녀가 소개하는 책 중 단 세 권밖에 못 읽어봤을까!) 95쪽에서 반가운 시 한 편을 만났다.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이란 없다>였다. 옛 미술블로그를 할 때, 아우구스트 마케(1887~1914, 독일 표현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그녀의 시와 엮어서 길게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시집 한 권을 사놓고 가장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고쳐 읽었던 시.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명언.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올 2월 초, 그녀의 타계 소식 접하고 다시 한 번 읽었던 그 시를 이 책에서 우연히 만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많은 고뇌와 생각 속에서 태어났을 저 높은 책들의 탑에 삶을 던지지 않고서야 쉼보르스카가 말한 우리네들의 삶을 어떻게 경작할 수 있을까!


  창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진다.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흙내음도 잠재울 정도로 세차게 들이 붓는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집으로 뛰어간다. 집은 그런 곳이다. 비 내리면 들어가 쉴 수 있는 곳. 우리와 같은 조그마한 독자들에게, 책은 바로 집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식상하지만 나는 이 비유가 포근하니, 가장 마음에 든다.

 

 

#. 얼마 전, 나는 방학동안 읽을 열한 권의 인문학 서적들을 나름 골라놓고 한 권씩 리뷰하기 시작했다. 두 권은 이미 올렸고, 곧 한 권의 리뷰도 올릴 것인데, 나머지 여덟 권을 밑에 조촐하게나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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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저를 위한 페이퍼! 탕기님도 인문학 서재나 블로그나 나름의 기준을 갖고 책을 고르겠지만 저는 탕기님 서재만으로도 충분해서 좋아요. 몇 권은 저도 보고 싶은 것들이에요. 왜 11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속도라면 곧 다 읽을 것 같아요^-^

탕기 2012-07-07 00:35   좋아요 0 | URL
부지런히 읽어놓고 8월의 11권도 선정할 생각이에요.
책장을 기웃거려보면 왜 "이건 못 읽겠어."라고 했던 것들도 다시 보이곤 하잖아요?^^
 

2012.06.16

 

#. 다음 주는 시험기간이다. 지난 목요일에 마지막 발표가 끝났고, 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비를 시작했다. 매번 그렇듯 나는 시험을 곧잘 보는 편이 아니라, 절박하진 않다. 이번 학기도 프레젠테이션과 레포트에 많은 신경을 썼다. 미술 블로그를 2년 정도 할 때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내가 준비한 것들을 남들이 어떻게 봐주던 나는 늘 결과에 대해 인색하다. 올해의 절반, 그 기간동안 많은 걸 갖췄다. 지식은 잊히겠지만, 단련된 습관은 더 나아질 기반이 될 것이다. 그간 적어뒀던 순간의 깨달음들과 좋은 습관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길 바란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며 사는 어른이 드물듯,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의 풍경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일 것이다. 이번 학기 귀감이 되었던 것들을 마음 속으로 혼자 복기해본다.

 

#. CPA 준비하는 동기 중 한 명과 잠시 시간을 내서 한가롭게 음료를 마시던 오후였다. 그는 나에게 경영학 수업을 들으라 권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답 없는 인문학 수업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다. 경영학 수업은 반대로 답이 있다더라. 나는 숫자놀이를 고등학교 이후 한 번도 안 해봤다며 손을 저었지만 속으로는 제법 솔깃했다. '답'이라. 구구절절한 서술 없이 답안지에 몇 글자로 '똑' 떨어지게 쓸 수 있는 답. 그러고 보니, 여러 인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껏 속시원한 결론으로 마무리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문학은 돌아가는 길이다. 어떨 때에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를 때도 많다.


  신화학, 철학, 종교학, 국문학, 심리학. 곁가지로 알게 된 것들은 참 많다. 독학한 미술도 그러하다. 얕게 안다면야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단답들처럼 상식으로 알게 되는 것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가 읽으라는 텍스트들을 접하는 순간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학사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것들에게는 수많은 설(設)들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 순간 갖게 되는 회의란! 그런 까닭에 차라리 문제를 풀어 답을 낼 수 있는 수학이나 물리학 등을 동경해본 적이 아주 없진 않다. 내가 우주과학을 동경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와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우주과학자들은 철학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껏 나는 '인간'을 배우고 있다. 인문사회와 사회과학 사이의 엄청난 차이는 둘을 포함한 교양과목 하나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아니면 후자의 학자가 전자의 현상을 설명한 책을 읽어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류의 책은 보통 전자의 학자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으니까.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냈다가 과학자들에게 비판 받은 건 반대의 경우라 하겠다. 차라리 인간은 문학의 낭만적 문구로 표현되는 편이 나은 존재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인문학에는 답이 없다."는 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지식은 믿음을 준다. 그것은 일정 부분 종교와 유사하다. 배운 것들 중 잊히지 않고 남아 행동과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러 인문학을 공부했고, 바쁜 생활 중에서도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답은 없다.",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진리 아닌 진리'를 마음 속에 품고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 그 포스트모던한 '진리'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다. 그 진리가 그에게는 지배집단이자, 절대다수이며, 또한 나름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되는 셈이다. 포스트모던인데도 말이다!

