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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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8-1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전 우리 집에 와 계셨다. 어머니는 바싹 마른 할머니가 안쓰러워 링겔을 꼽아드리곤 했다. 너무 바싹 마른 팔의 혈관을 찾지 못하여 몇번이나 아픔을 드리는 것이 죄송스러운 어머니와 그런 딸이 안쓰러워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2005-08-12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magic 2005-08-1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겨울 2005-08-14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 할머니의 손톱은 핏기가 하나도 없는 불투명한 흰색에 바스러질 듯 매말라 있어, 마늘을 깐다거나 하는 섬세한 노동이 어렵다고 매번 불평을 하십니다. 생명의 기운이 제일 먼저 손톱을 통해 빠져나가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아릿하면서도 무섭더군요. 사신의 그림자가 저만치서 지켜보는 기분이란, 섬찟합니다.

비로그인 2005-08-1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 몽상님의 스케치가 인상적이네요. 삶과 죽음은 하나, 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는 요즘입니다. 무력함을 느끼지만 숙명에 관해 겸허히 받아들이고 좀 더 좋은 나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잉크냄새 2005-08-1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 아....
우울과몽상님/ 생명의 기운이 제일 먼저 손톱을 통하여 빠져나간다는 말씀, 백번 공감이 가네요.
복돌님 / 삶과 죽음, 인간의 숙명에 대한 겸허한 자세는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직접 찍으신 사진이라니...감탄했소이다.

박가분아저씨 2005-12-1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차분하게 책상앞에 앉아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조금 답답하죠.
외할머니 얘기를 읽으니까 갑자기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는군요. 찡합니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상처난 가슴을 안고 돌아서던 사람들 어깨 위로 잔설처럼 쌓이던 외로움을 보면서 상처는 곧 아물어 향기가 나리라 위로했다. 가슴이 울어 두 눈이 충혈된 사람들 뺨 위에 깊게 묻어난 투명한 눈물 자국을 보면서 눈물은 곧 마를 것이라 위로했다. 설령 애틋한 마음 표현하지 않더라도 뜨거운 국수김이 먼지낀 유리창을 뒤덮는 국수집에서 가슴속 울컥울컥 국수를 먹지 못했던가. 

산다는 것이 때론 홀로 눈물자국 간직하는 것이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눈물자국 간직한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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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8-1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수 같이 먹을 뒷모습이 쓸쓸한 사람도 없어서 혼자서 라면 끓여먹고 왔습니다. 제가 첫인사 드리는 건가요? 즐겨찾기는 진즉에 해놓았었는데, 게으른 손가락을 갖고 태어난 죄입니다. 오며 가며 자주 뵈어서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편하게 그냥, 글 남기고 갑니다.

마늘빵 2005-08-1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어제 어느분 서재에 김치말이 국수가 뜨더니.. 또 잉크냄새님도 국수를 드시고 싶다구. 아.. 먹고잡다. 쓰읍..

ceylontea 2005-08-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따뜻한 국물에 국수 말고.. 오이를 채썰어 소금, 고추가루, 깨소금넣고 살짝 무친 것과 먹으면 너무 맛있고 좋더라구요... 음.. 또 먹고 싶당..
저 예쁜 글에 먹는 이야기만 잔뜩.. 히히.

icaru 2005-08-1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 속을 휜히 보여도 암시럽지 않을 그 사람들...
과..국수를 저도 먹고잡슴다....그립숨다...~~

비로그인 2005-08-1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래 부연설명한 구절들. 캬.. 시보다 더 시스러운(!) 주옥같은 글입니다. 아무래도 아니 되겄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덜! 두루마리 화장지 둘러메고 단체로 통곡하면서 멸치냄새 찐한 '울컥울컥 국수' 한 그럭씩 때립시다!! 우웁..팽~T^T

