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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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배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류를 나눈 후에 돌아가거나 혹은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는 역처럼 서점은 책이 마지막으로 당도하는 종착역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시발역이기도 했다. -6쪽

클릭 한 번으로 책은 살 수 있겠지만 그곳에 이야기는 없다. 서점으로 향하는 길목의 풍경, 서점을 가득 채운 공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사소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탐욕스럽게 추구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점을 찾는지 모른다. -7쪽

책은 물체로서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지만, 다시 책을 펼쳐 들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는 특성에 사람들은 매혹되고 만다. 그 한 권에 실려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구체적인 기대감 때문에 사람들은 책을 찾는다. 시간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자.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사는 독자는 책 안에 흐르는 무한한 시간 속으로 자신이 해방되는 감동을 맛볼 것이다. 실제로 책장을 펼쳐 읽다 보면 자신의 인생이 정말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농밀한 시간이 그 속에 흐르고 있다. 그 간극, 유한과 무한이 양립하는 그 부분이 바로 책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후지모토 소우-42쪽

도서관은 장대한 우주체계를 연상하게 하지만 서점은 우주이자 동시에 속세다. 사고파는 사람들의 마음과 취향과 욕망이 공명하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더 나아가 책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갖는 지극히 인간적인 맛이 그래서이다. -히라마츠 요코-77쪽

아름다운 서점에 대해 묻자, 린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 테니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세심한 배려, 사람과 책을 위한 공간 구성, 유연한 경영, 세계정세와 지역의 영향에 대한 견해를 갖춘 서점 만들기"라고 했고, 레이머는 "단순한 판매원이 아닌 전문 지식을 갖춘 북러버가 일하는 곳"이라고 했다. 캐린은 "다방면의 책이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어서, 전 세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린이 자신의 철학을 말했다.
"아름다운 서점이란 독자가 그 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만큼 엄선한 책을 진열해야 해요. 열정과 지식을 겸비한 안내원들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책과 독자와의 만남을 돕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서점이죠"라고 했다. -108쪽

"저희 북디자이너의 일이란 그런 외견상 아무런 특색 없고 밋밋한 스토리에 형상을 입하는 것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또렷한 첫인상을 새길 수 있게끔 '얼굴'을 디자인해 주는 셈이죠"라고 칩 키드는 설명했다. 뉴욕에서 25년 이상 서적 디자인 작업을 해온 그. "중요한 것은 책 그 자체의 '특별함'을 살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잠재적인 독자, 다시 말해 서점에 발걸음을 한 사람이 읽고 싶은 마음에 손을 저절로 뻗을 수 있게끔 인상적인 표지를 디자인하는 일이죠. 흔한 일반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속임수나 마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123쪽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스토리에 형상을 만드는 것일까? "디자인의 영감은 텍스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이것이 제 일의 가장 복잡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원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어떤 얼굴을 원하는지 그 대답이 있는 곳으로 텍스트가 저를 이끌어줍니다. 뛰어난 북디자이너는 텍스트 안에 숨겨진 목소리를 충실하게 찾아 듣는 통역사이자, 그 목소리를 디자인이라는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여야 합니다." -123쪽

확실히 그(테세우스 찬)가 디자인한 책은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여행'이 되어, 기억에 남는 '경탄'과 '발견'을 제공하는 장치가 되는 일도 적지 않다.
"훌륭한 북디자인이란 레이아웃이나 이미지,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판형과 구성, 그리고 인쇄 품질까지 다양한 요소를 통해 콘텐츠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예기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영감을 얻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중장비, 화학실험, 재봉처럼 언뜻 보기에 서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고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책은 서점 같은 공적인 공간에서도 그 책을 손에 쥔 사람의 모든 신경을 매혹하는 힘을 가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겁니다." -125쪽

서점은 여행하는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다. 출발하기 전에도 그렇고 여행지에서,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그렇다. 떠나기 전에는 지도나 여행안내 책자만 눈에 들어오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소설과 평론까지 읽고 싶어진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독서로 정리하고 싶고, 그 독서를 통해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된다. 이 두 가지의 경험은 실제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눌 수가 없다. 시작은 끝의 일부이며 끝은 시작에 포함되어 있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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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구판절판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24쪽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헤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그런데 그렇지가 않지-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25쪽

지난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만해.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뭔가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가 단순하게 내린 판단이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반겼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사실일 리 없었다! -76쪽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현상이라고 자위하기는 쉽지만, 마치 구멍에서 도마뱀이 나오듯 머리에서 기어나오는 수상하고 잡다한 생각들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았다.
조앤은 머나 랜돌프 생각은 뱀 같고, 다른 생각들은 도마뱀 같다고 생각했다.
열린 공간-그리고 상자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전 인생. 허수아비 자식들과 허수아비 하인들과 허수아비 남편.
아니, 조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내 자식들은 분명한 현실이라고.
아이들도 요리사도 아그네스도, 그리고 로드니 역시 현실의 인간이야. 그러면 내가 현실이 아닌 거지. 허수아비 아내. 허수아비 엄마. 조앤은 생각했다.
맙소사. 이것이 더 끔찍했다. 그녀는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고 있었다. 시나 더 외워볼까…… 뭔가 기억해내야만 했다. -103쪽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 아니, 조종하지 못하나? 상황에 따라서는 생각이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나? 도마뱀처럼 구멍에서 밀고나오거나 초록 뱀처럼 마음속을 슥 지나갈 수 있을까.
어디선가 슥 다가와서……
-111쪽

