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파국 -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
이택광.홍세화.임민욱 지음 / 꾸리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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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가 직접 쓴 글을 번역한 책은 아니다. 올해 6월 일주일간 한국을 다녀갔을 때 지젝의 강연과 대담 등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에게 지젝에 대한 입문서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추천을 받고 읽었다. 지젝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왠지 그의 책은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확실히 잘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김종철 선생의 말씀들을 떠올렸다. 지젝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말하고, ‘환경의 위기’, ‘지적재산권 문제’, ‘생명공학의 문제’ 등을 여러 번 지적할 때마다 계속 김종철 선생이 생각났다.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접하거나, 직접 강연을 통해 들은 김종철 선생의 말씀들도 대개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일찍부터 “난파 직전의 배에서 내리기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진단에는 환경의 위기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문제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지젝과 김종철 선생의 생각이 완벽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해한 바로는 매우 비슷한 면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지젝은 주로 일상생활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면들은 김종철 선생도 종종 지적했던 부분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우리에게 작동하는 지점들을 짚어주곤 했다. 지젝이 ‘스타벅스’를 강조했다면, 김종철 선생은 ‘학교 교육’을 강조하곤 했다.

 

지젝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주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에 대한 것이다. 여러 가지를 설명했지만 그 중에서도 ‘믿지 않지만, 마치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 가장 공감이 간다. 예로 든 것이 ‘건물에 13층이 없는 것’이나 ‘산타클로스’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4층이 없거나, 13층이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특히 산타클로스에 대한 부분은 나도 평소에 참 우습다고 여겼던 점이라 특히 공감이 간다. 빨간 옷을 입고, 길고 흰 수염을 붙인 가짜 산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설정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산타라는 거짓 이미지를 강요할까? 동심을 지켜야한다는 말로 그런 우스운 연출을 정당화하는 현실이 한편의 거대한 코미디 같다. 어차피 아이들은 곧 산타는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다. 하지만 어른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맞춰 아이도 속아주는 것처럼 연극을 계속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이며, 바로 어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싶다. 이해할 수도 없고 믿는 것도 아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고 또 행동하는 많은 일들이 바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부분은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말을 빌어 설명한 철학적 명제이다. 약간 표현이 다르지만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나열해보자. 하나, 우리가 (무언가를)알고 있고,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둘, 우리가 모르지만, 그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셋, 우리가 모르고, 그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도 있다. 이 마지막이 럼즈펠드가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리고 지젝은 여기서 럼즈펠드가 누락시킨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 바로 네 번째 명제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힌 채, 갇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지젝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을 추천해준 이에게 감사한다. 덕분에 지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앞으로 지젝의 다른 책들을 통해 더 그의 세계를 탐험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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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2-2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힌 채, 갇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지젝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저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읽고 있는데, 지젝 인터뷰를 실은 거랍니다. 쇼킹한 부분이 있어서 책을 읽는 재미가 있어요. (나중에 페이퍼로 올릴 예정이에요.)

반 정도 읽은 책이 네 권인데, 이번 해에 다 끝내고 싶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내년으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시간은 빠르게 달려 가는 것만 같습니다. 계획 실천의 발걸음은 느리기만 하고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은빛 2012-12-27 16:01   좋아요 0 | URL
쇼킹한 부분이 뭔지 궁금하네요.
방금 다녀왔는데 아직은 안 올리셨네요.
어서 올려주시와요! ^^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 옮김 / 황소걸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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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전 일이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뒤이어 들어온 젊은 남자 둘이 내 옆 탁자에 앉았다. 둘이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데, 바로 옆이다 보니 듣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들렸다. 밥 먹기에 집중해보기도 하고, 딴생각을 열심히 해보기도 했는데, 그들의 대화는 자꾸만 내 공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음악을 하는 친구들 같았다. 한쪽은 20대 중후반, 한쪽은 20대 초반 같았다. 나이 차가 별로 안나 보이는데, 어린 쪽이 다른 쪽을 굉장히 깍듯하게 대했다. 좀 더 나이 많은 쪽이 이런저런 경험담과 조언을 들려주는 듯했다.

