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더위과 장마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내게 반바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무더운 날에 긴바지를 입고 출근하면 일단 답답하고 땀이 찬다. 움직임이 많지 않은 날엔 그래도 견딜만하지만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곤욕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선택은 반대여야 한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는 날에는 반바지를 입어도 뭐라할 사람이 별로 없지만, 외근을 나가야 할 날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다간 당장 거래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게 틀림없다. 아니! 상의는 여름이라고 반팔을 입으면서 바지라고 반바지를 못 입을 건 또 뭔가? 비오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 아침처럼 그야말로 억수같이 퍼붓는 날에는 신발과 양말과 허벅지 아래 바짓단이 모두 젖는다. 뻔히 젖을 것을 알고도 긴바지를 입어야할까? 그냥 간편하게 반바지에 샌들 신고 가면 안되는 걸까? 오늘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와 샌들을 신고 출근했는데, 반바지의 3분의 2가 다 젖은 채로 사무실에 도착했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옷이 말랐다. 만약 긴바지였다면 퇴근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옷이 덜 말랐을지도 모른다.(물론 옷의 소재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날엔 DJ. DOC의 노래 '반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텐데~'라는 노래가 자꾸 생각난다. 물론 요즘은 '쿨비즈'라고 말하면서 넥타이도 풀고, 양복(수트)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회사에서 반바지까지 허용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정부와 한전이 워낙 '예비전력'을 강조하고, 에너지 절약을 부르짖은 덕분에 생긴 바람직한 변화라고 보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맹점은 보인다. 이 맹점은 실천의 지점이 아니라 전력산업의 구조 때문에 생기는데, 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하게 한번 짚어보고 싶다. 일단 오늘은 패쓰!

 

반바지 얘기를 하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느 중소도시의 환경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이다. 여름이었다. 당연히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습한 날씨에 빨래를 자주 하지 못해 옷이 부족해서 하필이면 후즐근하게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갑자기 시청 문화국장과 중요한 면담이 잡혔다. 옷차림이 맘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집에 다녀올 여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시청을 방문했다. 당연하겠지만 문화국장은 제법 나이가 있는 분이었다. 나는 문화국장을 만나기전부터 문화국 공무원들에게 눈총을 받기 시작했는데, 문화국장과 둘이 마주 앉으니, 국장은 무척 황당해하며 내 옷차림을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정상적인 대화상대로 두고 있지 않았다. 마치 학생 다루듯 하대하는 태도가 눈에 보였다. 조금 대화를 시도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표정을 바꾸었다. 다음 순간 나는 강한 어조로 태도를 바로하고 면담에 임할 것을 요청했다.

 

나는 지금 정확한 용무를 갖고 시청 문화국장과 면담을 하러 방문한 시민이지, 당신 부하직원이나 친인척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하대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이는 공무원 복무규정에 어긋난다. 제대로 자세를 갖춰 면담에 임하지 않는다면 이 면담은 없었던 것으로 할 것이며, 동시에 공무원으로서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뭐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나니, 그는 아주 당황한 표정을 보였고, 이후에는 딱 해야할 말만 무뚝뚝하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 상대에 따라 기본적으로 옷차림을 갖춰야 할 필요는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옷차림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무시하는 언행은 부당하다. 그리고 그 옷차림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여기저기 거래처를 다니면서도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어복달임

 

모 동물권단체 활동가로 있는 지인과 만날 약속을 잡다가 곧 다가오는 중복에는 저녁 늦게까지 정신없이 바쁘다는 말을 들었다. 복날엔 그냥 대박으로 바쁜 날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그쪽 단체는 그 날이 피크타임이겠구나. 모르고 지날 뻔 했는데, 덕분에 중복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 최근에 만난 어느 선생님은 복날에는 '삼계탕'이나 '보신탕' 보다는 '민어복달임'이 더 맛있고 몸을 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옛부터 삼복더위에 양반은 '민어'를 먹고, 상놈은 '보신탕'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민어는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들고, 제삿날에야 겨우 한번 접할 만큼 귀하고 비싼 생선이다. '민어복달임'이란 말은 김준 박사님의 [바다맛 기행]에서 처음 보았는데, 직접 먹어본 사람을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양반들만 먹었다는 그 민어복달임이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복날에 삼계탕을 끓여 주셨다.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부터 복날을 따로 챙겨 본 적은 별로 없는데, 대개 모르고 지나갔거나, 알았더라도 가난한 자취생이 삼계탕과 같은 비싼 음식을 먹을 여유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 한번은 근처에 자취하는 선배 두어명과 함께 저 멀리 농협 하나로 마트까지 걸어가서(버스비는 있었으나 버스노선이 없었고, 택시는 있었지만 택시비는 없었다.) 생닭과 마늘 등 재료를 산 후 다시 먼 길을 걸어와서 삼계탕을 끓여 먹은 적이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선배들 모두 삼계탕을 끓여본 경험은 없었다. 게다가 가스레인지도 없는 집에서 휴대용 버너를 이용했고, 마땅한 큰 냄비가 없어서 코펠에 넣어 끓였다. 맛은? 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냥 그저 삼계탕을 먹는 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무더운 복날 재료를 마련하려고 먼 길을 장보러 갔다 오면서 흘린 땀이 엄청났기에 효율로 따지면 차라리 안 먹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보신탕은 거의 먹어보지 못하다가(친척들 모였을 때 맛만 본적이 있었다.) 잠시 농사짓는 마을 빈 집에 살던 시절에 여러 번 먹었다. 그땐 일 때문에 여러 마을 어른들과 교류가 있었다. 여름에는 마을마다 서로 다른 날에 수시로 개를 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는 ㄱ마을에서 보신탕을 얻어먹고, 오늘은 ㄴ마을에서 얻어먹고, 내일은 ㄷ마을에서 또 얻어먹는 식이었다. 그해 여름에 평생 먹어본 것보다 많은 아니 앞으로 평생 먹을 양보다 더 많은 보신탕을 먹었다.

 

어쨌거나 중복을 맞아 무언가를 먹거나 혹은 안먹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민어복달임이 뭔지, 그렇게 맛있다는데 한번 맛이라도 보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3-07-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교복을 반바지로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남학생들은 긴바지에 허덕이고, 여학생들은 치마 속 안감이 무척 더워서 또 힘들어 하거든요. 반바지를 교복으로 입는 학교도 있다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어요. 저도 반바지 입고 출근하고 싶어요.(>_<)

감은빛 2013-07-24 17:01   좋아요 0 | URL
저도 반바지 교복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네요.

여학생들 치마는 좀 시원할 줄 알았더니 안감 때문에 덥군요.

학교 선생님들도 반바지를 못 입게 하나요?
교장 선생님(혹은 교감)이 무척 보수적인가보네요.
안타깝습니다!

조선인 2013-07-23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여름에 남자들은 긴바지에 와이셔츠 입고 있는 거 보기만 해도 더워요. 게다가 남자들은 실컷 껴입고 에어컨을 있는대로 틀어대니 여자들은 오히려 가디건 덧입고 이런 낭비가 없지요.