"시골의 변호사는 인간관계의 약한 면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는 사람이야-의사를 제외하면 말이지. 그래서 이 일을 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는 것 같아. 인간이란 원래 나약하고, 두려움과 의심과 탐욕에 약한 존재지. 그런데 가끔은 예기치 않게 이타적이고 용감한 인간을 보게 돼. 어쩌면 변호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폭넓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몰라."-136쪽

"세상에, 로드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에이버릴은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난 그 아이의 엄마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아이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146쪽

"결혼은 두 사람이 맺는 계약이지. 두 사람은 온전한 능력을 갖춘 성인이어야 해. 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고. 결혼은 동반자 간의 계약 같은 거고. 두 배우자가 그 계약의 조항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곁을 지키겠다고.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좋은 일이 있을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교회에서 말로 약속하고 사제가 승인과 축도를 하짐나 그럼에도 그건 계약이야. 신앙심이 깊은두 사람이 맺는, 여느 합의처럼 계약이라고. 일부 의무 조항들은 법적 강제력이 없지만, 책임을 맡은 두 사람에게는 구속력이 있지. 난 네가 이에 대해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만."-153쪽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202쪽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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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절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신기술과 디자인의 혁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상품에 열광할 때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주고 즐거운 울림을 일으키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네 일상에 가려진 사물들, 그것들이 오랜 시간 존재하는 이유는 기능이 탁월하다거나 외형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환경과 사물이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마법과도 같은 추억 때문이다. -20쪽

삶의 질이라는 건 조금 더 좋은 공기와 신선하고 풍족한 음식, 깨끗한 잠자리와 같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별것 아닌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도시 한복판에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만한 많은 공원은 영국 사회의 큰 장점이다. 건물을 지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넓은 녹지를 조상과 후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자산으로 여긴다. -62쪽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길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찾고 실천하려는 것이 정원 문화에 담긴 기본 정신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생산한 과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비되지 않는 디자인을 진정한 디자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가꾸어온 정원처럼 장기간 꾸준한 소비를 이끌 수 있는 디자인이다. 논에 보이는 것만이 디자인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환경을 지속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만들고 사용한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 것처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69쪽

옛것의 가치를 재탐색하고 확장 가능성을 연구해 쓸모를 생산하는 것은 런던 디자인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과거의 유산이 투영되지 않은 미래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77쪽

테이트 모던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업체 헤르조그 앤 드 메롱은 기존 건물의 외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내부 공간을 미술관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당시에는 수많은 혹평이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대중 문화와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테이트 모던을 이루는 특화된 콘텐츠는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전체 일곱 개 층 중에서 네 개 층이 전시관으로, 1층의 넓은 터빈 홀은 매 시즌마다 미술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 공간으로 활용된다. 애니시캐푸어나 미로슬라브 발카와 같은 설치 미술 대가들의 작품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미술은 어렵다거나 조용히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86쪽

사실 박물관에 가면 전시된 것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꼭 봐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이런 생각이 작품을 향한 개인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박물관을 멀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왠지 관람 시간 종료 전까지 머릿속에 꾹꾹 채워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브이앤에이가 행한 프로젝트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박물관의 체제를 개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변화를 모색하는 데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생각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학술적이고 엄숙하던 박물관이 문화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향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참여는 박물관의 진화를 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약간의 여지만을 만들 뿐이다. 누군가가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는 여지,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여지, 편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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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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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선율에 맞춰 공원 길을 달렸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램프가 어두운 길을 비추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와 윤상의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 내 숨소리도 들렸다. 머리 위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고, 저녁 공기가 모두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28~9쪽

독학의 절정은 실패하는 과정에 있다. (요즘 같은 취업 대란의 시대에 이런 말 하기 겁나지만) 실패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취향에 맞지 않는 노래들을 많이 들어봐야 내가 어떤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취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취향에 맞지 않은 음악들을 무수히 걸러내고 남은 '내 노래'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2쪽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 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93~4쪽

음악도,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사랑해) 그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풀기 위해(흠, 푼다니까 좀 야릇한 어감이 되어버렸지만) 반복해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쪽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134쪽

노래를 듣다가 울컥,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 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후에야 닦아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거다. 듣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갑자기 한숨을 쉬게 되고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들을 때마다 슬픔은 반복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래에 익숙해지면 슬픔은 사라지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그 노래를 들으면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147~8쪽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묻게 된다. -150~1쪽

