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꼬마요정 > 신들의 계보도 - 태초의 신

태초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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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2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의 < 뮈토스 > 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전출처 : 플레져 > 민들레 압정

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詩 : 이문재



* 위 사진은 하도 많이 올려서 민망하기까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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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1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일상에서 이리도 아름다운 진리를 찾아내는 시인의 눈이 마냥 부럽다.

파란여우 2005-03-17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망초꽃이 압정처럼 박혀있습니다....^^
 
 전출처 : stella.K >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광석 이야기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한때는 세상의 모든 의도적인 것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했지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김광석의 <수첩> 中에서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네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하늘로 나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오늘도 에드벌룬 떠있건만
태공에게 잡혀온 참새만이/한숨을 내쉰다

남자처럼 머리깍은 여자/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가방없이 학교가는 아이/비오는 날 신문 파는 애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오늘도 에드벌룬 떠있건만
포수에게 잡혀온 붕어만이/한숨을 내쉰다

백화점에서 쌀을 사는 사람/시장에서 구두 사는 사람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번개소리에 기절하는 남자/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오늘도 에드벌룬 떠있건만
독사에게 잡혀온 땅꾼만이/긴 혀를 내두른다





 
들을 만한 가수의 노래가 귀한 시대

 1964년 대구시 대봉동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울로 이사. 창신초등학교, 경희중/고등학교 졸업.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암울한 사회상황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방황하던 시기. 친구로부터 노래책 <젊은 예수>를 선물받고 <못생긴 내얼굴> <야근> 부르다 울어버림. 91년 7월 마당 세실 극장에서 62일간의 단독 라이브 콘서트. 92년 경이적인 1천회 콘서트 기록 수립. 1996년 1월 6일. <서른 즈음에> 생을 마감.

 누구인가.
 가수 김광석의 짧았던 생애의 기록이다. 다행일까. 나는 그의 마지막 공연을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관람했다. 중간쯤에 앉았는데, 어눌한 듯이 흘러가는 그의 목소리와 노래 부를 때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한 사내의 인생 이야기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 노래로 이야기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관객들을 향해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그것도 하나의 노래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가객’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그 공연의 울림이 가시기도 전에 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묘했다. 우리가 본 공연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니.

 배우인 송승환 씨가 “김광석이란 친구가 너무 일찍 인생을 많이 알았다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했다고 한다. ‘너무 일찍 인생을 많이 알았다’라는 그 말이 새삼 다가오는 건 무슨 까닭일까. 32라는 숫자만큼의 삶에 60, 70의 생이 담겨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만큼 그의 인생의 슬픔과 그 노래가 잴 수 없는 깊이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단 얘기인가.

이 세상에 요절한 예술가만큼 순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은 없다. 요절한 예술가들은 「이상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작품은 물론 그의 생애까지도 예술품화해 버린다. 그것은 왜일까? 그 이상한 기적이란 과연 무엇일까? 요절한 예술가는 「죽음 속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죽어가기」에 성스러운 불멸의 여신이 그들의 삶을 신비롭게 표구해 준다. 이런 「불멸의 표구」야말로 젊어서 죽은 애절한 인간에 대한 신들의 보상이다.
 -시인 김승희

 어디까지 끄덕거릴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한 가지 그는 ‘죽음 속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죽어’간 것만은 수긍이 간다. 아직도 그는 살아 있고 산자들보다 더 귀한 영혼의 울림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 그의 음악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어쩌다 친구들과 만나 노래방을 가더라도 그의 노래는 한 두번쯤은 꼭 선곡된다. 아련한 취기 속에서 슬픈 80년대가 그를 통해 위안이 되어 다가오는 느낌. 시대는 머릿속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육체 속에서도 각인되는 것이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원래 미국 가수 Bobdylon의 <Don`t think twice it`s Aii right>의 번안곡인 김광석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갑자기 듣고 싶었다. 마치 고려시대 이규보의 <이상한 관상쟁이>라는 글의 관상쟁이의 話法처럼 시대를 거꾸로 노래했던 노래. 경쾌한 포크 반주에 그의 탁하고 맑은 목소리가 어울리던 이 노래는 내 노래방 애창가요 중 하나다. 왜 그의 좋은 많은 노래 중에서도 이 곡이 마음에 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그 리듬이 주는 경쾌함과 가사가 주는 웃음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슬퍼지니까.

 원래 이 노래 가사는 가수 양병집 씨가 만든 것이다. 남들은 어떻게 느낄 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우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전도된 일상의 세계를 본다. 그러한 이 노래의 어법은 내게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어 顚倒(전도)된 요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주는 위태함 때문이다. 가수 김광석이 기타의 조율을 끝내고 흥겹게 이 노래를 부를 때 그 컴컴한 공연장에서 나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가치가 전도된 세계. 그 세상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가. 80년대 무자비한 군사 권력에게 시대의 키를 빼앗기고 우울한 청춘의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이 70, 80년대 학번들이다. 그 시대에 우연히 선물받은 <못생긴 내얼굴>과 <야근>이 왜 그를 울게 만들었을까. 그것을 그의 불우했던 개인사에 국한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흡한 석연함을 남긴다.

열사람 중에서 아홉사람이 내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질해/그 놈의 손가락질 받기 싫지만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못생긴 내얼굴 맨처음부터 못생긴걸 어떻해
너네는 큰집에서 네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집에 일곱이 산다/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사니 너네는 집많아서 좋겠다/하얀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집도 하얗지
몇일이면 우리집이 헐리워진다 쌓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오늘도 그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엄마 한숨만쉬네/개새끼 개새끼 나쁜사람들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나갔지 처음잡은 삽자루가 손이아파서/땀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나도 몰래 눈에서 눈물이 난다/하늘에 태양아 잘난척마라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 <노래 못생긴 내 얼굴> 가사 全文

 이 노래는 불행한 개인사의 삶이요 한 시대의 상처이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며 울었고, 80년대 현장에 있었고 노래를 불렀다. 民主化란 제자리 찾기이다. 말 그대로 ‘民’이 ‘主’의 권리를 가지는 것이 올바른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민주화의 표면만을 흉내 낸, ‘民’이 ‘勸力’을 갖지 못한 시대였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오징어로 경비원을 때리는 국회의원이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점에서 갈 길이 먼 시대이다.

 그의 노래의 始原은 이 지점이다. 그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래했다. 꿈과 사랑마저 아픔이 되었던 고통의 시대. 그는 ‘두 바퀴’의 자동차처럼 위태롭게 한 시대의 대중들에게 노래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권력은 바뀌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인터넷이 시끌하다. 국가 보안법보다 더 무식하고 엉뚱한 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가 보안법 자체도 비상식적인 악법이거니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기에 음원 저작권법은 한 술 더 뜨는 최악법이다. 국가 보안법이 특정한 권력의 이해관계를 유지시키고 고착시키는 것이라면 이 저작권법은 이제 감각과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먹구름이다. 권력은 이제 ‘民’의 감각마저 통제하고 싶은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장사꾼의 비열한 돈벌기의 차원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런 식으로 돈을 벌려고 했었다면 그들은 벌써 재벌이 되었을 테니까.

