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땅(진창)에 무수히 넘어졌지만, 그 땅(진창)을 짚고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려 하기는커녕, 넘어졌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넘어졌다는 사실은 인정했을 때는, 나를 넘어지게 한 원인을 밖에서 찾고, 그 책임을 외부로 돌리기에 바빴다. 내가 진창에서 일어서는 동안,적지 않은 주변 사람들이 내 몸에 묻은 진창 때문에 지저분해졌다. 진창에 넘어져 있는 동안, 나는 없었다. 나는 넘어지기 이전, 또는 다시 일어선 이후에만 있었다.

이문재 <이문재 산문집>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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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7-1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라고 했던가요?

도종환의 시가 생각나네요
아! 저도 모르게 자꾸 부인하고 싶었는지. 페이퍼 보는동안 뜨끔했어요;;


비로그인 2007-07-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드팩도 할 겸 진창에 계속 넘어져 있어야겠다~

얄랄라~~~(파란여우님 전용 의성어 도용)

3=3=3=3=3=3=3

은비뫼 2007-07-16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창, 진창, 진창.... 숙연해집니다.

잉크냄새 2007-07-1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제가 걸어온, 걸어갈 길... 길을 지우며 길을 걷고 싶어도 어쩔수 없는건가 봅니다. 그것이 길의 속성인가 봅니다.
체셔냥 / 보령으로 고고 하셔야겠네요. 보령 머드 축제가 한창이라는데...
은비뫼님 / 진창에 넘어지기전, 넘어져 나뒹글때, 그리고 잔뜩 묻어 일어날때조차 오롯이 자신이어야 하나 봅니다.
 

그녀와 헤어지고 - 고흥준

 

어느 골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은새잎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때가 유월이었는지, 칠월이었는지, 하루종일 비가 왔는지, 비가 오다 잠시 그쳤던 저녁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라디오 소리. 초승달이 낡은 지붕 위로 살금살금 걷던 소리.


때로는 어느 골목이었는지 모두 기억할 수 있네. 당신이 잠시 걸음을 멈춰 처음으로 나를 돌아본 길이었는데 그날은 고양이들이 낮은 담장에 나란히 앉아 낯선 이를 구경하던 밤, 아직 밤이기엔 너무 일러 낮잠을 실컷 잔 늙은 호박잎들이 옹종옹종 수군거리던 저녁이었네. 그때 사랑은 참 다정도 하여 반짝거리는 심장을 내게 주었지.


그 밤을 지나는 동안 젊었던 몸뚱이는 참으로 쉬이 늙어 흐느끼던 울음으로도 추억은 남질 않았네. 고양이들의 밤도, 호박잎들의 밤도, 은새잎 가벼이 지던 밤도, 당신이 안녕하며 뛰어갔던 골목에는 무엇 하나 남질 않았네. 그 길에 이리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옛 소리를 듣던 귀는 자꾸 닫혀가고,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담벼락에 쓰다가 주저앉았던 그 골목에, 스물 몇이었던 세월만 고스란히 남았네.


 


*

 

제 서재보다는 잉크냄새님의 서재에 더 어울리는 시라서...

선물로 드립니다 :)

사진은 제가 몇년 전에 홍대 한 골목에서 찍은 거예요. 담벼락 그림이 하도 예뻐서 ^^

 

- 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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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7-07-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에서 입체감도 느껴지는게 참 정겹네요 ^^

stella.K 2007-07-1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금도 가면 볼수 있으려나? 잉크님이 부러워요!!

비로그인 2007-07-12 11:03   좋아요 0 | URL
2,3년전에 찍은 건데요, 아마 일부러 다른 그림으로 덧칠하지 않은 한은
있을법도 한데...^^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

잉크냄새 2007-07-1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냥 /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런 글을 만날때마다 예전의 펌 기능이 간절해요. 제 페이퍼의 "우물에서 퍼올린 낭만"이 펌글 전용이었는데...하여간 멋진 시 고맙소.

rainer 2007-07-1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정말 근사한 그림이군요 ^^

프레이야 2007-07-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담벼락 그림이 행복한 기운을 팍팍 내뿜네요.
오,순,떡!! 저 아이 붉은 혓바닥 좀 보세요..^^

잉크냄새 2007-07-1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어님 / 반가워요. 정말 근사한 그림이죠?
혜경님 / 하하, 오,순,떡이 뭔가 했네요. 오뎅,순대,떡뽁이. 저리 해맑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는것 같네요.

누에 2007-07-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별 만들어갑니다.

잉크냄새 2007-08-07 12:54   좋아요 0 | URL
노란별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부탁하신 셔츠빠는 시예요 ㅎㅎ
이시 알고 있으실거 같아서 일부러
댓글안에 제목을 `제목아닌것`처럼 넣어놓았는데.
^^


가끔그럴때 있지 않나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처음부터 혼자라는것에 기대어 타기로 작정한 기차인데.
발차소리가 들려오면


 정말로 이상하게.
홀가분한보다 더한 외로움이 밀려오쟎아요.







그때 내옆에서 잠을 자거나 신문을 보거나.

하는 낯선사람.
단지 우리에게 인연이라고는 도착시간까지
동석하는것 일뿐인데
역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못볼지 모르는  남남일뿐인데

 

그래도.
어색함을 비집고 한번쯔음 묻고 싶은말



 

야심한밤 귀뚜라미아가씨에게
건네고 싶으셨을거라고 내심짐작하는
그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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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야기할 수 있어요 :)

잉크냄새 2007-07-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춤인생님 고마워요. 이병률 시인의 <바람의 사생활>에 실린 시로군요. 저도 이시 괜시리 마음에 남아 다시 읽어봐야지 하고 목차에 표시해놓은 시네요. 읽을 당시에 몇번을 읽어봤던 시죠. 뭐라 말할수 없는 여운이 머물던 시...

