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1



  오랜만에 신간들을 보러 들어왔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문장 하나가 땅 위로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글 다듬는 나 같은 이들은 안다. 무릎이고 손바닥이고 팔꿈치고, 그런 아픔이 좋다.


  예정된 고통을 향해 넘어지는 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진다. 글 다듬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 글을 쓴다. 어른이 되어도 습관처럼 넘어져야 하는 이 삶의 ‘아이 같음’을 매번 받아들인다. 상처 아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의 서랍 안에는 대단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이제니 시인의 <달과 부엉이>를 읽다 이 문장 밑으로 도무지 읽지를 못했다. 억울하게도 저건 두 번째 문장이었다. 하지만 남은 문장들은 상관없었다. 내 마음대로 문장을 주무르다가 잡히는 아무 종이 한 장에 코를 들이댔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날까?’ 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바라는 바를 질문으로 바꾼 것이었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난다면 참 좋을 것이다. 종이의 향이 기억이니,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련해지는 많은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무력했고, 부모님도 그러하셨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력함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봤다.


  “나는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한다.”


  이 문장은 하나의 운동이다. ‘글쓰기’라는 운동의 성질은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하는 것. 마치 기체와도 같은 ‘날것’의 기억을 하나의 묘비로 만드는 것. 극단적 단명의 성질을 어떻게든 없애 화석화시키는 것. 내가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모아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넣어보던가, 3개월 남짓 되는 숙성의 시간을 ‘가을’이라는 단어 안에 가둬두는 것.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안한 유동을 잠재워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 인생을 완벽하게 기릴 수 있는 묘비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한 기억을 온전히 남기진 못한다. 모르는 것은 쓰지 않고, 거짓은 적지 않는다는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이 아닌 여러 문장과 장면만이 인상에 남는 독서의 비효율은 글쓰기에도 있다.


  하지만 글 다듬고 책 읽는 이들에게 그 비효율은 체념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핍이 낳는 가능성의 세계를 언제나 믿기 때문이다.


  기억은 종이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두 대상은 서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절대 붙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다. 그건 기억에서부터 종이로 넘어지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과정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자신을 기꺼이 그 ‘사이’의 공간에 들여놓는 사람은 남들보다 사유의 근육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수많은 사유의 경지들 중에서 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곳은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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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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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6 1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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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차의 속도가 지나쳐버린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쫓는다. 그 눈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눈으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마음에 넣어두니까. 실시간으로 흩뿌려지는 의미들이 내가 사는 속도만큼, 혹은 그 의미의 절대 속도만큼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사소한 욕심이 아니다. 아이의 투정도 아니다. 잠시 뭔가에 홀린 사람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그물이 되어보려는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착각이 낳은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부터 많은 것들이 진다. 이미 진 것들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무 같은 비석을 세우고, 위로의 낙엽을 태운다.

  가을.


  거리를 걸었다. 비 내린 아침의 날카로운 공기가 비릿하기도 했다. 그렇게 목을 넣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두툼히 넣어 걷고 있는데, 낙엽 한 무리가 내 앞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보도블록의 맨살이 드러났다. 건드리면 안 되는 가을의 치부를 본 것 같았다. 전술한 바, (굳이 말하건대) 이것은 진부한 착각이었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때때로 가을을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착각은 가을의 절대명령이기도 했다. ‘멈춰라. 너를 멈추어라.’ 이 짧은 메시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떠오르게 되는 당연한 궁금함이 있다. ‘왜 가을의 풍경은 우리의 걸음을 끊는 것일까?’ 가을을 대하는 마음이 스스로 베일을 벗는 일은 결코 없으니, 그러하기에 우리는 시를 쓰고, 노래를 듣고, 허구를 현실로 끌어오기도 하는 것이리라.

  가을.


