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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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문화인인 척 해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말초적인 것에 끌리는 동물이던가. 연예계 스캔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나라고 해도 그것이 내가 가쉽거리에 쉬이 동요되지 않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연예계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기 떄문이겠지. 만약 당장 함께 일하는 옆 사람이 어떤 스캔들 같은 것을 일으켰다면 누구보다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주절주절 사설을 늘어놓는 건, 사실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서였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문동 세계문학전집 40% 세일 기간에 뭘 살까 하고 목록들을 보다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1991년 작.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루며 그 서술의 사실성과 선정성 탓에 출간 당시 평단과 독자층에 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다.' 라는 출판사 소개 글에 끌려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래 줄줄이 달린 이 책의 평이 굉장히 좋았다는 것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나는 이 책에 세 번 놀랐다. 먼저 책의 두께에 놀랐다. 이 책은 지금 내 책장에 꽂힌 책 중에 가장 얇은 책이고, 심지어는 어지간한 노트보다도 얇은 느낌이다.(샘플북만한 얇기다.) 이미 모 출판사 덕분에 의외로 책 두께가 생산 단가에 미치는 영향이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한 얇기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 문장에 놀랐다. 문장은 굉장히 쉽고, 단순하다. 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면 동화책 다음으로 읽을만한 책이 이 아니 에르노의 책이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녀의 문장은 단순하고, 짧고, 명확하다. 번역자를 괴롭히는 언어유희나 복잡한 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읽고 나서는 그 깊이에 놀랐다.

 보면서 '우와, 이거 좋은데!'라고 느끼게 하는 책이 있다면, 볼 때는 정작 아무 생각도 없지만, 보고 나서 '그 책 정말 좋은 책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도 있는데, 이 '단순한 열정'은 후자에 가까운 책이다. 분명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선정적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선정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게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녀간의 성행위를 보여주지만, 그 내용 자체는 황당하리만치 말도 안 되는 포르노물같은 그런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런 현실성이 이 책안에 있다. 책을 읽으면 사랑에 휩쓸려버린 한 여자의 마음이 고통스러우리만치 생생하게 현실로써 다가온다.

 게다가 그 문장이라니! 난 처음에는 작가가 자신이 겪었던 일, 그 일을 통해 생각한 것들, 그 일과 관련된 느낌을 일기 쓰듯이 가볍게 써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기에 책 두께 때문에 살짝 빈정상한 것도 있어서 '이런 글로 잘도 작가가 되는 구나'라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단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문장이, 그리고 그 문장이 묘사하는 상황이 말이다. 물론 훨씬 세련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블로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이별 관련 글과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찬탄으로 변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가 문장을 얼마나 고치고 또 고쳤는지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 '쉬워보이는 문장'을 쓰기 위해 계속해서 문장을 쓰는 작가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문장이 모여 만들어진 글은 또 어떻던가. 작가는 지금의 그 글만을 남겨놓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문장을 버렸을까. 단순해 보이는 문장이 모여 만들어진 단순해보이는 글이건만, 원래 100이던 문장의 90을 날리고 꼭 필요한 문장만 남겨 100이상이 농축된 10을 남겨놓은 것 같은 그런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면 어떻게 이런 평범해 보이는 사랑 글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를 위해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삼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p.28)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pp.66-6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 하나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사랑 부분은 말이다. 사랑은 사람을 존재하게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힘이다. 사랑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을 더욱 철저히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생명이고,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강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한 순간들은 바로 내가 어떤 존재에 강하게 몰입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라, 사랑하던 존재들과 만났던 것만큼 이별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난 단 한 번도 그 순간들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 날 살아있게 했고, 내 삶의 순간 순간들을 더없는 열정과 반짝임으로 채워줬으니까. 사람들이 작가의 글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순간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떄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도리어 질투였다. 작가가 느낀 순간 순간은 곧 그만큼이나 무겁고 짙은 삶의 순간들이었다. 생애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 삶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또한 단 한 사람이라도 이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읽고 나서 사랑은 그 어떤 경우라도 축복이라던 한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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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박찬일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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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우연히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내가 계획해서 가는 여행이라고 해도 그 여행은 결국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혹은 우연히 듣게 된 정보, 당시 받을 수 있는 휴가 날의 최대 일수, 그리고 당시 가지고 있는 자금 등으로 인해 여행지는 결정되지 않던가. 어쩌면 내가 선택한다고 했던 것과 달리, 그 나라가 그 때 그 나라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 이건 좀 막 나갔나.

