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절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신기술과 디자인의 혁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상품에 열광할 때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주고 즐거운 울림을 일으키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네 일상에 가려진 사물들, 그것들이 오랜 시간 존재하는 이유는 기능이 탁월하다거나 외형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환경과 사물이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마법과도 같은 추억 때문이다. -20쪽

삶의 질이라는 건 조금 더 좋은 공기와 신선하고 풍족한 음식, 깨끗한 잠자리와 같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별것 아닌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도시 한복판에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만한 많은 공원은 영국 사회의 큰 장점이다. 건물을 지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넓은 녹지를 조상과 후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자산으로 여긴다. -62쪽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길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찾고 실천하려는 것이 정원 문화에 담긴 기본 정신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생산한 과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비되지 않는 디자인을 진정한 디자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가꾸어온 정원처럼 장기간 꾸준한 소비를 이끌 수 있는 디자인이다. 논에 보이는 것만이 디자인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환경을 지속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만들고 사용한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 것처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69쪽

옛것의 가치를 재탐색하고 확장 가능성을 연구해 쓸모를 생산하는 것은 런던 디자인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과거의 유산이 투영되지 않은 미래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77쪽

테이트 모던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업체 헤르조그 앤 드 메롱은 기존 건물의 외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내부 공간을 미술관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당시에는 수많은 혹평이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대중 문화와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테이트 모던을 이루는 특화된 콘텐츠는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전체 일곱 개 층 중에서 네 개 층이 전시관으로, 1층의 넓은 터빈 홀은 매 시즌마다 미술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 공간으로 활용된다. 애니시캐푸어나 미로슬라브 발카와 같은 설치 미술 대가들의 작품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미술은 어렵다거나 조용히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86쪽

사실 박물관에 가면 전시된 것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꼭 봐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이런 생각이 작품을 향한 개인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박물관을 멀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왠지 관람 시간 종료 전까지 머릿속에 꾹꾹 채워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브이앤에이가 행한 프로젝트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박물관의 체제를 개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변화를 모색하는 데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생각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학술적이고 엄숙하던 박물관이 문화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향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참여는 박물관의 진화를 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약간의 여지만을 만들 뿐이다. 누군가가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는 여지,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여지, 편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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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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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선율에 맞춰 공원 길을 달렸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램프가 어두운 길을 비추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와 윤상의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 내 숨소리도 들렸다. 머리 위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고, 저녁 공기가 모두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28~9쪽

독학의 절정은 실패하는 과정에 있다. (요즘 같은 취업 대란의 시대에 이런 말 하기 겁나지만) 실패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취향에 맞지 않는 노래들을 많이 들어봐야 내가 어떤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취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취향에 맞지 않은 음악들을 무수히 걸러내고 남은 '내 노래'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2쪽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 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93~4쪽

음악도,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사랑해) 그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풀기 위해(흠, 푼다니까 좀 야릇한 어감이 되어버렸지만) 반복해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쪽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134쪽

노래를 듣다가 울컥,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 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후에야 닦아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거다. 듣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갑자기 한숨을 쉬게 되고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들을 때마다 슬픔은 반복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래에 익숙해지면 슬픔은 사라지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그 노래를 들으면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147~8쪽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묻게 된다. -150~1쪽

사람들의 성격이 모두 다르다는 게 놀라울 때가 있다. 각각 고유한 퇴적층이 되어 유일한 삶과 생각들을 쌓아올리며 자신만의 성격을 완성했을 테니 성격이 다르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문득 생각하면 놀랍다. 동물들도 그럴까. 같은 동물이라고 해도 태어난 시간이 다르고 자라온 동네가 다르니 자신만의 성격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동물 애니메이션 때문에 동물의 입장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같은 종의 고양이라도, 같은 종의 개라도 성격과 취향과 철학이 다를 것 같다.
'한번 정해진 성격은 영원히 그 사람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내 생각엔 (우리가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성격 역시 변하는 것 같다. 성격을 고쳐야지, 라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큰일을 겪거나 중요한 사건을 맞닥뜨리고 난 후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는 알지 못하더라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아, 그때 그래서 내가 변한 게로군' 하고 깨닫게 된다. -172~3쪽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180쪽

