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지 컵케이크 살인사건 한나 스웬슨 시리즈 5
조앤 플루크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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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몇몇 소소한 불만은 뒤로하고 열 권 이상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는 점에서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한나 스웬슨 시리즈. 갓 출간됐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미스터리'보다는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어쩐지 아쉬워 꽤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읽으면서 새삼 '그 언니(한나 스웬슨)는 잘살고 있으려나'라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그리워졌다. 비슷비슷한 제목(그러니까 레몬 머랭이니 블루베리 머핀이니 설탕 쿠키니 어쨌든 디저트라는 점에서 시간이 지나면 다 고만고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당췌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리뷰를 뒤지는 수고까지 극복(!)하고 마침내 시작한 <퍼지 컵케이크 살인사건>. 4~5년 만에 다시 만난 한나의 연애는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레이크 에덴에서 '쿠키단지'라는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는 한나. 핼러윈 데이는 다가오고, 경찰서장 선거에 출마한 제부 빌을 돕고, 경찰인 마이크와 치과의사 노먼 사이에서 간 보면서 데이트도 하고 레이크 에덴 사람들의 요리법을 모아 책을 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요리교실에서 우연히 현재 경찰서장이자 빌의 경쟁자인 그랜트 서장과 만난다. 몹시 허기져하는 그에게 한나는 마침 만든 퍼지 컵케이크를 하나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요리 교실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한나가 마주한 것은 옷에 퍼지 컵케이크 얼룩을 묻힌 채 덤프스터 안에 쳐박혀 있는 그랜트 서장. 또 시체를 발견한 것도 기가 막힌데, 경찰서장 자리를 놓고 경쟁한 제부 빌이 주요 용의자로 몰린다. 게다가 제부를 수사하는 것은 데이트중인 마이크. 한나는 제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또 한 번 수사에 뛰어든다.

 

  앞선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한나는 이번에도 '시체 찾기의 달인'다운 면모를 보인다. 레이크 에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 하면 한나가 있다니, 이거 무슨 한나가 김전일도 아니고 싶기도 하지만, 이런 걸 걸고 넘어지면 끝이 없으니 논외로 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한나는 또 한 번 시체를 발견하고, 수사에 나선다. <퍼지 컵케이크 살인사건>을 보면서 문득 생각난 미국드라마가 있다. <위기의 주부들>이다. 남들이 보기엔 평화롭고 행복해보이는 가정.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 가정은 균열로 가득 차 있다. 그랜트 서장 부부도 그렇다.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던 그랜트 서장 부부. 하지만 이들 부부는 이혼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금이 가 있었다.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오랫동안 입고 싶어한 청바지를 꺼내 입는 아내라니. 어쨌거나 한나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수사를 하면서 그랜트 서장이 숨겨왔던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고 실마리를 따라 사건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간다.

 

  살인사건에 대해서야 중반 이후에 범인의 정체가 쉽게 노출되어 맥이 빠질 지경이었지만(그래서 마지막에 범인과 대치하는 부분에서는 고생한 한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식상했었던), 한나가 마이크, 노먼 두 남자와 밀당을 하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만나면 편안한 노먼이 학회 때문에 마을을 떠난 사이 한나는 열정적인 마이크와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이크가 그랜트 서장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빌을 올리면서 한나와 마이크의 사이는 소원해진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마이크는 새롭게 등장한 금발머리 비서와 함께 다니며 한나의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도 선뜻 선택하지 못하면서 두근두근한 나날을 이어가는 한나.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 이런 데서 대리만족을 하다니, 싶어지지만 그 또한 한나 스웬슨 시리즈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전히 먹음직한 레시피(라고 해봐야 그림의 떡)와 밀당 연애담, 그리고 시체가 등장하는 한나 스웬슨 시리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대체 다음 번에는 어쩌나 싶어 최대한 빨리 <설탕 쿠키 살인사건>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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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3-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 좀 밀당했으면...ㅋㅋ 두권읽고 말았던가 그랬네요. 코지 미스터리 나름의 맛이 있긴 하지만서도 영 지루해서요.

