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이기철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

넝마 같은 삶이다. 헌옷이 된 생을 다시 펴서 주름없이 다림질하고 싶어지는 삶이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만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니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사이 없을 만큼 넝마가 된 일상의 순간에 생은 나에게만 칭얼대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어쩌겠니? 네가 아픈 것은 나도 알지만, 지금은 내가 더 아픈 것을...

시인은 지치고 쓰라린 마음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앉는다.
일순간 삶의 구체적인 얼굴들이 소란스럽게 달려든다.
시인은 그 순간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왜냐하면 내일 나는 다시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또 다시 스물 한 번 미워해야 하니까...

슬프게도 혹은 기쁘게도 내일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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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9-0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삶을 몇번을 사랑했고 몇번을 미워했는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다...

겨울 2006-09-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고 초라한 집을 쓸고 닦아 광을 내고
헌 옷도 빨아 탁탁 털어 햇볕에 널어놓고
하는 김에 생채기 투성이 생도 반듯하게 다림질 하기
뭐, 좋네요.

잉크냄새 2006-09-0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올과 몽상님 / 너덜너덜하고 쭈글쭈글한 생, 한번 다려볼까요...ㅎㅎ

마음을데려가는人 2006-10-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질하고 싶다는, 발상이라. 멋지네요.^^

잉크냄새 2006-11-0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님/ 그쵸? 시인의 발상이란 이토록 멋지고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전출처 : 프레이야 > 모든 것에는 자기 시간이 있다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안셀름 그륀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너희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이것은 인도의 한 노인이 굉장히 바쁜 백인 사업가에게 한 대답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삶의 요구와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또 이 대답에는 시간에 대한 기계적인 이해와 정신적인 이해가 얼마나 크게 대립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를 구분한다. ‘크로노스’는 계량할 수 있는 ‘시간’, 즉 세월이다. 시계와 같은 크로노미터(측시기)가 이 단어에서 나왔다. 서구인들은 계량할 수 있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우리는 분 단위로 약속을 잡고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상대가 약속시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약속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 내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계량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인생을 좁은 코르셋 안에 꼭꼭 쑤셔 넣으라고 강요한다. 크로노스의 신은 폭군이다.


인도인들은 카이로스의 신을 더 숭상한다. 카이로스는 좋은 순간, 환영받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시간의 특별한 품질을 일컫는다. 카이로스는 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순간, 내가 완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시간(여유)을 준다. 그들은 시간을 즐긴다. 그들은 시간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은 것, 즐거운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인지한다. 내가 완전히 ‘순간’에 존재한다면, 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시간은 종종 멈춘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바로 멈추어야 할 가장 적절한 때라는 것, 일을 해야 할 때라는 것, 생명을 번성시켜야 할 때라는 것,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경험한다.


구약성서의 현자는 그리스 지혜와 이스라엘 지혜를 결합한 <전도서>에서 이러한 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전도서 3,1-4)


시간을 느껴라

 

“모든 사람이 시간 죽이기쪰를 시도한다.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역설적인 내용을 담은 프랑스 격언이다. 우리는 시간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죽이면서, 죽음 자체에서는 벗어나길 원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다른 이는 자신의 시간을 헛된 일로 꽉 채우면서 시간을 죽인다. 어떤 이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피한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이 흘러가길 바란다. 그들은 시간과 있으면 시간의 한계를 인지하기 때문에 시간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계를 지닌 죽음은 우리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죽음은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에 대한 본질적인 경계선이다. 우리는 죽음을 대면하느니 차라리 시간을 죽인다. 하지만 죽음을 대면하는 자만이 시간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체험하게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의 성공도, 우리의 재산도,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도. 우리는 단지 우리의 텅 빈 손을 뻗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길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사물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차분히 살 수 있다. 우리의 일, 우리의 재산, 우리 주변의 사람들, 이 모든 것에는 각기 적당한 한계가 있다. 죽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현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생이란 결국 선물이라는 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우리의 업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생명의 시간은 죽음을 인지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죽음이 억압당하면 시간은 죽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역된 의미는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이지만, 본 글에서 그륀 신부는 ‘시간을 죽인다’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시간’과 ‘죽음’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다.

