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릭 유니버스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18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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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는 물과 공기처럼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우리의 현대적 삶의 경이는 대부분 전기 및 전자공학 기술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기라는 것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내고 길들이게 된 것은 길고 긴 인류 역사 중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성과이다. 그리고 역시 놀랍게도 그 짧은 기간 동안 발전한 기술은 순식간에 대중의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 난해하고 복잡한 세계로 질주해버렸다. 눈부신 속도로 발달하는 이 기술의 근간에 대해 늘 궁금증을 가져왔으나 요령부득이었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보더니스의 쉽고 즐거운 안내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전기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은 전보, 전화, 전구, 전동기, 무선통신과 레이더, 컴퓨터로 이어지는 전기와 관련된 물건의 발명을 차례로 다루고 (물론 중간에 순수과학적 발견에 대한 언급도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인체의 통신수단인 신경계 역시 전기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더니스의 전작인 <E=mc2>을 통해서 인물 중심으로 과학사를 펼쳐내는 그의 솜씨를 익히 접했지만 이 책에서 그는 더욱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전기의 역사의 각 국면마다 ‘순수한 열정으로 독창적인 성과를 내놓은 과학자들 vs. 공명심이나 이기심, 아집과 파렴치함으로 남의 성과를 훔치거나 망친 사기꾼들’을 등장시켜 선명한 흑백, 선악 구도로 인물들의 대결을 펼쳐나간다.

맨 처음, 전신(전보)의 탄생에서는 열정적인 실험가이자 원만하고 존경받는 인격의 소유자인 조지프 헨리와 그의 발견을 가로채 특허를 내고 큰 돈을 벌지만 평생 편집증과 소송에 시달렸던 새뮤얼 모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화의 발명에서도, 청각장애자인 미래의 아내 메이블에 대한 사랑이 동인이 되어 전화기를 발명하는 알렉산더 벨과 웨스턴 유니온의 후원으로 벨의 발명품을 살짝 개선해 업적을 가로채려고 했던, 기술용병에 지나지 않던 토마스 에디슨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에디슨은 시작은 미천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예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불굴의 투지로 전구를 발명해냄으로서 그의 독창적인 발명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제 자리를 찾았다. 보더니스는 전신, 전화가 정보를 빠르게 보낼 수 있게 되자 지구가 축소되었고, 전구의 발명으로 밤이 축소되었다고 멋지게 표현한다.

그에 이어 모든 움직이는 기계에 들어가는 전동기의 발명도 설명한다. 전동기의 원리에 대한 여러 설명을 접해봤지만 보더니스의 ‘가짜 토끼를 쫒는 그레이하운드’라는 비유만큼 알기 쉽고 명쾌한 설명은 처음이었다. 전동기는 엘리베이터의 발명을 낳아 오늘날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해냈고 가전제품이 주부와 하인의 일손을 덜어 만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적인 세상으로 나가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전기 관련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며 세상을 바꾸어놓는 와중에 한편에서는 전기의 정체와 원리에 대한 과학적 발견도 조금씩 진보해나갔다. J. J.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고 그에 앞서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기의 파동성에 일찍이 눈을 떴다.

기술과 과학이 맞물려 빚어낸 흥미로운 사건 중 하나가 대서양 바다 밑으로 구대륙과 신대륙을 연결하는 전선을 놓는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의 사업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선악대결이 벌어진다. 패러데이의 ‘역장’의 존재를 믿고 설계의 잘못을 지적했던 윌리엄 톰슨 vs. 아집과 자존심으로 원래의 설계를 밀고 나갔던 에드워드 화이트하우스의 대결이다. 물론 처음에는 화이트하우스의 안 대로 밀고나가다가 말아먹고 결국 톰슨의 제안대로 다시 추진한 끝에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선악구도까지는 아니지만, 보더니스는 가정에 공급되는 전기의 단위, 즉 전압에 볼타의 이름을 따 볼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못내 아쉬워한다. 그의 패러데이 사랑은 <E=mc2>에 이어서 이 책에서도 절절히 이어진다.

