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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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테니의 글이 자주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자신과 딸의 관계를 아주 자연스럽게 갖다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대부분 설명이 길다 보면 지루하기 쉽고, 이해하기 좋게 예화를 주로 사용하다보면 깊이가 없기 마련인데 그의 글에선 그런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가 낸 책을 연이어 찾게 되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 입맛에 맞아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쉬운 만큼 폐부 속 깊이 다가오고 그래서 내 경우에 비추기 쉽다는 것인데, 비추인 순간 내 문제가 무엇인지 속시원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견과 그 해결점의 부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왜 내게 특정 문제가 도드라져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말 그대로 그 문제를 어디다 두어야할지를 아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난 자주 내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게 됐고, 그 문제를 들고 기꺼이 하나님 앞에 가져갈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가져 갈 수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본 문제는 늘 크고 무거웠다. 그런데 하나님 앞으로 가져간 그것이 왜 그리도 작게 보이는지, 보다 정확하게는 왜 내가 그런 하잘 것 없는 문제에 끙끙댔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며칠 전 어느 분이 내게 ‘대진표 바꾸기’라는 예화를 들려주었다. 「양치기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면 반드시 골리앗이 이긴다. 힘없는 모세가 바로와 싸우면 반드시 바로가 이긴다. 하지만 다윗과 모세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면 언제나 하나님이 이긴다. 이제부터 네 자리에 하나님을 두라.」 이 책, 『하나님의 관점』과 일정부분 연결되는 이야기다. 물론 『하나님의 관점』이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적 측면에선 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 책은 토미 테니의 전작, 『다윗의 장막』과 후작인 『간절한 매달림』과 마치 시리즈물처럼 엮여 있다. 아직 전작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후작과 이 책을 통해 나는 많은 영적인 통찰을 얻었다. 위 세 편의 책은 예배에 관한 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피조물에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에 관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세밀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불과 광풍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던 하나님이 세밀한 음성 가운데 나타난 성경의 예에서처럼 저자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무게감이 높다. 때때로 낱낱이 드러나는 나의 죄된 속성 앞에서 달아나고 싶다가도 이내 그런 마음을 거두게 된 것은 이 책의 그런 무게감 때문이었다. 가슴을 찍어누르는 말 앞에 어느 누가 섣불리 도망칠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막연한 공포나 어설픈 두려움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옳은, 그래서 내게 너무도 적절한 말이라는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수긍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교회에 나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자녀가 골칫덩어리인지 범생이인지 하는 배경지식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자녀를 바라본다. 그래서 언제든 자녀가 ‘그 모습 그대’로 달려오기만 기다린다. 그런데도 우린 자주 '내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모습을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듯 떼를 썼다. 그런 현재의 나를 하나님이 기다리는데도 한사코 나는 아니라고 외면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초대장을 쥐고서도 나는 그런 초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초대석상에 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의 간절함을 원한다. 저자는 그런 간절함이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어느 자녀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모습이 조금 더 나아지면 그 때 가겠다고 하는 나’와 ‘그러니까 난 아버지가 필요해, 하고 한사코 매달리는 나’ 중에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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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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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의 사신이 한자어 사신(死神)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이해하기 쉽게 그냥 ‘저승사자 치바‘라고 번역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괜한 수작을 걸었다. 그리곤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번역가의 입장에 서서, ‘그랬다면 전설의 고향 냄새가 났겠지’, 하고 기꺼이 두둔하기를 마지않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얼토당토않은 해프닝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해프닝을 들려주는 건, 처음의 나처럼 사신이라고 발음하는 즉시 떠오르는 심상을 근거로 이 소설을 전형적인 귀신 이야기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를 벗어 던질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뜻에서다.

난 이 책을 쉽게 펴들지 못했다. 선입견은 상상외로 거셌다. 당연히 재미없을 것이고, 또 당연히 무슨 유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한 꼭지를 읽고 난 뒤였다. 그렇게 똬리 튼 생각이 일거에 흩어졌다. 지면에 가득 드리운 안개가 때마침 내리쏘는 햇살에 온통 사그라지듯. 

사신 치바는,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곧 나를 긍정하기도 하고 때로 부정하기도 하는 ‘나’라고 생각했다. 속상한 일을 당할 때 또 다른 내가 나서서 나를 위로하지 않던가. 그까짓 것 잊어버리라고,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던 나. 그런 나를 사신 치바를 통해 보았던 것이다.

