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나의 고전 읽기 7
박지원 원작, 고미숙 지음, 이부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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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이란 제목을 단 열하일기를 읽다. 연암은 여러모로 친숙한 학자이다. 현재 TV에서 방영되는 이산 시대에 활동한, 아니 은둔한 인물이다. 노론계 학자라 볼 수 있겠지만,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본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곧은 학자이다. 하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관심이 백성을 떠나지는 않는다.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된 첫번째 계기는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서치전을 지은 이덕무의 절친한 친우로서, 그리고 백탑파의 일원으로서 관심있게 지켜 보았다. 그당시 '책만보는 바보 이덕무'에 매료되어 있었다. 서자들과도 서스럼 없이 어울리는 그의 호방함에 첫째 매료 되었고, 그의 북학 즉 실용주의에 두번 매료되었다. 고교 국사책에 나오는 홍대용, 박제가등과 함께 북학파를 이끈 인물이다.

 한때 읽던 책에서 잠시 본 후 잊고 지내다가, 글쓰기에 관심이 생겨 책을 찾던 중 '연암에게서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연암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된 계기이다. 현재 이산에서 정조가 왕위에 등극하고 홍국영이 실권을 거머쥔 후 노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간다. 그 불 화살을 피하기 위해 연암은 연암(개성 부근 깊은 산골)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상황하에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 책을 통해 글을 쓰기 위한 내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더불어 연암의 생각과 글의 높음을 체감한다.

 그 후 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 저 책을 뒤지다.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중 한 편인 이 책과 조우하게 되었다. 삶을 대하는 자세, 그의 일기에서 그의 생각을 훔쳐보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책장을 펼쳤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앞세워, 발레리를 거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통해 열하일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세 학자와 마주앉게 되었다. 끊임 없이 회의 하라는 데카르트, 감각에 의존 하지 말고 이성에 의존하라는 그의 말이 이 열하일기에서도 시공을 초월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듯하다.

 연암 그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존재와 삶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는다. 연암의 공부법은 그렇게 삶과 혼연일체가 된다. 조금만 힘들거나 바빠도 생각의 끈을 확 놓아 버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빈곤한지, 그의 생각과 삶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박지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보자.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면서 깨달았듯이, 연암은 사람들이 오직 눈과 귀만을 믿기 때문에 사물이나 사건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네 삶이 온통 이렇듯이, 보이는 걸 그냥 좇다 '무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연암은 다시 이야기 한다. 우리 또한 보고 듣는 것에만 의존하는 분별을 멈춰야 생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다. 감각에 의존 하는 현 시대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그리고 인생과 우주에 모범답안이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사유한다는 건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남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느라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 앎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의심할 수 없는 명제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회의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자체가 삶 아닐까? 그들의 생각과 내 행동이 조금이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 행복할거 같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 문명론은 언제나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이용후생을 통한 정덕이다. 현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용 후생만을 추구하는 지금, 배불리 먹고 잘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시대에 빠진 것은 정덕이다. 전세계 국가 중에서 GDP 10위 안에 들고, 인터넷 최강국이 되었으며, 집값, 물가 수준은 미국 유럽을 능가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개개인은 10억이니 부동산이니 물질에만 매달려 있다. 이정도 되었으면 이제 정덕, 삶의 지혜나 원대한 비전, 올바른 가치관에 매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단적인 예가 현 이명박의 경제 부활론 아닐까? 이용, 후생에 이르러 돈에 집착하는 작금의 현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게 된건 아닐까 한다. 그의 도덕적 치부는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 반성해야 한다. 너나 할 것 없다. 약간 옆길이지만 북학파에서 중국어 공용론을 주창한 박제가와, 현재 영어 공용론을 주창하고 있는 인수위와 오버랩 되는 것이 영 깨림칙하다. 지나치면 아니한만 못하다.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차이를 사유하라. 우주의 변화는 실로 무상한 것이어서 하나의 단일한 척도로 수렴되지 않는다. 닭이나 개를 보고 산출된 가치는 닭이나 개에게만 적용될 뿐, 그것을 용이나 거북에게까지 적용하려고 들면 바로 탈이 난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 차이와 간극을 포착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서로 다르게 작동하는 가지들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천지 만물의 변화 무쌍한 흐름과 접속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지사지, 설정 그 상대가 인간이더라도 그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주위는 조금더 온화하고 따뜻할 것이다. 내부터이지만 자신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 맘이 아려오는건 사실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게는 주변의 상황과 크게는 나라의 상황을 절절히 반성했다. 그러나 눈감고 생각해 본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눈에 보이는 책과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그대가 있느니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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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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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를 읽고 그 감흥을 적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책은 글 쓰는 방법보다는 글을 잘 쓰기 위한 기본 토대를 중요시한다. 기술보다는 기본 소양을 논한다. 이 책 '이외수의 글쓰기 공중부양'은 글을 쓰면서 실제 어떻게 써야할지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하나하나 가르쳐 준다. 소위 이외수의 말대로 뜨기위한 글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렇다고 전자에 비해 이 책의 품격이 떨어진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내공과 외공 둘 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책에 있어서 크로스 오버하는 부분도 많다. 책의 말미로 갈 수록 글은 인간이라는 부분에 점점 무게를 싣는다. 진실이 묻어있는 살아있는 글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기술뿐 아니라 내공 또한 중요시한다.

