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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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에 믿음직한 작가를 꼽자면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가 아기자기한 장정으로 출간됐다. 표지도 그렇지만 면지까지 귀욤 지수가 만점이라 어쩐지 나도 장밋빛 고딩이 된 것 같은 기분(하지만 현실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되는데, 그가 그리는 고등학생의 일상 미스터리, 게다가 그의 데뷔작라니 오랜만에 책 때문에 두근두근했다.

 

  이야기는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가 세계여행중인 누나에게, 누나가 고등학교 시절 속했던 동아리인 고전부에 입부하라는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누나는 호타로에게 그냥 적만 두어도 된다며 "누나의 청춘이 깃든 고전부를 지켜"달라고 반쯤 강권한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라는 좌우명을 갖고 공부도, 스포츠도, 연애(?)도 회색빛 인생을 사는 "에너지 절약주의자" 호타로지만 (합기도와 체포술이 특기인) 누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고전부에 가입한다. 하지만 고전부 동아리실에 가보니 호타로보다 먼저 와 있는 한 여학생. 겉으로는 청초한 인상이었지만 작은 궁금증이라도 생기면 "저, 신경 쓰여요"라고 말하며 호기심덩어리로 변모하는 지탄다 에루에게 어느새 말리는 호타로. 여기에 호타로의 오랜 친구이자 호적수인 후쿠베 사토시 등이 추가로 입부하면서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다. 


  '고전부'라는 이름만 보고는 고전을 읽는 동아리인가, 고전을 읽다가 그속에서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건가 지레짐작했는데 고전부는 당췌 뭘 하는 동아리인지 알 수가 없다. 고전부 부원들 또한, 몇 년 동안 부원이 없었으니 반쯤 맥이 끊겨버려 무슨 동아리인지 아는 학생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교사에게 물어볼 위인들도 아니라 "활동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아도 존재 가치가 명확하지 않은 단체는 쌔고 쌨으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며 어물쩍 넘어간다.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지만, 지탄다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신경쓰이게 한' 삼촌과 관련된 일을 호타로에게 털어놓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여기에 더해 동아리지 '빙과'를 만들기 위해) 삼촌의 흔적을 쫓으며 고전부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기본적으로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보니 일면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과거 삼촌에게 일어났던 일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지탄다의 모습도 그렇지만, '회색빛' 인물인 오레키 호타로가 자기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길로 들어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장소설로 읽든 미스터리소설로 읽든 간에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색다른 만남을 할 수 있어서 퍽 즐거웠다. 등장인물들이 축제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과정을 보면서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합창부 활동을 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함께 떠올랐다. 축제준비를 위해 계속해서 화음을 맞추고 밤 늦도록 노래를 불렀던 그 시기. 그 당시에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어쩌면 나도 에너지 절약주의자?!)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그렇게 뭔가에 달려든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추억으로 남았다. 고전부원들에게도 '빙과'를 만들며 겪은 일 같은 것이 쌓여 삶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 계속 이어질 고전부 시리즈가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전부원들을 빨리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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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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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읽은 뒤 노리즈키 린타로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긴가 민가 싶어서 더 읽어봐야지 싶었는데 마침 <킹을 찾아라>가 눈에 띄었다. 출간 이벤트로 '킹 카드' 찾기를 하는 걸 보고 눈이 번쩍했었는데(상품이 무려, 출판사 상관없이 8월부터 12월 사이에 출간되는 일본 추리소설 전권이었다) 그게 뭐 내 뜻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고이 묵히다가 이제서야 발굴하듯 찾아내 노리즈키 린타로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교환살인이라는 소재야 뭐 새로운 것도 아니라 뭐 고만고만한 이야기겠지 하고 큰 기대없이 읽었는데 완급 조절도 괜찮고, 은근히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어서 즐거웠다.

 

  이야기는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우연히 만난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네 사람의 창단식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이 교환살인을 하기보다 셋, 셋보다는 넷일 때 더 발각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네 사람은 교환살인에 뜻을 모은다. 저마다의 살해대상을 가진 이들은 피해자의 순서와 사형 집행인의 순서를 카드 뽑기로 결정하고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부터 괴짜인 부자 삼촌 등 한 명씩 정해진 순서대로 살해되던 중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노리즈키 총경과 그의 아들 린타로는 일련의 사건에 의심을 품게 되고, 서서히 수사망을 좁혀간다. 사중 교환 살인은 성공할까? 아니면 경찰에 덜미를 잡힐까?

 

  네 명의 범인이 등장하고, 각자가 죽이고 싶은 네 사람, 그리고 이들을 상징하는 네 장의 카드가 등장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잠깐 정신을 놨다가는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조금 복잡한 듯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표를 만들어 정리해두고 읽으면 도움이 될 듯.) 결말은 앞장을 다시 들춰볼 정도이긴 했지만, 우연히 실마리를 잡아 엉겁결에 사건을 해결한 느낌이라 이 사건의 탐정 역인 린타로의 매력(또는 재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듯했다. 이래저래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짧은 분량이라 가볍게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매력적이었다. 결말에 다소 맥이 빠졌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전개를 쭉쭉 밀고 나가서 시원스럽고 좋았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 중 아직 읽지 않은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인 <요리코를 위해>와 <1의 비극>은 이 책과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와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니 이 작품만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가 더 기대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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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11-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에 헉!했네요.

