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 어느 과학자의 탄생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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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그의 회고록이라니~!

젊은 시절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다가 어느새 백발노인이 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올해 75세라니. 벌써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었군요. 생물학 분야에 낯선 대중에겐 그의 이름은 몰라도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개인적으로는 대중적 과학 글쓰기 대가로 불행히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스티븐 제이 굴드를 좋아하는지라 덕분에 낯설지 않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서로 많이 까신(?) 전적이 있어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ㅎㅎ 어쨌든 국내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세가 훨씬 더 좋고, 과학 분야 스테디셀러에 항상 랭킹 되죠. 그런 그도 이제 건강이 썩 좋지는 않은가 봅니다. 이번 자서전은 의미가 깊어 보이고 대중과학도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네요.

 

한국어판으로는 2016년 두 권이 동시 출간되었는데 실제 원서 1권은 2013년 12월에, 2권은 2015년에 출간된 자서전이라고 합니다. 자서전 1권 어느 과학자의 탄생에서는 유년 시절 이야기와 생물학에 입문하는 과정, 학부 시절 연구한 것들 그리고 그의 첫 책이자 스테디셀러가 된 <이기적 유전자>의 탄생까지 다룹니다. 자서전 2권에서는 본격적인 그의 학문적 업적 이야기가 나오고요. 

 

 

 

처음엔 조상 이야기까지 나오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냥 대충 읽고 얼른 그의 책 이야기 부분을 봐야지 싶었는데... 읽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남의 가족사 따위 자세하게 알고 싶지 않아! 했다가 그의 글발에 넘어가 크큭거리며 읽었네요.

 

지독한 회의주의자에 무신론의 아이콘인 리처드 도킨스 명성 때문인지 좀 완고해 보이고 꼬장꼬장한 성격일 것 같았는데 자서전 1권 읽으면서 생각지 못했던 다른 면을 많이 봤습니다. 은근 유머감각 있고 재미있는 분이더라고요.

 

 

 

영국인이지만 케냐에서 태어난 리처드 도킨스.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생활한 추억담을 풀어냅니다. 창의력 가득한 식물학자 아버지, 예술성 풍부한 어머니 슬하에서 천혜 환경의 아프리카 생활. 그런데 그런 환경이 그가 동물학자가 되는데 작용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을 땐 동물이고 자연이고 그다지 큰 관심 없었다고 해요. 게다가 현재의 비판적이고 회의적 사고력으로 꽉 찬 상태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정도로 무척 잘 속는 편이었다 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팬이어서 덩달아 모종의 창조자에 대한 광적인 믿음이 있었던 시기도 있었고요.

 

 

 

옥스퍼드에 진학할 때도 생화학 전공을 생각했다가 우연히 동물학 전공을 선택했을 정도로 동물학자의 특출한 기질 같은 건 없는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대신 옥스퍼드 특유의 튜터 제도인 교수의 개인지도 방식이 잘 맞아 훌륭한 스승들을 모시면서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는 게 현재의 그를 만든 일등공신이었어요.

 

인생에 영향을 준 중요한 조언자들과 동료들을 만나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면서 인생 전반부의 마침표를 찍을 책 <이기적 유전자>가 탄생하는 인생 전반부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볼 수 있는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권 어느 과학자의 탄생.

 

 

 

1권 중반부터는 슬슬 학문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과학자의 사고법, <이기적 유전자>를 쓰게 된 이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랄만한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밈'이라는 단어를 리처드 도킨스가 만든 용어라는 것. 우와~

 

자기가 연구하는 동물 외에는 무지하고, 별자리도 잘 모른다는 그는 다윈이 설득하려는 주제를 계속 이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다윈의 발자국을 따르는 데 일조하는 생물학자의 한 명으로 살아왔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그가 회고한 인생 전반부는 사실 큰 굴곡 없이 보낸 것 같아요. 독자로서는 신선한 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던 1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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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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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도 학생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지방대 시간강사 현실을 리얼하게 끄집어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 김민섭 저자의 신작 <대리사회>.

