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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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표정에서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입에 담는 이도 없었다.
만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우연히 만난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오히려 그 실낱같은 관계가 그들을 단단히 이어 주고 있었다. 뒤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깔끔한 이해관계이기 때문에 함께 위험을 짊어질 각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쪽

네 사람 모두 처음 만난 사이로, 아무 연관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하지만 푸른 하늘 아래서 함께 몸을 움직이다 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자연스레 연대감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넷 다 남자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술집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손님과 의기투합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복작거리는 일상과는 상관없는 일회성 모임이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꼭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살짝 열렸는지도 모르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를 흔드는 강바람을 맞으며 유메노시마는 무심코 히나코에 대한 울분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하소연이나 할 작정이었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처럼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지만 두 번 볼 일 없는 사람을 상대로 구태여 자신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35~6쪽

표적의 사진을 확인하며 자기 손으로 녀석을 죽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온라인 게임의 가상 전장에서는 수많은 적들을 학살해 왔지만, 그 경험이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도 통할까. 갑자기 영안실에서 보았던 외삼촌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제야 비로소 공포를 느꼈다. -81쪽

"유유상종이랬지."
한 사람이라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면 가네곤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으리라. 자신을 구속하는 굴레나 후환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잠재적인 살인-'누구에게나 거슬리는 인간 한둘은 있는 모양이야.'-를 공유하기 위한 전제였다. 운명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라도, 접점이 전혀 없는 네 남자가 한자리에 모인 시점에서 이미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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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영화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포레 / 2012년 8월
절판


"다치하라 씨는 정말 영화를 좋아하네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뭐…… 다들 그런걸요.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요. 이 녀석이 좀 유난하죠."
나는 곯아떨어진 미즈노를 턱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미나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물론 예전에는 다들 영화를 좋아했겠죠. 지금도 많이 볼 테고. 또 언젠가 자기가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정도 있겠죠. 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 그렇진 않아요. 가끔은 이 사람들이 영화를 증오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만드는 입장이 되면 모두들 그렇게 변하는 걸까요?"
"당연히 변하죠…… 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을 알게 되니까요. 한 컷 한 컷에 얼마나 많은 품과 시간이 들어가는지, 조명은 얼마나 신경 써야 하는지,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드는 일인지, 그런 걸 알게 되니까."-52~3쪽

개봉 예정일은 내년 1월 15일. 단관 개봉이지만 일단 설 연휴에 극장에 걸린다. 외국 영화 국산 영화 가리지 않고, 무시당하기 일쑤인 소규모 영화도 진지하게 검토해 걸어주는 긴자에 있는 작은 영화관인데, 여기서 화제를 불러 모으면 대개 전국에서 상영 요청이 들어온다. 예고편은 이미 내보내고 있고, 스태프들마저 결말을 모르는 영화라는 이유로 매스컴에서도 화제로 다뤄줬다. 그럴 때마다 감독은 만족스러워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 불안했다. 대체 감독은 어떤 결말을 준비하고 있을까? 이 영화는 뜰 수 있을까? 그리고 늘 따라붙는 걱정이 있었다-이 영화는 진짜 완성될 수 있을까? 아무리 영화판 베테랑이어도 이 걱정만은 늘 떨쳐버리지 못하는 듯했다.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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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구판절판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누구의 지문指紋으로도 뭉개버릴 수 없는 앨리시어의 지문을 배양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8쪽

그 계집애는 한 권뿐이었다는 것을 알까. 앨리시어의 동생이 가진 단 한 권의 공책. 그게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까. 그가 공책을 아끼려고 필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이전에 필기했던 내용을 지우고 지우개질 흔적으로 거칠거칠해진 종이에 다시 필기한다는 것, 그런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 것이다. 멍청하니까. 아둔하니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맛을 보아야지. 배가 아플 정도로 서글픈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계집애는 맛을 봐야지.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찢어져야지. 두고봐라 너도 찢어져야지. -18쪽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그래 그거. 가엾을 정도로 왕따를 당하다가 감투를 쓰고 나니 사랑받게 되었다는 얘기.
그런 얘기냐.
남들하고 다르다고 놀림을 당하고 외톨이로 지냈잖아. 그러다가 싼타한테 뽑힌 거잖아. 싼타의 썰매에 묶여 한자리 차지하게 된 거지. 그러고 나니 사랑받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니냐? 루돌프 코는 그전에도 빨갰는데 이제 그 코가 뭔가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비로소 사랑받는 코가 되었다는 거지. 게다가 길이길이 기억되기까지. 치사한 노래다. -22쪽