 

번역 / 이온화(이화여대 독문과 강사)   http://blog.daum.net/desertgo 에서 담아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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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인에게는 다음 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러기에 현재에 만족하고 순간을 즐길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출처 : 검둥개 >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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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가난하고 외롭고 맑고 쓸쓸하니" 라고 외우고 다녔다.
맑은 것은 높은 것이니 의미야 통한다 하겠다.

겨울 2006-08-2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사정없이 울렁거립니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감성이 아직은 남아 있어 기쁘다 할까요.

잉크냄새 2006-08-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하여도 울렁이면 그건 열아홉 순정이랍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뒤로 또 그리 가슴 저린 문장이 이어지고 있었군요.^^
 
 전출처 : 나어릴때 > [펌.하꿈] 지식인은 왜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지식인은 왜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많은 죽음을 보았지만, 건설노동자 하중근씨의 죽음만큼 억울하고, 침묵에 쌓여있는 죽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하중근씨는 집회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동료에게 도시락을 건네주러 갔다가 밀리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들리는 말을 들려주었다. 죽음에 대한 사진도,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가십거리’에 불과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작은 말들부터 알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진실은 너무나 없다.

너무나 선량해 보이는 이 아저씨의 죽음이 마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하나일 뿐이라는 듯이 무시하고 일상생활에 빠져드는 지식인들도, 그리고 시민단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신문들이야 늘 그렇다고 하지만, 이 죽음만큼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죽음도 별로 없어 보인다.

 

1. 기원 : 노무현의 서민들

불과 2년 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한국형 뉴딜을 들고 나올 때 많은 시민단체와 심지어 한겨레 신문의 기자들까지 “경제는 어떻게 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막노동꾼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 2년 전에 지금 불법파업과 불법점거라고 몰리고 있던 이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을 위해서 도로도 짓고 행정수도도 이전해야 한다고 소위 바른말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게 건설한국의 구호를 들고 나오고,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 포항에서 임산부가 유산하는 일이 벌어지는 정도로 오고가는 시민들까지 폭도로 몰리고 있는 이들의 한 가운데에는 바로 노무현의 그 “서민들”이 한 가운데 서 있다. 이 사람들이 행복하고, 이들에게도 얼마간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정부 재정자금 조기지출”을 얘기하던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지금 노무현의 서민들, 바로 그 시절의 서민들이 소위 참여정권이라는 세력의 방패 앞에 외롭게 서 있는 중이다.

그때 바로 나한테까지 “경제를 아느냐”고 몰아붙이던 그 지식인들이 노무현 정권은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척을 한다. 내 눈에는 다음 대선놀이에 또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기운이 빠진 것으로 판명된 노무현과의 선 긋기에 다름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지금 지식인들과 그 당시 노무현 정부살리기에 앞섰던 시민단체들이 할 얘기는 노무현에게 종조목을 들이대는 일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인 하중근씨의 죽음의 경위와 사인을 정확하게 해명을 하라는 요구를 해야하고, ‘경제적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이 노동자들에게 손배소를 걸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산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비록 허울만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지식인들의 요구이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지금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고 단 한 가족이라도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은 지식인의 고해성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2. 하중근씨의 죽음은 지식인의 죽음이다

한 사회는 언제나 지식인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들에게 예우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보면서, 그들에게 적절한 경제적 대우를 한다. 머리 좋고 위대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예우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약자들을 대변하거나 그들 앞에 몸을 던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예우하는 것이다.

방패의 패킹마저 던져버리고 생활인이 전투경찰 앞에 맨 몸으로 서 있게 되는 상황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에게 그리고 학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이다.