히틀러는 독일 미술의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이라 하여, 회화의 강제 수용소인 ‘퇴폐미술전’에 압수했다. 이들 작품은 대략 1만 7천 여점 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4천여점은 소각되었으며, 외국 작가의 작품을 포함한 2천여점 이상이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 1935년에는 베를린 소방서에서 회화 소각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독일 회화는 미치광이 히틀러에 의해서 말살되었다. 그것은 회화에 있어서의 ‘아우슈비츠 가스실’이며, 4천여점의 회화가 화염 속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20세기 저항의 회화는 화형에 처해진 것이다.
-富山妙子 「해방의 미학」 中에서

 왜 권력은 문화마저도 독식하고 싶어 하는가. 도대체 음악이 뭐길래, 그림 한 장이 뭐길래, 그리고 시 한 줄 잡문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가.

 먹고사니즘에 빠져 있었던 전후 한국의 가난한 역사에서 문화란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었다. 생각해 보라. 개발독재시대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는 서울 시장이 청계천 복원 공사랍시고 조선시대 귀중한 문화 유산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멘트 속에 묻어 버리지 않는가. 왜 그런가. 우선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니 돈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최소 비용의 최대 효과’를 자랑하는 무식한 자본논리는 문화의 복원에 투여되는 비용과 묻어버리는 비용의 손익계산에서 최저 비용을 계산해 낸다. 결과는 ‘보존과 복원’의 참패이다. 거기에다가 무식한 ‘속도전’이 가해진다. 빠른 시일에 어떻든 결과를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 ‘동백 아가씨’의 폐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문화’를 떠들어대는가. 저작자의 이익과 지적 재산권을 보호해 줄 만큼 우리 나라의 문화적 성숙도가 선진국의 경지에 날아올랐단 말인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에도 물론 돈이 된다는 것쯤은 모를 만한 먹충이들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인가. 음반 시장의 몰락이라는 절박감은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현상이다. 왜냐하면 저작권법이 시행되고 밀리온 셀러가 된 음반이 나타날 징후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이 될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판단이고, 인터넷의 정치력을 상징적으로 묶어둘 수 있는 시기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음반 시장은 더 몰락해 갈 것이다. 인터넷의 자유로운 정보 제공력과 교환력, 그리고 평가와 구매를 한꺼번에 원천 봉쇄시킨 대단한 법이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나는 지금도 음반을 구입한다. 비싸더라도 듣고 싶은 음반은 구매해서 듣는다. 그런데 사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괜찮은 것 같아서 구입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하고부터는 들어보고 산다. 진짜 음악 애호가라면 인터넷에 떠도는 음악의 질이 원음반보다 낫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험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음악 안 듣기는 뭐 하니까 몇 장 사서 돈버리고 스트레스 받아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정말 싫어진다. 그러면? 사는 횟수가 줄어든다. 사더라도 다른 이들 꺼 빌려서 들어보고 산다.

 시장이란 구매자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자유경쟁은 그런 것이다. 표절한 음악은 금방 드러난다. 국내 음악에 대한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음반 제작자의 비윤리성과 모자란 재능 때문이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예술성과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듣고 싶은 음악이 사라지고 있다. 음악은 없고 상품만 있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수가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서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얼굴 팔고 엔터테이먼트라고 MC고 드라마 주인공도 한다. 웃기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가수들은 모두 다재다능한 천재인가. ‘노래만 잘 해서 뜨는 시대는 지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등짐을 지며 언더그라운드에서 착실히 음악 수업을 하며 악기 하나에 목숨 거는 이들도 꽤 많다. 음악 하나에 그들은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좀체로 떠오르지 않는다. 파주의 세탁소집 아들 윤도현이 비닐 하우스에서 밴드 연습을 하고 각고한 노력 끝에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서울대 수석 입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그 모델처럼 누구나를 강조한다. 고려 페인트 ‘누구나’가 아니다. 그 말은 ‘아무도’ 하고 같다.

 그러면 본 문제로 돌아와 보자. 단지 음원을 독점해서 떼돈을 벌겠다는 것이 다일까. 나는 그 이면에서 무의식화된 정치의 통제력을 본다. 한국 사회의 자본가는 누구인가. 그리고 권력자는 누구인가. 한국 사회는 발달된 서구 자본주의 사회처럼 형식적으로도 분리되지 않는다. 사업을 해서 돈 많이 버는 사람, 돈이 있는 사람이 국회의원도 하고 시의장도 한다. 이 문제는 결국 자본논리 속에는 새로운 검열이라는 정치논리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저작권 문제는 시장 경쟁의 자유 논리를 억압하는 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사이버의 불온성(?)을 제거하고 싶은 권력이 결탁한 새로운 검열 제도의 탄생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 통제 욕망’을 ‘저작권자 보호’라는 그럴싸한 명분 속에 은폐시키는 중층적 악법이 저작권법인 것이다. 그것이 근본부터 이 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또 다시 문화의 창의성이 법률의 창살에 갇혀 허덕이는 그런 사태가 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수 김광석, 그가 그립다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 주고
열심이었다고,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 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하다
무료하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박수치는 그 사람이, 사람들이 무료하다
즐겁지 않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여전히 즐겁지 않다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김광석 1995년 8월 즈음


 
 희미한 조명 아래서 씨익 웃으며 마음을 감추던 가수. 개인적인 친분 하나도 없는 그 가수가 나는 왜 그리워지는 것일까. 아마 나는 한 두 장 정도는 빼고 그의 음반은 거의 다 구입했을 것이다. 주인과 객이 바뀐 시대. 음악마저 향유할 권리를 내놓아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일까. 가슴도 없는 남자들에게 브래지어를 사서 보라고 강요하는 그런 넌센스를 지금 나는 보고 있다. 나는 끝내 그 브래지어를 사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진심으로 나는 가수 다운 가수가 그립기 때문이다. 삶을 노래로 바꿀 줄 아는 사람. 삶이 노래인 사람을 말이다.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시대는 불행하다. 거기에는 진실도 그리고 진지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상품화된 문화와 상품화된 사람만이 있다. 그것의 소유는 돈이 결정한다.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인터넷이 빽 없고 돈 없는 노래쟁이들에게 참 좋은 선전 매체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크라잉 넛>도 언더 출신이 아니던가. 이제는 스타는 있을지언정 ‘가객’은 없을 것이다. 저작권법이 폐지되지 않는 한.

