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을 가며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황규관 / 패배는 나의 힘 / 창비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살때 나는 자유로웠다. 일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냥 놀았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그만이었다. 정 돈이 떨어져 밥을 굶을 지경이 되면, 노가다라도 한탕 뛰면 그만이었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생기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알바를 뛰든 어쩌든 일을 구해서 돈을 벌었다. 원하는 만큼 돈을 갖게 되면 또 일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했다.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 정말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는다.(지금은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사정이 생겨 일을 쉬게되면 학원강사를 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가고 싶으면 전국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서 활동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바닥은 늘 사람이 아쉬운 곳이고, 특히 지역으로 갈수록 더 하기 때문에 마음만 맞는다면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점점 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다. 한때 다니던 단체를 그만두고 좀 더 안정적인 다른 단체를 찾아보다가 결국 시민단체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수도권을 벗어나 지역으로 내려가면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아내의 직장과 집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섣불리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닥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서울에 있는 단체에 들어갔다가, 운동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 동안 나는 큰 보람도 없고 활동에 대한 의욕도 없었다. 그냥 당위성 하나로 버티는 나날이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은 넓은 대한민국 땅 전국 곳곳에 펼쳐져 있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좁디좁은 서울바닥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날, 가슴 속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그 답답함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비뚤어진 허수아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 마저도 내게는 욕심'이었던 것이다!


황규관 시인의 선한 눈매와 웃고 있는 얼굴이 기억난다. 촛불 집회를 통해 여러 차례 스쳐 지나게 되었다. 작가회의 깃발을 보게되면 근처에는 반드시 황규관 시인이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기 전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시집 한 권을 찬찬히 읽으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보았다. 

대한민국, 시인이 살기에는 참 잔인한 나라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2011-04-1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 많은 장소에서 황규관시인을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그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의 시와 시인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무모한 생각들이었지만 뭔가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이 무책임하지만 그 말 밖에 할 수 없는 날들입니다.
저도 집에 있는 시집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1-04-15 04:59   좋아요 0 | URL
시와 시인이 닮았다는 생각, 저도 가끔 하게 됩니다.
확실히 황규관 시인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4-1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분의 시집 제목을 보고 한동안 낱말 바꿔부르기 놀이를 했었어요.
패배의 자리에 이런 저런 낱말들을 넣어서 말이죠.
질투는 나의 힘, 사랑은 나의 힘, 밥은 나의 힘 등등이요.
근데 그 어떤 것도 패배는 나의 힘 만큼 둔중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건 없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했나봐요, 4월은 잔인한 달~(에고고, 이건 아니잖어?)

감은빛 2011-04-15 05:01   좋아요 0 | URL
4월은 잔인한 달! 인가요?
어느 해는 그랬던 것도 같아요.
올해는? 글쎄요. ^^

마녀고양이 2011-04-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여자는 조금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는거 같아요.
저는 회사를 때려치워도 신랑은 회사를 때려치우지 못 하는 모습에 미안함을 느껴요.
하지만 시부모님과의 갈등이나 아이들, 남편에게 꼼짝도 못 하는
주부를 보면 감은빛님의 부자유를 떠올리죠.

결혼이란게,,, 참 다채로와요. 비단 결혼 뿐 아니라 사람 산다는게 다 그런거죠?

감은빛 2011-04-15 05: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부분들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족 내에서도 위상이 많이 다르죠.

네, 다채롭죠. 삶의 모습은 정말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낮밥


삼남매가 평상의
반상에 둘러앉아
볼이 미어져라
상추쌈을 우겨넣는 근경을
열댓 발치에서
묵묵히 바라다보며
오져해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큰 손 하나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였다


조성국 / 슬그머니 / 실천문학사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최전방 철책선이었다. 연대본부에서 다른 동기들은 다들 군용 포차나 육공트럭을 타고 자대로 떠났는데, 우리는 인솔장교와 함께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비로소 포차를 타게 되는데, 인솔장교가 전방에는 한번 들어가면 전화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미리 전화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한 사람당 2통의 전화를 쓰게 해줬다. 물론 전화카드나 동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동기들이 각각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혹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동기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모님께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왠 여자애가 전화해서 내 소식을 전하면 그것으로 더 놀랄 양반들이었다. 그냥 전방으로 간다고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대대본부를 거치고, 중대 본부를 거쳐 다시 소초로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소초에서는 앞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진짜 고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다 만나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도 있었지만, 왠지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처음 소초에 들어갔을때, 가장 고참은 부산 사람이었고, 그 바로 밑에 있던 고참이 광주사람이었다. 왕고인 부산 사람은 내가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제대했다. 나는 화기분대 기관총 탄약수로 들어갔는데, 화기분대장이 바로 두번째 왕고였던 광주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나와 마주치면 매일같이 했던 말이 바로 '낮밥문냐?' 였다. 난 전라도 사투리를 하나도 몰라서 '낮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안그래도 어리버리하던 이등병시절, 천천히 또박또박 잘 말해줘도 긴장해서 두세번은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소리지른 후에야 비로소 고참이 무슨 말은 하는지 알아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낮밥문냐?'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세번째였던가 네번째였던가 계속 내가 못알아듣자, 결국 그는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퍽 치고는 '낮밥 무긋냐고?'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낮밥'이 뭔지 몰랐던 나는 계속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숙인 나를 내버려둔채 그냥 가버렸고, 나중에 다른 고참이 '낮밥'이 점심이라고 말해주었다. 낮밥, 이 쉬운 말을 왜 못알아들었을까?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고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났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가방 2011-04-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향이 경상도, 남편은 전라도거든요.
결혼해서 한동안은 시어머님 말씀을 남편이 통역해줘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답니다.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은 웬만한 사투리는 다 알아들어요..^^