감은빛 2013-07-24 17:03   좋아요 0 | URL
그죠? 저 처럼 반바지입고 일하면 에어컨 덜 켜도 될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노출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들이 부러운 계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7-23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어는 목포나 신안에서 많이 먹어요.민어가 고급생선이긴 하죠.목포에는 민어전문점들이 있어서 맛기행 같은 방송에 가끔 언급됩니다.

감은빛 2013-07-24 17:09   좋아요 0 | URL
네, 저기에 언급한 [바다맛 기행]에서는
태이도(신안군 임자면 타리섬) 일대에서 많이 잡힌다고 하네요.
일제 시대에 민어 파시가 들어섰던 얘기도 언급하구요.

언제 목포가서 민어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blanca 2013-07-24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 양복 입은 것 보면 너무 더워 보여요. 저번에 뉴스에서 사무실에 반바지 차림도 괜찮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인터뷰로 사십 넘으면 반바지 입기 좀 뭣하다,는 이야기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좀 다들 시원하게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입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을 텐데요. 우아, 민어복달임은 어떤 맛일까요?

감은빛 2013-07-24 17:12   좋아요 0 | URL
제 주위엔 사십이 아니라 오십이 넘어도 반바지 입고 다니는 분들 많은데,
물론 반바지를 입고 출근할 때는 좀 민망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의식이 바뀌면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민어복달임이 무척 궁금합니다.
복날은 지났지만 꼭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14주년 축하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음주 운동

 

퇴근 후 운동하러 갈 생각이었다. 운동은 공복에 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운동 시작시간인 저녁 7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운동 중에 도무지 힘이 안나는 것 같고,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서 9시경 저녁을 먹으면 너무 배가 고파 오히려 과식을 하는 것 같다. 가능하면 너댓시쯤 간단하게 뭔가 먹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일하다가 뭘 간단히 먹기는 쉽지 않다. 사무실 근처에는 빵 가게가 여럿 있는데, 이상하게 나이 먹어가면서 빵에 손이 안가게 되더라. 어릴 때는 무척 좋아했었는데. 어제 5시가 되기 직전쯤 뭘 간단히 위장에 집어넣어줄까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사장님께서 1시간 일찍 정리하고 간단하게 한잔 하자고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하고, 나도 일찍 마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앞에 간단히란 단어가 붙긴 했지만 한잔 하고나서 운동을 하러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붙잡을까봐 걱정이 아니라 내 의지가 술을 중단하고 운동을 택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일을 정리하면서 "간단히 한잔만 하고 운동하러 갈거예요." 라고 미리 못을 박아 두었다. 나중에 체면 때문에라도 술을 중단하고 운동을 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모처럼 비가 멈춘 날, 바람은 선선했다. 어딜갈까 고민하다가 고기집을 택하는 사장님. 난 치킨집에서 맥주 한두잔 가볍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고기집이면 소주가 땡겨서 쉽지 않겠는데. 운동하러 갈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소주를 마셔도 나 혼자 맥주를 홀짝였다. 한 시간 일찍 마친 탓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맥주를 네 잔쯤 마셨을 때쯤 운동하러 갈 시간이 다 되었다. 분위기를 보니 1차는 대충 마무리 단계였다. 신발을 신고 나오니, 사장님께서 묻는다. 운동하러 갈 거냐고. 아주 짧은 순간 한번 더 고민을 했지만, 앞서 밝혔듯이 체면 때문에라도 운동을 택했다. 다른 사람들은 2차를 가고, 나는 지하철을 향했다.

 

운동은 공복에 해야하는데, 이렇게 배가 불러서 무슨 운동을 하나 생각을 하며 지하철 안에서 열심히 숨쉬기 운동을 해서 배를 꺼뜨리려고 노력 중이었다. 고기를 조금만 덜 먹을걸. 맥주를 한 잔만 덜 마실걸. 후회를 해봐야 소용없다. 이 헬쓰클럽은 크로스 핏 전용 체육관이 아니라 딱 정해진 시간에만 크로스 핏 수업을 한다. 그런데 1차가 끝나갈 무렵에서 자리를 일어서서 나오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크로스 핏 수업엔 이미 늦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이렇게 배가 부른 상태로 그 고강도의 운동을 해낼 자신은 없었다. 조금 천천히 가서 오랜만에 헬쓰머신들을 돌면서 근력운동이나 빡세게 해야겠다 싶었다.

 

스퀏과 런지로 가볍게 몸을 푼 후에 덤벨과 바벨을 들었다. 많이 안 마셨고, 취기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역시 알콜의 기운이 느껴졌다. 며칠째 잠을 잘 못자서 좀 피곤했고, 몸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번 운동을 시작하면 몰두하는 편이라 제법 오래 이것 저것을 했다. 그 약간의 알콜 기운 때문에 그랬는지 바벨 무게를 점점 올렸다. 평소라면 적당히 들다가 다른 운동으로 넘어갔을텐데, 이번에는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나 싶어 무게를 좀 올렸다. 막판에 좀 힘들었다. 무게를 늘리니 두어번만 들어도 땀이 쏟아졌다. 물을 마시고 잠시 쉬다가 케틀벨 스윙으로 운동을 마무리 했다. 오늘은 음주 운동을 했구나. 아주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개운하지도 않았으니, 앞으로는 음주 운전은 물론 음주 운동도 가능하면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내용증명

 

지난 글에 쓴 것처럼 집 주인이 계약금을 곧 주겠다 해놓고는 시간을 질질 끌다가 다시 못 주겠다고 말을 바꾸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다. 아내와 밤 늦게까지 대책을 논의 했는데,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로 했다. 벌써부터 내용증명에 대한 얘기를 했던 데다가, 예전에도 여러차례 문제가 생겼을 때 내용증명을 통해 해결된 적이 있어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막판까지 돈을 안 줄 경우에는 좀 피곤하겠다 싶었다.

 

의외로 어이없게 내용증명을 보낸 다음 날 집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늘 연락하던 영감이 아니라 서류상 집 주인인 영감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내용증명을 받았다고 했고, 그간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고, 계약금을 보내줄테니 잘 풀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쉽게 보내줄거였으면 그간 한 달이상 사람을 괴롭힌 이유는 뭘까? 진짜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좀 따질까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그것도 좀 피곤한 일이다 싶어 마음을 바꿨다. 정식으로 제대로 사과를 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입장은 전달 받았고, 금방 계약금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갈등의 원인은 해결이 되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 다시 전화가 왔고, 방금 입금했다고 다시 한번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통장에는 정확하게 전세 보증금의 10%가 입금되어 있었다.