모든 음악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된다. '실용음악학과'라는 학과 이름을 들을 때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그럼 뭐야, 실용음악의 반대는 무용음악인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18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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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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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에 믿음직한 작가를 꼽자면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가 아기자기한 장정으로 출간됐다. 표지도 그렇지만 면지까지 귀욤 지수가 만점이라 어쩐지 나도 장밋빛 고딩이 된 것 같은 기분(하지만 현실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되는데, 그가 그리는 고등학생의 일상 미스터리, 게다가 그의 데뷔작라니 오랜만에 책 때문에 두근두근했다.

 

  이야기는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가 세계여행중인 누나에게, 누나가 고등학교 시절 속했던 동아리인 고전부에 입부하라는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누나는 호타로에게 그냥 적만 두어도 된다며 "누나의 청춘이 깃든 고전부를 지켜"달라고 반쯤 강권한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라는 좌우명을 갖고 공부도, 스포츠도, 연애(?)도 회색빛 인생을 사는 "에너지 절약주의자" 호타로지만 (합기도와 체포술이 특기인) 누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고전부에 가입한다. 하지만 고전부 동아리실에 가보니 호타로보다 먼저 와 있는 한 여학생. 겉으로는 청초한 인상이었지만 작은 궁금증이라도 생기면 "저, 신경 쓰여요"라고 말하며 호기심덩어리로 변모하는 지탄다 에루에게 어느새 말리는 호타로. 여기에 호타로의 오랜 친구이자 호적수인 후쿠베 사토시 등이 추가로 입부하면서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다. 


  '고전부'라는 이름만 보고는 고전을 읽는 동아리인가, 고전을 읽다가 그속에서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건가 지레짐작했는데 고전부는 당췌 뭘 하는 동아리인지 알 수가 없다. 고전부 부원들 또한, 몇 년 동안 부원이 없었으니 반쯤 맥이 끊겨버려 무슨 동아리인지 아는 학생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교사에게 물어볼 위인들도 아니라 "활동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아도 존재 가치가 명확하지 않은 단체는 쌔고 쌨으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며 어물쩍 넘어간다.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지만, 지탄다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신경쓰이게 한' 삼촌과 관련된 일을 호타로에게 털어놓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여기에 더해 동아리지 '빙과'를 만들기 위해) 삼촌의 흔적을 쫓으며 고전부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기본적으로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보니 일면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과거 삼촌에게 일어났던 일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지탄다의 모습도 그렇지만, '회색빛' 인물인 오레키 호타로가 자기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길로 들어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장소설로 읽든 미스터리소설로 읽든 간에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색다른 만남을 할 수 있어서 퍽 즐거웠다. 등장인물들이 축제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과정을 보면서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합창부 활동을 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함께 떠올랐다. 축제준비를 위해 계속해서 화음을 맞추고 밤 늦도록 노래를 불렀던 그 시기. 그 당시에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어쩌면 나도 에너지 절약주의자?!)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그렇게 뭔가에 달려든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추억으로 남았다. 고전부원들에게도 '빙과'를 만들며 겪은 일 같은 것이 쌓여 삶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 계속 이어질 고전부 시리즈가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전부원들을 빨리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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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밤의 코코아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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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봄, '봄이구나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솔솔 들게 한 <서른 넘어 함박눈>을 읽은 뒤 새삼 다나베 세이코의 매력에 빠졌다. 이 할머니는 어쩜 이렇게 오글거리지 않는 연애소설을 쓰시지, 싶으며 몇 작품 더 찾아 읽으려 했는데 그새 마음이 난폭하여 '연애는 무슨, 다 미워' 모드가 되어 추리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버렸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이 가고 매일매일 점점 추워지는 어느 날 <고독한 밤의 코코아>로 다나베 세이코가 다시 찾아왔다.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샌가 빠져들어 마지막 장까지 다 넘어갔는데, 읽고 나니 여자의 마음을 잘 표현한 이 할머니가 더 얄미워졌다. 무려 30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

