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1초전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5
로맹 사르두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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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라고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휴일의 의미가 강해진 것 같다. 딱히 종교가 없는 내게 석가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나 별반 차이가 없긴 하지만, 여기저기 울려오는 캐롤을 들으며 문득 '크리스마스'가 소재인 책이 읽고파 책장을 뒤적이다 발견한 책. 바로 이 책 <크리스마스 1초전>이다. 

  우중충한 분위기의 코크커틀에서 굴뚝청소부를 뽑는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또래 소년들보다 키는 작지만 초롱초롱하고 생기가 넘치는 아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 해럴드다. 고아원에서 지내다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나와 현재는 마음씨 좋은 팔루 할아버지와 강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팔루 할아버지가 죽고, 고아원에 다시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루 할아버지에 대한 살인죄까지 뒤집어 쓰며 재판을 받게 된다. 끔찍한 형벌을 받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스코틀랜드의 교화 농장행이 결정된다. 그곳도 고아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그곳에서 해럴드는 꼬마 요정인 뤼탱을 만나고, 그들을 도와 크리스마스 부흥(?)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산타할아버지는 누구인가'와 '산타할아버지는 어떻게 짧은 시간에 선물을 줄 수 있는 걸까'에 대해 동화처럼 풀어간다. 하지만 이 부분을 동화 같은 현실 속에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 전개시켜나가 유치하지 않게 느껴졌다. 해럴드에게 어른들의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항상 의심하고, 믿을 사람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아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해럴드와 뤼탱들의 노력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책을 내려놓고 나니 어쩐지 귓가에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과는 비슷한 듯 다르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만난 것 같아 즐거웠다. 로맹 사르두의 또 다른 크리스마스 이야기인 <크리스마스를 구해줘>도 내친 김에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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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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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데뷔작에는 그 작가가 앞으로 이뤄갈 작품세계의 면모가 엿보이기 마련이다.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고, 조금은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세상에 쏟아내고 싶어한 메시지가 데뷔작에는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국내에 소개되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가 있다면, 일단 그의 데뷔작부터 읽어보곤 한다. 하지만 단편보다는 장편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인지 주노 디아스는 데뷔작인 <드라운>보다 첫 장편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노 디아스의 길지만 짧게 느껴지는, 놀라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제목만 보고는 뭔가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떠난 오스카 와오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다보니 오스카 와오는 SF에 심취한 오덕후 중에 오덕후. 게다가 100키로 그램이 넘는 뚱보에 까맣디 까만 흑인으로 아무도 그와 어울리려 하지 않는 왕따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여자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지만 외모 때문에(물론 그의 화법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누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와 손 한 번 잡아보기는커녕 대화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대체 무슨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오스카 와오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 않다. 그의 이모할머니 라 잉카와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의 부모님, 누나까지 그를 있게 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트루히요 정권 하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강제, 박탈당한 그들의 비극적인 삶.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고 싶어했던, 단지 그들을 지키고 싶어했던 욕망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그들은 푸쿠라는 저주처럼 그것을 직접 경험한다. 하지만 대대로 오스카 집안의 사람들은 학습 효과가 제로에 가깝다. 이 사랑이 자신의 인생을 부숴버릴지 몰라도, 이 사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가게 될 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과 맞서 싸우려 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쥐어 뜯어 말려도, 그(또는 그녀)는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해도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믿고,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어쩌면 이것은 푸쿠가 아니라 오스카 와오의 집안의 가풍일지도.

  오스카 와오의 덕심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낯선 부분이 많아서 독자가 처음에 꽤 고전할 법한 책이지만, 역자와 편집자의 노고 때문인지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기존에 만나지 못했던 신선한 경험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것처럼,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독자를 어찌할 수 없게 만든다. 단순히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가족, 사랑,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대한 책. 찌질하지만 사랑스러운 우리의 오스카 와오, 그가 뚱보에 덕심 가득한 왕따 소년이라 해도, 그의 짧은 생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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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구 - 그때 우릴 미치게 했던 야구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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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읽을 때마다 어쩐지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감돌게 되는,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설. 늘 상처 입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가는 그의 소설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특히나 이번에 출간된 <열구>는 최근 애정해 마지 않는 '야구'에 대한 이야기라 더 관심이 갔다. 

  실력은 형편 없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만큼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슈코 고등학교. 비록 상대편 에이스의 견제구보다도 느린 공을 던지지만 엄연한 슈코의 에이스 주인공 요지. 늘 예선 초반에서 떨어졌던 슈코 야구부가 엄청난 운이 따라줘 처음으로 지역 예선 결승전까지 오른다. 1승만 더 하면 고시엔 마운드에 오를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시합 바로 전날 불의의 사건이 터지며 이들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고, 이들은 슈코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 도쿄로 떠난 요지. 20년이 흘러 잠시 사정상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쇠락한 고향에 아쉬워하기도 하고, 여전히 폐쇄적인 사람들의 모습에 답답해하지만, 요지는 고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비로소 20년 전의 상처와 마주보게 된다. 

