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 라인업을 쭉 보다가 어쩌다보니 최근 자꾸 얽히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를 상영하길래, 그래, 나도 이 참에 오랜만에 영화나 몰아서 보자, 하고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상영하는 영화를 쭉 훑었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영화가 <엔젤스 셰어>와 <디테일스>였는데, 호기롭게 세 편을 같은 자리에서 연달아 볼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허리 건강을 생각해 <엔젤스 셰어> <안나 카레니나> 두 편만 예매했다. 네이버 영화 소개(부산국제영화제 때 소개로 보임)에서도 씨네큐브 영화제 작품 소개가 뜬구름 잡는 듯해서 그저 거장 답지 않은 유머가 있는 영화, 정도로만 기대했는데 보는 내내 낄낄대기 바빴다. 

 


  어린 시절부터 원수처럼 지내는 동네 친구와 싸우다 잡힌 로비. 전적이 있는 터라 원래대로라면 교도소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임신한 여자친구 때문에 개과천선하고 있다는 변호로 가까스로 지역봉사활동으로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 로비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그냥 그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지역봉사활동 담당 직원과 교류하면서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봉사활동 담당자와 위스키 양조장에 견학을 다녀온 로비는 위스키에 관심이 생겨 재미삼아 공부하다가 자신이 위스키 감별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곧 희귀한 위스키가 경매에 나와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친구들과 위스키 탈취라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운다. 

 


  사람도, 환경도 생동감과는 거리가 먼 마을. 여자친구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지낼 곳은커녕 혼자 지낼 방 한 칸 없이 친구 집을 떠돌며 사는 로비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를 얽매고 있는 과거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의지와 없는 일 때문에 박탈당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과거를 떨치게 해준 것은 바로 위스키였다. 자신의 재능을 우연히 알게 돼 이를 살려 인생의 소소한(?) 역전을 꿈꾸는 모습은 그 상황이 지극히 불법적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유쾌하다. 윤리적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면 사실 말도 안 될 터지만, 관객들도 어느샌가 공범자가 되어 이 악동들이 맞이한 비극(?) 앞에서 함께 탄식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긴다. (그러고보니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에 경험했다.) 

 


  사실 그냥 영화 시간 맞춰서 골라잡은 영화였지만 얻어걸린 게 잭팟(!)이라 연말에 좋은 선물 하나 받은 기분이었다. (오죽했으면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귀차니즘을 딛고 글까지 쓰고 있겠는가.) 물론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준다거나, 감동 또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때로는 관객과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냥 웃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 지쳐 있는 내게 괜찮다고, 그냥 웃어넘겨버리라고 장난쳐주는 친구 같았던 영화. 찾아보니 2013년에 정식으로 개봉할 것 같던데, 그때 다시 한 번 이 악동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덧) 영화를 보고 나오면 어느샌가 흥얼거리게 되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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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12-1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볼테야요!!
이매지님 잘 지내시죠??^^

이매지 2012-12-16 12:16   좋아요 0 | URL
개봉하면 꼭 보세요! ㅎㅎㅎ
나비님 오랜만이예요. 와락와락.

카스피 2012-12-15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글을 올리실 정도니 상당히 재미있는 영환가 보네요^^

이매지 2012-12-16 12:17   좋아요 0 | URL
정말 저 영화 리뷰 정말 오랜만에 썼어요. ㅎㅎ

amator 2013-01-21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얻어걸린 잭팟'이라기엔 저는 무척 기다리고 있던 영화였는데 재밌으셨나보네요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 할 때 딱 출장가는 바람에 여러 작품을 놓쳐서 무척 아쉬웠어요.
혹시 아직 안보셨다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님의 다른 작품도 한 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랜드 앤 프리덤', '빵과 장미', '티켓',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다~ 좋습니다. :)

