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실업 과목은 수산업이었다. 대부분의 인문계가 상,농,공업이었던 것에 반해 수산업이었던 이유는 신생 학교에 실업 교과 선생까지 배치할 수 없어 수산업고에서 대체 선생으로 선임해 수산업 과목을 배당하기 위해서였다. 임시 선생은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여 말도 편하게 하대했다. 그가 처음 교실에 나타났을 때 당시 유행하던 주윤발식 바바리코트를 펄럭이며 안주머니에서 팔각 통성냥을 꺼내 들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가 다소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능글맞기까지한 개인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던 이유가 더 컸다. 그는 전국 인문계중 수산업을 배우는 학교는 2개 학교 뿐이고 시험 출제자 모두 자기 선배이니 대입시험은 족보로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다. 수업은 주로 삼천포로 빠져 바다 이야기로 흘러들어가곤 했고 그의 수업은 지친 우리들에게 꽤나 재미를 보장했다. 그래도 물고기와 그물에 대해서는 아직도 꽤 기억난다.


그는 선장이라도 된 듯한 포즈로 우리를 제군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제군들, 삼각측량법에서 이 지역 세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 줄 아는가?" 삼각측량법은 기하학의 삼각형을 이용하여 위치와 거리를 측정하는 기법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그 중 하나는 등대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제외한 한 포인트가 어디일까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주로 지대가 높고 눈에 잘 띄어야 하는 특성을 갖추어야 함은 당연지사. 당시 학생들 답변에 그 곳이 포함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의기양양한 답은 인상적이었다. "그 한 곳은 언덕 위의 성당이다. 그러니까 제군들의 위치는 등대와 성당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마을에서 꽤 높은 언덕 위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눈만 오면 비료 포대를 들고 눈썰매를 타러 가던 곳이다. 다른 건물도 아닌 성당이 우리 위치를 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 꽤나 인상적이고 낭만적인 일이었다.


그 이후로 친구들 사이에 작고 의미심장한 변화가 한 가지 찾아왔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의 땡땡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가끔은 그 목적지가 등대와 성당이 보이는 바닷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는 동해안 철조망이 아직 철거되기 전이었고 경계병이 실탄을 장착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개구멍을 통해 바닷가로 들어가서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등대와 성당을 보며 모래밭에 누워있곤 했다. 탐조등 불빛과 군인들의 욕설을 피해 도망치곤 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아치면 몰래 바닷가로 들어가 말없이 등대와 성당을 쳐다보다 돌아오곤 했다. 조명이 거의 없던 시절 소울음 소리와 불빛으로 어린 시절을 사로잡던 등대와 약간은 어색하지만 왠지 포근하던 성당의 십자가 불빛이 우리의 위치를 자리매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위치를 가늠해 보곤 한다. 등대는 건축 규제상 지금도 시야가 확보되어 있지만 천주교 성당은 성당과 바다 사이에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밤새 꺼지지 않는 네온빛으로 그 역할을 잃고 말았다. 두 건물 다 100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배 뿐 아니라 누군가의 길라잡이를 해주며 늙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왠지 정겹고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배들도 GPS로 그 위치를 파악한다. GPS도 원리상 삼각측정법이기는 하나 자신을 제외한 두 가지 포인트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위치도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타인 혹은 사물과의 관계로 자리매김하던 우리의 위치도 지금은 네비게이션처럼 단독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살고 있다. 관계로 규정되던 人이 이제는 그 의미를 상실하여 관계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철저한 홀로서기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가 허기처럼 허전할 때면 가끔 마음 속 등대와 성당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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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6-14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닌 성당도 당시 산동네가 있었던 곳의 중심에 지어졌던 탓에 당시만 해도 이정표처럼 동네 어디서든 다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다시 가보니 그 산속까지 다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가버려서 상대적으로 무척 작아보이더라구요. 바닷가에서는 좀 들어간 동네라서 등대는 없었지만 그 청춘시절엔 학교는 싫었고 노래하고 여자애들도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성당이 그야말로 등대였던 것 같습니다. ㅎㅎ 제 위치를 알게 해주는...