  <열구>에서도 시게마츠 기요시의 전매특허인 상처 받은 인물과 그가 자신의 상처를 마주보고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사실 표지도 그렇고 내지 이미지도 야구에 대한 이미지가 많아서 시게마츠 기요시 표 스포츠 소설일까라는 기대도 품었는데, 야구가 하나의 소재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꿈'과 '좌절'이 중심에 놓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생을 스포츠, 특히 야구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인생을 야구에 비유하는 듯하다. 하지만 기존의 소설에서는 흔히 9회말 2아웃이라고 해도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로 비유를 들곤 했다면, <열구>는 독특하게 콜드 게임을 예로 든다. "져도 된다. 인생에 콜드 게임이란 없으니까"라는 말로, 인생에 늘 승리만 있을 수 없다고, 지는 것 또한 소중한 경험이라고 위로와 응원을 통해 힘을 북돋워준다. 

  주인공 요지는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난다. 고향을 떠나 도쿄로 향한 그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도망친 것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 옛 친구를 만나고, 자신의 딸을 통해 부모님과 마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기만 했던, 지우고만 싶었던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도망치지 말라고,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기보다는 때론 도망쳐도 괜찮다고, 그것이 자기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이야기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감성의 시게마츠 기요시. 그의 다른 작품보다는 조금 더 뜨거운 면이 있었지만, 그 뜨거움마저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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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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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면서도 뭔가 딱 이거다 싶은 책이 없어 방황하던 중 트친님과의 대화를 하던 중 이 책이 번쩍 찾아왔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예전에 사두고는 고이 꽂아만 두었던 책. <나의 미카엘>이라는 제목 때문에 어쩐지 어린아이에 대해 쓴 글이 아닐까 지레짐작도 해봤지만, 의외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책은 시작된다. 

  10년 전,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과의 첫 만남.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그녀의 팔꿈치를 한 남자(미카엘)가 잡아주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 그 설레임. 그녀는 미카엘과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일까. 그녀는 결혼 전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결혼 후에도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행복도, 그렇게 어렴풋한 미소만 남긴 채 현실 속에서 조금씩 파묻혀간다. 

  활달하고 몽상적인 성격의 한나, 무슨 일을 겪어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는 미카엘.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린다.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두 사람.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도 해보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진행되는 구조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노라고 이야기하기엔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어쩌면 누군가에게 결혼은 가장 고독한 순간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결국 혼자인데, 애써 결혼이라는 계약을 매개로 하나가 아닌 둘이 됨을 강요받고, 그 굴레 속에서 얽매이다가 결국 자기 자신다움을 잃게 하는 것.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는 격렬함은 없었지만, 한나와 미카엘의 조용한 전쟁 속에서 현실과 이상은 얼마나 타협하기 힘든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중에 결혼을 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스라엘 최고의 작가라는 아모스 오즈.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다른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소설이지만 한 편의 서정시 같은 그의 문장. 그 문장의 맛을 다시 느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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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17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저처럼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이 좀 더 느낄 수 있는 내용이겠군요?
자기 자신다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고도 모순이 되는지...결혼으로 완전해진다기보다...좀 덜 외로우려고 선택하는 길은 아닌가 싶어요~ㅠ

이매지 2010-11-17 11:40   좋아요 0 | URL
결혼하고 읽으면 정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좀 덜 외로우려고 선택하는 길이라고 해도,
한나와 미카엘의 이야기는 참 쓸쓸해요 ㅠㅠ
 
대지의 기둥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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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의 기둥>을 읽는 동안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작품을 추천하기 바빴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데?"라고 묻는 이들에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꼬집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대성당 짓는 이야기'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기엔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했고, '정의를 되찾는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 이상의 재미가 담겨 있어 나는 번번이 설명할 바를 못 찾고 어버버 하다가 "그냥 일단 읽어봐"라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면서도 또 다시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은데, 그걸 논리적으로(혹은 열정적으로) 글로 옮기기엔 부족함이 많아 아쉽고 또 아쉽다.

