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동물은 행복할까?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1
로브 레이들로 지음, 박성실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7년 3월 일본 ‘도쿄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서는 조선인, 류큐인(琉球人), 아이누인 그리고 대만의 고산족(高山族) 등을 진열하여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충격적이다. 인간을 마치 물건이나 동물처럼 진열해두고 구경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전시한 유럽의 사례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오타 벵가라는 피그미족 청년은 만국박람회에서 전시된 후 동물원으로 팔려가서 오랑우탄의 우리에 함께 갇혔다. 미국과 유럽과 일본의 야만적인 제국주의에 분노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중에 G. A. 브래드쇼의 『코끼리는 아프다』와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등을 읽으면서 그때 놓쳤던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가두면 안 되고, 동물은 구경하기 위해 가둬두어도 괜찮은가? 우리는 오타 벵가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오랑우탄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에 대해서도 함께 분노해야 했다.

 

이 책의 원제는 ‘Wild Animals in Captivity’다. ‘창살에 갇힌 야생동물’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저자인 로브 레이들로는 생물학자이자 운동가로 특히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들에 관심을 두고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동물원을 찾아다니며 그 안에서 고통받는 동물들을 지켜보았다. 이 책은 인간 사회에 그 실상을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북극곰이 있다. 북극이 아닌 열대지역인 인도네시아의 한 동물원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다. 뜨거운 태양과 무더운 날씨를 피하고 싶겠지만 갈 곳은 없다. 그저 좁은 우리 속에서 그늘을 찾아다니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없다. 그런데 한낮이 되어 우리 안의 그늘이 사라지자 북극곰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걷다가 방향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걷기를 반복했다. 이런 행동을 스테레오타이피(stereotypy), 즉 비정상적 반복행위라고 한단다. 동물원에 갇힌 많은 야생동물이 이런 무의미한 행동을 온종일 반복하고 있단다.

 

충격적인 것은 새하얀 북극곰의 털이 초록빛과 누런빛으로 얼룩덜룩한 모습이었다. 더러워진 것일까? 목욕을 안 시켜주나? 북극곰의 겉 털 안쪽에 녹조류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란다. 올여름 낙동강과 영산강을 뒤덮은 죽음의 녹조가 떠올랐다. 새하얀 얼음나라에서 새하얀 털을 바람에 날리며 살아야 할 북극곰이 바람 한 점 없는 습하고 뜨거운 곳에서 물감으로 장난치고 안 씻은 것처럼 얼룩덜룩한 모습으로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을 보며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맨 처음 들려주는 두 마리의 도마뱀 이야기처럼 갇혀 있는 존재는 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인간이 갖다 주는 먹이에 의존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존재는 이미 예전의 자유로웠던 존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자를 철창 안에 가둬두고 지켜본다면 그건 생김새만 사자일 뿐,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사자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사자를 지켜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자의 생김새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영상물로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다. 직접 보고 싶다면 사자가 사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제 더는 인간의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이용한 돈벌이 때문에 야생동물들을 콘크리트 지옥에 가둬두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9-07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 그 길에서> 영화를 찍은 황윤 감독님이 동물원 이야기도 영화로 찍었는데... 저는 황윤 감독님 말이 참 옳다고 생각해요. '동물원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요, 동물원은 모두 없어져야 하지요. 돌고래쇼도 없어져야지요...