이매지 2013-11-19 09:26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쎘네요. ㅎㅎㅎ
 
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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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물을 좋아해 가상으로나마 다양한 범죄 사건을 접하면서 과연 어떤 범죄가 가장 악질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법적으로야 타인의 생명을 앗는 살인이 가장 중한 죄겠지만 '악질'이라면 역시 유괴가 맨 먼저가 아닐까. 그 어떤 범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돈을 매개로 한 가족의 삶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삶의 흐름을 틀어버린다는 점에서 살인보다 유괴가 더 잔인할지도 모른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바로 그 유괴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익히 봐온 것 같은 아이가 유괴된 가족의 이야기도, 유괴 사건을 공모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아버지가 유괴범인 딸의 인생을 둘러싼 독특한 이야기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자이 신문사의 사장은, 자신의 회사에 신입 기자로 내정된 여학생(히로코)이 유괴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타 주간지에서 보도하려는 정보를 접하고 인사국장에게 확인하나 이는 사실로 밝혀진다. 빼어난 인재라 사장은 히로코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지만, 편견 없이 채용한 것은 기쁘긴 하나 용납할 수 없기도 하다는 사주의 입장 때문에 이십 년 전의 유괴 사건은 재조사에 착수한다. 현역 기자가 조사하기엔 무리가 있는 건이라 편집자료실에 좌천되어 있던 전 사회부 기자인 가지가 이 조사를 도맡는다. 가지는 이십 년 전 사건을 다시 들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어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지만 "가능성 제로라는 것은 없는 법"이라 반쯤 재미로 임무 수행을 시작한다.

 

  범죄자의 딸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가정환경을 비관하는 아이를 그리게 된다. 하지만 <저물어 가는 여름> 속의 히로코는 다르다. "그런 일류 호텔에 저 같은 유괴범의 딸이 출입해도" 괜찮냐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때묻지 않은 어리숙함과 입사하지 않겠다고 강단 있게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췄기 때문에 도자이 신문사의 사람들뿐 아니라 나도 '이 아가씨 매력 있네'라고 점점 히로코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히로코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책 초반에 히로코의 양아버지가 한 말처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편견으로 둘러싼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편견을 실력으로 부숴버리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엔 자포자기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야기 초반에 입사를 반려하고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인정한 히로코의 마음 한 켠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으리라. 도자이 신문사 입장에서도 히로코란 인재는 탐낼 만하지만 히로코 입장에서도 분명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시기다. 하지만 이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아이를 위한 20년 전 유괴 사건의 조서는 역시 녹록치 않다.

 

  생후 1주일 된 영아가 납치되고 희안하게도 범인은 부모가 아닌 종합병원의 원장에게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아기는 죽는다"는 협박장을 보내고 돈을 요구한다. 접선 현장에서 영리하게 도망친 범인의 흔적을 수신기로 다시 찾아내지만 결국 범인은 차로 도주하던 중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한다. 죽은 범인의 집에서는 범행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여럿 나왔지만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어버린다. 가지는 20년 전의 증인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증인들을 찾아냄으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사건의 잔재를 쫓아 결국 가지는 이 사건에 공범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결말. 초반에는 약간 늘어지지만 사건을 조사해가는 과정에서 점점 긴장감이 더해지고 결말부 공범과의 대면에서 '이런 발상도 가능하구나' 하는 신선함을 느꼈다.

 

  오래된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점에서 미국드라마 <콜드케이스>가 떠올랐는데 두 작품 모두 기본적인 한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너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20년 전이 아니라 2년 전, 두 달 전, 심지어는 이틀 전의 기억마저도 가물한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세부적인 디테일까지도 마치 방금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기억에 남았다손 쳐도 역시 이런 소재는 이 부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태생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물어 가는 여름>은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이라기에는 생각보다는 탄탄했고,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책 말미에서 이 책의 편집자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결말의 정서는 권선징악의 쾌감이 아닌 서글픔과 회한이다"라고 마무리하는데, 그 말처럼 책을 놓고도 하나의 사건으로 한순간에 인생이 바뀌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더위도 조금씩 꺾이는 정말로 '저물어 가는 여름'날 밤. 맥주 한 잔 마시며 읽으면 씁쓸함이 더해질 책이다.

 

덧) 책 속에서 범인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의 원작인 <킹의 몸값>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과 <킹의 몸값>을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할 듯 싶다. 유괴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다룰 수 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하며 보는 즐거움이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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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2-0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드 시작해서.. 읽으려고 찜했어요
 
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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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러브레터>다. 첫 장면인 장례식 장면부터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오겡끼데스까"까지 <러브레터>의 배경에는 눈이 하염없이 날린다. 당연히 홋카이도도 여느 도시처럼 사람 사는 곳이건만 <러브레터>의 이미지 때문인지 나에게 홋카이도는 범죄 같은 어둠 없이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순수한 사랑만이 남은 순백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쩐지 동화 속의 도시 같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오해를 이 스스키노 시리즈가 유쾌하게 깨부쉈다.