  그것은 아주 긴 발음이다. 길게 풀려나가는 두루마리와도 같다. 하늘로 바람 따라 날아가 풀리며 결국 구름 없는 청아한 파랑이 되어버리는 풍경이다. ‘가을’이라는 단어를 손으로 만져보면 때론 전혀 촉감이 없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미 수확이 끝나 기울어진 노을처럼 누워 있는 논밭의 내음이 그곳으로부터 풍겨오는 것도 같다. 거두고 난 것을 먹는데도 마음이 허할 때가 있다. 잔인한 11월일수록 더하다. 가을 하늘 청아함을 바라봐도 우리의 눈으로는 도무지 우주를 바라볼 수가 없으나, 그럴수록 시선이 우리 안으로 아득하게 굴러 떨어진다. 그것을 건져 올리는 것도 일이다.

  가을.


  어김없이 찾아와도 해마다 더욱 진하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부터 ‘가을’이라는 걸 알았을까? 지금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얼마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도 같고, 그로부터 결국 가을을 전혀 모른다는 결론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가을이지 않은가. 아침마다 느끼는 공기의 냉랭함과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과 그렇게 헝클어져도 다시 빗고 싶지 않은 이 마음도 다 가을이지 않은가. 언젠가는 줄기차게 서리가 얼 것이고, 첫눈이 내릴 것이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가득 채우고 있는 지금의 가을, 그 의미와 그 풍부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불안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사뭇 포근하기도 하다. 어느 유명 시인에게서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라는 ‘시적 발악’이 나오길 기대하며, 내 마음도 그렇다고 말해본다.

  가을.


  한 마디로 이것 역시 붙잡아둘 수 없어 비석으로 세워둬야 하는 시간. 마땅한 장례식도 없이 추색(秋色)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고, 하필 무더기로 썩어간다. 그러나 시신을 밟아대는 이 계절의 발걸음들은 하나도 잔인하지 않다. 그 소리 듣고 사는 것이 가을의 생리이다. 우리가 밟는 것 중에서 눈과 모래 같은 것들은 그저 자연의 섭리인 것으로만 느껴지기 일쑤인데, 낙엽은 전연 다르지 않은가. 시간이 흘깃 떨어뜨려 바닥을 나뒹구는 그 의미로, 세상에 수도 없이 피어난 시. 그리고 세상은 하나의 시집. 당신과 나는 독자. 그러나 오늘부터 11월. 붙잡고 싶지만 이미 반절이나 지나가고, 그나마도 대부분 붉게 떨어져버린.

  가을.


  장인(匠人)이 다듬어낸 정교한 그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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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8일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보다 더 깊은 사람들의 ‘글’이라는 것을 대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는 데에 있어 별다른 사고절차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려는 사람들이 어떤 분위기와 문제를 유발하는지는 충분히 봐왔다. 융합과 소통의 사회임을 자처하는 21세기이지만 겉만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슬로건의 문구 같다. 오히려 오늘날은 어떤 책의 제목처럼 분노에 익숙한 사회이다. 분노로 곪아버린 여드름이 때가 되면 벌겋게 터져 나오는 듯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 상당수는 우리와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사건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개 부정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사회의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단과 방법, 규모가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그 까닭일 것이다. ‘쿨’하다는 특정한 성향에 대한 미화가 유난하다. 사람의 성격도 유행을 타야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만약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보다는 일반적으로 조금 더 ‘깊은’ 사고를 할 줄 아는 시대에 살게 된다면, 그들은 이 시대를 뭐라고 평가할까.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본 (그래서 가족들을 위해 나름 번역을 해줬던) 영화 <K-PAX>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자신을 외계행성 K-PAX에서 온 방문객이라고 소개한 프롯(케빈 스페이시)이 정신과 의사인 마크 포웰(제프 브리지스)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하나 말씀드리지요, 마크. 당신네 인간들, 인간의 대부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책, 그 어리석음으로 우주 전역에 알려진 정책에 동의합니다. 당신들의 부처와 예수는 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두 인물에게 주목을 하지 않더군요. 심지어는 불교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까지도 말입니다. ‘인간’이란. 가끔은 당신네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게 어렵기까지 합니다.” (Let me tell you something, Mark. You humans, most of you, subscribe to this policy of "an eye for an eye, a life for a life," which is known throughout the universe... for its stupidity. Even your Buddha and your Christ had quite a different vision, but nobody's paid much attention to them, not even the Buddhists or the Christians. You humans, sometimes it's hard to imagine how you've made it this far.)