 

음주 독서

 

책 읽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디일까? 오래전 대학생이었을 때는 학교 뒷산 어딘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종종 거기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고, 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때 그 바위에서 책을 제법 읽었다. 도서관이나 강의실 등 답답한 실내에서는 잘 눈에 안들어오던 전공서적도 이 바위 위에서 담배를 물고 읽으면 이해가 잘 되었다. 아마도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기 때문에 가끔 밖에서 책을 읽으면 뭔가 자유로운 느낌과 편안한 느낌이 들어 집중도 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차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누군가를 기다려야 했다. 의자를 뒤로 제끼고 잘까? 라디오를 들을까?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할까 고민을 하다가 잠시 내렸는데, 바로 근처에 풀과 나무와 벤치가 있었다. 책을 갖고 나와 읽었는데, 야외에서 읽는 느낌이 좋았다. 처음 한동안은 집중이 잘 되었는데 잠시 후엔 잠이 쏟아졌다. 최근 며칠 잠이 좀 부족했다. 꾸벅 꾸벅 졸다가 책을 덥고 벤치에 누웠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와 풀벌레의 날개짓 소리를 들었다.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 앉았는데, 주위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풀벌레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다시 책을 펼쳐 읽다가 문득 이런 삶이 참 바라던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 답답한 실내가 아닌 나무와 풀과 곤충들이 있는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고, 졸리면 잠시 눈을 붙이고, 깨면 또 책을 읽고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삶 말이다. 얼마 후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와서 차를 몰고 나오면서 내내 그 짧은 독서와 낮잠에 대해 생각했다. 평생 못 잊을 기억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야외에서 아니 자연 속에서 책 읽는 얘길 했는데, 사실 책에 한번 빠져들면 장소와 시간 따위 별로 관계 없다. 책을 읽지 못하는 환경만 아니라면(가령 근무시간 사무실 처럼 대놓고 책을 읽기 쉽지 않은 시간과 장소만 아니라면) 어디든, 언제든 별로 상관없다는 말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빤스만 입고 엎드려서 책을 읽어도, 사람 많은 지하철에 서서 읽어도 책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떤 책은 읽다보면 담배가 땡기거나 술이 땡기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지하철이나 도서관에 있다면 조금 곤란하다. 오래 전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를 읽을 때에는 정말 무척 담배가 땡겼다. 그때는 자취하면서 내 맘대로 살다가 잠시 본가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하필 그때 집 안에서 맘대로 담배를 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괴로웠다. 한밤중에 담배와 책을 들고 밖에 나가서 가로등 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술이 땡겼을 때에는 한밤중에 문을 연 구멍가게를 찾아 온 동네를 헤메기도 했다.(아직 편의점이 많이 생기기 전이었고 결국 술을 마시지는 못했다.)

 

혼자 자취방에 살 때는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책을 읽곤 했다. 만약 티비가 있었다면 술을 마시며 티비를 봤을테고, 컴퓨터가 있었다면 술을 마시며 웹서핑이나 채팅을 했겠지만, 그땐 책 밖에 없었다. 이른 바 음주 독서다. 요즘도 가끔 밤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음주 독서를 한다. 여전히 집에 티비가 없지만, 컴퓨터는 있어서 더 자주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지만, 가끔은 옛날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 확실히 영화나 웹서핑 보다 책 쪽이 몰입이 더 잘된다. 영화를 보며 술을 마시면 홀짝 홀짝 술을 비우지만, 책은 한번 빠져들어 읽다보면 술잔에 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확 지나가버린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면 그제서야 김빠진 맥주잔을 발견하게 된다. 한번은 소주를 마시다가 책장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어 꺼냈다. 조금만 살펴보고 다시 꽂아놓을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확 지나가 있었다. 마시던 술을 비우기에는 출근이 부담스러워지는 시간이 되어 있어서 결국 술을 버리기도 했다.

 

오늘은 음주 운동이 아닌 (운동을 마친 후에) 음주 독서를 해야겠다.

 

 

 친한 선배에게 선물 받았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닌 전교조 1세대 교사 김용택이란다.

 뒷 표지에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문구에 격하게 공감한다.

 

 학부모가 되어보니 참말로 이 땅의 교육문제가 심각함을 깨닫는다.

 현명한 노 교사의 지혜를 통해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한창 필사를 많이 했던 시절에,

 김형경 작가의 단편들을 여러번 베껴쓰곤 했다.

 

 이젠 담배를 피우고 싶어질까봐 겁나서 못 읽겠다.

 

 

 

 

 

 

 

 

 

 예전에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사놓은 책.

 아직 펼쳐보지 못했지만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바로 오늘의 '술안주' 되시겠다.

 

 내일 아침 출근길이 좀 힘들지 몰라도

 오늘 밤의 즐거운 독서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3-07-1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주페이퍼 쓰기도 권해드립니다 ^^

감은빛 2013-07-18 17:22   좋아요 0 | URL
야클님, 저 음주페이퍼는 자주 쓰는 편입니다.
새벽 늦게 쓰는 글은 대개 음주페이퍼라고 보시면 됩니다.
야클님도 음주페이퍼 자주 쓰시나요?
확인하러 방문할게요. ^^

다락방 2013-07-1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역사 후기도 궁금해집니다. ㅎㅎ
음주 독서는 저는 못하겠더라고요. 일단 독서 자체는 되는데 다음날 내용이 슝- 날아가 버려서 전혀, 전혀 기억이 안나지 뭡니까! ㅎㅎ

감은빛 2013-07-18 17:2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전 소설 후기는 잘 못 쓰겠더라구요.
재밌게 읽은 책일수록 후기가 형편없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더욱 부담이 되더라구요.
그래도 다락방님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책 읽으면서 마시면, 많이 먹지 않고, 오히려 집중이 잘 되던데요.
오늘 밤 즐겁게 마시면서 읽을게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신 다락방님 덕분입니다. ^^

따라쟁이 2013-07-18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주 운동 좀 해봤는데. 저는 다음날 꼭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음주독서시 저는 독서보단 맥주입니다.ㅎ 책장은 않넘어갈지라도 맥주는 목을 타고 넘어가죠.

감은빛 2013-07-22 16:19   좋아요 0 | URL
음주 운동의 선배님이시군요.
본의아니게 이 글을 쓴 날도 음주 운동을 하게 되어,
이틀 연속 음주 운동을 했는데,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 번 모두 술의 양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마노아 2013-07-18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팟캐스트 듣느라 책 읽을 짬이 자꾸 부족해져요. 이이제이 다 듣고 나니 이제 김갑수의 부킹정치가 듣고 싶어져서 담아놨거든요. 방송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안타까워요. 방송 들으며 밥은 먹을 수 있는데...^^
저도 통역사 다락방님 때문에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그새 절판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역시 인생은 타이밍!!

감은빛 2013-07-22 16:22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께서는 팟캐스트를 많이 들으시네요.
저는 음악 외에 귀로 듣는 건 영 집중이 안되어 못 듣겠더라구요.
무슨 강좌라던가, 라디오 프로그램도 말로 떠드는 위주의 프로는 잘 못 듣습니다.

저는 오히려 밥 먹으면서도 한 손에 책을 쥐고 있을 때도 있어요. ^^
[통역사] 정말 재밌었습니다.
꼭 구해 읽으시길 권합니다.

단발머리 2013-07-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ㅎㅎ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저는 술은 좀 약해서요.

낮에 책 읽을 땐 커피, 밤에 책 읽을 땐 과자인데요.
음주 독서 너무 괜찮아 보여요.

시작은 맥주가 좋을까요?^^

감은빛 2013-07-22 16: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
네, 그냥 단발머리님께서 좋아하는 술로 가볍게 한 두잔 드시면서
재밌는 책을 읽으면 좋겠지요.