 

<지방시>이후 바깥으로 나온(밀려난) 그는 이제 대리기사를 하며 겪는 다양한 통제들을 보면서 이 사회 전체가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에 불과하고, 그 누구도 온전히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사유하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읽는 내내 코끝이 시큰거리네요. <지방시> 출간 이후의 속앓이라든지 대리기사 초보자가 겪는 좌충우돌. 그 과정에서 분노를 함께 터뜨리기도, 함께 공감하고 웃기도 하면서 읽었습니다.

<지방시>를 내부고발식으로만 보며 공감해주지 않던 동료들에게서 벗어나 결국 대학을 그만둔 김민섭 저자. 8년의 시간강사와 1년 3개월의 맥도날드 알바 투잡을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오히려 대학 바깥에서 찾게 된 그는 더 이상 대학에 남아있을 수 없었어요. 읽는 저도 덩달아 착잡한 심정이지만 그래, 그깟 대학 잘 나왔어!하며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밀려나고서야 물러서는 법을 배운 부족한 한 인간은, 다시 타인의 운전석에 앉을 준비를 한다. 이제 다시는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 책 속에서.

 

 

 

 

<대리사회>는 우리는 과연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는가의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대리기사를 하면서 타인의 운전석에 앉는 순간 개인의 주체성은 바로 통제되는 상황을 겪습니다. 핸들, 브레이크, 엑셀 이외에는 건드리면 안 되는 '행위'의 통제, 차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말'의 통제,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영혼 없이 운전만 하는 '사유'의 통제를요.

 

문제는 운전석에서 내려도 여전히 '대리'라는 단어에 묶여있더라는 겁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잊어간다는 거죠. 나/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그것. 주체적 사유를 하지 못하는 대리인간을 만들어내는 이 사회 시스템을 생각해봅니다. 2015년 초 읽었던 르포르타주 사진집 <변경 지도>가 생각났습니다. 이 사회가 만든, 중심으로 가고자 하지만 밀려난 것/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당시 성석제 소설가의 <투명인간>과 함께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거든요. 이 책 <대리사회> 역시 주제가 쭉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모, 교사, 직장 상사 관계에 모두 퍼져있는 '순응'.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을의 공간에서 순응에 익숙해지면 운전석에서 내려도 각인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 속에서 '대리국민'을 만들어내는 거고요. 2016년 11월과 12월 현재 우리는 대리국민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대리운전 노하우 터득 중에 겪는 에피소드는 무게감 조절하며 웃음 짓게 하기도 합니다. 대리기사용 어플에 뜨는 콜 알림을 보자마자 수락과 거절 버튼을 실시간으로 판단해 눌러야 하는데 쉬려고 한 날이었음에도 일명 대박 지역이 뜨자 '이건 꼭 가야 해!' 하며 몸이 먼저 반응하기도 합니다. 진상 손님, 좋은 손님 별의별 손님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무서운 손님이 있었다는데 차 브레이크가 잘 안 잡힌다고 하더니 진짜였다고... ㅋㅋ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 책 속에서.

 

책임질 가정이 있는 만큼 아내와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절절했어요. 건강보험 같은 사회적 안전망조차 없는 대학 노동자의 삶을 사면서 가족 모두가 힘들었습니다. 부모, 아내, 아이에게까지 본인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아줄 것을 강요하고 부탁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면서요. 고난의 시간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보다는, 상처를 주고받기 이전에 소중함과 감사함을 나누는 가족관계를 희망합니다. 대리기사를 하는 지금이 오히려 더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하고요.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 책 속에서.

 

 

 

 

학의 꼰대에서 거리의 아재가 되어 이 사회가 말하는 노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노동은 그저 영혼착취를 하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하는 '대리노동'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라는 거죠.