죽음이 임박한 여인의 상태를 점검하러 나온 치바가, 뜻밖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여인에게  기꺼이 ‘죽음 보류’라는 선물을 준 것을 보라. 삶의 의지는 운명마저 돌려세운다는 고전적인 해석은 적절치 않다. 차가운 사신에게서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사신이 표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인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오늘 사신 치바를 ‘아(我) 치바’로 부른다고 형용모순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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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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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 뛰놀기 바빴던 중학생 시절, 그래도 방학이라고 책 한 권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펼쳐든 책, 표지를 포함해 서너 장이 찢겨나간 터라 제목을 확인할 새도 없이 읽는 재미에 폭 빠졌었다. 세로줄 쓰기와 익숙지 않은 활자는 누가 봐도 단박에 윗세대가 구입한 책이란 걸 알려주었다. 아버지가 청년시절에 읽은 책이려니 생각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총 두 권 중 한 권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알고 얼마나 아쉬웠던지...... 아무튼 일본작가와의 첫 대면은 그렇게 이뤄졌다.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맞게 된 또 다른 일본작가. 감흥이 남달랐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렇다고 미동조차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게다. 80년대 전후 소설의 통속성에 넌덜머리가 난 후 소설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어왔으니 어느 작가의 책이라고 달랐으랴. 책을 받아든 순간부터 무척 낯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해 했던 그 날의 기억처럼.

창에 후다닥 부딪는 여름장마와 달리 옷깃이 날리는 걸 보고 존재감을 비로소 알게 되는 봄바람처럼 그저 잔잔하기만 한 이 소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읽히지 않으면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무료로 얻었으니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의무감이 앞선 탓이었다. 지금 생각이지만, 벌써 책의 반을 훌쩍 넘었다, 그런 종류의 이물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이 소설 안엔 정확히 집어낼 순 없어도 무언가 따뜻한 구석이 있다는 그 느낌 때문이었다. 어느 틈에 잔잔한 스토리 구도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던 걸까?

『중력 삐에로』는 전혀 다른 방식의 마력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만 우선 그걸 두고, 일본소설의 소설적 특성이라고 해두자. 

소설은 하루와 그의 형, 이즈미가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른 형과 달리 하루는 예술 영역에 조예가 깊을 정도로 극히 사색적이다. 어느 날 의문의 연쇄방화사건이 일어난다. 하루가 이즈미가 근무하는 회사에 방화가 있을 것을 예견한 후 형은 하루가 방화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하루는 벽에 형형색색의 스프레이를 이용해 낙서하는 그래피티 아트를 지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피티 아트가 그려지면 연이어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규칙성(룰)을 발견한 하루는 그래피티 아트에 쓰인 영문자가 방화사건의 단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것이 이즈미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형과 하루는 방화범을 잡기로 하고 그래피티 아트가 그려진 벽 뒤편으로 180도 범위 내의 빌딩 중 두 빌딩을 주목하고 각각 잠복에 나선다. 하루가 잠복한 빌딩에서 불이 일어났다. 빌딩 입구에 도착해 모퉁이를 돌아드는 순간 등을 돌리고 재빨리 사라지는 고다 준코를 발견하는데...... 그럼, 방화범은 고다 준코?......  다음날 이즈미가 고객의 DNA를 채취하기 위해 들른 고급 아파트에 고다 준코가 나타나고. 이제 사건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들 조짐을 보인다. 

출판사에 의해 현재 일본 문단에서 가장 각광받는 지성파 신예로 소개된 저자는 거대한 서스펜스나 반전을 철저히 배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소설 전체를 호수 중앙에 갖다놓고 파문 없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속도감을 잃은 소설은 때론 정지해 있는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유전자 염기 배열을 심심지 않게 배치하고, 두 문자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적 구성을 보이는 등의 특별한(?) 장치가 아니었다면 김빠진 맥주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함유된 오염물질을 흡입하기 싫다고 산소를 거부할 수 없듯이 어떠한 이유로도 벗어버릴 수 없는 엄연한 ‘일상’(주인공들의 입장에서야 어디 닥친 사건들이 일상이었으랴 마는)을 소설 전체에 깔고, ‘그러니 어디 한 번 읽는 걸 포기해 보시지’ 하고 위협하기로 작심한 듯 하다.