 돈과 관료주의가 유착된 이 ‘무식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본주의의 자유 경쟁마저도 거세해 버린 ‘반자본주의적’ 현실 앞에서 나는 그때의 그 무대가 그립다. 브라운관이라는 매혹적인 매체를 등지고 무대에서 통키타 하나로 승부하던 김광석. Bobdylon의 反骨性과 김광석을 겹치며 그가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한 구석, 빈 자리를 쳐다본다. 그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2005.01.27 새벽편지] 새벽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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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1-3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그보다 더 살아버렸다. 그래도 그가 그립다.
그의 콘서트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라이브 무대 테잎을 통해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그의 삶...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노년의 로맨스, 버스 안에서 흘린 눈물을 이야기하던 그의 삶이 그립다.

깜소 2005-02-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그 라이브 TAPE 저도 들어요...외로울때...잔잔히 울고 싶어질때...에~혀......

잉크냄새 2005-02-1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대포집 술한잔이 떠오르는 노래들이죠.
괜시리 코끝이 찡해지는....

burgeo1102 2009-12-1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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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펌)시인의 나이

연말이다.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는 기쁨도 있겠지만, 연말이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열 아홉, 스물 아홉, 서른 아홉, 마흔 아홉…. 아홉이란 말의 어감에는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먼저 묻어난다.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중 '사십대'에는 이런 고백들이 절절히 풀어져 있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사십대 중에서

특히나 여자들이 맞는 아홉 수란 보다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스물 아홉보단 서른 아홉이, 서른 아홉보단 마흔 아홉이. 하지만 여류시인들에게 있어서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사이는 다른 아홉보다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 가사처럼 멀어져 가는 또 하루를 보내며 떠나간 사랑을 못내 그리워하듯이.

시인 김승희는 자신이 체험한 삼십 대를 '나이 삼십이 넘으니 이제 보이는 것 모두가 재개봉관' 같다며 우울함을 감추지 못한다. 심지어 '사랑도 미움도 번뇌마저도 재개봉관'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최승자, '삼십 세' 중에서

최승자 시인은 보다 더 충격적으로 서른 살을 회고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왔다. 그때의 서른은 시큰거리는 치통이었고,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한 나이였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제목을 아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내세운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시인이 아직 서른이었기 전, 시인은 마찬가지로 서른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 나희덕, '나 서른이 되면' 중에서

서른이 되면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던 나희덕 시인은 지금 한국 나이로 서른 아홉이다. 시인은 과연 자신의 마흔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이제 곧 잊혀질 삼십대는.

김승희, 최승자 시인은 50대 중반을, 최영미 시인은 40대 중반을, 그리고 유안진 시인은 60대 중반을 살아가고 있다. 모두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선 것도 어제의 일, 중년의 산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 문정희, '생일파티' 전문

'쉰 살이 되면'을 읊조리던 시인은 이제 육십줄에 다다라 있다. 서른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마흔이, 마흔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쉰이, 그리고 쉰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어느덧 예순과 일흔을 지나 인생의 황혼을 마주한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처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김으로 아름답게 추억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그리고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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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보다 두살이 많은 입사동기를 놀리느라 <서른즈음에>를 부르던 적이 있었고,

허탈한 내 심정 달래느라 <서른즈음에>를 부르던 적이 있었고,

술 사달라 칭얼거리며 <서른즈음에>를 부르는 후배를 따라 살며시 읊조리던 적이 있었다. 에헤라~~

진주 2004-12-23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싸, 서른은 넘겼으렸다!(근데,잉크님은 코를 안 흘렸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 코는 언제까지 흘리고 댕긴겨??)82...

icaru 2004-12-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 냄새 님이 들려주는 서른 즈음을 들었던 그 동기님은.... 아마...따식..같이 늙어가는 주제에...했겠지요~ ㅋㅋ 님...얄궂습니당^^

잉크냄새 2004-12-2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그럼요. 코는 초등학교 입학전까지 흘렸죠.^^ 82년에는 안 흘렸답니다.

복순이 언니님 / 제가 서른즈음에는 그 친구가 불러주더군요. 축하한다고! 둘다 얄궂죠?
 

* 다음은 『장정일 삼국지』의 발간취지를 고양하고 내용에 관한 정확하고도 폭넓은 이해를 돕고자 작가 장정일 씨에 의해 작성된 글입니다.


<나의 삼국지 이야기>


1. 내가 『삼국지』를 쓰게 된 까닭

5년 전 김영사로부터 『삼국지』를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뭔가 ‘점지’ 받았다는 생각으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삼국지』는 자신이 해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번역이나 개작·윤색을 할 수 없는 책이다. 우선 분량부터가 한두 권짜리가 아닌 10권 길이의 대작이라 제작비가 엄청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지』 시장에는 늘 자신보다 먼저 시장을 점거하고 있는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김구용 앞에는 김광주가, 김광주 앞에는 박종화가, 박종화 앞에 또 다른 선행 판본이 있다는 것은 제작비를 훨씬 뛰어넘는 기획비용을 지출하게 한다. 따라서 『삼국지』는 탈고하고 나서 출판사를 찾는 평범한 집필·출판 관행에서 벗어나, 번번이 출판사가 작가를 점지하는 기획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우쭐해지는 기분과는 달리 내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차례로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한 번도『삼국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반감이었다. 작가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기에, 이름 난 고전에 자신의 개성이나 명성을 살짝 덧씌워 내놓는 개작이나 윤색은 진정한 작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에 달려든 유명 선배 작가들을 은근히 마음속으로 경멸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나긴 세월이 받들어 모시는 여러 고전 가운데 유독 ‘남성적 서사’가 지배적인 『삼국지』와 나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또 체질과 상관없이 『삼국지』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늘 업신여겨왔다.
그래서 나는 ‘한문도 모르고 번역도 못한다’는 이유를 방패로 출판사의 제의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출판사는 ‘또 한 권의 번역본을 추가하려고 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글작가 장정일만의 고유한 해석과 관점이 들어 있는 새로운 판본이다’라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솔깃했다. 그 까닭은 『삼국지』 제의를 받기 한 해 전에 나는 진시황과 그 아들간의 권력투쟁을 그린 『중국에서 온 편지』를 쓰면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구성하는 일로부터 엄청난 매력과 자유를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라면? 이건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삼국지』를 쓴 허다한 우리나라 작가들 가운데 애초부터 『삼국지』를 번역하거나 윤색·개작하기 위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망설였다. 『삼국지』를 새로 쓴다는 것은 내가 진짜 쓰고 싶은 일체의 원고 작업을 중단하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 동안 『삼국지』 하나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점지’가 혹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금전적 보상만큼 작가로서 감수해야 할 손해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피한 채 ‘『삼국지』를 검토할 시간을 6개월만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출판사와 헤어진 바로 그날로 고서점가를 뒤져 구할 수 있는 『삼국지』 판본을 모두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여러 종류의 판본들을 반 년 동안 읽으며 나는 『삼국지』가 새삼 굉장한 책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를 새로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삼국지』가 굉장한 책이라는 것은 ‘이 책을 가지고 못할 이야기가 없다’라는 세간의 평가가 증명한다. 문제는 『삼국지』가 동양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게 유명무실할 만큼 하자가 많다는 점이다. 이 글을 통해 국내에 번역된 『삼국지』의 문제점들은 물론 소위 원본 『삼국지』 자체가 갖는 본질적 한계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겠지만, 3종의 번역본과 1종의 평역본을 읽고 난 후의 내 느낌은 ‘『삼국지』가 읽히지 않을 책이라면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고전으로 취급될 거라면 누군가가 『삼국지』를 새로 쓰는 일보(一步)를 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삼국지』가 군담역사소설(軍談歷史小說)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삼국의 역사에 덧보태면 안 될 이유가 없고, 또 시대와 인물의 재해석을 통해 『삼국지』 자체를 새로 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600여 년 전에 편찬된 『삼국지』가 당대의 민중과 시대정신을 반영했다면, 21세기에 읽히는 『삼국지』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삼국지』를 쓰기로 결심한 계기다.