조선인 2013-07-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준비하시는군요. 내용증명으로 해결되셨다니 그간에 얼마나 곤란이 많았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래서 재테크니 부동산투기니 이런 거랑 하등 상관없는 우리 서민들은 늘 내 집 마련이 소원인가 봅니다. ㅠ.ㅠ

감은빛 2013-07-22 16:25   좋아요 0 | URL
이사 준비 때문에 제법 오랫동안 에너지 소모가 큽니다.
물론 저보다는 아내가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하고 있구요.
네, 서러워서라도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서울에선 무슨 집이 또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어요!

blanca 2013-07-1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네요. 저도 한다고 하곤 있는데 유산소운동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야외에서 책 읽는 것 언젠가 꼭 따라해볼랍니다.^^;; 이사 문제는 저는 엄동설한에 한달 남겨두고 나가든 월세로 전환해 달라고 했던 야속한 집주인이 떠오르네요. 아이도 어렸는데 정말 분노의 게이지가 상승하더라고요. 나중에 부랴부랴 이사갈 때 사과를 받긴 했지만...씁쓸한 기억이에요.

감은빛 2013-07-22 16:31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유산소 운동 보다는 (크로스 핏처럼) 무산소 운동을 추천합니다.
요즘 간헐적 단식으로 유명해진 타바타 교수가 예전에 증명한 운동 실험이 있어요.
유산소 운동은 지방감소가 있지만 장기간 하면 오히려 근육 손실이 생기는데,
타바타 운동법과 같은 무산소 운동은 지방감소 효과가 훨씬 더 뛰어나고,
근육도 더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따로 유산소 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데,
벌써 복부 지방이 제법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음식 조절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더 많이 먹고 있습니다.)

아이 키우는 세입자에게 한 겨울에 월세 전환이나니!
정말 이 나라 집주인들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승주나무 2013-07-2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감은빛 님의 글을 천천히 읽었네요. 글맛 참 좋으세요. 조만간 감은빛 님 이름으로 책 한 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네요!!ㅎ

감은빛 2013-07-22 16:33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승주나무님!
다른 분도 아닌 승주나무님께 칭찬을 받으니 무척 좋네요!
못 뵌지 오래네요. 오가다 인연이 닿으면 뵙겠지요.
아이들과 건강하게 재밌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8월 말에 전세 계약이 끝나는데, 6월 초에  집주인의 대리인(집 주인은 대리인 영감의 딸이다.) 영감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이 있으니, 계약 만기일에 나가달란다. 우린 서류상 집주인인 딸이 들어오려나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들어와 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 여자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다. 영감은 그에 대해 별 말없이 그냥 우편물을 모아놓아 주면 나중에 찾아가겠다는 말만 했다.


이사를 나가려면 새로 살 집을 구해야 하니, 계약금으로 전세 보증금의 10%롤 달라고 했다. 영감은 알겠다고 대답했고, 구체적인 액수까지 합의했다. 그런데 그 후로 돈을 안주고 계속 버티면서 한 달 이상을 보냈다. 6월 말경에 한창 집을 보러 다니다가 계약금을 왜 아직 안주시냐 물었더니, 자기는 계약금 준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단다. 계약금을 주셔야 우리도 집을 알아보고 계약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소릴 여러번 하고서 계약금 언제 주실거냐고 물어보니, 7월 초에 준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한창 집을 보러 다닐 즈음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손님을 데려가니 집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묻는다. 집 주인에게 연락 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집 주인이 들어올 사람 있다고 얘기하더라고 부동산에 전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다시 한번 집주인에게 확인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7월 초가 지났다고 다시 계약금 얘길 꺼냈더니, 이번에는 낮 시간에 공인중계사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한다. 직장인이라 낮에는 안되고, 저녁에는 볼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건 자기가 안된단다. 그러면 계좌로 보내주시고 공인중계사에서 영수증 만들어놓으면 곧바로 들러서 싸인해놓겠다. 나중에 시간되실때 찾아가시면 된다고 했더니, 자기는 안된단다. 왜 안되냐는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냥 무조건 안된단다. 부동산 사장님과 통화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확인 받았다고 말해도 또 안된단다. 그렇게 같은 억지만 반복하더니 이제는 계약금을 못 주겠다고 발을 뺀다. 약속을 왜 안지키냐고 했더니, 약속 한 적 없다고 한다. 만기일에 보증금 전액을 주겠단다. 그래서 우리가 계약할 당시에 계약금 10% 냈던거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 말에는 자기랑 계약한 게 아니란다. (서류상으로는 자기 딸이랑 계약한 거고, 자기가 대리인으로 나와서 서류에 도장 찍었다.) 그럼 누구랑 한 거냐고 물었더니, 앞서 살던 사람이랑 계약한 거라고 말한다. 집 주인이 아닌 세입자와 계약을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물었더니, 또 거기엔 답이 없다. 자기는 계약금 받은 적이 없으니 못 주겠단다. 분명히 따지자면 우리는 그에게 계약금을 지불했고, 그는 세입자에게 그 계약금을 다시 전달했을 것이다.
이쯤되면 더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


좀 언성을 높이면서, 여러차례 약속을 어긴 사실에 대해 지적하면서 어른이 되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이러시면 어떡하냐?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갑자기 젊은 여자가 전화를 뺏는다.
다짜고짜로 넌 애미애비도 없어? 묻는다. 아마 서류상 집 주인인 딸이겠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나보다. 모르는 척 하고, 누구신데 갑자기 끼어드냐? 누군지 밝히고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 여자는 언성을 높이면서 듣자듣자 하니 젊은 놈이 싸가지가 없다고 지껄인다. 그래서 반말은 그쪽에서 지금 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당장 말 똑바로 하지 않으면 나도 같이 반말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여자 씩씩거리면서 말도 똑바로 못하면서 뭐라고 언성을 높인다. 누군지 왜 말 안하냐? 말 안할거면 다시 전화 바꾸라. 왜 갑자기 끼어들어 난리냐고 물어도 절대 자기가 집주인이라는 말은 안한다. 뭔가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처음에 계약할 때, 저 여자가 시세도 잘 모르면서, 시세보다 싸게 전세를 놓았다고 뭐라고 영감한테 했던 모양이다. 계약 도중에 전화로 뭐라 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이 여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으로 주소를 옮겨놓았다. 아마 재개발이나 뭐 다른 이권 때문에 그런 모양인데, 위장전입으로 엄연히 불법이다. 계약 만료를 3달 앞두고 갑자기 일방적으로 나가라는 말을 한거나, 계약금을 주기로 해놓고 자꾸 시간을 끌고 말을 바꾸는 모양새를 보니, 멍청한 영감이 혼자 한 짓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저 딸년이 옆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일테지. 암튼 이 여자는 계속 언성을 높여 뭐라 떠들어대고, 나도 지지않고 언성을 높였는데, 전화를 바꾸라고 계속 다그치니, 약속도 안지키고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무슨 약속을 안 지켰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약속을 몇 번이나 어긴 건 그 영감인데, 무슨 소릴 하나 들어보니, 계약 만기일에 집을 빼고 어쩌고 말한다.
아직 만기일은 한달 반이 남았는데, 미래 날짜에 약속을 어겼다는 억지를 부리나.