그런 정도의 위협이야 처음엔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도 책을 읽는 사이사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어서 그것이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쯤 눈치챌 수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방치한 건 전적으로 내 불찰이다. 그닥 감동스러울 것도 없고, 추리소설다운 강렬한 반전이라든지 단서를 좇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라든지 묘미 같은 것들을 전혀 내장하지 않은 이런 소설의 미덕이 무엇이라고 난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이 책을 밀쳐놓지 못했다. 치명적이지 않은 독, 하지만 장기 투약에 따른 사망마저 피할 순 없게 만드는 그 독을 기꺼이 마신 격이었다. 다 읽은 지금,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긍정(이와 유사한 구도의 우리 소설에 비하면 정말 밋밋하다)이 일고 보니 그야말로 어이없다. 정정해 말해두건대, 이 소설은 치명적인 독이다. 다시 또 저자의 소설에 접근할지도 모르겠다고 선언하듯 무장해제를 해버린 의식을 추스를 자신이 내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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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 고객에 미쳐라
케네스 블랜차드 외 지음, 조천제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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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 고객에 미쳐라. 긍정의 감탄사인 ‘암’이 아니네. 얌? 뭘까? 회사이름 치고는 어쩐지 어색하고 호칭이라고 하기엔 너무 튀는 이름. 경영서 치고는 독특한 서제(書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목을 끈 방편으론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내용만 받쳐주면 더할 나위없을 터.

이 책의 진가는 평가대상 기업과 외부 평가인, 곧 공저자 상호간에 일체의 포장을 배제하고 맨눈으로 기업내부를 관찰했다는 데 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공저자들 또한 당초 미사여구를 동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업 홍보원으로 전락하는 걸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고 보면 양자간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일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기업이야 좋게 쓰여지길 바랄 테고 저자들로선 그런 기업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철저하게 ‘날것’으로 드러내 보이길 바랐다면 그건 전적으로 기업경영, 구체적으로는 내부혁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모델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수준 높은 혁신을 이루어낸 기업적 성과는 때와 장소를 떠나 찬양받기에 충분하다.

직원을 인정하는 데서 혁신은 출발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일정부분 인정욕구를 갖고 있다. 그가 속한 조직이 적극적인 수용의사를 드러낼 때 그 개인은 조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높은 충성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조직의 입장에선 구성원에 대해 ‘인정’과 ‘배제’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조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얌이 구축한 ‘You Understand Me!’(당신이 나를 이해하는군요!) 는 고액제일주의의 선언이기 이전에 기업 구성원을 향한 일종의 구애와 같다고 할 것이다.

 

당초 ‘피자헛’과 ‘KFC’, ‘타코벨’은 점주와의 갈등과 내부정체, 수익저감 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사업부가 나락으로 떨어진 데는 무엇보다 직원들의 타성이 컸다. 모회사인 펩시코의 우산 아래에선 소비자의 니즈와 원츠에 발 빠르게 대응할 필요도, 그렇다고 수익모델을 창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펩시코가 이들 사업부를 분리하기로 한 결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빈들에 내몰린 이들 사업부에 회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노박은 달랐다. 먼저 직원들의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노박은 회사의 이름을 얌으로 바꿨다. 얌(YUM)은 위 영문의 두문자 조합이다. 기업의 직원에 대한 ‘인정’과 직원이 회사에 보인 ‘동일시’는 즉시 고객에 대한 태도로 나타났다. ‘고객 마니아’로 탈바꿈한 직원들은, 한낱 골칫덩어리였을 뿐인 이들 사업부가 전 세계적으로 3만 3천개 이상의 체인점을 거느리고, 종업원 84만 명을 고용하고, 연간 84억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하는 거대기업으로 재탄생한 현실을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

고객중심주의를 지향한다.