그 다음 전기의 파동성이 더욱 확장되어 무선통신 기술을 낳는 단계로 넘어가는데 이 부분의 처음인 6장은 다른 장과 다른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발전시켜 파동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한 과학자 헤르쯔의 굵고 짧은 삶을 그의 일기와 편지, 연설과 그의 사후 추도사를 교차로 엮어 넣어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숙연한 감동이 밀려오는 이 부분을 읽고서 보더니스의 문학적 기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mc2>에서 박진감 넘치는 원자폭탄 개발 전쟁이 펼쳐졌다면 이 책에서는 레이더 전쟁 이야기가 등장한다. 근대와 현대의 과학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테마일수밖에 없는 듯 하다. 독일이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영국해를 건너 영국마저 함락시키기 일보직전, 로버트 왓슨 와트와 윌킨스가 개발한 레이더(체인 홈 레이더)가 영국 공군인 RAF에 큰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고 독일이 한 수 위의 단파장 소형 레이더 기술을 개발해냈다. 여기에서 찰스 콕스를 비롯한 영국 공수부대 대원들이 프랑스 브루네발 기지의 독일군의 레이더(뷔르츠부르크라고 불리는)를 빼앗아 오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무용담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들이 훔쳐온 레이더를 조사해서 장단점을 분석해낸 결과는 연합군 측의 가장 악랄한 사령관 아서 해리스에 의해 함부르크 민간인 대공습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이야기의 흐름이 -연합군과 독일의 첨단 무기 개발 경쟁, 연합군 측 특수부대원들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큰 공을 세우는, 아슬아슬 스릴 넘치는 무용담, 그에 의해 연합군측이 승기를 잡게 되지만 결국 연합군측의 한 방이 엄청난 규모의 비극적인 민간인의 희생을 낳는 결과……- E=mc2의 원자폭탄 이야기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을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을 분수령으로 인간의 역사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듯 전기의 역사 역시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전자의 비물질성이라는 현대적인 물리학의 관점이 도입되게 되고 그것은 컴퓨터, 트랜지스터, 마이크로칩과 같은 도구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 부분에서부터는 그 기술과 이론의 원리를 이해하며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더니스도 난해한 과학적 원리보다는 역사와 인물 위주로 소개해나가고 있다.

범용 기계, 즉 컴퓨터의 원리를 고안해낸 앨런 튜링의 짧고 애잔한 삶에 한 장(9장)을 할애하고 있고, 그 다음 10장에서는 튜링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선악구도가 펼쳐지는데 실리콘의 전자 흐름을 조절하는데 성공해서 트랜지스터를 만들어낸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 vs. 그들의 상관으로 그들의 공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한 윌리엄 쇼클리의 대결이다. 그들은 모두 벨연구소에 몸담고 있었는데 쇼클리의 횡포로 브래튼과 바딘 모두 연구소를 나가고, 쇼클리 자신도 벨 연구소를 떠나 캘리포니아의 한적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자신의 연구소를 차렸다. “쇼클리는 거대한 원심분리기가 되었으며,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혁신을 퍼뜨리는 기계가 되었다. 그의 명성에 끌렸던 똑똑한 이들은 그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깨닫고 나자 서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 유대를 바탕으로 쇼클리의 회사를 빠져나와 근처에 자신들의 회사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인 것이다. 그리고 마이크로칩을 발명한 로버트 노이스나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도 쇼클리에게 이끌렸다 떨어져나간 인재들에 포함된다.