2. 번역의 문제

『삼국지』를 애독하는 사람들은 『삼국지』 하나로 사회·정치·경영·심리·군사·외교·역사·예술 등 하지 못할 이야기가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삼국지』로는 도무지 제대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심각한 장애가 『삼국지』의 다양한 가능성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잘못된 번역 관행이다.
해방 이후 독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명멸해간 숱한 번역본은 물론이고 오늘날 시중에 나와 있는 몇몇 번역본의 문제는 너무나 자명하다. 번역 능력이 전무한 내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학자와 작가들의 오역을 감히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번역이 충실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번역 자체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삼국지』의 독자들은 물론이고 유수의 작가(또는 번역가)들마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삼국지』에 정본이 있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압도적으로 번역된 원말(元末)·명초(明初)의 『나관중(羅貫中)본』과 청대(淸代)의 『모종강(毛宗崗)본』은 현재 중국에서 읽히고 있는 숱한 판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정본이 있다는 믿음 자체가 허구이다. 이것은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 일화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해석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장 많은 독자를 지닌 『나관중본』과 『모종강본』만이 있을 뿐 정본은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역자들은 『나관중본』『모종강본』에만 매달려 ‘이번에 자신이 번역한 『나관중(또는 모종강)본』은 숱한 『나관중(또는 모종강)본』 가운데서도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판본’이라며 실재하지 않는 『삼국지』 정본을 숭앙한다. 정본 또는 원본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바탕으로 자자구구(字字句句)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은 시대의 제약과 한계를 반영한 『나관중·모종강본』이 애초부터 ‘비틀어진 원판(原版)’이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한 예로 1천 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조조에 대한 평가는 월단(인물평) 잘하기로 소문났던 허소가 나관중·모종강본 『삼국지』에서 말했다던, ‘그대는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말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한 그 삼국지들은 ‘그 말을 들은 조조가 크게 기뻐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태평성대에는 고만고만한 신하로 만족할게 분명하고,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혼란을 부추길 위험한 사람’이라는 허소의 말에 천하의 재사였던 조조가 기뻐했다는 것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후한서』에 실려 있는 「허소전」에 의하면 허소는 『나관중·모종강본』에서와 달리 ‘그대는 태평세월의 간적이요, 난세의 영웅이다(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라고 말했다. 즉 ‘당신은 태평세월을 혼란하게 할 인물이지만, 오히려 혼란한 세월이 오면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에 젊은 조조는 흥겨워 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나관중·모종강이 허소의 월단을 왜곡한 것은 ‘영웅’을 ‘간웅’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조조를 능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 역사학자 장학성(章學誠)이 『삼국지』를 가리켜 “열에 일곱은 사실, 셋은 허구(七實三虛)”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와 비교해 보면 장학성의 논평은 중국인의 관용과 과장이 상당히 섞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칠실삼허가 아니라 칠허삼실(七虛三實)이 오히려 더 적확해 보인다. 정사에 따르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비롯해 초선(貂蟬)의 미인계니 적벽(赤碧)에서의 연환계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뒤틀린 원판을 놓고서 번역의 정확성을 아무리 따져본들 생산적인 의제는 생겨나지 않는다. 『나관중·모종강본』을 정확하게 옮기려고 하면 할수록 독자들은 왜곡된 역사로 가득찬 『삼국지』를 대하게 될 뿐이다.
역사의 왜곡과 함께 원전 번역이 가진 결정적인 약점은 나관중과 모종강이 살았던 시대에는 흥미를 유발했겠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설득력을 잃은 편향적 해석이다. 옹유반조(擁劉反曹)의 시각으로 일관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 한족(漢族) 중심의 왕조를 미화해야 했던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분법적인 선악론만 흉하게 도출될 뿐이다. 나아가 황건군(黃巾軍)을 황건적(黃巾賊)으로 사갈시 하는 기술 또한 유교이념이 득세했던 시절의 체재지배적 해석이다. 동학난(東學亂)이라는 비칭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승격되어 불리는 이 시대에, 옛날 옛적 먼 나라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황건기의(黃巾起義)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는 일에 인색할 필요가 있을까?
짐작컨대 한학자 출신의 번역자들에게는 동양 문화의 정수를 전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원전중심주의에서 한발도 비켜나지 않는 그들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600여 년 넘게 이 땅을 그늘지게 했던 중화주의의 그림자다. 새로운 중국 패권주의가 도래할지도 모르는 21세기에 왜 그렇게 중화주의로 점철된 『삼국지』를 아무 비판 의식 없이 번역하고 군말 없이 읽으려 드는 건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이름난 작가들의 『삼국지』 번역은 한학자들의 원전중심주의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서양의 고전과 달리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 소설을 그것도 당대의 가장 이름난 소설가들이 무수히 달려들어 10여 차례나 번역했다면 그건 이미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감과 문제의식을 갖고 『삼국지』에 도전한 사람이 없다. 하물며 조선시대부터 관운장이나 조자룡을 몸주로 삼은 무수한 무당(巫堂)까지 있어왔건만, 우리 소설가들 가운데 ‘『삼국지』는 우리 것!’이라고 외친 작가는 전무한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 번역본의 경우 처음 그 책이 출간된다고 했을 때 많은 독자들은 가슴이 설레었다. 민중·민족문학의 좌장이라고 할 만한 분의 작품인 만큼 토종 『삼국지』를 읽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펼쳤을 때, 그 기대는 말짱 허사가 되고 말았다. 탈식민주의와 문화 주체성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소위 민족과 민중을 기치삼아 사회와 문학예술의 일선에서 향도가 되어 왔던 작가의 그 책은 독자와 시대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삼국지』 1권 서문에 “나는 주요한 전투장면에서는 건조한 원문에다 나름대로의 신명을 얹어서 좀 더 박진감 있게 표현하려고 덧붙여 묘사하기도 했고,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 바로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현재형 문장으로 다듬기도 했다”라고 쓰고 있다. 나름대로 신명을 얹어 덧붙여 묘사했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이 문장은 이제껏 되풀이 돼온 『삼국지』 번역 작업의 실체만이 아니라 고전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슬며시 암시해 준다. 모두들 텍스트를 정역을 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앞선 번역자의 몇몇 오역을 시정하면서 새로운 오역을 더하거나 고작해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대적 어투로 문체를 갈아 입혀왔던 게 고전 번역의 실주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정역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해석이다.