막판에는 이 여자가 쌍욕을 내뱉았다. 그래, 니가 이제 욕까지 하는구나. 내가 어릴때부터 한 욕하는 사람이거든. 어차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 실컷 욕을 퍼부어주었다. 욕으로 못 이길 것 같으니 그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에이 진짜 서울 살면서 제대로 상식이 박힌 집 주인을 만난 적이 없다! (딱 한번 부천에 살때 제대로 된 집 주인을 만났다.)

 

어떤 주인은 한 겨울에 가장 추운 날(언론에서 몇 십년 만의 추위라고 떠들던 날) 밤에 보일러가 고장났는데, 그걸 못 고쳐주겠다고 세입자가 잘못해서 고장 냈으니, 알아서 고치란다. 그때 큰 아이가 갓난쟁이여서 우리 부부가 밤새 잠도 못자고 번갈아가며 아기를 안고 있었다. 얼음으로 변해버린 방 바닥에 도저히 아기를 눕힐 수가 없었다. 보일러 기사님을 불렀다. 보일러가 수명이 벌써 지나서 고쳐도 임시 방편 밖에 안된다고 했다. 이렇게 날씨가 추우면 금방 또 고장날 지 모른다고 한다. 주인에게 갓난 아기가 있으니 보일러를 갈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주인 아줌마가 계단에서 아기를 안고있는 나를 밀어버리고는 욕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 겨울을 그 집에서 보낼 수가 없어서 급하게 집을 내놓고 이사를 나왔다.


또 어느 주인은 녹물이 나오는 문제를 고쳐주지 않고 몇 달을 보냈다. 처음에 집을 볼때 이 집은 장기간 비어있었다. 집은 좁았지만 깔끔하게 수리가 되어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집을 볼 당시에는 녹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마 부동산 사람이 집보기 전에 한동안 물을 틀어 놓았던 모양이다. 이사를 들어오고 나서 녹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정 시간 이상을 물을 쓰면 괜찮아졌는데, 몇 시간 동안 물을 안쓰다가 처음 틀면 어김없이 녹물이 나왔다. 그렇다고 물을 쓸때마다 몇 십분씩 녹물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버려지는 물과 수도요금이 아깝기도 하고, 그렇게 기다릴 여유도 없다.


아이들이 어려서 자주 목욕을 시켜야 했는데, 그때마다 녹물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동산과 집 주인에게 녹물을 고쳐 줄것을 요청했는데, 계속 알았다는 답만 돌아왔다.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전화를 할때마다 곧 하겠다는 답만 돌아오고, 실제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거래했던 부동산과 대판 싸우고, 집주인과도 전화로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변호사 친구에게 자문을 받아 내용증명을 보냈다. 녹물이 나오지 않도록 집을 수리할 것과 정신적, 물질적 피해보상을 요구했고, 응하지 않을 경우 소송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제서야 주인이 찾아왔다. 미안하다고 자기는 몰랐다고 했다. 일주일 안에 공사를 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소송에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공사가 급하게 이루어지느라 수도 관이 눈에 보이게 벽을 타고 연결되었다. 깨끗하게 고쳐진 집이 좋아서 들어왔건만, 수도관이 흉물스럽게 집안 전체를 가로지르는 집이 되어버렸다.

 

 

이번 주인(딸이 아닌 영감)은 처음에 들어올 때부터 베란다에 물이 새는 문제를 고쳐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먼저 살던 세입자를 통해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뚝뚝 떨어진다는 얘길 들었고, 계약할 때 그 하자를 고쳐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한번 공사 업자가 방문했는데, 단순히 어느 지점에서 물이 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낡아서 비가 들이치면 낡은 벽돌이 빗물을 머금으면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렇게 벽돌이 머금은 빗물이 베란다에 뚝뚝 떨어지는 거라고 했다. 윗층을 방문해보니,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주인에게 벽돌에 방수처리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얘길 하고는 더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리는 늦여름에 들어와서 가을과 겨울, 봄을 나는 동안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다시 여름이 되자 미친 듯이 비가 내렸는데, 말 그대로 집중호우였다. 비가 많이 오니 베란다에서 뚝뚝 수준이 아니라 비가 내리듯이 물이 샜다. 여름엔 베란다에 물건을 놓아둘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시 몇 차례 고쳐달라고 요청을 했건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하는 짓이 이게 뭔가? 계약금도 준다고 약속했다가 태도를 바꿔 못 주겠다고 하고, 거짓으로 들어올 사람이 있다고 했다가 부동산 때문에 들통이 나고, 딸이란 년은 앞뒤없이 욕이나 퍼붓고 부녀지간에 잘 하는 짓이다! 정말!


문제는 법으로는 계약 만기일에 보증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되어 있고, 만기일 이전에 보증금의 10%를 계약금으로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부동산 거래는 전세던, 월세던, 매매던 상관없이 무조건 전체 보증금의 10%를 계약금으로 먼저 건네줘야 성립된다. 그래서 관행상 대부분의 집주인과 세입자가 미리 보증금의 10%를 계약금으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이제 어쩌라는 거냐? 나가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계약금을 안주면 나도 나갈 수 없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ika 2013-07-1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발 꼭 이기시길! (이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되나 싶긴 하지만 ㅠㅠ)
그 영감 딸년(!)에게 욕으로 대응하실 수 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ㅠㅠ
새로 이사가는 집은 꼭 좋은 집 주인, 살기 좋은 집이었으면 좋겠네요.

우리 어머니는 가게 세 주면서, 그 전 세입자(전기세도 안내고 쓰레기도 한트럭이나 쌓아놓은데다가 6월까지 돈없다고 나중에 준다고 하다가 말없이 짐싸들고 안산다면서 반년동안 집세떼어먹고 도망간)가 남겨놓은 쓰레기 처리비용, 집 정리비용 등등등...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하니까 거금 백만원이나 깎아주고 세를 줬어요. 그 돈 없다고 우리가 죽을것도 아니고, 라면서 통크게.
가끔 세상사람들이 다 그러면 조금은 세상이 좋아지려나, 싶어지지만. (저도 쉽게 그러진 못하겠더라고요 ㅠㅠ)

아무튼. 정말 좋은 집 구하셨으면 좋겠고만요.

감은빛 2013-07-12 10:31   좋아요 0 | URL
제가 겪은 집 주인들은 어쩜 이렇게 뭐 같은 것들만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외로 좋은 주인들도 제법 있던데요.
어머니께서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힘이 납니다! ^^

readersu 2013-07-1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마음 고생이 심하겠어요.
다음 집은 부디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랄게요.
집 없는 서러움을 감은빛님 글 통해 또 깨닫게 되네요.
힘내요!!

감은빛 2013-07-12 10:33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시죠?
매번 집 주인이랑 안 좋은 일을 겪게되니,
차라리 대출이 좀 부담이 되더라도 집을 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좀 고민이네요.
어쨌거나 또 전세를 구하던, 집을 사던 계약금은 반드시 필요하지요.
응원 고맙습니다!