그녀가 그년을 씨발 년이라고 말할 때 그년은 진정 씨발이 된다.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년 천만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 그 정도로 씨발이라서 앨리시어는 그녀가 씨발, 하고 말할 때마다 고추가 간질간질하게 썩는 듯하고 손발이 무기력해진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27쪽

알겠냐 너.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들으면 씨발, 이 된다는 거.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말해도 씨발 된다 너.
왜?
말하면서 자기 말 듣게 되잖아, 씨발 씨발, 하고.
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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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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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생활 하면 장밋빛, 장밋빛 하면 고교 생활. 이렇게 호응 관계가 성립된다. 서기 2000년, 현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국어사전에 등재될 날도 머지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고등학생이 장밋빛을 희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공부도, 스포츠도, 연애도, 좌우지간 온갖 활력과 활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회색을 선호하는 인간도 있거니와, 심지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조차 그런 인간은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거, 꽤나 쓸쓸한 인생이다. -11쪽

그러고 보니 고전부란 무엇을 하는 동아리인가. 그것을 아는 학생은 이미 학교에 없다. 교사에게 물어보고 다닐 만큼 궁금한 것도 아니다. 누나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지금쯤 베이루트에 있을 것이다. 뭐, 활동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아도 존재 가치가 명확하지 않은 단체는 쌔고 쌨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 -49쪽

나는 가끔 특이하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증거다. 나는 위쪽의 맑은 물도, 바닥에 가라앉은 앙금도 아니다. 상승도, 하강도 지향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사토시의 말이 맞았다. '회색으로 살고 있는 건 호타로 너뿐인 것 같은데'.
학력만 그런 게 아니다. 특별 활동, 스포츠, 취미, 연애……. 요는 인간성의 문제이리라.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도 있다. 국어사전에도 이제 곧 등재될 텐데, 고교 생활 하면 장밋빛이다. 그리고 장미는 필 장소를 얻어야 비로소 장밋빛이 될 수 있다.
나는 적합한 토양이 아니다. 그뿐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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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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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거나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죠. 믿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든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거나 더 잘났다고 우기고 싶지도 않아요.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고향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는 우연히도 자기 일족이 멸종될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사고방식의 일부죠.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55쪽

진실은 CIA든 미국의 어떤 공식, 비공식 정부 기관이든 간에 그렇게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철인들이 아니라는 거요. 우선 우리에겐 그만한 자금이 없어요. 심지어는 백지 수표를 휘날리던 냉전 시대에도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뒷방, 동굴, 골목길, 매음굴, 엄폐호, 사무실, 가정, 차, 논을 감시할 만한 눈과 귀를 동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소. 오해하진 마시오. 우리가 무능하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니까. 아마 우리 팬들과 비평가들이 오랫동안 우리가 했다고 의심했던 일들 중 일부는 정말로 우리 작품일 수도 있소. 하지만 진주만 시절부터 대공포 시절까지 떠돌던 모든 터무니없는 공모 이론을 합쳐 보면 미국보다 더 강력한 조직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노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조직이 나올 게요.-77~8쪽

우리는 고대의 비밀과 외계인의 기술을 지닌 은밀한 초능력 집단이 아니오. 아주 현실적인 한계와 극단적으로 제한된 재원을 가진 조직일 뿐인데 모든 잠재적인 위협을 추적하느라 그 빈약한 재원을 다 써 버려야 한다는 게 말이 되오? 이 점이 바로 정보기관의 실상에 대한 두 번째 신화를 건드리게 되지. 우리는 우연히 새롭고 그럴듯한 위험을 찾기를 빌면서 마냥 부족한 재원으로 무리하게 일을 벌일 순 없소. 대신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찾아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78쪽

선생은 경제에 대해 좀 아시오? 내 말은 전쟁 전 알짜배기인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좀 아냐 말이오. 그 경제란 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오? 난 그런 거 잘 모르고, 안다고 떠들어 대는 놈들은 모두 헛소리를 하는 거요. 경제에는 어떤 규칙도 없고, 과학적으로 절대적인 사실도 없소. 돈을 따는 것도 잃는 것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노름과 같은 거지. 그나마 납득이 갔던 유일한 규칙은 워튼 경영대학원의 경제학 교수가 아니라 역사학 교수에게서 배운 거요. 그 양반이 그러더군. '두려움.'
"두려움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고가의 상품이다."-89쪽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지. 두려움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요. 인간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아먹을 수 있다. 그게 내 영혼의 진언이었소.-90쪽

당신이 정말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고? 질병, 실업, 전쟁, 아니면 다른 사회적인 질환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절대 아니지.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건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그 문제들을 관리해 주는 거요. 이런 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성숙이라 부르는 거요. 비를 멈추게 할 순 없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붕을 만들어 놓고 새지 말라고 빌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리에게 표를 던질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게 해 주는 거지.-99쪽

