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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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도 책도 재미있게 봤는데 어째서인지 다나베 세이코의 다른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 국내에 번역서가 여러 권 소개되었던 터라 관심만 있다면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건어물녀마냥 건조한 나는 연애소설이라니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소녀같군 하며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과는 자연 멀어졌다. 그러다 서른이 되고 봄바람 불자 <서른 넘어 함박눈>의 분홍분홍한 표지에 마음도 부농부농해져서 오랜만에 다나베 세이코를 만났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 사랑이 진행될 때의 열정, 그리고 식어버린 사랑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폭넓게 보여준다면 <서른 넘어 함박눈>의 여자들의 모습은 그보다 조금 구깃구깃하다. 여행지에서 멋진 남자에게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며 다니기도 하고, 룸메이트의 남자가 두고 간 듯한 특대 흰 팬티를 보고 공상을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고 남자가 걸리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서른이 넘어 한 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음을(혹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내심 우연한 계기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팟, 하는 계기로 결혼에 골인하기를 꿈꾼다. 

 

  사실 이 책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리 낯설지 않다. 카페 옆자리나 술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부부의 대화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농밀한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 책 속의 여자들처럼 어느샌가 나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30대 여자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와 일본드라마 <결혼하지 않는다結婚しない>를 볼 때처럼 무한공감하며 읽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만 등떠밀려서 하고 싶지는 않은, 이왕이면 조건에 맞춰 결혼하기보다는 내 힘으로 사랑을 이뤄가고 싶은,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서른 넘어 함박눈>에서 만난 여자들의 모습 속에 나를 슬쩍슬쩍 만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 봄이구나.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들었다. 아아, 봄도, 서른도, 사랑하기 좋은 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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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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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영미장르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를 하나 고르라면 많은 이들이 스티븐 킹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숱하게 영화화됐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 소개가 된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작품이 소개됐다. 독서모임 책으로 <11/22/63>이 선정되었을 때 '드디어 스티븐 킹을 만나게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맨 먼저 스쳤다. 그래도 나름대로 장르소설은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데 스티븐 킹이 처음이라니 스스로도 좀 의아했지만, 너무 작품이 많다 보니 뭐부터 읽지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렀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초면부터 벽돌 같은 책 두 권이라니.

 

  표지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책이다. 젊은 나이에 취임한 케네디는 경제불황과 냉전, 핵전쟁으로 뒤숭숭하던 시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 오늘까지도 많은 미국인들의 기억에 살아 있는 대통령 중 하나다. 지병이나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닌, 1963년 11월 22일에 오스왈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며 급작스럽게 임기가 끝나버렸다. 어쩌면 암살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그리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도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은 꾸준히 제기된다. 그리고 스티븐 킹은 이 사건에 타임슬립을 접목시켜 자기 나름의 견해를 더한다. '그때 오스왈드를 저지했다면 미국, 아니 세계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스티븐 킹 나름의 답이 <11/22/63>이다.

 

  1권 520쪽, 2권 744쪽. 1200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인지라 케네디 암살 사건을 스티븐 킹이 뭔가 집중적으로 파헤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고개가 갸웃해졌다. 애초에 1958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케네디의 암살을 저지하기 위해 1963년까지 그곳에서 주인공이 오스왈드의 행적을 쫓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과거에서 새롭게 만날 사람들과 꾸려갈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그려지겠구나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어느 순간 케네디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고 새라와의 사랑이 메인 스토리로 부각된다. '과거는 고집이 세'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의지로 이를 바꾸어 보겠는 의지를 보이던 주인공이 새라를 만난 이후로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라는 식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타임슬립 로맨스로 변해버린다. 63년이 되어 이제 정신 좀 차려 암살 사건에 집중하나 했더니 스티븐 킹은 되려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라고 어떤 시대에도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명성답게 무지막지한 분량도 어느새 몰입해 술술 읽어가지만,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8년부터 63년까지 약 6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그럼 과거 체류 기간을 몇 년 줄이면 되잖아 싶었다. 나도 어차피 주인공 같은 소시민(?)이라, 주인공처럼 토끼굴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면 오스왈드의 저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과거에서 저렴한 식재료나 사들고 돌아왔을 것 같지만 말이다. 기대했던 바와 다른 이야기 전개에, 아무리 암살이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라고 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마무리라 용두사미같았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한다는 점 하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단순의 미학"이 중요하다고 "군더더기를 배제하라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했던 스티븐 킹. 그의 말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책. 여러모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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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3-04-0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더기 너머 많은 좀도 분량을 줄였으면 훨씬 더 읽기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이 드네요

