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人性)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 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老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秋水)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사했던 귀휴 1주일의 일들도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 장의 명함판 사진으로 정리되리라 믿습니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친정부모님과 동생들께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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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읽으시는군요..흐흐^^

비로그인 2005-07-25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옥중서신. 다시 읽고 싶은 책, 1순위에 꼽히는 책입니다. 아, 그나저나 찌찌뽕! 아무래도 날씨 탓일까요? 며칠 전에 땀이 진득하게 고인 제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무심코 '존재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라는 구절을 떠올렸걸랑요. 미움받지 않으려 자주 씻고 다니려 노력은 하는디, 어째..좀..(거참, 요즘 날씨하곤ㅡㅡa)

진주 2005-07-2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와닿았어요.-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징역살이....

잉크냄새 2005-07-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드디어가 아니랍니다. 벌써 한달가량 보고 있답니다. 보고 또 보고 의미를 되새기면서...
복돌이님/ 제가 읽자마자 다시 읽고자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번 여름휴가에 다시 한번 읽을 요량입니다. 존재로 인하여 기쁘고 존재로 인하여 슬픈 인간의 모습을 참 잘 나타내는 글인것 같네요.
진주님 / 저도 여름 징역살이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외에도 유랑, 문신, 노랑머리 창녀에 관한 글도 기억에 남네요. 이 글이 책 표지에 올라있는 글이죠.
 

더 좋은 잔디를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마는 역마(驛馬)의 유랑도 그것을 미덕이라 할수 없지만 나는 아직도 달팽이의 보수(保守)와 칩거(蟄居)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마살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골짜기의 시절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의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p180~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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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저를 몰라보셔도 추천은 할께요..험험
-이젠 역마살이 두려운 파란여우-

Laika 2005-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마.살.......음.....

꼬마요정 2005-06-23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역마살 하니까... 뜬금없게도... 도화살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같은 살이라서? 살... 상충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아~ 주제에서 한없이 비켜나는 나의 한심함...흑흑

플레져 2005-06-2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마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여요, 제겐.
역마살이 부족해서 뭘 못하고 있단 느낌...ㅎㅎㅎ

chika 2005-06-2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괜찮아요. 저는 심각해지려다가 님 댓글보면서 '물렁살'을 떠올렸네요. ㅎㅎ
바다로 나와 버린 물.... 좋은 글 감사. ^^

잉크냄새 2005-06-23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인데요...
역마살에 이리도 애틋한 감정과 사연 한조각씩 품고 계실것 같은 모습들이라니요...^^

2005-06-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6-2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6-27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8800

이렇게 하는 거 맞겠죠? 저도 서재지수 잡아주신 거 신기해서 뭘 좀 잡아보까... 둘러봤어요. 큭큭. 출근하기에 이보다 기분 우울한 날도 없겠네요. 비는 좍좍 내리고,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깔렸고, 교통은 꽉꽉 막힐 테고, 음 어쩌면 월요일엔 회의도 있을 수 있겠고... 아이 그림책에 그런 말이 있어요. Monday가 Runday 라나요. 일 주일 열심히 뛰라는 날로 받아들이자구요. ^^


잉크냄새 2005-06-28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저도 사람들의 바로 그 질문이 두려워 미리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나저나 어서 쾌차하시어 또 자주 뵈어야 할텐데요.^^
이안님 / 가끔은 눈에 와서 확 박히는 숫자가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 잡은 서재지수 10000 이란 숫자도 눈에 와서 확 박히던걸요. Runday....화이팅입니다.
 

억새의 꽃은 흩어져 멸렬하기 위하여 피어나는 꽃이다. 그 꽃들은 죽을 때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바람 속에 흩어진다. 추락하는 꽃들의 내면에는 영광과 치욕을 함께 소리지르는 아우성이 들끓고 있을 테지만, 산화하는 꽃들의 내면에는 생애의 무게가 잘 빻아진 마른 뼈의 가루들로 들어 있을 것 같다.