  인간에게는 수많은 한계가 있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없이 통상적으로 보면 그토록 많은 인간 ‘개체’가 존재했음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삶을 살거나 가르침을 전파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정신의 경지와 단계가 탁월하여 타인을 구제하고 구원해줄 수 있는 이의 수가 적은 것이 (다들 동의하는 바대로) 당연한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주목을 하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그들을 제대로 주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주목할 만한 이는 누구이고, 오늘날의 주목할 만한 이는 누구인가? 이유는 무엇이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초등학생들이 풀 단답형 문제의 질문처럼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K-PAX>의 프롯이 던진 따끔한 경고는 언제까지나 유효할 것이다.


  월터 카우프만, 지그문트 바우만, 알랭 드 보통,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막스 피카르트, 에리히 프롬 등이 그러했다. 그들이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우리가 ‘물화(物化)’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물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임을 자의적인 선택에서이든 아니면 외부 압력으로부터 강제된 결과이든 간에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끌려가는 삶이 편하기는 할 것이다. 그로부터 자존감에 상처를 받고 내내 마음고생을 한다고 해도 주변의 물화된 환경들이 언제든지 위로해줄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화는 대체로 감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강도 높은 쾌락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고행과 같은 수행의 길이 그나마 반대 극점에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평소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독서와 사색이라는 방법밖에 없다. 물화되어 있지 않은, 정돈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위험천만한,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것. 독서와 사색은 우리를 정신으로 안내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이다.


  현대문학을 가르친 한 교수가 그랬다. “여러분은 작가가 될 꿈을 꾸지 마십시오. 그 고단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한 명의 충실한 독자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낭만적이고 쉽습니다.” 물론 반어적인 의미였다. 2년 전 강의였지만 뇌리에서 이 말이 떠나지 않는다. 정신적인 삶의 고충이 얼마나 무게감 있는 것인지는 그 결과물이 하나의 사회에 알려졌을 때 그 사회가 겪게 되는 소위 ‘후폭풍’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고, 그 규모가 개인이 상상하기에는 너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신적 삶을 사는 ‘그들’과 우리[凡人]의 현저한 차이다. 우리가 할 말도 그들이 하면 다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통해 쟁취된 것이기에, 또한 증명된 것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삶 내부로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어쩌다가 한 번 쯤은 우리가 무한히 생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새로워지며, 신념이 다시 세워진다. 자주(自主)의 거대한 산맥이 삶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정신적 삶의 위력이다.


  독서와 사색이 정신과 닿아 있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타인의 정신적 삶을 맛볼 수 있다. 후에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정도 마음 다잡고 살다가도 다시금 우리의 삶은 대체로 물화적인 영역으로 선회하기 마련이고, 이런 일상에서 버둥거리며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시도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알 만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후에 다시 타인의 정신적 삶에 ‘접촉’하는가에 달려 있다. 순전한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든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든지 우리는 ‘접촉’이라는 일종의 사건에 주목해야 한다. ‘접촉’이라는 사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중요하다. 책을 읽으라는 대중적인 충고도 명백한 증거를 가진 조언이다. 그러나 책이 매한가지로 좋은 것만은 아니듯이 우리에게는 ‘접촉’이라는 사건을 조금 더 제한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이것이다. “무엇과 접촉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독서량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예 책을 안 읽는 이들에게야 전 세계의 독서량 데이터를 가지고 설득을 할 수는 있겠지만 책을 읽는 이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자신들이 믿기를) ‘독자’층에게는 어떤 책을 읽어서 자신의 정신적 삶을 외부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키는지를 자문하도록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점에 있어서 수많은 이들이 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 하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데 열정적이고,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보다 확장된 독서를 하는 이들을 ‘보통 독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대부분은 ‘보통’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안이한 독자에 머물고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책 한 권을 써야 한다는 식의 다소 보수적인 것 같은 말을 나는 거의 전적으로 지지하고 믿는다. 양심적으로 생각했을 때, 독서는 연비가 매우 낮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며 (주로 시간문제 때문에 먹히는 말이지만) 발췌독을 권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듯한데, 과연 작가가 아닌 우리가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나쳐도 되는지를 어떤 수로 제대로 판단할 수가 있을까?


