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 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 판미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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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저명한 영적 스승이자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호킨스는 마더 테레사가 찬사를 보내기까지 한 의식혁명》 책을 통해 대중에게 과학과 영성이라는 다른 두 영역이 어우러짐을 보여줬다. 2012년 별세한 그의 유작 《놓아 버림》 에서는 항복이야말로 완전한 성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노력기제'라는 밧줄을 놓고 '항복기제'를 통한 내적 변화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면 겪기 마련인 부정성을 인정하면 항복을 통해 비로소 부정성에서 벗어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스트레스, 위기 등으로 둘러싸인 인생을 감당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원치 않는 감정을 모두 해소하는 방법은?

 

기존의 책들에는 진보된 자각 상태와 깨달음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놓아 버림》 에서는 깨달음을 가로막는 일상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기법을 알려준다. 생각이나 일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감정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고통의 주된 원인은 애착이다. 간단히 말해 놓아 버림으로써 감정적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묻기만 하면 자동으로 답을 알려주는 스승이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경험을 마주하게끔 하는 것에, 항복기제라는 접근법을 이야기한다. 항복 상태란 창조성과 자발성이 마음 속 갈등에 가로막히거나 방해받지 않고 나타날 수 있도록 특정 방면의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마음은 일종의 생존 기제이며, 생존 방법으로 주로 감정을 사용한다. 감정자체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안전을 추구하도록 몰아가는 기본적 공포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놓아 버림에 익숙해지면 모든 부정적 감정은 생존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과 관련이 있으며, 모든 감정이란 마음이 생존에 필요하다 믿는 프로그램일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감정은 오고 가지만 나의 감정이 곧 나는 아니며 진짜 '나'는 감정을 지켜볼 뿐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부정적 감정을 놓아 버린다는 것은 번번이 저항하는 에고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회의가 들거나, 항복하는 것을 잊거나, 저항감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저항감을 내버려 두고 저항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떤 특정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고 느낄 때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느낌을 그냥 항복하라는 의미다.

 

놓아 버림은 일상에서도 매우 유용하지만 특히 삶의 위기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삶의 위기에서는 감정이 압도적으로 밀어닥치는데 이 상황의 과제는 어떤 감정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압도하는 감정을 상대하는 것이다. 감정을 다룰 때 마음이 동원하고자 하는 평상시 기제는 억제, 표출, 도피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희생자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의식적으로 자각해 인정하고 항복하면 더는 무의식적으로라도 휘둘리지는 않는다. 
 

얼마 동안이나 계속 괴로워하고 싶은가?

언제가 되어야 기꺼이 괴로움을 포기할 것인가?

그만하면 되고도 남는 것이 언제일까?

 

모든 '못해' 이면에는 '안 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 해'는 사실 하려니깐 겁이 나고, 창피하고, 실패가 두려워서 등을 의미한다. 무의욕과 암울함은 자신의 왜소함을 믿어버린 대가다. 이 상태를 벗어나려면 보다 '못해'를 '안 해'로 바꿔 모든 감정이 드러나게 하라고 한다. 원망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 옳고 그름의 선택권 문제는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현재 입장에 있는 것임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부정적 입장에서 얻던 보상을 놓아버리면 놀랍게도 답례처럼 긍정적 보상이 긍정적 감정의 힘에서 생기게 된다. 원망을 놓아버리면 용서를 경험하듯 말이다. 부정적 감정을 항복하고, 놓아 버리고 나면 감정이 해결되며 전처럼 고통을 겪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참아야지 하는 (여전히 이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감수와는 다르다.

 

『 답을 찾지 말고, 문제 이면의 감정을 놓아 버려라. 』 - p275

  

 

 

 

무의욕, 비탄, 공포, 욕망, 분노, 자부심, 용기, 받아들임, 사랑 등의 감정을 해부하며 놓아버림의 이로움, 그를 통한 자신 치유를 각각의 감정에 맞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건강, 부, 행복, 인간관계, 사회생활 등에서의 실천사례를 알려주며 내적 자유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 감정을 포기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때의 대처방법까지도.

