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오덕 일기 세트 - 전5권 ㅣ 이오덕 일기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평점 :
이오덕 일기1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14쪽(1962. 9. 21.)
공부를 못해서 시간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하루하루가 무거운 짐이 되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마음을 누르고, 그래서 천진한 품성마저 비뚤어지기가 보통이다.
20쪽(1962. 10. 23.)
내가 가르친 이 아이들만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조그만 벌레 한 마리도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늘도 내일도 이 아이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쳐 가르쳐야 되겠다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106쪽(1970. 4. 24.)
시키고 부리는 정치는 바로 이것을 노린다. 그대로 놓아두면 생각을 하게 되고 진짜 교육을 하게 되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 온갖 잡동사니 일을 지시하고 보고하게 한다.
257쪽(1973. 9. 8.)
권 선생(권정생을 말함)은 또 내가 <갑돌이와 갑순이>에 나타난 사회, 역사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점이 좋더라고 하고, 요즘 아동문학가란 사람들의 작품 보면 한심하게도 권력에 맹목적으로 달라붙거나 고속도로니 새마을이니 하는 것에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한심스럽다 했더니, “요 이웃에 어떤 할머니가 지난해 월남에서 아들이 전사한 통지서를 받고 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아이고 우리 **를 박 대통령이 미국의 강냉이가루하고 바꿨구나 합데다”했다. 참으로 요즘 많은 아동작가들은 이 무식한 시골 할머니한테 배워야 할 것 아닌가.
이오덕 일기2 - 내 꿈은 저 아이들이다
12쪽(1978. 5. 19.)
뿌리깊은나무를 찾아갔더니 인사도 안 했는데 모두 나를 알고 있었다. ... 그리고 내가 일본 사람 글 보고 더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가 했더니 "독자들로부터 편지는 더러 왔어요"했다. 기껏 그것뿐인가 싶으니 한심스러웠다. 서울 사람들 다 뭣하는가? 서울 한바닥에서 일본 놈이 그렇게 못된 큰소리를 쳐도 아무 말이 없다니! 일제 잔재를 발설한 그 수십 명의 지식인들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196쪽(1980. 8. 29.)
<서울신문> 컬러판이 왔는데 거기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 장군 내외”의 사진이 전 지면 가득 컬러로 나와 있고, “전두환 장군 역사의 부름으로 민족 앞에 서다”라는 큰 활자가 보이고, 그 밑에는 놀랍게도 김요섭의 축시 ‘참사람 새 사람’이 나와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이란 자가 무슨 짓을 못 하랴. 이런 짓을 해서 벼슬자리에라도 오르고 싶어 하는 자가 아동문학을 하고 있는 나라. 그 나라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해 본다.
이오덕 일기3 - 불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12쪽(1986.3. 5.)
나는 "웬만큼 말이 되어 있으면 반박할 만한데, 그럴 가치조차 없어요. 언젠가 다른 문제를 다룰 때 이런 엉터리 문인들, 관제 문학 동조자들이 날뛰는 문단 현상을 잠시 언급해야겠지만, 이런 것만 가지고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은 너무 차원이 낮은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즘 문공부에서 우리들을 악선전하기 위해 매스컴을 동원해서 하는 짓이란 것을 정신 제대로 가진 사람은 다 아는 터라 반박할 필요도 없고 반박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했다.
15쪽(1986.3. 5.)
소설문학사에서 오는 5월 호에 '아동문학 베스트10'을 선정한다면서 설문지를 보내왔다. 우표를 동봉하였기에 할 수 없이 보낸 자료 가운데서 국내, 외국 각 세 권씩 선정해서 보냈지만, 그 자료란 것을 보니 아주 잘못되었다. 외국 것은 171권인데, 그중에 같은 책을 여기저기 세 곳에나 적은 것도 있다. 국내 것은 315권인데, 아주 시시한 작가의 것이 여러 권씩 나열되어 있는가 하면 권정생의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 여러 명저가 다 빠져 있고 겨우 <하느님의 눈물> 한 권이 들어 있다. 이건 어떤 편견을 가진 사람이 고의로 한 짓이란 느낌도 들었다.