감은빛 2013-09-09 18: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최근에 동물원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관람객으로 지나칠 때는 몰랐지만,
동물들은 창살 안에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버티고 있더라구요.
동물을 이용한 모든 쇼와 오락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다.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현실의 가족이나 친구보다는 실체도 보이지 않는 온라인 상의 인간 관계가 더 소중하고 깊을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처음 인터넷을 통해 채팅이란 걸 경험해보고, 이메일 계정이란 걸 만든 이후로 온라인을 통해 얼굴 모르는 이들과 감정을 나눈 경험은 생각보다 많았다. 부모나 친구에게는 말 못할 은밀한 고민도 낯 모르는 채팅 상대에겐 편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고, 친구들이라면 잘 들어주지도 않을 별 것아닌 일상 얘기를 펜팔(이메일 친구)에게 메일로 장황하게 풀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상대와 내가 접해있는 면이 아주 작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의외로 낯선 사람들과 낯선 분위기에서 아주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만약 일상에서 만난 여성이었다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대쉬하지 못했겠지만, 온라인을 통해 알게된 인연이어서 과감한 도전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인연을 맺어 사귄 여성이 두 명이다. 한 명은 아주 우연히 채팅으로 시작해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다음날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대략 5시간 동안 채팅을 했고, 5시간 동안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을 주고 받은 지 10시간 만에 우린 서로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과 현재 그리고 미래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런 대화는 (당연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막상 손가락과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 호감이 깨어질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서로 외모에 대한 기준이 높지 않았나보다. 한번 사귀어 보기로 결정했고,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두번째 인연은 한때 몸담았던 문학동호회에서 알게된 사람이다. 글을 아주 매혹적으로 쓰는 사람, 글에서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고, 댓글과 채팅을 주고받다보니 약간의 친분이 생겼다. 점점 자주 채팅을 했고, 쪽지나 메일도 주고받았다. 어느날 채팅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그이가 사는 도시를 찾아가겠노라고 말했고, 그이는 환영의 뜻을 보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한 인연은 좁은 면적의 접점으로 시작한다. 그 관계가 진행하면서 점차 넓어지겠지만, 그 관계가 넓어지기 전에 단순히 호감만으로 시작한 연애는 생각보다 험한 길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현실은 정말로 복잡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자꾸만 끼어든다. 어쩌면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가진 채로 그냥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내 경우엔 둘 중 하나는 살짝 후회가 되었고, 하나는 그래도 제법 오래 착실히 만났다.

 

이 책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약간 뻔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재미가 있었기에 처음 손에 쥔 상태로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세 시간 쯤 걸렸던 것 같다. 맥주를 마시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여유있게 한 손에 책을 쥐고 눈은 책에 둔 채 나머지 손으로 맥주를 홀짝 거렸지만, 나중에는 맥주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이 빠르게 책장을 훑어나갔다.

 

여러모로 에미에게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남편보다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된 펜팔에게 더 감정을 쏟는 부분에 대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의 말투와 태도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도 절대 쎄게 밀거나 놓지 않는 모습을 보아 나 못지 않은 선수임이 틀림없다 싶었다.

 

공교롭게 책을 다 읽은 시간이 세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찾아보려고 컴퓨터를 켰다가 이 책의 후속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이대로가 더 좋을 듯한데, 후편은 왠지 이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야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문득 [비포 썬라이즈]가 생각났다. 무척 감동적으로 본 영화였고 그래서 오랜 후에 [비포 썬셋]이 나왔을때 무척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최근 마노아님을 통해 [비포 미드나잇]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별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금방 마음이 정해졌다. 일단 구매는 보류.

 