 

 

 

 

놓아 버림의 목표는 우울한 '무엇'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 우울한지 캐내는 심리치료의 목표를 크게 넘어선다. 바탕 원인을 없애 완전한 초월을 목표로 한다. 놓아 버림 기법은 무엇을 고쳐주는 치료법이 아니다. 내면의 감정과 생각, 신념을 빠르게 자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탐구 기법이다. 항복한다는 어감 때문에 수동적으로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수동적일 때는 상황처리 대안을 찾지 못해 주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오히려 항복하면 효과적으로 행동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

깨달음에 저항하는 것은 이 순간을 통제하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성과 긍정성의 중간인 '용기'를 기준으로 부정성을 항복하고 긍정성에 대한 저항을 놓아 버리는, 호킨스 박사가 연구해 온 모든 이론을 아우르는 결정적 방법론을 《놓아 버림》 에서 접하게 된다.

읽어나가기만 해도 내 안의 부정성의 틀이 삐거덕 틈새가 생기는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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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천재들 - 세계에서 가장 비범한 언어 학습자들을 찾아서
마이클 에라드 지음, 박중서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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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우리는 언어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울 따름이다. 

언어 초학습자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인지, 한계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며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의 비밀을 알아낸다면,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 전반의 비밀을 알아내는 열쇠를 얻는 셈이 되지 않겠냐는.... 즉, 초다언어구사자들 각자의 재능을 얻은 방법을 우리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일반인도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방법을 더 잘 알게 될지 모른다는 저자의 지적 탐구 과정을 담은 책  《언어의 천재들》

 

'초다언어구사자'는 최소한 여섯 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전설과도 같은 추기경 메조판티의 일화는 다언어구사자들 사이에서 유명한데 오래전의 사람이라 단지 입소문인 것인지 진정한 초다언어구사자였는지 실질적인 증거를 찾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메조판티는 원어민과 같은 수준의 언어가 서른 가지나 되고 무려 72가지 언어를 구사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유품으로 확인한 결과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언어를 배우고 이용했다는 것은 자명한 부분이었다고 한다. 언어를 신속하게 분석하는 능력, 비범한 기억력, 언어의 말소리를 흉내 내는 능력, 언어와 언어의 전환 능력만큼은 독특한 실력이었다.

 

이어 현대의 다언어구사자를 찾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 보면 여러 다언어구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놀라웠던 점은 다언어구사자들이라고 해서 모든 언어를 동일한 수준으로 알지는 못하고 매일 사용하는 언어 몇 가지 외에 나머지는 냉동 보관하듯 잠재워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언어구사자 '켄 헤일'"물론 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사람들이 착각하게 할 정도로 여러 가지를 저 혼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가 제게 질문할 경우, 저는 거기서 어떻게 해야만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겁니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한 가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에 관해 뭔가를 아는 것과 정말로 다르다는 겁니다." 라고 말했다.

'롬브 카터'는 "사람은 언어에서 문법을 배우는 것이지, 문법에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언어적 요령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던 그녀조차도 스스로 친숙하다고 여기는 언어는 겨우 다섯 가지에 불과하다고 시인했다. 

'아르겔레스'는 전 세계의 문학작품을 고전이든 현대물이든 원어로 읽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원어만의 살아있는 영혼, 그 언어의 공명에 동조 되는 것을 원해서다. 그 자신도 밝히듯 공부한 많은 언어를 읽을 수는 있되 대화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원어민 억양을 구사하기 위해 굳이 노력하지도 않는다.

'헬렌'은 열아홉 가지 언어를 최소한 중급수준까지 구사할 수 있는데 디지털 장치를 이용한 최소 15회 이상 반복 청취와 정기적인 복습으로 제한된 양의 정보를 일시적으로 머릿속에 간직할 수 있는 능력인 작업 기억을 추진시키는 접근법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기가 아는 언어는 모두 똑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며 비교적 나중에 배운 언어는 한 번에 하나씩 사용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그 언어들이 서로 간섭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에밀 크랩스'는 언어를 배우는데 놀라운 속도를 갖고 있었는데 예순 개의 언어를 알고 있고 서른 두 가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상태지만 그 역시 자기가 터득한 언어를 요일별로 복습해야만 한다.

현존 최고의 어학 능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레그 콕스' 역시 왔다갔다 자유롭게 구사 가능한 언어는 일곱 가지가 최대라고 한다.

유럽의 다언어구사자 경연 1, 2회 우승자들 역시 수많은 언어를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 두지는 않고 나머지 언어를 사용하려면 벼락치기 공부라도 해야 한다고 한다.

 

즉, 이들은 활성화하는 언어는 평균 3~4가지 정도며 자신들의 언어를 대부분 예비 상태로 간직하고 있다. 결국 활성화할 수 있는 언어 개수의 한도 문제가 아니라 '비활성화' 시킬 수 있는 언어 개수의 한도로 초점이동이 된다.

