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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① <이슬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 아얀 히르시 알리 / 추선영 옮김 / 알마


  맞으면 아프긴 하지만 통증, 멍, 상처, 장애 등 우리의 신체를 결정해버린 징표들보다 훨씬 오래 가는 것은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라, '맞아서' 아픈 것이다. 아픔은 맞음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현상이지만, 나는 왜 맞은 것일까? 왜 누군가가 나를 때렸던 것일까? 때릴 수 있었던 그 환경(체제, 제도 따위)과 내가 맞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약자, 소수 등)은 결국 하나다. 분리될 수 없는 이 폭력의 전체성이 만연한 사회는 젠더전통, 근본주의 종교, 혹은 전쟁, 경제위기 등 특수 상황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폭력적 상황을 정당화시킨다. 아얀 히르시 알리의 책 번역 제목에는 두 개의 방점이 있다. 이슬람과 여자. 이슬람교와 아랍이 최근 IS 사태로 상당히 왜곡되고 있는 분위기가 안타깝긴 하지만 이 종교적 전통이 여자의 '참여적 태도'를 억압해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미국과 네덜란드 국적을 얻어가면서 이슬람에게서 분리된 이 정치인의 목소리는 그런 전통 속에서 희생된 여성 가치의, 아니 인간 가치의 존엄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국내에 소개된 아얀 히르시 알리의 두 번째 책이며, 앞선 책의 번역을 맡은 추선영 씨가 또 한 번 귀중한 수고를 해주셨다.




















② <쌤통의 심리학> - 리처드 H. 스미스 / 이영아 옮김 / 현암사


  순전히 흥미로울 것 같아 고른 책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사실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운 적이 있었다. 물론 죽을 정도로 고통 받는 누군가를 본 적은 없고, 아마 그런 모습을 본다면 비위 약한 내 내장기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고통(?)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다수가 공감할 것이다. 저 정도의 고통, 그것이 신체적이든 처지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것이든, 그만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봐줄 수가 있다. 어두운 내면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창 틈으로 이 사회의 쇼윈도우 안에 있는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는 쾌락을 준다. 고통은 때론 전시되는 것 같다. 관음증적 변태 환자다. 왜 나는 이런 걸까? 학습된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여러 분야에 걸쳐 대답이 나오겠지만 이건 분명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다. 찜찜하다. 그렇다고 나의 쌤통 심리를 정당화할 계획은 없다. 책에서는 정상이라고 말한다고 이미 스포일러가 떴지만. 일단은 되도록 줄여봐야지, 생각하는데 모르겠다. 우선 읽어봐야 할 것 같다.





















③ <모든 것의 역사> - 켄 웰버 / 조효남 옮김 / 김영사


  사실 이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30대에 막 접어든 나에게 정신의 영역은 피상적인 관심과 이따금 발동하는 '멋부리기' 모드로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임이 명확해졌다. 반성하는 중이다. 세상은 더 어려워졌고, 깊게 들어가려던 예전의 거만한 시도들은 봉쇄시켰다. 나를 둘러싼 정신 사이에서 운신을 줄이는 대신 주변을 둘러본다. 최근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해 다시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비밀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건 헤어짐과 죽음 등으로 필히 작별을 경험하게 되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는 말이지만, 실은 인간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종교와 철학의 대가들이 한 목소리로 던진 맑은 조언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켄 웰버를 알게 된 건 길희성 씨 덕분이다. 신비사상가라는 점에서 그를 주목하진 않는다. 나는 그가 '범우주적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에 매료됐다. 과연 그러할 지는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구분 없이 펼쳐져 있는 이 우주 같은 시선과 그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올 사상적 정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12월의 추천 신간을 쓴다고 새해 벽두부터 느릿느릿 찾아본 수많은 책들 중 오랜 시간 붙잡고 모니터 옆에 꽂아두고 싶은 유일한 책이다. 2016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④ <역사교과서 국정화, 왜 문제인가> - 김한종 / 책과함께