이매지 2012-03-12 10:06   좋아요 0 | URL
이게 남자분들이 보기에는 좀 오글거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도 대리만족이지 말입니다. ㅎㅎㅎㅎ

BRINY 2012-03-1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당도 밀당이지만, 작은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참 많이 일어나더라구요!

이매지 2012-03-12 10:31   좋아요 0 | URL
살기 고달픈 동네 레이크 에덴. ㅎㅎㅎ
사람도 너무 많이 죽고, 맨날 한나가 발견하고. ㅎㅎ
 
폭설권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 2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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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의 둘째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조금 누그러지고 있구나 하면서 뉴스를 보니 강원도에는 눈이 내릴 예정이라 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날씨가 천차만별이라니 하고 생각하면서 문득 이 시기에 <폭설권>을 읽은 것이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읽을 때만 해도 봄이 다 되서 무슨 혹한기 독서인가 했지만, 이 시기에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 3월 히간(춘분과 추분을 중심으로 7일간) 무렵에 북일본을 공습하는 폭풍우 히간아레. 간선도로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되는 일도 드물지 않은 엄청난 폭풍설. 하루 동안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립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다. 

 

  훗카이도의 작은 마을 시모베츠. 10년 만의 초대형 폭설이 이곳을 강타한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부는 바람, 제설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쌓이는 눈. 이런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움직인다. 누군가는 불륜남과 마지막 만남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직장에서 거금을 훔쳐 새 삶을 시작하려 하고, 누군가는 계부의 성폭행으로 가출하고, 누군가는 폭력단 조장의 집을 습격해 도주한다. 대자연의 맹위 앞에선 평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 그린루프라는 펜션에 발이 묶인다. 눈으로 발이 묶인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폭설권>에서 그려진다.

 

  전작인 <제복수사>에서는 카와쿠보의 역할이 컸다면, 이 책은 카와쿠보 시리즈라고 하기 조금 민망할 정도로 그의 비중이 크지 않다. 폭설 때문에 발이 묶여 사고현장에 가지 못해 미안해하는 모습이나 마지막에 사건을 해결(?)하는 정도로만 등장할 뿐이라 명색이 '카와쿠보 시리즈'인데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사사키 조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경찰소설에 강한 편인데, <폭설권>에서는 그 부분도 두드러지지 않았고, 초반에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슨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무력해지는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서 개개인의 심리를 그려내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만약 눈이 없었다면, 만약 그곳이 훗카이도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 심심한 소설로 끝났을 것 같지만 눈 때문에 마음속에 어둠을 품은 이들의 티는 더 도드라졌다. 순백의 눈. 그리고 인간의 어두움. 자극적인 맛이 없어 미스터리 소설로는 다소 밋밋한 이야기를 이 두 가지 대비를 통해 풀어가는 점이 재미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아쉬움이 못내 남지만 카와쿠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을 만나봤으면 싶다. <제복수사> 때는 인상적이었는데, <폭설권>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해서일까. 사사키 조가 시모츠마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주재경관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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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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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먼드 챈들러가 <호수의 여인> 이후 할리우드로 잠시 외유를 했다가 6년 만에 내놓은 작품. 공교롭게도(?) 나도 6년 만에 필립 말로를 다시 만났다. <리틀 시스터>와 <기나긴 이별> 단 두 권이 남은 게 아쉬워서 미루던 것이 6년이나 지났다니. 대실 해밋 전집 출간 소식에 문득 이제는 챈들러를 마저 읽어야겠구나 싶어져 책장 한 켠에 꽂아둔 챈들러를 주섬주섬 찾았다. 6년이라는 시간차 때문일까. 할리우드 시절에 대한 염증 때문일까. 오랜만에 만난 필립 말로는 한층 더 고독하고 찌들었고 시니컬해진데다 챈들러는 한층 더 불친절해졌다.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는 누군가의 의뢰에서 시작된다. "내가 그 사무실에 앉아서 죽은 파리와 놀고 있는데, 이 캔자스 맨해튼에서 온 촌스러운 아가씨가 휙 들어와서는 고작 닳아빠진 이십 달러에 자기 오빠를 찾아달라며 나를 들볶았지. 오빠란 사람은 얘기로 들어서는 얼간이 같았지만, 동생은 찾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 대단한 돈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는 베이시티로 내려간 거야"라는 말로의 말처럼 달랑 이십 달러로 온갖 유세를 떠는 촌아가씨 오파메이 퀘스트의 의뢰에 말로는 그의 오빠 오린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오린이 마지막으로 머문 싸구려 하숙집의 주인이 얼음 송곳으로 급소를 찔려 죽은 것을 시작으로 말로의 시체 발견 전담반으로의 활동이 이어진다. 과연 오린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필립 말로는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대체 꼬여버린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되는 것일까?

