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은 한번 잡으면 제 자식도 몰라보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번 잡으면 그 자리에서 끝을 봐야겠단 생각이 들 만큼 몰입도가 엄청난데, 상황은 별로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달라붙은 아이들을 매몰차게 떼어내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
항상 무언가 교훈을 남기려는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주제의식이 투철한 편이다.
이번에는 칼날이 방황을 한댄다. 정의의 칼날 경찰과 사법부는 범인들을 쫒는 과정에서 부조리함을 느낀다. 범인 가이지를 찾아내는 일은 곧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복수할 기회를 빼앗게 되는 것이고, 경찰이 나서서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원한을 불완전한 상태로 봉인시키는 일이 되기에.
그래서 이 형사들은 스스로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런 문제에 대해 토론할 필요도 없다고 스스로 다그치고 있다. 형사인 이상.
미성년자가 저지르는 악랄한 범죄에 대한 것. 20세 미만의 나이가 갱생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법은 그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이 법에는 피해자의 입장이 철저히 배재되어 있다.
128쪽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복수가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또 하나의 짐승을 방치해 둘 수 없다. 그것은 에마에 대한 배신이다. 그녀를 괴롭힌 짐승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 법원은 범죄자에게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그 인간쓰레기들이 빼앗은 것은 에마의 인생만이 아니다. 그들은 에마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217쪽
다키아키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체스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처음에는 모든 말을 다 가지고 있지. 그대로 있으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지만 게임인 이상 그런 건 허용되지 않아. 어떻게든 움직여서, 자기의 진지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그리고 많이 움직일수록 상대 말을 쓰러뜨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자기도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 그런 면이 사람의 인생과 똑같지 않니? 또 상대의 말을 빼앗았다고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없지."