3. 해석의 문제

강조하건대 『삼국지』는 그것이 읽혀지는 시대와 우리 주변의 인물 군상을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때문에 『삼국지』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추출하려고 해야지, 안이한 번역본들처럼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위나라, 촉나라 할 것 없이 중요한 전쟁에는 반드시 평소에 경원했던 ‘오랑캐’를 앞세워 전투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큰 나라라도 전쟁터에서 입을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손실은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위험 부담을 주위의 동맹국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베트남으로 이라크로 파병해야 하는 비애가 여기 있는 바, 『삼국지』는 끊임없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국내의 여러 필자들이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원전 중심 번역에 매달려 텍스트의 다양한 가능성을 개봉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삼국지』를 재구성하고 당대와의 대화를 시도한 평역 『삼국지』가 10여 년도 더 전에 출간된 바 있다. 오로지 그 평역만이 천년 전의 중국 역사와 현재간의 ‘역사적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이 땅의 80년대를 견인했던 민중의식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대타의식을 갖고 쓰인 만큼 작가의 보수성과 고답성이 면면히 은닉되어 있다. 작가가 그토록 자랑하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설 역시 객기와 객담의 차원에 불과하다.
그 『삼국지』가 작가의 온갖 보수성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이자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식견 있다는 사람들은 『삼국지』가 작가의 온전한 저작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책을 찬찬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에 태만했다.
『삼국지』를 재구성 또는 재해석한다고 할 때 작가는 도대체 『삼국지』의 무엇을 재(再)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한다는 것일 터이며, 따라서 작가의 역사관이야말로 그것의 옳은 기초가 될 것이다. 하지만 황건군을 어김없이 황건적이라고 명기하는 선민적(選民的) 역사관으로는 삼국시대를 살았던 당대 민중의 염원은 물론이고 현재의 중화민국 건국에 관한 진실마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중국 역대 왕조는 항상 농민혁명으로 붕괴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중국 역사는 황건난을 ‘의로운 봉기’로 높여 부르고 있다. 작가가 인간사(人間事)의 현상과 본질을 가려 바른 이름을 붙여주려고 애쓰지 않을 때,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난이 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폭동이 된다.
민중에 대한 선민우월주의적인 시각과 함께 참으로 아쉬운 점은 ‘『삼국지』가 한족에 의한, 한족을 위한, 한족의 선전물 또는 강령일 수도 있다’라는 비판적 시야를 그 평역 『삼국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왕실에 대한 불충과 무단(武斷) 행위가 결코 동탁이나 여포만의 전매특허가 아니건만 그 두 사람은 『삼국지』에 나오는 동급의 여타 주인공들에 비해 시종일관 턱없이 의리 없고 예절 모르는 야수로 묘사되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두 사람 모두 중앙의 정통 한족이기보다는 변방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평역을 한다고 했지만 그 『삼국지』 속에는 아직 제3국인의 눈으로 중국인의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 나라(중국)의 고전을 해체하여 그들의 정전을 해체해 보이는 일은 그 나라(중국) 사람들에게도 공헌을 하지만, 그것을 시도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모종의 자각을 준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 빈번히 등장하는 동호(東胡)가 그 당시 요동지방의 주도권을 놓고 한족과 다투었던 고구려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 독자들 또한 조조나 유비의 각축으로 압축되는 『삼국지』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려 들 것이다.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 대한 평판 역시 동탁이나 여포와 다르지 않으며 그들의 운명이 바로 우리의 운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정전을 해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국지』의 경우, 자국의 문화유산이라는 헤어나기 어려운 무게에 짓눌린 중국인이 하기보다 우리 같은 비중국인이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작업을 더 잘해내기 위해서는 꼭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앞서 나는 ‘우리 삼국지’가 나와야 된다고 말했지만, 『삼국지』가 우리 것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우선 먼 옛날 먼 땅에서 왔음에도 너무 오래되고 친숙하여 마치 ‘『삼국지』는 우리 것’이라는 무의식중의 착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우리 삼국지’가 나와야 된다면서 먼저 ‘『삼국지』는 우리 것’이라는 착각과 결별해야 한다는 말에 헷갈릴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런 혼란조차 중화주의의 한 자락을 부여잡고 500년이라는 조선 역사를 운영해왔던 소중화주의 유산의 비애라고 보면 된다. 실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삼국지』에서 파생된 많은 단어들이 시사용어나 중고등학생들의 시험 문제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읍참마속이니 삼고초려니 괄목상대니 백미니 하는 단어들은 우리 생활 속에 마치 우리 역사의 일부인 듯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껏 『삼국지』와 우리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는 모종의 일체감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때문에 『삼국지』를 읽는 한국 독자들은 항상 유비를 ‘우리 편’으로, 또 조조를 ‘나쁜 편’으로 정해 놓고 읽게 되었으며 유비 삼형제가 모두 죽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한숨을 쉬며 흐지부지 독서를 중단하기까지 하니 이게 바로 ‘삼국지는 우리 것’이라고 여겨온 우리의 무의식이다. 이제 그것과 결별해야 한다. 우리는 유비의 편도 조조의 편도 될 필요가 없다. 대신 전투로 날이 새고 지는 그 시대에 대한 해석을 통해, 말썽 많은 오늘날의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한다.
역사의식 부재와 중화사관이 주변화시킨 변방인에 대한 애정이 전무하다는 비판과 더불어, 형식상의 불일치 또한 그 평역 『삼국지』의 취약한 부분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평설이라는 형식으로 서구의 현대적 이론을 날것으로 피력하면서, ‘전설 따라 삼천리’나 다름없는 제갈량의 동남풍 일화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넘어간다. 인과성과 사실성이 결여된 ‘이야기’의 세계와 그것들의 합산이고자 안간힘 쓰는 ‘소설’의 세계가 두서없이 혼거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모두가 원전에 압도되어 새로운 판본도 철저한 정역도 할 수 없었던 작가의 어정쩡한 타협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4. 『삼국지』, 누군가 바로 써야 독자가 바로 읽는다