컴퓨터를 켠 김에, 메일함을 뒤져 한때 펜팔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아봤다. 대략 10여 년 전 캐나다 여고생과 주고 받은 메일을 어딘가 백업해 둔 것으로 기억했는데, 찾아보니 없었다.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네이티브 스피커와 대화를 자주 나누는 것이 좋을텐데, 현실에서 그런 친구를 찾기 어려우니 온라인에서라도 만들어보자 싶어서 좋아했던 가수 '알라니스 모리셋'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이름과 이메일로 무작정 연락해서 얻은 펜팔이었다. 내 어줍잖은 영어가 많이 답답하고 시시했을텐데, 의외로 이 친구가 친절하게 대해줘서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뒤이어 생각이 나는 건 군대에서 인연을 맺은 여중생이었다. DMZ에 있을때 한 달에 몇 차례 통일전망대(강원도 고성) 주간 근무를 나갔다. 4월과 5월에는 전국 각지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수학여행은 일정부분 반공여행의 성격이 있어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는 수많은 학교들이 끝없이 몰려왔다. 우린 철책선 안쪽에서 원래라면 해안을 감시해야 할 배율이 좋은 쌍안경으로 7번 국도를 올라오는 수학여행 차량이 여학교인지 남학교인지를 살폈다. 만약 여학교라면 학생들이 도착해서 전시용 탱크 앞에서 사진을 찍을 무렵, 군복 매무새를 잘 다듬고 총을 거꾸로 메고 철책 문을 열고 내려가는 것이다. 원래라면 근무지 이탈로 징계감이지만,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는 듯 전시용 탱크 주변을 살펴보는 것처럼 어슬렁 거렸고, 금방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여 사진 한번 같이 찍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럼 슬쩍 한번 튕겨줘야한다. 근무 중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굵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총을 고쳐 메고 자리를 뜨는 것처럼 굴어야 하는데, 당연히 여학생들은 팔짱을 끼고 매달린다. 그럼 어쩔수없이 해주는 것처럼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여학생들이 신나서 탱크 앞을 떠날 무렵, 사진을 보내달라고 주소를 적어준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중생과 장장 5년 넘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물론 내가 제대하고 그 친구가 여고생이 된 이후에는 뜸했다. 뜸했어도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다. 종이로 편지를 쓰기가 귀찮아서 나중에는 이메일로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결국 완전히 연락이 끊긴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루한 군 생활을 견디게 해주었고, 무료한 일상에 웃음을 주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계속 메일을 뒤지다보니 지금의 아내와 연애시절에 주고받은 메일이 나왔다. 내가 보낸 메일은 거의 안 남아 있었지만, 받은 메일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남겨두었다. 우린 기차로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살았으니 나름 장거리 연애였다. 금요일 밤에 기차역에서 만나서 주말을 함께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마치 주말부부 같았다. 평소에 보고 싶어도 자주 못보는 마음을 전화와 이메일로 달랬다. 다시 하나하나 열어본 메일에서 아내는 무척 낯설었다. 아! 당시에는 이랬구나. 이 사람이 당시에는 날 이렇게 생각했구나. 신기하고 낯선 느낌에 적지 않은 이메일을 하나하나 열어서 읽었다.

 

그렇게 펜팔 인연들을 추억하고 또 아내의 편지를 읽느라 시간을 보내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4시를 살짝 넘겼다. 푹푹찌는 열대야는 이 늦은 시간까지도 기승이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선풍기에선 오히려 더운 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새벽 4시 바람 한 점 없는 밤, 어느 낯선 이에게 엉뚱한 메일 한통 보내보고 싶은 밤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3-08-2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은빛님, 완전 낭만적이군요! 기차역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영화같은 연애를 하셨습니다그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이 책을 읽고 이런 진솔한 리뷰를 쓰시다뉘~! 공감을 안할 수 없는 걸요~^^

감은빛 2013-08-26 15:52   좋아요 0 | URL
야무님, 시골 간이역이었다면 좀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희는 서울역에서 만나고 헤어졌기에 그닥 낭만은......
모든 연애는 영화처럼 극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따라쟁이 2013-08-2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새벽세시에 오신것을 환영해요, 이제 문득, 새벽에 깨어있는날 문득 시계를 보며, 어? 세시네... 하실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참고로 저는 그 뒷편도 읽었어요.

감은빛 2013-08-29 17:59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책을 막 읽었을 때는 속편을 읽을까 말까 좀 고민했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걸 보니 안 읽어도 되겠다 싶어요.