마지막 11장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우리의 삶에 작용한 전기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몸 안의 전기의 작용, 뇌와 신경계의 신호전달에 대해 설명한다. 전신, 전화에서 오늘날 무선통신에 이르기까지 전기가 통신의 수단으로 위력을 발휘했듯 우리의 신경계 역시 전기적 원리로 신호를 전달한다. 이 경우 직접적인 전자의 흐름이 아니라 전기력을 띈 분자, 즉 이온의 전위차를 이용해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오징어의 신경세포를 연구해 이 원리를 발견한 앨런 호지킨과 앤드류 헉슬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경세포 말단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건너뛰는 부분의 신호전달을 맡은 신경전달물질을 발견한 오토 뢰비의 업적을 다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멋진 구성과 뛰어난 서술, 무엇보다 재미있고 재치 넘치는 유쾌한 책이다. 후반부의 무선기술, 컴퓨터, 실리콘 등의 원리에 대해서는 수박 겉핡기 식으로 너무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서 조금 아쉬웠지만, 책의 분량과 의도를 고려할 때 그 정도로 다룰 수 박에 없는 내용이지 싶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책의 부록에 실려있는 “더 읽을거리”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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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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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카메론 디아즈가 인터뷰에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기자에게 “그런데 E=mc2이 무슨 뜻이죠?”라고 물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메론 디아즈와 같이 무수히 들어는 봤지만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이 공식에 궁금증을 품어왔을 것이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공식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에너지와 질량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며 빛의 속도의 제곱(c2)이라는 어마어마한 상수의 곱을 통해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보더니스는 =를 길게 늘려 ===============로 묘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변의 작은 (실로 미세한 수준의) 질량이 이 긴 = 기호의 터널을 지나면서 어마어마하게 큰 (지구와 인간 문명을 낳은 생산력과 그것을 모조리 없애버릴 파괴력을 지닌) 에너지로 변환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명쾌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 책은 과학책이라기보다는 과학사 내지는 E=mc2이라는 공식을 둘러싼 미시사처럼 읽힌다. 책에 등장하는 각 이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개요 정도를 묘사할 수 있지만 사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왜 그 답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수학적 증명과 계산 없이 와 닿기는 어렵다. (그것이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 사이의 간극이 아닐까 한다.) 과학자들이 마술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지만 거기에 어떤 트릭이 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E=mc2을 비롯해서 관련된 어렵고 복잡한 이론과 원리들을 보더니스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로 그 실루엣이나마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맨 처음 이 공식의 각 요소인 E(에너지)와 m(질량)과 c(속도, 빛의 속도) 각각에 얽힌, 궁극적으로 이 공식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한 이론들과 그것을 발견한 중요한 과학자들, 패러데이(전자기력), 라부와지에(질량보존), 맥스웰(파동), 뢰머(빛 속도 측정), 에밀리 뒤 샤틀레(에너지가 속도의 제곱과 비례) 등의 재미난 일화를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줄곧 이야기의 흐름 곳곳에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

그 다음 원자의 세계-양전자, 중성자, 원자 모형등- 그리고 방사성 원소에 관련된 발견들을 다루면서 러더퍼드, 가이거(방사능 계수기), 채드윅(중성자 발견), 페르미(중성자 속도 늦추어 핵에 들여보내기), 퀴리부인(방사성원소)이 소개된다. 그리고 우라늄 핵의 분열(nuclear fission)이 일어나는 과정을 계산으로 입증해낸 리제 마이트너의 이야기는 한 장에 걸쳐 자세히 소개된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연합군의 원자폭탄 만들기 경주가 4개 장에 걸쳐 드라마처럼 묘사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지휘하는 독일의 연구팀,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가 지휘하는 로스앨러모스 팀의 진척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전개된다. 이 부분은 정말이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데, 특히 독일 연구팀에 중수를 공급하는 노르웨이의 베모르크 공장에 대한 연합군 특공대(노르웨이 레지스탕스로 구성된)의 활약은 너무너무 재미난다. 깊은 산속 호수로 가로막혀 지리적으로 고립된 중세의 성과 같은 공장에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고 몇 주에 걸쳐 잠입해서 폭탄을 설치하고 유유히 도망치는 크누트 하우켈리트와 노르웨이 특공대원들! 그뿐이 아니라 하우켈리트는 그 다음 복구된 공장에서 생산한 중수 탱크를 호수 건너 운반할 때 운반선을 다시 한 번 폭파시키는 것도 성공을 거둔다. 이 때 배에 탄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놓고 갈등하고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빼앗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안중근 의사 비롯한 우리나라의 항일 투사들이 떠올라 울컥 하기도 했다.