 어행은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혼여행으로 간 장소는 그 사람에게 평생 특별한 곳이 될 것이다. 내게 이탈리아가 꼭 그렇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도 이탈리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그 나라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보곤 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금도, 내게 이탈리아는 그리움과 추억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에 이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첫 페이지에 이 책이 있었는데, 내 눈에 다른 책들이 아니라 이 책만 딱 와서 꽂힌 것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라니! 이건 누가봐도 이탈리아 요리 이야기 아니겠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이탈리아 중에서도 시칠리아라는 작은 섬의 한 주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시트콤들을 써 놓은 책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쏙쏙 박아놓은 게 꼭 웹툰 '오므라이스 잼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요리나 요리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래서 더 좋았던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요리를 가벼이 다루거나 잡다한 신변잡기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요리에 대한 진지함이 그대로 녹아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는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하지 않고 그저 전화통을 붙들고 배달받는 미슐랭급 스타 요리사를 경멸했으며, 멀리서 수입한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기계화되는 재료의 역사를 슬퍼했으며,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분노했으며,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진짜 요리사가 되려면 시장과 들판을 알아야 해. 오징어와 참치가 언제 올라오는지, 토마토가 가장 잘 익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하지. 식당에 앉아 전화통 붙잡고 손가락만 써서는 절대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없다구. 좋은 재료는 요리의 전부야"


 주인공이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에 낄낄거리며 웃다가도 섬세함이라고는 백만광년쯤 떨어져있을 것 같은 마초냄새 물씬 풍기는 오너 쉐프가 툭툭 내뱉는 '요리 철학'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곤 한다. 특히 내게 인상깊었던 것은 좋은 (돼지)고기를 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오너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었다. 직접 고기가 될 돼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이름 있는 돼지'를 최고로 친다는 말에는 순간 갸웃했지만, 이내 그 뜻을 알고 나면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이름 있는 돼지'는 제주도 흑돼지나 '**읍 ***돼지'같은 브랜드가 아니라 '꿀꿀이'니 '꽃순이'같은 이름을 붙여 가족이 정성으로 키운 돼지란다. 이렇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애지중지하는 돼지에게 아무거나 막 먹이고, 아무렇게나 대하겠냐는 거다. 한 손에는 그 돼지를 해체할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15년은 살 녀석이 2년만에 죽었다고(그나마도 오래 산 거라나) 슬퍼하는 마초 쉐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시트콤의 한 장면인데도 어쩐지 숙연해지는 면이 있다. 그래, 이것이 이탈리아의 식문화다. 이미 저자가 이 책을 쓰는 2009년에는 이탈리아도 많이 자본화되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그래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이탈리아다. 

 나는 그리움과 함께 이 책을 덮었다. 