  한 권의 책이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를 굳이 작가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하나의 결과물이 저 가벼운 종이 안에 묶여져 있는 현상(혹은 기술) 자체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런 독자라면 “작가가 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부터 우리의 또 다른 독서는 시작된다.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일인지를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 하나의 문단, 그리고 하나의 장. 한 권의 책 곳곳에서 우리가 탐구하고 사색, 경험할 수 있는 세상으로 수도 없이 뻗어나가는 부지기수의 선이 있다. 안 그래도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독서이다. 한 권도 많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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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7



  8년 만에 만난 대학동기가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우린 서로 알아보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너도 아직 학교에 다니는구나. 우리 학번 별로 없지, 맞아. 우리 나이 대에는 하는 말이 다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친구는 제대 후 몸이 아팠고, 나는 제대 후 길을 헤맸다. 서로 3년을 휴학하고, 우리는 어색한 고학번이 됐다. 할 말이 많았다. 아직 같이 저녁을 못 했으니, 그때에 가서는 먹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뱉어내겠지, 그렇게 한 주가 끝나간다. 개강한 것보다 그 친구 생각이 더 많다. 8년 만의 얼굴이다. 어른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 8년도 까마득하다.


  그 친구는 철학을 하고, 난 문학을 한다. 군대 이야기, 취업 이야기, 결혼 이야기, 뭐 이런 것들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말하다가 문득 질문을 받았다. 무슨 책이 좋았냐고. 마침 강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우린 복도에서 헤어졌다. 다음 주를 기약하기에는 나의 마음만 앞서간다.


  친구야. 나는 이 두 책을 늘 보이는 곳, 가까운 곳에 꽂아둔다.



















  이탈로 칼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

Italo Calvino,『Le città invisibili(1972)』


  아포리아를 딱히 챙겨두거나 하진 않는다. 그건 고등학생 시절에 충분히 하고 다 끝냈다. 플라스틱 판으로 되어 있던 교실 책상에 샤프 꽁지로 긁어서 적어두는 건 나만의 유행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젠 문장에 휘둘릴 나이는 벌써 지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구절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임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는 아포리아를 모방한 쓰레기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인데. 여하튼 그건 다 지나간 이야기.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포리아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나는 감히 말해본다.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책장과 벽 사이에 콘센트가 있어 코드를 꼽으려고 손짓으로 전전반측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구멍 곁에서 사납게 긁어대다가 이윽고 코드가 딱 들어맞는 순간, 그 삽입과 결합의 쾌감을 말이다. 아포리아란 그런 것이다. 내가 맞아 떨어지는 문장과 구절이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완전체로 향하게 된다. 다만 완전체가 되진 않는다. 그 앞에 ‘pseudo-’를 붙여야 하니까. 그래도 아포리아는 퍽 매력적이다.


  아포리아로 이뤄진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대놓고 다 맞아 떨어지는 코드는 너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진리의 순간이 헤퍼지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포리아를 마약 삼은 자들처럼 불쌍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


  다만 한 권의 책이 통째로 하나의 아포리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책을 성경과 꾸란, 우파니샤드의 옆에 나란히 꽂아둘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은 그런 책 한 권을 얻어내는 일.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순고한 정신으로, 독서를 하는 일. 어쩌면 생각이 많다고 책을 걷어찼던 지난 몇 번의 긴 시간은 그 순결을 지키고자 다른 책을 일부러 괄시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는 한 권의 아포리아를 찾았는지.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간절히, 그래서 그게 누가 됐든 상관없이 모든 조언을 받아들일 만큼 절실히 물어서, 그 물음을 내가 받아들게 되었다면 나는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경전처럼 읽으라 귀띔해주고 싶다.