  1123년부터 1174년까지 50여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중심에는 킹스브리지에 세워질 '대성당'이 놓인다. 일거리가 없어 배를 쫄쫄 굶다가 결국 아내가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이한 석수쟁이 톰. 그에게 대성당은 평생을 바쳐 꼭 도전해보고픈(혹은 이루고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이다. 작은 수도원의 원장에서 쇠퇴할 대로 쇠태한 킹스브리지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필립에게 수도원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부를 벌어다줄 수 있는 기회로, 누군가에게는 어려울 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고마운 존재로 수도원은 자리잡는다. 긴 세월을 담고 있고,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주연급은 끽해야 10명 남짓한 등장인물들의 오랜 세월 동안 얼키고설킨 이야기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보통 우리가 접하는 현대소설에는 비교적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져 있다. 악인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그의 악함을 동정해줄 수 있는 설정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지의 기둥>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그중 악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윌리엄 햄리다. 하급 귀족인 퍼시 햄리 경의 아들인 그는 한때 신분상승을 꾀하고자 하는 부모의 계산 하에 바살러뮤 백작의 딸 앨리에너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그녀의 거부로 파혼하며 앙심을 품는다. 그리고 윌리엄 햄리는 아름답고 총명한, 그리고 도도하기까지 한 앨리에너에게 평생 애증의 감정을 품고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괴로움을 주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고 살아간다. 어찌보면 이 책은 윌리엄 햄리(악)에게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악은 등장인물들을 겁먹게 하고, 그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준다. 

  권력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상황. 이런 상황은 어쩌면 이미 많은 소설에서 만난 빤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대지의 기둥>에서는 그런 모든 이야기가 '성당'과 연계된다. 종교적인 면을 떠나서 '성당'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정의로 대치할 수도 있을 듯)을 세우기 위한 지치지 않는 투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채석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자재의 수급이 어려워지더라도, 예정보다 빠른 공사로 인해 성당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도, 폭우로 인해 전에 없는 기근에 시달려도, 윌리엄 햄리의 약탈에 마을이 불타도, 그 모든 방해와 고난을 딛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회의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성당은 조금씩 쌓아올려진다. 그저 막무가내로 돌을 쌓기만 하는 것이 아닌, 치밀하게 짜여진 비율에 맞춰 세워지는 성당. 그렇게 쌓아올려진 성당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경배이며,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인물은 늘 고난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여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지의 기둥>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녀 앨리에너는 그런 면에서 짧은 삶 속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극단적으로 경험한다. 백작의 딸로 우아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아버지가 역모 혐의로 수감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윌리엄 햄리에게 겁탈 당하고, 철 없는 동생을 부양하며 오직 반드시 셔링의 백작을 되찾겠다는 목표로 살아간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 고생 끝에 양모상으로 성공하지만, 그마저도 윌리엄 햄리의 습격 때문에 모두 불에 타 빈털털이가 되고, 결국은 동생을 위해 불행한 결혼을 택하는 모습. 그러나 결국 자신의 사랑을 되찾는 모습 등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아름다운 외모, 그에 어울리는 총명함.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고난을 안겨줬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복수를 수행하느라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답답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그녀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은, 그래도 삶이 아직은 괜찮다고 조금만 더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이 책의 여주인공격이라 그런지 몰라도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었던 인물.

  사랑, 음모, 권력, 그리고 정의. 천오백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 속에는 이 모든 것이 긴장감 있게 녹아 있다. 중세의 암흑. 그 암흑 속에서 조금씩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는 모습을, 조금씩 사랑과 정의가 그 어둠을 거둬가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읽어갔다. 이 작품의 속편인 <끝없는 세상>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작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책의 아쉬움을 달래며 이제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대지의 기둥>을 보며 감상을 되새김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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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1-15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들이 극찬하던데~~ 이매지님 리뷰를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이매지 2010-11-15 10:08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러니까 겁나게 열심히 쓰기는 했는데, 리뷰만으로는 뭔가 부족해요.
일단 읽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어요 ㅎㅎ

BRINY 2010-11-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고 추천작인 '수도원의 죽음'도 봤는데, 사실 전 '수도원의 죽음'이 더 끌리더라구요. 킹스브리지 성당 건축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어도 건축지식이 없으니 뭔가 대단한 거 같기는 한데, 뭐가 뭔지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안그려져서요.

이매지 2010-11-15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수도원의 죽음>도 챙겨서 봐야겠네요. 저도 딱히 건축 지식은 없는데 찾아가면서 읽고 그랬어요^^ 아무래도 드라마를 보면 확 와닿을 것만 같아요 ㅎㅎ

BRINY 2010-11-15 1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드라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tella.K 2010-11-1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표지가 너무 영화스러워서 좀 그랬는데
이매지님이 확 깨주시네요. 흠..관심이 가요.^^

이매지 2010-11-15 14:05   좋아요 0 | URL
노란 부분이 표지고 드라마 들어간 부분은 띠지예요.
띠지 벗겨내면 덜 영화스러운 표지로 변신 ㅎ
어쨌거나 멋진 작품이예요 :)

마녀고양이 2010-11-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즈음 같이 사고파했던 분들이,
다들 읽고 리뷰를 올려주시는데... 전 아직 꽂아놓고 손도 못 대고 있으니
아하하, 왜이리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리뷰 감사히 읽었습니다, 더욱 침을 흘리고 있답니다. 이그.

이매지 2010-11-15 23:48   좋아요 0 | URL
저는 10월 중순 즈음에 시작해서 이제서야 끝냈네요 ㅠㅠ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여운도 남네요.
마녀고양이님도 어여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