  그래도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과서 문제에, 아니 교육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해 거국적 좌우 싸움을 벌이고, 안 그래도 선거구 확정 문제 등 다른 정치권 이슈들 때문에 도무지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가 이미 오래 됐는데,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위안부 관련 문제도 그렇고 연말에 참으로 속 거북한 소식만 들린다. 송구영신의 기분 뒤로 무겁게 깔리는 구름 같은 걸 걷어낼 수가 없었다. 교육 문제가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정치권은 늘 그랬듯이 그걸 가지고 싸움을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생각' 자유의 문제가 정치적 카드에 든, 마치 만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카드들 속 귀여운 몬스터들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서로 공방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아니, 차라리 만화의 몬스터들은 귀엽기라도 했지. 그리고 또 하나 기가 막힌 건 교육의 현장에 있지 않은 이들이 왜 역사 교육이 좌우 편향을 나눠버린다고 예단하고 '피치 못할 결정'을 내리는 분위기를 조성한 뒤 그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냐는 거다. 혹시 어린 학생들이 하나의 팩트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내리지 못할 거라는, 혹 그들이 하나의 해석만을 습관적으로 외워 나중에 '그런 어른'이 되어버릴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일까?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나는 이만한 국가적 실패도 없을 거라 확언한다. 왜 문제일까? 누가 모르나?





















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리사 랜들 /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우주/과학 분야를 읽다 보면 정신의 분야를 들여다보는 착각을 한다.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은데,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것이 많다.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고, 확인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러니 '우주'라는 단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도 불가능하다. 전문용어, 영단어, 기호, 수학 등, 왜 하필 이런 것들에 그리도 취약할까 싶은데, 지금의 내가 범접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세계를 설명하는 기본 요소들인데도 나는 우주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새벽에 아파트 사이로 높이 떴다가 시계로 치면 1시에서 2시 사이의 방향으로 지나가버리는 (대략 3시간 정도 걸리는데) 목성 보는 재미가 있다. 저기까지의 거리가 얼마일까? 검색해보면 나오겠지만 그 수를 내가 이해할 방법은 없다. 작정하고 뛰어본 거리로는 10km가 최고고, 근래 맛 들린 자전거로는 42km가 최고였다. 그런데 수 억 km면... 저 행성을 작은 점으로라도 볼 수 있다는 고마운 마음이 '과학적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이 된다. 나는 과학을 그런 눈으로 읽는다.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작아지고, 안으로 들어가고, 일치와 분리, 재결합을 느낀다. 리사 랜들은 유명한 과학자다. 너무 유명해서 굳이 유명하다고 하지 않아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미치오 카쿠, (故)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등 과학 분야의 최전선에 서있는 전투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과학자이다. 쉽게 쓴 책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내용임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보라. Knocking on Heaven’s Door. 과학의 시선으로 우리가 들여다보는 건 그다지 딱딱하지 않다. 우주-인간의 관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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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폭한 독서> - 금정연 / 마음산책


    독서에 한창 빠져 있을 때는 그랬다. 남의 서평은 읽고 싶지 않았다. 아이 같은 욕심 탓이었다. 지금 읽는 바로 이 책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물론 문학 강의를 듣거나 비평이론 같은 걸 읽으면서 '다른 눈'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눈을 갖고 싶었다. 그게 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고집은 서서히 사라지더라. 너무 많은 책이,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을 알고 싶은 바닥 없는 욕망은 남의 눈을 빌려야 그나마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몇 권이 집에 있지만 별로 성이 차지 않았던 터에 신간으로 <난폭한 독서>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별로였다. 그런데 '난폭'과 이 책이 담고 있다는 '풍자'의 두 단어가 미묘한 케미스트리를 갖고 있었다. 그 결합 때문에 직감적으로 골랐다. 모르는 책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 겸, 사납다는 그 독서의 방식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 겸.




