 

언어 학습에 관한 기술은 이미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긴 하다.

언어적 잠재력 vs 실제의 성취

집중, 반복, 연습 세 가지 활동의 습관화가 중요하다는 견해와 인지능력 자체가 높은 신경학적 발달과 관련된 것이라는 견해로 크게 나뉘는데 예외적인 성공적 외국어 학습자는 이례적인 기억력 보유자들임에는 확실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다언어구사자들도 언어를 배우고 말하는 능력의 최대 한계는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기억에 들어있는 항목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여 결국 각각의 항목 모두를 명료하게 유지하는 정신적 능력을 위협하는데 무엇 때문에 애초에 이런 한계가 있는지는 과학자들도 아직 명료하게 알지는 못한다.  

 

정작 다언어구사자들의 고된 노력을 발견하고 나서는, 또는 정작 실제 활용 가능한 언어 가짓수의 한계를 보며 실망 아닌 실망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본 다언어 구사 능력은 언어와 언어학습에 관한 본질과 가치에 대해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준다.

사람들이 흔히 의미하는 '언어를 안다'라는 의미는 '전부 아니면 전무' 방식에 따라왔었고 원어민 수준, 통달 수준 등의 사실상 모호한 기준에 맞춘 의미일 뿐이다. 공용화 국제사회의 자연스러운 산물로서의 다언어사회에서는 '조금 그리고 조금' 접근법이 유용하다는 조언을 하고 있다.

유전적이건 후천적이건 간에 다언어구사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언어를 학습할 때 즐거움을 느끼며 습득했다는 것. 나름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외국어 공부의 동기가 있었다는 것. 그 누구도 스펙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시샘 어린 눈빛으로 다언어구사자들을 바라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그렇겠지..하는 생각이 더 컸던 건 사실이다) 고수도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무한한 노력을 더하듯이 그들의 평소 언어 학습 노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전설로 일컬어졌던 메조판티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전율이 찌릿~! 할 정도였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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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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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 꼬박 하루 붙잡고 있으니 다 읽혀진다. 

2002년에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읽다가 (당시에는 작가가 그렇게도 유명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단순히 고양이가 나온다고 해서 읽었던)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어 내 취향이 아닌 책으로 단언하며 중간에 집어치웠는데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시점에 현암사 소세키 전집 출간을 계기로 다시 한번 도전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어느 출판사의 것이건 하물며 발로 쓴 번역이어도 1장은 원래 재밌다.

중반 이후부터가 관건이다. 고양이도 한해 나이 먹었다고 점잔을 빼는지 칼날같은 비유가 고양이의 목소리에서 점점 사람의 대화로 바톤을 넘겨주는 경우가 많아 주제가 조금만 생소해도 머리가 지끈거릴판인데 어려운 한자투, 일본식 표기 등이 송태욱 번역의 현암사 책은 한글로 순화가 잘 되어있는데다가 문장 줄 간격 등 편집면에서도 세련되어있어 술술 넘어간다. 번역의 힘이란게 이렇다.

간결한 문장과 세련된 편집 덕에 드디어 완독을 하게 됐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이거 결말이 이렇다고????!!!!!!"

나름 반전의 결말을 맞있어 한동안 충격에서 못 헤어났다.

 

그 유명한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로 시작되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주요 인물이 세 사람이다.

우유부단하고 냉소적인 중학교 영어선생 구샤미(고양이의 주인되시겠다), 내뱉는 말의 90%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이 힘든 허풍쟁이 메이테이, 이들의 장단을 맞추는 간게쓰. 모두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에 속하는 자들로 그들을 통해 일본 사회상을 꼬집고 있다.

 

『 원래 인간이라는 족속은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여 다들 우쭐거리며 거만하게 군다. 인간보다 좀 더 강한 자가 나와 혹독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거만하게 굴지 모른다. 』 - p25 

『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 - p49

 

그런대로 만족하며 평생 이름없는 고양이로 살아갈 생각을 하며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는 '나' 고양이가 책을 이끌어간다.

인간들은 참으로 제멋대로 구는 족속이라며 초반에는 인간들이 하는 행태 자체에 쓴 소리를 퍼붓는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쓴 소리만 하고 있느냐? 

고양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담는, 진지해보이는 소세키 작가에게 이런 면이 있단 말인가 할 정도로 어느 장면에선 빵 터지기도 하고, 킬킬거리기도 하고, 이거 허당 기질이 대단한걸? 하는 느낌을 몇번이고 받았다.