이렇듯, E=mc2 공식과 그것의 발견이 낳은 가장 극적인 사건인 원자폭탄 이야기에 상당한 장을 할애한 후, 보더니스는 그 공식이 단순히 인간의 손으로 기술에 적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이 우주의 탄생 및 작동 원리임을 보여준다.

태양이 수소를 연료로 하는 거대한 용광로이며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지구상의 만물을 빚어냈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양의 구성성분의 2/3가 철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던 20세기 초, 태양광 스펙트럼을 다시 해석해 90% 이상이 수소임을 밝혀낸 여성 과학자 세실리아 페인이 주류 과학계로부터 핍박받고 거부당하고 무시되고 그 공마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 후 프레드 호일이 페인의 발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별의 일생과 우주 생성에 대한 이론을 내놓는다. 원자폭탄 제조 과정에서 플루토늄의 폭발성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내파’원리를 별에 적용했던 것이다.

호일이 예언한 별(항성)의 일생주기를 마치고 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발견한 사람은 인도의 과학자 수브라마냔 찬드라세카르로 그는 블랙홀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다. 그의 가설은 페인과 마찬가지로 배척받았으나 차후 관찰에 의해 입증되었다.

보더니스가 설명하는 우주의 역사는 맨 처음 엄청나게 조밀하고 압축된 지점, 그러니까 모든 에너지(방사선)가 E=mc2 공식의 우변에 몰려 있는 상태로 시작되어 그것이 차츰차츰 에너지로 변환되어 궁극적으로 모두 좌변으로 이동하는 길고 긴 여행이다.

여기에서 E=mc2의 이야기는 마감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다시 아인슈타인에 대한 에피소드, 그의 상대성 이론의 실험관측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 역시 보더니스는 아인슈타인의 불운한 제자 에르빈 프로인틀리히의 희비극적 에피소드로 재미있게 장식하고 있다.

유명한 보더니스의 책을 이제야 집어들게 되었는데, 과연 명성답게 과학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고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그는 뛰어난 과학해설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통찰과 서술 능력은 일류 소설가 수준이 아닌가 싶다. E=mc2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마치 커리커쳐와 같이, 가장 인상적인 특징만을 잡아서 간결하게,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난한 제본공의 신분으로 험프리 데이비 경의 눈에 들어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지만 결국은 시샘과 배반으로 상처받은 마이클 패러데이. 유복한 환경, 매력, 뛰어난 머리를 모두 타고 나서 당대의 지성인 볼테르와 평생 사랑하고 교류하며 짧은 생애를 마칠때 까지 과학을 후원하고 과학연구에 몰두했던 에밀리 뒤 샤틀레. 로댕과 까미유, 바렌보임과 뒤프레 커플을 연상시키는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의 관계. 비범한 천재로 로스 앨러모스의 원폭 개발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자신의 연구 커리어와 일생을 망쳐버린 로버트 오펜하이머. 자유로운 영혼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 천재의 필수요건이라고 말해주는 듯 한 아인슈타인, 프레드 호일의 어린시절. 여성이기에, 인도인이기에 굉장한 업적을 내놓고도 배척받고 무시당했던 세실리아 페인과 수브라마냔 찬드라세카르.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 책에 펼쳐지고 있다.

책의 1/4 가량을 인물에 대핸 개요/미주/김제완 교수의 강연록 등의 부록이 차지하고 있는데 부록도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본문 중에 미주 번호가 달려있지 않아서 쭈르르 읽고 나니 뒤에 미주(notes)가 들어있어서 나중에 따로 읽었는데 따로 읽어도 괜찮을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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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09-12-1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외국에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들어오셨나 봅니다. 저의 독서 이력에 많은 도움을 주신 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가끔씩 이네파벨님의 번역한 책들은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네파벨 2009-12-1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란님, 쓸쓸한^^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미국 1년 다녀오고 또 들어와서 몇달 바로 일하느라...서재는 폐가가 되었죠. 이제 모처럼 일 마감하고 시간이 생겨서...그동안 못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었지만 까먹은 책들....좀 읽어보려고 한답니다.

