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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ㅣ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평점 :
배꼽을 실종시켜 버릴것만 같은 선전 문구와는 다르게 그닥 폭소를 자아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과 이라부의 치료과정의 전개상황에서는 괜시리 웃음이 나오기는 한다. 유아기적 행동을 벗지 못하는 이라부, 환자에 무관심한 마유미짱, 책상 모서리만 보고도 벌벌 떠는 선단공포증 야쿠자, 더 이상 공중그네를 탈수 없는 곡예사, 권위있는 장인의 가발을 벗겨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전도유망한 의사, 1루로 송구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3루수, 새로운 소설속의 등장인물이 이전 소설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작가. 이들이 펼치는 상처의 치유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가슴속에 상처 하나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라부와 환자들이 펼쳐가는 치유의 과정은 힘겹고 고단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조금씩 대면해가는 유쾌한 과정이다. 어린아이 같은 이라부의 행동 자체가 상처를 내면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부위를 째고 고름을 짜고 햇볕에 잘 말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가슴속에 무의식의 어린 아이를 품고 있다. 어느 순간의 상처로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스스로를 결박한 어린 아이,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 속에 저 멀리 뒤쳐져 어기적 어기적 더욱 멀어지는 어린 아이. 이라부는 바로 등장인물들의 가슴속에 방치된 어린 아이이다. 유치 찬란하고 뻔뻔하고 당돌한 이라부를 대하면서 환자들은 은연중 자신속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상처입고 방치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보듬어 저 아래에 홀로 남겨진 상처입은 영혼을 현재 나의 모습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치유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치유보다는 극복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것 같다.왠지 극복이라는 단어가 더 주체적이랄까.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어느 책에서인지, 알라딘의 어느 서재에서인지 본 기억이 나는데, 이 소설의 카피 문구로 딱 어울릴것 같다. 결국 상처는 온전히 자신의 몫일테니까.
p.s) 배우 김수로의 코믹연기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웃음코드가 존재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소설가 박민규, 배우 설경구, 송강호식 코믹연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별로 웃음을 선사하지는 못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