이매지 2013-04-03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글을 군더더기 없이 쓰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어느샌가 리뷰에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ㅠㅠ)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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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 일정을 짜는 것이나 숙소 예약보다 『금각사』를 먼저 챙겼다. 오래전에 삼 분의 일쯤 읽다가 어쩐지 잘 읽히지 않아 포기했던 책이라 한편으로 이번엔 읽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교토에서 『금각사』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같았다. 여행지에서 독서라니, 이것이 나의 얄팍한 허영이라 할지라도 나는 금각사가 있는 교토에서 『금각사』를 읽고 싶었다. 책을 챙길 때만 해도 『금각사』를 읽은 뒤 실제 금각사를 보자 싶었지만, 금각사 쪽에 숙소를 잡은 관계로 짐을 풀자마자 금각사에 달려가는 바람에 실물을 먼저 접한 후 『금각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후 매일 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내 교토 여행은 조금 더 풍성해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금각사』는 1950년에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책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을 불태운 미조구치라는 인물의 성장과정과 내면 묘사를 통해 그가 왜 '금각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려낸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라는 "금각의 환상"을 품어온 미조구치가, 금각사에 도제로 들어가면서 금각과 싱겁게 만나게 되고 금각과 미묘한 관계를 맺어가는 장면들을 통해 '절대적인 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이코라는 여자아이에 대한 관심과 그녀의 죽음, 금각의 주지가 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기대, 그나마 자신을 현실과 이어준 쓰루가와의 만남과 그의 죽음, 대학에서 가시와기와 만나며 시작된 일탈, 패망으로 인한 충격 등 내외부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 인물이 어떻게 그릇된 노선을 걷게 되는지 『금각사』는 잘 보여준다. 워낙에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에 『금각사』는 탐미주의 문학이든, 성장소설이든 혹은 '금각사 방화'를 소재로 한 수기든 어떻게 읽어도 완전하고 무궁무진하다. 


  금각에 대한 기대, 동경이 실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불괴의 아름다움"이 되어 "순수한 파괴"에의 갈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는 가벼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흐름이나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 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비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하는 불멸의 금각과, 계속하여 변해가고 겉모습과 달리 위선과 탐욕으로 가득 찬 미조구치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금각은 점점 더 굳건한 존재가 되고, 이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는(혹은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어간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우는 것은 그의 말처럼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조구치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탈아에의 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더듬이에 가난한데다가 친구도 몇 없어 안으로만 침잠하는 인물. 자신의 열등함을 인지하나 부모에 의해, 주지에 의해 더 나은 인물이 되기를 기대받고, 그로 인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인물. 그런 미조구치가 이상으로 대변되는 금각을 불태우고 "살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등 떠밀리듯 쫓아간 이상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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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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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빗> 개봉에 맞춰서 <반지의 제왕>이나 다시 한 번 연달아 볼까 하다가 그냥 <호빗>에만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볼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없어서) 원작부터 읽기 시작했다. 작은 판형에 4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분량이라 처음에는 우습게 봤는데 이 안에 실로 많은 모험이 그려져 있어서 일주일 넘게 붙잡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의 제왕』 은 이 정도 분량의 책이 영화 한 편이었다면 『호빗』은 이걸 영화 세 편으로 쪼갰으니 말이다. 『반지의 제왕』 이전의 이야기라지만 그 또한 본 지가 하도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골룸과 간달프 정도만 '아, 반갑네' 하면서 거의 백지 상태로 읽었지만 어느샌가 나도 호빗과 함께 '뜻밖의 여정'을 시작했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언덕에서 평온한 생활을 해온 골목쟁이네 빌보. 여느 날처럼, 모험이라고는 거리가 먼 아침을 맞이한 빌보 앞에 간달프가 나타난다. 간달프는 빌보에게 모험 어쩌고 하는 말을 꺼냈지만 모험보다는 가능하면 하루에 저녁 식사를 두 번 하고, 가끔 이웃들과 함께 파티를 하며 웃고 떠들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즐기기 좋아하는 평범한 호빗인 빌보는 황급히 그 자리를 뜬다. 하지만 기껏 간달프를 쫓아냈나 싶었더니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빌보의 집에 난쟁이들이 찾아온다. 영문도 모른 채 손님을 맞이한 빌보. 엉겁결에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면서 빌보는 난쟁이들이 자신들의 땅과 보물을 차지하고 있는 스마우그를 찾아 떠나는 길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간달프가 자신을 이 모험대의 일원으로 지목했음을 알게 되고, 등 떠밀리듯 난쟁이들과 함께 외로운산을 향해 떠난다. 자신의 마을을 벗어나본 적도 없는 빌보가 상상도 못했던 모험과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는데……


  따지고 보면 스마우그의 보물을 되찾기 위한 단순한 모험담인 『호빗』은 이후 『반지의 제왕』의 주요 소재인 '절대반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사실 절대반지가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호빗: 뜻밖의 모험>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스마우그의 보물을 손에 넣은 뒤 변해가는 난쟁이들의 모습은 절대반지를 잃고 분노하는 골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물질적인 부에 비교적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빌보다. 어쩌면 이 부분이 간달프가 빌보(그리고 이후에 프로도)를 선택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보석 같은 물질적인 부보다는 자신이 가진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씨 말이다. 아무튼 『반지의 제왕』보다 등장인물도 작고 서사의 구조도 훨씬 소소한 모험담인 『호빗』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대사나 상황 때문에 빵빵 터지는 구석이 있어서 영화와 다른 의미에서 재미있었다. 이야기 초반에 화자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골목쟁이 집안의 한 호빗이 모험을 하게 되었고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가 이웃의 존경을 잃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얻기도 했다. 글쎄, 그가 결국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운을 띄우는데, 그의 말처럼 책을 다 읽자 빌보가 결국 얻은 것은 돈이나 타인의 존경(혹은 명예)이 아닌, 소박한 일상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어졌다.