2. <말, 바퀴, 언어> - 데이비드 W. 앤서니,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반사적으로 <총, 균, 쇠>가 떠오른다. '기마민족'이라는 테마가 매력적이다. 고고학, 언어학, 신화학, 인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분명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이다.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제목의 '말(馬)'이 '말(語)'로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적 뿌리가 같다고 추정되는 유라시아의 오래된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니 그렇게 보아도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미술이론과 역사를 공부하는데, 선사시대 미술을 검색해야 할 때면 Wikipedia나 Stanford Encyclopedia 등에서 고고학, 인류학 등 과학적이면서도 인문학적인 분야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매력적이다. 굳이 독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어려운 분야를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까마득한, 그리고 알 수 없는 과거로 호기심을 던지는 그 순수한 마음이 지닌 가치를 확인했었다. 동심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화석인 '말(語)'과 고고학의 분석으로 이뤄진 이 책에서 선사시대의 광활한 초원이 어떻게 복원될 지 궁금해진다.






















3.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김영란 / 창비


    딱딱하고 어려운 건 질색이었던 대학생 시절, 나는 내가 판결문을 서너 개 읽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영어로 된 것이었다! 한창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을 때였다. 그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유행하는 지적 흐름은 따라가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관련 강의를 들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정치철학의 피치 못할 관문인) 칸트도 읽고, Wikipedia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미국 법관들의 판결문도 읽었고, 내친 김에 마이클 샌델의 다른 책들도 3권 더 사서 읽었다. 그때 내가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대부분의 내용은 무척 지루하다. 둘째, 하지만 판결을 선언하는 마지막 문단에서는 가슴을 울리는 명언들이 나온다. 그 때문인지 나는 법이 지닌 차가운 이미지가 원칙을 고수하는 단호함에 있는 것이지 실은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그렇지 않은 법 탓에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본에 근거한 법의 근본은 기본권 보호다.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은 이미 유명하다. 나는 그녀가 제대로 된 의식을 갖고 있는 사회적 인물이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전 대법관이 사회적 이슈과 된 판결들을 모아 조곤조곤 설명해준 책이니 서재에 꽂아두고 읽지 않을 수가 없다.

    





















4. <IS : 분쟁전문기자 하영식, IS를 말하다> - 하영식 / 불어라바람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누리꾼들 중 대부분이 '아랍'과 '이슬람'과 'IS'를 여전히 혼동한다. 전형적인 '일반화'의 악습이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 이후 또 도졌다. 심지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이라는 단어가 소수의 억압 받는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언어 폭력의 피해자까지 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IS는 이슬람이 아니다. 누가 봐도 가짜인 이슬람의 탈을 쓰고 정치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폭력 집단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예측과 달리 IS는 서구 문화의 심장부 중 한 곳인 파리를 급습하는데 성공했고, 그 공포는 이제 미국 본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도 반응을 했었다. 테러의 위협이 지근거리까지 왔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오해받지 말아야 한다.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현장을 목격한 하영식 기자의 이 책은 IS 뿐만 아니라, 현재 터키, 시리아, 러시아 등과 연관되어 뉴스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쿠르드'라는 민족,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까지 담고 있다. 국내 이슬람 전문가들의 글은 다소 딱딱한 경향이 있는데, 현장감이 있는 기자의 글은 어떨지 기대된다.




P.S 예술/대중문화 분야에 읽어볼 만한 좋은 신간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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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에일리언 유니버스> - 돈 링컨 지음, 김지선 옮김


    영화 <E.T.>, <스타 트렉>, <스타 워즈>, <우주전쟁>, 미드 <X-파일> 등을 하나하나 챙겨볼 정도로 우주와 외계 생명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은 외계 생명체가 무엇인가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지구의 우리가 외계 생명체를 어떻게 그려왔는가에 집중하며 출발하고, '가능한 외계 생명체'의 형태를 추정해보기 위해 지구의 생명 방식을 알아본다. 4장까지 술술 읽히던 독서가 5~6장에서는 다소 전문적인 내용 탓에 느려질 수도 있지만 어려운 용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안성맞춤이다. 저자 돈 링컨이 문화과 과학 사이에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칼 세이건, 미치오 카쿠, 닐 투록, 크리스 임피 등 과학 명저들을 두루 읽어 왔지만 근래에는 <에일리언 유니버스>만큼 흥미롭고 풍성한 '과학 이야기' 책을 접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하루 이틀 정도에 다 읽을 수 있는 과학책은 그리 많지 않다.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 양태자 지음