 

<대리사회>를 읽으며 '노동'의 의미와 노동을 하는 '나'의 존재를 생각해봅니다. 대리사회 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 같지만, 밀려나면 그제야 보인다고 합니다. 그는 밀려났지만 우리에게는 물러서라고 합니다. 패배, 잉여가 아닌 주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죠. 그때부터 우리는 사유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가는 주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으니 올겨울의 촛불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의 주체로 자리할 수 있음을 몸소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다시 대리국민으로 되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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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심리학이 필요해! 생생 심리학 4
이소라 지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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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소통해요~" 댓글에 질릴 정도로 다들 소통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통의 부재가 만연한 사회.

베스트셀러 <그림으로 읽는 생생심리학> 이소라 작가의 심리학 책, 이번에는 진정한 소통과 관계의 의미를 짚어주는 <인간관계, 심리학이 필요해!> 책이 나왔네요.

 

 

 

태어나서부터 맺는 부모 관계는 물론이고 친구, 연인, 직장 등 다양한 관계 영역. 대인관계는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 되듯 대인관계는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관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건강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에는 둔감합니다. 물론 기질과 성격에 따라 관계 맺음과 유지가 더 어렵고 더 수월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인관계는 학습과 개발을 통해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려면 먼저 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상대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집단 가족. 사람의 기질에 영향 주는 가족이기에 건강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 내 상호작용을 살펴보는 가족가계도 개념이 신기하더라고요. 가족가계도를 직접 작성해보면 동맹관계, 적대관계, 희생양 관계 등 가족 내 문제 일으키는 핵심 관계와 영향, 가족의 강점과 약점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족구성원마다 주관적 판단은 다를 수 있기에 각자의 가족가계도는 또 다르게 표현되니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인간관계, 심리학이 필요해!>는 성격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데요. 성격을 일컫는 다양한 요인들을 정리해 뇌과학으로 입증된 대표 성격 특성을 알려주고, 까다로운 10가지 성격을 소개합니다. 개인의 특이한 성격이 발전되고 굳어져 사회생활에 부적응을 일으키는 10가지 성격장애를 보면서 이런 유형은 이런 특징을 가졌다는 걸 깨닫고 문제발생시 이렇게 대처하면 좋겠구나 도움받을 수 있었어요. 각각의 성격장애 유형마다 첫인상은 또 그렇지 않다는 점까지 알려줘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편집성 성격장애 유형은 처음엔 객관적, 합리적이고 정중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편집성 성격장애, 조현성 성격장애, 분열형 성격장애, 반사회적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 강박성 성격장애, 의존성 성격장애, 회피성 성격장애 제각각 무조건적인 단점만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장점을 캐치해 좋은 방향으로 개선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알려줍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심리학으로는 칭찬, 거절, 화해 타이밍을 통한 좋은 관계 유지 팁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특히 성과에 대한 리액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요. 칭찬을 받았을 때 그 공을 상사, 동료, 운, 혹은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 상사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에 높은 점수를 줬는지는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물론 상사에게 공을 돌린 경우를 가장 좋아했고 ㅎㅎ 그다음으로는 우리는 보통 동료라고 생각할 텐데, 실상은 동료보다 운이 좋아서라는 상황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는 겁니다. 동료, 직원 간 단결이 오히려 상사 본인을 배척한다고 느껴서였을까요. 놀라웠어요.

 

최대한 쉬운 문체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지라 각각의 내용 자체는 아주 깊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생생한 심리학 이야기를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관계 맺음이 있다면 관계를 끊을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내 삶의 질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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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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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비네 작가의 소설 HHhH. 

작가의 첫 장편소설임에도 공쿠르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차지할 만큼 독자를 매혹할만한 매력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사형 집행자, 도살자, 금발의 짐승 등의 별명으로 불린 독일 제3제국 나치 친위대 (ss) 2인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표적 암살 사건을 다룬 소설 HHhH. 흔하지 않은 독특한 소설! 이 소설은 작가 이야기를 좀 길게 해야 할 것 같아요.