북극곰 2013-07-1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 정말.... 그렇게 말이 안 통하고 양심을 팔아먹고 자기 욕심으로만 똘똘 뭉친 사람을 대하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꼭 이기시길 바래요. 억울하게 당할 수는 없지요. +.=!!

감은빛 2013-07-12 10:34   좋아요 0 | URL
네, 지금 제 맘이 딱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당할 수는 없죠.
계약금을 안 주면 저도 가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립간 2013-07-1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집 주인에게 집이 노화된 것을 사용자 잘못이라고 하면서 두번이나 10~20만원 정도를 띁기기도 했죠. 돈을 무작정 안 주는 것이예요. 벽지에 먼지 묻은 것을 트집 잡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

감은빛 2013-07-12 10:34   좋아요 0 | URL
그런 억지를 쓰는 집 주인들이 꼭 있더라구요!
저도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양심도 없는 것들!

saint236 2013-07-1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주인은 슈퍼갑이지요...^^

감은빛 2013-07-12 10:35   좋아요 0 | URL
슈퍼갑이라도 갑의 의무는 이행해야할텐데,
의무는 아랑곳않고 잇속만 챙기려 드니까 문제네요.

기억의집 2013-07-1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간만에 알라딘 들어왔다가 님 글 읽으니 속상 하네요.
음 그런데 일단 전세계약금 10%는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줄 법적인 근거는 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없어요.
이건 저도 매번 이사 다니면서 겪었지만 저는 주인집에서 계약금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천만원 단위가 넘어도요. 좋은 주인을 만날 경우 관례상 임차인에게 10% 주는 거라 감은빛님이 법적으로 소송을 건다해도 님 100% 집니다.
어디까지나 감은빛님도 알고 계시듯 관례예요. 관례가 법을 이길 수 없잖아요.

마지막 구절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읽다가 컴 켜서 댓글 달아요. 일단 감정적 싸움은 그만 하시는 게....왜냐면 계약금 10%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면 계약만료일부터 님은 월세로 전환되서 나중에 집 구해서 나갈때 임대인에게 감은빛님이 그 집에 있는 만큼 주인에게 돈주고 나가야합니다. 이것도 좋은 주인 만나면 안 받는 경우가 있지만, 감은빛님 주인을 보니 받을 거에요. 오히려 저쪽에서 소송이 들어오면 님 재판비용까지 다 덮어 쓸 수 있어요.

금융권에 대출 받아 계약금 마련하셔서 8월말까지 이사가는 게 가장 손해를 덜 보는 방법이에요. 화가 나시더라도 꾹 참고 빨리 집 구하세요. 다음은 좋은 주인, 좋은 집 만나시길 바래요.

감은빛 2013-07-12 10:46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염려해주신 마음 무척 고맙습니다.

계약금으로 법정 소송을 갈일은 없을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법적으로 집주인은 만기일 이전에 돈을 지급할 의무가 없거든요.
주인과 제가 했던 약속을 어긴 사실에 대해 따질 생각입니다.

지금 이 집에 몇 가지 문제가 얽혀 있는데,
첫번째는 서류상 집주인이 이 집에 위장전입을 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집주인을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고, 항상 대리인인 주인의 아비만 만나거나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죠.
세번째는 입주 전에 약속했던 누수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장기적으로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으로 들어가면,
주인도 좋을 일이 없겠죠.
저는 그 점을 이용해서 소송으로 가지 않으면서도,
계약금 이상의 금액을 지급받고, 그 후에 충분히 이사나갈 시간을 벌어서 갈 생각입니다.

계약만료가 된다고 곧바로 월세 전환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계약 만료일에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제가 소송을 걸 수 있습니다.

계약금을 대출받아 낼 생각도 안한 것은 아닌데,
관례상 그리고 저희 형편상 일부러 그럴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차례 계약금을 주기로 약속했다가 말을 바꿨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집 주인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요?
결혼 하고 몇 번째 이사인지 잘 기억도 안나는데요.
이 글에도 언급했듯이, 부천에서 딱 한 번 괜찮은 주인을 만났고,
그 외에는 단 한번도 상식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몰상식한 인간들 밖에 없더라구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일까요?
저는 이게 바로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집을 살아갈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이 시스템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도 집 주인 입장에서는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는 거죠.

다시 한번 기억의집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지금은 조금 힘들지만 순리대로 상식적으로 풀어가면
결국에는 주인도 어쩌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qualia 2013-07-1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전세금 잘 돌려받으셨으면 좋겠네요. 서로 화도 내고 큰소리도 치고 했으니까, 이젠 차분하게 살살 논리적인 설득 작전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대판 싸우고 나면 양쪽이 물러서서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되잖아요. 그걸 인간적인 전략으로 파고드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도 인간인 이상 뭔가 양보하고 합리적인 방식/태도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있는 곳에서 셋방살이 10년 넘게 살고 있답니다. 주인댁을 잘 만나서인지 10수년 전 계약했던 그 금액 그대로 살고 있지요. 중간에 주인 선생님께서 월세로 전환해서 월 기십만원씩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찾아가서 한 2~3년만 더 전세로 살게 해달라고 했죠. 처음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셨는데, 나중에 그냥 그렇게 살라는 무언의 승낙을 해주시더군요. 그뒤로는 방세 얘기 전혀 안 하시고 5~6년이 지나도 그냥 내비두시더라구요. 4가구를 세 놓으셨는데, 저만 그렇게 장기 전세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랍니다. 정말 감사하죠.

그런데 원주인께서 집을 집장사 하시는 분한테 2011년에 팔고 이사가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집주인이 다른 분이랍니다. 원래 전세 계약서를 원주인께서 새주인한테 넘겨주셨다고 하시면서, 자동 이월 되는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하시더군요. 새주인한테도 물어보니까 계약서 잘 받았다고 하시면서 원하면 계속 그 전세로 살라고 하시더군요. 새주인도 좋으신 분 같아요.

근데, 먼젓번 주인께서는 이 집 2층에 사셨었는데, 새주인께선 집을 다 세놓으시고 다른 데 사시죠. 그래서 지금 세든 세입자분들한테 제가 수도 요금을 달달이 받아서 대표로 납부하고 있어요. 수도 요금만 요금이 5가구 모두 통합돼 나오기 때문이죠. 근데 통합 수도 요금이 한 달에 10만원이 넘어요. 집이 오래된 집이라 누수가 엄청 심해서죠. 어디서 새는지도 모르고요. 알더라도 수리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근데, 새주인께서 올해 11월달 정도에 이 집을 헐고 원룸을 지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사갈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이곳이 대학교 앞이라 장소도 좋고, 아주 싼 가격에 안방, 작은방, 작은 주방 겸 거실을 갖춘 비교적 넓은 전셋집에서 정말 고맙게 잘 살아왔는데요. 이사갈 생각을 하니까 걱정입니다. 이만한 가격에 이렇게 괜찮은 조건의 집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니까요.