잉크냄새 2005-08-1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 안녕하세요 돌바람님. 처음이 아니십니다. 예전에 stonywind시절에 남기신 댓글 보았답니다. 제가 못찾아뵈었죠. 저도 그냥 편하게 님 서재로 날아갑니다.
아프락사스님 / 오, 드럼 공연후의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인가요...눈앞에 선합니다.
실폰티님 / 잘 지내시죠...지현이랑 같이 드셨나봐요. 무슨 종류의 국수죠. 이러다 국수 종류 다 나오겠네요.^^
이카루님 / 맞아요. 내속을 훤히 보여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들...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첫구절이 생각나는 사람들이죠.
복돌이님 / 울먹죽죽 국수가 아니고 울컥울컥 국수 입니까? 한 그럭만 때리쇼. 코는 돌려서 풀고...팽~

ceylontea 2005-08-1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그냥.. 국수죠.. 다시마, 멸치 넣고 국물 만들고... 소면 삶아서.. 계란 하나 풀고, 파 쓸어넣고.. ^^

검둥개 2005-08-1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시 참 좋네요. 추천하고 퍼가요... :)

水巖 2005-08-1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은은하게 아려오는 그런 시이군요. 울컥 ~
저도 추천하고 퍼 가겠습니다.

미네르바 2005-08-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라 멋지게 댓글을 달고 싶은데, 왜 국수 먹고 싶다라는 생각부터 들까요?
저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눈물자국 간직한 사람"이거든요. 그럼, 저와 따뜻한 국수를 먹을래요^^

(큰소리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눈물자국 간직한 사람~ 요기요기 붙어라 (엄지 손가락 내밀었음) 그래서~ 잉크냄새님과 함께 국수 먹자구요(너무 큰소리로 말해서 목이 쉬었음^^)

잉크냄새 2005-08-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 내리네요. 이런 날 국수가 더 땡기죠. 후루룩~~
검정개님 / 황지우님의 <거룩한 식사>라고요. 님 서재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딱 님 취향이다 싶네요.
수암님 / 휴가다녀오신 사진 잘 보았습니다. 소나기도 아니고...가랑비처럼 은연중에 슬며시 스며드는 그런 애잔함이 느껴지더군요.
미네르바님 / 알라딘 주인장들이 거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눈물자국 간직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네요. 근데 엄지에는 몇분이나 붙었나요?^^

연우주 2005-08-1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가장 마지막 문장, 참 좋네요...

2005-08-1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8-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님 / 연보라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우주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전부다..ㅎ 저도 님의 서재 시 밑에 달린 아름다운 댓글을 읽었답니다.
속삭이신님 / 지금 확인하고 처리했습니다. 표로롱~~~

플레져 2005-08-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늘... 연이은 국수 삶아 먹기 실천 중입니다 ^^*

잉크냄새 2005-08-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 님의 서재에서 두 그릇의 국수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또 여우님 서재에서 한 그릇....아무래도 암암리에 국수 바톤 잇기가 펼쳐지는건 아닌지...

파란여우 2005-08-1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국수보단 잉크님 서재 국수를 더 많이 준비해야겠는걸요.
손님들의 내방이 이리 많으니^^

잉크냄새 2005-08-1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제 서재의 손님수가 어찌 님의 서재에 비교하겠습니까. 그걸 조족지혈이라고 한다죠...ㅎㅎ 국수는 여우님이 준비하셔야 할듯....
 

이모콘티라고 하나요. 하여간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한 회사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친구가 말이죠 회사 여직원들의 신상명세를 인사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놈입니다. 하여간 이야기할때보면 전부다 친한 친구요, 후배인데 실상 뚜껑을 열어보면 쥐뿔도 관련이 없더군요.

몇년전 늑대소굴인 친구의 팀에 어여쁜 여사원이 입사했죠. 영어, 일어에 능통, 인물까지 뛰어나지. 하여간 무식한 공돌이 투성이인 이곳에 한줄기 섬광처럼 빛나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했다나요. 그러던 어느날,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날 찾아온 녀석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좋아라 하더군요. 이유를 물어본즉, 그 여사원한테 관심이 가는데 그 여사원도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녀석의 실패사례를 죽 지켜본 경험으로 헛물켜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고 했지만 귀를 틀어막고 혼자 실실거리며 좋아하더군요.

