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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의 그림자 : 전통건축, 그 종의 기원
- 서현 (지은이) | 효형출판(출판)

: 어지간해서는 포스팅 제목에 부제까지 그대로 쓰는 경우는 없는데, 이 책이 어떤 책이냐는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저 제목과 부제라고 생각해서 모두 써 봅니다. 특히 저 '그 종의 기원'이라는 부분이 그렇네요.

이 책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건축가가 쓴 전통 건축에 관한 책'이라는 데 있을 겁니다. 아무리 학식 높은 전문가라고 한들, 그 현장에 있는 사람만큼 그 분야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간호사를 이야기하며 '나이팅게일'이며, '백의의 천사', '사명감' 같은 단어는 진부하고 현실과 백만광년 떨어진 뜬구름 잡기식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무리 저명한 일반 여자 사회학자라고 한들 군대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고찰은 사회학을 전공한 직업군인(...이런 사람이 있다면요...)이 쓰는 군대 문화보다 깊이가 얕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건축가가' 쓴 '전통 건축'에 대한 '대중 교양서'라는 데 있습니다.

1. '건축가'의 '전통건축' 이야기
- 이 책은 철저하게 건축 공학적인 면에서 전통 건축에 대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용자의 편의성도, 미학적인 부분도 일차적인 고려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치타가 인간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날렵한 몸매와 화려한 무늬를 가진 게 아니듯, 전통건축이 일정한 양식을 가지게 된 데에는 반드시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때문에 이 책에는 '버선의 코와 같고, 여인의 치맛자락과도 같은 처마의 우아한 곡선'이라거나 '배흘림기둥의 곡선미'와 같은 말은 일절 등장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건축가의 시선에서 '이 건물은 왜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 아닐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만들 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용성'입니다. 미학적인 부분은 그 다음의 문제가 됩니다. 먼 훗날 후대의 후손들이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이상과 중력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이며' 운운하면 우리는 그 후손(놈)의 뒷통수를 퍽 후려치며 '이놈아, 땅값은 비싼데 인구는 더럽게 많으니 차곡차곡 포개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전통건축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현대의 우리는 전통건축을 '관광지'로, '유물'로 바라보지만, 그 당시의 건축이 이것을 멋드러지게 지어서 훗날 유물로 남겨주겠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했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살기 위해, 혹은 안에서 일을 하기 위해 건물을 짓듯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건축은 그러했겠죠.

이렇게 마치 생물이 필요에 의해 진화하여 현재의 모습을 띄듯, 전통 건축 역시 필요에 의해 진화하여 발전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생물들이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가장 진화에 최적화된 모습인 것처럼, 지금까지 남아있는 전통 건축 역시, 적자생존의 법칙애 따라 가장 최적화된 모습의 건축들만이 남아있다는 것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건축들은 모두 무너지거나 파손되었거나 혹은 중간중간의 보수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을테니까요.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이제 왜 이 책의 제목이 '전통건축, 그 종의 기원'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제게 이 점이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일단 원시적인 움막(원두막)의 형태부터 시작된 건축이 어떻게 현재 남아있는 기와집 형태의 건축이 되어가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동안 많이 접한 미학적인 관점에서 건축을 바라보는 것보다 이렇게 '공학적인' 이유가 더 그럴듯해 보이거든요. 생각할수록 더더욱요. 63빌딩이 일반적인 아파트처럼 통으로 된 직육면체 건물이 아니라 유선형을 띄게 된 것은 미학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보다는 공기 저항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2. 전통건축에 대한 '대중 교양서'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죠. 저 구슬이 컨텐츠라면 실은 저자의 문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꽝이라면 읽고 싶지 않은 것처럼요. 읽히지 않는 이야기가 뭔 소용이 있을까요? 이 책은 굉장히 쉽고 흥미롭게 씌여진 책입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예를 드는데, 지붕과 처마를 설명하기 위해 우산의 예를 든다거나 포작을 설명하기 위해 바이올린의 브릿지를 예를 드는 건 특히 기억에 남네요.

아무리 어렵고 전문적인 개념이라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만 있으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책은 제가 처음 읽은 건축학 관련 저서인데도 쉽게 이해하고, 지루해질만 하면 한 챕터가 끝나서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읽기 쉬운 대중서를 만난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죠. 생소한 분야를 하나 더 알 수 있으니까 말예요.

 

이제 고궁이나 전통 건축을 볼 때, 혹은 고미술을 볼 때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이 살짝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 처마의 우아한 곡선은 실은....'이라면서 아는 체도 좀 해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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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sunset 2012-06-1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 훗날 후대의 후손들이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이상과 중력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이며'"란 부분이 재밌네요. 잘 읽고 갑니다.

이카 2012-10-28 13:39   좋아요 0 | URL
거진 5개월만의 답글이네요. 제가 매번 상품에서 바로 리뷰를 올리는지라 댓글이 달린 것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대중 입문서를 좋아합니다. 이 책은 제가 직접 구매한 것은 아니고, 이 책이 너무 좋다면서 아는 언니가 선물로 줘서 읽게 되었는데 건축 양식의 기원부터 굉장히 재미있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에요. 지금 보니 벌써 이 책은 절판이던데, 이런 책이 보다 널리 읽히지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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