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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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해했다. 또는 직관했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인지 몸인지 어느 한쪽을, 또는 경우에 따라서 둘 다를 누군가가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 한다.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 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60~1쪽

아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논리도 믿지 않고 비논리도 믿지 않아. 신도 믿지 않고 악마도 믿지 않아. 거기에는 가설의 연장도 없고 도약 같은 것도 없어. 다만 그것을 그 자체로 말없이 받아들일 따름이지. 그게 바로 내 근본적인 문제점이야.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벽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어. -104쪽

흠, 분명 재능이란 건 때때로 유쾌하기는 해. 폼도 나고 남의 눈을 끌기도 하고 잘만 하면 돈이 되기도 해. 여자도 붙어. 그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하지만 재능이란 말이야, 하이다, 육체와 의식의 강인한 집중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나사가 하나만 빠지거나, 아니면 육체의 어딘가 연결선 하나만 툭 끊어지면, 집중 같은 건 새벽 안개처럼 사라져 버려. 예를 들어 어금니 하나가 욱신거리기만 해도, 어깨가 심하게 결리기만 해도,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가 없어. 사실이야. 난 실제로 그런 걸 체험했으니까. 고작 충치 하나 때문에, 뭉친 어깨 근육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비전과 울림이 휙 사라져 버려. 사람의 육체란 이렇게 나약하고 물러. 육체란 놈은 무섭게 복잡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사소한 것에도 자주 상처를 입어. 그리고 한번 고장이 나 버리면 대부분 회복이 어려워. 충치나 뭉친 근육쯤은 아마도 쉽게 고칠 수 있을 테지만, 못 고치는 것도 잔뜩 있지. 그렇게 한 치 앞도 모르는 허약한 기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재능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겠어? -104~5쪽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아니, 모릅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미도리카와는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핥듯이 마셨다.
"그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가요?" 하이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자격이야.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어져.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그 자격은 지금 나에게 주어졌지."
하이다는 잠시 침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말했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있는가 하면 보기 괴로운 색깔도 있어. 즐거운 색깔이 있는가 하면 슬픈 색깔도 있지. 빛이 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엷은 사람도 있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그런 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말이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어져. 그러니까 이런 산골로 흘러들어 온 거지."-108~9쪽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150~1쪽

"사람은 변하는 모양이야." 사라가 말했다.
"물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일지도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고 가슴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잘 모를지도 몰라."-175쪽

사람들은 어디서랄 것도 없이 줄줄이 밀려와 스스로 질서 있게 늘어서서 차례차례 열차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실려 갔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쓰쿠루는 감동했다. 그리고 또한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녹색 철도 차량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차량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직적으로 옮겨진다는 것.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가야 할 장소와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 -181쪽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후자 쪽이야. 오해를 풀든 말든 넌 원래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건 잘 알아."
"잘 알아?" 쓰쿠루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잘 알게 되었다는 말이야."
"쌓였던 모래가 날아가 버려서?"
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지."
"뭐랄까,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우린 역사 이야기를 하는 거야."-229쪽

"재능이란 그릇과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이즈는 쉽게 바뀌지 않아. 그리고 일정한 양을 넘으면 물은 더 들어가지 않아."
-231~2쪽

그는 의자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건 고요한 슬픔뿐이었다. 가슴 왼쪽이 뾰족한 칼에 베인 듯 아릿해져 왔다. 뜨끈한 피가 흐르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도 그건 피일 것이다. 그런 아픔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 친밀했던 네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고 물에 몸을 누이듯이 아픔의 세계를 떠돌았다. 아픔이 있는 편이 그래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위험한 건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이다.
온갖 소리가 하나로 섞여 귀 저 안쪽에서 찡 하는 날카로운 잡음을 일으켰다. 끝도 없이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수한 소음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없다. 자신의 장기 안쪽에서 만들어 낸 소리다. 사람은 누구든 그런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 -286쪽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친구가 한 말이야."(중략)
"그 가운데는 완전히 굳어 버려서 벗겨 낼 수 없는 뚜껑도 있을지 몰라."
"억지로 벗겨 낼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어떤 뚜껑인지 정도는 내 눈으로 보고 싶어."-340~1쪽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3~4쪽