    내가 읽은 양태자 교수의 첫 책은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15년 1월 신간)>이었다. 평소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기 때문에 '중세'와 '마녀사냥'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은 아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내게 더 클 것이다. 그런 내게 양태자 교수의 쉬운 글은 언어의 장벽을 두드리며 공부하는 일상에 단비와도 같았다. 확실히 양 교수의 글은 움베르토 에코와 다른 이들이 쓴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중세>라는 책과는 달리 읽기 쉽다. 그런 그녀가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를 신간으로 냈다는 희소식이 있었다.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은 주제가 주제인 만큼 마음 편히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는 (우리 가족의 일상어로 표현하자면) '화장실 책'으로 삼기 좋았다. 길거리 장사꾼, 이동 변소, 노상 음식, 책장수, 고철 수집가 등 우리에게 친숙하거나 그렇지 않은 수많은 부류의 직업들이 소개되니 챕터별로 읽어도 좋고 몰아서 읽기에도 좋다. 흡사 피터르 브뤼헐의 풍속화 속에 들어가는 상상까지 하게 만든다. 12장부터는 약 60여 페이지에 걸쳐 삽화들이 나오는데,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중세 유럽의 자세한 삶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풍부하게 소개해주는 국내 저자는 드물다. 유럽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모로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③ <고장난 저울> - 김경집 지음


    아무래도 인문학 분야의 책을 이모저모 살펴보는 독자들이라면 '어? 이 저자의 예전 책 괜찮던데...' 라는 반가움과 설렘으로 한 저자의 책을 (우리끼리 은어로) '파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게 김경집은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으로 큰 충격을 준 저자였다. 대학 시절, 비교종교학 강의를 듣고 몇 권 종교 관련 인문학 책들을 찾아 있었는데, 김근수의 <슬픈 예수>와 함께 김경집의 그 책이 단연 기억에 남았다. 그의 <인문학은 밥이다>도 생각날 때마다 챕터별로 골라 읽곤 한다. 그런 김경집의 신간 <고장난 저울>이 나왔으니, 안 살 수가 없었다. 에필로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다. 거짓이 참을 능멸하고 탐욕이 정직한 노동을 우롱하며 불의가 정의를 조롱한다. 저울은 이미 완전히 망가졌다. 이 고장난 저울을 누가 고칠 것인가."(197쪽) 기울어버린 저울은 그가 말하는 '수평사회'가 아니며,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 우리를 우롱하는 각종 사건과 현상들을 뉴스로 목격한다. 김경집은 그런 우리가 포기와 체념의 일상을 산다며 안타까워한다. 경제, 교육, 수평사회를 테마로 한 3장의 일침이 이 책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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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4


    봄날의 햇살에 걸터앉는 것도 좋다.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댔다 등을 댔다 하며 뒹구는 것도 좋다. 찬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에 숨는 것도 좋다. 매한가지로 책을 읽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제 막 일출을 마친 가을의 품을 우리 독자들은 왜 그리도 편애하는 것인지. 사계 중에 가장 사랑하는 모습을 꼽으라면 그들 중에도 가을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뭐, 1/4 정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책은 분명 그렇다. 거의 다 익어간, 붉어지는, 떨어지는, 바람에 구르는, 쌀쌀해지는, 하늘이 맑은, 더러 눈 내리는 날이 그리워지는 이때가 제격이다. 최초의 책은 가을에 만들어진 건가. 혹시.


    사람마다 다르고 나이마다 다르다고들 한다. 겪은 일도 그 가지가 부지기수일 텐데, 그런 우리들 사이에 저마다의 가을이 갖고 있는 의미를 너무 일반화해서 이해하는 건 별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이들의 가을은 어떨까. 일상의 ‘오후 3시’ 같은 느낌일까. 부모님께서는 “심하게 가을 탔어.”라고 표현하시지만 사실 난 그 뜻을 모르겠다.