덧 - 좀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명사들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이딸리아로, 파스타는 빠스타로 표시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낯선 느낌이 드는데, 장담하건데, 그 불편함은 첫 에피소드를 넘기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게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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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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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형태의 만화책 - 그러니까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는 형식말이다 - 은 영 익숙치가 않다. 지금까지 시도해서 겨우 끝까지 본 그래픽 노블은 '브이 포 벤데타'정도였는데, 그나마도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서야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의 줄거리가 흥미로운데다가 평이 좋길래 이번에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칸 영화제 최고의 상인 '황금종려상'을 탄 영화 'Blue Is the Warmest Color'의 원작이라는 이 이야기는 주인공인 클레망틴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클레망틴이 죽으며 유언에 따라 애인인 엠마가 클레망틴의 집에 하룻밤 머물며 클레망틴의 일기장을 받게 되며, 독자는 엠마와 함께 클레망틴의 청소년기와 그 이후의 삶에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차근차근 보게 된다. 클레망틴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 문제는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였던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차분히 읽어보면, 작가가 얼마나 섬세하게 이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메세지를 담아놨는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이 책을 읽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용이 난해한 것도 아니고, 이 그리 두꺼운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꽤 평범한 내용이고, 뭔가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쩌면 이 책을 나처럼 호의적인 리뷰나 평을 보고 접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방해 요인은 호의적인 평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각종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져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평범한(?) 사랑 이야기와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은 사뭇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버리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나 아까운 이야기며, 책을 두 번 읽고 난 지금은 바로 그 '평범함'이야말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동성애가 요즘 익숙한 화제이고, 그 익숙함을 넘어 영화나 드라마, 예능 등 각종 매체에서 동성애 코드를 삽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지만, 아직도 여전히 동성애는 자극적인 소재인 게 맞다. 동성애자가 '존재하고', 그들도 우리(여기서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가 되겠다)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아직 한국은 동성애자들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라고 생각한다. 정말 사람들이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는 게 왜 여전히 모험이 되며 왜 내 주변에서는 스스로 내가 동성애자라고 나서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느냔 말이다. 

 그 분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수 밖에 없겠네요. 
 제가 남자였더라도 클렘은 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요.

 .....그만 두자. 그런 식의 논리를 펴서 결론이 나는 법이 없지.

 책 소개도 그렇고,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소개도 그렇고 이 작품을 '동성애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고들 이야기하는데, 그렇게만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을 반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점이 이 작품의 훌륭한 점이기도 하다. 분명 작가는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평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만난 이후 서로의 생각에 안절부절 못해 하는 것도, 서로 오해도 하고 화해도 하는 모습이라거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평범한 (이성애자) 사람들의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코 '대다수의' 사랑일 수가 없다. 소수자의 사랑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공포와 두려움, 부정, 분노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클렘(클레망틴)이 엠마와의 관계를 부모님께 들키고 난 이후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은 집안에서 반대하는 사랑을 하다가 쫓겨나는 것과 유사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점은 이후 엠마와 클렘의 갈등 부분이다.

 엠마에게 그녀의 성(性)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공적 자산이다. 사회적, 정치적 자산.
 하지만 내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것이다.
 엠마는 나의 이런 생각을 비겁함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저 행복해지려고 애쓸 뿐이다.
 (중략)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엠마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동성애 관련 사람들을 만나 예술 활동을 하고, 자신의 성을 하나의 ...뭐랄까...일종의 사회적 자아로 삼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클렘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나중에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타인 앞에서 거리낌없이 드러내지도 않는 인물이다. 둘 중 어떤 방식의 삶이 더 낫다는 그런 이야기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런 방식도 있고 저런 방식의 삶도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둘의 이런 관계는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이 부분을 어찌나 작품 내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는지 감탄이 나온다. 리뷰를 쓰기 위해 검색을 해 보다가 작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다지 놀랍지 않았달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읽어봐서 후회될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이왕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면, 책꽂이에 꽂아두고, 언젠가 다시 눈길이 이 책 위에 머문다면, 다시 한 번 뽑아서 차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보이지 않던 이야기를 들려줄테니까. 내게 이 책이 그렇게 해 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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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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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이하 엘릭시르판)'는 제가 애정을 가지고 수집하는 시리즈입니다. 그런 엘릭시르에서 이번에 <구석의 노인 사건집>을 냈다는 걸 알고는 환호하며 당장 주문했었지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전의 '동서 미스터리 북스(이하 DMB판)'를 통해 봤을 때 상당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더욱이 새로운 번역에 예쁜 표지로 만난다는 것도 좋지만, 목차를 비교해봤을 때 겹치는 이야기가 의외로 없었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 더 좋지 않겠어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기본 등장 인물은 단순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만 해도 홈즈에 왓슨에 레스트레이드에 마이크로프트에 모리어티 교수같은 고정 등장인물이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고정 인물은 딱 둘입니다. 구석의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이자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폴리 버턴'은 '메리'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여기자입니다. 그리고 종종 폴리를 만나 이런저런 사건 이야기를 해 주는 '구석의 노인'이 있지요.(이 노인의 이름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폴리는 ABC 카페에서 기묘한 노인을 만나 미궁으로 빠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후 폴리는 지속적으로 노인을 만나면서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되죠.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구석의 노인' 그 자체입니다. 오히려 사건은 평범해 보이고 트릭도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엘러리 퀸이 구석의 노인을 가리켜 '최초이자 가장 뛰어난 안락의자 탐정'이라고 했다지만, 작중 노인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안락의자 탐정같지만도 않아요. 검시 배심에 참여한다거나 (아주 가끔이지만) 경찰에 접촉하기도 하거든요. 이야기들에는 거의 돈이 얽혀 있고, 몇 편 읽다보면 대충 다음 사건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 가능합니다. (1)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사건이 발생 -> (2) 특정 인물이 유력 용의자가 됨 -> (3) 이후 밝혀지는 증거들로 인해 이 인물이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남 -> (4) 사건은 미궁 속으로.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패턴대로 진행됩니다. 게다가 일단 설정 상으로 구석의 노인이 폴리에게 이미 끝난 사건을 회상하고 그 범인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범인과 대치한다거나 증거를 모으기 위해 조사를 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노인의 추리는 거의 정황증거나 심리적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구석의 노인이 탐정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노인에게 사건의 추리는 지적 유희에 가까우며, 경찰의 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범죄자의 편에 가깝습니다. 