잉크냄새 2025-06-15 10:14   좋아요 1 | URL
예전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동네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당은, 특히 해질녘에는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처럼 성스러운 모습을 풍기는 때가 있었죠. 제가 저 성당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당 오르는 언덕 길 잔디밭에 앉아서 바라보면 제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집 파란 대문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파란 대문을 보다가 성당 종소리에 울컥해 성당 미사에도 잠시 참여한 기억이 나는군요. ㅎㅎ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학적 특성상 하늘을 날아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었으며 북쪽의 국경은 스틱스 강을 건너는 것보다도 더 상상하기 힘든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라나시에 머무는 내내 나는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스트레스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다음 목적지가 네팔이었고 그곳을 가자면 인도-네팔 국경인 소나울리를 걸어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별것 아닌 이 일이 계속 맘에 떠돈 것은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낯선 두려움 외에도 그 동안 인도 곳곳(특히, 기차역)에서 겪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에 질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새해를 맞이한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바라나시에서 오후 3시경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고락푸르에 도착하였고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올라탄 버스는 점심경이 되어서야 소나울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나 면세점이요' 하는 콧대 높은 건물들이 서 있는 국경 특유의 어떤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마을 중앙의 꽤 넓은 길을 통해 사람과 소와 릭샤가 번잡하게 오고 가고 있는 그저 평범함 인도의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었다. 


(인도 소나울리 국경 - 저 명확한 표지판을 못 본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경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인파에 휩싸여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으니 허름한 일련의 일층 건물 속에서 그나마 관공서 같은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 정도의 사무 인원이 있는 공간에 뚱뚱한 중년의 남성이 미소를 띄며 맞이했다. 출국 수속을 하러 왔다고 하니 그가 큰 소리로 welcome to nepal 이라고 웃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보니 이미 국경을 넘어 네팔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 X 됐다. 스틱스 강을 건넌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여행내내 가끔씩 나를 불안하게 하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최대한 비굴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니 다시 인도로 넘어가서 도장을 받아오라고 한다.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옆 마을 마실 가듯이 말하는 그에게 증명서라도 하나 써 달라고 하니 그냥 갔다 오라고 한다. 다시 발걸음을 돌러 인도로 향하니 그제서야 개선문 같은 아치형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저걸 놓칠 수 있을까. Indian Border Ends라고 선명히 적힌 저 글귀를 시장 같은 인파 속에서 보지 못하고 넘어선 것이다. 아마 보통 생각하는 국경의 모습이 내 눈을 가린 이유일 것이다. 그 글귀 아래에는 인도와 네팔 병사가 비슷한 색의 군복을 입고 벽에 기대어 웃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넘어다니고 있었다. 군인을 보니 왠지 찔끔 쫄아 다시 무단 출국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니 귀찮다는 듯 그냥 넘어가라고 한다. 다시 인도로 넘어와 눈에 불을 켜고 건물을 찾으니 오, 저기 한쪽 벽에 책상 두 개를 놓고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인도인 두 명이 그제서야 '나 공무원이요' 하는 포즈로 서 있었다. 출국 절차를 간단히 마친 후 출입국 관리소를 찾기 어려워 네팔에 벌써 넘어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기절초풍할 고해성사를 하니 종종 있는 일이라며 허허 웃는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겁나 해맑게. 


다시 국경을 넘어가는 길 위에 섰다. 하얀 분필 가루로 그어진 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어지러이 넘나들고 있는 길 위일 뿐이었다. 양 국가에 한 발씩 걸치고 잠시 서 보니 문득 분단국인 우리에게 국경이란 하나의 엄청난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철조망이 쳐지고 총검을 들고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 한발짝 건넌다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길, 그렇게 형성된 국경에 대한 트라우마가 스스로를 금기라는 틀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길 내 맘 속에도 굳건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옆 마을 마실과 다름없는 이 길 위에서 오직 나만이 다른 풍경 속 다른 색채를 띄고 다른 길을 걷는 듯 긴장하고 어색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형 경계선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문득 존 레넌이 Imagine에서 노래한 곳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agine there's no co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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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5-26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여행은 아직 비교적 먼 미래의 꿈이고 워낙 못 가본 곳이 많아서 유럽만 해도 갈 곳이 많아요. 더운 날씨는 또 선호하지 않기도 해서 바라나시를 가볼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곳에 간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무려 3중으로 가위에 눌렸다 깨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 등 뭔가 오랜 곳에 층층히 쌓인 시공간의 에너지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ㅎ

잉크냄새 2025-05-27 22:07   좋아요 1 | URL
인도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동네입니다. 꼭 다시 갈꺼야와 두번 다시 안가로 나뉘는데 중간은 별로 없습니다. 전 전자에 가깝습니다. 쓰신 댓글에 적절한 글귀가 보이는데 제가 생각하는 인도의 매력은 다양성입니다. 인도 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문화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페크pek0501 2025-06-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중인 나라의 뉴스를 많이 봐서 그런지 외국 나가는 게 좀 무서워졌어요.
인도에 관한 책을 읽은 책이 있는데 신비로운 무엇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잉크냄새 2025-06-04 20:00   좋아요 1 | URL
봉준호 감독이 자막 1인치를 뛰어 넘으라고 그랬듯이 1인치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외국 나가는 것 별거 아니더군요. ㅎㅎ
인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온 세상에 대한 상식과 기준이 다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동네라 여행지로서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감은빛 2025-06-13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무단 출국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 뒤늦게 출국 수속을 마치는 잉크냄새님.
심지어 국경선을 통과해놓고 거기가 국경인지 몰랐던 잉크냄새님.