    지금은 없는 한 가수는 서른 즈음이 되면 세상 일 중 흥미로운 것이 하나둘 사라져간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가을이, 그 중 어떤 가을이 내게 유난한 의미를 갖고 있진 않다. 둔해진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인정하면 스스로 섭섭해지고, 그런다. 생각한 것, 겪은 것, 그 중 저물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쓰라린 상처 같은 것이 드물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을’하면 나는 주름이 떠오른다. 세월이 만든 산맥들 사이로 낮게 그림자가 지고, 점점 짧아지는 해가 어둠으로 사라지는 모습이다. 아, 그러고 보니 책이 그렇다. 나보다 많은 주름을 가진 이들이 적어 내려간 생각들이다. 겉보기에는 정갈한 평면 같지만 뭐 하나 빙판 위 날을 딛고 있는 것 같은 속도로 읽히는 것이 없으니, 나는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덜커덩거렸던가. 책을 품은 가을의 힘은 혹 그것이 아닐까.


    봄을 기(起)라고만 할 수도 없고, 겨울을 결(結)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봄에 피었다가 그 철에 지는 만물처럼 봄은 그 나름의 뜻과 생각을 피게 하고 여름에 접어들면 여름의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 또 그 사이가 명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의 시기를 놓고 보면 가을은 분명 결(結)에 가까운 느낌이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이 어딘가로 향하고, 그 끝에는 종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의 철로는 없는, 여정의 종착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 마침표 뒤로 여백만 남겨놓는 책처럼 말이다.


    다 읽고 덮은 뒤 독자가 느끼는 일렁이는 그 기분. 책이 주는 묘한 성취감과 아쉬움까지. 그러고 보니 닮았다. 책과 가을. 그간 보내온 시간을 셈해보고, 손에 든 바구니에 수확을 하듯, 혹은 모난 돌 사이에서 모양 좋은 것들을 골라내듯 둘은 우리가 정지해 있는 시공을 늘려준다. 한없이 길어져 그 끝이 겨울의 문턱을 넘어갈 때도 있지만 가을은 느려진 시간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갈 것들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유속 느린 강가에 살포시 멈춰선 무언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가을의 시간도, 책의 시간도 우리를 자꾸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으로 만든다. 떨어진 밤 알알이 주워 부푼 호주머니처럼 또 무엇을 얻게 될까, 기대하는 건 독자된 이들이 갖고 있는 순수한 동심이다. 그리고 노을 같고 주름 같은 가을. 끊어지지 않는 어떤 흐름 같은 것도, 여기서 이렇게 보니 보인다. 가을의 하늘은 그냥 텅 빈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도 빈 곳이 있으면 채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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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2



    책은 바다다. 밀려들어오는 바다다. 지표에 누워 있는 나는 얼굴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억겁의 수면들을 안경처럼, 혹은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세상을 본다. 나는 눈을 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눈 위에 있는 여러 겹의 막으로 세상이 쏟아져 들어온다. 감으면 안 보는 것이고, 충격적인 상이 맺히면 잠을 설치는 것이다. 책은 글자의 군대이지만 나는 이미지로 된 상처를 입는다. 독서라는 건 한동안 잠수하는 것. 빠져나올 수 없는 경험. 물속에서 물 위를 바라보려고 하는 태생적 한계. 이 상태가 오래 되면,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숨 쉴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자. 그래서 바보라는 소리도 듣는다. 다들 숨을 쉬고 살아가기에, 왜 숨을 쉬지 않으려고 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멋지게 대답할 수는 있지만 그 겉멋 속에는 내일의 독서가 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다. 나는 “왜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이를 여태 본 적이 없다. 그건 존재의 문제다. 왜 독서가 존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나도 모른다. 죽으려고 뛰어든, 아니, 죽으려고 누워 있던 밀물 전의 바다에서 나는 썰물이 준, 달이 빚어낸 신비로운 조화에 감사하며 한창을 호흡하다가도 곧 쏟아질 글자의 폭격을 기다린다. 죽으려고 사는 것일까. 말장난 같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나와 당신의 로망이다.