  그렇다. 물론 이건 소설이다. 쿠빌라이와 폴로의 거짓말이다. 세상에 그런 도시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제목에서도 그 도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경전처럼 읽으라 한 뜻은,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는 종교의 순수한 마음에서 이 소설을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허구에서 진실을 캐내려고 할 때,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서 건강한 고구마와 감자를 힘껏 뽑아내려고 할 때, 우리는 대체로 경전을 대하는 마음을 호미와 쟁기로 사용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침묵의 세계』

Max Picard,『Die Welt des Schweigens(1948)』


  책을 읽는 자들 중에서 침묵에 대한 직관을 가지지 못한 이가 몇 있을까. (다들 알면서 숨기는 것이겠지.) 낭독을 제외한다면 독서는 침묵의 일환이다. 밀어 올리거나 끌어당기고, 혹은 켜거나 끄면서 움직이는 세상을 사는 요즘에 독서만큼 묵언수행, 혹은 수도(修道)에 가까운 자세와 태도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고리타분한 독서를 하지 않으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독서는 재기발랄하고 유쾌하며 역동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말은, 책을 읽으면서 이리저리 산만하게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너무 흔하다는 뜻이다. 쉽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볍다는 뜻이다. 독서마저 가벼워진다면 인생의 의자에 앉아 우리의 엉덩이를 덥힐 그 따뜻한 기회는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인생의 의자에 앉는다는 건 합체된다는 뜻이다. 무엇과 붙을 것인가는 개개인의 몫이 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존재에 있어 합체는, 혹은 결합은 중요한 주제로 항상 남아 있다. 이 시대가 우릴 어디에서 떨어뜨려놓았는가. 책을 읽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런 질문을 듣지 못하며, 듣다 한들 답변의 단서조차 도무지 찾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부유(浮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주제로 수많은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놀라운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신과 비탄으로 우리를 잡아끄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수레 삼단화(Hooiwagen-drieluik)>와 같은 무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글을 찾는 작업은 본래부터 어려웠다.


  사상의 언저리를 헤매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말 것. 들여다보는 이들을, 그걸 거칠게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진 이들을 사랑할 것.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많은 이들이 쓸모없는 독서의 무용성을 간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만 봐도 그러하다.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운집한 곳이 아닌가. 다독(多讀)이야 취향이겠고, 요즘 ‘취존’해달라는 민주적 의견이 대세이긴 하지만 하늘을 날 것도 아닌데 깃털처럼 가벼운 걸 왜 그리도 많이 찾는지 모르겠다. 쉬었다 갈 요량으로 한 입 솜사탕 베어 문 것이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어울리지도 않는 (또한 기능도 없는) 깃털로 살갗 전부를 가리진 말 것. 우리에게는 알맞은 몸무게라는 것이 있다. 피카르트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0g이었을 무렵에서 각자의 몸무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었던 0g의 세계를 알 수 있다. 역설이지만 0g이 가장 무겁다. 우리를 중력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밀어올린 그 무게의 근원이 가장 무겁다. 가장 밑에 깔린 것이라 이 책을 두 번 고쳐 읽고도 나는 아직 침묵을 전혀 모르겠다. 입을 다물고, 할 말을 조금 줄여보는 수밖에, 아직은 없다. 나는 매해 이 책을 고쳐 읽어야 한다. 나에게 가장 위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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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3-0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의 빛나는 보석 같은 아포리아 일지라도, 책 속의 맥락에 들어있을 때는 보석이지만 아포리아 단독으로 봤을 때는 그냥 광석에 불과하다. 책은 인생이고 아포리아는 작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탕기 님의 글이 제게는 이런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저는 책 읽을 때 아포리아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책을 좋아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아포리아 구절 보다 책 전체가 더 와닿더라구요. (확실히 이전보다는 아포리아에 덜 열광하는 거 같아요.) 이 변화가 무얼 의미하지? 하면서 갸웃거리던 중 탕기 님의 포스팅을 읽으니 무릎을 아니 칠 수가 없네요. 탁~

두 권의 책, 눈길이 갑니다. 매해 고쳐 읽어야 하는 책이란 말씀이 와닿구요.