 

 

 

그러다 한 문장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 왔다. "단 한 번의 후회도 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아직 대학을 다니고 있는 친구가 공부보다는 음악을 선택하려 한다고 말했을 때, 선배로 보이는 친구가 했던 말이다. 그 친구는 후배가 이 어렵고, 배고픈 길을 선택한 것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확실한 각오를 하고 시작하길 바라는 것일까? 표현은 달랐지만, 가끔 후배 활동가들과 상담을 하게 되면 나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고민하고,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 길로 가라!" 그리고 내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생이 된 후, 선후배들의 요청에도 나는 학생회 활동을 중단했다. 운동권 집단 내부의 권력싸움, 패거리 문화 등이 지긋지긋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늘 선후배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이제 혼자 있는 때가 많아졌다. 읽고 싶었던 책들도 찾아 읽고, 공부도 많이 해야지 결의를 다졌다.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어려운 철학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유독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냥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당시에 내가 생각한 실존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강에 집어 던지려고 집어든 돌멩이 하나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 것처럼, 자연의 모든 구성원은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거기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인공물로 채워가는 행위가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활동가가 되었다.

 

 

 

과연 나는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을까? 한때 내게 상담을 요청하곤 했던 후배 활동가들은 과연 이런저런 갈등과 고민들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인 어려움, 단체나 조직 내에서의 갈등, 진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 개인이나 단체의 전망에 대한 생각들 등등 수많은 고민거리가 쉴 새 없이 던져졌다.

 

 

 

결국, 나는 직업활동가를 그만두고 직장인이 되는 선택을 했지만, 활동가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활동했던 단체에 대해서는 후회와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활동가를 그만둔 것도 사실 결혼이나 육아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의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단체 활동에서 전망을 찾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야기가 좀 많이 옆으로 새버렸는데, 저 위에서 "단 한 번의 후회도 하지 않을 자신 있어?" 라는 질문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을 무렵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철학 안내서이자 진정한 의미의 자기 계발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기존의 딱딱한 철학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저자의 발랄하면서도 당돌한 어투는(이 책은 저자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읽힌다.) 철학이라는 학문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쉽게 읽을 수 있다.

 

 

 

실존주의라는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어려운 주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기존 철학책들처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또 다른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의 예를 들어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물론 아무리 쉬운 설명이라 해도, 그 설명을 제대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하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실존주의에 대한 내 오랜 관심과 열정을 다시 한번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 대학 후배가 서울로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우린 그닥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후배는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 역시 몇 가지 어려운 상황과 고민으로 맘이 편치 않았다. 헤어질 때 후배 녀석이 말했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소. 힘내이소!"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녀석에게 나도 비슷한 말을 돌려줬다.

 

 

 

실존주의는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지독할 정도로 솔직한 철학이다.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 말인 듯하다. 실존주의자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허무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반허무주의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실존주의자로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더 힘들어하고 또 괴로워하지만,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힘든 시기에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것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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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2-11-2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궁금합니다. 과연 식사는 제대로 하셨을지요. 식사중이셨으니까요.

감은빛 2012-11-28 19:01   좋아요 0 | URL
아, 시간이 좀 지나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좀 불편하게 먹었던 것 같아요.

제 식사를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비로그인 2012-11-2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점점 느끼게 되는거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12-11-28 19: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도 제법 이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2012-11-29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1-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어져요...
그 말을 했던 사람에게요. ^^

당연히 후회하고 반성하고 발전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은 모험이 없는 삶인거 같고.
실존주의.... 현재를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네 저도 실존주의자인지라.

감은빛 2012-11-29 12:43   좋아요 0 | URL
음, 글쎄요.
후회라는 단어에 대한 체감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결의를 갖고 시작해야 된다고 받아들였어요.
나중에 결국 후회할 날이 있을지라도 시작할 때만큼은,
그런 일은 없을거야 라는 각오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달여우님도 실존주의자였군요.
언제 한 잔 기울이면서 실존주의에 대해 논해볼까요? ^^

마태우스 2012-12-0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 얘기를 하시니 제 얘기가 하고 싶어지네요. 저는 기생충학을 택할 때 별다른 고민없이 선택을 했어요. 임상을 택한 친구들에 비하면 그리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할 거였지만, 그래도 기생충이 좋았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네요 벌써... 그간 한번도 후회를 안했다면 거짓말 같지만, 진짜로 전 후회를 안했지요. 친구들보다 금전적으론 넉넉치 못하지만 그만큼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그 넉넉치 못하단 것도 우리 사회 기준으로 보면 상위에 있을 것 같아서 후회를 안한 측면도 있지요. 음악과 비교하기엔 적절치 않았네요 그러고보니깐.