새주인께서 원룸 주택 지으면 방 2개짜리 싸게 주겠다고 하시던데... 그래도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이 지금의 전세금밖에 없기 때문에 걱정이네요.

감은빛 님, 아무쪼록 전세금 문제 원만하게 해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도 좋은 측면이 있을 테니까, 그쪽을 부드럽게 인간적으로 파고드세요. 그러면 의외로 잘 풀릴 거예요.

감은빛 2013-07-12 11:11   좋아요 0 | URL
부럽네요! 좋은 주인 만나 10년 넘게 한 집에 사시다니.
사실 저도 매번 이사할 때마다 그런 바램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집에서는 좀 오래 살아보자는 생각 이사 들어올 때마다 했습니다.
집 주인과도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구요.

문제는 글에도 적었듯이 주인들의 횡포가 상상을 초월하더라구요.
보일러 기사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낡은,
수명이 다한 보일러를 세입자가 고장냈으니 알아서 고쳐서 쓰라고 합니다.
그것도 한겨울에 갓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세입자에게 말이죠.
이런 인간하고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죠.

이번 집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집마다 주인과 말썽이 생겨서 언제부턴가 꼭 해야할말도 잘 안하고 참고,
당연한 요구를 할 때에도 부탁하듯 자세를 낮춰 말하고,
요구를 안들어줘도 계속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호소해왔습니다.
제가 수십 번 웃으면서 부탁하고, 좋게 말로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사람을 우습게 봤는지 점점 더 어이없는 언행을 하더군요.

이 글에는 다 쓰지 않았지만, 집이 낡아서 몇 가지 문제가 끊임없이 생겼습니다.
변기로 연결되는 수도관이 낡아서 샌다던가.
수도꼭지가 낡아서 샌다던가.
방마다 형광등 케이스가 고장나거나 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던가.
부엌 환기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던지.
베란다 누수 같은 심각한 문제도 안 고쳐주었듯이
이런 크고작은 문제가 생기때마다 세입자의 부주의로 고장난 건 알아거 고치랍니다.
수도관이 낡아서 새는게 세입자 부주의일까요?
애초에 형광등 케이스를 튼튼하게 달아놓지 않은 것이 세입자 부주의일까요?
부엌 환기시설이 낡아서 자주 멈추는 것이 세입자 부주의일까요?

제가 위에 기억의집님께도 답글로 말씀드렸는데,
이건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들도 인간이고 가족과 친구가 있을테고, 분명 인간적이고 좋은 면이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집 주인의 입장이 되면 몰상식하고 몰지각하고 형편없는 인간으로
돌변하더란 말이죠.
그런 인간들과 더이상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더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이 글을 쓴 이후로 내용증명도 발송했구요.
그 인간들의 반응에 따라 원만하게 해결이 될 수도 있고,
좀 힘들고 피곤하게 흘러갈 수도 있겠지요.
칼자루는 넘어갔습니다.
그 인간들이 양심이 있는(말씀처럼 좋은 측면이 있는 인간이라면)
잘 해결해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뭐 서로 최선을 다해 싸워야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고 또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영남지기 2013-07-12 15:2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님은 참 좋은 주인 만나셨네요. 저는 작년11월에 단독주택 매매해서 첨 주인이 되었는데 저희는 4가구 9명 사는데 평소에 수도세가 120,000원 정도 나옵니다. 근데 세입자 아주머니 한분이 올해 4월에 이사왔는데 그 세입자 아주머니가 결벽증이 있는지 정신분열증이 있는지 전세계약서 작성할때문해도 괜찮았는데 막상 이사온후 대화도 안되고 좀 정신나간사람 처럼 행동하면서그 아줌마 온 뒤 처음 고지서에서 5~6월 사용량이 220,000원에 두달 동안 244t을 사용햇더라고.... 이것은 푱소보다 10만원이나 많은 금액이며 물 사용량은 100t이 넘는 양입니다. 저번달에 비해도 거의 두배 작년 이맘때 비해도 거의 2배 입니다 그래서 복채에 이사비용 줄테니 나가라고 해도 안나갑니다. 참 집주인 노릇하기 힘드네요.

2013-07-12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남지기 2013-07-1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작년 11월에 단독주택 2층건물을 매매하여 생에 첨 집 주인이 되었습니다. 님 사연을 읽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정반대일까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올해 4월 2층 작은방에 60대초반 아주머니한테 세를 주었습니다. 도배도 해주고 싱크대 수도도 교환해주고 근데 이사온지 일주일만에 아줌마가 밤세 혼자 중얼거리면서 싸우고 2층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 집이 맘에 안들고 같은 집에 사는 옆방 아줌마를 막 욕하면서 집이 구석구석에 냄새가 나고 온몸이 가렵고 하면서 불편사항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이 쓰레기 장도 아니고 그전에도 사람이 잘 살던집에 이사 왔어 이런 얘기하니 좀 정신병환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전세금 돌려 줄테니 나가라고 하니 이사 비용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멀쩡한 집 본인이 맘에 안들어 해서 나가라고 했는데 왜 이사비용을 주냐고 그냥 있었더니 3개월이 지난 지금 그 아줌마가 2달에 혼자 100t이상 물을 사용하면서 하루에 세탁기 2번 돌리고 매일 설겆이 매일 물청소하면서 수도세가 평소보다 10만원이나 더 나왔습니다. 3개월 전에 말이 생각나서 그럼 복채에 이사비용 드릴테니 나가라고 하니 이제 왜 쫒아 내냐며 큰소리 칩니다. 9명 사는 집에 수도 요금이 220,000원 나왔고 2달에 244t사용합니다.
누구는 이사 비용에 전세금 돌려 주면서 나가라고 해도 안나가고 글쓴님은 방기한이 다 되어도 주인이 돈을 안줘 못나가고.... 님 같은 분이 저희 집에 이사 오셔야 되는데, 저는 세입자 아주머니 때문에 매일 물세 걱정 소음 걱정 하면서 하루하루 한숨만 짓고 있습니다. 주인이 갑이라고요? 그것도 세입자 나름이고 주인 나름입니다. 저희는 나이도 젊고해서 그런지 오히려 세입자들한데 절절 매며 삽니다. 아주머니 방기한이 1년하고 9개월 남았는데 빨리 방기한 끝나가길 매일 한숨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살걸 괜히 단독주택으로 이사 왔나 싶어 가족들한테 한 없이 미안하고 내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감은빛 2013-07-15 15:09   좋아요 0 | URL
대개의 경우 집 주인이 슈퍼 갑이지요.
을중의 가장 비참한 을이 세입자가 아닌가 싶어요.

글쓰신 님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겠네요.
부디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밤톨맘 2013-07-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같은 경우는 집보여주고... 이사들올 사람 다 정해진 상태에서
이사날짜 맞춰서...대출받아서 먼저 소리소문없이 이사나갔습니다.(한 2주 전에)

그리고 이사 들어오는날 도배한다 어쩐다 난리피는데.. 돈 못받으면 열쇠못준다..
우린 이미 이사 왔다..(돈 없어서 이래전래못한다는 인상 주기 싫어서 사실 좀 배짱을 부렸습니다.)
우린 돈 없어서 그 돈 못받으면 갈데 없고 계약못하는거 아니다 하고 강하게 나가니
맨날 부동산이 전화했거든요(부동산놈들이 더 못됐어요.. 저같은 경우는 도배장판,마루 원상복구하라고 했거든요.. 절대로 못하죠)

이사들올사람 난리피우니.. 집주인 그때서야 전화 오더라구요..
저희 신랑이 법적으로 하자.. 세게 나가니...
그냥 마루 코팅비만 내는걸로 합의하고 부동산서 만났어요...