"있잖아, 쓰쿠루, 넌 그 여자를 잡아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 그 여자를 놓쳐 버리면 넌 앞으로 아무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자신이 없어."
"왜?"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사라는 낙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너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전혀 텅 비지 않았어."-380~1쪽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있는 그릇으로."-381쪽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통근하는 데 소비하는 걸까, 쓰쿠루는 생각해 본다. 편도 평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아마 그 정도 아닐까. 결혼해서 어린아이가 하나 아니면 둘, 도심에 직장이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 집 한 채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통근 시간을 그 정도 들여야 하는 '교외'까지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 24시간 가운데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통근하는 데 소비되는 셈이다. 만원 전차 안에서 잘하면 신문이나 문고본 정도는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팟으로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거나 스페인어 회화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눈을 감고 장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색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하루에서 그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을 인생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시간, 양질의 시간이라 부르기는 힘들지 않을까.사람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이런 (아마) 의미 잆는 이동을 위해 박탈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소모시키는 것일까? -412~3쪽

사라는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호감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다. 인생은 길고 때로는 가혹하다. 희생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무르고 쉽게 상처 입고 피가 흐르게 되어 있다. -434쪽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는 지금 자신이 품은 그런 기분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그 온기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잃어버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편이 낫다. -435~6쪽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도 그는 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주어야 할 것이 있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내일 일이다. -436쪽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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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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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사람들은 독기나 오기를 품으라고 말하지. 마치 싸움을 할 때 독기를 품으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뜨거운 것들은 결코 힘이 되지 않아. 그렇게 뜨거운 것들을 들고 싸우면 다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작 투지는 아주 차갑고 조용한 거지.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툭툭, 방울토마토 하나. 툭툭, 방울토마토 두 개. 툭툭, 방울토마토 세 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25~6쪽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26쪽

금고 속의 정적이, 기묘하다. 천장의 할로겐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수십억 혹은 수백억 원이 넘는 보석과 골동품이, 금세 무감각하다. 저것들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마냥 행복해질 거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 반짝반짝하는 것들을 가지려고 훔치고, 사기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고 당장 손에 쥘 수 있어도 결국 금고 밖으로 못 가지고 나간다.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다른 놈들 인생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아무도 금고 밖으로 저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저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 불안하니까. -42~3쪽

사람들은 사기꾼이 거짓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중략) 환상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금세 진실이 된다. -47쪽

장지구는 벽시계를 봤다. 오후 5시였다. 벌써 5시다. 오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일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구가 반드시 자정까지 섹스를 끝내고 호박 마차 같은 것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꼭 일곱 시간이 남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섹스는 새벽 1시에 해도 되고 2시에 해도 된다. 33년이나 묵은 동정을 걷어차버리고 훨씬 홀가분해지고 긍정적인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발제문을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섹스가 러닝머신이나 벤치 프레스처럼 혼자 우쌰우쌰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섹스는 반드시 둘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랑 한단 말인가? 장지구는 '누구?'라는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자 절로 '인생의 쇠털처럼 많은 나날들 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산 건가? 남들은 그렇게 쉽게도 하더니만, 나에게는 왜 단 한 명의 그 '누구'도 없는 것일까?' 따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154쪽

"나 같으면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날아가겠다. 복잡하고, 땅값 비싸고, 사람 많고, 이 콧구멍만한 명동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지겹지. 터무니없이 지겹지. 매번 같은 사람들에, 같은 일에, 같은 농담에, 같은 술자리에, 정말 지겨워. 가끔은 섹스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지겨워서 하품이 다 나온다니까" 하며 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겨우면 그만해도 되잖아?" 내가 물었다.
"외로우니까. 그런 짓이라도 안 하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안이 말했다.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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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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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183쪽

빨간 눈은 원인 균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 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의료팀이 할 수 있는 조처는 거의 없었다. 해열제, 항생제, 수액이나 산소 공급 등 효과가 거의 없는 몇 가지 처방이 전부였다. 박남철 과장은 치료자 자신에 대한 보호를 강조했다. '접촉'이라는 같은 조건에서 발현하지 않은 사람들은 병원체에 감수성이 없는 행운아일 테지만, 무감수성의 조건이 무엇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그 행운아이기를 바라지는 말자고 했다. 수진은 자신이 혹시 그 행운아가 아닐까, 생각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은지는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은지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 죽어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190쪽