이매지 2013-01-21 09:32   좋아요 0 | URL
사실 전 <안나 카레니나>에 더 기대를 하고 있었거든요 ㅎㅎ
개봉하면 한 번 더 보려고 하는데 영 개봉일이 안 잡히네요 ㅠ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봤는데 아직 못 본 작품이 많네요.
언제 시간내서 추천해주신 다른 작품들도 봐야겠어요! ^^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누군가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탈원전을 외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대체에너지 사용에 좀더 관심을 쏟았으며, 누군가는 현대사회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경제성장을 미덕으로 여겨 끊임없이 '할 일'을 만들어내고,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를 외치며 살아온 시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경제적 풍요'가 아닌 우리 아이들과 자손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먹고 마실 공기와 깨끗한 물, 그리고 안전한 음식임을, 그리고 이 지구가 서로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임을 깨닫는 이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4월 총선 때 녹색당을 지지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찌보면 하나의 증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슬로라이프'의 제창자이자 『슬로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쓰지 신이치 선생님은 '돈과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사람들의 '할 일' 리스트가 가족 문제를 비롯해 자살, 교통사고, 전쟁, 빈부격차 등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욕망에만 근거한 모든 '할 일'. 쓰지 신이치는 이런 욕망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를 자꾸만 쫓기게 하는 시간과 화해하지 않고서는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하지 않을 일 리스트'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일 리스트'는 소위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의 '시간 관리술'이 아닙니다.

 

  •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 쓰지 않기.
  • 나무젓가락 쓰지 않기.
  • 버스나 전철에 급히 올라타지 않기.
  • 잠자는 시간 아까워하지 않기.
  •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않기.
  • 자동판매기 이용하지 않기.
  • 식사시간에 일을 들고 오지 않기.
  • 화장실에서의 시간을 소중히 하기.

 

  이처럼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하지 않을 일'을 제시합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시작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게 되고, '잘못된 부분'을 줄임으로써 삶의 행복을 채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체 시스템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과잉과 할 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기꺼이 '즐거운 불편'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면 효율과 경쟁에 치이는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느끼게 되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어찌 보면 조금은 싱거워 보이는 주장이지만 읽고 나면 어느샌가 삶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게 되는 걸 느끼게 됩니다. 결국 행복은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것이로구나 싶었던 『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 한 박자 쉬어가고 싶은, 마음의 여유를 잃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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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6-18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다른 의미지만 저도 오늘일은 내일로 미루자 입니당^^

이매지 2012-06-21 10:00   좋아요 0 | URL
어찌되었건 일은 줄지 않습니다. ㅎㅎㅎ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한 연재글로 인해 이소장과의 가벼운 논쟁으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뜨겁게 시작한 <권력과 인간>은, EBS 평생대학-역사 이야기 강연, 가을 고궁 답사 등으로 마지막까지 그 열기를 이어갔습니다. 총 조회수 4만 2천여 회, 댓글 수 5천 개 의 기록을 남기며 성공리에 끝난 <권력과 인간>. 12월 연재가 끝난 뒤 많은 분들이 단행본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게시판으로도, 전화로도 출간 시기를 문의주신 분들께 번번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라고 말씀드리면서 담당 편집자로서 빨리 책을 소개하고픈 안타까움과 연재글보다 완성도 있는 책으로 소개하고픈 욕심 사이에서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때로는 장을 병합하고, 때로는 사족 같아 보이는 부분은 쳐냈고, 연재시에 있었던 사소한 오류 몇 가지를 수정하는 등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선생님과 연재원고를 다듬어갔습니다. 각 장에 들어가는 아이콘 하나, 도판 하나도 고심 끝에 선택했습니다. 표지도 수많은 B컷을 뒤로했습니다. 곤룡포가 떠오르는, 궁궐의 이야기를 담았구나 싶어지는 붉은빛의 표지로 드디어 출간된 <권력과 인간>. 그 붉음은 왕실의 상징으로, 그리고 원고의 뜨거움의 상징처럼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아니 한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산> <성균관 스캔들> <영원한 제국> 같은 드라마, 영화, 소설로 끊임없이 재해석, 재생산되어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어땠을까요? 2010년 <한중록>을 번역, 주석하면서 정병설 선생님은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일차적인 해석도 잘못되고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논거를 토대로 학문적 가설이 아놀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몇 명이 계속 잘못을 증폭해가며 그릇된 학설을 정착시킬 수 있었을까? 왜 학계에서는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을까?" 정병설 선생님은, 사도세자가 미쳤다 하여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도세자가 약소 당파를 편들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 같은 논의가 있었으나 두 가지 설 모두 제대로 된 근거자료가 뒷받침되지 못했다고 보았습니다. <권력과 인간>은 이렇게 제대로 된 학문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그동안 오독해온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자 한 첫 성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권력과 인간>을 통해 맹비난을 받은 이덕일 소장측에서는 정병설 선생님의 논의에 대해 혜경궁 홍씨가 자기 집안을 변명하고자 쓴 <한중록>을 토대로 하고 있으니 신뢰할 수 없다, 노론사관(식민사관)이다 등으로 반박합니다. 하지만 노론사관(식민사관)에 대한 논의는 뒤로하더라도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만'을 토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 당시의 다양한 사료를 두루 읽으며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오늘날 우리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남은 자료를 통해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애쓸 뿐이지요. 제대로 책을 읽지 않고,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기보다 <권력과 인간>을 찬찬히 읽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사도세자의 고백>과 <권력과 인간>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분명 흥미로운 독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책을 만들면서 두 책을 비교해서 읽어봤는데, 실록의 같은 부분이라 해도 독법이 전혀 달라 놀랐습니다. 요즘은 원문도 쉽게 열람할 수 있으니 세 텍스트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권력과 인간>을 통해 만나는 조선의 어둠은 분명 불편하고 아픕니다. 권력을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하고, 권력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없습니다.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신원하기 위해 사실을 교묘히 편집해 아버지상을 새로이 만들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진실은 조금씩 왜곡됩니다. 가슴답답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사도세자의 죽음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더 밝은 역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가슴 아프긴 하지만 이 과정을 함께 나눌 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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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하죠. 불구경이야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릴 때도 있으니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지만, 싸움구경은 불구경보다 물질적/인명적 피해가 덜해서인지 정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만 보면 그 싸움도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감정상의 다툼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 이권을 놓고 다툴 때도 있고, 사회 구조상 다툴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으니 옛날 사람들도 싸우긴 싸웠을 텐데, 요즘 싸움이야 오가면서 또는 TV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옛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요?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책, 바로 <조선의 묘지 소송>입니다. 