 

  <리틀 시스터> 속에서 필립 말로는 다른 때보다 더 고독하다. "만나는 사람이 다 멍청이인 날"이 이어지고 자신을 "사립탐정 면허증을 가진 허깨비", "투명인간", "쓰레기통 바닥에 구겨져서 버려진, 철 지난 달력 종이"라고까지 비하한다. 이렇게 더이상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서 자조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필립 말로를 보자니 대체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싶어 우울해졌다. 하지만 '나의 말로를 돌려줘!'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말로다운 모습, 그러니까 시덥잖게 이죽거리면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이나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모습이 간간이 보여서 어쩌면 내가 알던 말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 앞에 그도 변한 건 아닐까 했다. 달라진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어쩐지 씁쓸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작품의 주인공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 이런 기분인가 싶어졌다.
 

  챈들러는 <리틀 시스터>에서 말로 자신에 대한 자조 섞인 발화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글러먹은 사람들이죠.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미소지을 뿐, 그게 다예요. 쇼 비지니스죠. 이 업계에는 싸구려 같은 데가 있어요"라며 할리우드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자조 섞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파리 날리는 사무실에 있다가 우연히 들어온 의뢰(심지어 평소보다 돈도 적다)에 사람 하나 찾아나선 주인공이 연속살인사건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팜므파탈, 죽은 시체에서 돈을 훔쳐내는 호텔 직원, 협박용 자료를 가발 속에 숨긴 사나이 등 개성 강한 인물을 만난다는 점 등이 한 편의 할리우드 범죄물을 연상케했다. 단순히 인물과 사건으로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안의 욕망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이야기하는 점도 좋았다. 시궁창 같은 삶을, '아냐,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라고 애써 포장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곳이 시궁창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솜씨가 마음에 들었다. 불친절한 서술 탓에 '대체 그래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투덜거리다가 결국 어느 순간 그냥 사건이야 아무렴 어때 하고 놔버렸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네 싶었던, 독특한 매력이 있는 소설. 읽고 나면 그전보다 더 고독해지고, 더 시니컬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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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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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고전 미스터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엘러리 퀸이다. 대학 시절 한창 미스터리에 빠져 있을 때 작정하고 엘러리 퀸 전집 독파에 나선 적이 있었다. 비극 시리즈야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와 국명 시리즈는 작품 간에 다소 편차가 있어 아쉽기도 했다. 그렇게 엘러리 퀸과 나는 한 시절을 함께했다. 이상한 건 그 다음부터였다. 다른 미스터리 작품 속에서 수없이 엘러리 퀸의 그림자를 마주했다. 가는 데 마다 나타나는 엘러리 퀸의 환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었지만 이미 시그마북스는 절판된 지 오래. 고전 미스터리가 하나둘 소개될 때 어디선가 '제대로' 된 엘러리 퀸 전집이 다시 안 나오나, 하고 마냥 애타게 기다렸는데 드디어 엘러리 퀸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브로드웨이의 로마 극장에서는 <건플레이>라는 연극이 궂은 날씨도 개의치 않고 인기몰이중이다. <건플레이>의 2막이 끝나갈 무렵,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된다. 피해자는 악명 높은 변호사 몬테 필드. 만석인 극장에서 이상하게도 그를 둘러싼 좌석은 비어 있었고,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그가 쓰고 있었을 실크 모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원한을 사고 다녔던 터라 죽을 이유도, 그를 죽일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던 몬테 필드.