- 김훈 < 풍경과 상처> p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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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3-2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른 겨울 아침에 보았던 억새가 생각나요...

파란여우 2005-03-2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오늘 책 주문했습니다.
님에게 투병중인 장영희 교수의 글이 많이 읽혀졌으면 싶군요.
항상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icaru 2005-03-2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 풍경과 상처> 이 책...님에게...큰 영감이 되어주는 책인듯해요...
억새...일명 으악새...맞남요? (잘못 아는 척 함..이거이거 뻘짓인데........) 이 풀에도 꽃이 있나봐요...

잉크냄새 2005-03-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전 억새하면 정선 민둥산이 떠오릅니다. 가을 산행을 생각하고 간 정선에서 민둥산 입구는 찾지 못하고 오히려 정선 팔경에 매료되어 차로 하루종일 돌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파란여우님 /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영희 교수의 글은 영시 번역을 통해서 처음 접했습니다. 아름다운 글 읽을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복순이 언니님 / 영감도 영감이지만 너무 어렵게 쓴것 같아서 읽는 동안 힘들었습니다. 억새꽃이란 말은 저도 처음 들었답니다. 근데 으악새는 뻐꾸기 아닌가요? 아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

진주 2005-03-3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새는 복순이 언니님의 말씀이 옳은 듯 아뢰오.

미네르바 2005-03-3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새꽃은 역시 민둥산인 것 같아요. 저는 작년에 가 보았는데,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곳이에요. 김훈의 <풍경과 상처>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지요? 저도 오래 오래 읽었어요. 여전히 가끔씩 또 펼쳐 보는 책이구요.

잉크냄새 2005-04-0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무식한 저를 용서해주시길...^^
미네르바님 / 예전에 보내주신 김훈의 < 풍경과 상처 > 를 이제야 다 읽었네요. 읽고 다시 앞으로 돌려 읽고 그래도 너무나 멀리 있는 글같이 느껴집니다. 시간이 더 흐른후 다시 한번 바라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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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3-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틱 낫한 스님의 책에 수록된 사진과 같은 풍이군요. 저 얼굴들중 하나가 나의 얼굴이었으면 싶습니다. 아니, 저 얼굴을 비슷하게라고 닮고 싶은 소망입니다.

잉크냄새 2005-03-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편안하고 욕망의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그런 평안한 얼굴... 닮고 싶네요.

icaru 2005-03-1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요~

잉크냄새 2005-03-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은 저 얼굴을 닮아가시는것 같습니다.
 

시는 시만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시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언제나 쓸쓸해진다. 그것은 거의 생리적인 것이다. 시는 알몸의 시만으로 노출되어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산문으로 분해될 수 없다. 시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시는 언어의 의미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고 감싸고 또 그것과 혼연 일체가 되어 있는 향내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시는 벙어리 소녀의 눈빛과 같은 것이다. 시가 전달하는 것은 하나의 침묵이다.

<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 p13~14

언젠가 나는 시가 전달하는 것은 벙어리 소녀의 눈빛과 같은 침묵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논리의 손가락 사이를 새나가는 모래라고 했다. 무력한 언어가 잉태하는 안타까움이라고 했다.
참된 예술작품은 말하지 않는다. 시는 시만으로 직립해야 한다. 하늘의 높이에서 얼어 있는 햇살의 폭포같이 수직으로 혼자서 서야 한다.

<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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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3-0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가장 어려운 장르입니다.
시인은 가장 먼저 울며 가장 나중까지 우는 자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침묵의 소리를 읽는 일은 내면을 읽는다는 의미죠?
시는 시 만으로 직립해야 한다는 말에 200% 공감!!!

잉크냄새 2005-03-08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뭔 소린줄 모르고 읽고 있답니다. 시는 시만으로 직립하듯이 제 속의 시로만 살아나는 그런 시들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