감은빛 2012-12-04 11:25   좋아요 0 | URL
네, 마태우스님께서는 정말 후회 안하셨을 것 같아요.
음악, 미술, 체육 이런 쪽은 이 나라에서 정말 먹고 살기 힘들죠.
글쟁이도 그 못지않게 배고픈 쪽이구요.
저는 그보다 더 배고픈 사회운동 쪽에 있었구요. -_-;;

그치만 그런 비교보다는 각자의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선택.
그 얘길 하고 싶었던 것이니
마태우스님의 말씀이 적절치 않은 것은 아니예요.
저는 마태우스님 이야기를 알게되어 좋네요! ^^

마태우스 2012-12-04 12:14   좋아요 0 | URL
직업활동가 정말 힘들죠. 일은 많고,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는 요즘같은 시대에 그 바쁨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다보면 중간에 회의도 들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꾸준히 일하시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거죠.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글이네요

페크pek0501 2012-12-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부터인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돼 버렸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삶이란 그저 그런 시시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일상을 반복하다가 죽는 거죠.ㅋㅋ
그냥 인간이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 이 말이 꽂히는군요. 요즘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

저, 첫 방문이어요!!!!!!!!

페크pek0501 2012-12-04 16:59   좋아요 0 | URL
아니, 첫 방문이 아니라 첫 댓글이어요.ㅋ

감은빛 2012-12-05 13: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첫 댓글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억해두겠습니다! ^^

'삶의 의미'에 대해 어려서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전히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삶은 그냥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죠.
그것만 알게 되어도 큰 깨달음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페크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신 듯 해요! ^^
 
우리 학교 텃밭 - 초등학교에서 많이 심는 채소 9종과 곡식 3종 가꾸기 철수와영희 그림책 5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노환철 감수, 바람하늘지기 기획 / 철수와영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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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내가 지역의 생협 조합원들과 함께 텃밭을 분양받았다. 아내는 주말마다 나가서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곤 했다. 나도 아내도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내는 같이 농사짓는 조합원들에게 배워가면서 즐겁게 일을 했다. 아주 가끔 나와 아이들도 함께 텃밭에 따라갔다. 초등학생인 큰 아이는 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신기하게 관찰했고, 조그맣던 싹이 점점 자라나 줄기가 굵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흐릿한 기억에 나도 그 나이때쯤 강낭콩을 심어서 몇 알을 밥에 넣어 먹었던 기억이 났다. 몇 알 되지도 않는 콩이 들어간 밥을 한술 뜨시며 아버지께서 칭찬해주셨던 말도 뒤이어 떠올랐다. 아이가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텃밭을 지켜본 기억은 아마 오래 남을 것이다. 아내가 상추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쌈채소를 따오고, 방울토마토를 따오고, 고추를 따오고, 옥수수를 따올 때마다 아이는 엄마가 농사지은 채소들이 사먹는 채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이의 학교에는 아직 텃밭이 없는데, 최근 초등학교에서 텃밭을 만들어서 이것저것 키워본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작은 텃밭이라 해도 고사리 손으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아마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글에는 학교 텃밭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깨닫게 될지 잘 표현되어 있다. 직접 수확한 싱싱한 제철 채소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농사를 통해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깨닫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며, 살뜰히 보살핀 만큼 수확을 할 수 있어요.” 라는 저자의 말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계속 마음속에 남는다.

 

이 책 『우리학교 텃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많이 심는 채소 9종과 곡식 3종을 가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농사계획표를 짜고, 농기구와 거름을 준비하는 일부터 수확한 작물들을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서 요리하는 방법까지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띄엄띄엄 아내의 텃밭을 살펴보곤 했던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아내와 아내의 동료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어왔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마운 흙’, ‘고마운 비’, ‘고마운 해’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꼭 필요한 자연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자칫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자연의 가치에 대해 깨우쳐 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고마운 풀’에서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는 풀들 중에서도 나물로 먹을 수 있는 풀이 있으며, 또한 풀이 있어서 땅이 마르는 것을 막아주고, 땅의 힘을 길러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마운 벌레’에서는 식물과 곤충의 공생관계를 알려주고 특히 꽃가루받이를 가장 많이 하는 ‘벌’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알려준다.