  에헴, 하고 잰체할 것만 같은, 평소에는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았던 양반 사대부들이 죽기살기로 싸운 소송이 있었습니다. 바로 묘지 소송인 산송(山訟)입니다. 조선시대의 3대 민사 소송 중 하나인 '묘지 소송(산송)'은 말 그래도 '묘지'를 놓고 다툰 소송입니다. 요즘에도 명당 자리를 놓고 다툰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조상 묘자리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조선시대의 묘지 소송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풍수지리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유교 이념이 확립되면서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툼이 시작됩니다. 묏자리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종법질서의 확립과 부계의식 강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런 유교 의식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평소 토지나 노비 매매시에는 대리인을 내세워 진행했던 양반 사대부들이 패싸움까지 벌이면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산송에 매달렸습니다. 단순한 땅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교'를 지키는 길이자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인 산송. 사실 처음에 <조선의 묘지 소송> 원고를 받아들었을 때는 고문서 자료가 많아서 어렵게 느껴졌는데, 원고를 찬찬히 읽어가다보니 그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무려 250년 동안이나 징하게 다툰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이야기도 그렇고, 시집간 누이의 묘를 파내려고 하면서 "저희는 차라리 누님의 죄인이 될지언정 조상의 죄인은 될 수 없"다고 호소하는 형제들의 이야기의 흥미진진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관에서 묘를 파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어떻게든 파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불법적으로 투장한 무덤이라도 남의 무덤은 함부로 파낼 수 없어서(조선시대에 남의 묘를 파내는 것은 살인죄와 똑같이 처벌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직접 파내야 했는데, 이를 이용해 날이 추우니까 땅이 얼어서 못 파겠다, 농번기라 바빠서 못 파겠다, 풍수상 3월과 9월에는 묘를 옮기지 않으니까 못 파겠다 등 갖가지 꼼수를 부리며 차일피일 기한을 미루고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하는 사람이야 속이 터질 일이지만 제3자 입장에서 재미있는 싸움구경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2010년 론칭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가 어느덧 열 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어 자연스레 책을 펼쳐볼 수 있게" 하고자 한 시리즈의 목적에 <조선의 묘지 소송>만큼 잘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이 반영된 싸움구경. 점잖은 양반들이 계급장 떼고 제대로 한판 붙는 모습을 함께 구경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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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죄를 고하여라에서 산송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여튼 대단하네요..ㅡㅡ;

이매지 2012-02-25 00:37   좋아요 0 | URL
<네 죄를 고하여라>도 참고차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ㅎㅎ
이러나 저러나 대단한 사람들.

BRINY 2012-02-25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산송이군요. 교과서에 딱 한줄 나오는데, 읽어두면 수업시간에 재미난 얘기거리가 되겠네요.

이매지 2012-02-27 09:12   좋아요 0 | URL
엇. 교과서에도 산송이 나오는군요. ㅎㅎ
타깃층을 고등학생부터 잡고 있는 책이라 학생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재미난 얘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지난 금요일 아침.
전날 정민 선생님의 까페 연재 뒤풀이가 있어서 늦게 잠이 든 터라 비몽사몽해서 핸드폰 문자를 보니 문자가 6건이나 와 있었다.
밤 사이에 뭔 일인가 싶어서 봤더니 죄다 씨티카드에서 온 문자. 

