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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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있는 이야기에, 마지막으로 갈 수록 눈을 뗄 수 없는 서사를 지닌 좋은 책입니다, 다만 흠이 있다면 번역이지요. 특히 초반의 번역은 자칫 좋은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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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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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설픈 힐링 서적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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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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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신의학을 공부하다보면 꼭 한 번 마주치게 되는 이름이죠.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의 책이라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숙연해졌던 책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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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홀로 죽는다
한스 팔라다 지음, 이수연 옮김 / 씨네21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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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이 전 인류적 사건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험은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인간의 광기가 어느 정도까지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경험은 전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러했고, 그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역시 그러하다.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들에게도 그 당시 있었던 끔찍한 인종 청소와 폭력의 상처는 대물림되어 이어지고 있다.
 
 이 당시에 있었던 일들은 늘 내 관심을 끌어왔다. 아우슈비츠 등 각종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며, 전쟁의 끔찍한 참상같은 것들. 전쟁에서는 살짝 비켜나 있더라도 겪게 되는 궁핍합, 그리고 그 속의 인간애 같은 것들. 그런 이야기들에는 늘 히틀러니 괴링이니 괴벨스니 하는 독일인이 등장하고, 독일이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정작 그 당시 일반 독일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일에 대해서는 크게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범국가의 사람들이 '나도 힘들었소'라고 말해봐야 당시 존재 자체로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들에 비할까. 

 "나와 내 총통 각하라고?" 갑작스런 그녀의 공격에 압도된 그가 당황한 듯 웅얼거렸다. "왜 갑자기 '내' 총통 각하라는 거야? 나는 당원도 아니고 단지 노동전선에만 속해 있을 뿐이잖아. 그리고 노동전선에는 누구나 가입해야 하는 거고. 그 사람을 뽑았던 건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딱 한 번 뿐이라고."(pp.17-18)

 이 책은 그래서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하의 독일에 대한 독일인의 저항을 그린 책이기 떄문이다. 여기 지극히 평범한 한 노동자 부부가 있다. 원래 가구 장인이었던 오토 크방엘과 그의 아내 안나 크방엘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독일인이었다. 나치 당에 투표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들도 나치당에 한 표를 더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당시 독일인들처럼 아들을 전쟁에 내보냈고, 지극히 평범한 부모의 마음으로 빨리 전쟁이 끝나 아들이 그들의 품에 돌아오기를 바랐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나라와 국가와 인류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오늘 별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치당에 투표를 한 것도, 노동전선에서 직분을 맡은 것도 그것이 옳아서라기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한 것에 가까웠다. 그들의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가차없이 비난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건, 나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신혼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가볍게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 전쟁이 나면'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그럼 돌아오지 말아야죠'였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물론, 내 전 재산과 내 가족과 친구들은 이 나라에 있지만, 최소한 국외에 있으면 나와 내 남편의 목숨은 건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내가 매국노에 치사하다는 말을 다 뒤집어쓰고 말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 속에 빠뜨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오토와 안나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대세'를 따라서 투표를 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동전선에서 직분을 맡고. 다 그런 거지.

 그런 평범한 일상에 하나의 비일상이 끼어든다. 전장에 나갔던 오토와 안나의 아들, 오토헨이 전사한 것이다. 이 일로 부부는 나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저항을 시작하게 된다. 오토와 안나가 처음부터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안나는 오토헨을 위해서, 그리고 오토는 안나를 위해서. '뭔가 이건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엽서에 메시지를 적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건물에 놓아두는 것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당시 독일 사회, 그 자체였다. 홀로코스트 소설을 보면 종종 독일인인 척 하는 유태인 등이 나오는데, 사실 독일인이라고 하더라도 소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독일인의 삶 역시 비참했다는 점이다. 물론,  유태인처럼 아무 이유 없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약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독일인에게도 자칫하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죽을 거라는 공포가 있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의 누군가가, 오늘 아침 인사를 한 바로 옆 집의 사람이 게슈타포의 끄나풀일 수 있다는 것. 그들은 항상 그것을 인식하며 살고 있었다. 술 취해서 자칫 말실수라도 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일단 어떻게든 누명을 쓰면, 게슈타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바로 위 층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도 차마 함부로 창문을 열어 확인하지도 못하는 공포, 그 공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런 삶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포에의 지배가 어찌나 일상 속에 파고들었는지, 이전에는 그런 공포 없이 지냈을 사람들이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듯 살고 있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하긴,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전두환이며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일 아닌가. 