탕기 2014-03-10 23:08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요.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4-03-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이 전체가 아포리아인 책을 고른 듯해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한 문장을 찾으려다보니 전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이었거든요. 두번재 책은 저도 기억해둘게요, 탕기님이 좋아했었다는 걸, 아니 좋아한다는 걸. 잘자요^-^

탕기 2014-03-13 07:43   좋아요 0 | URL
칼비노에게서 느낀 점이 정말 많았어요. 솔직히 <우주만화>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자주 손에 닿는 책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입니다. 3~4장만 읽어도 생각할 것이 참 많은 책이잖아요.^^

<침묵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피카르트가 한 이야기의 액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뒤에 그려진 배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지요. 그래서 올해 또 한 번 고쳐 읽을 생각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03-13 19:06   좋아요 0 | URL
멋있다, 어젠 잠깐 왔다가느라 짧게 적고 갔지만 이 글이 생각할 여지를 주었어요. 권수에 집착하고,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깊은 독서보다 한단계 아래의 독서로 자만하고, 그걸 억지로 글로 풀고, 그 행동을 반성하면서도 잘 고치지 못하는 반복적 행위가 지겨워졌는지 저도 생각없이 쓰는 우러나오지 않는 글은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주만화>는 3부작 뒤에 읽으려 했는데 아직이구요, 피카르트는.. 더 궁금해지네요. 책이야 워낙 유명하고 좋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탕기님 글보며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액면만이 아니라 배경을 읽는 일, 중요하고 또 그게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으면 좋겠어요. 아 맞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읽을때 탕기님 생각했었어요. 구절이 나뉘기에 짧아보여서 먼저 시작했던건데 참 좋아서, 언제 인사를 해야겠다고 하고선 까먹고 이렇게 인사해요.^^

좋은책 여러번 읽는거, 저는 잘 안하던 버릇인데 좋았던 처음 마음을 훼손하고싶지 않기도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젠 해보려구요. 몇 권 있긴한데, 잘 갈무리해서 이런 페이퍼 쓰고 싶어요!

탕기 2014-03-13 23:29   좋아요 0 | URL
사실 독서의 성향이야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뭐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하나의 책을 읽기 위해 그 책의 척추와도 같은 단어, 현상, 혹은 개념이나 물질 같은 것을 평소에 많이 생각해봐야 하는, 그런 책이 있다고 말이죠. 그래도 읽기에는 독자가 너무나도 부족한 상태인 책.

평소 침묵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은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으며 완패의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물론 읽으려 하지도 않겠고, 몇 장 읽다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달리 말하자면, 겉만 훑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피카르트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아이리님은 그런 점에서 어서 빨리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분들 중 한 명일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아이리님에게 정말 좋을 거예요."라고 섣불리 말씀드릴 수도 없어요. 저는 이 책에서 아이리님이 뭘 얻고 나오실 지 전혀 모르니까요.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침묵'을 말합니다. 완독 후 뭐든 들고 나올 수 있다는 뜻이에요. 불안정한 독서를 피하지 못합니다. 그런 느낌 받은 적 있으세요? 독서하는 내 눈이 막 흔들리고 있는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 말이에요. 약간의 비유이긴 하지만 저는 이 책을 그 시선의 산란으로 기억해요.