저 이 이야기 나중에 소설에 써도 되나요?

저 오래 전에 군대에 있을 당시에 철책선에서 근무했었어요.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에 철책선은 3선이 있었어요.
가장 안쪽 철책은 정말 낡은 철책이고, 가장 바깥쪽(그러니까 가장 남쪽) 철책은
녹이 하나도 슬지 않은 튼튼하고 반짝거리는 철책이었죠.

통문을 통해 그 3개의 철책선 안쪽으로 들어가면
긴 시간 사람의 흔적이 없는 자연의 공간이 나오죠.
문제는 그 공간들 곳곳에 지뢰들이 깔려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국경이란 그런 곳인데,
이 글에서처럼 인파를 따라가다 국경을 이미 지나버린 것도 모르다니!
비현실적인 현실이네요.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6-13 18:05   좋아요 0 | URL
와우! 소설의 소재가 된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소설 속에서 제 추억을 떠올려보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그나저나 군생활을 엄청 힘든 곳에서 하셨군요. 충성, 존경합니다. ㅎㅎ 전 개인적으로 DMZ의 저 공간을 개발이 손대지 않은 천연의 모습 그대로 <DMZ 평화 트랙킹>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길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철칙하에 주변 지뢰 주변 지역도 그대로 남겨두고요. 너무 위험한가요? ㅎㅎ
 

한국 최초의 주행가능거리 기능에 나도 지분이 있다!

당연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기능들이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 존재마저 부정당해 버리기도 한다. 차량 운전석이나 센터페이샤에 보이는 주행가능거리도 그 중 하나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기능이 한국 차량에 최초로 적용된 것은 그랜저XG (1998년)부터이다. 그랜저XG나 에쿠스(1999년) 등 주로 기함급 대형세단에 선행 적용된 것이 밀레니엄(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으니 이 간단한 기능이 최초 구현된 것은 불과 25년 전이란 것이다. 전자 기능의 함축적 의미인 TRIP COMPUTER 란 명칭으로 공급되던 ECU를 생산 납품하였는데 개발 초기 여러 어려움은 물론 양산시까기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험생산부터 양산 적용 단계가 나의 주요 업무였으니 한국 최초의 주행가능거리 구현에는 꽤나 지분이 있는 셈이다.


삼각대 들고 일단 뛰어!

차량 부품은 안전에 관한 특성상 제품에 대한 신뢰성 확보가 가장 엄격한 편이다. 최고 안전 부품에 해당하는 AIR BAG이나 ABS는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인 안전 부품은 아니더라도 자동차 실부하 상태에서의 전기전자적 성능을 검사하기 위하여 차량 출시전까기 엄격한 실차 테스트가 진행된다. 주행가능거리에 대한 실차테스트는 어떠했을까. 그냥 물리적이고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었다. 테스트팀은 연구소, 신뢰성, 생산기술팀으로 구성된다. 평가팀은 운전, 기록, 예비로 역할 분담되며 교대로 한다. 뒷자석과 트렁크에는 휘발유가 든 흰색 통이 가득 실린다. 그리고 전국 곳곳을 달리며 기록하는 것이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등등 몇달에 걸쳐 달린다. 리터당 주행가능거리를 측정하기 위하여 휘발유가 떨어져 차량이 쿨럭쿨럭 요동을 치며 정지하기 직전까지 기록을 정리하며 달린다. 차량이 정지하면 안전 삼각대를 들고 전력질주하여 세우고 차량에 측정할 리터수만큼의 휘발유를 주유하고 또 정지할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는 쿨럭쿨럭 요동칠 때 먼저 갓길로 피해야 하는데 가끔 차선에 그냥 정지해버리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주행가능거리는 구현되어졌다. COMPUTER이란 세련된 명칭 뒤에 감춰진 무식한 방법으로.


에쿠스, 너의 본적은 전남 나주여! 