52~53쪽(1986. 8. 25)
임 선생(임재경)이 노인의 말을 듣더니 “영감님, 아주 이곳 마포 토박이군요.”하면서 마포 토박이 사투리 말씨를 흉내 내어 보였다. 서울에도 옛날에는 마포 사투리, 왕십리 사투리, 또 어디 사투리 이렇게 몇 갈래 사투리가 있었다고 했다. (...) 임재경 선생은 또 왕십리 사람들은 그 들판에 채소를 심어서 팔았는데, 서울 시내에서 가져간 인분을 밭에 뿌려 채소를 가꾸었기 때문에 파리가 그 논밭에 들끓어 그만 왕십리 하면 똥파리란 이름이 따라붙어 다녔다고 했다.
310쪽(1991.5. 5.)
김지하라는 사람은 이제 그 본질이 드러났다. 이 사람은 본래 노동을 하면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어도 그렇다. 이상한 신비주의와 영웅 심리 같은 것이 뒤섞인 성장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한때 그처럼 영웅이 된 것은 재주 때문이다. 그가 쓴 시는 삶의 바탕이 없고, 그저 막연한 영웅적 울분과 감정의 배설뿐이다. 그의 산문은 관념과 추상의 신기루다. 그런 심리들 속에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자신이 괴로워(그렇게 살아갈 도리가 없기에) 이제 고백이니 참회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노동자와 농민과 학생들을 그처럼 악의에 넘친 말로 욕할 것은 뭔가? 역사 속에 매장되어야 할 사람이다.
이오덕 일기4-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
벌레 소리
8월 19일 날씨 : 맑음.
오늘도 해는 지고
밤이 와서
이제는 잠시라도 나를 찾아야 할 시간
불을 끄고
혼자 앉으면
열어젖힌 창밖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
오늘도 하루를 정신없이 보냈구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내가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오늘 밤 저 벌레 소리.....
아, 풀 속에서 노래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형제들에게 마음 한 가닥 보낼 길이 없구나.
나는 형제들에게 서툰 노래 한 마디 보낼 재간이 없구나.
너희들은 저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데!
13쪽(1992. 1. 27.)
(현대고등학교 학생 수련회에 가서) 내가 한 얘기는 "행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상태고 공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는데도 학생들이고 선생들이 그다지 공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웬일일까? 이런 이야기는 지난날 다른 데 가서 얘기해도 모두(어른이고 아이고) 그랬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서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깨달은 것이 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삶의 태도를 그렇게 개인 중심으로 바로 세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데서 찾아내고 세워 가도록 해야겠다고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혼자서는 못 산다. 반드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살아가는 문제를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남의 문제도 함께 해결하도록, 곧 사회 전체 문제를 풀어가는 데서 자기 문제도 풀도록 해야 되겠고,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너무 깊이 사회체제 문제를 얘기할 것까지 없고, 적어도 자유라든가, 평화라든가, 반독재라든가, 평등이라든가 하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바람직한 사회를 생각해 두고, 그런 사회를 이뤄 가는 데 나 한사람이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 이런 말을 해 주었더라면 좀 더 내 생각에 공감했을 것 아닌가 반성이 되었다.
249쪽(1996. 5. 7.)
그래서 그만 아주 열이 올라서 처음부터 “우리나라 어른들이 모두 아이들 잡아 족치려고 머리가 돌았어요. 어째서 그렇게 일찍부터 책만 읽히고, 글쓰기만 시키려 합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면 그 지긋지긋한 책을 다시는 안 읽고, 글도 안 씁니다. 아이들 제발 좀 밖에서 뛰놀게 해 주세요. 그래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지능도 발달되고 창조력도 뻗어납니다. 방 안에 갇혀 책만 읽고 글만 쓰면 모두 바보가 되고 병신이 됩니다. ”하고 야단을 치듯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326~327쪽(1997. 10. 13)
이광수 <달마쥐>도 좋았는데,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걸 가지고 얼마 전에도 논란이 있었다는데, 작품이 아깝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배가 좋지 못한 농부가 지은 곡식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고약하지만 그가 지어 놓은 곡식은 이 땅의 흙과 물과 바람과 해와 모든 정기를 받아 맺은 열매니 우리는 고맙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 작가가 쓴 작품도 그렇게 볼 수 없을까? 이광수란 사람은 몹쓸 사람이지만 그가 지어놓은 작품 가운데 어쩌다가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전통과 정서와 삶을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만 그 작자를 비판하는 것만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하면서, 그가 남기 작품 가운데 몇몇 작품은 우리 민족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 아동문학이 너무 빈약한 탓에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