근데 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통화를 하시면...서로 네~네~만 하시다 끊는답니다.
시어머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친정어머니는 시어머니 말씀을 하나도 못알아 들으셨다더군요..ㅋ

저도 낮밥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요.
남편오면 물어봐야겠네요...^^

감은빛 2011-04-13 15:23   좋아요 0 | URL
사투리라는게 그래서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같은 나라에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거 신기하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조차 말예요.

낮밥이란 말 생각할수록 간단명료하고 좋은 것 같아요.
조기 시에서 '오져해한다는' 표현도 전라도 사투리더라구요.

책가방 2011-04-14 01:00   좋아요 0 | URL
(오지다)에 대한 일화도 있답니다.
경상도에서의 (오지다)는 (고소하다, 샘통이다)등의 뜻으로 쓰인답니다.
그런데 전라도에서의 (오지다)는 (든든하다, 알차다)등의 뜻으로 쓰이더군요.
첫아이 낳고 친정에 있을 때 시부모님이 오셨었는데...
그때 시어머님이 친정엄마께 "아들딸들이 많아서 오지겄소" 하셨다는...ㅋ
친정엄마는 당황해하시면서도 침착하게 "네~그렇지요" 하시더군요.
나중에 나를 통해, 나는 남편을 통해 그 (오지다)의 뜻을 알고나서는 오해가 풀렸답니다...^^

감은빛 2011-04-14 03:2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일화네요!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 잘 아는데요.
'오지다'는 그닥 좋은 뜻이 아니거든요.
어머님께서 무척 당황하셨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신중하게 잘 대처하셨네요.

재미있는 사례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굿바이 2011-04-1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져해하고 있는데" 저 문장을 읽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

감은빛 2011-04-13 15:2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찾아보니,
역시 사투리더라구요.
표현이 참 좋아요.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4-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경상도 지방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동기며, 고참들 말을 대체 하나도 알아 듣기가 힘들더라고요. 사투리가 꽤 심한 동기의 얘기는 제대할 때까지 늘 반만 알아듣고, 대강 흘려 듣던 기억이 납니다.

10년만에 만났는데, 잘 풀려 있더라고요. 꽤 부럽기도 했지만, 그 친구가 준비한 시간들이 꽤나 의미 있는 것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어떤 고참은 제게 괴롭혀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일도 보내기도 했는데 감은빛님 페이퍼 보니 막 생각이 나네요 ㅎ

감은빛 2011-04-13 15:25   좋아요 0 | URL
군생활을 경상도에서 하셨군요.
저는 경상도 사람인데, 강원도에 있었어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시나봐요.
저는 군대와 관련된 사람은 모두 연락이 끊긴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따라쟁이 2011-04-1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심 먹어야겠어요. 갑자기 막 배가 고파지네요

감은빛 2011-04-13 15:25   좋아요 0 | URL
뭐 맛난 거 드셨나요? ^^

2011-04-13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4-1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낮밥'이 점심이라, 저도 군대에서 주요 대사가 '잘 모르겠습니다.' 였는데 감은빛님도 비슷하셨군요. 저는 예전 커피숍 근무 시절에 나이든 손님들이 '엽차'를 달라고 하셔서 이게 도대체 무슨 차인가 메뉴판에도 없고 한참을 헤맸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그냥 맹물이었다는 사실에 어찌나 황당하던지 ^^ 암튼 '낮밥'이 점심밥이라 단어가 멋지네요. 감은빛님의 군대 추억도 그렇구요. 아!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감은빛님은 글 잘 쓰시는게 확실합니다!

감은빛 2011-04-14 02:30   좋아요 0 | URL
네, 이등병때는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

'엽차'라는 단어 참 오랫만에 들어보네요.