알라딘에서 자주 뵈어요~ 감사합니다.
 
꿈꾸는 기계의 진화 - 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
로돌포 R. 이나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북센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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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했듯이 뇌는 실재 묘사기이다. 그 계가 닫혀있다. 따라서 아주 다르다는 말의 의미는 그게 '모든 것(everything)'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뇌 활동은 다른 모든 것을 위한 은유(metaphor)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현실세계의 가상 모형을 건설하는 꿈꾸는 기계이다. -144쪽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동물에게 주관적 느낌(감각질)이 있다는 걸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될 때까지는 주관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지를 입증할 책임은 동물의 주관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나는 가장 원시적인 진화 수준에서조차, 신경계는 모두 주관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168쪽

'나'는 언제나 굉장한 수수께끼였다. 나는 믿는다. 나는 말한다. '나는' 다음에 무엇이 오든. 그러나 물리적인 '나'라는 존재란 없다는걸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저 특별한 정신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나' 혹은 '자아'로 부르는 것은 어쩌다 생겨난 추상적 실체에 불과하다...(중략)....그래서 자아란 무엇인가? 자,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 유용한 구조이고 복잡한 고유벡터(eigen vector)이다. 오직 계산된 실체로만 존재한다.-188쪽

색깔, 냄새, 맛, 소리와 같은 감각의 2차적 특질들은 본질적인 중추신경계 의미론(semantic)의 발명품 혹은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189쪽

인간이 학습한다는 사실은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그러나 특정 사람이나 동물이 학습하는 내용은 발달 도중에 경험한 수많은 필요와 사건, 즉 개체의 삶이라 불리는 풍요로운 꿈의 산물이다. 개체의 삶은 즉각적이며 생물학적 유산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252쪽

우리는 잘 배선된 뇌와 그 유전적 배선에서 유도되는 놀랄만한 양의 지식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는 신경과나 정신과 의사와 같은 직업이 있다는 사실로도 쉽게 증명된다. 그런 직업이 있는 이유는 사람의 뇌는 유사하므로 유사한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서 유사한 증상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식을 습득한 사람도 완전히 무식한 사람과 신경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는 뜻이다.-253쪽

이러한 관찰은 단세포 안에 원시적인 방향의 지향성, 즉 원시 감각 기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어떤 능력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감각질이 그러한 원시 감각 기관이 전문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거기에서 출발하여 더 고등한 유기체가 보여주는 다세포의 '공동 느낌' 현상까지 이동하는데에도 개념적으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다면, 감각질은 근본적으로 단세포의 성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다는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301쪽

모방은 같은 행동의 공통성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동물의 내부 상태와 지각되는 행동 간의 연상을 일으킨다. 나는 이렇게 느낄 때 이것을 한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아마 너 역시 내가 그 행동을 할 때 가졌던 느낌이겠구나. 그러므로 무한히 긴 시행착오의 시간을 거쳐 유기체간에 의미가 진화된다.-338쪽

생물학이 물리학과 별개라고 믿을 엄밀한 이유가 있을까? 지난 1백여 년에 걸쳐서 수집된 과학 지식은, 놀랍도록 복잡한 생물학이 물리학이ㅡ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따라서 의식은 물리적 유기체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쩌가 그것을 생물학 체계라고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중략).....내게는 그것이 생물학의 살아있음 대 물리학의 죽어 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능적 구조를 가진 물리적 자유도의 문제로 보인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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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3-13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네파벨님, 먼 곳으로 가신담서요!
기획회의 글, 이번엔 다른 경로 통해 또다시 저한테 와버렸네요.
근데 이네파벨님이 너무 좋은 글들을 많이 쓰셨던지라... 주눅이 들어서... ㅠ.ㅠ
저는 전문가도 아니고 과학에 대해선 완전 문외한인데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우선 한번만 써보겠다고 했어요.
근데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당황스러워 하고 있답니다.