빨간 눈의 원흉이 개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들리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개에게'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개 한 마리가 수백 명의 사람에게'를 부각시킨 탓이었다. '살 처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생략이요, 과장이었다. 이 교묘한 말장난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두 번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재형은 망연한 심정으로 구급차 뒤 칸에 실린 개들을 돌아봤다. 모처럼 드라이브를 하게 됐다고 즐거워하는 개들 사이에서 대장 츄이의 푸른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고 차분한 눈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던, 우리만큼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리라 믿는 것처럼. -213쪽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퍼센트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230쪽

언론은 여론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임기 2년 차에 돌입한 대통령의 정치력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논평하고, 화양시민은 원인 균이 규명돼 진단 시약이나 치료제 및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돌출 행동을 자제하며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발병에서 치사에 이르는 기간이 짧아 화양을 철저하게 격리한다면 대유행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사스처럼 자연 소멸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을 폈다. -231쪽

인터넷과 SNS에선 수십만 개의 손가락들이 수십만 개의 훈수를 뒀다. 세계보건기구와 손잡고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둥, 이 전염병에 '빨간 눈' 괴질이 아닌 보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둥, 정체 모를 병의 유행으로 대중이 막연한 공포를 느낄 때 정부와 언론은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고 공중과는 어떤 내용으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만들어 실행하라는 둥. 더하여 희한한 풍문들이 'RT'를 통해 무한 확산됐다. 빨간 눈은 개와 사람의 바이러스가 합방해 낳은 이종 변이 바이러스라느니, 화양에 내린 이 새빨간 저주는 사악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신이 보낸 최후의 불벼락이라느니, 생마늘과 홍삼을 많이 먹으면 빨간 눈에 걸리지 않는다느니……. -231쪽

고글과 마스크 같은 방역 물품, 기본 생필품이 순식간에 동나버렸다. 카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됐고, 화양시내의 현금인출기는 모조리 빈 깡통이 됐다. 도로에선 차들이 폭주하고, 사람들은 라면 한 상자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쇠 파이프로 상점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동네 골목길과 도로에는 하룻밤 새 버림받은 개들이 떼를 지어 나돌아 다녔다. (중략) 화양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었으나 불을 대하는 안팎의 태도는 이렇듯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 똑같았다. 안쪽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바깥쪽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232~3쪽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6쪽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404쪽

대원들 대부분이 기준처럼 혼자가 됐거나 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소방차를 타는 건 도망치기 위함일 거라고, 기준은 생각했다. 현재에 이르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부터, 매일 매 순간 밀려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으로부터, 다시는 일상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부터. 저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앉아 울분을 토하고, 박수를 치고, 내일을 희망하며 삶을 확인하듯. -409~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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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시오리코 씨와 미스터리한 일상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2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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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카와 씨에게는 책에 대한 막대한 지식 말고도 또 하나의 특기가 있다. 오래된 책에 얽힌 수수께끼라면 아무리 실마리가 사소하든, 누군가에게 곁가지로 들은 이야기든 개의치 않고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다. -31쪽

"고인은 책의 구입과 보관 방법에 독특한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중략)
"이쪽에 있는 책들은 매입하지 않을 책인데, 이런 책을 굳이 보관하는 분들은 거의 없죠. 그렇다고 여러 번 읽은 것 같지도 않고요. 아마도 책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셨던 모양이에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분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통해 책 주인의 성격까지 알 수 있는 겁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취미는 물론, 직업이나 나이까지……. 책장만 보고도 그런 걸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거든요."-145~6쪽

어떤 감정이든 그대로 놓아두면 서서히 멀어지다 언젠가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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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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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래된 책 몇 권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된 책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오래된 책에는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에도 이야기가 존재한다. 나도 어떤 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하나 덧붙이자면 그 '이야기'가 반드시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추한 내용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13쪽

"전 오래된 책을 좋아해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안에 담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62쪽

"고서점에서 일하려면 책의 내용보다 시장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해요. 책을 많이 읽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읽지 않아도 배우면 돼요. 실제로 퇴근하면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요. 저처럼 무슨 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 게 드물지도 몰라요."-92쪽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짝지근하지만 가슴을 저미는 말 아니더냐? 가슴에 쌓인 게 있으면 뭐든 말해도 좋다.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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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3-06-2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노카와짱~

이매지 2013-06-26 11:09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서 후딱 읽었어요. ㅎㅎ
오늘 2권 읽으려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