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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사진관 - 상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내 장르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중독성 강한 NEW 미스터리!"라는 띠지 문구와 표지의 묘한(?) 분위기에 처음에는 이거 SF 계열인가 하며 갸웃하면서 '뭐 그래도 미미 여사니까' 일단 읽어나보자 하고 선택. 앞서 읽으신 분께서 별 두 개를 주시고 상권만 읽으신 터라 '재미 없으면 어쩌지' 하고 일단 상권만 빌렸는데 상권 다 읽기가 무섭게 하권까지 내리 달렸다. 아무래도 'New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뭔가 새로운 모습을 연상케하는 데 정작 읽다 보면 <누군가>나 <대답은 필요없어>의 고등학생 버전이랄까, '일상 미스터리'에 가까운 아기자기한 네 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책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하나비시 에이이치(일명 하나짱)의 부모님이 결혼 20주년을 계기로 고대하던 '마이 홈'을 장만하면서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괴짜 같은 구석이 있는 하나짱의 부모님. 그들은 덜컥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낡은 사진관을 구입하는 것도 부족해 간판도 그대로 스튜디오의 장비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생활한다. 가게가 다시 문을 연 지, 아니 하나짱네 가족이 다시 '고구레 사진관'에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소녀가 이 사진관 때문에 피해를 봤다며 사진 한 장을 하나짱에게 떠넘기고 간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옆에 슬픈 얼굴의 한 여자의 얼굴. 마치 심령 사진 같은 사진 한 장.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유령 같은 이 여자는 누구인 것일까? 하나짱은 사진 속의 몇 가지 단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사진이 남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고구레 사진관>은 고등학생인 하나짱이 주인공(혹은 화자)이지만, 그가 소년 탐정이 되어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 아니다. 심령사진이 등장하지만 그가 사이킥인 것도 아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어하는, 공부는 조금 못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끈기를 지닌,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접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고구레 사진관>의 주가 된다. 'new 미스터리'라는 표현은 물론 기존에 미야베 미유키가 써온 작품과 다른 분위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마 이렇게 성장소설, 일상 미스터리, 심령물 같은 다양한 층위가 이 책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장르적으로는 경계선상에 놓이지만 <고구레 사진관>에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가족'과 연결된다. 종교 문제 때문에 끝내 갈라선 부부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가족도, 할아버지의 죽음에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가족도, 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부모처럼 직원을 보살펴주는 가족도 등장한다. 하나짱은 이 모든 가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 진정한 삶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간다. 어떻게 보면 <고구레 사진관>은 동생인 후코의 죽음을 가슴 한 켠에 '냉동'시킨 채 살아온 하나짱이 다양한 가족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다. 하나짱뿐만이 아니다. <고구레 사진관>에는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상처를 숨긴 채 살아오다가 하나짱과 과거의 사진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삶을 정리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기차역에 잠시 정차는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출발하게 되는 전차처럼, 현재를 붙잡던 과거의 짐을 내려놓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조금씩 과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상처도, 가슴 아픈 사랑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도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고구레 사진관>은 미스터리의 색깔로 그려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등장인물이다. 어쩐지 어수룩하고 친구의 연애에 괜한 심술을 내보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짱을 비롯해 집 마당에서 취미 삼아 야영을 하는 덴코의 아버지, 친척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파격적인 색깔로 염색을 하는 덴코, 아직 어리지만 똘똘한 하나짱의 동생 피카. 여기에 웃을 때면 동안이 되는 부동산 사장님과 피부가 가무잡잡한 탄빵, 시니컬하지만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가기모토 준코까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다양한 일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신기한 일도 있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인간사는 다양한 궤적을 그린다. 그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조금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될 수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조금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미미 여사만의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한껏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 신인 미야베 미유키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