아마 이 시기는 주행가능거리 기능이 점진적으로 전체 차종으로 확대되던 시기일 것이다. 그때 실차 테스트가 진행된 모델은 에쿠스 페이스리프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차테스트엔 자동차 회사에서 시험차를 제공하는데 신차의 경우 차량 디자인 유출을 막기 위하여 검은색 위장막으로 차량을 감싸고 테스트를 진행하게 된다. 에쿠스가 출시될 당시에는 소형차가 대세였고 대형 SUV가 출시되기 전이라 당시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위장막으로 둘러싸인 모습의 이질감은 차량이 아닌 장갑차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당시 실차테스트 기간에 직장 동료의 부친상이 있었다. 장지는 전남 나주의 시골집이었다. 교통비도 아끼고 월차도 아낄겸 전남 나주 방향으로 테스트 진행 방향을 정하였다. 평소 테스트팀이 아니었던 난 삼각대를 들고 뛴다는 조건으로 테스트팀에 합류하였다. 몇십 킬로 단위로 삼각대로 들고 뛰며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조금씩 취기가 오른 우리는 장주인 친구의 위신을 세워주자는데 뜻을 같이 하였고 시험차의 위장막을 벗겨버리고 장례행렬 선두차로 시험차를 사용하기로 결정해버렸다. 사실 시험차 위장막 제거는 차량 디자인 정보 유출로 징계감이었다. 장례식장이 사람이 많은 병원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리는 전남 나주의 어느 장지길에 황금빛 에쿠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저 집 아들 성공했나봐...사장이라고 부르던데...' 동네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과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에쿠스는 당당하게 진흙탕 길을 8기통의 위력을 발휘하며 가뿐히 넘어갔다. 부친상을 치르고 온 동료의 말에 따르면 나주 고향 마을에서 에쿠스는 대통령이나 타는 한국에 몇 대 없는 차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거기다 방탄 기능까지 있다고...그리고 얼마뒤 에쿠스가 정식 출시되었다. 제네바, 파리, 도쿄, 디트로이트, 뮌헨 등 세계 5대 모터쇼에 첫 선을 보였을 것이다. 모터쇼에 참석한 MK회장은 알고 있었을까. 회심의 역작인 에쿠스가 그 위용을 처음 드러낸 곳은 제네바도, 파리도 아닌 전남 나주의 황톳빛 장지길이었음을... 화려한 모터걸이 아닌 상복입은 아낙들에 둘러싸여 한국형 대형 세단의 그 황톳빛 태동을 맞이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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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05-14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역시 글을 잘 쓰세요.

잉크냄새 2025-05-14 18:32   좋아요 0 | URL
포겟터블님, 오랫만이네요.
그냥 오래된 기억들 주절주절 펼치고 있습니다. 여행기도 주절거려 보려는데, 이건 영 신통치 않네요. 자주 뵈요....

감은빛 2025-05-14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 너무 재미있어요.
주행가능거리 기능에 이런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더니!
삼각대 들고 뛰어다니시는 잉크냄새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세계 최초의 자동주차 기능도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기술을 큰 자동차 회사에 팔았는데, 여러 이유로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고.

차량 디자인을 잘 알지 못해 에쿠스가 어떤 차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장갑차로 오해를 받을 만한 차였군요.
동네에 오래 회자될 이야기 거리 하나 남겼군요.

잉크냄새 2025-05-14 18:42   좋아요 1 | URL
장갑차 오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경찰서에 신고된 적이 꽤 있었던 사건입니다. 도로에서 시험차를 목격한 운전자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시커먼 커버를 씌우고 차를 탄다고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차가 출동한 경우도 있어요. 고속도로 순찰대가 오면 거의 검문당했고요. ㅎㅎ 아마 차가 어떻게 생겼냐는 경찰 질문에 대부분 장갑차 같다고 답변한 모양입니다.

지금은 SUV도 많이 나오고 대형차가 많아서 그리 커 보이지 않는데 출시 초기에는 꽤나 육중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페크pek0501 2025-05-18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본인이 일하는 분야에서의 경험담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합니다!!!
에쿠스는 한때 부의 상징이었죠.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잉크냄새 2025-05-18 20:39   좋아요 0 | URL
ECU 라고 하는 현장 아니면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내용은 별로 전문성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ㅎㅎ 경험은 일하는 분야에서나 가능한 것이지만요.

에쿠스 초창기에는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크기에 압도되곤 했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고 안치환은 노래하였다. 굴하지 않고 비껴서지 않으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은 말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근데, 외로움에 우뚝 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에게 더 애착이 갈 때가 있다. 열흘 남짓 열리지 않던 옆방 문소리에 머뭇머뭇 다이얼을 돌렸을 사내의 손떨림이라든지, 그 손떨림을 너무 잘 알면서도 외로움이 들켜버릴까 살며시 이불을 끌어 덥는 사내의 미안함이라든지, 두 사내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냥 외로움에 전염되어 버리는 독자라든지....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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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률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는데 이 시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시가 많이 담겼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잉크냄새 2025-05-05 23:2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률 시인의 시집중 <바람의 사생활>이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5-05-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행이 좋네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다는 느낌은 저도 가끔 느낍니다.