그러기를 근 한달, 어느날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 x 팔려서 회사 못다니겠다고 하더군요. 전 뭐 심각한 일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니 전날 술을 먹고 용기를 내어 그 여사원한테 문자를 보냈다더군요.

나: 뭐라고 보냈는데?
흐뭇쯧쯧 :  김또깡, 시라소니, 하야시, 나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 이고 싶다....흐뭇 쯧쯧 --> 직접 보여주더군요.
나: 뭐냐?
흐뭇쯧쯧: 호프집에서 술먹다 용기내서 보냈는데, 그때 야인시대를 하고 있더라. 그거 보며 보냈는데, 아침에 확인하니 이렇더라.
나: 근데 흐뭇 쯧쯧 은 뭐야?
흐뭇쯧쯧:  ^^ 를 보낼라고 하는데 키가 없어서....
나: 에라이 인간아,  쯧쯧은?
흐뭇쯧쯧: 그건 혓바닥 차는 소리...
나: 가라.

그 이후로 근 한달간을 그 여사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근신에 또 근신하여 지금은 그나마 잘 다니고 있다나요. 이후 녀석의 회사내 별명은 제가 흐뭇쯧쯧 과장이라고 지어버렸답니다. 이런 메세지 받으면 어떨까요? 제가 시간이 좀 지나서 여사원한테 물어보니 "흐뭇쯧쯧 과장님, 재미있어요."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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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웃다가 발목 삔거 건드릴뻔했잖아요!!!
음..나도 표절해야겠어요^^

검둥개 2005-07-2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뭇 쯧쯧이 왜 ^^의 대용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으, 너무 궁금해요. :)

잉크냄새 2005-07-2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좀 또라이 기질이 다분하죠? 그래도 친구인지라...^^
검정개님 / 흐뭇한 표정이 ^^ <-- 요것 아닌가요? 쯧쯧은 그냥 혓바닥 차는 소리인데, 왜 그 뒤에 붙였는지는 아직도 불가사의입니다.

비로그인 2005-07-2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그랬었군요.
그렇담 요건 어떻습니까? 복돌이의 최근 야심작 --> T^T 울먹 죽죽(특허 내도 되겄습니까?)

날개 2005-07-29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흡~ ^^ 가 흐뭇이라고 하기엔 좀... 차라리 하하, 호호 그런게 더 낫지 않나요?ㅋㅋ
근데, 복돌님의 죽죽은 뭐랍니까? 울먹은 알겠는데...

잉크냄새 2005-07-2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울먹죽죽은 과히 압권입니다. 근데 이카루님 서재에서 흐뭇쯧쯧이 오용된 현장을 포착했습니다. 그 진지한 글 뒤에...차마 거기서는 뭐라 못하고 여기서 지저귑니다.
날개님 / 이벤트 잘 치루신것 축하드립니다. 죽죽은 아마도 복돌님 눈물 콧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아닐런지요?

Laika 2005-07-3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이야기가 흐뭇쯧쯧하네요..^^

icaru 2005-07-3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뭇 은 알겠는데... 쯧쯧 은... 이거이거 혀차는 소리 아녔던가유~

비로그인 2005-08-0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흐..다들 대덕 연구단지나 실리콘 밸리 연구원들 같은 열공(!) 모드로 들어가는군요. 아무래도 친구 과장님을 초빙해 '어린 백성을 위하야 흐뭇 쯧쯧을 맹그셨'으니 흐뭇 쯧쯧의 과학적인 제작 형성 원리를 따로 설명해주심이 옳은 줄 아뢰오!

잉크냄새 2005-08-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 오! 적절한 표현입네다.
이카루님 / 의태어와 의성어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수 있죠?^^
복돌이님 / 아마도 제작 형성 원리는 술과 눈에 쓰인 꽁깍지와 협객 드라마와 임을 향한 애틋한 마음 한조각(?) 이라고 할까요...^^

2005-08-08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08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08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8-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들 / 이래 저래 고마운 일들만....경사났네요.^^
 