축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제가 글을 잘 쓰는 건 아니구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원한 청춘 2011-04-1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밥이라는 말은 저도 처음 듣네요. 엄마가 전라도 분이시지만 저희엄마도 모르시는듯.ㅋㅋ
감은빛님은 낮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렇게 군대시절을 떠올리겠네요.
멋진 글 잘 보고 가요~

감은빛 2011-04-14 02:32   좋아요 0 | URL
아마 전라도 중에서도 지역마다 단어나 뜻이 다르겠지요.
경상도도 그렇더라구요.
부산 바로 옆에 있는 김해는 부산말과 완전히 다른 억양과 단어를 쓰거든요.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1-04-1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전라도 며느리 돼서 '낮밥'이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낮밥과 더불어 '식은밥'도 생소했는데, 그건 충청도의 '찬밥'이란 걸 알아들었지만...ㅋㅋ
'오지다'는 말은 광주살이 20년 넘으니 저도 곧잘 씁니다.^^
그리고 전화 통하를 끝낼 때 '들어가라~'는 말,
처음엔 '들어가긴 어디로 들어가!' 하면서 웃었는데, 이제는 나도 쓴다는~~ ㅋㅋ

감은빛 2011-04-14 02:34   좋아요 0 | URL
'식은밥'이란 단어도 있군요.
'오지다' 조기 위에 책가방님께서 알려주신 사례가 굉장히 재밌네요.
경상도에서 '오지다'는 사실 좋지 않은 뜻이거든요.

'들어가라'는 말, 서울 사람들도 많이 쓰던데요.

양철나무꾼 2011-04-1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남편은요,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를 해서 평상시엔 전혀 못 느끼는데...
한번씩 부모님이랑 전화통화를 할때 보면 '오지게' 사투리를 써요.

이 '오지다'는 말은 연애 6년, 결혼16년 만에 깨친 것들이구요~^^

감은빛 2011-04-15 05:06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에는 사투리를 거의 안쓰지만,
(억양에는 살짝 남아있다고 하더라구요.)
가족들이나 고향친구들과 전화(혹은 대화)할 때는 '오지게' 쓰게 되던데요. ^^
 

소를 웃긴 꽃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 문학동네



2008년 어느날 그를 처음 만났다. 광우병 수입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살면서 가장 많은 시인들과 함께한 날이었다. 그 날은 <삶과 문학> 출판기념식이 동대문 어느 식당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대부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가인 <삶과 문학> 동인들이 이십여명 모여서 식사를 하고 책의 출간을 축하했다. 그리고 다같이 촛불집회 장소인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작가회의 소속의 다른 작가들과 합류했다. 행진대오가 행진을 마칠 즈음 작가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소설가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시인이었다.

그 날 윤희상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무척 겸손하고 점잖은 모습의 그는 몇몇 작가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디론가 갔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내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처음부터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별로 말을 나누지 않고 옆에 있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몇 마디 말들로 나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노점상연합회에서 나눠주는 순두부가 맛있다고 꼭 먹으라고 내 손을 잡아 끌고 가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매일 밤 촛불집회에 나와서 밤을 새고 아침 해장국을 먹고 출근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 보다 한참 선배뻘되보이는 어느 시인이 그에게 이제 그만 밤새고 집에서 가족들도 좀 돌봐야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쌓아지던 순간에도 그가 최초로 신문 기자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떤 시를 썼는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윤희상이라는 이름을 내 머리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늦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그와 나는 둘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계속 나에게 시를 써보라고 했다. 나는 뭐라 대답을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성명서는 좀 써봤고 이런저런 잡다한 글들을 조금 써봤지만 과연 내가 시를 쓸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글쎄 나는 시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시가 의외로 쉽다고 계속 나에게 시를 권했다. 왜 그랬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를 잊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느 저녁 촛불집회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고,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고, 잠시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나에게 뭔가 말을 건넸던 것 같은데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인삿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제서야 그의 시를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시집을 구입했다. 그의 시는 내가 그에대해 느꼈던 첫인상만큼이나 좋았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세상만물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부러워졌다! 이런 멋진 사람과 잠시나마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몹시 기뻤다. 시를 써보라는 그의 제안은 워낙 시에 대해 문외한이고, 또 시적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생각때문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다른 글들을 꾸준히 써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글이 안써질때마다 그가 내게 들려준 말들이 생각난다. 한번 쓴 시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하루에도 여러번씩 고쳐쓴다고. 그렇게 수십번을 고쳐쓴 다음에야 시를 완성한다고. 하나의 시를 쓰는데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문득 소를 웃겨버린 그가 보고싶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1-03-29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으니, 얼마전 뵜던 '소와 함께 여행하는법'이 생각나네요.

저도 님이 시랑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언어를 고르는 센스도 그렇고, 언어를 극도로 응축시키는 힘도 그렇고 말이죠~
'가장best'인건 의도하지 않은 감동인데 말이죠~

윤희상님이 낯설어서...그만 주제 넘었습니다~^^

감은빛 2011-03-30 12:46   좋아요 0 | URL
아유! 주제넘다뇨? 무슨 말씀을!

윤희상 시인이 워낙 강하게 권하길래, 이후로 시를 좀 찾아 읽었는데,
저는 시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읽으려는 생각중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곱네요. 담백하구요.
저두 소랑 함께 웃어버린 그런 시네요.
그런 분을 아시게 된 감은빛님이 부러워요. 진짜루
감은빛님이나 윤희상님 같은 분들과 막걸리 진하게 먹으며 하루 거나하게 떠드는
그런 저녁이 소원이었거든요. ^^ 저야 항상 전산 하는 친구들과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들만 해대서, 걸죽한 자리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감은빛님의 시도 볼 수 있는건가요? 그럼 전 시인을 알게되는거네요? 와!