씨티카드(6*8*) ㅇㅇㅇ님, 12/09 05:38 승인내역 [USD] 84. 53 MACY'S EAST #752 

씨티카드(6*8*) ㅇㅇㅇ님, 12/09 05:40 승인내역 [USD] 250. 00 MACY'S EAST #752

씨티카드(6*8*) ㅇㅇㅇ님, 12/09 05:41 승인내역 [USD] 250. 00 MACY'S EAST #752 

씨티카드(6*8*) ㅇㅇㅇ님, 12/09 05:48 승인내역 [USD] 120. 91 MACY'S EAST #752 

씨티카드(6*8*) ㅇㅇㅇ님, 12/09 06:11 승인내역 [USD] 363. 78 WALGREENS
씨티카드(6*8*) ㅇㅇㅇ님, 승인관련으로 한국씨티은행 고객상담실로 연락부탁드립니다.


어제 집에 올 때도 지하철 나오면서 카드를 찍었는데 이게 무슨 자다가 날벼락. 
일단 출근은 해야 했기에 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나서면서 카드사와 통화를 했다. 
시간이 너무 일찍이라(7시 30분) 통화가 될까 싶었지만 다행히 상담원과 금세 연결이 되었다.

이러저러하다고 얘기를 했더니 카드 도용인 것 같다고 일단 카드 정지부터 시키겠다고.
자세한 사항은 리스크 관리 담당자가 직접 연락을 주겠노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드디어 담당자와 통화.
담당자 말로는 포스기에서 카드 데이터가 유출이 되어서 복제 카드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했다.
5건은 승인이 났는데 6번째로 월마트에서 긁으려다가 승인이 거부되니까 그 뒤로 카드를 안 쓴 것 같다며
내 과실이 전혀 없기 때문에 피해액은 100퍼센트 보상이 된다고 했다.
뭐 보상 신청서와 신분증, 카드 사본을 스캔해서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거기에 카드 재발급까지)이 있었지만,
금요일 오전 내내 나를 패닉으로 만든 카드 외국 도용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1000달러 넘게 긁어재낀 범인들의 수법도 놀라웠지만,
(아... 나도 못 해본 1시간에 120만원 써보기를 니놈들이...!)
카드의 실물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도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포스기를 해킹해서 카드 데이터를 빼갈 수 있다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지만 당장 다른 카드의 해외 결제를 막아버렸다.

마냥 현금 박치기를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카드 사용에 대해 크게 데인 지난주.
카드사에서는 어디서 카드 데이터가 유출된 것인지 조사 후에 알려준다고 했는데,
사실 그거 알아도 어디서든 이제 안심하고 긁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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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1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년전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요. 카드회사 두 군데에서 전화가 왔는데 몇월몇일몇시에 해외의 무슨무슨사이트에서 결제시도 하셨냐고요. 물론 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어요. 카드회사 말은 제 카드로 결제를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트가 카드회사쪽에서 의심사이트로 주시하고 있던 사이트였나 뭐 그런 거였던 같아요. 그래서 결제거부가 되었고 확인차 전화걸었다고... 두세달 간격으로 두 개의 카드가 연속해킹, 복제 당해서 황당했어요. 하나는 별로 안 쓰던 카드여서 바로 해지신청했고, 다른 하나가 가장 많이 쓰는 카드여서 은행에 가서 재발급 신청을 했거든요. 거기 담당자한테 물어보니 은행직원도 당한 사람있다고 ㅜㅜ 버젓이 한국에 있던 사람인데 혹시 이탈리아에서 뭐뭐를 카드로 결제했다고 하더래요. 저도 당시에는 정말 초당황 + 초황당 = 패닉절정 이었어요. 카드를 죄다 재발급 받아야 하나, 하구요.

이매지님도 해당카드 재발급받는게 좋을실듯. 귀찮아도 찜찜한것 보단 나을거예요.