딸기 2008-03-18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이네파벨님, 결국 저 못하겠다고 전화했어요... 포기했어요
담달 출장도 있고... ㅠ.ㅠ 욕심내지 않으려구요 ^^
 
꿈꾸는 기계의 진화 - 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
로돌포 R. 이나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북센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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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의 정체 내지는 심신문제는 오늘날 과학계의 가장 뜨겁고 흥미로운 논쟁거리 중 하나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데카르트가 인간의 마음은 물리적인 몸과 다른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시대의 관점을 통합한 이래로 모든 것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물리적 실체로 환원될 수 있다는 현대 과학은 그 "다른" 실체의 영역을 침범하고 정복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원론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과학적 탐침으로 조사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 이외에 "뭔가"가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계에도 널리 퍼져있다. 이원론자들의 마지막 보루, 물리주의자들이 채 탈환하지 못한 마지막 영토가 바로 "감각질(qualia)", "주관성(subjectivity)", "지각력(sentience)" 등이 아닐까 싶다.

내가 오래 전에 번역한 책 <꿈>의 저자, 철저한 물리주의자인 하버드의 꿈 연구가 앨런 홉슨은 그 감각질이니 뭐니 하는 유령을 몰아낼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저작으로 바로 이 책, 로돌포 이나스의 <I of Voltex>를 추천했다. 그때도 원서를 구해서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니 반갑고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책은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물론 이 책이 감각질 논쟁을 한방에 해결해버렸다고 판정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의미 심장한 것은 '의식'이나 '감각질'이 진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갑자기 출현 내지는 '창발'한 것이 아니라 액체 속에서 헤엄치며 "운동"하는 단세포의 수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세포 생물도 원시적인 감각력, 자아감, 감각질을 갖고 있다는 주장 역시 도발적이라고 할만큼 과감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유령을 쫓아버렸다고 하면서도 의식은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나 수학자, 물리학자, 컴퓨터과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경학자 라마챈드란같은 "생물"학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의식(감각질, 주관성)이 단세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 동물에게 의식이 없다고 결론 내리려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는 말.....이런 대목을 마주하고 나는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소년의 말을 들은 것만큼 후련했다.....그것은 바로 내 맘속에 있던 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나스 외에 오직 에른스트 마이어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진화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마이어는 "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의식으로부터 진화했다. 의식이 인간 고유의 속성이라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 그 정당함을 입증할 길이 없다.....(중략)....그와 같은 의식의 징후를 동물계에서 얼마나 “아래로” 추적해 내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 징후는 일부 무척추동물, 심지어 원생동물들이 보이는 회피 반응으로 거슬러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이나스와 정확히 동일한 통찰이다. 단세포 생물의 회피반응이 인간의 의식으로 진화되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은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론이나 "생물철학"에 관련된 글들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나스는 10장 "감각질, 감각의 결합이 만든 보고"라는 한 장을 할애해서 이 철학적 논쟁을 본격적으로 펼쳐놓는다. 이 장에서는 마치 물리주의자들에게 넘지 못할 금을 그어놓은 듯한 그 유명한 차머스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주장이 인용되어 있다. 사실상 이 장에 펼쳐진 이나스의 논리전개는 아....주....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이 장에서 효과적으로, 명명백백, 논리정연하게 차머스를 논박했다기 보다.....이나스는 자신의 주장을 약간은 조심스럽게 여기 저기에 불쑥불쑥 간접적으로 개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이 책을 전반적으로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심신논쟁에 대한 물리주의적인 관점에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책은 하나의 세포 수준에서 시작해서 진화론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발생학적으로 의식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신경계가 진화 및 발달해온 과정을 고찰해나가고 그것은 감정, 언어, 추상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이나스는 "진화적으로 사고는 내면화된 운동"이라고 말한다.

