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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고


정확히 10년 전이다. 한국역사의 한 장에 기록을 남겼을 1997년은 IMF의 해였다. 그 해 이후로 나라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내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것이 한묶음으로 꿰어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많은 징후가 있었다고 한다면…… 내 생의 일부는 그 징후에 붙들려  있었다. 1997년. 나는 제대를 했다. 집으로 와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신문배달. 부산의 조간 국제신문이었다. 날마다 신문의 1면을 건성으로 훑으며 자전거 바퀴를 돌렸다. 11월의 어느 날 IMF라는 단어가 신문 1면에 등장했을 때 날마다 이 괴질과 같은 슬픔의 전염병을 집집마다 던져 넣으며 나는 그 의미를 몰랐다. 그저 자전거 페달을 전속력으로 밟으면 밟을수록 가야 할 어딘가에서 내가 그만큼 멀리 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갈 곳이 멀리/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빗속으로/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멧새 한 마리/저 全速力의 힘/그리움의 힘으로/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다시 생각해도/나는/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바깥」중에서


며칠 뒤 아버지가 나가는 공장이 도산을 했고, 거의 동시에 어머니가 나가는 공장이 도산을 했다. 나는 다리를 다쳤고, 자퇴를 했고, 집을 나왔다. 부산 사하구의 반지하 자취방과 그 주변 다세대 주택에는 자퇴한 친구들이 간혹 있었다. 뜬금없이 뇌호흡 강사가 되어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김영삼 정부와 삼성의 타협의 결과라고 얘기되던 부산 삼성자동차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방세를 내고 조금씩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어서면 내 눈높이에 한 뼘 높이의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창살 밖으로 재래시장의 아침이 보였다. 아니 저마다의 일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발목이 보였다. 아니 발목들 건너편 벽에 세워진 생선궤짝들이 보였다. 아니 그 비린내가 훅하니 느껴졌다. 그날 나는 내가 그들의 바깥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들을 바깥에서 바라보았다. 그 전 내가 아직 어머니의 품안에 있었을 때 나는 기꺼운 풍경이었다.


어미 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젖 물리는 개」중에서


나 역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젖 물리는 개’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돌아갈 수 없는 자의 슬픔을 담고 있다. 그 슬픔은 ‘바깥’에 놓인 모든 인간이 공명하는 슬픔이다. 바깥에서 시인은 한결같이 슬픔을 얘기하고 돌아갈 안을 그리워한다.

시집의 첫 시는 이렇게 노래한다.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思慕-물의 안쪽」중에서.

시인에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이야말로 시로서 이루어야 할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의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이 나왔을 때 나는 「호두나무와의 사랑」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 시는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고 자책한다.

이 근원적인 슬픔을 품은 채 시인은 세상을, ‘어긋나는 감각의 면 위를 물뱀처럼 오래 걷는다’(「나는 오래 걷는다」중에서). ‘알고도 모르는 척 속은 척 받아넘기’(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중에서)기도 하면서.

그래서 시인은 ‘외따롭고/생각은 머츰하다’ 늘 누군가 ‘와서 울고 간다’(「누가 울고 간다」중에서).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자루」중에서)으며 시인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가재미」중에서).

이쯤 되면 나는 시인을 바깥에 선 슬픔의 동반자라고 말한 셈이다. 시인의 슬픔은 너무나 근원적이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어서 치유할 수도 없지만 슬픔에 빠져 쉬 넋을 놓게 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고해로 보고 중생의 아픔을 큰 슬픔으로 보듬어 준 석가가 깨달은 자가 되었듯이, 슬픔을 아는 슬픔을 들여다보는 눈에는 지혜가 깃드는 법이다. 지혜는 ‘그맘때가 올 것이’(「그맘때에는」중에서)라는 걸 알게 하고, 인간에게 ‘3초씩 5초씩 짧게’ 지나가는 시간이 나비에게는 ‘보다 느슨한 시간’(「극빈」중에서)이라는 걸 알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성찰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에 관한 시인의 성찰이 「그맘때에는」과 「극빈」에서 돋보인다면 공간에 관해서는 ‘수평’이라는 화두가 돋보인다. 그것은 해설 ‘극빈의 미학, 수평의 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니 잠시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 시의 화자들은 그 수평으로부터 어떤 사소한 우주적인 동력을 발견한다. “평면의 힘”“무서운 수평”“평면적으로 솟는다”와 같은 역설적인 표현들 속에서, 수평은 수직의 에너지와 움직임을 전유한다.  -127p에서


과연 시인은 슬픔을 지혜의 옆 자리로 옮겨놓을 줄 아는 존재임을 알겠다.

이제 시집 감상을 마치도록 하자. 다시 1997년 이후 즈음을 떠올려 본다. 1년 만에 나는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얼마간의 학비를 장만하고, 부산을 떠나 경남에 보금자리를 옮겨놓은 가족들과 재결합할 수 있었다. 그것이 풍경 속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 터이지만, 노모를 만난 기쁨을 잠시 떠올려 볼 수는 있겠다.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老母」중에서)

그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와 혼자서 직장을 얻어 살다가 작년에 아리따운 여인과 결혼을 했다. 이제 나도 ‘젖 물리는’ 부모가 되는 것일까?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으며 반지하 주택의 창문 앞을 지나는 발목들과 맞은편에 놓여 있던 생선궤짝의 비릿한 감각을 훅 느껴본다. 바깥과의 그 마주침!


나와 오리와 세 마리 쥐가/눈이 마주쳤다 오오 이런!(「오오 이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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