감은빛 2011-03-30 12:49   좋아요 0 | URL
저도 마녀고양이님과 함께 막걸리 진하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 나누고 싶네요! ^^

저는 시랑은 인연이 안되는 것 같아요.
시보다는 산문 쪽이 좀더 잘어울리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꿈꾸는섬 2011-03-2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희상님의 시를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소를 웃긴 꽃, 너무 좋으네요.

감은빛 2011-03-30 12:50   좋아요 0 | URL
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반딧불이 2011-03-3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시인을 함께 얻으셨군요.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에요. 감은빛님의 글도 시처럼 따듯해요.

감은빛 2011-03-30 12:51   좋아요 0 | URL
흔치않은 일이죠.
무척 소중한 만남이고, 감사한 인연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3-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쓰신 글이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굳이 나눌것은 아니겠지만 시를 쓰시는 분들은 조용하고, 겸손한 분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요. 한편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속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단단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렇게 시인도 만나 얘기를 나누시는 감은빛님. 좀 부러워지려고 하네요 ^^

감은빛 2011-03-31 13:48   좋아요 0 | URL
문학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주변에 시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등단한 사람들, 등단 준비중인 사람들, 그냥 취미로 쓰는 사람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은,
나중에 워낙 다양한 시인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희석되었습니다.
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겠다 싶은 생각.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바람결님 말씀처럼, 나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4-0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쓴 시를 수 없이 고쳐쓰고 내보내기 까지 노고하는 것은 소의 되새김질처럼 느껴지네요. 씹으면 씹을수록 좋은 시가 나오나 봐요. 소도 여물을 자꾸 씹어 먹으면 건강에 좋듯이 말이죠. 리뷰를 쓸 때 급하게 나오는데로 써 버리는 경우가 전 많아요. 감은빛님의 글을 잃으면 저도 좀 되새김질을 하면서 써야하지 않을까란 사색을 해요. 후훗 원래 못 쓴다고 하는 분들이 더 잘 쓰던데..예전에 나 공부 안했어라고 시험날 말하던 친구가 시험 잘 보듯이 말이죠. ㅋㅋㅋ 시가 아니더라도 많이 많이 써주세요. 전 재밌게 읽고 있으니까요.

감은빛 2011-04-04 14:33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많이 생각하고, 되새김질 해본 글이 좋은 글이 되더라구요.
하지만 저도 늘 급하게 나오는대로 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유가 없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밑천이 별로 없어서, 더 생각해보고 싶어도 나올게 없기도 하구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루쉰님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루쉰P 2011-04-04 23:13   좋아요 0 | URL
흠...그렇게 급하게 쓰시는데도 이런 좋은 글이 ㅋㅋㅋ 좀 만 생각하시면 시 쓸 수 있으실 듯 화이팅!!

따라쟁이 2011-04-0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저를 미소짓게 하는 감은빛님.. 이라는 시를 써볼까요?
고운글입니다. ^^

감은빛 2011-04-05 13:13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이야말로 늘 저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
고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5-09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소를 웃긴 꽃을 만나는군요. 윤희상 시인 님 참... 좋죠. 마침 저도 이 시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리뷰를찾다가 여기 잠시 앉아서 읽습니다.. 후후..

감은빛 2013-05-10 17:1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참 옛날 글에 댓글을 주셨네요.
덕분에 저도 잠시 옛글을 읽어봤습니다.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겸허해지는 순간

오월햇살


네 엄마를 분만실로 들여보내고
문밖에서
겁 많은 네 엄마의 불안을 주워 담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네가
노래 못 부르는 것은 나를 닮지 말고
뽀얀 속살은 네 엄마를 닮았으면 하다가도
저어기
네 엄마의 신음소리가 들릴때면
여자이기보다는 남자이기보다는
예쁘다기보다는 선하다기보다는
그저 너와 네 엄마가 건강하기를
햇살처럼
들풀처럼 건강하기를
병원 복도를 동동거리는 동안
창 밖엔
오월 햇살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한주 /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 / 삶이 보이는 창 