그 집주인도 부동산이 이래라저래라 해서 흔들어놓은거 같더라구요

저희는 전세금 받고,, 꼭 먼저 받으셔야 해요.. 안그러면 또 딴소리 할거예요 분명히!!
그리고 코팅비 주고
깨끗이~~ 끝냈어요...

정말 저 그 안빠지던 살이 6kg가 빠졌어요 1-2달 새에...
나중에 집주인이.. 부동산 사장한테 막~~뭐라뭐라 욕하고 그러더라구요


감은빛 2013-07-15 15:11   좋아요 0 | URL
고생 많으셨겠어요! 정말 살이 빠질만 하네요!
그리고 현명하게 잘 해결하셨네요.
저희도 잘 마무리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2015-01-2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나가다 읽어봤는데 그 후로 어찌되셨는지
잘 마무리 되셨길 바라네요
 

한때 그러니까 제법 시간이 지난 얘기긴 하지만, 한때는 나도 제법 몸 좋다는 소릴 들었다. 헬쓰클럽 같은데를 다닌 적은 없다. 어릴 때 몇 번 친구따라 가서 운동하는 거 구경한 적은 있었다. 아령 드는 것 정도는 헬쓰클럽을 다니지 않아도 다 알 수 있고, 그 외에는 대부분 맨몸 운동을 했을 뿐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산을 자주 올랐고, 약수터에서 아저씨들 따라서 돌로 된 역기를 들었던 것이 내 체력과 근육을 만든 기초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기억에 남는 몇몇 여성들이 꽉 붙는 셔츠를 입은 내 몸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날씬하고, 근육이 좀 더 탄탄했지만, 보기에 좋을 정도였을 뿐, 몸이 썩 좋다거나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한 후배는 자신의 애인 앞에서 늘 "오빠 몸 좋다!", "오빠 근육 좀 봐!"라고 말했는데, 질투를 유발하려는 것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애인이었던 그 친구가 체형이 더 컸고, 근육의 크기가 더 큰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날씬한 체형 덕분에 과대평가 된 편이었고, 그 친구는 덩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된 편이었다.

 

작년에 읽은 [남자는 힘이다]의 저자 맛스타드림은 이걸 근 선명도(definition)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날씬한 체형은 상대적으로 근 선명도가 좋아서 더 근육이 많아 보인다고 한다. 내 경우에 가을과 겨울에 만났던 사람을 여름에 다시 만나면 놀라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그러니까 겉옷에 가려있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여름에는 근 선명도 덕분에 나름 몸 좋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날씬한 체형과 근 선명도의 효능은 짧은 운동만으로도 나름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인 5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간헐적으로 생각날때마다 운동을 하곤 했다. 그래봐야 지속적이지 못한 응급처방 같은 운동이라 운동을 등한시 했던 십여 년 동안 몸은 지속적으로 망가져왔지만, 그래도 짧게 반짝 괜찮아 보이는 효과를 얻곤 했다. 도저히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작년이었다. 물론 재작년에도 여름을 맞아, 이대로는 안된다. 다시 총각 시절의 그 몸매로 돌아가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늘 그렇듯이 생각만하고 운동은 지속적으로 안하고 술과 안주로 밤을 지새웠다.

 

작년에 가장 충격을 받았던 일은 그동안 무리없이 입어왔던 몸에 붙는 셔츠들을 더이상 입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뱃살이 대책없이 나와서 도저히 그 옷들을 입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십여 년 전에 새겨졌던 '왕'자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시 식스팩을 되찾아야지 결심을 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다. 가을과 겨울에 간헐적으로 운동을 하긴 했지만 역시 지속적이지 못했고, 그동안에도 꾸준히 술과 안주는 먹어왔다. 그나마 양을 좀 줄이긴 했다. 덕분에 뽈록 나온 배의 높이가 조금씩 낮아지긴 했지만, 아직 식스팩은 멀고 먼 나라의 얘기 같았다.

 

올해 여름이 다가올 무렵 나는 혼자 하는 운동에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딱 정해놓은 시간과 규칙이 없으니 자꾸 운동을 빼먹게 되고, 또 다양한 운동법을 모르니 매번 같은 운동만 하는 것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때 접한 게 '크로스 핏'에 대한 얘기였다. 아마 그 전부터 여러번 들었을텐데, 그 전에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혼자 하는 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나서야 그 얘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올해는 기필코 배에 있는 이 군살들과 작별을 고하리라. 큰 맘을 먹고 헬쓰클럽에 등록을 했다. 크로스 핏 수업이 저녁에 한 차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헬쓰클럽이었다.

 

운동을 하러 간 첫날 깨달았다. 아, 나는 절대 몸이 좋거나, 힘이 좋은 편이 아니었구나. 앞서 맛스타드림이란 사람이 언급한 근 선명도의 개념도 읽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싶었는데, 이제는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운동은 재미있었다. 집에서 맨손으로 하기 어려운 다양한 운동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난 후의 그 상쾌함이 좋았고, 다음날 적당히 온 몸이 뻐근한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는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좀 무리하게 운동을 했던 모양이다. 막상 그날은 괜찮았고, 토요일 오전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 무렵부터 허리와 등, 엉덩이와 허벅지가 불편하더니, 일요일 아침에는 허리를 굽히거나 앉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근육통을 이처럼 심하게 앓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몸이 아프니 입맛도 별로 없었다. 어제 오후 5시부터 시청 광장에서 '우리가 밀양이다'라는 탈핵 행사가 있었고, 거기에 녹색당 당원들과 함께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도저히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냈다. 밤에 잠들기 전에는 출근할 일도 걱정이었다. 이렇게 꼼짝을 못해서야 어떻게 출근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한결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직까지 통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몸도 구부릴 수 있고, 앉을 수도 있게 되었다. 저 책에도 다음날 근육통을 느낄 정도로 운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앞으론 무리하지 말아야겠다. 이러다가 정말 사람 잡겠구나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7-08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9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07-0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줄 놓고 육체를 방치한 채로 지내고 있다가 이 글을 보니 아, 또 정신 못차리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네요. 늘 여름이 가장 다이어트 하기 좋다고 부르짖으면서 그 여름을 또 언제나처럼 보내고 말아요. 다시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몸 관리 좀 해야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니까 좀 이따가...( ")

식스팩 만들기 성공하세요, 감은빛님!!

감은빛 2013-07-15 15:12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 읽었는데 답을 안드렸군요!
여름이 몸 만들기에 제격인 계절이죠.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이니까요.
식스팩은 곧 성공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술도 많이 줄였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종이달 2022-08-19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