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살해된 것일까? 리처드 퀸 경감과 그의 아들 엘러리 퀸. 두 사람은 '사라진 모자'를 찾아, 그리고 몬테 필드 살해범을 찾아 미스터리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기본적으로 엘러리 퀸의 작품은 '미스터리'지만 미스터리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엘러리 퀸 시리즈를 이끌어 가는 것은 리처드 퀸 경감과 엘러리 퀸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인내심이 필요한 사건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사람, "세세한 것까지 찾아내는 관찰력과, 복잡한 동기나 수법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 그리고 벽에 부딪쳤을 때 발휘되는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인 리처드 퀸 경감. 그런 퀸 경감보다 "직관력과 타고난 상상력"이 더 뛰어난 소설가인 아들 엘러리 퀸.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그들의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 제 힘이 발휘하지 못했지만, 일단 머리를 합치면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책 속의 언급처럼 자신도 능력이 되면서 많은 부분을 아들에게 의지하는 리처드 퀸과 그런 아버지의 투정을 가볍게 넘길 줄 아는 엘러리 퀸, 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졌다. 부자(父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은 다르지만 만담을 하듯이 경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건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느슨하게 사건을 관망하게 된다. 그렇게 방심하게 해놓고 턱 하니 '독자에의 도전'을 선포하는 모습이라니. 일전에 엘러리 퀸을 만난 적이 있기에 곧 도전장이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기 전에 한 방 맞았다.


  '독자에의 도전'을 할 정도로 엘러리 퀸 시리즈는 공정성을 중시한다. 독자는 모르는, 책 속의 인물만 아는 제3의 사실 같은 것은 없다. 드러난 정보만을 가지고 독자와 탐정이 공정한 출발선상에서 대결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엘러리 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어이없는 상황은 연출되지 않고,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퀸 부자의 활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회색 뇌세포를 운운하며 거들먹거리는 포와로나 입만 열었다 하면 청산유수인 파일로 밴스 같은 고전 추리소설 속 탐정에 비하면 퀸 부자의 캐릭터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어딘가 홈스와 왓슨을 연상케하지만, 홈스처럼 개성 강한 인물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국명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자 엘러리 퀸의 데뷔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비극 시리즈에 비하면야 내용이나 트릭은 영 아쉽지만 미스터리계의 한 획을 긋게 될 거장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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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12-01-0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터리 소설을 자주 읽진 않지만 읽을 때마다 공정한 진행인지가 상당히 신경쓰여요. 어쩌면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독자도 등장인물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그 규칙 위에 지어진 작품이 더 성의있고 치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매지 2012-01-09 00:36   좋아요 0 | URL
엘러리 퀸은 공정성을 앞세우고 있어서 확실히 자극적인 맛은 덜한 것 같아요. 사건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집중되는 듯해요. 치밀한 작품은 그 나름의 맛이 있지만 때론 이런 나이브한 작품도 한번 읽어보셔요. ㅎㅎ

재는재로 2012-01-0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러리퀸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가죠 절대 사건을 완벽히 풀지않으면 절대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하지 않죠
뭐니해도 최고는 y의 비극이죠 x,y,z 비극시리즈

이매지 2012-01-09 09:28   좋아요 0 | URL
Y의 비극이 엘러리 퀸의 최고봉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네요. ^^
자꾸 트릭을 까먹는 제게도 Y의 비극의 결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