운동하는 생물에게는 외부를 감지하고 예측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예측의 중심이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다세포 생물이 출현하면서 세포간 소통이 필요하게 되어 신경계가 발달하게 되었다. 신경계(뇌)가 만들어내는 내면세계(사고, 의식, 추상)는 외부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동일한 조직원리에 따라 창조된다. 따라서 운동 실행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운동 조절에 따르는 연산 부하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운동의 불연속성, 동기화, 과잉완성, 고정행위패턴(FAP) 등의 원리는 의식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나스는 닫힌계로 작용하는 우리의 뇌는 외부의 자극을 재료 삼아 가상현실(꿈)을 엮어내는"실제묘사기"라고 주장한다.

책의 전반부가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생리학적 증거들을 종합하고 자세히 설명했다면 후반부는 인간의 마음을 둘러싼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쟁들을 다룬다. 예컨대 웹의 발달로 "집단마음"이 형성될 수 있을까? 생물이 아닌 존재(예컨대 컴퓨터나 기계)도 의식을 가질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내보인다. 이 부분은 사실 앞부분에 비해 약....간....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지만 그래도 보석같은 통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각론에 있어서는 "?"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있어도 총론에 있어서는 100% 공감한다. 그는 "집단 의식"이나 "비생물 의식"에 대해 원리적으로, 잠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본다. 단지 지금 현재의 "웹"이나 "디지털" 방식의 한계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재미있는 점은 기계의식의 기반이 꼭 우리의 뇌와 아주 비슷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무척추동물인 두족류의 뛰어난 지능을 예로 들면서...하지만 "운동성"은 근본적인 필요조건이기때문에 컴퓨터만으로는 안된다..로봇과 같은 형태여야 한다.....는 견해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연구테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학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이 났지만.....사실 '운동성'이 의식의 기원이라는 그의 논리에 충실한 결론인 셈이다. )

아무튼 이 책에 제시된 그의 모든 주장과 결론은 내게는 완전히 현실적이고, 성숙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공감만땅이다.

그리고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는....어찌보면 전공 교과서처럼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생리학적, 물리학적 설명들을 친절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요점을 다시 강조해주고, 군데군데 우아한 유머와 시적인 표현을 곁들여 강의에 흥미를 유발하는 매우 효과적인 선생님이다. 심신문제라는 철학적 주제에 이끌려 이 책을 손에 들었지만 이 책은 그 토대가 되는 과학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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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0-02-0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 그 때썼던 리뷰를 부끄러워 지워 버렸네요. 지난 주 토요일부터 읽었었나(?) 오늘 아침에야 다 읽고 여기에 들어와 다시 님의 리뷰를 보니 부럽기도 합니다. 책에 대한 여운이 진하게 내마음속에 남는데 혹시 다시 또 좋은 책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전출처 : 딸기 > 멋진 책!
아인슈타인의 베일 -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세계
안톤 차일링거 지음, 전대호 옮김 / 승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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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년 전에 영국의 영(Young)이라는 과학자는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개의 좁은 틈으로 빛을 비추어 물결무늬 그림자를 보여주는 ‘이중 슬릿(틈새)’ 실험을 생각해냈다. 이중슬릿은 과학책을 한두 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현대물리학에서 빠지지 않는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중슬릿 실험을 여러 용도에 응용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빛은 입자(광자·光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언제 입자가 되고 언제 파동이 되는 것일까? 우습게도 빛은, 이중슬릿을 관찰하는 내가 광자의 위치를 알고 있을 땐 입자처럼 행동하고, 모르고 있을 땐 파동처럼 행동한다! 놀랍지 않은가? 빛이 내가 지켜보는 것을 어떻게 알고 내 눈길에 따라 행동방식을 바꾼단 말인가.

과학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듣기에 따라선 좀 잔인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어디까지나 생각과 논리만으로 이뤄지는 사고실험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상자 안에 고양이를 가두고 스위치를 눌러, 상자 속 방사능 폭발장치를 가동시킨다. 스위치를 누른 순간 폭발이 일어날 확률은 50%. 스위치를 누르고 5분 뒤에 당신은 상자 뚜껑을 연다.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있을까?