얌의 성공은 철저한 혁신에 있었다. 누누이 얘기돼온 자율과 권한위임의 효과를 교과서 속에만 가두어두지 않았다. 본사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프랜차이즈점의 의사결정권한을 비례적으로 늘렸다. 일선에서 발로 뛰는 직원들에게는 자율과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고객의 요구사항을 현장에서 해결토록 했다. 아울러 이러한 변화와 혁신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과 재교육을 병해 실시하고 필요한 마인드를 공고히 구축해갔다. 얌만의 고객중심주의는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그렇다고 얌이 보인 전사적인 체질개선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었으랴. 사실 부침을 거듭하는 기업 환경에서 어느 기업이라고 성공의 방법을 모르겠는가. 다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실천을 하긴 하지만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밀려났다고 하는 것이 옳은 진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락한 기업에게나 설립을 앞둔 기업들에게 얌은 몽학선생이라 할 수 있다. 고객중심주의의 철저한 실천만이 기업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얌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 『얌! 고객에 미쳐라』는 고객서비스의 지향과 근간을 근거리에서 정밀 관찰하고 있다. 아울러 고객이 목적하는 바와 같은 궤적을 그린 기업의 결과를 명백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책이 개인과 기업의 서비스 마인드 구축과 구체적인 실천에 두루 활용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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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옥루몽 1 - 대한민국 대표 고전소설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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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조앤 롤링이라는 작가의 출현은 환타지 소설의 부흥을 알리는 전조였다. 그의 작품 해리포터 시리즈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례적으로 작품이 나오기도 전에 출판 계약이 이뤄지는 진기한 풍경까지 연출됐다. 환타지 소설은 아이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보기 좋게 꺾어놓기도 했다. 그의 책을 앞다퉈 구입하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아류작의 출간이 줄을 이으면서 환타지 소설은 2000년대의 대표적 트렌드로 자리잡았고 환타지 소설은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 주요했다. 복지정책의 축소와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기조로 한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바야흐로 급물살을 탈 준비를 하고 있던 때가 바로 그 2000년을 고갯마루로 둔 1998, 9년경이었다. 세계는 모호하게 번역된 세계화, 곧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구호 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갖췄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기도 전에 그 안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양극화 현상은 그 부산물이었다. 양극화 현상은 의식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몽환의 추구가 현실 도피 수단으로 적극 차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환타지 소설은 시대적 상황과 요구에 부응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다소 둔탁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출판사측에 의해 고전 환타지 소설로 명명된 『옥루몽』 또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옥루몽』이 출현할 당시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의 질서가 유교적 통제를 바탕으로 공고하게 그 틀을 갖추고 있었으나 정파적 이해에 따른 당쟁의 격화로 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던 상태였다. 정치, 경제적으로 미래를 향한 동력을 상실한 사회는 반대급부적으로 현실 부정의 양상을 보이는 한편 그 수단으로 도피처를 찾기 마련이다. 고전판 환타지 소설이 태동할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때 『옥루몽』이 출현했으니 비록 한문으로 되어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만만치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등장인물에 대한 탄탄한 묘사와 빠른 극 전개가 읽는 재미를 더했을 것이다. 주 소비층이 누구였는지 기록이 없어 짐작만 할 뿐이지만 입소문에 힘입어 구전의 형태로 많이 읽히지 않았을까 싶다.

『옥루몽』구운몽과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고전 소설이다. 일부다처제를 암묵적으로 옹호하는 등 작품 안에 사회적 일탈을 내장함으로써 답답한 현실에 마스터베이션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인물의 비현실적인 행동을 미화함으로써 그 인물과 심정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는 등 현실도피적 환타지 소설이 갖춰야 할 미덕을 두루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전반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을 불교적 습속이 작품 곳곳에 녹아있는 점도 이에 한몫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주도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한층 높였으리라고 본다.

관음보살에게 발원하여 태어난 양창곡은 본래 선계의 사람, 문창성군이다. 싯구가 문제가 되어 인간세계로 내려온 문창성군은 16세가 되던 해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길에 오른다. 도중 강남홍을 만난다. 황제의 뜻에 반해 윤소저와 혼인한 문창성군은 유폐되고 만다. 곧이어 그곳에서 벽성선을 만난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문창성군은 황제의 주선으로 황소저와 혼인한다. 대원수가 되어 남방정벌에 나선 문창성군, 나탁과 맞서 싸우는데, 풀려난 나탁은 무릎 꿀 기색을 보이지 않고......(총 5권 중 1권의 줄거리)

이 책이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매끄러운 번역에 있다. 자칫 지루할 수 있을 한문투나 번역체 문장이 종종 드러내는 어순파괴 등 독해를 어렵게 만드는 제반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이라면 두 번째 미덕은 문장 구조를 짧게 가져감으로써 호흡이 길지 않아 읽기에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고전소설의 특성상 현대적으로 변용이 가능하지 않은 특정 한문 용어를 각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읽는 도중에 시선을 이동하는데서 오는 불편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각주를 책의 말미에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궁금증을 바로 해소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을 필두로 고전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를 바라며 후속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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