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거리에서 이 작은 책을 펼치고 나서 겨우 처음 몇 줄을 읽어 보고 다시 덮고는 가슴에 꼭 끌어 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 방에 까지 달려왔던 그 날 저녁으로. 나는 아무런 마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p20~21-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 못하게 불어넣은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 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p88-




독서는 그 자체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지 기억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일상과 오버랩되는 것. 그리고 고전의 내용들이 신체와 융합하여 나의 언어가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지성이고 수행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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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끔은 '기억도 못하는데 왜 책을 읽을까?' 라고 스스로 자문해보기도 하는데, 자꾸 앞을 다시 들추어보는 건망증을 변호하기 위하여 작년 가을부터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작가들의 글을 메모해보았다. 나도 저들의 고민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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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라고 말했다. 원래 잘 먹지 않는 음식이긴 했지만 한 편의 시는 그것을 끝내 머릿속에서 살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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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 박지웅-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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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술에 취해 "우리집으로 가주세요" 라고 말하곤 한숨 소리에 깃든 택시기사의 싸늘한 눈초리를 백미러를 통해 알아버린 기억들이 없는지. 저 두 줄의 고단함이 "내 고향으로 날 데려주" 라는 어느 노예의 노래 구절만큼이나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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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9-03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정말 그렇게 말하신 적 있었어요???^^;;;

잉크냄새 2022-09-03 10:36   좋아요 0 | URL
버스 타고도 그래 봤어요.
 

추억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이들의 죽음은 세월이 무상함을 문득 다시금 느끼게 한다. 라디오를 통해 팝송이란 걸 처음 듣고 빠져든 이후, 그 숱한 노래들 중에서도 "Let me be there" 라는 하나의 노래로 기억되던 그녀의 부고를 오늘 접했다. 올리비아 뉴튼존이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 부고를 접하고 학교 앞 문방구 먼지 낀 창 너머 낡은 테이블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그 시절 브로마이드 속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가슴 설레이던 사진속 그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대 잘 가라.....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in your life
Surely you know
I always want to be there
Holding you hand
And standing by to catch you when you fall
Seeing you through
In everything you do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Watching you grow
And going through the changes in your life
That's how I know
I always want to be there
Whenever you feel you need a friend to lean on, here I am
Whenever you call, you know I'll be there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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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상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가 있다. 동시에 의미가 간명한 단어이기도 하고 또 역시 세상의 그 어떤 말로도 번역하기가 난감한 단어라고 하는데 바로 Mamihlapinatapai(마밀라피나타파이)다. 칠레 최남단 섬에 사는 소수민족인 야간Yaghan족이 쓰는 단어로 뜻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먼저 마음을 앞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이다. 아주 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타국의 언어로 번역하기 가장 난감한 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단어 하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나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꼭 맞는 단추를 채워준다. 사랑의 정의는 한 단어로는 어림도 없을뿐더러 저 단어만큼이나 길고도 길다. 적어도 사랑은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랑은 모든 답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일한 '무엇'이 있으니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사랑.

-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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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할 필요 없겠다. 우리에게 '거시기'라는 기네스북에 등재되고도 남을 가장 의미 함축적인 단어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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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7-25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인스타에서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빵 터졌더랬죠.
이 글을 우리는 한문장으로 말 할 수 있다구요.
˝저기 조장하실 분?˝
그런데 이 미묘한 뜻을 저 말이 참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감탄했습니다. 우리 삶에는 저런 순간들이 오잖아요. 힘들고 귀찮은 이 일을 함에 있어 누군가가 총대를 메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요.

잉크냄새님 말씀처럼 ‘거시기‘는 정말...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야 마땅합니다. 모든 뜻을 다 가지고 있어요!!!!!

잉크냄새 2022-07-25 22:10   좋아요 1 | URL
오, ˝저기 조장하실 분?˝은 정말 대단한 센스네요.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표현되어 실각 사유가 되지만요.ㅎㅎ

얄라알라 2022-08-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그러네요. 정말...만능 양념같은 그 말 ‘거시기‘
기네스북에 등재만 안 되었을 뿐 놀라운 단어네요. 말씀 듣고 보니

잉크냄새 2022-08-11 22: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중국에서 근무할때 거시기 만으로 중국 직원들과 회의하던 부장님도 생각나네요. 거시기의 위대함을 새삼 느낍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8-2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밀라피나타파이.. 이거슨 마법의 주문 같은데요? :)

잉크냄새 2022-08-20 19:39   좋아요 0 | URL
‘아브라카다브라‘ 나 ‘옴마니반메훔‘ 말씀하시는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