라로 2012-01-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 엘러리 퀸의 작품은 읽은게 하나도 없다는,,,^^;; 저도 이제 미스터리의 세께로 빠져 볼까봐요,,ㅎㅎㅎ

이매지 2012-01-09 17:41   좋아요 0 | URL
엘러리 퀸은 위의 재는재로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최고죠. ^^
국명 시리즈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역시 그쪽이 확 빠져들기에는 제격. ㅎㅎ

가넷 2012-01-1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의 비극은 어렸을적에 읽었는데,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나는데 딱 생각나는 건 세가지네요. 청산가리, 분홍색이 들어가 있는 책의 표지, 그리고 재미있었다는 감정만 남아 있네요. 로마모자 미스터리,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는 구입해 뒀는데 아직 안 읽고 있는데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ㅎㅎ

이매지 2012-01-10 09:11   좋아요 0 | URL
Y의 비극에 대해서는 쉿. ㅎㅎ
저는 일단 나오는 족족 사고는 있어요. 부지런히 좀 읽어야 할 텐데... ㅠㅠㅠ

재는재로 2012-01-1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러리퀸의 책 제목이 잘붙인것도 있고 이해가 가지않는 제목도 있지 로마모자,그리스관등
 
고구레 사진관 - 상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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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장르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중독성 강한 NEW 미스터리!"라는 띠지 문구와 표지의 묘한(?) 분위기에 처음에는 이거 SF 계열인가 하며 갸웃하면서 '뭐 그래도 미미 여사니까' 일단 읽어나보자 하고 선택. 앞서 읽으신 분께서 별 두 개를 주시고 상권만 읽으신 터라 '재미 없으면 어쩌지' 하고 일단 상권만 빌렸는데 상권 다 읽기가 무섭게 하권까지 내리 달렸다. 아무래도 'New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뭔가 새로운 모습을 연상케하는 데 정작 읽다 보면 <누군가>나 <대답은 필요없어>의 고등학생 버전이랄까, '일상 미스터리'에 가까운 아기자기한 네 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책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하나비시 에이이치(일명 하나짱)의 부모님이 결혼 20주년을 계기로 고대하던 '마이 홈'을 장만하면서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괴짜 같은 구석이 있는 하나짱의 부모님. 그들은 덜컥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낡은 사진관을 구입하는 것도 부족해 간판도 그대로 스튜디오의 장비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생활한다. 가게가 다시 문을 연 지, 아니 하나짱네 가족이 다시 '고구레 사진관'에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소녀가 이 사진관 때문에 피해를 봤다며 사진 한 장을 하나짱에게 떠넘기고 간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옆에 슬픈 얼굴의 한 여자의 얼굴. 마치 심령 사진 같은 사진 한 장.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유령 같은 이 여자는 누구인 것일까? 하나짱은 사진 속의 몇 가지 단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사진이 남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고구레 사진관>은 고등학생인 하나짱이 주인공(혹은 화자)이지만, 그가 소년 탐정이 되어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 아니다. 심령사진이 등장하지만 그가 사이킥인 것도 아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어하는, 공부는 조금 못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끈기를 지닌,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접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고구레 사진관>의 주가 된다. 'new 미스터리'라는 표현은 물론 기존에 미야베 미유키가 써온 작품과 다른 분위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마 이렇게 성장소설, 일상 미스터리, 심령물 같은 다양한 층위가 이 책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장르적으로는 경계선상에 놓이지만 <고구레 사진관>에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가족'과 연결된다. 종교 문제 때문에 끝내 갈라선 부부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가족도, 할아버지의 죽음에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가족도, 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부모처럼 직원을 보살펴주는 가족도 등장한다. 하나짱은 이 모든 가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 진정한 삶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간다. 어떻게 보면 <고구레 사진관>은 동생인 후코의 죽음을 가슴 한 켠에 '냉동'시킨 채 살아온 하나짱이 다양한 가족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다. 하나짱뿐만이 아니다. <고구레 사진관>에는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상처를 숨긴 채 살아오다가 하나짱과 과거의 사진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삶을 정리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기차역에 잠시 정차는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출발하게 되는 전차처럼, 현재를 붙잡던 과거의 짐을 내려놓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조금씩 과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상처도, 가슴 아픈 사랑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도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고구레 사진관>은 미스터리의 색깔로 그려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등장인물이다. 어쩐지 어수룩하고 친구의 연애에 괜한 심술을 내보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짱을 비롯해 집 마당에서 취미 삼아 야영을 하는 덴코의 아버지, 친척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파격적인 색깔로 염색을 하는 덴코, 아직 어리지만 똘똘한 하나짱의 동생 피카. 여기에 웃을 때면 동안이 되는 부동산 사장님과 피부가 가무잡잡한 탄빵, 시니컬하지만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가기모토 준코까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다양한 일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신기한 일도 있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인간사는 다양한 궤적을 그린다. 그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조금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될 수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조금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미미 여사만의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한껏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 신인 미야베 미유키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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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12-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 읽었어요.
탄빵이 내뱉었던 말은 참 청춘소설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이거 미스터리를 빙자한 청춘소설인가? 라고 생각도 들었죠.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아플때 읽으니까 좀 더 편한 느낌이 들기는 들더라구용.ㅎㅎ;;;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물 미스터리가 더 재미나고 좋아요. 현재 예약주문도 받고 있던데, 메롱이랑 미인도 아직 다 읽지 못해서 그거나 마저 읽어야 겠어요.ㅋ

