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다 그런 거라고 치더라도 쿠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야 했다. 거기서 죽는 게 옳았다. 하지만 쿠퍼는 블랙홀에서 살아남았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내려면 영화를 조금 더 보는 게 좋겠다. 토성 주변에서 발견돼 의식을 되찾은 쿠퍼에게 귀한 손님이 찾아오는데, 바로 딸 머피다. 이 이상한 재회 장면에서, 각자가 머문 공간의 중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빠 쿠퍼는 여전히 젊은 반면 딸 머피는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리고 머피는 이제 죽을 참이다.
처음부터 쿠퍼가 초점인물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당연히 쿠퍼의 관점에서 이 장면을 볼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장면은 어쩐지 머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게 둘러싸인 채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피는 블랙홀에 들어간 쿠퍼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온 일생의 모든 순간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리라. 죽음이란 그렇게 시간의 흐름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 사랑하는 아빠를 보게 된다면 과연 그는 어떤 모습일까? 당연히 우리가 영화에서 본 바로 그 모습, 딸보다 훨씬 젋은,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그 모습이리라.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딸만 생각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빠 쿠퍼라는 캐릭터도 어쩐지 이해된다. 그저 무조건적으로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환상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빠의 모습에 가까우니까. 여기에 이르면 영화는 어린 시절에 헤어진 아빠를 평생 그리워한 딸이 병상에 누워 다른 가족들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로 느껴진다.
<시절일기> p146~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