이매지 2011-12-11 23:43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군요. ㅠㅠ
카드사 직원 말로는 카드 긁은 게 4군데는 백화점이고 1군데는 드럭 스토어라고 하더라구요.
주로 걔들이 카드를 그런 데서 단시간 안에 샤샥 긁는다며 ㅠㅠ
두세 달 간격으로 두 개의 카드가 연속해킹, 복제라니 진짜 황당하셨겠어요.
진짜 금요일 오전에 패닉이 되서 이걸 내가 물어내야 하면 어쩌지 그러고 있었어요 ㅠㅠㅠㅠ
저도 일단은 카드 재발급 받았는데 다른 카드도 안심 못하겠어요 ㅠㅠ

BRINY 2011-12-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금방 대처할 수 있으셔서 다행이네요! 그런 식으로도 카드 복제가 가능하다니! IC칩 있는 카드는 좀 안전하려나요?

이매지 2011-12-11 23:45   좋아요 0 | URL
카드 단말기에서 카드번호가 유출이 된 거라
IC칩 카드라고 해도 별 수 없지 않을까 싶은데 잘 모르겠네요. ^^
24시간 상담원 운영을 하는 카드사가 진짜 고맙더라구요. ㅠㅠ

Mephistopheles 2011-12-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도 빨리 신고하셔야 100%보상이 되지 늦게 신고하면 에누리없이 덤탱이 쓰게 된답니다.

이매지 2011-12-11 23:56   좋아요 0 | URL
어우, SMS로 카드 결제 내역 오게 해놔서 다행이었네요.
근데 사실 처음에는 결제 내역보고 벙쪄서 긴가민가했었어요.

마노아 2011-12-12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식겁했어요.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영 찝찝하네요. 카드 안 쓰고 살 수도 없고 참..;;;;

이매지 2011-12-12 11:06   좋아요 0 | URL
그르니까요. 카드 안 쓰고 살 수도 없고. 참;

가넷 2011-12-1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일도 있네요.-_-;;; 저도 SMS로 카드 결제 내역 오게 해놔야 겠네요... ㅠㅠ;;

이매지 2011-12-12 11:07   좋아요 0 | URL
SMS로 꼭 받으세요!
긁을 때마다 와서 귀찮긴 하지만 그거만큼 확인이 금방 되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가넷 2011-12-1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튼 잘 해결되서 다행이네요. 이래나 저래나 나쁜넘들이 너무 많아서 신경쓸일이 많아지네요.

이매지 2011-12-12 11:07   좋아요 0 | URL
진짜 이래나 저래나 나쁜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그냥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살고 싶은데 가만 냅두지를 않네요. ㅠㅠ

비연 2011-12-12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 보상받으실 수 있다고 하니. 그래도 그 정신적인 충격과 찝찝함은 위로가 안 되시겠지만..ㅜ

이매지 2011-12-12 11:08   좋아요 0 | URL
금요일 출근길에 정말 패닉상태였어요 ㅠㅠ
보상이 100프로 되니 정말 다행이예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돈까지 물어내야 했으면 ㅠㅠ

마늘빵 2011-12-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게 어떻게 해외까지 갔어요. 이런. 덜컥했겠네요.

이매지 2011-12-12 13:22   좋아요 0 | URL
국내에서 데이터만 빼가서 그쪽에서 실물을 만들어서 사용한 모양이예요.
직원 말로는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ㅠㅠ

LAYLA 2011-12-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거 보면 카드사 시스템이 참 잘 갖춰져있다 싶어요.

이매지 2011-12-12 15:32   좋아요 0 | URL
어쨌든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는 거니까 다행이죠 ^^

LAYLA 2011-12-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놀래셨겠어요 통닭통닭

이매지 2011-12-12 15:33   좋아요 0 | URL
통닭통닭. 문득 통닭이 먹고 싶어지는.. ㅎㅎㅎ

조선인 2011-12-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뉴스에서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군요. 일단 저의 경우 모든 카드의 해외결제를 차단해놨어요. 여행 갈 때만 푸는 식. 좀 귀찮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카드사 권유를 따른 건데... 카드사 말 듣기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매지 2011-12-13 18:04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제 카드는 심지어 주인보다 먼저 해외 땅을 밟았군요 ㅠㅠ
해외 나가지도 않으면서 해외 결제는 왜 열어놨나 모르겠어요 ㅠㅠ

분홍쟁이 2011-12-1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 깜짝 놀라셨겠어요 @.@ 저도 예전에 카드 분실한 적이 있어서 그 후로는 몇 번씩 확인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답니다;;

이매지 2011-12-13 18:05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카드 분실한 적 있었는데 그때는 다행히 바로 알아차려서 바로 정지.
편하긴 하지만 정말 카드가 돈보다 더 신경 쓰인다니까요 ㅠㅠ

2015-04-05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6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