원래는 정부와 생활인 사이의 갈등에 지식인과 학자라는 하나의 안전선이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말 즉 토론으로 해결하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일들을 하라고 학자들을 만들어놓고 월급도 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마지막 1년, 끝까지 내몰린 생활인들이 “정의의 방패”임을 자처하는 전투경찰의 방패 앞에 알몸으로 내몰려서 서게 될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이미 사라져버린 목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목숨들이 이 정권의 제단에 올려질 것이다. 불 보듯이 뻔하지 않은가?

이 가운데에 지식인들이 안전지대이든 아니면 바리케이드이든, 혹은 ‘고독한 요구자’이든, 그런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

하중근씨의 죽음을 보고도 “저건 절차상 잘못된 폭도에게 벌어진 비극적 사건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짊어질 수많은 “배고프다”는 아우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달려간 고부의 민중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언제 일본 물러가라고 혹은 고종 물러나라고 하였던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가깝게는 친구에게 도시락이라도 건네주러 나섰다가 죽었던 고 하중근씨의 사건에서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연말의 농민들이 죽음까지 이들이 외쳤던 소리는 정말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배고프다”고 민중들이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하는 순간이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난의 역사였고, 지금은 고부민란 이후로 백 여년만에 생활인들이 길거리로 나서는 순간이다.

이제 그들이 역사 속에서 이 시기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너희들은 배부르니? 나는 배고픈데...”

 

3. 역사는 계속된다

연말, 여의도에 모인 농민들은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국회와 정부에 할 말이 있던 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자비를 들여서 올라왔다.

이제 더 이상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지 않는다. 포항의 건설노동자 사건은 그래서 역사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서울로 모이지 않고, 밥이라도 줄 능력이 있는 ‘창고’와 ‘관아’로 모여드는 것이다. 포스코에 모였던 건설노동자 사건이 사건인 것은, 정부에 아무리 말해봐야 혹은 국회에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배고프다”고 달려간 농민들과 포항에 모였던 건설노동자는 다른 점이 전혀 없다. 본질은 “배고프다”이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주의나 절차 혹은 정의 같은 고상한 것과는 전혀 차이가 없이 “밥 사먹게 돈 좀 줘라”는 단 한 마디였다.

2006년 8월, 대한민국은 지금 민란 전야이다. 배고프다는 백성들을 왕의 포졸들이 “집에 가라”고 창으로 밀어붙였는데 그 중에 선량한 한 사나이가 맞아 죽고, 안타깝게 구경하던 임산부가 아이를 유산하게 된 사건이 현재의 상황이다. 조선조에서도 배고프다고 하는 백성들을 초기부터 역도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고 있다. 게다가 양반집 정원이 몰상식하게 몰려든 백성들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초가삼간과 전답을 전부 팔아서 양반에게 돈을 물어줘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다음주부터 시작될 손배소의 본질이다.

그나마 전셋집이나 월세집의 보증금까지 다 뺏기고, 평생을 벌어도 1/10도 채 갚지 못할 수 십억원의 손배소를 등에 엎고 살게 될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걸인이 되거나 산적이 되는 일 밖에 더 있겠는가?

그야말로 ‘어린 백성’이 배고프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길이 엎어서 우 몰려간 것이 포항의 포스코 앞마당이다. 그 앞자리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아이가 죽어나갔는데, 민주주의? 현명한 선택, 한미 FTA?

조선조 같았으면 사림의 유생들이 줄상소를 올리고, “어린 백성을 보살펴 살피시옵소서”라고 경희궁 앞에 돗자리를 깔고 목날아갈 각오를 하고 목놓아 울고 있을 순간이다. 정승들이 덕이 없음을 하늘에 목 놓아 고하며 석고대죄를 드려야 할 상황이다.

지금은 가부장제의 수호자로 몰릴대로 몰린 서원들이지만 조선이 나라다왔을 때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 서원의 유생들은 “굽여 살피옵소서”라고 줄상소를 올렸었다.

민란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야 진정 이 땅의 역사는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단 말인가?