 

  '알코올 중독'이 아닌 '알코올 의존증'인 '나'. 여느 날처럼 스스키노의 바 '켈러 오하타'에서 위장약을 털어넣은 뒤 술을 벗삼아 밤에 젖어들려는 차에 누군가 '나'의 성씨에 '선배'라는 "뒷맛 나쁜 단어를 붙여" 불렀다. 평범하게 생긴 대학생인 그는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에게 여자친구의 행방을 찾아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별로 흥미가 동하는 의뢰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동정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조사. 하지만 단서를 쫓다 보니 얼마 전 한 모텔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의 접점이 떠오른다. 이에 나는 처음의 마음가짐과 달리 진지하게 후배의 여자친구를 찾기 시작하고 살인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실질적인 정의는 차치하고 하드보일드 하면 비정한 도시에서의 사건, 그리고 진지하게 폼잡는 탐정, 건조한 서술방식 같은 키워드가 떠오른다. 하지만 <탐정은 바에 있다>는 여느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떠올리는 하드보일드 키워드에 플러스알파로 '유머'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올해도 스물여덟 늙은이"인, "언뜻 보면 야쿠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주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오셀로게임이 소소한 부수입인 주인공의 캐릭터부터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대놓고 쉴새없이 웃기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볼 때는 너무 진지한 캐릭터인데 알고 보면 허당이라 그 간극에서 오는 매력과 웃음이 있다. 내가 갭모에라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 '나'에 홀딱 반해버렸다. 마음이 드는 사람이 아무리 시덥잖은 농담을 해도 실없이 터지는 것처럼 나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빵빵 텨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건 자체는 우연적이고, 이야기의 얼개도 좀 산만한 면이 있지만 그런 스토리의 아쉬움을 '나'란 캐릭터의 힘으로 모두 커버해낸다. 물론 탄탄한 개별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캐릭터가 힘있게 자리매김한 시리즈가 롱런 하는 걸 보면 '스스키노 시리즈'도 꽤 나왔겠구나 싶었는데 2011년까지 총 12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이미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으니 앞으로 몇 번 더 '나'와 스스키노 거리를 누빌 수 있을 듯해 기뻤다. 스토리 외에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자면, '나'는 줄창 마시는데 소설 밖에 나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책을 읽어 힘들었다. 다음 권인 <바에 걸려온 전화>는 맥주를 구비해놓고 함께 마시면서 스스키노 거리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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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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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을 놀라게 한 작가'라는 띠지 문안에도 혹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스무 권 이상의 장편을 발표했음에도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는 점이 끌렸다. 한 남자가 인형을 조종하는 표지 그림을 보면 이 책이 무대와 관계 있음을, 제목의 연기가 '연기(演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마음은 '연기(延期)'에 가까웠다. 페이지는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머리 식힐 겸 읽으려고 주문했는데 500페이지가 넘어 어쩐지 여유 있을 때로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니 '일생 일대의 상황'을 맞닥뜨린 주인공의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면서 점점 이 남자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의 연기를 끝까지 정신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주인공 토비 플러드.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지만, 그의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선 상황이다. 순회공연 중인 연극도 반응이 그저 그래서 연기 인생이 끝나갈 참이고, 별거중인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끝이 보인다. 그러던 중 토비는 아내에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토비의 극성팬을 쫓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떻게든 아내와 다시 시작해보고팠던 토비는 이 일을 계기로 재기를 노리고, 팬으로 보이는 남자는 토비와 이야기를 나눈 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진행되는 것 같았던 일은 팬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아내의 곁을 맴돌고 이에 항의하는 토비에게 그의 연극무대가 시작되는 8시에 단둘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후 토비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몰리게 된다. 그의 무기는 '끝까지 연기하는 것'뿐. 잇단 의문과 죽음을 토비는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은 상황에 떨어져 일주일 동안 편안히 잠 잘 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토비의 모습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일을 이렇게 벌이는 건가 걱정도 됐다. 토비라는 캐릭터가 연극배우이면서 탐정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일을 자기 딴으로 수습하기도 바쁜 판인데 어쩌자고 대기업의 비밀까지 파고들어가는 건가 했는데, 결국 막판에 제삼자가 사건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며 이게 어떤 의미로는 반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토비는 대기업의 음모를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별거중인 아내 제니의 관심(또는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좇을 뿐이다. 그가 맞선 것은 운명이나 유령 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단 한 번의 기회는 아니었을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 초반에 얘기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미래를 다른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손에 넣는다.

 

  기대했던 형태의 반전은 없어서 아쉬웠지만 지문 사이, 대화 사이에 살짝 녹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각은 좋았다. 예를 들어, 토비는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을 읽는 독자 또한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대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토비는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토로했지만, 어차피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일뿐이 아닐까. 어이없을 정도로 뒤통수 때리는 반전이 아니라 맥이 좀 풀릴 수 있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남이 등장하는 속도감 있는 스릴러 정도로 읽는다면 분량에 관계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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