다락방 2013-08-2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읽고 책장을 덮자마자 그 알싸하고도 완벽한 결말에 어쩔줄을 몰랐더랬죠. 그리고는 메일함을 뒤졌어요. 누군가에게든 메일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전 이 책이 정말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읽고, 할 줄도 모르면서 독일어 원서도 사고, 읽을 줄도 모르면서 영어책까지 사놨지 뭡니까. 심지어 독일어 오디오북도 있다능 ㅋㅋㅋㅋㅋ

온라인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당연히 자기만의 레오나 자기만의 에미를 생각하게 될 거에요. 제 경우에도 제게 레오 같다고 느껴졌던 남자가 있었고(그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찬가지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를 에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죠. 또한 저는 에미와 레오처럼 후버까페 만남도 해봤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온라인에서 알게 되고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다가 사귀게 된 남자가 한 둘이 아닌데요(응?), 하아- 추억 돋네요. 저는 요즘 이 책을 회사 동료들에게 빌려주고 있습니다.

속편은, 읽게된다면, '그래 이럴 수 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테고, 그러니 읽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완벽한 건 새벽 세시로 끝내는거에요. 새벽 세시의 결말이야 말로 모든걸 말해주는 가장 완벽한, 소설이 완성할 수 있는 최대치인것 같아요.


아..좋다. 저는 새벽 세시 얘기만 하면 참 좋으네요.

감은빛 2013-08-29 18:21   좋아요 0 | URL
우와! 독일어 원서에 오디오북 그리고 영어판까지 모으셨다니!
이거 왕팬이시군요!

후버카페 만남도 해보셨군요!
정말 서로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그냥 찾기로 했나요?
찾아보고 아는 척 하지 않고 돌아와서 나중에 물어봤어요?
아! 그 이야기 정말 궁금해요!

온라인을 통한 인연이 한 둘이 아니었다니,
역시 다락방님도 선수이시군요.

속편은 지금은 안 읽어도 되겠다 싶은게 별로 궁금하지가 않네요.
나중에 다시 읽게 되거나 했을 때 궁금해지면 그때 사던가 해야겠어요.
 
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아침 9시의 담배는 공허함이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씨 혹은 지하철 역 앞 맥도날드 앞이 아니었다면 담배를 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지만, 정오가 되기 전에 담배를 꺼내 무는 일은 드물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그러니까 거의 가족이 아직 한국에 있을 당시에 아버지는 일이 없었다. 가끔 막노동일을 나가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새벽에 어머니가 일을 나가고, 늦게 일어난 언니와 그가 배가 고파 부엌을 뒤질 무렵 깨어난 아버지는 이불 위에 앉아 담배부터 찾아 물었다. 성냥갑을 열고, 성냥 하나를 치익 그어 불을 붙이고 천천히 담배에 대고 불을 당겼다. 어린 그는 단칸방 아래켠에서 눈치를 살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담배에서 연기가 올라오면 아버지는 손을 휘저어 성냥불을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 천천히 깊게 한 모금을 들이마신 후, 아버지는 아주 깊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았다.

 

목표는 다섯 걸음 옆에 있었다. 그 역시 담배를 물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아주 이른 시간의 외출이었다. 통역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일을 받는다면, 목표는 어떻게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뭔가 숨겨진 돈이 없다면, 묵고 있는 방의 월세와 지금 입고 있는 값비싼 옷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공허함을 달려려고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것과 달리 다섯 걸음 옆의 목표는 담배를 몇 번 빨지 않고 그냥 타들어가게 내버려 두고 있다.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이던 목표가 갑자기 맥도널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았다가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목표를 따라 걸었다. 목표가 비를 피해 실내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흰 연기를 내뿜으며 유리창 너머로 목표를 주시한다. 목표는 계산대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다. 한 참 후에야 커피 한잔을 받아 들고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린다. 마침 한 남성이 맞은 편 빈 자리를 권한다. 목표와 같은 동양계 남성이다. 어쩌면 목표와 그리고 그와 같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이 일은 맡은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뒤를 밟고, 정보를 캐고, 감시하는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 경험을 쌓아 잘 처리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목표와 같은 나라 출신이고, 목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며, 급하게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 일이 훨씬 더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고, 돈을 위해서라면 위험도 각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지금까지는 평범했다. 목표는 외출이 거의 없었고, 간혹 외출을 해도 특이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금을 들여 목표를 감시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의뢰인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는 없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목표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밖으로 나온다. 둘이 대화를 나눈 것 같지는 않았다. 남성은 자리를 권했지만, 목표가 앉자마자 신문을 펼쳐들고는 내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둘이 비밀 접선을 했을 가능성을 떠올려본다. 아니. 곧바로 머리를 가로젖는다. 그는 목표에게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권했다. 비밀 접선이라면 그렇게 눈에 띄는 행위를 했을 리 없다. 남성은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늘 아침 뉴욕 변두리에서 공허한 동양인을 또 만난다. 그는 중년 남성의 눈빛에서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눈빛을 본다.