이매지 2011-12-20 13:11   좋아요 0 | URL
미스터리를 빙자한 청춘소설이라기에 미스터리 요소가 좀 부족하죠. ㅎㅎ
저는 읽으면서 어쩐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 생각났어요^^
시대물 쪽도 사건보다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요.
저도 시대물 쪽을 더 좋아해요^^
(예판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 홍홍홍)

재는재로 2011-12-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이제까지의 미야베 여사와는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죠 심령사진보다는 가족과의 유대 그리고 정
잃어버린 동생 그리고 그것에 얽매이는 인간의 모습 미스테리라기보다 한편의 가족 시네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에요

이매지 2011-12-20 16:37   좋아요 0 | URL
심령 사진이 주가 되는 것처럼 액션만 취하고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죠^^
미미 여사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분명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는 꽤 만족하면서 읽었습니다.
재는재로님 리뷰도 봤었는데.. 훈훈하다는 평에 저도 동감! ^^
후속편 저도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재는재로 2011-12-2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셨다고요 못쓰는글 읽으셨네요 --; 나름 읽고 쓴다고썼지만 제대로 전달됬는지 의문이네요
아무튼 전작과는 다른 스타일의 하지만 이런 훈훈한 가족이야기는 이런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에
더 마음에 와 닿네요 누가뭐래도 인간관계의 첫시작은 가족이죠 피는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왜있겠어요
ㅎㅎ

이매지 2011-12-22 00:08   좋아요 0 | URL
고구레 사진관에 재는재로님 리뷰 밖에 없어서 자연스레 봤어요 ㅎㅎ
가족이 붕괴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의미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ㅎㅎ

재는재로 2011-12-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레 사진관의 히로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탄빵 아니며 부동산의 그녀 저는그녀라고 생각하는데요
읽어보셨을면 제 생각에 공감하실거라 생각해요
위태위태해서 보는 사람을 가만있게만들지 못하는 고독한 모습이

이매지 2011-12-22 00:10   좋아요 0 | URL
저는 고구레 히로인은 역시 부동산 그녀라고 생각^^
그녀 역시 하나짱처럼 가족(친가족) 때문에 상처받고 가족(부동산 사장님 내외와 하나짱의 가족) 때문에 치유받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