  원작을 다 읽고 내친 김에 영화까지 봤는데, 원작과 영화는 닮은 점도 있었지만 몇몇 설정이 달라서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원작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모험을 시작했던 빌보가 영화에서는 스스로의 결심으로 모험을 시작한다는 설정이나, 원작에서는 비중이 미미했던 참나무방패 소린의 비중이 늘어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난쟁이들의 전투력이 원작보다 향상되었다는 점 등이 눈에 띄었다. (원작에서는 허구한 날 도망다니기 바쁘던 난쟁이들이 영화에서는 결과야 어떻든 간에 이만하면 그래도 '용사'가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원작에 각색을 더하고, 『호빗』 외에 번외 이야기까지 살을 붙여 영화는 (다소 드문 경우지만) 원작보다 더 보는 재미가 있었다.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끝날 때쯤에는 어여 연말이 와서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간만에 영화도 원작도 재미있는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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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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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소설을 갓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 소개된 일본현대작가가 별로 없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나름 많이 읽었지만, 어느새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외에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이 소개된데다 무슨 공장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작품을 쏟아내는 속도에 기함해 어느샌가 손을 놓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무슨 작품이었는지 가물할 지경이라(아마 가가 형사 때문에 읽은 <신참자>가 아니었나 싶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알라딘 머그컵이나 받아야지 하는 불순한 동기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구입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고, 그저 히가시노 게이고니까 잘 읽히긴 하겠지, 하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강도짓을 한 세 청년이 경찰의 눈을 피해 밤을 지샐 곳을 찾던 중 우연찮게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간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은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간다. 조용히 숨어 있다가 새벽이 되면 첫차를 타고 도주할 예정이었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얼결에 편지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어떤 이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장난인가 하고 무시하려다가 어느샌가 답장을 쓰게 된 이들. 하지만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다시 편지가 날아든다. 시간이 이상하게 뒤틀린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세 청년은 어느새 진지하게 누군가의 고민을 상담하기 시작한다. 첫 이야기인 <답장은 우유 상자에>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이 점을 내려놓고 본다면 다섯 편의 연작은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범한 이들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 보면 세상엔 이렇게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소하게는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신을 아는 누군가에게는 선뜻 말하지 못할 고민이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그냥 누구라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독백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할 때, 누군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경청해준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다. 결혼을 예정한 애인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이 얼마 남지 않아 고민인 이도, 가업인 생선가게를 물려받는 것과 꿈인 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도, 부모와 함께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이도, 어떻게든 성공을 하고 싶어 사무보조일을 그만두고 호스티스의 길을 걸을까 고민하는 이도 모두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상담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때도 있고, 누가 내 등을 떠밀어줬으면 하는 마음일 때도 있었지만 고민을 글로 옮기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마주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그렇다 쳐도 이를 들어주는 이들의 입장도 사뭇 진지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장난에서부터 시작한 고민 상담이었지만, 나미야 잡화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면서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구멍이 휑하니 뚫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대면해 보듬어준다. 나미야 잡화점 할아버지뿐이 아니다. 엉겁결에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온 좀도둑 패거리도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별로 대단한 충고는 못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하면서 누군가에 고민에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륜이 있는 할아버지가 하는 조언이든, 가방끈 짧고 누군가의 고민이라고는 진지하게 들어본 적 없는 좀도둑들의 조언이든 이들의 조언은 그 조언을 받는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전해준다.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분명 갸웃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탐정도, 시체도, 살인범도 존재하지 않는다. 끽해야(라기는 그렇지만) 좀도둑 정도가 등장할 뿐이다. 주요 사건도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과 삶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담겨 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몰입력은 분명 히가시노 게이고인데 그 소재가 예전 작품과 사뭇 달라 '이거 의외네' 하면서 쉴 새 없이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나미야 잡화점'이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무슨 고민을 써서 보낼까, 무슨 답장을 받게 될까 괜한 몽상에 빠져들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스토리로는 이미 산전수전 다 써본 작가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런 작품도 쓸 줄 안다니 솔직히 좀 의외였다. 미스터리 요소가 거의 배제됐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던져놓은 조각을 다른 이야기에서 맞추는 식으로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정도의 떡밥은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기대했던 미스터리는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밤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읽다보면 어느샌가 이불의 온기만큼이나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다. 역자의 말처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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