 

  <고독한 밤의 코코아>에는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20~30대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했다. 애인에 대해서 "인생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척하면 착 통하지만 좀더 소중한 것,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연애에 빠진 동료를 "꽤 훌륭한 취향을 가진 여자였는데 지금은 좀 눈이 뒤집혀버린 느낌"이라며 약간 조롱했지만 정작 자신도 연애를 시작한 뒤 변해버려 "연애라는 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멋진 건지도 모른다"고 씁쓸해하기도 한다. 그가 건넨 따뜻한 말이 만우절 거짓말이 아닌 진심일지 모른다고 설레하기도 하고,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정말 행복했음을, 그 행복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점도 좋았다. 예를 들어, "헛된 노력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영원히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끝날 수 있다"고, "결혼도 연애도 못 해보고 싸구려 원고지만 더럽히면서 청춘을 다 날려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작가라는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은 게 좋았다.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설계해서 그 이미지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교정하고 수련해야 한다"는 '나이 화장'에 대한 이야기도 한 살 한 살 먹으며 나도 조금씩 생각해오던 문제라서 그런지 남 얘기 같지 않았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 속 여자들을 만나며, 나이는 달라도, 처한 상황은 달라도, 심지어는 시대가 달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의 마음은 변치 않는구나 싶었다. 열두 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각각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여느 연애소설처럼 마냥 핑크빛만은 아니라 오글오글한 연애소설은 닭살 돋아 못 읽는 나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한 맛이 있는, 다나베 세이코의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연륜이 묻어나는 이야기들. <고독한 밤의 코코아>라는 제목처럼 깊어가는 겨울밤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함께 읽으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녹아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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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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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읽은 뒤 노리즈키 린타로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긴가 민가 싶어서 더 읽어봐야지 싶었는데 마침 <킹을 찾아라>가 눈에 띄었다. 출간 이벤트로 '킹 카드' 찾기를 하는 걸 보고 눈이 번쩍했었는데(상품이 무려, 출판사 상관없이 8월부터 12월 사이에 출간되는 일본 추리소설 전권이었다) 그게 뭐 내 뜻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고이 묵히다가 이제서야 발굴하듯 찾아내 노리즈키 린타로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교환살인이라는 소재야 뭐 새로운 것도 아니라 뭐 고만고만한 이야기겠지 하고 큰 기대없이 읽었는데 완급 조절도 괜찮고, 은근히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어서 즐거웠다.

 

  이야기는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우연히 만난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네 사람의 창단식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이 교환살인을 하기보다 셋, 셋보다는 넷일 때 더 발각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네 사람은 교환살인에 뜻을 모은다. 저마다의 살해대상을 가진 이들은 피해자의 순서와 사형 집행인의 순서를 카드 뽑기로 결정하고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부터 괴짜인 부자 삼촌 등 한 명씩 정해진 순서대로 살해되던 중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노리즈키 총경과 그의 아들 린타로는 일련의 사건에 의심을 품게 되고, 서서히 수사망을 좁혀간다. 사중 교환 살인은 성공할까? 아니면 경찰에 덜미를 잡힐까?

 

  네 명의 범인이 등장하고, 각자가 죽이고 싶은 네 사람, 그리고 이들을 상징하는 네 장의 카드가 등장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잠깐 정신을 놨다가는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조금 복잡한 듯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표를 만들어 정리해두고 읽으면 도움이 될 듯.) 결말은 앞장을 다시 들춰볼 정도이긴 했지만, 우연히 실마리를 잡아 엉겁결에 사건을 해결한 느낌이라 이 사건의 탐정 역인 린타로의 매력(또는 재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듯했다. 이래저래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짧은 분량이라 가볍게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매력적이었다. 결말에 다소 맥이 빠졌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전개를 쭉쭉 밀고 나가서 시원스럽고 좋았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 중 아직 읽지 않은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인 <요리코를 위해>와 <1의 비극>은 이 책과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와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니 이 작품만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가 더 기대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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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11-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에 헉!했네요.

이매지 2013-11-19 09:26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쎘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