 어쨌거나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고, 276통의 엽서가 베를린과 그 외곽지역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 엽서 중 18통을 제외한 258통은 발견된 즉시 게슈타포의 손으로 들어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엽서를 발견하자마자 그것을 제대로 읽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로 신고를 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18통조차 대부분은 찢겨버리거나 태워지게 된다. 오토와 안나의 엔딩 역시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발각되고, 투옥되어, 죽게 된다. 사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이후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 덤덤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처음에 유태인 부인을 도와주었고, 이후 오토와 안나를 도와주고자 했던 이웃집 판사 역시 폭격 속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작가는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툭, 하고 이야기를 한다. 적어도 난 그 18통 중 몇 통은 살아남아 누군가 한두 사람 정도는 생각을 바꿨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렸으며, 이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뭐 그런 이야가 나올 거라고 마지막까지 기대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장이 끝날 때까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소설은 오토와 안나, 그리고 그들에 얽인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에서 끝을 맺는다. 적어도 소설 속에는 그 엽서는 거의 누구에게도 거의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엽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박사님! 에셰리히 경감이 내가 쓴 엽서 285통 중 267통이 자기 손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순간 놀라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딱 열어렵 통만 찾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 열여덟 통도 별 효과는 없었어요!"
"그걸 누가 알아요? 그리고 크방엘 씨는 최소한 악에 저항했습니다. 같이 악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후략)." 
"그래요, 그리고 곧 목숨을 잃겠죠. 그렇다면 우리의 저항이 누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겁니까?" 
"우리 자신에게요, 우리에게 많은 소용이 있죠.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의로운 인간이었다고 느끼게 될 거니까요. (중략) 우리는 모두 각자 행동해야 했고, 모두 따로따로 잡혀 들어왔고, 모두 혼자 죽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중략)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는 바로 우리이기 대문에 이 길을 걸어야 했던 겁니다." (pp.640-641)

 이런 죽음도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저항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소위 말하는 '개죽음'이고 '헛고생'인데도? 소설은 그렇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저항 그 자체라고, 최소한 자신이 인간임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옳은 일은 그것이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옳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저항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사회가 그래도 이렇게 유지되고 더 나은 곳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밀그램의 실험을 떠올렸다. 65%가 그저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 사람에게 아주 위험한 수준 이상으로 전기충격을 가한 그 실험 말이다. 65%라는 숫자에 '대부분 그렇지 뭐'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권위에 저항한 35%가 있었음에 주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35%의 사람들의 저항이 쉬운 것은 아니다. 저항은 늘 어렵다. 거의 언제나, 저항보다는 순종하는 편이 편하다. 생각해보면 독일인이라고 해서 저항이 쉬웠을 리 없다. 오히려 비-독일인의 경우 지금보다 나빠질 일이 없기에 저항하는 것 외의 방법은 남아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공포에 떨 지언정 목숨은 보전할 수 있고,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더 나아지기는 힘들어도, 최소한 당장 하루하루는 나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누구도 행동하지 않으면, 그 침묵을 타고 공포는 퍼지게 된다. 

 공포에 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도 자신이 목숨보다 큰 것을 걸 수는 없고, 공포에 저항한다는 일은 곧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 행동이 크든 작든, 행동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숭고한 일임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누구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않았다. 극적인 판결도, 극적인 종전도 없었다. 오토와 안나는 사형을 당하고, 이후 일은 나오지 않는다. 그 엽서는 표면적으로는 어떤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오토와 안나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한 작가에게 발견되었고, 그 작가는 그것을 소설로 만들어 현재에 이야기한다. 현재 오토와 안나의 믿음대로 히틀러의 세상은 무너졌다. 그리고 그 일에는 수많은 오토와 수많은 안나의 행동이 분명 기여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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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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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동아리 오빠 Y는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카야, 너는 인문학도는 못 되겠다. 너는 텍스트와의 거리가 0이구나" 뭐, 이런 말이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텍스트와의 거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과서를 읽거나 문제를 푸는 학습이 아닌, '독서'를 할 때는,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서 읽어내리곤 합니다. 그것은 영화를 볼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공연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를 할 때 저는 텍스트에 흠뻑 빠져들고,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습니다. 대상에의 몰입이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코의 이 책은 그런 몰입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합니다. 초반은 굉장히 넘기 어렵고, 생소한 이름이 마구 나오는데다가 잠깐만 집중력을 잃으면 도대체 어디까지 읽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이 책을 교과서를 대하는 기분으로 읽을 때에서야 이 책은 제게 문을 조금 열어주더군요. 제 스스로 마감시한을 정해놓고 읽어내리지 않았다면, 이 책은 책장에 꽂힌 채 잊혀져가는 그런 책이 되었을지로 모를 일입니다.

 

 이 책은 기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작은 기만에서 점점 커 가는, 결국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는 기만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에코 할아버님께서 어찌나 허구와 사실을 버무리는 솜씨가 일품이신지, 자칫하면 정말 이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마지막까지 오고 나면, 어째서 이 책이 그토록 화제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의심스러워지곤하니까요. 음모론, 이것은 참 매력적인 소재란 말입니다.

 

 보고 나서 어째서 작가는 이런 소설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눈에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이런 사실 뒤에는 사실 이러저러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일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해서 fact처럼 느껴지는 그 '사실'을 한 번쯤은 의심해 보라는 경고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써 놓으면 이 책은 한도끝도 없이 지루하고 진지한 글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모니니의 적의 가득한 시선은 오히려 그렇기에 우스꽝스럽기까지합니다. 물론, 이게 에코 할아버님의 책이다보니 웃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실제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코식 유머가 아닐까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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