HHhH 소설은 한마디로 작가 노트를 읽는 느낌입니다. 역사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해도 작가의 허구적 상상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HHhH 소설은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파헤치며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의 현재 시점을 드러내 역사적 과거를 재구생하는 과정 그 자체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작가의 허구가 들어간 부분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어 어떤 것이 실제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 독자 입장에서는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어요. 로랑 비네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도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중점을 둔 의도는 나치의 희생양이었던 무수한 무명씨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작가는 역사를 픽션으로 다룰려니 그만큼 정확한 자료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정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이드리히를 다룬 영화도 빠짐없이 봤고, 역사소설 거장들의 책도 탐독하다 보니 HHhH 소설은 장황한 설명 없이 배경 이해하는 데 딱 좋은 수준에서 깔끔하게 진행하는, 알맹이 제대로인 소설로 탄생한 것 같아요. 알고 있는 걸 주절주절 풀어내고 싶어 하는 갈등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의 표적,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일까. 히틀러 정예부대 나치스 친위대 일명 SS의 2인자이자 나치스 조직에서도 가장 악랄한 부서 보안방첩부 SD를 이끈 하이드리히. 히틀러의 정적을 처리한 '장검의 밤'을 실행했고, 아이히만을 주요 조력자로 삼아 유대인 학살 정책의 기본 전략을 고안한 인물입니다. 소설 대부분의 분량을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초점 맞춥니다. 유대계 혈통이라는 찝찝한 소문이 평생 따라다녔고 가느다란 하이톤 목소리지만, 훤칠한 키에 금발이라는 외모와 잔인함과 충성심까지 더해져 완벽한 나치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해요. 




하이드리히 스토리에는 20세기 유럽사가 관통합니다. 폴란드에서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순간, 인간 청소 임무 실행의 순간 등 독일 제3제국의 끔찍한 정책 중심에 언제나 하이드리히가 있었습니다.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의 물밑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관계라든지 영국과 프랑스 등 당시 국제 정치 관계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강렬한 역사적 사건인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은 '유인원 작전'으로 불렸는데 체코인 얀 쿠비시와 슬로바키아인 요제프 가브치크, 두 명의 낙하산병이 맡게 됩니다. 두 영웅이 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었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은 하이드리히 이야기를 통해 저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42년 5월 27일 사건 당일. 어이없는 총기 불량 사고 때문에 차선책으로 폭탄을 던져 사건을 마무리했고, 일주일 후 하이드리히가 사망하게 되면서 '유인원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무차별 보복을 하며 마을 하나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하면서 그동안 은밀히 진행했던 독일 제3제국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승승장구하던 독일 전세가 뒤바뀌는 빌미가 되고요. 무엇보다도 하이드리히는 히틀러 다음을 이을만한 인물이었던지라 역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상금에 눈먼 배신자의 밀고로 두 영웅은 물론 그들과 함께 작전에 관련했던 많은 이들은 사건 3주 후 여덟 시간이라는 치열한 저항 끝에 비극으로 마무리됩니다.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 불린다'는 이 문장은 나치 친위대 수장 히믈러가 있지만 실질적인 계획은 하이드리히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렇게 불렸다고 하는군요. 이 문장의 첫 글자를 따 소설 제목 HHhH가 나왔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독일 제3제국의 만행에 피해 입은 이들이 공감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영웅의 모습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동안 나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저는 너무 무지했더라고요. 묵직한 소재지만 지루하지 않고 몰입도가 상당히 좋았는데 작가의 필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작가 스스로는 HHhH를 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인프라 소설이라고 칭합니다. "실화라는 바다에 픽션 문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한 역사 덕후 기질이 진하게 보이는 작가. 로랑 비네 작가의 또 다른 소설도 기대될 만큼 인상 깊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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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화요란
오카베 에츠 지음, 최나연 옮김 / ㈜소미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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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막장드라마도 우리 것과 비슷할까 궁금했는데, 일드 '아름다운 함정' 원작소설 <잔화요란>으로 생생하게 느꼈어요. 드라마에서는 부부, 불륜관계에 치중했다면 원작소설은 한차원 깊게 파고들어 여자어른들의 심리에 집중해 무척 공감하면서, 때로는 버럭대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0대 소녀부터 결혼을 앞두고 퇴사한 여자, 결혼 6년차 커리어우먼, 결혼 24년차 전업주부, 독신녀까지 여러 상황에 놓인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캐릭터들의 특징이 아주 명확해요. 