    일상은 편하다. 아는 지도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눈 감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모르는 길을 가면 내비게이션을 보느라, 도로표지판을 보느라,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쫓긴다. 초보 운전자가 복잡한 서울 시내에 들어가면 갖게 되는 공포는 웃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사납게 몰아치는 행렬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막강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포에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이 편하다. 나름 박아놓은 이 땅의 말뚝 안에서 우리는 울타리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며, 아는 만큼 산다. 하지만 책은 우릴 울타리 밖으로 내친다. 글자에 저항할 수 있는 철갑을 입은 이가 몇이나 되는가. 책의 세상은 우리를 두드린다.


    마음을 때리는 것. 어디 있는지 모를 그 나의 ‘마음’이 타격을 받을 때, 그 타격을 육체적 고통으로 느끼는 이들도 있다. 나는 자신에 대한 회상과 작품 활동을 연결시켜 오래도록 고민하다 병을 얻은 한 화가를 안다. 그 화가가 보내준 이메일, 그 창작의 고통은 꼭 같진 않아도 나 역시 느꼈었다. 왜 그것은 그리도 아픈 것일까. 명치를 주먹으로 세게 한 대 맞은 것과 그것은 또 왜 다른 아픔을 주는 것일까. 책은 세상을 긁는다. 부스럼은 더럽다. 어떤 책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입 속으로 날벌레들이 수도 없이 들어온 것 같은 역겨운 감정만 남기기도 한다. 딛고 선 땅을 뒤흔들어버리는 책도 있다. 살을 베는 것도 있다. 엄동보다도 시려 읽는 내내 몸을 떠는 책도 있다. 익숙한 이 세상을 엘리스의 나라로 만들어 붉은 여왕과 쉼 없는 꼬리잡기를 해야 하는 책도 있다. 다 상처를 남긴다. 이렇게 말하면 콧방귀 끼는 이가 있을까. 독서는 자학에 가깝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싫다. 성장은 남이 봐야 아는 것이고, 자기 자신은 한참 뒤에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옛 모습이 화석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단히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실로 성장하기에, 저 말이 사실이기에 그래서 싫다. 아프지 않으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현자들이 그렇게 말했고, 가까이는 어른과 선생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고, 얼마나 아프며, 그 상처는 어떤 크기와 모양으로 얼마나 남게 되는지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고 떠벌리는 이들은 가라. 고통을 아는 자는 곧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정신 속 가사(假死) 상태에 있는 이들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만 본다. 손을 내밀어봤자, 내밀 손도 없고 붙잡을 손도 없다.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신이, 절대자가, 최상자(最上者)가 있다면 이 세상의 본성은 가혹한 놀이판이라고 할,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피해가는 이들은 그 지옥을 모른다.


    “그대는 나를 마치 허약한 어린아이나 전쟁에 관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처럼 시험하지 마라. 나도 전투와 전사들을 죽이는 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나도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마른 소가죽 방패를 돌릴 줄 알며, 그것이 내가 보기에 방패를 든 전사로서 싸우는 법이다.” (호메로스, 천병희 譯, <일리아스>, 98쪽)


    헥토르가 아이아스에게 외치는 구절이다. 강건한 장수 한 명이 상대 장수에게 이렇게 외치면 향후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용기백배의 호언은 우리에게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모양을 그리며 흩어져 창백한 배경을 내보여야 하는 가을 하늘이 꼭 우리의 모습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문자 앞에서 혹은 조용히 읽거나 혹은 침묵하며. 어쩌면 그 모습은 공포와 경외와 숙고 속에 어떠한 계시를 기다리는 수도승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장황한 글은 모니터 옆의 티끌을 훔쳐내다 써내려간, 한낱 사물과의 동질감을 느꼈더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티끌이다. 티끌은 쓸어가는 자에게 시끄럽게 지껄이는 법이 없다. 펼쳐든 책 앞에서 나와 당신은 어디로 쓸려 가는가. 어디가 그렇게 아픈가. 우린 서로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독자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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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2 0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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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2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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