 

4. 측은지심과 염치지심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축생과 같다고 했다. 어쩌면 5대째 가난했을지도 모른, 철종 때부터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한 건설노동자가 죽었다. 어찌 이리도 측은지심이 없는가? 하중근씨의 집안도 가난했지만 일제를 버텼고, 6.25도 버텼고, 조국근대화도 버텨서 21세기로 넘어온 집안이다. 그 집안의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40대 자식이 죽었는데, 불법노동자라는 한 마디 낙인으로 딱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이 응당 가지게 되는 측은지심이다.

신문사의 칼럼에서 각종 매체에 자기 프로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헌으로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간만에 집에 월급봉투 좀 가지고 가는 게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소위 민주화 투사들에게 한 자리씩 주는 시대 유행 아닌가?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자칭 지식인 그리고 각 대학에서 옛날식으로 치면 대감 대우 받으면서 교수대감 노릇하는 학자들, 당신들은 지금 행복한가?

옛날로 치면 당상관 자리에서 대감 노릇하는 지식인들이여, 어찌 그리도 염치지심이 없는가! 국민들의 세금과 시민들이 모아준 돈으로 살아가는 당상관들이여, 대감들이여!

부디, 측은지심과 염치지심을 회복하고, 왕에게 상소라도 올려주시라.

포항의 노동자들의 손배소만은 안된다고, 산 사람이라도 살리자고, 상소라도 울려주시라.

백성들은 오래된 경제 가뭄에 전답옥토는 팔아버린지 오래이고, 이미 신용불량자된 지아비를 대신해 지어미들이 신용불량자가 되어있고,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 신용불량자가 된 저들의 아이들은 아예 취직도 못하고 도탄에 빠진지 오래이다.

그들이 배고프다고 몰려든 것이 측은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집이라도 팔아서 갚으라구해”라는 가혹한 손배소만이라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이런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불쌍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하중근씨의 주검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손배소 소송을 하겠다는 현 상황이 어찌 사람사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조선조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찍이 벌어진 적이 없다.

당상관들과 대감들이 왕과 대선놀음 하는 동안에 얼마나 더 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대한민국 생활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언제나 마르게 될 것인가! 민중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비정규직이든, 이들도 다 어린 백성들이고, 생활인들이다.

당상관과 대감들, 당신들을 이 사회는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사회에 백성들의 피라도 막아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들 밖에 없다.

당신들이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배고파”라고 백성들이 직접 움직이게 된다.

그걸 우리 역사에서는 민란이라고 부른다.



조실  :  초록정치연대의 우석훈 정책실장의 글입니다 (저는 우석훈 실장님 글의 팬입니다. 물론 하소장님은 말할 것도 없구요 ^^;) 2006/08/14
하종강  :  저도 방송에서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일을 "노동자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불법파업에 대한 자업자득 또는 인과응보"라고 냉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이건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는 현상입니다.

나이가 환갑이 다 된 노동자들 2천여 명이 아흐레 동안이나 회사를 점거했고, 노동자 한 명이 죽고, 임신부가 유산을 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일이 벌어지기 전과 벌어진 다음에 우리 사회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주의적으로 따져 본다고 해도 노동문제에 대한 이런 대처방식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2006/08/15
답답  :  전 국민을 때려 죽이려나 봅니다. 2006/08/15
하종강  : 

포항 건설 노동자들 천여 명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06/08/15

 

 '하종강의 노동과 꿈'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원출처는 모르겠다. 난 우석훈 실장의 글을 별로 열심히 읽지는 않는 편인데, 이 글은 여러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소한(?) 사실관계에서 내가 알고 있던 것과의 다른 부분들이 있기도 한데, 굳이 그걸 신경 쓰지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점잖고 진보적인' 지식인과 학자들도 이 글을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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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8-1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지뽕! ^^
우아, 비 온다!
안녕, 잉크냄시님~

잉크냄새 2006-08-1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 단 하루만에 완연한 가을날씨를 보이고 있네요. ^^
 
 전출처 : 기인 > 이벤트 정답 공개 ^^

넵. 식민지 시기의 불운아, 천재, 삶과 예술을 혼융한 사내. 이상. 본명은 김해경 입니다. 제 동기 한 명도 이상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천재적인 면모들에 반했다고 하네요. 정말 신선한 은유와 상징들로 그만의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요절한 천재라는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시인.