현대인의 가치 판단으로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믿었던 가치와 이념을 일방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워낙 많은 한국인들, 특히 남성들이 이 소설을 무슨 통과의례처럼 읽기 때문에 『삼국지』 속에 나타나는 존왕충군(尊王忠君) 이데올로기와 성리학에 기초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은 깊은 주의를 요한다. 한실부흥의 명분을 내세워 고군분투하는 유비의 모습을 보면서 천명 받은 군주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게 충의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불행해진다. 예를 들어 80년대 초에, 자신들의 주군이 만들어 놓은 유신체제를 지속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한강다리를 건너왔던 일단의 정치군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겉으로는 복한(復漢)을 외치면서 내심으로는 새 왕조를 꿈꿨던 유비처럼 13년간이나 정권을 찬탈하고 개인적 야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지역감정의 씨앗을 이 땅에 뿌려 놓지 않았는가? 이럴 때 『삼국지』는 주군은 물론이고 주군의 실정을 목숨 걸고 탄핵하기보다 맹목적으로 따르기로 작정한 잘못된 정치적 멘탈리티를 가진 인물들을 양산하는 좋은 배양지가 된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과 평역본으로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삼국지』 독서 체험을 바꿀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삼국지』는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 한(漢)나라 말기 중국이 위·촉·오로 분열된 채 약 100여 년 간 싸우던 시절의 군담역사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에는 한대(漢代)에 이르러 중국의 통치 이념으로 공식화된 유교주의 가치관과 인간 이해 방식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남송 때부터 발달한 주자(朱子)의 성리학이 나관중이나 모종강 같은 유명한 『삼국지』 편찬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탓에, 어떤 인물은 괜찮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이 희화화되거나 사소하게 지나쳐가고, 반대로 어떤 인물은 겉과 속이 다른 무능력자인데도 영웅시되거나 중시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한 예로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조조를 악의 화신으로 알고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을 충의지사로 알고 있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그런 묘사는 실제 인물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리와 대의명분이 선악의 기준이 되는 유교적 춘추사관의 산물이다.
특히 나관중·모종강본 『삼국지』가 표방하는 유교적 춘추사관을 충실히 보강해 주는 것이 『삼국지』 속에 삽입된 총 210수에 달하는 시(詩)다. 『삼국지』의 편찬자들은 한 편의 일화나 한 개의 장(章)이 끝날 때마다 긴장된 서사를 이완시켜주는 한편 방금 끝난 일화나 장을 평가할 목적으로 삼국시대나 그 이후에 활약했던 문인들의 시를 찾아 넣거나 직접 써넣었는데, 그 시들이야말로 춘추필법의 정수가 고스란히 고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지』에 삽입된 원시들에 의해 유비(촉)는 언제나 찬양되고 그 외의 제후장상들은 역도로 폄하받거나 어리석은 자로 조롱받는다. 가장 놀랄 만한 예는 전장에서 조운이 한덕의 아들 넷을 차례대로 죽이고 난 직후에 나오는 시다.
“저 옛날 상산 조자룡은/ 나이 일흔에도 커다란 공을 세웠도다/ 혼자서 젊은 장수 넷을 죽였으니/ 지난날 당양에서 주인을 구하던 기개와 같구나.”
원래 어진 이는 대(代)를 끊지 않는다고 했으나, 상대가 조조군이면 애도의 대상조차 못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최근의 번역본 『삼국지』는 그 간에 나온 번역본들이 원시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소홀히 취급했다면서 전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210여 수의 시를 완벽히 번역해 넣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가 그 독(毒)을 고스란히 받아 마셔야 할 이유는 없다. 편찬자들은 한껏 서정적인 시를 이용해 옹유반조는 물론이고 중화주의와 국가유교의 온갖 도그마를 주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원시의 저자들이 하나같이 당대의 고급 문인 관료들이었기에 영웅들의 삶과 죽음만 미화되고 민중들의 고통과 애환은 어디에서도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삼국지』의 문제는 바로 『삼국지』에 들어가 있는 시’라는 것을 안다. 내가 나관중·모종강본 『삼국지』에 나오는 시를 거의 다 삭제하고 꼭 필요한 곳에만 시를 새로 써넣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일관하고 있는 춘추필법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선인(청류·유학을 배운 사대부)과 악인(탁류·환관과 외척)으로 정형화하고 이분법화 함으로써 인간 내면에서 모순되게 약동하는 욕망을 바로 읽지 못하게 한다. 또한 황건군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는 예에서 보았듯이 당대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러한 세계관의 제약으로 인해 소중하게 해석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 번번이 잘못 기술되고 있다. 바로 이런 문제점이 앞서 예로 들었던 것처럼 자칫 오늘의 우리 역사마저 굴절되게 바라볼 수 있는 맹점을 『삼국지』 독자의 내면에 심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와 같이 영향력이 큰 소설은 누군가가 바로 써야 독자가 바로 읽는다. 청류와 탁류로 나뉘는 중국(한족)의 춘추필법이 황실 내부가 아닌 중화주의로 발현될 때는 한족이 청류가 되고 이민족은 탁류가 된다. 그러므로 몽고족(원나라)과 만주인(청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완성된 나관중·모종강본 『삼국지』가 화이론(華夷論)적 세계관에 얼마나 충실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지』를 읽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례로 제갈량이 남만(南蠻)의 추장인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다시 풀어준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일화를 거론해 보자. 많은 독자들은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씩이나 적장을 풀어준 끝에 오랑캐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을 끌어낸 제갈량의 재기와 인덕에 경탄하면서 중국인의 배포에 감탄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일화가 중국인들에게 읽히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칠종칠금 일화에는 중국의 오만한 중화사상과 주변국을 다스리는 중국인들의 오랜 통치술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을 직시한 독자라면 더 이상 제갈량의 재기와 인덕이나 중국인의 배포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미련하고 염치없어 보였던 맹획의 행동으로부터 어떤 지혜를 이끌어내려 할 것이다. 주체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만이 한 민족의 존엄성과 독립성을 보장받는 길이라는 것을 맹획은 일찍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갈량은 힘들여 정복한 남만에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대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역시, 누가 바로 쓰지 않고서는 쉽게 고치기 힘든 『삼국지』 독자들의 신화가 되어 있다.
나관중·모종강이 강조한 한족 중심의 중화사관과 관련하여 몇 마디 덧붙여 보자. 『삼국지』가 비록 한족 중심의 위·촉·오 세 나라의 쟁투를 그리고 있긴 하나, 실제로 삼국시대는 숱한 제후들이 각축하던 시대였고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이라 불리는 숱한 민족이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하지만 두 편찬자는 『삼국지』무대에 비(非)한족을 올리길 극히 꺼려했고, 맹획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설사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한족에 의해 정복되고 감화되는 열등한 미개인으로 묘사한다.
고구려 역사의 귀속을 놓고 중국과 역사 논쟁을 벌이는 이때, 나는 그런 단순한 화이론적 차별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 『삼국지』가 한족만의 것이 아닌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공유하는 문화유산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위나라와 함께 연합작전으로 공손연을 토벌했던 고구려 동천왕의 실제 역사를 복원한 대목이다.