시의 제목이 '오월 햇살'이다. 우리 둘째도 햇살이 따뜻한 오월에 태어났다. 첫째때 충분히 기다렸다가 병원에 갔다고 생각했는데도, 병원에서 진통을 열시간이나 했던 기억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준비물을 챙기고, 큰 아이의 손을 붙잡고 함께 집을 나섰다. 첫째도 같은 병원에서 낳았는데, 지금 집에서는 차로 이십여분 걸리는 거리다.(첫째때는 걸어서 이십여분 걸리는 곳에 살았다.)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을 향했다. 아내는 첫째때 아무 준비없이 산통을 겪으며, 무척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탁틴맘'이란 곳에서 임산부 요가도 하고, 호흡법을 비롯한 여러가지를 미리 배워놓고,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5년전에 비하면 제법 느긋한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나는 주로 애를 챙겼다. 큰 애는 동생이 태어난다는 아주 중대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좁은 개인별 대기실에 짐을 풀고, 큰 애에게 동생이 나올 일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겉싸개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간호사가 집에서 갖고 오라고 했다. 5년 전에는 그 병원에서 겉싸개를 준비해줬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챙겨오지 않았는데, 그새 방침이 바뀌어서 이제는 병원에서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는 얼른 집에 다녀와달라고 했다. 큰 애를 그냥 둘 수 없어서 함께 데려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차가 조금 막혔다. 서두른다고 애를 썼는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겉싸개와 한두가지 물품들을 찾아들고 집을 나서서, 택시를 잡으러 큰 길로 향하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나를 집으로 보낸 그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쯤 오고 계신가 물었다. 나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한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분만이 시작되려 한다고, 서둘러 오라고 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큰 애를 어깨에 들쳐메고 뛰었다. 꼭 급할 때는 택시가 잘 안잡힌다. 서둘러야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을 볼텐데, 아빠가 도착해야 탯줄을 자를텐데, 아내가 힘들때 내가 손을 잡아줘야하는데, 빨리가야 할텐데. 자꾸만 속이 탔다. 겨우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께 짧게 설명을 드리고, 최대한 서둘러 주십사 부탁을 했다. 기사님은 택시만이 가능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달리셨다. 덕분에 약간 차가 밀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큰 애를 들쳐메고 뛰었다. 분만실로 달려가니 나에게 전화를 했던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곧 나올것 같다고 서둘러 수술가운 같은 옷을 입혀주었다. 큰 애 손을 잡고 들어가니, 이미 아기 머리가 반쯤 나온 것 같았다. 다 되었다고 원장선생님께서 아내를 다독이고 있었다. 재빨리 아내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주었다. 곧 아기가 태어났다. 간호사가 아기를 아내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곧이어 나는 탯줄을 잘랐다. 큰 애는 분만실 입구쪽에 정신없이 멍하게 서있었다. 아차! 급하게 서두르다보니, 큰 애에게 신경을 못썼다. 큰 애를 안아주고 동생이 태어난 일에 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두번째는 좀 잘할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일로 이번에도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진통을 오래겪지 않았고, 아내도 아기도 모두 건강했다. 하마터면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을 못볼뻔했지만(그래서 그 간호사는 자기 책임이라 생각하고 엄청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그것도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 그리고 아래는 첫째가 태어나던 순간에 대해 기록해놓은 글이다. 예전 블로그에서 옮겨왔다. 

오늘은 아내가 열시간이 넘는 진통 후에 아이를 낳은 날이다. 즉 우리 아이의 생일이다! 아마도 예정일이 지났던 것 같다. 아내는 거짓말처럼 예정일에 진통을 느낀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가진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진통이 오기 전 단계였다. 가진통으로부터 대략 이틀(아마도 워낙 정신이 없을때였기에 그런지 정확한 시간이 기억이 안난다!)쯤 지나서 진짜 진통이 왔다. 아내와 나는 여러차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다가, 아내가 이젠 가야한다고 확신하자 대충 짐을 싸들고 병원을 향했다.

마침 당시 우리 동네에 아기와 산모를 위해 작은부분까지도 신경을 많이 써주기로 유명한 병원이 있었다. 나야 그런 것 하나도 모르지만, 아내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 병원이 곧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보통 사람 걸음으로 걸어서 대략 2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가 그냥 천천히 걸어서 갔다. 아내는 걷는 게 자연분만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걸어가면서 우리는 유명한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10월의 마지막 날'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얘기하며 웃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내가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장모님과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달려왔다. 진통이 심해지자 아내는 소리를 질러대며 내 손을, 팔을 그리고 내 머리칼(딱 한번)을 쥐어뜯었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미리 무슨무슨 호흡법 등등을 배운다고 하던데, 아내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진통이 오면 그냥 소리를 질러대고 이를 앙다물고 그 고통에 맞섰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병원이 떠나갈 지경이었다. 나와 아내의 친구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썼지만 아내는 홀로 죽을만큼 아프다는 고통을 이겨나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 그 기분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집에서 처음 진통을 느낀 지 열시간이 넘어섰다. 아내는 점점 더 빨라지는 진통에 죽을 듯이 괴로워했다.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는데, 그제서야 간호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호흡법을 알려주고, 어디에 어떤 느낌으로 힘을 줘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진통은 오래했지만 요령이 없어서 아직 자궁이 하나도 안열렸다고 했다. 간호원은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호흡법을 알려주며 '아빠'가 함께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점점 더 진통은 빨라졌고, 아내와 나와 아내의 친구는 아주 열심히 간호원이 알려준 호흡법을 따라했다. 아내는 여전히 아프긴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호흡법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다시 간호원이 오더니 곧 분만이 시작될 것 같다고 분만실로 옮겼다. TV나 책에서 보면 분만할 때 남자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초조해하면서 기다리던데, 나는 분만실에 함께 들어갔다. 이 병원은 남편이 곁에 있도록 하는 방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아내를 격려하기도 하고, 요령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내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아내와 아이가 별 탈이 없기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거의 다 되었다고 조금만 더 힘을 주라고 의사 선생님이 재촉하고 격려하기를 여러차례. 마침내 아이가 이 세상으로 나왔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원은 아이가 나오자 아빠가 탯줄을 자르라고 했다. 워낙 긴장하고 있던 터라 뭘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허둥대는데, 간호원이 시키는대로 움직여서 간신히 탯줄을 잘랐다. 간호원은 아이를 깨끗한 천으로 감싸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모습으로 맹렬하게 울고 있었다. 잠시 아이를 간단히 씻겨서 깨끗한 배냇저고리에 감싸서 엄마에게 안겨줬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서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삼일 동안 아내와 나와 아이는 병실에 있었다. 다른 아빠들은 아이가 태어난 날과 다음날 정도만 쉴 수 있었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나는 한 달동안 육아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잠을 자거나 젖을 빨거나 울거나 했다. 한 밤중에 깨서 울면 아내는 젖을 물렸고, 젖을 다 먹은 아이를 잠시 바람을 쐬주기 위해 내가 안고 나와서 병원 복도를 거닐었다.