 "나는 공권력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한 범죄자들을 보면 오히려 공감이 가거든."
 - <펜처치 스트리트 수수께끼>, p.15 

 * 이하 스포일러 포함 * 
 
 이런 노인의 캐릭터는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불어넣습니다. 홈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건 이상의 매력을 불어넣듯이('세 명의 개리뎁'에서 유명한 건 그 사건 자체나 트릭이 아니라 홈즈와 왓슨의 이야기인 것처럼!), 노인과 폴리의 대화는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은근히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범죄자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범죄자이기도 한 구석의 노인과, 그가 범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음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그를 만나는 폴리나 둘 다 '상식'에서 벗어나있기는 매한가지지요. 엘릭시르 판에서 이 둘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편은 바로 <메이다 베일의 구두쇠>입니다. 이 단편의 초반부는 엘릭시르 판에 수록된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 둘의 관계를 생동감있게 보여줍니다. 폴리가 자신을 재수없어 하는 걸 알면서도 도리어 그걸 즐기는 노인과 그 노인의 뺨이라도 쳐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특종'의 냄새를 맡고 살살 웃어가며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폴리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죠.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이 둘이 안 지도 벌써 20년이 넘은 시점이기 때문인지 폴리가 노인을 능숙하게 조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노인과 폴리는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노인은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폴리는 기사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건도, 노인도, 폴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것, 바로 책의 '편집'에 훨씬 신경이 쓰이더군요.

 이 소설은 각 단편 속의 '사건'이 노인과 폴리 사이의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셜록 시리즈처럼 탐정과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또 크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아예 전집으로 내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 가에서 편집자의 생각이 많이 개입되는 게 느껴집니다. 

