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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ㅣ 범우 한국 문예 신서 79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3~1994를 읽다.
나온지 오래 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다. 장정일의 지금의 모습에선 조금 옅어져서 찾을 수 없는 부분이, 이 책에서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판의 날을 세우며 까칠하게 말을 하는 악동 장정일.
장정일은 그의 책읽기 5권에서 복거일 그 이름 만큼이나 괴상망측(?) 사람은 본 일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이 책에서부터 이미 장정일은 복거일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본다.
그리고 대학 1~2학년 때 과제 때문에 읽었던 당시 신간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하재봉의 <블루스 하우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발견. 흥미 때문에 열올려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요일의 여자들>. 신경숙의 몇몇 작품들을 그의 이 책에서 발견하니... 옛날 레포트 제출용 노트를 다시 펼쳐보는 듯 콤콤한 회상에도 잠겨 본다.
그러나 이 책에서 곧 여지없이 그 책에 대한 혹평 발견.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몇 해 전 어떤 허풍선이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참칭하며, 그 슬픔을 가장한 바 있으나, 그것은 유치원생의 작문처럼 유치찬란한 것이었다. 그런 우스개가 모모한 문학상을 받고 나오는 난장 같은 한국 문단.
하재봉의 <블루스 하우스>
이 소설에 나오는 ‘황금의 삼각형’ 이미지는 무라카미류의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 나오는 ‘검은새’의 이미지에 비하면 너무 왜소하고하고 설득력이 없다. 하재봉이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선전되는 것은 우스개스러운 일이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일급의 평론가가 나쁜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전례를 보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형식적인 전략이 전혀 배려되지 않은 엉터리 페미니즘 소설. 노회한 김수현이 도리어 ‘언니’라고 불러야 할 만큼 닳고 닳은 상투. ,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요일의 여자들>
하루키의 단편은 그가 쓴 장편의 낙수에 불과하다. 이 단편집의 번역자인 서계인은 그의 또 다른 하루키 번역에서와 같이 서양인의 인명을 옳게 표기하는 일에는 젬병이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
너무 많은 헛것으로 나를 짜증나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짜증을 독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까닭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득세하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감상주의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 감상은 '사랑없는 사랑'의 무절제에 대한 반작용이다. (...) 그러나 감상주의로의 도피보다는 '살 없는 사회'에 대한 직시가 더 진실해 보인다. 그리고 어긋난 사랑의 비가와 순애보의 역사는 이광수에게서 혹은 더 멀리 샬롯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철없는 복고주의자들에게 나는 그것을 되풀이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의 날을 누그러뜨린 것만 같은 김형경의 작품 경향에 대한 장정일의 말.
김형경의 문학적 관심과 기술은 정적주의적인 것이고 심리주의적인 것이다. 그녀는 낚시를 즐기는 한 주인공을 통해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그 하염없음 속에 몸을 담그고 모든 정신을 이완시키는 것. 그렇게 이완된 정신의 어느 한 곳을 뚫고 오래 풀리지 않던 문제가 명징한 깨달음처럼 스스럼 없이 풀리는 상태를 동경한다.
이 책을 통해서 좀 솔깃했던 책들은 다음과 같다.
래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공선옥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사강의 <어떤 미소>
장 그르니에의 <까뮈를 추억하며>
폴 존슨의 <지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