 

****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머리 속에 외전 격의 곁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지를 감시하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 그 그림자는 그레이스가 고용했을 수도 있고, 해마다 아이리스를 보내는 누군가가 보냈을 수도 있다.(그 누군가가 그레이스 아니라면) 혹은 KK단의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민국의 누군가가 고용했을 수도 있다.

 

아, 소설에서 그림자의 존재는 확실치 않다. 다만 수지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착각일수도 있고, 실제일수도 있다. 나는 그 그림자가 실제이고, 그가 수지와 같이 한국에서 어릴때 떠나온 젊은이라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흥미로운 책에 뻔한 미사여구로 감상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함량미달의 글이 이 책에 폐를 끼치겠지만, 나로서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라는 점을 알리며 양해를 구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3-08-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래서 자세한 스토리는 기억이 가물가물해가는데, 그럼에도 감은빛님의 이 리뷰 첫줄을 읽는데 금방 알겠는거예요, 이 책이 이렇게 시작했다는걸.
은근히 긴장감을 더해주는 스토리에, 비밀스러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로움, 쓸쓸함이 짙게 전해져 왔었지요.

감은빛 2013-08-14 11:37   좋아요 0 | URL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로 시작하죠.
저도 이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따라해봤어요.
알아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비밀스럽고 차분한 전개에 은근한 긴장감이 있죠.
외롭고 쓸쓸하고 축축하고 무거운 느낌이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 무척 끌리는 책이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08-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최고의 찬사.
책이 좋은가 보네요.

감은빛님, 잘 지내시죠?
아침 9시의 담배는 공허함이군요, 제게 있어 커피가 다소 그렇다는... ^^

감은빛 2013-08-14 11:4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마녀고양이님!

이 책 제법 좋았습니다.

아침에 피는 담배는 늘 공허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커피도 그렇군요.
저는 커피를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는 편이라 그 느낌을 잘 모르겠네요.

yamoo 2013-08-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다는 단어가 반복되는 거 보니, 정말 재밌나보군요! 서점에서 한 번 훑어보고 재밌으면 그냥 서점에서 읽어야 겠어요^^

감은빛님 흡연자이시군요~ㅎ 아침에 피는 담배는 공허하다란 말을 누구한테선가 좀 들었습니다. 아마 친구들이 그랬던거 같아요. 저는 비흡연자라 저얼대 그 느낌을 알 수 없다는^^;;

감은빛 2013-08-14 14:47   좋아요 0 | URL
어, 동어반복이었군요. 막판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랬나봅니다.
서점에서 읽기에는 분량이 좀 많지 않을까 싶은데,
야무님 책을 빨리 읽으시나요? 속독법?

오랫동안 흡연자였구요.
끊었다고 해놓고 참고 참고 또 참는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고 간혹 한 대 피우기도....)
생활을 한지도 제법 되었네요.