 

2.

윤동주. 잘 생긴 외모와 단정하고 순결한 시들. 연대의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는 시인입니다. 기형도와 윤동주가 있는 연대. 둘의 공통점이 어느정도 있겠지요.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섬서한 감수성으로 그려낸 시들. 그리고 또 너무 이른 죽음들...     저는 연대가 너무 좋아요 +.+ (사실 3번인가 가봄 -_-; )

3.

김기림입니다. 시인이며,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시론가. 이상의 절친한 친구여서, 이상이 죽은 후에 이상에 대한 추모시가 유명합니다. 그 시에서 이상을 쥬피터 신으로 은유한 신비로운 이미지. 그는 이상의 천재성을, 그 초월성을 잘 알고 있고 안타까워 했던 사람이지요. 구인회의 수장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이육사. 일제말기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그의 시에 나타나는 웅장한 스케일. 고등학교때까지는 윤동주를 더 좋아했는데, 대학 들어와서 읽은 이육사의 스케일은,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박력이 있었습니다.

5.

임화. 카프의 서기장. 시인이자 문학사가, 평론가. 카프의 대표적 시인이자 대표적 논객,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문학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과 시를 동시에 고민했던 시인으로, 한 단체, 한 시기를 이끈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요. 북한에서 미제의 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안경알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정말 잘생겼었어서 영화배우도 하고, 여자관계도 꽤나 복잡하다는....

6.

박팔양. 조금 어려운 문제였나요? ^^; 카프의 시인이며 또한 구인회에도 관여했던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성격이 매우 급했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시들 또한 구인회와 카프 사이를 진동하며 흥미롭게 변모해 나갑니다. 태양의 시인이라는 별명도 있지요.

7.

김억. 김소월의 스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근대시의 초창기 선두주자이며, 최초의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를 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시 지망생들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고요. 외국시를 많이 번역하기도 하고, 당시 세계어로 인공적으로 개발되었던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해서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회장이기도 했습니다. 후대에는 민요를 계승하자는 민요시 운동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8.

오상순. 공초 오상순으로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무소유를 실천한 시인이라고도 하지요. 얼마전 방영된 EBS 프로 덕택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9.

백석. 왜 뒤에 영어가 써 있냐고요? 백석은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잠시 동안 영어 교사를 했습니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요. 월북시인이라 80년대까지 해금조치가 안되어서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최근에야 우리가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음식과 관련한 빼어난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10.

주요한. ^^; 제가 관심을 갖고 논문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최종심이 끝나서 놀고 있기는 한데, 이제 또 고쳐야지요 ㅎㅎ) 한국 '최초'(?)의 근대시라는 '불노리'로 유명합니다. 이 시가 정말 압권인 부분이 여럿 있는데, 당시 한국에서 쓰여진 시들과 비교하면 그 수준 차가 엄청납니다.

수재로, 동경제국대학 예과 불법과에 입학했고, 입학한 해에 3.1운동이 발생,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얼마후 상해의 임시정부에 이광수와 함께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만들고 여기에 일제와 투쟁하는 시를 쓰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민요'를 계승하는 시를 쓰자는 민요시 운동을 주창하고 귀국 해서는 민중들의 아픔을 반영하는 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이광수와 함께 친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모하는 걸까. 이는 식민지라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과, 그 시공간 안에서 변모하게 되는 지식인들의 모습 중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 말이 길어졌네요. ㅎㅎㅎ 어쨌든 재미있는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헤헤 ^^;

이렇게 밝혀졌으니, 패러디 시 많이 올려주세요. 넘 기대하고 있답니다. 시 읽는 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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