작고 여린 생명을 안고서 나는 어쩜 이리도 작을까 신기해하고 또 신기해했다. 아이에게 뱃속에서 목소리로만 들었던 아빠를 실제로 만난 소감을 물어보기도 하고,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랑 함께 등산도 가고, 축구도 하고, 여행도 가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곳에 태어나게해서 미안하다고, 네가 크면 아빠와 함께 좋은 세상 만드는 일을 함께 하자고 얘기해주기도 했다.

지금도 팔에 그리고 가슴에 그 조그만 아이를 안았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이자, 아이의 생일이다. 아이를 위해서도 축하해야 할 날이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아내를 위해 꼭 기념해야 할 날이다! 마침 금요일이다! 일중독에서 하루쯤은 벗어나서 뭔가를 해줘야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1-03-24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아이 모두 탯줄을 직접 자르셨군요. 겁나서 못하겠다고 하는 아빠들도 많다던데.
아이가 태어나던 날은 그 아이 본인만 기억못할뿐, 아이 엄마에게도 그리고 아빠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지요.
그 고통을 견디며 낳은 아이들이 벌써 자라 소리 지르며 뛰어 노는 모습을 보면 문득 뭉클해질 때가 있어요.

감은빛 2011-03-28 13:04   좋아요 0 | URL
잊을 수 없는 날이지만, 해가 갈수록 사소한 일들은 자꾸 잊게되더라구요.
저는 애들이 태어난 당일 일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 이후 며칠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잘 기억이 안나요.

커가는 아이들보면 문득 뭉클해질 때가 있죠! 공감합니다!

첫눈 2011-03-2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않고 실감나게 기록을 하시다니..
부인되시는 분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눈물을 흘리실것 같네요.
보는 저도 마음이 뭉클할 정도에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글에 가득 담겨있네요.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감은빛 2011-03-28 13:05   좋아요 0 | URL
이렇게라도 써두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스트레인지러브 2011-03-2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무엇보다 아이의 출생순간을 기록하신 건 대단한데요.

그 아이에게 물려줘도 충분히 자랑스러울 그런 기록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없이 소중해지는 그런 글 같네요.

감은빛 2011-03-28 13:06   좋아요 0 | URL
이렇게 적어두면, 나중에 들려줄 때 참고가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3-2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결혼을 하지 못해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뭔가 따뜻하고 가슴이 벅차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네요.^^ 저도 제 아이가 태어난다면 어떤 기분일지 참으로 기대가 만땅이에요. 그래도 다짐하는 건 아이들에게는 좀 인간다운 사람으로 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많아요. 아! 정말 좋으시겠어요.^^

감은빛 2011-03-28 13:07   좋아요 0 | URL
아이에게 자신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냥 아이가 있는그대로의 아빠를 받아들일거예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3-2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둘째를 아직 낳지 못해서 이런 멋진 글을 남편에게 선물 받지 못했을까요?
아님, 울 아들은 꽃 피는 5월이 아닌 쓸쓸한 10월생이어서 그럴까요?
곡우님도 그렇고, 님도 그렇고...아내와 아이를 무한감동시키시는 분들인 듯~^^

감은빛 2011-03-28 13:10   좋아요 0 | URL
저희 첫째가 10월의 마지막 날 태어났어요.
절대 잊어버리지못할 생일이 되었죠.(이용의 노래와 함께~ ^^)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3-2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진통하면서 승질나서 신랑을 병실에서 쫒아냈던 기억이 있어요.

그나저나, 첫째 아이가 동생의 분만을 보고 좀 놀랐겠는데요.
탯줄을 자르셨다니 멋지십니다. ^^ 어쩐지 마음이 따스해지는 글입니다.

