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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평점 :
최근에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표지에 손글씨 같은 게 들어간 책이 재미지다는 얘기를 듣고 고른 책. 하지만 읽다보니 뭔가 이상한데, 하면서 다시 찾아보니 원래 읽으려고 했던 책은 <라스트 차일드>였다. 누굴 탓하랴, 이왕 읽기 시작한 거. 평점도 나쁘지 않고, "충격적 데뷔작"이라니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결말까지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하면서 마지막 한 방을 기대하며 읽어갔다.
매일 아침, 낯선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거울을 보고 너무 늙은 자신의 모습에 놀라며 하루를 시작하는 크리스틴. 낯선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이 남편 벤이라고, 결혼한 지 20년이나 지났다고, 당신은 사고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벤의 도움으로 잠들고 나면 기억을 잃는 그녀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벤에 대한 기억도 없는 그녀는 이 모든 생활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 혼란 속에서 집에 혼자 남은 그녀에게 내시라는 정신과의사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동안 그녀를 비밀리에 상담해왔다는 내시는 그녀에게 일기장의 존재에 대해 알려준다. 치료의 일환으로 매일매일을 기록한 일기장. 거기에는 "벤을 믿지 마라"라는 문장이 써 있다. 자신의 과거를, 삶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일기장을 읽기 시작하는 크리스틴. 그녀는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예기치 않았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으며 살아가는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벤의 설명으로 머리로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없는 크리스틴도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메멘토>를 비롯해 많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접한 소재이기 때문에 단기기억상실증이란 소재는 낯설지 않다. 어떻게 보면 식상할 수 있는 이 소재를 저자는 '일기'라는 기록을 토대로 어느 정도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진행해간다. 하지만 데뷔작이기 때문에 아직 기교가 부족해서일까. 다소 늘어지는 서술과 엉성한 마무리가 발목을 잡았다. 설마설마 했던 결말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간질 수술을 받은 후 새 기억을 형성하지 못해 과거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한 환자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고심 끝에 작품을 썼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움, 무기력함, 불안 등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괜찮았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를 기대하고 본다면 너무나 맥 빠지는 결말. 내용을 쳐내고 속도감 있게 진행됐더라면, 마무리에 방점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못내 아쉬웠던 책. 이 아쉬움을 채울 수 있다면 앞으로 좋은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옥석을 만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