아이리님의 <침묵의 세계> 독서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4.03.01



  고 3때, 담임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로부터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아마 평생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대입을 앞두고 있었고, 새파란 사랑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서툴렀다. 나도 사랑으로 아린 상처를 남긴 시절이었다. 아무 것도 정리된 것 같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것이 ‘불안’이라는 걸 알았다. 삶의 접착제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아포리아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타액마저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명언인지 아니면 담임선생님께서 만드신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저 사랑의 농도를 감히 가늠해볼 수가 없다. 모 방송의 토크쇼에 강신주가 나와서 사랑을 정의내린 기억도 방금 떠올랐다. 하이데거의 말도 떠올랐다. 수 천 년 전의 한 성자(聖者)의 가르침도 떠올랐다. 뉴스를 보니, 20대가 잔소리가 싫다며 50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고, 한 종방의 토크쇼에서는 이름 모를 부부가 출연해 방송에서 대놓고 싸우고 있다. 다 보기 싫다. 소름이 경멸의 결을 따라 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아직 이 나이까지 단 하나도 성숙하지 못했다 생각하나, 세상에서 진리 하나를 건진 듯하다. 우린 세상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또한 한 번 배우고 나면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야 하며, 부단히 배워야 한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맛 좋은 점심을 먹으러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멜로디가 좋은 팝송이 있어 동생에게 검색을 해달라고 했다. 머리에서 멜로디가 떠나지 않아 집에서 다시 검색해보니, 사실 나를 묶어둔 건 가사였었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제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제게 상처받은 영혼밖에 남지 않았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나는 곧장 문태준의 시「가재미」를 떠올렸다. 아직도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은 상상처럼 되는 것이 아니더라. 내 눈에 그리도 예뻐 보이던 그녀가 돌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화를 내면 나는 세상이 다 싫어졌었다.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한 쪽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다만, 사랑이 1+1로 2 이상을 낳는 놀라운 마법이라 알고 있던 어린 나에게 그 값이 계속 1로만 떨어지는 것 같아 그 무엇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눈이 멀더라. 그런데 나는 편지로, 문자로, 목소리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치 화장실 휴지의 커다란 묶음 상품 옆에 붙은 호일이나 키친타월인 양 붙여넣기 하고 있었다. 왜 나는 그 정체를 모르고 있었을까? 더 궁금한 것은, 누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는가? 라나 델 레이의 저 노래가사, 저 질문에 “Always.”라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은, 그 용기는 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다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 것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늘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모자람의 눈물이 난다. 없어서 우는 것이다. 그렇다. 허한 공동(空洞)에 울려 퍼지는 헛소리와 한겨울의 한기가 허무하고 냉랭해서다. 문태준은 시에서 뭐라고 하였나. 시한부 인생, 곧 병으로 숨을 거둘 것이 분명한 아내의 병상 옆으로 남편이 아내와 같은 낮은 높이까지 내려가 가재미처럼 바짝 눕는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아내는 아름답지도 않다. 상처받은 영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몸은 더 이상 몸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기능도 하지 않으므로 거추장스러운 가죽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은 우리가 언제든 몸 밖으로 꺼내고 다시 집어넣을 수 있었던 영혼이 그 몸이라는 곳 안에 갇혀 아내는 어디도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내는 “Will you still love me?”라고 묻는다. 아니, 묻진 않았다. 시의 그 어디에도 물음의 흔적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향하는 사랑에서 우리에게 물음과 답변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리라. 하나의 인간이 가재미가 된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한 마리의 가재미가 되었다. 그 순간 아내가 눈물을 왈칵 쏟은 이유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면서 되묻는다.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랑이 예전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채를 낼 수 있도록 내가 빛을 비춰줄 수 있는가. 신이란 존재가 있어서 내게 그걸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부탁하고 싶다. 언제쯤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사랑을 ‘용기’라고 읽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 얻기에도, 하기에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버리기에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말이 맞다. “단 한 번 스치기만 한 그 사람의 / 붉고 뾰족한 것에 긁히고 휩쓸려 / 사정없이 곪을 테니.”(이병률,「고름」) 그럴 바에 다치지 않는 편이, 혹은 내가 뾰족해지는 편이 이윤 남는 장사라는 심보가 한두 번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싫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사랑 앞에 ‘쿨’하다는 태도가 과연 우리가 광고하고 회자하는 것처럼 정말 멋진 것인가? 나는 사람의 겉을 핥고 다니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리라. 맛만 좀 보자는 게 아닌가. 어딘가에서 우리는 그들의 손놀림에 뺨을 몇 대 맞았을 수도 있다.