고양이의 운명은 5분 전에 결정됐지만, 당신이 뚜껑을 열 때까지 5분 동안 고양이의 생명은 ‘결정돼 있지 않다’. 과학자들은 고양이의 생사를 ‘파동함수’로 표현을 한다. 그들의 어법을 빌자면 5분 동안 파동함수는 ‘중첩’돼 있는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고양이는 ‘살면서 또한 죽어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생명을 가르는 파동함수는 당신이 상자를 여는 순간에야 비로소 고정되는 것이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양자물리학자들 버전으로 바꾸면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실재(實在)가 되었다”가 된다.


그저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살고도 죽었다니, 내가 쳐다보는 순간 정체를 바꾸는 빛이라니. 내가 가진 정보가 물질세계를 규정한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유아론(唯我論)이 아닌 셈이다. 정보가 실재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소리다.

때로 현대물리학은 직관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의 베일 뒤에 가려진 양자의 세상은 우리의 직관, 상식을 완전히 던져버리기 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공간이다.

안톤 차일링거

안톤 차일링거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일하는 유명한 물리학자다. 비엔나대학 실험물리학연구소는 현대물리학의 선조 격인 루드비히 볼츠만과 에른스트 마흐, 앞서 말한 고양이의 냉정한 주인 슈뢰딩거가 여기에서 연구를 했다. 차일링거 박사의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공상과학소설의 단골 소재인 순간이동이 가능함을 입증해보였다. 방법은, 여기 있는 양자의 ‘정보’를 저리로 옮겨 일종의 재생을 하는 것이다.
차일링거는 우리가 가진 세상을 정보가 결정한다는 주장을 넘어, 정보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 단위로는 비트(bit)를 개량(?)한 ‘큐비트(qubit)’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 이 입자는 내가 측정하기 전에는 여기 있지 않았다. 여기 이 고양이는 내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정보가 곧 세계이다. 고대인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에테르(ether)라는 물질이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자기장, 전기장 같은 장(場)들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고 말한다. 차일링거는 에테르와 장을 ‘정보’로 바꾸었다.

‘정보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빛이나 전기, 자기, 에너지처럼 지금은 잘 알려진 것들도 예전엔 미지의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런 개념들이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서 과학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몇 백 년 동안의 일이다. 비트, 디지털 같은 말들이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 년 간의 일일 뿐이다.

양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뉴턴적(的) 공간’의 물리학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 작고 미묘한 세계에서 실재성(實在性)이나 객관성은 너무나 취약한 개념들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후 물질세계에서 절대적인 것, 객관적인 것은 사라져버렸다. 양자들의 세계는 측정불가능하며, 확률적인 정의만이 가능한 세계다. 그곳은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 세상의 천재과학자들마저 아연케 만드는 당혹스러운 공간이다. 관측자가 가진 ‘정보’가 관측 대상과 피드백을 해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양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차일링거의 ‘정보’가 세상의 구성요소로 격상될 순간이 오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재미있다. 원래 양자역학은 어려운 법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도, 리처드 파인만도 양자역학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책에서 차일링거는 양자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차일링거가 보여주는 탁월함은 어려운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들과 ‘정보 물리학’에 대한 통찰력을 넘어서, 철학적 질문들로 향해갔을 때 빛을 발한다. 정보가 실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스무고개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 등을 통해 보여준 뒤, 차일링거는 과학과 철학의 전면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정보는 물질세계의 근본이다’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세계관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책의 후반부는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철학적 질문들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할애돼 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아직 불분명하고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실재와 정보를 포괄하는 개념의 본성에 대한 질문, 즉 앎의 본질에 대한 질문도 그런 질문들 중 하나이다.”


양자물리학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은 것을 보면 차일링거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작가적 역량 또한 탁월한 사람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출간된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 (Information - The Language of Science. 승산)는 미국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가 차일링거의 연구와 아이디어에 감복해 내놓은 ‘정보 물리학 소개서’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아인슈타인의 베일’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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