5. 여성 독자들에게 전하는 글

동서고금을 통틀어 고전이란 늙거나 혹은 젊은 남자들이 즐겨 읽으며 반복해서 익히는 책을 일컫지, 남녀노소가 읽는 책이 아닙니다. 소위 인류의 공적 유산이라고 추앙받는 고전들이 여성들에게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독서나 교육이 왜 이처럼 배타적으로 고정되고 말았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한 권의 책이 쓰여야 하겠지만, 『삼국지』는 이런 잘못된 고전 가운데 특히 악명 높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는 『삼국지』를 읽었다는 여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여성들의 독서 취향이 ‘말랑말랑’하고 낭만적인 것만을 선호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지요. 진실을 말하자면 무수한 고전들이 그렇듯이 『삼국지』가 여성 독자의 진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담역사소설이라는 『삼국지』의 서사적 특성상 남성 인물이 대거 등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세심히 살펴보면 꽤 많은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것에 오히려 놀라게 되지요. 그런데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축융부인 같은 여장부나 뛰어난 정세판단으로 한 집안을 멸족에서 구해낸 신헌영 같은 인물들은 드물고, 대부분 경국지색을 갖춘 요부이거나 당대의 유교적 충군이념을 보조하는 열녀라는 점입니다. 초선이나 동승의 시첩이었던 운영 그리고 황규의 시첩이었던 춘향이 앞의 부류라면, 아들이 충신(유비)을 버리고 간신(조조)을 찾아왔다고 목을 매어 죽은 서서의 모친과 마초를 꾸짖고 죽은 강서의 모친 그리고 마초 휘하에 있는 아들 걱정으로 싸우기를 주저하는 남편에게 “자식 하나쯤 잃는다고 대사를 그만 둘 수야 없다”고 다그치는 조앙의 처 왕씨는 뒤의 부류이겠지요. 여기에 후주(유선)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보다 먼저 목숨을 끊은 유심의 처 최부인까지 합하면 아무래도 요부보다는 유교적 충군이념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열녀가 더 많이 등장하는 게 『삼국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서의 모친, 강서의 모친, 조앙의 처, 최부인은 물론이고 중상을 입은 채 유비의 어린 아들(아두)을 안고 조조군의 추격을 받던 중 조운을 만나 아이를 건네주고 자신은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우물에 몸을 던져 죽은 유비의 둘째 부인, 손권의 여동생으로 유비와 정략결혼을 했다가 결국 파혼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손부인 같은 황후들마저 하나같이 성명 미상으로 처리되는 것을 보면 『삼국지』의 여주인공들은 각자 개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당대의 가부장적 국가이념을 널리 알리는 선전수단으로 기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여성잔혹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삼국지』의 여성잔혹 결정판은 그럼 어떤 장면일까요?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며 네 차례나 부인을 팽개치고 도망 다닌 유비의 소행일까요, 아니면 여포에게 쫓겨 산길을 헤매던 배고픈 유비에게 아내를 잡아(?) 화로에 구워주었던 어느 사냥꾼의 엽기 행각일까요? 여성 독자를 막기 위해 남성 편찬자들이 금줄을 쳐놓은 소설이 『삼국지』입니다. 남성들은 여성의 접근을 막아 놓은 그들만의 흑막 뒤에서 유치한 놀이를 하지요. 저는 여성은 아니지만 『삼국지』를 탈고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만큼 『삼국지』를 싫어했습니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이 도처에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제가 두고두고 웃었던 경우는, 조조의 근거지를 빠져나온 관우가 형수(유비의 부인)를 호위해 위험하고 고단한 먼 길을 헤매며 유비를 찾아가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유비 일행이 어느 산 속에 들어섰을 때 관우의 명성을 듣고 달려온 황건군의 잔당이 자신들을 휘하에 거두어 주길 원하자, 유비보다 더 융통성 없었던 관우는 단호히 거절을 합니다. 황숙(皇叔)의 군대가 도적 무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에서이지요. 황건군 대장과 그 부하들이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극진히 애원하자, 관우는 할 수 없이 유비의 첫 번째 부인인 감부인의 수레에 가서 사정을 보고합니다.
『나관중본』『모종강본』을 바탕으로 했던 국내의 번역본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남편과 황군(皇軍)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감부인의 대답을 되풀이하지요. 하지만 제 『삼국지』 속의 감부인은 수천 년 동안 성실히 수행해 왔던 남성적 수사(修辭)의 앵무새 노릇을 거부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장군님, 예로부터 병비일가(兵匪一家)라고 했으니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군인과 비적은 원래 하나라는 것, 제 『삼국지』는 한 가녀린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일성으로 남성적 기만의 세계를 통째 거부합니다.
황제에게 반역한 황건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관우의 대의명분성 발언은 훗날을 위한 명분 축적용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명분으로 치장된 발언인 만큼 현실 인식이 빈약한 언행이라고 해야지요. 실제로 우리 국민은 정국에 따라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근 50년 이상 곡예사 같은 정치 행각을 벌였던 노회한 정치가를 보아왔습니다. 스스로 유신본당(維新本黨)이라고도 밝혔던 그가 잘 못 살았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기회와 보신을 위해 줄을 바꿔서는 ‘철새’들의 행각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어제 오늘에 만연하던 일이 왜 수천 년 전에는 없었겠습니까?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군웅들 가운데 그 아무도 황건군과 합작한 인물은 없습니다만, 소위 황숙이라는 유비만 유독 황건군은 물론 입장이 불투명한 여러 정치 집단과 합작을 했습니다.
이 글의 첫 장에서 저는 이미 체질적으로 『삼국지』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고 이 장을 통해서 “저는 『삼국지』를 싫어했습니다”라고 다시 한 번 밝혔습니다. 생래적으로 남성적인 폭력의 세계가 싫었던 데다가 권력을 향한 주인공들의 무지막지한 열정은 더 더욱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삼국지』를 써보라는 제의를 받고 검토를 했던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밤마다 사람의 목이 떨어지고 어디론가 말을 달려 도망다니는 무시무시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적과 싸우고, 패해서 무릎을 꿇고, 은전을 받은 뒤에 새로운 주군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는 도저히 친숙해지지 않는 남성적 서사가 저를 가위눌리게 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반년 동안의 검토 끝에 『삼국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남성이나 권력에 대해 깊이 이해하거나 나름대로 판단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여성잔혹극이 두려워서 혹은 도저한 남성적 서사에 질려 아직껏 『삼국지』를 읽어보지 못했던 여성 독자님들, 『삼국지』를 읽어보십시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용호상박의 싸움을 벌이는 남자들의 전 생애가 위선과 자기기만과 모략에 더하여 굴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삼국지』를 보며 비웃어 주십시오!