 범죄자에 보다 가까운 노인이 직접 범죄를 저질렀음을 암시하는 사건은 총 두 번 나옵니다. 1~3권 중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판 제목)'과 3권의 마지막이야기인 '황무지 사건'이죠. 3권의 시작은 2권 마지막 사건을 기준으로 20년 후라고 설정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출간 년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 중 어떤 사건을 편집본에 넣을지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책의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먼저 DMB판은 과감하게 3권의 내용은 빼버리고 1~2권의 내용 중에서 14편을 뽑았습니다. 그간 DMB 시리즈의 번역이나 구성을 봤을 때 일부러 그랬느냐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도 들지만, 이렇게 구성했을때의 효과는 확실히 충격적입니다.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 판 제목)'은 DMB판에서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으로 나오며, 이 때 처음으로 노인의 범죄가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됩니다. 그리고 1~2권에서 14편을 뽑은 만큼 노인과 폴리의 관계도 확실히 더 자세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노인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폴리는 카페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노인을 찾고, 노인도 폴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앉아 사건 이야기를 하며 사적으로 친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를 쌓아가다가 마지막 사건에서야 폴리는 문득, 그 사건의 범인이 노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 이후 노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나게 되는 구성은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가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결성이라거나 결말의 인상 면에서는 DMB판의 압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 엘릭시르판은 1~3권에서 총 13편의 이야기를 수록했으며, 그 중 1~5편은 1~2권에서, 6~13편은 3권에서 뽑았습니다. 이런 구성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는 반면에 약점도 가지게 됩니다. 얼핏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 같은 구성이었달까요. 실제로 구석의 노인 사건집 단행본 3권이 나온 시기는 각각 1905년, 1909년, 그리고 1926년입니다. 작중 설정에서와 같이 약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이 시간만 봐도 세 번째 단행본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실제로 단편들을 읽어보더라도 원래 작가는 3권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참고로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전략) ... 하지만 나는 그늘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내 눈에는 보였다. 가느다랗고 천재적인 손가락들이 노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매듭을 하나씩 묶어가는 모습이. 그리하여 내가 지금껏 보아 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훌륭한 매듭들이 나오는 모습이.
 마침내 나는 말문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눈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제가 영감님이라면 노상 노근을 매듭짓는 버릇을 버리겠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보니 구석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구석의 노인을 만나지 못했다.  

 -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 p.169

 아무리 봐도 전 작가가 이 단편을 전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편집자의 고뇌는 시작되는 거죠. 현재 시중에 번역된 DMB판과 차별도 둬야 하고, 그러면서도 뺄래야 뺄 수 없는 사건들은 넣어야겠고, 차별성은 둬야겠고.... 그래서 현재의 구성이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최대한 미번역된 3권의 내용을 다루되, 1~2권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뽑아가는 형태로요. 그러다보니 좀 기묘한 구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이미 DMB판을 통해 구석의 노인의 사건들을 접한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3권의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다가옵니다만, 책 자체 완결성이랄까...이런 것은 확실히 DMB판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솔직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5권에서 노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좀 뜬금없게 느껴지고, 이후 아무렇지 않게 20년 후에 천연덕스럽게 나타나는 장면이나 그런 노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폴리의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구석의 노인 사건집 1/2로 분권해서 1권에는 1~2권의 내용을, 2권에는 3권의 내용을 실었으면 보다 나았으리라 싶지만, 여기에도 나름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지요. 1~2권으로 분권을 해서 냈을 때 수지타산을 맞출만큼 팔리느냐의 문제도 있겠고요. 그래도 특히 이 책은 편집을 신경써서 했다는 게 물씬 느껴지는 한 권이었습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에서 지금까지는 유일한 단편 모음집이라서 그런 걸까요. 각 이야기 뒤에는 ABC 카페 이야기며 홍차 이야기며 검시 배심 이야기며 깨알같은 정보들을 실어서 작품 이해를 도와줍니다. 특히 단순한 재판인 줄 알았던 검시배심에 대한 정보는 유익하기도 하고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 정보였어요. 그리고 이 검시배심을 다룬 '오시리스의 눈'이라는 작품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어쩌면 이런 편집에 대한 이야기는 추리 팬의 투정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추리물을 많이 읽지 않는 남편은 이 책이 꽤 재미있다고 했으니까요. 구석의 노인은 여러 면에서 참 특이한 탐정(?)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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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3-11-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에서 발매된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는 마지막 중년여성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마지막 사건이 완결적인 내용이라 생각되네요 근데 이번에 발매된 책에서는 뜬금없이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뒤 다시 만나고 마지막 황무지 사건이후 다시 사라지는 것은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라 좀 어색한 내용이라 생각이 드네요 구석의 노인 단편집 좋아하는 지라 읽어보지 못한 단편들은 좋지만 이건 마치 홈즈가 살아돌아와서 다시 모리아티와 싸우고 죽는 꼴이라 홈즈의 마지막 인사의 결우는 영국을 위해 활약한다는 여지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이게 그나마 납득하는 이야기이지만 반복되는 결말이 어색한 작가가 어쩔수 없이 다시 글을 쓰고 마지못해 끝낸다는 느낌이라 좋은 책의 느낌이 죽는 기분이라

