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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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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사는 건지, 안 사는 건지 모를 만큼 절망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다른 삶을 얘기할 것이다. 좋은 시란, 이 귀찮은 삶 속에서, 이 막막한 삶 속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해 절망의 세계, 현실의 귀찮음과 저 아름답고, 거룩하고 완결된 어떤 세계와 연결해주는 것이다.“

프레시안 <우물에서 하늘보기 북콘서트 현장> “시를 읽으며 더 게으르게 살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2103&ref=nav_mynews

 

 현실이 팍팍할수록 문학은 늘 철부지 막내처럼 여겨졌다. 문학 중에서도 시는 훨씬 사치스러운 무엇같다. 자기계발서나 현실을 담은 에세이는 당장에 위안을 주지만 시는 짧은 글을 곱씹어 생각해야 한다. 끝까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씩 젖혀가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없는 문학은 해결되지 않은 고민처럼 찜찜함을 남긴다.

 

 

 

 황현산은 살아 낼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해야 하는 절망적 현실에서 시가 거룩하고 완결된 어떤 세계와 연결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추상적이다. 대중과 시를 더 가깝게 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기고를 시작했을 것 같은데 이 책의 제목은 너무도 '시적'이다. 평론을 좋아하지만 시를 평론한다는 것 자체가 극도의 심장과 극도의 머리가 만나는 느낌이라 혼란스러웠다.

 

우물에서 하늘보기......’

 

 시에 관한 한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의 와 나의 사이의 비대칭성을 인정하고 견주어 볼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나의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유미적이거나 퇴폐적인 예술이 아니더라도,예술을 예술되게 하는 기본 요소에서 사치는 큰 몫을 한다. (중략) 미학주의가 사실주의나 현실주의의 대척점에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중략) 예술은 자주 그 무용한 사치와 그 과격한 사보타주로 현실의 억압을 비껴간다. (중략) 특히 시인의 공들인 작업은 저 보이지 않는 삶을 이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긴다. " - <02. 사치와 사보타주 중에서>

   

 저자는 작품의 창작 배경, 해석을 돕는 다른 작품과 역사, 철학, 관련된 당신의 이야기를 끌어오면서 거의 모든 순간 그것이 향유되고 있는 오늘을 잊지 않는다. 고전과 현대, 국내와 국외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종과 횡으로 아우르며 세월호의 비통함, 민주화 투쟁과 고통의 현대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당신이 중심에 있는 문학계의 등단 시스템에 관하여도 두 편의 시를 통해 자연스레 풀어낸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듣고, 읽고, 공부하는 그 노래들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받은 자로서 사명감과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시가 여전히 막막하고 팍팍하다고 투정부리고 싶은 삶에서 거룩하고 완결된 삶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시가 책장에서 모든 재미있고 가벼운 글들을 다 읽어낸 뒤에야 가장 마지막에 손에 쥐게 될 장르라는 것에는 어떤 확신마저 있다. ‘우물에서 하늘을 본다’...마치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이 꼭 그런 것이라는 걸 책을 덮을 즈음에야 어렴풋이나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있는 곳이 우물 속인 줄 알아야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을텐데... 시에 대한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동조가 있기 위해서 다시 한 가지 과제와 삶의 목적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이해. 나와 우리, 일상과 사회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세워 감지하고 느끼는 것. 우물이 우물인 줄 아는 것. 그리하여 이따금씩 하늘을 넘어 볼 줄 아는 것, 그것 말이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나 역시 설득당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젊은 작가의 변을 붙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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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이 이렇게 뒤숭숭한데, 인문학이란 이런 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실로 난감한 질문이었지만, 실은 나 또한 스스로에게 가장 혹독하게 묻고 있는 바로 그 화두였다. 세상이 이토록 뒤숭숭한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바로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극도의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야말로 가장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한 시간이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타인의 생각에 귀 기울여야만 할 시간이었다. 세상이 힘드니 공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렵기에 공부가 더욱 절실한 때였다.

 

  공부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어떻게 인생과 세계와 일상에 적용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였다. 나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모두가 시름에 빠져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갈고 닦아온 모든 지혜를 동원해 불의와 싸워야 할 진정한 인문학의 시간이라고.

시사인 책꽂이’ <정여울의 독서공감> “그가 물었다, 잘 지내느냐고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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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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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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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다 출판의 걸어본다여섯 번째 이야기는 소설가 배수아가 함께했다.