감은빛님 페이퍼로 예전 그 순간을 되새겨보는데, 무서워서 두째는 꿈도 못 꾸겠어요. ㅋ
하두 고생하면서 낳아서 말이죠~

감은빛 2011-03-28 13:15   좋아요 0 | URL
병실에서 쫓겨난 아빠 이야기 굉장히 재밌을 것 같은데요. ^^
네, 첫째가 동생 태어나는 장면을 보고 많이 놀랐던 것 같아요.
미리 얘기도 많이 들려주고, 그림책도 보여주고 했는데,
역시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은 비교할 수가 없는 듯!

아내도 너무 힘들었다고, 절대 둘째는 안 낳을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첫째가 많이 자라버리니까,
다시 조그만 아기가 그리웠는지, 둘째를 갖기로 했죠. ^^
 

작업복 팬티


공장 탈의실 옷걸이에 낡은 깃발처럼 걸린 누런
팬티는, 주조 공장 성철이 일할 때 갈아입는 작업복
팬티다. 새 팬티 입으나 누런 팬티 입으나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쇳가루 흙먼지투성이 될 게 뻔하다
고, 자주 빨아도 아무 소용 없다고, 아무렇게나 걸
어 둔 성철이 작업복 팬티다. "성철아, 그래도 불알
과 자지는 쇳가루 흙먼지 못 들어가게 잘 닫아 둬
라. 사용자 잘 만나서 토끼 같은 새끼도 낳아야 하
고······." 아침부터 누런 팬티 하나 쳐다보며, 우린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또 웃어도 마음이 아프다.


서정홍 / 58년 개띠 / 보리


내게도 작업복 팬티가 있었다. 흔히 노가다 혹은 막노동이라고 말하는 건설현장에서 그날그날 일을 할 때였다. 대학 다닐때 용돈이나 좀 벌어버려고 친구 따라 한두번 갔던 이후로 혼자 살면서 생활비가 딱 떨어져서 라면 하나, 담배 한 갑 살 돈 조차 없어지면 며칠씩 막노동을 해서 밥 값을 벌어오기도 했다. 대게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들은 새벽에 집을 나올때부터 허름한 옷에 다 떨어져가는 운동화를 신고 오기도 하지만 비교적 젊은 층의 사람들은 작업복과 신발을 따로 가방에 넣어와서 현장에서 갈아입었다. 물론 여름에는 너도 나도 여벌옷을 두세벌씩 갖고 다닌다.

혼자 살면서 세탁기도 없어서 일주일에 한번씩 몰아서 빨래를 하곤 했는데, 손빨래를 두시간씩 하고나면 기진맥진하곤 했다. 빨래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옛날 마을 빨래터에 아낙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면서 서방 흉보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던 심정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암튼 빨래가 귀찮았던 나는 어떻게든 빨래를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했다. 막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옷이 정말 더러워진다. 그냥 더러워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옷이 빨리 상해서 오래입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유행이 한참 지나서 더이상 안 입는 옷, 오래 입어서 아주 낡은 옷 등이 작업복으로 선택된다. 이건 속옷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일을 하고 오면 속옷도 평소보다 훨씬 더 더러워지고 빨리 상한다.(아마도 소금기가 많은 땀에 푹 절어 있어서?) 시인이 잘 표현했듯이 깨끗이 빨아도 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막노동을 나갈때만 입는 팬티를 낡은 것들 위주로 서너벌 정해놓고 입었다. 이른바 작업복 팬티인 것이다. 나는 성철이처럼 아예 빨지 않은 것은 아니고 서너벌을 갖고 교대로 입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훈련 나가서 일주일씩 속옷을 안갈아입고 버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면 적어도 그런 경우를 보거나 얘기를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나는 유난히 팬티를 자주 잃어 버렸는데, 빨아서 널어놓으면 없어지곤 해서 처음에 7벌을 보급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 데, 자대에 배치 받은 이후로 3벌 이상을 갖고 있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상병을 달고 두어달 쯤 지나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만 하게 되었을 때, 무슨 훈련을 나가게 되었는데, 일주일을 야외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내가 가진 팬티가 단 두벌 뿐이었다. 하나는 입고 하나는 여벌로 군장속에 챙겨넣고 훈련을 떠났다. 훈련중에는 빨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팬티를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여벌이 하나 밖에 없으니 한번 갈아입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훈련 중에 입을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부대 복귀후에 빨래를 하고 마를 동안 입을 것도 고려해야 했다. 훈련중에야 더러운 팬티를 입고 있어도 원래 훈련 중에는 그런 것이니 참을 수 있지만, 부대로 복귀한 이후에도 더러운 팬티를 입고 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되도록이면 비교적 덜 더러운 상태의 팬티를 입고 복귀하고 싶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처음 입었던 팬티로 최대한 버텨야 했다. 3일인가 지났을 때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지금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뒤집어 입는 것으로 스스로와 타협을 하고 하루나 이틀만 더 버티기로 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정말 갈아입고 싶은 욕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부대 복귀 행군은 죽을 만큼 힘들게 뻔했고, 그때 (땀때문에)팬티가 굉장히 더러워질 게 분명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복귀 행군을 시작할 것이다. 이틀만 더 버티면 부대로 돌아가서 깨끗한 팬티를 입고 잘 수 있었다. 그날 낮잠을 잘 때 팬티를 벗어서 햇빛이 잘 드는 나무가지에 걸쳐 놓았다. 한시간쯤 후에 깨어나서 쨍쨍 내리쬐는 햇살에 빠짝 말라서 살균까지 된 뽀송뽀송한 팬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복귀 할때까지 일주일 동안 팬티를 한번도 갈아입지 않고 단 한벌로 계속 버텼다. 햇빛에 말리는 방법은 도저히 팬티를 입고 잘 수 없어서 그냥 한번 벗어서 널어놓았을 뿐인데, 의외로 효과가 굉장했다. 그래서 다음번부터 훈련때마다 그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뒤집어입기와 햇빛에 말리기만 적절히 잘 이용하면 훈련내내 비가 오거나 눈이 오지 않는 한은 오랫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않고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아마 여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일 것이다. 만약 아내가 결혼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직도 혼자 살고 있지 않았을까? 
 