6. 글을 맺으며

『삼국지』 독자들은 세대에 따라서 자신이 처음 접하고 감명 깊게 읽은 역본이 모두 다르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구의 『삼국지』를 읽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하다. 고전은 되풀이 번역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시대든 그 시대는 자신만의 판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를 낸 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지 않던가. 『삼국지』가 더 이상 읽혀서는 안 될 책이라면 모르되, 그게 아니라면 매 세대마다 그 시대에 맞게 『삼국지』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번역이 아니고 새로운 판본(板本)이 필요하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라면 잘못 번역된 토씨 하나까지 발본색원하여 되풀이 번역되어야 하겠지만, 원래부터 저자가 없었던 연의(演義) 『삼국지』는 언제나 새로운 저자를 구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한자 번역 능력이 없다. 때문에 단순한 『삼국지』 번역이 아니라 나만의 『삼국지』 판본을 새로 만든다는 각오로 매진할 수 있었다. 선배 작가들처럼 한문 『삼국지』를 거침없이 읽어낼 능력이 있었다면 나 역시 번역이라는 간편성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원어 능력이 없었기에 오히려 삼국시대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게 됐고,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삼국지』가 무의식중에 강요하고 있는 중화주의와 춘추필법을 털어내고 나자, 흥미진진하고 광활한 소설의 세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 소설의 광야에 서서야 비로소 나는 중화주의와 춘추필법을 바탕으로 조탁된 여러 인물들의 메마른 전형성을 벗어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의 피가 도는 주인공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장정일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은 굳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편가름 하기보다 겉으로는 인의(仁義)·구국(救國)·창신(創新)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권력과 허명을 쫒는 남성적 위선의 세계에 희생당한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수많은 영웅들이 모조리 죽고 책장을 덮을 때,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삼국지』는 자신을 거울처럼 빛내며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춰 줄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보혁 갈등이 첨예하고 국외적으로는 한반도가 놓여 있는 지정학적 변화가 극심한 오늘날 신판 『삼국지』가 나오지 않고 또 읽히지 않는다면, 시대에 따라 새로운 번역본이 나와야 된다고 호기롭게 말했던 여러 『삼국지』의 저자들이나 그것을 반겼던 독자들이 서로 멋쩍은 일이 될 것이다. 애초에 내 능력으로는 가당치 않았지만, 5년 만에 탈고된 『삼국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한(韓)·중(中)·일(日), 삼국에서 나온 삼국지 가운데 이만한 『삼국지』는 없다고 자부해 본다. 그러나 신판 『삼국지』가 얼마만큼 높은 완성도를 성취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겠지만, 나는 그저 이 판본을 통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이 작가’라는 내 평소의 신념을 독자들이 직접 확인하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지』 탈고하고 나서 느낀 역사의 교훈에 대해 한 자 적고 싶다. 『삼국지』의 가장 유명한 편찬자였던 나관중이 썼듯이 역사란 “오래 나누어진 것은 다시 합해지고, 합해진지 오래면 반드시 다시 나눠지는” 것이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었던 1800여 년 전부터 아주 근세에 이르기까지,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합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언제나 영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영웅이 앞장서서 통일의 과업을 떠맡을 때마다 이름 모를 무수한 민초들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21세기를 맞이하여 통일이라는 화두를 피해갈 수 없는 우리가 똑같은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먼저 ‘통일의 대업을 내가 이루겠다!’고 외치는 자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일이다. 어떤 영웅에게도 맡기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통일에 필요한 소임을 한 가지씩 맡아 행할 때 통일은 온다. 이 말은 신판 『삼국지』와 오래 씨름한 저자가 서문에 꼭 넣고자 별렀던 것으로 이 글의 말미에 다시 한 번 적어둔다.


장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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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1-2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국지는 예전에 중국 어느 대학에서 완역한 것을 우리나라 어느 출판사에서 번역한 것과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명망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다지 새롭다는 느낌을 가질수 없었다. 오히려 비록 만화책이지만 조조를 중심으로 쓴 <창천황로>는 분명 삼국지에 대한 엄청난 시도였다고 본다. 장정일의 말대로라면 <창천황로> 역시 중화사상과 유교중심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차피 대만사람이 쓴 것이니 당연하겠지.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시도에 기대가 크지만 삼국지에서 영웅호걸로 일컬어지던 이들의 몰락이 보이는것 같아 한편 아쉽기도 하다.

파란여우 2004-11-26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장정일은 삼국지를 박살(?)낼 작정으로 사는 사람 같더군요. 이문열의 삼국지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자신만의 삼국지를 분석, 재정립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의 신간은 거의 삼국지로 도배하다시피하고 있잖습니까. 작가들은 스펙타클한 그 무엇의 과정을 거쳐야 더욱 성숙되는 것일까요?

잉크냄새 2004-11-2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장정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저 지나가는 글에서만 언뜻 보았지만 위의 삼국지에 대한 글에서 보여지는 자신감은 대단하네요. 그가 말한 삼국지를 먼저 출간한 기존의 문인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아먹을 당대 최고의 문객들일텐데, 이 글 자체는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할만큼 비판을 하네요.

미네르바 2004-11-2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읽느냐고 숨차네요^^ 전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박종화씨의 번역으로 된 삼국지를 읽었어요. 아버지가 읽고, 언니가 읽고 매일 아버지와 언니가 삼국지 얘기만 해서(혼자 왕따 당하는 기분이라) 저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구요.(그리고 나서 언니와 아버지의 대화에 나도 끼어들었죠) 그 후 이문열씨가 번역하고, 황석영씨가 또 새롭게 책을 내 놓았는데 다시 읽게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장정일씨가 새로 쓴다면 어떨까 궁금해지면서 읽어보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4-11-2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독하느라고 혼났답니다.^^ 삼국지를 다시 한번 읽을까 하면서도 쉽사리 손에 잡지 못했는데 이번에 장정일씨의 삼국지가 나오면 한번 읽어볼까말까 고민중입니다. 새로운 시각도 좋지만 영웅의 몰락은 왠지 씁쓸할것 같아요.

2004-11-27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