  청춘의 잔인함은 우리의 대부분이 사랑을 모르는 채 우리 스스로가 재단한 사람에 대한 시선으로 사랑을 평가하고, 미래를 과감히 시험한다는 데 있을 것. 핑계도 대어본다. 남자와 여자가 너무 많다. 매한가지로 달리기 위해 태어난 종마 같이 우리가 메어있는 곳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 트랙에서 빙빙 돌다보면 제 격에 맞는 상대와 들러붙겠지 하는 계산. 뭐 이렇게 계산기 두드려보지 않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따져놓고 보면 이런 난잡한 글을 쓰는 나도 어떻게든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요리조리 피해가려는 곡예운전사일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누가 사랑을 못할까. 그 누가 사랑한다고 자부하지 못할까. 그 누가 자신을 속이지 못할까. 속인 줄도 모르고, 맹신 속에 살아가지 못할까.


  분명한 사실이다. 사랑의 시 앞에서 우리가 통곡을 하는 까닭은 확실히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카타르시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문태준 시인의「가재미」같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높이 손을 한 번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죽어가는 아내와의 사랑. 라나 델 레이의 노래가사처럼 상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의 사랑. 아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랑과 오래도록 평행을 이루고 싶어 한다. 신형철은 자신의 평론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신형철,『몰락의 에티카』)


  강신주는 사랑은 상대의 몰락 앞에서 진정한 시험을 맞이한다고 했다. 다음 상황들을 극적으로 변조해보자. 아내가 죽어가는 상황은 아내가 가정적으로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다. 아버지가 더 이상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 눌러앉는 상황은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임과 동시에 위치적으로 ‘비정상’인 상황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상황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니가 ‘타자화’되어가는 상황이다. 이때 우리의 사랑은 그 진정함의 시험대에 오른다. 몰락의 순간에. 내가 아니라 상대의 몰락 때에.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여러 상황들을 고민하지만 막상 ‘닥치면 잘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랑은, 우릴 잔인하리만치 심판하리라.


  진정한 사랑을 달이라 해본다. 삶은 환상문학과도 같아 산소마스크와 우주왕복선 없이 달을 밟아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그러면 우리는 독후감을 쓴다. 나도 달을 밟아봐야겠다고. 하지만 나는 두렵고,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가장 먼저 야속하다며 신을 욕할 속 좁은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칼비노의 『우주만화』에서처럼 장대 하나로 지구와 달 사이를 오고 간 신비의 옛 시대를 그저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도 쉬운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도 의문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달이 있다는 사실이다. 틱낫한 스님도 우리를 타일렀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달을 보고 걷는 자는 달을 보고 걷지 않는 자와는 다르다면서 말이다. 거리가 문제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거리도 숫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나는 달을 보고 걸으면 더 많은 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제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아주 많은 거리를 걸은 자라면, 내가 그 자라면 이렇게 대답해줄 것 같다.


  “우리 함께 이리도 긴 걸음을 함께 했는데, 우리에게 때가 어디 있으며, 우리에게 예외는 또 어디 있습니까? 당신과 나의 시간은 ‘항상’입니다.”


  마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나는 지상에서 아웅다웅하며 죽이고 살리는 사랑보다는 유유히 저 먼 달로 날아가는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을 더 값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병실에 누운 두 마리의 가재미를 생각해본다. 거울에 내 모습이 가재미로 비춰질 수 있을까를, 물어보고 바라본다. 영락없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래서 우는 것이다.


  He's my sun, he makes me shine like diamonds.

  (그는 나의 태양입니다. 그이는 나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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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와서 추천! (뭐라 덧붙일말이..) +_+ 잘 읽었어요! (꽃피는 3월이에요!)

탕기 2014-03-05 07:54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아이리님 ^^
진달래, 철쭉 몽오리들이 조금씩 밀고 나오는 중입니다.
그래도 꽃샘추위는 여전하니까 몸조심 꼭 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