스물 다섯을 특별한 이유없이 떠올릴 일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시인 랭보가 스물 셋이 어쩌구 저쩌구 한것으로 그 시절을 뒤돌아보았고, 김광석이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서른을 뒤돌아본 적은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스물 다섯도 김경미의 비망록 이라는 시 속에서 발견하고는 잠시 뒤돌아본 기억이 난다. 오늘 이 글은 랭보도, 광석이 형님도, 김경미도 아닌 파란여우님의 스물 다섯이란 페이퍼를 보고 문득 생각나서 끄적인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내 나이 스물 다섯에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한 복학생이었다. 아직도 벗지 못한 촌티에 복학생 특유의 칙칙함까지 골고루 갖춘, 말 그대로 전형적인 복학생의 모습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커다란 가방에는 묵직한 전공서적과 노트들, 다시 읽기 시작한 데미안, 이문열의 삼국지, 거금을 주고 마련한 카시오 공학용 계산기, 첫사랑이 선물해준 여성스런(?) 낡은 헝겁 필통이 있었다. 독쟁이 고개의 곱창골목은 열악한 주머니 사정에 딱 어울렸고 시화전이 주로 열리던 호숫가 벤치는 낮잠의 장소였다. 잠결에 실눈을 뜨고 어느 시 동아리 회원이 쓴 협궤 열차 시를 읽고는 한동안 협궤 열차의 환상에 사로잡혀 고등학교 시절의 습작노트에 달랑 2편의 얼토당토한 시를 쓰고는 접어버렸다.

내 나이 스물 다섯에 새벽 인력 시장을 꽤나 돌아다녔다. 나와 동갑, 군 제대후 다시 대입시를 시작한 친구에게 꿈을 너무 오래 꾸지 말기를 술 취하여 열변 토하며 떠별리고는 미안한 마음 주체하지 못하던 시절, 주말이나 연휴기간은 그 녀석을 따라 노량진역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쪽방에서 칼잠을 자며 새벽마다 인력 시장을 들락거리곤 했다. 아침 커피가 끓고 노가다 이력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사람들 틈바구니 어색한 소파에 앉아 날이 밝아오는 모양을 지켜보곤 했다. 워커에 군복 바지, 조금이라도 비싼 일터로 가기 위하여 학생 신분을 속이고,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괜히 담배도 줄창 물고 있곤 했다. 일당 오만원을 거머쥐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바라본 63빌딩의 낙조,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시절이다.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낀 유일한 기억이다.

내 나이 스물 다섯은 첫사랑과 헤어진 이후 두번째로 어느 여인을 만났다. 스물 다섯도 거의 지나갈 무렵, 인턴사원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우연찮게 만나서, 짧은 3주간의 기간동안 그런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처음 데이트를 한 날, 그녀가 잃어버린 가죽 장갑 한쪽을 찾기 위해 공단내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으며 새벽까지 돌아다니다 감기에 걸렸다. 장갑의 상실과 감기몸살의 열병, 막 뜨기 시작한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 이후 스물 여섯의 가을까지 이어진 만남의 쓰라린 추억의 징후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스물 다섯에는 그런 이별과 열병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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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조금만 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를 묻고 싶지만 왠지 빛 바랜 흑백 사진같은 이 아릿한 풍경을 덮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아껴뒀다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물어봐야지) 근데 스물 셋에서 스물 다섯까지, 제게도 정지된 어떤 흔적들은 있는 거 같은데 아직은 그것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진지버젼)아, 그나저나 때깔나는 식사는 하셨수?(까불버젼)

2005-07-2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2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특별히 슬픈 사연을 읊은 것두 아닌디...
어쩌자구... 슬프구 처연하게 느껴지는지요~

참...글게요~ 부실한 아침 점심 식단 개선은 좀 됐는지유~

플레져 2005-07-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나이 스물 다섯에는 인생을 다시 시작해서, 만약 그걸 고백하자고 들면 그 환희를 표현할 수 없어 쓰다 말 겁니다. 다른 님들의 스물 다섯을 바라보며 자꾸 나의 스물 다섯이 떠올라도 무던히 참아내는 것,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언젠가 거리에서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을 주은 적 있는데... 혹시 제가 주웠으려나요? 캥거루표 검은색 가죽장갑이었는데...ㅎㅎㅎ

갈대 2005-07-2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스물 다섯, 복학해서 3학년, 같네요^^ 그렇다면 내년에는 로맨스가..