이카 2013-11-26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동서판을 먼저 읽어서 그런지 이 책의 편집방식은 이해가 되는 한편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재는재로님처럼 작가가 원래는 3권을 쓸 생각이 없다가 (독자의 요청인지 작가의 경제적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3권을 썼다고 생각해요. 3권은 좀 뜬금없이 시작하고, 역시 2권의 마지막과 같은 방식으로 끝나죠.

개인적으로 가장 완성도 있는 방식은 동서판과 마찬가지로 1~2권에서만 이야기를 뽑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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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 당신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분명 가방에 있어야 할 지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에서 분명히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방에도 없고, 책상을 털어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는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릅니다. 바로 옆의 짝꿍을 보니 그 친구가 수상해보입니다. 오늘따라 말도 없이 책상에만 엎드린 모습이 꼭 날 피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바로 한 시간 전 체육시간에 배가 아프다며 교실에서 쉬었는데, 그 와중에 훔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닐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어쩐지 자꾸만 께름직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밖에는 범인이 될 만한 상황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의혹으로 시작된 이 생각이 확신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에 관한 책입니다.

 주인공인 에릭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는 양호합니다. 아들 키이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있지만, 그 고민조차 '있을 법한' 평범한 고민들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의 딸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유력 용의자로 아들 키이스가 지목되면서 에릭의 가정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의심은 산(酸)이다. 그게 내가 아는 한가지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중략) 에어리언이 부식성이 강한 액체를 토하자, 그 액체는 순식간에 우주정거장의 한 층을 먹어 치웠고 차례로 다른 층까지 먹어 들어갔다. 내 생각에 그 액체는 의심과도 같았다. 의심은 아래로 내려 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자칫 이 책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던 허울이 벗겨지며 그 '실체'가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집요하리만치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에릭의 '의심'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절대 범인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의 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의심은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이 바로 가정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에릭은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에릭은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회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도 가게 문을 열고 사진을 인화하고 액자를 만드는 모습은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각에 정면으로 부딪치기 보다는 중요한 사실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정말 평범해서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할 법한 '경찰(혹은 탐정) 친구'도 없습니다. 그가 접하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며, 그렇게 접한 정보를 통한 추리 역시 평범한 사람이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탁월하게 '체험'하도록 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에릭의 시점에서, 에릭의 시야라는 제한 속에서 에릭과 같은 사고를 하게 됩니다. 때문에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에릭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에릭이 좀 더 자신의 아들을/가족을 믿었더라면'은 쓸데없는 가정이 됩니다. 의심은 종종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가족이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냐는 말은 쉽지만, 종종 우리 자신도 가족을 의심하지 않나요. 오늘 옷장에서 없어진 코트를 보며 동생이 무단으로 입고 나갔으리라는 의심과 에릭의 의심이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이후 아내도 아들도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족을 일부러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서로 소원한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빤한 문제를 덮어놓고 모른 척 한 적도 없고요. 지금까지 그냥저냥 평범하게 살아왔고, 평범하게 사랑했고, 평범하게 의심을 했던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 지극히 합리적이고 평범한 의혹에서 시작된 의심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

 결국 이 책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의심'입니다. 작가는 에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고 다를 수가 있느냐'고 말이죠. 때문에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과 결말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을 경험하는 에릭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행동이 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장르문학이라기보다는 장르문학의 형식을 빌린 순문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도 이야기의 힘은 바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말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문장의 완성도와 힘에 놀라며 다시금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책에 감탄을 하는 것은 비극적인 결말이 주는 묵직한 여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 비극에 이르게 한 에릭과 이웃들의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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