특히나 공중부양에서 와닿은 주장은 감성적인 글 쓰기다. 생어와 사어를 구분하고, 초보적인 글 쓰기에서는 생어를 쓰는 방법을 단련하라는 부분이다. 그를 바탕으로 단어를 추출하고, 문장을 형성한 후 수사를 통해 문장의 살을 붙인다. 다음의 과정을 보고 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움에 대한 문장을 쓰고자 한다.
주변에 방치되어 있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적는다.
초겨울, 창문, 바람소리, 골목, 외등, 새벽, 눈시울이라는 단어를 채집했다고 가정하자.
이를 바탕으로 진심을 담아 문장을 만든다.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초겨울 바람소리
행여 그대가 아닐까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골목 저멀리 외등 하나
눈시울이 젖은 채로
새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앞뒤 글들을 생략한 이 예문 하나만으로 내가 받은 감흥을 다 풀어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주위에 의식하지 못하는 여러 단어들을 아우러 살아있는 생생한 글들로 재탄생되는 이 순간, 창조주에 비해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아무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아니 고쳐 이야기하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글을 잘 쓰지는 못한다. 노력하고 단련 해야 한다. 천성적으로 잘 쓰는 사람을 부러워 하지 말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따라 하자. 이 글을 쓰는 지금 나 자신도 부끄럽지만 그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달려갈지 의심도 되지만 오늘 하루 이 한 페이지로 한걸음 더 떼었다. 언젠가 이 글이 부끄러워 질 날이 있기를 속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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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전 읽기 - 이 시대 대표 지성인 10인이 말하는 나의 인생과 고전
공지영 외 지음 / 북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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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고전 읽기를 읽다. 요즘 들어 고전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가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부딛혀 머리를 쥐어짜기도 하고, 한숨 쉬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넘기기 허다하다. 머리 탓도 해보고 게으른 천성 탓도 해보지만, 뾰족히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책의 제목만 보고도 읽어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 책을 집어 들었다. 여러 저자들이 자기만의 고전을 읽으면서 느낀 감흥이라든지, 고전에 영향 받은 자기 생각들 까지 이야기 한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랬던 저자가 고전을 읽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며, 맹자와 톨스토이, 라보에티(자발적 복종)를 안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재는 서양 고전, 서양고전이라 해봤자, 데카르트에 대한 관심과, 합리론, 경험론 정도에 대한 관심뿐이지만, 동양 고전에 대한 관심도 늘 가지고 있는 터라, 동양고전의 입문으로 맹자를 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고전을 보든, 고전의 필요성 만큼은 꼭 되새기고 가야한다. 그리고 고전을 대하는 자세 또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고전이 옛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가장 첨예했던 문제들을 예술가들이 자신의 세계관 속에 풀어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고전이란 사랑하거나 좋아해야 하는 것이지, 존경하거나 흠모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치밀한 고뇌, 거기에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의 치밀한 고뇌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의 롤모델을 현재에서 찾을 수 없다면, 몇 백년 전 그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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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예찬.군주론.방법서설.잠언과 성찰 세계의 사상 7
에라스무스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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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내가 느끼는 이 공간은 꿈인가? 실재인가?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궁금해하던 내 물음들에 대한 나의 소박한 결론이다. 그래 모르겠다. 뭐가 뭔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누군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들에 나보다 나은 사람들의 답을 듣고 싶어 조그마한 여행을 떠난다. '평화로운 전사'를 시작으로, '뇌를 단련하다'를 거쳐, 폴발레리, 데카르트까지 와버렸다. 조그마한 시작이 이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생각과 고민들로 넘쳐 버렸고, 여전의 그들의 말은 내가 담기에 너무나 컸다. 그 크기에 맞추기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그릇은 내 욕심에 미치지 못한다.