 

가장 마지막에 부록처럼 실린 내용들도 모두 흥미롭다. 올해 농사를 지은 수확물로 다음해에 뿌릴 씨앗을 얻는 방법이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고, 천연 거름을 만드는 몇 가지 방법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줌과 똥으로 거름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빗물을 모아서 사용하기 등 학교에서 조금만 더 신경 쓰면 훨씬 더 텃밭 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백 마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깨닫는다. 도시에서만 자란 탓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텃밭 농사였는데, 책에 실린 그림으로 1년 농사 과정을 쭉 보고나니,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아니구나 싶다. 아이들도 이 책을 본다면 흥미를 갖고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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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1-1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에서 꽃그릇 하나 마련해(아무 플라스틱 상자도 다 되니까요)
아무 씨앗 하나만 심어도 돼요.
아무 씨앗을 안 심고 흙만 있어도 돼요.
숲에서 한 봉지 주워 와서
꽃그릇에 담고는 가만히 지켜보면,
햇볕이 잘 들고 빗물을 받을 만한 데에 두고 보면
온갖 풀이 돋아요.

사실, '텃밭'이란 집에 딸란 밭이란 소리인데,
주말농장은 '텃밭'이 아니거든요.
주말농장은 '멀리 찾아가서 일하는 논밭'이니,
집안이나 집앞에 진짜 텃밭을 마련해 보셔요.

감은빛 2012-11-16 11:41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베란다에 파와 방울토마토 등 몇개 야채를 길렀죠.
올해는 옥상에 스티로폼 상자와 큰 화분을 이용해서
상추와 고추 그리고 방울토마토 등을 길렀구요.

그런데 역시 밭에서 키우는 야채들이 더 잘 자라고, 많이 열리더라구요.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도 심어 먹을 수 있구요.
저희 텃밭은 완전 집 앞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동네 텃밭이었으니까요.
 
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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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개봉한 유명한 SF 영화 스타워즈 프리퀄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다. 당시 극장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할 때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영화랑은 전혀 관계없이 떠오른 이 엉뚱한 생각은 이후 살아오면서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위험(그 위험이 크면 클수록)은 잘 보이지 않고,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위험요소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가 바로 먹거리 문제라고 생각된다. 광우병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겠지만, 이외에도 각종 발암물질과 농약 그리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과 방사성물질 등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에 3끼씩 먹어야하는 사람들은 그 음식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지 못하고(또한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다.

 

먹거리 문제에 대한 책들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넘어온 주제는 바로 ‘채식’과 ‘동물권’이었다. 채식에 대해서는 아내를 통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으니, 우선 동물권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물권(혹은 생명권)’ 운동 안에 다시 3개의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물 복지’, ‘동물권’, ‘동물 해방’이 그 경향들이다. 이중 ‘동물 복지’가 셋 중에서 가장 온건한 방식의 운동이며, 마지막의 ‘공물 해방’이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다.

 

그 가장 급진적인 운동 흐름과 같은 이름이자, 그 운동의 시작을 연,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개정완역판이 최근 출간되었다고 하여 찾아 읽었다. 이 책은 1975년에 처음 나와서 2009년 다시 개정판이 나왔다. 국내에는 1999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2009년의 개정판이 이번에 완역출간된 것이다. 역시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이라, 그 시작부터 흥미로웠다.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이란 가치가 1792년에는 ‘여성 해방’이란 가치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재밌는 일화를 먼저 소개한다. 현대 여성 해방론의 선구자인 메리 울스턴이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출간하자, 뒤이어 [짐승의 권리 옹호]라는 책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 라는 주장이 마치 짐승(단어부터 동물이 아닌 짐승이다)이 사람과 평등하다는 주장처럼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조롱하는 뜻으로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익명의 저작이 구체적으로 어떤 논거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시점에서 저 제목은 아주 급진적인 운동의 흐름으로 많은 진보운동 진영으로부터 환영받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에 저항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배우고 살았다. 그러나 종차별 즉 동물 차별에 대해서는 배우거나 들은 바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농담이나 조롱의 표현이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종차별주의자’로 인식할 기회가 전혀 없다. 근래 들어 점점 육식이 많아지고, 도로와 아파트와 골프장 때문에 야생동물들이 살 곳은 점점 줄어들지만, 누구도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자연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실에서 우리가 잘 알기 어렵고, 보이지 않을 뿐이지만, 실제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은 종차별주의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온갖 종류의 동물실험을 거친 상품들을 소비하고, 동물의 가죽이나 털을 입거나 매고, 동물의 살과 뼈로 배를 불리며,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 그들을 몰살시키고 있다.