담배를 피워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알수 없죠! ^^

무해한모리군 2013-08-1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다음책을 내지 않나 궁금한 작가중에 하나입니다.
누구나 한권의 책을 쓸만한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라는 얘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감은빛 2013-08-16 16:57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왜 차기작이 없을까요?
그 말 멋지네요.
휘모리님께서도 책 여러 권 쓰실만한 이야기 갖고 계시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들려주세요.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침몰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타이타닉이 밤에 전속력으로 항해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고, 망루에 망원경이 없어서 육안으로 전방을 관측했기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또 몇 차례 빙산과의 충돌 위험을 보고 받고도 안일하게 대처한 선장을 탓하기도 한다.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이타닉은 눈 앞에 다가온 빙산과의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현재 지구와 인류는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고갈, 기후변화, 사막화, 식량위기, 핵폭발의 위험(핵폭탄 혹은 핵발전소의 폭발), 전 지구적 차원의 파괴와 오염 등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1972년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출간했고,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는 ‘유엔 인간환경회의’를 개최하여 이 날을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했다. 이처럼 우리는 1972년에 이미 지구 환경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2013년이 된 지금 우리는 위기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지금의 지구를 타이타닉에 비교해보자. 우리는 현재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퍼올리고, 핵 발전소를 짓고, 산을 깎고, 숲을 파괴하고, 갯벌을 매립하고, 강을 막고, 흙과 공기를 오염시키며 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눈 앞에는 석유고갈, 해수면 상승, 핵폭발, 식량위기 등 여러 이름의 빙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 계속 속력을 높이다가는 이들 빙산에 충돌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빙산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신이 타이타닉호의 승객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침몰이 자명한 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뛰어내릴 것인가? 선장을 설득해 배를 멈출 것인가? 힘으로 배를 장악하고 속도를 늦출 것인가?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침몰을 기다릴 것인가? 침몰의 순간까지 장렬하게 음악을 연주할 것인가?

 

경제성장을 위해 지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대부분 타이타닉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처럼 안일하게 여기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이 경제성장이라는 종교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저자는 1949년 1월 20일 트루먼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처음 사용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밝혀낸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경제성장이라는 신앙은 사실 미국이 다른 국가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과거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아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친 후 미국은 다른 나라를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산업화시켜 전 세계적인 착취구조를 완성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산업화가 어떻게 착취구조가 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가려졌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저자는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식이 되어버린 ‘성장 이데올로기’ 대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생산과 소비 등 경제활동을 줄이고 문화와 여가를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외에도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그 결과 더 많은 국민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희생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고,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 방식이 사실은 공화주의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해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 책의 제목을 ‘21세기의 상식(커먼센스)를 위하여’라고 짓고 싶었다고 한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던 토마스 페인의 『상식(커먼센스)』처럼 사회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저자의 바램처럼 더 늦기 전에 상식이 바뀌는 날이 오기를 나도 간절히 바란다!

 

여러 해 전에 이 책을 읽은 후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이 되어버렸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책 소개를 원하면 0순위로 소개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부족하기만한 원고를 실었던 [100인의 책마을]에 소개한 책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책도 이 책이다. 최근 마을의 공부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해서 책을 찾았더니 없었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기억도 없는데 왜 없을까? 며칠을 어지럽게 쌓여있는 책 더미를 뒤졌지만 못 찾았다. 결국 개정판을 새로 사서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널리 알리고픈 마음에 소개를 쓴 후로 또 몇 년이 지났다. 여전히 지구는 빙산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샌택을 해야할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3-07-26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점점 그 '상식'과 반대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군요. 저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감은빛 2013-07-26 19:3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저 '경제성장이라는 거짓 신화'에 빠져있지요. 물론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쫌 심한 편입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한 권을 뽑으라면 이 책을 선택할 겁니다.
읽어보시면 후회 없으실 겁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 개정판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를 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혁명? 군대? 좀 더 어렸을 때에는 아마 이런 답이 나왔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하나의 정치적인 결단이나 사건으로는 세계를 바꾸거나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이보다 더 보편적인 사건, 이를테면 수많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변화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여기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라는 단어가 입력되면 나의 뇌는 자동으로 비폭력, 무저항, 인도 독립 등의 단어를 내놓는다. 간디는 내게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 혹은 민족지도자 정도로 인식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간디가 단순한 독립운동가는 아니라고 깨닫는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와 산업의 발달이 인류를 파멸로 끌고 가리라고 예상했고, 그에 맞서 세계를 구원할 대안을 종교와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사상가이자 이를 몸소 실천하고 전파한 실천가였다.