데카르트에 까지 이어진 나의 관심은 방법서설의 원문을 보는 곳에 도달했다. 필체가 유하고 전개가 소극적이지만 그 내용은 여느 철학서 못지 않게 심오하다. 물론 이 번역본의 난해함으로 인해 한국어를 이해하기가 이리 힘든지 다시금 깨달았지만, 잘 번역된 원문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의 '코기토'에 의해 자신과, 신, 정신의 존재를 밝히고, 끝까지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그의 방법적 서설에 감탄한다. 또한 심신 이원론을 통한 정신과 물체의 분리, 신과 과학의 분리를 통해 근대 과학의 기초를 설립한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며, 데카르트의 연역법 또한 간과 할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내가 태초에 궁금했던 것 보다 데카르트의 인간적인 면에 좀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철학을 중시하던 시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지 못하던 소극적인, 용기가 없는 철학자 데카르트. 적극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분출하지 않고 자기에로 한없이 질문을 던진 사나이. 그 성찰의 결과가 '방법서설'이다. 그 시대를 배척할 수 없어서 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이 신을 넘어서지 못해서인지 그는 신을 거부하진 않는다. 타협인지, 한계인지 불분명하다.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소심한 철학자의 자기 돌파구를 찾는 그 과정이 가장 인상적이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만 내입을 떠난 질문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6부까지 이어진 그의 생각을 미쳐 다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험난한 고민의 흔적과 두려움에 같이 휘둘렸다. 나는 사랑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종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데카르트를 보아도 대답은 시원치 않다.

글을 읽는 내내 글자가 눈에서 튕겨나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머리가 굳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집중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 서설을 읽고 난 후 솔직히 조금은 시원했다. 이해를 했든 못했든, 버거운 책 하나를 다 읽었다는 자기 만족에 그 감정이 생겼나 보다. 이제 고전에 집중하기로 한 내 이야기의 시작이지만, 한 계단을 지났고, 그 계단이 무한루프를 돌지라도 계속하고 싶다.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일까? 어제의 내가 아니길 바래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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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 뜨거운 가슴을 잃어버린 당신을 위한 스물네 편의 사랑 이야기
김용택.정호승.도종환.안도현 외 지음, 하정민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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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 책의 반이라 해도 어울릴 법하다. 제목에서 나오는 아련함에 책을 펼친 사람은 아마 대부분 후회 하지 않을까 한다. 24명의 시인이 사랑에 대해,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이야기 했다고 하지만, 책 후반부로 갈 수록 그 향취는 옅어진다.

물론 이런 종류의 책은 휴일 오후, 아련한 감정이 스며들 때 읽어야 같이 동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상태에서 읽지 못해 그럴지 모르고, 또 이해하기에 그만한 연륜이나 경험이 쌓이지 않아서 일지는 몰라도. 읽는 내내 불편함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24편중 21편째를 읽고 있다. 갈수록 난해해지는 시적 언어. 그런 책과 연이 깊지 않아서 인지, 다른 생각들만이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그런 글 들 속에서도 다음의 문장 하나만은 오롯이 기억에 젖어있다.

"서로에 대해서는 두 눈을 꼭 감을수록 좋았다. 그리고는 다만 같은 방향을 쳐다보아야 했다."

새로운 시작의 선상에서 위 두문장은 가슴 속 아련함에 마침표를 찍는 듯하다. 두사람이 같은 곳을 보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부부인 것이다. 그 문장의 잔향을 눈 감고 아롱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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