 

이 책은 동물 아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 외의 다른 생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지만, 막상 내용을 읽어나가는 일은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동물 실험 장면들과 공장식 농장에서 가축들이 대량으로 사육되는 현장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들 그리고 그런 묘사들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다. 공장식 축산 농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 사전 지식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불편했는데, 동물 실험 부분에서는 정말 읽으면서 욕이 나올 정도로 상식에 어긋난 짓을 저지르는 장면들 때문에 자주 책을 덮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요즘은 ‘애완동물’이란 단어보다는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이고, 길을 걷다가 심심찮게 동물병원도 마주치고, 길을 걷다 어렵지 않게 동물들을 마주치는 시대가 되었다. 유명한 아이돌 그룹 출신의 여성가수가 동물권 운동 단체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채식을 하고, 가죽옷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시대이다. 이 책을 통해 지구상에는 인간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웃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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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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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여행하던 아는 만큼만 보이고, 딱 그만큼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마 대학에 다닐 때였다. 사실 그 전까지는 제대로 여행이란 걸 해본 적도 없었으니, 그런 당연한 사실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역사에 관심은 많았지만,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었고 배경지식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돌아다니길 좋아하기도 했고, 내 발로 여기저기 한 번씩 밟아보고 싶단 생각에 훌쩍 떠나서 보름씩 한 달씩 떠돌아다니곤 했다. 다니면서 아쉬웠던 건 내가 돌아다녔던 고장들에 대해 잘 몰랐던 탓에 새로운 군이나 시에 들어서면 어디를 가서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기차나 버스에서 내리면 이 고장에 가봐야 할 곳이 엄청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막상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보면 별로 볼 게 없었다.

 

그래도 역사에 관심은 많았던 탓에 한번 가본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찾아보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 곳을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물론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이건 나중에 친구들이나 동료들 혹은 좋아하는 여성과 그 곳에 가게 되면, 내 특기 중 하나인 잘난 척하기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곤 하는데, 특히 진주성은 여자 친구가 바뀔 때마다 놀러가서 나의 지적 허영심을 맘껏 펼쳐보이곤 했다.

 

제주를 처음 간 건 신혼여행 때였다. 이 책에는 유홍준 선생께서 결혼할 당시에는 상위 20%의 부유층만 제주로 신혼여행을 가는 호사를 누렸다고 했지만,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이미 대학 졸업여행이나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제주로 올 정도였고, 대다수의 신혼부부는 해외로 떠나고 있을 때였다. 이틀간 유명한 곳들만 돌아보는 관광버스를 탔는데,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들이셨고, 간혹 동성끼리 온 젊은 분들도 있었지만, 신혼부부는 우리뿐이었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가이드가 보여주는 곳만 따라다니고, 들려주는 말만 주워섬길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본 제주의 자연에 푹 빠지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유명한 포인트들만 돌았음에도 말이다.(물론 그 중의 3분의 1은 매우 가고 싶지 않은 곳들이었다.)

 

두 번째 이후 나는 제주 숨겨진 매력에 더욱 푹 빠지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한두 달쯤 제주에 살면서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싶다는 바램을 갖게 되었다. 물론 먹고 살기 바쁜 현실에 치여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먼 거리와 비행기 삯에도 불구하고 너댓번씩 가봤으니 많이 가긴 했다. 만약 그 중 한번이라도 이 책을 읽고 갔더라면 훨씬 더 알차고 흥미로운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읽고 두 가지 일을 꼭 실천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4.3 사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찾아보고 알아볼 것. 이건 벌써부터 늘 생각만 해오던 것인데, 이젠 정말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 번째는 다음에 제주에 가게 된다면 꼭 오름 들을 더 많이 올라봐야겠다는 생각. 특히 다랑쉬오름은 꼭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작년 겨울 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다랑쉬오름을 꼭 올라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이 책 덕분에 다시 한 번 더 그 결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유홍준 선생은 아직 눈 덮인 다랑쉬오름을 올라보지 못했다는데, 나는 그 가장 아름답다는 풍경을 꼭 내 눈으로 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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