사람들의 성격이 모두 다르다는 게 놀라울 때가 있다. 각각 고유한 퇴적층이 되어 유일한 삶과 생각들을 쌓아올리며 자신만의 성격을 완성했을 테니 성격이 다르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문득 생각하면 놀랍다. 동물들도 그럴까. 같은 동물이라고 해도 태어난 시간이 다르고 자라온 동네가 다르니 자신만의 성격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동물 애니메이션 때문에 동물의 입장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같은 종의 고양이라도, 같은 종의 개라도 성격과 취향과 철학이 다를 것 같다.
'한번 정해진 성격은 영원히 그 사람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내 생각엔 (우리가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성격 역시 변하는 것 같다. 성격을 고쳐야지, 라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큰일을 겪거나 중요한 사건을 맞닥뜨리고 난 후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는 알지 못하더라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아, 그때 그래서 내가 변한 게로군' 하고 깨닫게 된다. -172~3쪽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180쪽

모든 음악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된다. '실용음악학과'라는 학과 이름을 들을 때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그럼 뭐야, 실용음악의 반대는 무용음악인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18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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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밤의 코코아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1월
품절


인생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척하면 착 통하지만 좀더 소중한 것,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이 조금 분명치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충직한 나는 그와 있으면 조바심이 난다.
나와 사귀면서도 나를 갖고 싶어하는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나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가 좀 뭐해서 슬쩍 운을 띄우면,
"아니…… 별로. 그……" 이런 식으로만 대꾸한다. -11~2쪽

스물다섯 살 여자에게 앞뒤 안 가리는 연애는 이미 어울리지 않는다. 스물다섯 살 여자의 연애는 좀더 상큼하고 여우 같아야 한다. -34쪽

연애라는 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멋진 건지도 모른다. -46쪽

나는 돈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스물여덟 살이 되고보니 돈이란 여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무기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꼬박꼬박 생활비를 내고 저축도 한다.
하지만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는 남자와 데이트할 때 함께 돈을 낸다. 내 돈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상대방의 돈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52쪽

"와다와 있는 게 가장 좋아. 마음이 편해."
그는 스스럼없이 내게 말한다.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 사이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은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난 비프스테이크를 좋아해' 할 때 쓰는 '좋아한다'와 다를 게 없었다.-55쪽

세상엔 좋은 남자가 가득할 거야.
나는 봄을 맞아 겨울잠에서 깬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조끼를 입은 모습이 그렇게까지 섹시한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매력에 이끌렸던 것은 내게도 그를 향한 욕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져들지 않고 몸을 빼버린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88쪽

성실하게 일하고 월급으로 알뜰살뜰 절약하고 살면서 남은 시간에는 내 안에서 종잡을 수 없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이야기들을 밤늦게까지 글로 옮겼다.
헛된 노력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끝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보낸 청춘의 날들은 엄청난 낭비가 되어버릴 것이다.
결혼도 연애도 못 해보고 싸구려 원고지만 더럽히면서 청춘을 다 흘려보낼지도 모른다.
이런 무서운 불안이 나이와 함께 깊어갔다. -98쪽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남녀의 차이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 같다.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내가 이러니까 그도 이럴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니, 그런 사실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없는 일심동체라고 굳게 믿었다.
그건 아닌데……
일심동체라도 남편은 남자고 아내는 여자인 것을.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겨우 알았다. -111쪽

이모는 이모부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그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젊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젊을 때는 결벽이 심해서 남녀 간의 응수에 더 민감하니까…… 남녀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교류, 말없이 오가는 시선, 그런 것이 핑핑 아플 정도로 느껴져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139쪽

나는 몇 살이 되어도 좋으니까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짝사랑이나 조건을 따지는 결혼이 아닌. 그런 진한 사랑은 어쩌면 이모 부부처럼 마흔이나 쉰이 넘어서야 겨우 찾아올지 모른다. '뒤따라갈께' 하고 정말로 뒤따라갈 수 있는 사랑. -147쪽

"온다 씨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지네요. 왜 그럴까요?"
"제가 잘 들어주나봐요."
"그런가."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치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내 마음의 파문이 선생님의 마음에 파도를 일으켜서 유쾌한 기분으로 이끄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일부러 꾸며서 즐거운 척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척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거짓이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함께 있는 게 진심으로 즐겁다면 분명 상대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해진다. 그렇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162쪽

나는 치사가 나름대로 나이 화장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물예닐곱이 지난 여자는 이미 자신을 생겨먹은 그대로 내보여서는 안 되니까.
여자는 이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설계해서 그 이미지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교정하고 수련해야 한다. 나는 그걸 나만 아는 말로 '나이 화장'이라 부른다.
파운데이션이나 립스틱을 바르는 화장만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의 여자가 돼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73쪽

치사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더 덜렁대고 남자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고 농담이나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것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른 넘어서까지 들떠서 지내는 여자는 없다. 서른이 넘으면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안착할 곳을 찾게 된다. 미혼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사이에 자연스레 자신의 등딱지에 맞는 구멍을 파게 되는 것이다.
우아하게 나이를 드러내면서 시크한 이미지를 풍기려는 여자도 있고, 젊어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얼굴에 덧칠하는 여자도 있고, 전투를 포기한 듯이 화장을 그만둬버리고 눈가 주름이나 입가의 팔자주름을 안쓰러울 정도로 깊게 파는 여자도 있다.
치사는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해 눈에 띄는 '아줌마'가 됨으로써 노처녀의 콤플렉스를 날려버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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