 리고 나는 그녀와 함께 걷기 전에 지도에서 몽골을 찾아보려다 방황하는 손가락을 발견했다. 어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훨씬 더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온 알타이어족의 땅이었는데, 세계지도에서 몽골을 찾으려는 눈길이 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국 대부분의 기억 회로의 멈춤 현상에서 그래왔듯이 인터넷 검색창에서 몽골을 찾아냈다. 지도를 조금 더 확대해 수도인 울란바르트와 알타이의 위치도 확인했다. 고비사막과 알타이산맥도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야...나는...책 겉 표지를 떼어내어 펼치면 알타이 지도가 된다는 사실을...알게 되었다. 뒤늦게...^^;; -

 

여행한다. 방문한다. 둘러본다. 돌아다닌다. 탐사한다. 달린다. 뛴다. 살펴본다.

 

 라는 유사어를 끄적이다가 저들과 걸어본다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걷는다. 걸었다. 걷고 싶다. 걷는 중이다. 걸어 본 적이 있다.

 

 와 견주어 보아도 느낌이 아주 같지 않다. 알타이어족의 공통 특질이자 우리말의 특징이기도 한 어미와 접사의 발달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꾸만 경제적 제약에 부딪치지 말고 시간적 제약이 덜할 때 짐을 챙겨 떠나라고 말하는 책들과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의지도 없이 무작정 타국에서 해답이 나오기를 바라며 떠나는 여행은 삼가라는 책들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 씩 헤맨다. 싼 항공권이 나왔다는 이야기에도 흔들리고 계획에 없던 휴가가 생겼을 때에는 훨씬 더 흔들린다. 이 흔들림 어디에도 왜 떠나야 하는가는 없다


 행은 해방구다, 탈출구다, 적어도 도피는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공간의 이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회의가 들 때쯤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사유라는 셈치고 고민과 잡감들이 계속 이어졌고 결론이 나지 않는 일들에 여행이 지쳐만 갔다. 반드시 눈과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여행의 강박이 더욱 해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아가 생전 처음 알타이로 떠난 데에도 왜 떠나야 하는가보다는 갈잔 치낙이라는 알타이 원주민 부족 족장의 소설에서 받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영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많은 예술가의 경험에서 보았듯이 그녀 역시 강한 끌림을 느끼고 주변의 제약을 모두 떨치고 떠난다. 내가 보기에는 무작정에 가깝게. 그리고 그녀는 뭇 '무작정 여행자'와는 다르게 그 곳에서 세상의 민낯을 만난다.

 

 타이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기대가 없었기에 배수아가 들려주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소설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갈잔 치낙의 소설을 보고 떠난 그녀에게도 알타이는 처음에 이런 곳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크 똥으로 불을 피우고 야크 젖으로 끓인 차를 마시며 양과 관련된 것들이 유르테를 메우고 있는 풍경보다도, 문지방이나 난로에 대한 알타이 유목민들의 생각, 생각이 믿음이 되어 전해진 풍습들이 훨씬 더 소설 같았다. 아마 직접 보기 전까지는 내게 알타이란 이렇게 초원에 부는 바람에 실려오는 흙, 돌내음처럼 그렇게 거칠게 자리할 것이다.

 

이 글에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여행이란 단어는 

(중략) 아마도 단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적인 꿈, 고통의 또다른 이름으로서의 꿈

혹은 정체불명의 그리움,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찬 발자국

혹은 그러한 감정의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은밀하고도 슬픈 몽환과 동의어에 불과할 것이다.” -p.12