 

 

 

 

 

 

  

 

※ 예전 블로그의 글을 살짝 다듬어서 옮김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2-1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비역으로써 팬티 이야기, 공감할뿐더러 추천을 안 할수가 없네요 ^^
야외 훈련 나가면 속옷 갈이 입을 시간이 마땅치 않기 마련이죠.
유격 훈련 때 FM으로 속옷 몇 벌을 군장 안에 담아넣지만 정작 훈련장에 가면
못 입게 되죠, 결국에는 군장을 무겁게 만드는 쓸데없는 보급품인거죠 ㅎㅎ
그리고 훈련의 고단함 때문에 속옷 갈아입을 기회가 분명히 있음에도
막상 갈아 입기 귀찮아지기도 하구요 ㅎㅎ
읽는 내내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웃으면서 읽었네요 ^^

감은빛 2011-02-11 19:23   좋아요 0 | URL
하하! 공감하셨다니 반갑습니다.
저는 속옷이 충분했다면 되도록 갈아입는 편이었습니다.
글에도 적었지만, 자주 잃어버려서 늘 절대빈곤에 허덕였지요. ^^

잘잘라 2011-02-11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얘기는 보통 "내 친구 얘긴데요" 이러면서 시작하는거 아녜요? ㅎㅎ
대놓고 고백하시니까,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저도 쫌.. ㅋㅋㅋㅋ

그나저나 58년 개띠가 유명하긴 유명하군요.
내용은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전설의 오팔년 개띠' 아닙니까!!!
기를 받아서 올해도 열심히 뛰어볼랍니다. 멍멍!

감은빛 2011-02-11 19:24   좋아요 0 | URL
뭐 이정도 얘기를 굳이 남 이야기로 둔갑시킬 필요는 없지요. ^^
혹시 띠가? 오팔년 생은 아니신 것 같은데.... ^^

양철나무꾼 2011-02-11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실비실 웃으면서 공감과 추천을 날리면 되는건가요?^^
전 직업상 온갗 종류의 팬티를 다 보는데, 노 팬티도 보고...
보면서 가장 눈시울이 뜨거운 건,엄마들 지퍼 달린 팬티예요~

감은빛 2011-02-11 19:26   좋아요 0 | URL
직업상 온갖 종류의 팬티를 다 보신다니!
어떤 직업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의료계통에 종사하시나요?
지퍼달린 팬티는 그럴 것 같네요.

무해한모리군 2011-02-1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구절을 읽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작업용 옷은 가져보았지만 속옷은 생각도 안해봤네요..

언제나 노동의 과정과 결과물의 괴리는 늘 놀라워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아이스크림 공장은 엄청덥고,
삐까번쩍 차도 누런팬티 아저씨들이 만들고..

감은빛 2011-02-11 19:28   좋아요 0 | URL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데이트가 있거나, 뭔가 특별한 날엔 좋아하는 속옷을 입고 싶다던가.
그런 의미에서 옷이 쉽게 더러워지는 작업을 할 때는
속옷도 거기에 맞추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괴리로 먹고 사는 자본가들에게 화가 나지만,
그들은 그런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겠죠!

아이리시스 2011-02-1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작업복 팬티.. 겉옷만도 아니고 팬티나 런닝이 시꺼매져 있음 속상해요.
몸으로 부딪쳐 현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다들 그렇잖아요.

ㅋㅋ, 너무 재밌어서 계속 웃고 있어요. 아하하.

감은빛 2011-02-11 19:29   좋아요 0 | URL
재미있으셨다니 그리고 제가 잠시나마 웃음을 드렸다니 다행입니다! ^^

따라쟁이 2011-02-1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 82년 개띠..(이런 댓글이나 달고.. ㅠㅠ)

감은빛 2011-02-15 12:51   좋아요 0 | URL
앗! 여기서 나이를 공개하시다니!
82년이 개띠였군요. 그러고보니 올해 딱 서른이신가요?
좋은 나이로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