춤추는인생. 2007-07-0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네~ 언제든 이야기할수 있어요
지금도 하고 있쟎아요 이렇게^^

잉과장님 `뭐라 말할수 없는 여운이 머물던 시` 네 그 시 맞아요.^^
그때 제 옆좌석에서 시한번 읽고 숨한번 크게 들이쉬며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남자. 혹시 잉과장님?ㅎㅎ

은비뫼 2007-07-09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잉크냄새님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시 마음에 닿네요.

잉크냄새 2007-07-0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아마 책은 떨구고 침 흘리며 창문에 머리 꽁꽁 부딪히는 사람이 저일겁니다.ㅎㅎ

은비뫼님 / 그죠? 그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읽으면서 무심히 넘어간 시를 춤인생님의 글을 통해 하나둘 다시 느끼고 있지요.

icaru 2007-07-2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던 것이었떤 것이군요~!!

잉크냄새 2007-08-07 12:55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눈치챘던 것이었던 것이었떤 것이군요.
 

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

 

진작부터 시 선물 한 번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생각이 나서요.

아마, 잘 아시는 시겠거니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소리내어 읽어주시기를.

헐거운 신발 같은 지인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 체셔고양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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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참 좋으네요. 체셔님이 잉크냄새님께 드리는 선물이지만
저도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나 다름 없어요. 이렇게 낭송해 보고
가니까요..^^

비로그인 2007-07-0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혜경님 감사합니다.
헐거운 신발, 하니 격변하는 지금의 알라딘 생각이 나서...

잉크냄새 2007-07-0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저에게 온 선물을 먼저 뜯어보셨네요.ㅎㅎ 낭송하신 낭창낭창한 목소리의 여운이 남아있는듯

체셔냥 / 헐거운 신발같은 지인,,,감사드립니다. 저도 헐거워 편안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헐렁해 우스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ㅎㅎ

비로그인 2007-07-04 09:33   좋아요 0 | URL
신다 남은 운동화가 있으면 택배로 부치겠습니다 ㅋ~

잉크냄새 2007-07-04 13:06   좋아요 0 | URL
역시 왕발인가 봅니다.
 

넓은 밭이, 자그마한 숲이 집앞에 있는 탓일까, 유독 집안에 보금자리를 트는 곤충들이 많다. 끈적거리를 피부를 가진 양서류와 파충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을 좋아하는지라 그들이 내 옆에 튼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왠만해서는 건들지 않는다. "넌 어떤 인연이기에 여기 나의 삶 곁으로 다가온 것이냐" 하고 지켜볼 따름이다.

매미

여름이면 어김없이 베란다 한구석에 둥지를 튼다. 한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그의 울음은 소음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깝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생명이 그를 그토록 울다 텅 비어 세상을 떠나게 만드나보다. 텅 비어 바스락거리는 그의 몸을 땅 한켠에 묻어주는, 혹은 어느 나무 등결에 살며시 얹어주는 장례식은 다소 서글프다.

너무나 울어
텅 비어버렸는가
이 매미허물은
-바쇼-

올해의 첫 매미 울음
인생은
쓰라려,쓰라려,쓰라려
-이싸-

여름 매미,
나무를 꼭 껴안으며
마지막 울음을 운다
-이싸-

매미 한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가을에 우는 매미 소리
그 목소리에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소세키-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 드는
매미 소리
-바쇼- 

귀뚜라미

그녀는 세들어 사는 삶이 약간은 쑥스러운것일까. 집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않으려는지 내가 움직이는 시간대에는 고요하다. 책을 읽던지, 잠이 들던지 한동안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면 살며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딜까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그녀를 찾으면 또 고요히 숨어버린다. 그녀와의 숨바꼭질은 늦가을 서리가 내릴때까지 계속된다. 그녀의 장례식은 보통 한참이 지난후이다. 죽음마저도 나에게 알리지 않는다. 고독한가보다.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소세키-

돌아 눕고 싶으니
자리좀 비켜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죽어가는 귀뚜라미
얼마나 삶으로 충만한가
그의 노래는
-바쇼-

거미

내 집에 재건축을 하는 녀석이다. 그의 집에 아침이슬이 송송 맺히는 그림같은 장면을 기대하지만 보통 하루살이들로 대신한다. 내가 다니는 길목만 아니면 강제철거 시키지는 않는다. 어느날 일언반구 말도 없이 떠나는 냉정함이 엿보인다. 집을 가진 자의 당당함이려나.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 청소를 잘 안하니까
-이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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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7-07-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쇼의 하이쿠는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딱인거 같아요.
저도 요즘 읽고 있는데 일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어요.^^

춤추는인생. 2007-07-0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연속에서 살고 계시는군요.
그나저나 왜 귀뚜라미는 그렇게 찾으셨나요?ㅎㅎ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넣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같은밤. 이시의 제목 기억하세요?
이야기좀 할수 있을까요? 그러셨나요^^

잉크냄새 2007-07-0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 하이쿠 = 촌철살인 이군요. 류시화 시인의 "한줄도 너무 길다"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네요. 그 여백만으로 충분하기에 한줄도 너무 긴가 봅니다.

춤인생님 / 야심한 밤, 방안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저뿐 아니라 누구든 방바닥을 기며 그 노래의 주인공을 찾으려 들겁니다. 인사말은,,,글쎄요 직접 만나봐야 할듯...
아, 그리고 위에 소개한 밤에 셔츠 빠는 시 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