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라고 말했다. 원래 잘 먹지 않는 음식이긴 했지만 한 편의 시는 그것을 끝내 머릿속에서 살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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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 박지웅-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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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술에 취해 "우리집으로 가주세요" 라고 말하곤 한숨 소리에 깃든 택시기사의 싸늘한 눈초리를 백미러를 통해 알아버린 기억들이 없는지. 저 두 줄의 고단함이 "내 고향으로 날 데려주" 라는 어느 노예의 노래 구절만큼이나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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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9-03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정말 그렇게 말하신 적 있었어요???^^;;;

잉크냄새 2022-09-03 10:36   좋아요 0 | URL
버스 타고도 그래 봤어요.
 

추억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이들의 죽음은 세월이 무상함을 문득 다시금 느끼게 한다. 라디오를 통해 팝송이란 걸 처음 듣고 빠져든 이후, 그 숱한 노래들 중에서도 "Let me be there" 라는 하나의 노래로 기억되던 그녀의 부고를 오늘 접했다. 올리비아 뉴튼존이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 부고를 접하고 학교 앞 문방구 먼지 낀 창 너머 낡은 테이블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그 시절 브로마이드 속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가슴 설레이던 사진속 그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대 잘 가라.....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in your life
Surely you know
I always want to be there
Holding you hand
And standing by to catch you when you fall
Seeing you through
In everything you do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Watching you grow
And going through the changes in your life
That's how I know
I always want to be there
Whenever you feel you need a friend to lean on, here I am
Whenever you call, you know I'll be there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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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상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가 있다. 동시에 의미가 간명한 단어이기도 하고 또 역시 세상의 그 어떤 말로도 번역하기가 난감한 단어라고 하는데 바로 Mamihlapinatapai(마밀라피나타파이)다. 칠레 최남단 섬에 사는 소수민족인 야간Yaghan족이 쓰는 단어로 뜻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먼저 마음을 앞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이다. 아주 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타국의 언어로 번역하기 가장 난감한 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단어 하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나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꼭 맞는 단추를 채워준다. 사랑의 정의는 한 단어로는 어림도 없을뿐더러 저 단어만큼이나 길고도 길다. 적어도 사랑은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랑은 모든 답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일한 '무엇'이 있으니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사랑.

-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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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할 필요 없겠다. 우리에게 '거시기'라는 기네스북에 등재되고도 남을 가장 의미 함축적인 단어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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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7-25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인스타에서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빵 터졌더랬죠.
이 글을 우리는 한문장으로 말 할 수 있다구요.
˝저기 조장하실 분?˝
그런데 이 미묘한 뜻을 저 말이 참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감탄했습니다. 우리 삶에는 저런 순간들이 오잖아요. 힘들고 귀찮은 이 일을 함에 있어 누군가가 총대를 메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요.

잉크냄새님 말씀처럼 ‘거시기‘는 정말...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야 마땅합니다. 모든 뜻을 다 가지고 있어요!!!!!

잉크냄새 2022-07-25 22:10   좋아요 1 | URL
오, ˝저기 조장하실 분?˝은 정말 대단한 센스네요.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표현되어 실각 사유가 되지만요.ㅎㅎ

얄라알라 2022-08-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그러네요. 정말...만능 양념같은 그 말 ‘거시기‘
기네스북에 등재만 안 되었을 뿐 놀라운 단어네요. 말씀 듣고 보니

잉크냄새 2022-08-11 22: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중국에서 근무할때 거시기 만으로 중국 직원들과 회의하던 부장님도 생각나네요. 거시기의 위대함을 새삼 느낍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8-2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밀라피나타파이.. 이거슨 마법의 주문 같은데요? :)

잉크냄새 2022-08-20 19:39   좋아요 0 | URL
‘아브라카다브라‘ 나 ‘옴마니반메훔‘ 말씀하시는거죠? :)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집이나 마구간, 양 우리, 헛간의 지붕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다. 정면이 넓은 이 곳의 집은 멋진 청동빛의 떡갈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황금빛을 띠는 녹색의 이끼, 붉거나 푸르거나 노란빛을 띠는 짙은 라일락 그레이의 땅, 자그마한 밀밭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녹색, 느슨하게 매달린 채 황금색 비에 소용돌이치듯 휘날리는 가을잎, 그 속에 우뚝 서서 검은색으로 젖어 드는 포플러나무, 자작나무, 라임오렌지나무, 사과나무.....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듯 빛이 스며드는 게 보인다. 그 색채는 얼마나 인성적이던지.

 고요하게 밝게 빛나는 하늘은 라일락 색조를 간신히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부유스름하다. 그것은 빨강, 파랑, 노랑이 떨리면서 반사되는 흰색이면서도, 아래쪽에 있는 옅은 안개와 흐릿하게 뒤섞여 섬세한 회색빛을 띠고 있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p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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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썼듯이 그는 늘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하나는 물질적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이다. 살아 생전 단 한 점의 작품만이 400프랑에 팔릴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유화에 필요한 물감 수급에 항상 목말라했고 그 금전적인 부분을 동생 테오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 미안함이 많은 편지에 스며 있다. 색에 대한 그의 눈이 타고난 것인지 탐구에 의한 후천적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림이나 글을 보면 그는 우리가 인지하는 색의 스펙트럼뿐 아니라 그 바깥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관찰력과 글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력 이라니! 그가 표현한 색의 범주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범주가 아니라 색의 결합과 대조를 통하여 사랑과 희망과 떨림과 열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장마 기간 간간히 얼굴을 내미는 햇살이 불완전한 대기를 형성하는 육칠월은 그 동안 우리가 관념화한 노을의 빛깔마저도 낯설게 만들곤 한다. 작년 이맘때쯤 마주친 너무 생소한 빛깔의 노을 앞에서 난 문득 고흐의 색을 떠올렸으나 일반적인 색의 스펙트럼 안에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난 그저 감탄만 연발할 뿐이었다.  "와, 죽인다"



- 21년 7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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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7-06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그렇군요! 낯설고 신비로운 색입니다. 장마가 싫어서 이런 것들은 관심도 두질 않았는데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어제 달빛이 참 오묘하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

잉크냄새 2022-07-07 12:35   좋아요 1 | URL
들꽃뿐 아니라 뭐든 자세히 보아야 보이나 봅니다. 가끔 만나는 저런 낯섬이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