 

『 나는 새해 들어 다소 유명해졌으니 비록 고양이지만 다소 자부심이 드는 것 같아 흐뭇하다. 』 - p37

 

이렇게만 적어두면 반만 이해되는 셈이니 현암사 책이 두꺼워진 이유는 바로 친절한 각주에 있다. 읽으면서 동시에 이해를 해야 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책 아래 간략히 설명을 덧붙이고 있어 바로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바로 1905년 1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장을 하이쿠 전문잡지 호토토기스에 발표하고나서 호평을 얻어 연재가 계속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각주를 통해 바로 알지못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소세키만 파고든 전문 학자도 아니고 일반독자에게는 그래서 이번 현암사 책이 매력만점이란 것.

 

인간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사상과 언행을 평가하고 싶어하는 '나' 고양이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고양이로서 진화의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며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고양이가 떡국떡을 몰래 먹고 떡이 이에 박혀 곤란해진 장면에서는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소세키 작가가 전생에 고양이였나 싶을 정도로 '나' 고양이의 속마음을 그럴싸하게 표현하고 있어 한바탕 웃게 만든다.

『 씹어도 씹어도, 10을 3으로 나눌 때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 - p55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소세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다.

일본에서 상, 중, 하편 세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중편에서 작가의 말에 소세키의 친구 시키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시키와는 문학을 매개로 비판도 주고 받는 절친한 친구였고 시키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의(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 작가가 세상에 태어난 계기가 될 정도로 시키와의 관계는 깊다. 하지만 소세키가 영국 유학 당시 투병중이던 친구 시키의 편지에 답장을 더 해주지 못한 채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미안함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소세키는 얼굴때문에 소심함이 많았다한다. 천연두 자국이 남아 곰보가 된 자신의 모습을 고양이의 말을 통해 비하한 장면이 나온다.

『 무슨 업보로 이런 묘한 얼굴을 가지고 염치도 없이 20세기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일까. 』 - p419

 

그 외에도 소세키는 위선적인 교양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 자기본위의 이기주의 등 개인, 사회, 국가의 군상을 곳곳에서 풍자한다. 소세키가 살고 있던 메이지 시대는 문호개방으로 서양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풍토였는데 서양 문명 따위 그런식으로 따라해봤자 틀려먹었다며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니체의 초인론을 들먹이며 민족성과 내셔널리즘의 일면만 받아들이는 군국주의 국가의 당시 사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듯 현실 세계를 '나' 고양이의 눈을 통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세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겨우 10여 년의 작품활동기간임에도 소세키는 일본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일본 국민작가로 불린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정면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비판적 시각으로 다양한 비유와 은유를 통해 반영하기 때문에 일본 국민작가로서의 폭넓은 독자층을 얻고 지속적인 지지를 받아오게 된 것이 아닐까. 10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고전에서 받는 고리타분함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 별반 다를것도 없네 싶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나' 고양이가 말하고 있는것이 공감이 되는 이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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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
킴벌리 맥크레이트 지음, 황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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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 주연과 제작으로 영화화 결정된 소설,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눈빛을 가졌으면서도 모성 연기도 일품인,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듯한 니콜 키드먼과 이 소설 속 아멜리아의 엄마 케이트의 이미지가 참 잘 어울리겠다 싶다.

 

미드 가십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구성이다.

시시껄렁한 학교 소식이 가십 블로그에 적나라하게 올려지고 페이스북, 휴대폰 등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들은 SNS 시대에 사는 어른들조차 차마 짐작하지 못할 장면이 많다. 

 

뉴욕 브루클린 사립학교에 다니는 다섯 살 아멜리아는 안정감 있는 직장을 가진 서른여덟 살 싱글맘과 함께 사는 모범생 엄친아다. 부쩍 근래 변덕 부리고 작은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엄마의 시선에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었던 아이.

하지만 숙제 표절로 정학을 받게 되었다는 학장의 연락을 받은 엄마 케이트가 학교로 딸을 데리러 가던 도중에 아멜리아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은 상황을 접하게 된다.

 

『 아멜리아가 자살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탓이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도,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트는 완전히, 결정적으로, 그리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 - p59

 

어느 날, "아멜리아는 뛰어내리지 않았어" 라는 익명의 문자를 받게 되면서 엄마 케이트와 딸 아멜리아 각각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아멜리아가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되었는지, 정말 자살인 것은 맞는지, 학교생활, 엄마의 과거 등 비밀스러운 사건들이 샅샅이 파헤쳐지는 가운데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케이트의 시선에서는 직장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싱글맘으로서의 모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아멜리아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이라면? 자신이 생각보다 아멜리아를 잘 모르고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 죄책감과 슬픔, 충격에 빠져든다.