주인공 격인 인물은 회사 상사와 불륜 관계였다가 그의 아내가 주선한 맞선남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리카입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불륜의 당사자가 되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열렬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계속 이어질거라 생각했지만, 한 순간에 허무하게 끝나는 걸 겪으며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어른 친구에 대한 정의가 와 닿습니다. 이제는 담을 쌓아 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보여도 결코 들어가지 않는 사이. 상대방이 담장 안에 감추고 있는 이상 틈새로 살짝 보이는 일들도 못 본 척하는 일. 어른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불륜이 흐지부지하게 끝나면서 세상에 남자의 애정 표현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배우며,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안심과 안정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마흔 넘은 독신녀 마키. 평생 연애하기 위해 평생 일한다는 신조를 가진 그녀는 가벼운 연애만 하며 삽니다. 이해하기 힘든, 아니 제 기준에선 용서하기 힘든 일을 벌이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리카와 결혼할 남자에게까지 마수를 뻗치고, 거기에 또 홀라당 넘어가는 남자를 보면서 욕을 아주 한 바가지 했네요. 하지만 결국 리카의 결혼이 무사히 진행되는 걸 보면서 그동안 쌓아 온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사고방식이 변하게 되는데 그 과정도 꽤 흥미로웠어요. 결국 자신은 단 한번도 제대로 사람을 사랑해보지도, 사랑받지도 못했다는 것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소설 끝에서 반전을 한 번 안겨주는 인물이라 정말 골때리는 인물이었어요.


결혼 6년차 커리어우먼 이즈미는 남편과 관계가 멀어지면서 결혼 유지와 이혼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아름다운이란 건강한 몸과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 믿으며 외모에 시간과 돈을 크게 들이지 않는 성격인 그녀. 어쩌면 가장 평범하고 흔한 보통의 인물을 대표하는 것 같아요. 서로에게 무관심한 부부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두고 냉랭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 이후 행복과 결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리카의 불륜남 아내인 미츠코는 부유한 가정의 딸로 자라면서 기품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에 목숨 건 여자입니다.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걸 눈치채도 모르는 척 완벽한 아내역을 연기하며 잉꼬부부로 불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그녀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딸 미우인데요. 이 가정이 누리는 행복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딸인만큼 이 아이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리카, 마키, 이즈미 세 여자가 함께 다니는 서예 교실의 선생님인 50대 독신녀 류코는 이 소설의 키맨 역할을 하는데요. 소설 제목 <잔화요란>이라는 글자의 의미와 남녀 관계에 대해 조언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일품입니다. 아직 다 지지 않고 흐드러지게 피는 꽃을 뜻하는 '잔화요란'. 미련과 불만 때문에 지지 못하는 것이 아닌, 시들기 직전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처럼 빛을 내며 살아내는 용기를 알려줍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봤냐고 묻는 그녀. 우리는 의심의 갑옷을 입은 채로 남녀관계를 쌓아가는 건 아닌지 묻습니다.


사랑과 결혼, 행복의 정체에 혼란스러워하는 여자들의 성장기를 다룬 <잔화요란>. 상대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바치려 했던 애정과는 이제 다른 종류의 애정을 알게 된 리카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저 심심풀이용 막장드라마를 넘어 어른여자로 인생을 살아내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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