 녀가 본 알타이는 슬프다. 그리고 아프다. 낭만은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바람이 가슴에 구멍을 내는 것 같은 곳이다.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민낯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대로 인간의 체온이 그리운 곳이라고 했다. 슬프고 아프고 낭만 따위 없는 넓고 빈 땅에서 서로의 온도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 좋은 향기와 음식과 차를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 세상의 민낯에 굳이 화장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알타이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붙임1] 책 곳곳에는 독자가 읽으며 표시할 법한 음영(형광펜)처리가 되어 있다. 작가의 주문이었을지, 편집자의 선택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독자가 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여지가 줄어드는 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집중과 느슨해지기사이에 완급을 조절하며 편안하고 빠르게 읽기에는 좋은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붙임2] 표지부터 본문까지 사용된 사진들이 컬러가 아닌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책의 정가를 낮추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작가나 편집자의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흑과 백의 대비가 심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많기도 했지만 몽골의 은 어떤지 더욱 궁금해 지기도 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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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12-10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치는 않지믄 알타이어족과는 다르게 독립적으로 발달한 걸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지만.. 그런 어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와락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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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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쨌거나 라면이라는 음식이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된 데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 배우가 내뱉은 대사가 한몫을 했다. 그리고 개그우먼 안영미가 패러디하면서 라면을 끓인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평범한 문장은 라면수프의 맛처럼 더욱 자극적으로 퍼져나갔다. 김훈의 에세이집의 제목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보니 괜히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른 듯이 부끄러워졌지만...... 그러나 그래도 재미있다. 그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을 모아놓은 제목부터가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온 것이다. 작가로서 그의 이름은 멀고 높지만 뜨끈하고 입맛이 당기는 것이 마치 라면이 끓기를 기다리는 순간처럼, 커피나 국물이나 다른 것이 끓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또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것 같다.

 

한 편의 에세이에 담긴 사유들은 그의 문체만큼이나 간결하고 다채롭다. 그는 죽변항을 거닐며 신석기부터 이곳에서 어업을 해왔을 모든 사내들에 대한 동료애를 느끼고, 가오리로부터 가자미, 물곰()... 등에 이르기까지 생물과 사물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걸으면 걷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처럼 생각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이치를 보는 데 반해 내 사유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언제나 공회전에, 원상복귀를 반복하고 있었다.

 

는 그가 즐겨 먹는 음식만큼이나 담백한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물이든 인공적 사물이든 각각에 깃든 역사를 빼놓지 않고 상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찰나에 감동하기 이전에 이미 훨씬 더 멀리, 선사시대까지 이르러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이 현상에 더 깊이 감동했다. () 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고대 격구와 폴로부터 오늘날의 축구, 야구, 배구에 담긴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쉴 틈 없이 풀어낸다. 남태평양 어느 마을에선가 본 도마뱀들의 다리, 발톱, 갈퀴의 개수와 모양이 다른 것까지 발견할 정도라면 작가란, 정말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관찰자로서 또는 연구자로서 시선을 품고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 가장 읽고 싶었던 글, 11’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모든 이치와 심리학 이론를 부수고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기가 찰 정도로 쓰인 문장이라 헛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우리는)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p.72. ‘1’ 중에서)

히 설화적인 가난을 겪어 왔다는 저자. 그의 일상과 가족과 과거에서 울 수 없는 슬픔과 이제는 울지 않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토막난 국수 가락 같은 문장이 이제는 더는 맛 볼 수 없는 우리 할머니의 음식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슬펐다. 그리고 무엇이든 써 내야 하는 잡감들차마 글로 풀어낼 수 없는 광경들사이를 오가는 그의 생활들이 작가로 수십 년째 밥벌이중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처럼 김훈의 책을 처음 보는 이에게도 김훈은 문장이 좋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회의 글쓰기 특강에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는 책을 읽은 게 자랑스럽지 않다. 책 속에 길은 없다. 길은 세상에 있다. 그래서 글은 세상을 살면서 쓴다. 글은 삶에 대한 구체성으로 써야 한다. (출처: [티타임즈] 글쓰기 천재들의 글쓰기 비법 http://me2.do/xETn4Kcl)


을 쓰는 데영감을 받겠다고 자극을 얻겠다고 좋은 문장력을 가진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 나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들의 문장 속에는 감동은 있어도 내 글은 없었다. 내 글이 찾아갈 길도 없었다. 세상에 예민하지 못하고 대체로 무심하기까지한 내가 글을 잘 쓴다면 그것은 모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들의 속에서 그와 비슷한 나의 기억들을 살려낸다면 모를까......

 

가 집을 짓는 목수, 해양 심층과 생물을 연구하는 연구원들, 고기를 낚는 어부, 압록강 건너편의 북한 소년 보초병을 관찰하는 눈이 깊고 진지해질수록 자꾸만 저 말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을 저렇게 깊게 살아내야 하는구나. 지금도 내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 한글프로그램 속에서 타이핑에 따라 사라져가는 여백과 타이핑에 따라 채워져가는 글자들, 이름 모를 인디밴드의 음악과 타이핑을 치는 손가락의 촉감, 오른쪽 뺨을 타고 내려오는 해질녘 그늘까지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이러고도 이내 나는 훨씬 더 무심해져 가는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때마다 다시 펴 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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