잉크냄새 2005-07-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 스물 다섯은 장미빛이었다오. 님이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정지된 흔적들은 뭘까요. 전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곧잘 돌아다 봅니다. 지금은 잘 익은 상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카루님 / 칙칙한 복학생, 너저분한 노가다꾼, 이별이 예고된 만남...뭐 이런 글들이니 좀 청승스러울 겁니다. 그래도 어쩐데요. 저것이 제 스물 다섯의 빛바랜 흔적들인걸요.ㅎㅎ
플레져님 / 님이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벅차 오르는 환희는 무엇일까요. 어, 그 장갑 제가 주웠더라면 이루어졌을텐데...지금이라도 주쇼...
갈대님 / 스물 다섯, 복학생, 거기다 로맨스... 부디 복학생의 칙칙함만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요즘 복학생 취급 안하는것 제가 다닐때보다 심한것 같더이다. 복학 축하드려요.

2005-07-27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7-2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칙칙한 복학생, 너저분한 노가다꾼, 이라고 표현하시니 대뜸 떠오르는 군상들이 있는데요, 에잇, 이렇게 얘기하시면 너무 울적해지잖아요. ^^ 스물다섯에 뭐 기분 째질 일이 많던가요? 저도 좀 암울했는데... ^^

잉크냄새 2005-07-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별 말씀을요. 에브리바디, 모두 기쁨입니다.
이안님 / 대뜸 떠오르는 군상...예전에 말씀하신 지리산 멤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물 다섯, 글이 칙칙해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다보니 감상적이 되어서 그렇지...저에게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시절이었답니다.

파란여우 2005-07-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의 기쁨에 제 이름이 나와서 기쁩니다.^^

잉크냄새 2005-07-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저도 기쁩니다. 님으로 인해 스물 다섯을 오랫만에 돌아보았답니다.

미네르바 2005-07-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우님 페이퍼 읽고, 님 페이퍼를 읽고 제 나이 스물 다섯을 떠올려 봤는데...(그 해는 너무나 선명하게 획을 그었던 아픈 일이 있었네요)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 때는 어둡기만 하네요. 그래도 그리운 시절이더라구요. 칙칙한 복학생... 맞아요. 왜 복학생들은 하나같이 칙칙했는지...^^

잉크냄새 2005-08-0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여성이 남성보다 과거를 돌아보기에 벅찬 기억이 많은 모양입니다. 전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과거는 한낱 추억일 뿐이다 라는 명제하에 곧잘 돌아보고 웃곤 합니다. 복학생 칙칙한것은 숙명입니다.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人性)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 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老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秋水)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사했던 귀휴 1주일의 일들도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 장의 명함판 사진으로 정리되리라 믿습니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친정부모님과 동생들께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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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읽으시는군요..흐흐^^

비로그인 2005-07-25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옥중서신. 다시 읽고 싶은 책, 1순위에 꼽히는 책입니다. 아, 그나저나 찌찌뽕! 아무래도 날씨 탓일까요? 며칠 전에 땀이 진득하게 고인 제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무심코 '존재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라는 구절을 떠올렸걸랑요. 미움받지 않으려 자주 씻고 다니려 노력은 하는디, 어째..좀..(거참, 요즘 날씨하곤ㅡㅡa)

진주 2005-07-2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와닿았어요.-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징역살이....

잉크냄새 2005-07-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드디어가 아니랍니다. 벌써 한달가량 보고 있답니다. 보고 또 보고 의미를 되새기면서...
복돌이님/ 제가 읽자마자 다시 읽고자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번 여름휴가에 다시 한번 읽을 요량입니다. 존재로 인하여 기쁘고 존재로 인하여 슬픈 인간의 모습을 참 잘 나타내는 글인것 같네요.
진주님 / 저도 여름 징역살이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외에도 유랑, 문신, 노랑머리 창녀에 관한 글도 기억에 남네요. 이 글이 책 표지에 올라있는 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