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책衆責은 불벌不罰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벌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처벌해야 하는 법은 법이 아닙니다. 모든 통행 차량이 위반할 수밖에 없는 도로는 잘못된 도로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딱지를 끊을 것이 아니라 도로를 고쳐야 합니다. 다수가 정의라는 사실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p136-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p200-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중략)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드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p232-
미셀 푸코는 감옥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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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만에 다시 꺼내들어 읽었다. 밑줄 그은 내용들은 가물가물 하지만 여전히 끄덕거리게 되는 것은 세상을 보는 큰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유라 여겨진다. 불신의 시기에 책을 다시 펼치게 되는 것은 큰 어르신의 글에서 희망을 더듬어 보기 위함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