그리고 잉크냄새님의 마지막 말씀도 인상적이예요.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다니.

어느 출장지의 허름한 여관 방에 머물렀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5-08 20:13   좋아요 0 | URL
시에서 여관을 모텔로 바꾸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관만이 지니는 낡고 어둡고 눅눅한 감성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예전에 묵었던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 떠올랐어요. 지저분한 이불을 덥고 누우면 천장에 쓰리쿠션으로 떠오른던 상념들...아마 외로움도 한 쿠션 했을 겁니다.
 

재작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집에서 동쪽 바다를 제외한 세 방향으로 네 가지 루트를 잡아 왕복 30km의 코스를 기분과 바람에 따라 번갈아 가며 주행중이다. 같은 코스를 일 년 이상 다니다보니 주변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익숙해진 만큼 또 세세한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의 계절이 되풀이되던 작년에는 유독 국도변에 핀 꽃들에게 눈이 가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의 생멸이 빈번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빈번함 만큼이나 많은 꽃들이 생멸 주기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눈맞춤을 이어가던 중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다소 미안함을 느꼈고 작년 늦여름부터 눈맞춤하던 이들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망막에 맺힌 상을 되살려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하나하나 기록하다보니 꽤 많은 꽃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왜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는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올해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작년에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초봄에서 한여름까지의 꽃들에게 다시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다.


<작년 한해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국도변에서 만난 꽃들의 이름 -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꽃들도 아직 꽤 많다>


<들국화라 통칭되는 가을 국도변의 국화 종류가 이리도 많더라. 실제 들국화란 명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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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12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쁜 꽃이 아주 다양하군요. 관찰력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지요. 글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관찰력을 갖고 세세히 기록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 저도 배우겠습니다.^^

잉크냄새 2025-04-13 10:33   좋아요 1 | URL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던 꽃들이 이름을 불러주니 제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봄 날의 꽃들도 그 의미를 되찾아 볼까 합니다.

transient-guest 2025-04-15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에는 차를 타고 다니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시절엔 하루에 6-7마일씩 아침에 걷고 달리고 했었는데 정말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감도 좋아지는 걸 느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살던 동네는 10마일 반경 잡고 속속들이 길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잉크냄새 2025-04-15 17:08   좋아요 1 | URL
꽃이 북상하는 속도가 4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꽃의 북상 속도가 아닌 자연과 리듬을 맞춰 걸어가야 하는 사람의 속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속도에서만 자연은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사람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속도를 맞춘 길은 오래도록 그 길을 보여주더군요.

감은빛 2025-04-15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자전거를 언젠가는 꼭 배워야지 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재작년에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해 잠깐씩 연습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뒀고,
작년에도 또 시도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둬 버렸네요.
올해는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꽃들이 참 예쁘네요.
주말에 달리기 할 때 양쪽 천 변에 벚꽃이 멋지게 피어 있었어요.
힘든 몸 상태를 잊으려고 일부러 꽃을 보면서 달렸는데,
그 자리에 그렇게 어여쁘게 피어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잉크냄새 2025-04-15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자전거를 못 타신다는 예전 글에 잠시 의심(?)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ㅎㅎ

걷기도, 달리기도, 자전거도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잠깐만 눈을 돌리고 허리를 숙이면 수줍은 듯 펼쳐진 작은 세상들이 보이게 되더군요. 저도 자전거 페달링이 힘에 부치면 도로변의 꽃들에 눈 맞추며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감은빛 2025-04-23 12:56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의 의심을 받았군요. ㅎㅎ

며칠 전에 저에게 잠깐씩 자전거를 가르쳐줬던 친구들이
저는 자전거를 아직 ‘못‘타는 것이 아니라
탈 수 있는데 아직은 조금 서툴러서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태
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주더군요.

저는 제가 혼자서 언제든 원할 때 탈 수 없으니 ‘못‘타는 것이 맞다고
우겼습니다만, 그 녀석들이 아니라고 해서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4-23 20:24   좋아요 0 | URL
자전거 처음 배울 때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스름 저녁녘 학교 운동장에서 몇 번이고 넘어지며 배우던 때가 그립네요. 그때 뒤에서 잡아주던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참 행복했던 기억중 하나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