대통령은 내게 물리적이거나 물류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셨지.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이든, 지상의 그 누구든 내게 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힘이었소. 내가 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미국의 노동력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많은 경우 그런 분리에는 문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소. 우리 강사들 중 절대 다수가 이민 1세대들이지. 이 사람들은 자기 한 몸 돌보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최소한의 물자를 가지고 자기들의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사람들이오.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자기 집을 직접 수리하고, 기계적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최대한 오래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지. 이런 사람들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우리의 편안한, 일회용 위주의 소비 생활 양식과 결별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주 중요했소. 비록 이들의 노동력 덕분에 애초에 우리가 그런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었지만.-227~8쪽

"지금이야말로 이상을 좇아야 할 유일한 때요. 우리가 지금 가진 거라곤 이상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생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소. 우리는 유럽이 지니고 있는 지주 같은 사치품이 없소. 우리게엔 공통된 유산도 없고, 천 년에 걸친 역사도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꿈과 약속밖에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가진 건 우리의 이상뿐이오."
각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네도 알겠지. 미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이고, 만약 그 믿음이 우리를 이 위기로부터 보호해 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이나 꿀 수 있겠나? -240~1쪽

대통령도 미국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종말을 의미하는 거야. 사람들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내 생각은 달라. 나는 수많은 나약함과 도덕적 타락을 목격했어. 도전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야 할 사람들이 그럴 수 없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 탐욕, 공포, 우둔함, 증오 때문이었지. 전쟁 전에도 그걸 목격했고 지금도 그게 보여.-241쪽

에이디에스(ADS), 그게 나의 적이었지. 자각 증상 없는 사망증후군(Asymptomatic Demise Syndrome) 또는 종말론적인 절망 증후군(Apocalyptic Despair Syndrome)이라고나 할까, 말하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 이름이 뭐든 간에 그것이 전쟁 초기 막다른 상황에 몰린 몇 달 동안 기아, 질병, 인간 간의 폭력, 혹은 좀비가 죽인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아무도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 우리는 로키 산맥 방어선을 안정시켰고, 안전지대를 위생 처리했는데도 하루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 자살은 아니었어.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냐, 이건 경우가 달랐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상처를 입었거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을 앓고 있었고, 건강 상태가 완벽한 사람들도 있었지. 이 사람들은 그냥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다음 날 영영 저세상으로 가버린 거야.-258쪽

문제는 심리적인 거였지, 포기해 버리고 내일을 맞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일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믿음, 버텨내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하는 일은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기 마련이지.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인 규모로 발생하는 건 아니지. 이건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무력감, 혹은 무력하다고 인식하는 거야. 나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259쪽

거짓말이 아니냐고? 괜찮아. 그렇게 말해도 돼. 그래, 그건 거짓말이고 때로는 거짓말이 나쁜 게 아냐. 거짓말은 사실상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냐. 거짓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불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도 있고, 태워 죽일 수도 있지. 정부가 전쟁 전에 우리에게 한 거짓말들, 우리를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행복한 바보들로 만들려고 했던 거짓말들은 우리를 태워 버린 거짓말들이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어.-269쪽

진실은 이런 거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결코 미래를 보지 못했을 거야. 진실은 우리가 인류라는 종족의 황혼기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그 진실이 매일 밤 수백 명을 얼려 죽이고 있어. 그 사람들은 밤새 그들을 지켜 줄 따뜻한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고, 대통령도 했고, 모든 의사와 신부와 소대장과 부모들이 거짓말을 했지.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게 우리의 메시지였어.-269~270쪽

그 영화에서 영웅들의 암울한 면을 보여 주던가? 그 영화에서 일부 '영웅'들의 마음에 숨겨진 폭력과 배신과 잔혹함과 비행과 끝을 알 수 없는 사악함을 보여 주던가? 아, 물론 아니겠지. 왜 그래야 했겠나?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촛불을 끄고 이승을 하직해 버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티는 대신 또 다른 면, 사람들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누군가 그들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주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살아남게 만드는 면을 보여 주기로 한 거야. 그런 거짓말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지. 그건 희망이라고 부른다네.-271쪽

무지가 우리의 적이었어요. 거짓말과 미신, 오보, 허위 정보가 적이었죠. 가끔은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무지가 수십억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무지가 좀비 전쟁을 일으켰어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지금 우리가 결핵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그때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세계 시민들이, 아니면 적어도 이 시민들을 보호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선 상대에 대해 정확히 알고만 있었더라도. 무지가 우리의 진정한 적군이었고 냉엄하고 확실한 정보가 무기였어요.-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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