 

#. "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뜻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지듯, 인문학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해석 방식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 싫은 것은 내칠 수 있고, 좋은 것은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기분 내킬 때마다 꺼내볼 수도 있다. 인문학이 어려운 까닭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맞게, 자율적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스토리도 없고, 문제지도 없으며, 어떨 때에는 아예 이미지조차 없다. 그런 종류의 게임이라면 아마 게임 매니악(혹은 오타쿠)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삶은 흥행여부를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얕은 지식과 피 마르지 않은 머리로 지금까지 내가 인문학에 대해 판단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이런 것들이다. 나는 그 날 동기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큰 갈등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건 괜한 갈등이었더라.

 

 

 

 

 

 

 

 

 

 

 

 

 

 

 

 

 

 

 

#. 시험이 끝난 다음 주에 레포트 두 개를 과(科)사무실에 제출하면 나도 드디어 방학이다. 이번 계절학기에는 전공 과목들을 보충하려고 했는데, 개설된 과목이 하나도 없어 패스하기로 했다. 야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나에게 주어진 긴 시간이 마치 남창(南倉), 북창(北倉)에 가득한 노적들처럼 풍성하게 다가온다. 읽을 책, 할 공부, 다닐 전시회들을 김칫국 마시듯 계획해봤는데, 마음 속부터 북 받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 중 내친 김에 오늘 4권의 책을 주문했다. 주문해놓고 보니, 지난 학기부터 얼마간 관심을 가졌던 '종교', '폭력', '테러' 등으로 주제가 갈무리된다. <성배와 칼>이나 엘리아데 시리즈를 사려고 했는데, 금값이라 포기했고, 마침 <축의 시대>가 반값 할인이라 주저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머지 세 권은 누차 사고 싶었다고 말한 그 책들이다. 이번 방학의 초두에는 파농을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다행이 "방학이다!"며 들뜨진 않을 듯하다.

 

 

 

 

 

 

 

 

 

 

 

 

 

 

 

 

 

 

 

#. 시공사 인문서평단에서 이번 달에만 책 두 권을 보내줬다. 하나는 <궁녀>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전기>이다. <궁녀>는 무척 생소한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 그 중에서도 미시사라 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룬 책은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식단을 교정할 만한 책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예루살렘 전기>는 약 1년 간 계속 종교를 교양과목으로 듣는 내게 적합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종교와 관련된 두꺼운 책들(저 책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다!)이 계속 서재에 들어서고 있다.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지만 냉담자인 내게 이러한 책들이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각을 주고, 종교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

 

#. 이제 그만 글 쓰고, 시험공부를 해야겠다. 어릴 적, 멸치를 유난히 싫어 했던 내게 어머니께서 늘 하셨던 말씀, "편식하면 못 써!" 마음에 없는 공부라고 소홀히 하면 못 쓴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늘 벼르기만 하는 형국이니, 나는 참 철이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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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2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 잘 봤어요? 방학 했어요? 그렇잖아도 사촌동생이 오늘 보고서와 시험을 모두 끝내고 부산 집으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탕기님 보니까 상기되었어요. 만나서 놀아야지ㅋㅋㅋ

시험 잘 보고 얼른 책 많이 읽어서 서재 와요, 와!!

탕기 2012-06-27 07:48   좋아요 0 | URL
저도 드디어 방학입니다.^^
이제 천천히 책 읽으면서 학기 중에 힐끗힐끗 거렸던 책들도 정리해봐야 겠어요.
이것저것 막 주문은 해놨는데, 방학했다고 살짝 늘어지기 시작하네요.ㅎ
이번 주 중에는 탱자탱자 놀다가 조금씩 컨디션 끌어올리려구요. 아이리님도 자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