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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황선엽 교수의 인문교양서 <단어가 품은 세계>는 단순한 단어의 해석을 넘어 삶과 세상을 탐구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속에 숨은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통해 말과 글, 나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됩니다.
단어에도 생명력이 있다는 말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강렬합니다. 황선엽 교수는 단어를 생명체처럼 접근하며 그 태생과 성장, 쇠퇴를 세밀히 관찰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양치질'이라는 단어는 불교문화에서 시작해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단어가 품은 수천 년의 이야기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상추의 옛 이름 '부루'와 같은 사례를 통해 단어의 변천 과정을 밝히는 이야기는 단어의 어원과 삶의 연결 고리를 탐구하게 합니다. 저자가 강원도 정선에서 방언 조사 중 발견한 '부루'라는 단어는 옛 문헌에서만 보던 말을 현재의 방언 속에서 다시 발견한 사례입니다.
단어는 소통의 도구를 넘어 인간의 삶과 문화, 역사적 변화의 궤적을 담고 있습니다. 얼룩백이 황소, 강아지풀, 노루궁둥이버섯 같은 단어를 통해 단어가 명명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관찰력과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에 등장하는 '얼룩백이 황소'는 한국적 농촌의 정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얼룩백이 황소는 흔히 생각하는 누런소도 아니고 젖소도 아닌, '칡소'라고 합니다.
칡소는 검은색과 황갈색의 얼룩무늬가 특징인 전통 한국 토종 소로, 한국 농촌의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품종이라고 합니다. 칡소는 당시 농촌의 일상과 생계를 대표하는 존재였고, 그 상징성은 시인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까치설’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탐구하며 설날이라는 문화적 풍습과 단어 간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새로운 시각을 안겨줍니다.
또한, 사전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 지적하며 단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언어가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를 어떻게 틀짓는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언어는 시대와 문화를 반영합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는 단어 속에 녹아 있는 시대의 인권 감수성과 사회적 변화를 조명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닌 공동체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새로운 단어가 기존의 단어를 대체하는 과정과 저항 사례를 짚어줍니다. 특정 단어가 금기시되거나 새로운 단어로 대체되는 사례는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탐구하게 만듭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단어를 아는 과정이 곧 삶을 아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단어를 사전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문화적, 시각적 상징성을 탐구하는 여정은 단어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키오스크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조어와는 거리가 멉니다. 요즘엔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서 주문과 결제를 돕는 기계로 자주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단어의 기원은 고대 페르시아어인 kushk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는 '정원 안에 세워진 작은 건물'을 뜻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거치며 '작고 우아한 정자'나 '파빌리온'의 의미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17세기 유럽으로 넘어오면서는 개방형 구조의 간이 판매대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았고,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키오스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키오스크는 기술 발달과 함께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거나 주문을 받는 기계를 넘어서 정보 안내, 티켓 발권, 셀프 체크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실용성과 편리함을 극대화한 디자인 철학은, 과거 정자와 판매대에서 추구했던 공간 활용의 미학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키오스크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온 인간의 창의성과 실용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어에는 인간의 삶이 가장 경이로운 모습으로 함축되어 있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 그 속에 담긴 경이로운 삶의 비밀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단어를 넘어서 삶을 탐구하는 흥미로운 여정을 선사합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말속에 숨겨진 세상과 마주하며,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동시에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 말과 삶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