아멜리아의 시선에서는 늘 집에 없는 엄마여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엄마를 자랑스러워 하고 엄마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다가선다. 하지만 스스로 준비가 덜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결국 비밀이 비밀을 낳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다.

 

『 이렇게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못 챌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동안, 나는 엄마가 늘 집에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엄마가 필요할 때 엄마는 항상 눈치를 챘으니까.

그리고 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정말 필요한 지금, 엄마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 - p363

 

『 여태껏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있었는데,

막상 물어보니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 - p365

 

맥파이스 비밀 클럽에 가입하게 되면서 아멜리아의 삶이 꼬이게 됨과 동시에 비밀이 하나둘 늘어나는 아이의 생활이 엄마 입장에서 남 같지가 않다. 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짚이는 데가 분명 있을 테지만 서로 간에 믿음이라는 장벽 아닌 장벽을 두고 결국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쓰라리다.

더는 나빠질 수 없겠다 싶을 때마다,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는 늪과도 같은 상황.

아이들의 은밀한 사생활과 학교 문제, 부모와 아이 관계, 직장생활... 이 모든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뻔한 정석 같은 답을 스스로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빠지는,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율 있게 진행되고 있어 두툼한 분량이지만 궁금해지는 결말에 손을 놓지 못하고 하룻밤 새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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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너머, 아하! - 기성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오강남.성소은 엮음 / 판미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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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으로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이야기를 고루 접하고, 표층적인 종교에는 실망을 해버린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책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종교와 종교간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어 편한 마음으로 읽은 종교관련 교양서였다. 

 

믿습니다월드 울타리를 나와 총체적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목소리.

 

『 종교 너머, 아하! 』 라는 것은 각 종교들이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를 넘어 서로 소통하고 대화할 때 "아하!"를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염원은 실은 말이자, 인류보편적인 '내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바탕으로 개별 종교를 넘어 종교가 본래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속내', '심층', '영성'에 관심을 가져 참된 의미의 '아하!'가 가능함을 발견한다는 의미를 가진 현재의 제도적이고 개별적인 종교를 넘어 가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현재 우리 주위에 있는 병리적 종교 현상을 진단하고 그 치유책을 처방하고 있는, 10인의 이야기 모아 엮은 책 < 종교 너머, 아하! >

 

표층 종교가 아닌 참나를 발견해 심층 종교로 심화하는 과정,

'하나'라는 사상 부각과 그 의미,

한국이 세계 문명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적시하는 희망의 메시지,

믿음 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리며 종교와 철학 사상, 영적인 문제와 현대 과학에 관한 통찰을 다루는 종교 전반에 관한 총체적이고 원론적인 글 네편과 더불어

 

유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성과 역할,

성서 번역의 기본 방향과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을 읽을 때 염두할 기본 원칙,

작은 교회 이야기,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현실 적시와 나아갈 방향성,

동학의 전통과 종교로서의 의미,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강연한 도법스님의 생명 평화 이야기.

이렇게 필자들이 속하거나 전공하는 개별 종교의 변화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다룬 여섯편의 글을 포함해 모두 한국의 종교 상황을 염려하고 정신적, 종교적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판 같은 글이 담겨있다. 

 

『 종교의 중요한 키워드 네 가지는 진리, 깨침, 변화, 자유다 』 - p25

 

예수의 회개하라의 회개는 의식의 변화라는 메타노이아를 뜻하고, 불교의 성불하십시오는 깨침을 이루라는 의미며, 유교 역시 무조건적인 믿음은 참된 의미의 믿음에 방해가 될 뿐이라 한다. 이기적인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내면적 훈련으로서의 심층 차원의 신앙을 가질 때 참된 사랑이 저절로 나오고 자기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대신 다원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한다.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 역시 서로간의 조롱, 비난, 폄하만 있는 진화론과 창조론간의 적개적인 대결이 아닌 지식, 믿음, 과학, 종교 이 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존중, 진정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 - 아인슈타인

 

우물 안에 있을 때의 제약된 시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운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행동하며, 옹졸한 정신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정신 상태를 바탕으로 참된 의미의 종교, '나 중심' 혹은 '우리 중심'에 맴돌지 말고 교리적 갈등과 모순을 극복한 종교적 성숙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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