 

이 책의 핵심 단어는 스와라지와 스와데시이다. 스와라지는 정치적 의미의 자치를 뜻하고, 스와데시는 경제적인 자립을 뜻한다. 간디는 서구 산업자본주의가 착취구조를 바탕에 두고 점점 더 사람들을 못살게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마을 단위의 자치와 자립을 제시한다. 마을은 자치와 자급자족이 가능한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구조다. 권력과 부의 축적과 폭력과 강제가 없이 모두가 자발적인 경제활동과 협력을 통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마을이다. 얼핏 들으면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을 그리는 듯한데, 간디는 이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각 개인의 역할과 같은 작고 세세한 부분부터 마을 연맹과 국제 교류와 같은 큰 부분까지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려놓았다. 단순히 그림만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해나가면서 이를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정도쯤 되면 쉽게 불가능한 상상이라 몰아세우기 어렵겠다.

 

책에는 비노바 바베와 간디가 주로 주장한 ‘나이탈림’이라는 새로운 교육운동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배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함께 읽던 아내가 말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책을 읽고도 어떻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어?” 나이탈림은 수공예를 통한 교육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죽은 지식이 아닌 삶 속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지식을 말한다. 간디는 아이들이 물레로 실을 잣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산수와 역사와 생물학과 경제학과 지리와 농업 등에 대해 알아간다고 했다. 매일 아이의 산수 숙제 때문에 끙끙대는 입장에서 진심으로 공감하고 또 실천해보고 싶은 내용이다.

 

군대와 경찰을 대신할 비무장, 비폭력의 집단을 설계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평화 여단’, ‘비폭력 자원부대’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들은 종교분쟁을 평화적인 노력으로 해결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비상 시에 다친 사람들을 돕고, 전쟁 및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간디 자신이 인정했듯이 이 방법이 실현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무척 높은 도덕성과 살신성인의 정신과 종교적 헌신이 요구되는 이런 집단이 과연 마을마다 만들어질 수 있을까? 분명 현실적인 한계가 명확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무척 대단하고 또 흥미롭다.

 

이 책의 훌륭한 내용과 별개로 아쉬움도 제법 있다. 우선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 구성 상 여러번 나올 내용이라면 앞에는 간단히 다루고, 뒤에 자세히 설명하던가, 반대로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면, 뒤에는 언급만 하고 지나가야 할텐데, 앞에서도 또 뒤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이 여럿 있다. 이건 간디가 직접 하나의 책으로 작업한 것이 아니라 여러 매체에 쓴 글을 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글을 묶은 편집자가 손을 봐야 할 몫이었다고 본다. 번역 후에 교정 과정에서 이 지점을 간과한 우리나라 편집자도 역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번역의 문제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개정판이어서 그래도 수정이 많이 되었던데, 그 전의 번역은 훨씬 더 심각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녹색평론 책들이 대체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아쉽다. 마지막으로 내용 설명을 하다 만 것처럼 끊기는 문제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들어가면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조금 설명하다가 끊기거나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점 역시 앞서 말한 것처럼 간디가 여기저기 필요에 따라 쓴 글을 모았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일텐데, 거의 하나의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해내면서 사소한 부분들에 신경을 덜 쓴 느낌이다. 이건 좀 과한 바램일 수도 있지만 좀 더 꼼꼼한 설명이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이 있다.

 

요즘 ‘사회적 경제’,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 등의 단어들이 자주 들린다. 시골의사 박경철도 마트가 아닌 동네 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했다. 거의 한 세기 이전에 인도에서 쓰인 이런 개념들이 지금 이 나라에서 유행하는 의미를 곰곰 곱씹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